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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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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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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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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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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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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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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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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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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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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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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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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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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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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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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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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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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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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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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0】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 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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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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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0】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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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9】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 우연히 알게 된 문유석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전직 부장판사라는 경력도 관심을 끌고 그가 쓴 책이 꼴통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사람이 안정적인 밥 벌이 하느라고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퇴직하고 법조인들이 가는 로펌이나 변호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돈 벌려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법이란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라고 말한다.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와는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법, 재미없는 법 그러나 결국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p. 41)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 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p. 42). 물론 국민에게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복지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아름다운 약속들은 써놓았으되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를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국가가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목표(p. 66)는 여러 가지다. 어느 나라든 국방 예산이 최우선 순위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아직 사치라는 논리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세상이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아직도 인간 세상은 대부분 국가 안보, 경제 발전, 민족의 융성, 선진국 진입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권리인 사회적 기본권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라고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가치다. 그게 '존엄'의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당연한 천부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헌법은 세상에서 완성된다(p. 67).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p. 100)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같은 말도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왠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을 강조하셨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가짐까지 포함한다. 인격 수양을 위한 자세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p. 101)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 해보자. 홀로 있을 때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최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 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p. 102),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000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p. 103).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p. 104)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진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 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p. 105)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p. 106) 관계없이 톡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만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였(p. 107)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 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p. 108)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 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p. 109). 전통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범죄의 중함을 그 결과의 외형적 크기, 즉 사망, 전치 몇 주의 상해인지, 손해액이 얼마인지 등으로만 비교하려는 경향을 띤다.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법감정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로 보곤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근친상간, 아동 성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등 터부와 연결되고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유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들이다)을 파괴하는 범죄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본능적 분노를 야기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폭력인 법이 이를 충분히 응보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법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져 사회 존속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p. 158)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은 온갖 인지적 편향과, 이성 이상으로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면 법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p. 159). 성폭력은 자유에 대한 죄 사람들은 왜 성폭력에 대해 유독 분노할까. 성폭력은 단순히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이나 상해와 다르다. 모든 폭력은 사람의 정신에도 충격을 가하지만, 성폭력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오랜 정신적 상흔을 남기기에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어땠을까. 형법상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 아래 강제 추행죄,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함께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12월 29일자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다. 대체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p. 160) 첫번째 뜻으로 '정절'과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정절'을 다시 찾아보면 '여자의 곧은 절개'다. 두번째 뜻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니는 일'이란다.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하면, '기혼 여성의 남편과만 섹스해야 할 의무'와 '미혼 여성의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의무'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도 아닌, 서태지 박진영 신해철이 톱스타로 활약하던 <응답하라 1994> 시절 이야기다. 물론, 설마하니 이 당시까지 법학자나 판사 들이 강간죄를 '정절'과 '순결'을 침해하는 죄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973 년에 발간된 서울법대 유기천 교수의 『형법학』 (개정9판) 교과서를 보면 강간죄는 '인간의 애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다(애정의 자유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지지만). 내가 공부하던 1980년대 후반의 형법 교과서에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가 보호법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1995년 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형법전의 항목 제목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정조에 관한 죄'란 일본의 구형법, 즉 일제강점기 형법의 잔재인 것 같다. 간통죄를 포함한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죄 등과 함께 묶어서 건전한 사회 풍속을 해하는 범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 법익에 관한 죄'로 규정했었는데, 광복 후 1953년 우리 형법이(p. 161) 제정되면서 강간죄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항목 쪽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이다. 당시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인식의 발전이었겠지만, 사회적 인식까지 크게 변화했었는지 의문이다. 그 유명한 보호가치 있는 정조라는 말이 판결문에 등장했을 정도니까. 1955년 7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재판부는 현역 장교를 사칭하며 '댄스홀' 등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바로 파기되었지만, 당시의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회 인식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을 돌이 켜봐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성범죄 사건을 재판할 때마다 변호인들이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법 교과서에 강간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에 관한 죄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부 변호사님들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여성, 나이트클럽에 자주 가는 여성, 과거에 바든 카페든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여성은 그런 자유가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오히려 사회 인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은 지(p. 162)금까지도 적지 않다. 성범죄 피고인의 부모가 낸 탄원서를 보면 피해자가 학교나 회사 내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로 유명한 여자였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남자들과 섹스한 적이 있는 여자는 아무 남자의 섹스 제의에도 당연히 자유롭게 응했을 거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어지곤 했다. 젊은 세대는 당연히 강간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간죄를 폭력범죄, 상해죄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친 곳도 없지 않느냐 후유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좀 무섭게 말은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다'••••• 몸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 즉 '몸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라고 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한다. 강간이란 '누구와 섹스할지, 언제 섹스할지, 어디서 섹스할지, 어떻게 섹스할지, 왜 섹스할지 각자 알아서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죄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의 권리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든, 클럽에서 매일 밤 원나이트를 하는 여성이든, 5분 전에 당신과 섹스를 마친 여성이든,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당신을 보며(p. 163) 계속 웃음을 보인 여성이든,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섹스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이중 어떤 경우에도 발생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모두를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즉 상당히 무거운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억지로 성행위를 한 경우에만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법은 섹스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모든 자유로운 주체 간의 행위들처럼, 자유무역처럼, 동업처럼, 부동산 매매처럼, 코스프레 동호회 사진 촬영회처럼, 합창단 공연처럼, 길거리농구처럼, 자유롭게 그걸 원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상 법은 시민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입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래 말로는 싫다고 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냐고? 말로 싫다면 싫은 거다. 인간은 원래 말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나요. 그래도 자신 없으면 간단하다. 애매한 사이에서는 안 하면 되는 거다. 눈만 맞으면 서로 알아서 이불 까는, 상호 합의 과정이 이미 충분히 이행된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으로 모든(p. 164) 애매한 신호를 자기 성기 측에 유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떻게 초면에 그렇게 과감한지. 남성들에게 불공정한 점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법익으로 하면서도 강간죄의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했었던 과거의 형법 조문이 그랬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여성들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남성들의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므로 침해당할 우려도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했다. 무려 2012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 대신 '사람'으로 개정되어 남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했다. 남성들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폭력으로 박탈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p. 165).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능력이다"라고 썼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 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p. 221)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p. 222) 인간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해 노동시간은 계속 감소했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서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 해서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단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p. 223)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극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p. 224). 에필로그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헌법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개념이나 제도보다도 '사고방식'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를 만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사고방식, 판결문을 작성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다시 말하면 '법학적 사고방식'이자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p. 248)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 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 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 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 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p. 249)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 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수호지」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호결이 악질적인 부잣(p. 250)집을 습격하여 일가족을 죽이는데, 갓난아기를 발견하고는 그 아기마저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아기이지만 언젠가는 커서 복수심에 불타는 화근이 될 것이라 면서. 조선 시대에 누구 하나를 역적으로 몰면 삼족을 멸한 것 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은 특정 단계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제자, 친구, 이웃, 은혜를 입은 자, 가혹함에 분노했던 자들에 의해 언젠가는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역사에서 진짜 '청산'이라고 할 만한 일은 로마가 카르타고에 행한 복수 정도다.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등 카르타고는 여러 번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이 숙적을 철저히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부녀자와 노인은 아프리카 오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의 흔적조차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등 모든 건 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다. 아예 한 나라를 역사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 정도를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끝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공존하려면 일정 정도에서 그치고 타협할 수밖(p. 251)에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윤: 음..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그럼 언제 놀아? 선 :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p. 252)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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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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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9】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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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7】 당회와 문제해결
- 당회와 문제해결 교회 안에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당회는 교회에서의 섬기는 리더십 팀입니다. 목사는 당회 운영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당회는 성도들을 보살핌과 동시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당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회에서 문제가 생겨 해결 못 하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리더는 당회 운영을 잘해야 합니다. 당회는 토론하는 기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다가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됩니다.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목사의 목회 정책에 기도하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회 안건을 내놓을 때 합리적이고 무리하지 않은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안건을 올렸다가 서로 논쟁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담임목사는 당회 서기와 당회 안건을 사전에 조율해서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모르는 안건을 당회 서기 마음대로 안건에 올리지 못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담임목사와 당회 서기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시 당회원끼리 소통하기 위해 그룹 카톡을 만들었으면 당회 안건이나 공지 사항 외에 사사로운 개인의 글이나 정치 이야기나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소한 것 작은 것 때문에 일어나기에 매사에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 관계에서 교회 문제가 생기면 살피고 의논하여 문제해결의 지혜를 모아 당회원이 하나 되어 한목소리를 내고 초기에 담대히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늦추고 우유부단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 하면 문제해결을 못 하고 적은 문제를 큰 문제로 만들게 됩니다. 당회에서 의논된 내용들, 예를 들면 재정 보고나 인사 문제 등 예민한 것, 서류 내용은 당회 후 집에서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고 나누어 준 서류들을 다시 거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타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회원은 목사의 목회 협력자로서 기도하고 순종하고 협력해야 함을 교육해야 합니다. 당회원을 사랑하고 격려해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회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당회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당회 회원은 문제 해결하는 섬김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나 어디서나 문제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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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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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7】 당회와 문제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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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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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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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 구굴은 무례(無禮)란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의가 왜 필요한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빨가벗고 살든,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놓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한 것이 있다. 나중에 좌석에 앉는 사람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자리가 비면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중간쯤에 앉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를 밀고 들어온다. 양쪽 사람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불편한다. 그런데 나처럼 가운데 자리에 앉을 때 양 편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리가 비면 산모를 위한 여성 좌석 옆에 앉는다. 이 자리에 산모가 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한쪽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좁은 지하철 좌석인데 겨울이라 모두 두꺼운 옷을 입어 더 비좁은데 제발 가운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앉지 마시기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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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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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 취재 가서 보리굴비를 먹게 되었다. 보리굴비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30년을 함께 산 내 반려자. 이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보리굴비 먹은 것을 말하고 보리굴비를 주문해 먹으라고 했다. 이때 아내 왈 “이제 보리굴비 별로 안 좋아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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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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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교만. 하나님도, 사람도 싫어한다!
- 교만(驕慢)에 대해 구굴 A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만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한다. 심리학과 철학에서 다루는 교만의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자기중심성: 타인의 권리나 감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우월함을 우선시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뽐내며 건방짐'으로 정의한다. 7대 죄악: 기독교 전통에서는 교만을 7대 죄악 중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첫 번째 죄악으로 꼽는다. 심리적 기제: 때로는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 기제로 나타나기도 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세상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을 볼 때 불편하다. “뭐가 그리 잘났는가?”하는 생각을 한다. 별것도 아닌 것인데도 교만을 떤다. 그런데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교만한 자를 그냥 내버려두자. 하나님께서 손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 떠는 것들로 인해 기분은 상하지만 냅두자. 언젠가 댓가를 치룰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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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교만. 하나님도, 사람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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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7】 자신의 약함이 남에게 위로가 된다
- 이 에세이의 저자는 궁상맞은 자신의 삶의 여러 단면을 노출하고 있다. 이런 류의 에세이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낯설기도 하면서 재밌기도했고, 저자의 또 다른 책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의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삶의 단편들이 때로 이처럼 누군가에는 힘과 용기가 된다. 혀는 좀처럼 낫지 않았고 수면의 질은 최악이었다. 감정 조절도 안 됐다. 외출했다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워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동네 한의원에 갔다. 양방이 모르는 병이라면 한방에라도 의지해봐야 했다. 나이 지긋한 한의사는 혀는 쓰리고 잠도 못 자고 어깨도 아프다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물었다(p. 25) "많이 힘든가보네.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놀랍게도 그 말에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남들 앞에서 잘 울지 않는다. 슬픈 영화를 봐도 웬만하면 이를 악물고 참는다. 그런 내가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나는 그에게 고백했다. "다 힘들어요. 일도 힘들고 아이들 키우는 것도 힘들어요. 뭐든 잘해야 하니까 더 힘들어요." 그제야 알았다. 나는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힘들었던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를 쓰고 살아온 것이다. 유치원과 학교에 다닐 때는 단체 생활에 적응하느라,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느라, 20대가 되어서는 혼자 서울에서 살아남느라, 30대에는 아이들을 키우고 먹여 살리느라 너무 기를 쓰고 살았다. 심지어 나는 그 모든 일을 다 잘해내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자랄 수 없을 것이고, 남편은 내가 없으면 티셔츠를 거꾸로 입거나 바지 지퍼를 채우지 않고 나갈 것이고, 회사는 내가 없으면 망할 것이라고 믿었다(p. 26). 친구는 내가 없으면 외로워 죽을 것이고, 부모님은 내가 없으면 슬퍼서 못 살 것이고, 출판사는 내가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대충 그렇게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나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사고의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정말로 사고가 날 것 같은 불안과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잘해야 했다. 기를 쓰고 잘해야 했다. 걱정마저도 잘해야 했다. 40여 년 동안 그렇게 기를 쓰고 산 결과,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p. 27). 수능 시험 날 늦잠을 잔 아이에게는 과연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늘 뉴스를 보며 혀만 찼을 뿐, 그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p. 88). 늦잠을 잔 아이들, 길을 잃은 아이들, 고사장을 착각한 아이들, 그래서 경찰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한 아이들, 닫힌 시험장 문을 붙잡고 울던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그 일이 과연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문득 궁금하다. 수능 시험 날 늦잠을 자지 않은, 수능 시험을 꽤 잘 본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그런 것과 인생은 별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늦잠 자서 수능 시험을 못 본 이영지 씨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잘된 일이다. 수능 시험 날 지각해서 시험을 못 본 내 아이, 공부 못 하는 내 아이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찌 알겠는가? 그 애가 겪을 모든 성공과 실패, 모멸감과 절망감과 기쁨과 자랑스러움 같은 것들은 내가 대신 겪어줄 수 없다. 놀이터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서 화나고 부끄럽고 슬픈 얼굴로 달려와 울던 그 작은 아이는 이제 없고, 나도 그 아이의 뒤를 영원히 서성 일 수만은 없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자. 아이는 나의 걱정이나 불안과는, 나의 예측이나 소망과는 별 관계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실패와 좌절, 상처와(p. 89) 눈물, 불행과 불운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내 자식들에게도 분명 그런 것들은 닥칠 테지만 그게 너무 아프지는 않기를 바란다. 아니 그러한 아픔마저도 끝내 힘으로 바꿔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막막하고 서글픈 어느 밤, 제 부모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 애들의 마음에 약간의 따뜻함이 깃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그렇게 든든한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또 너무나 어려운 바람이다(p. 90). 나는 춤추는 것만큼이나 위로에도 서툴다. 그러나 이제 내게도 우울증에 걸린 당사자로서의 경험이 생겼다. 할 말이 생긴 거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게 없었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내게 필요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주는 거였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는 못해도 언제든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가끔 내가 이야기하고 싶어할 때 그저 들어주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라고 할 때 "정말 힘들겠다"고 대꾸해 주는 정도면 족했다. 걷고 싶다고 하면 한밤중이라도 같(p. 166)이 걸어주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좋은 곳에 함께 가 주면 족했다. 내게는 집과 일터에서 매일같이 붙어 있는 남편과 친구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은 힘들 때마다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어디든 함께해주었다. 인내심이 강하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을 더 잘하는 친구의 존재 역시 큰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엄마는 한 건 했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하자 엄마는 "어머, 나도 그랬어. 그 나이 때는 원래 다 그러고 사는 거야"로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대서사시를 읊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지는 전혀 물어보지 않고 자기 얘기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엄마 앞에서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엄마는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채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엄마. 엄마를 어쩌면 좋지? 그러니 우리 엄마와는 완전히 반대로 하시라.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조심스럽게 물어봐주는 것도 괜찮겠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우울증에 걸린 여자에게 남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건 어떤 기분이야?" 여자가 설명 하자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거 참 힘들겠다." 그는 또(p. 167)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저 창 너머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라고 말해주었다. 이 정도면 친구의 우울증에 대처하는 모범 답안이라 할 만하다. 그 밖에도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가 뜬금없이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었을 때도 눈물이 울컥 날 정도로 고마웠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 친구야말로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던 모습도 많이 보아온 사람이기에 그 응원의 말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동네 한의원 선생님에게 힘들다고 토로했을 때 그가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라고 차근차근 물어봐준 것도 좋았다.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의 이야기는 더 큰 도움이 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은 책 『보이는 어둠』에서 자신처럼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친구와 밤마다 통화하며 서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p. 168)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 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거의 언제나 구출된다." 결과적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기꺼이 함께하려는 태도가 가장 큰 도움이 된다. 특별한 걸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곁에 있어주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잘 치료받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기. 그거면 충분하다(p. 169).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망한 것이다. 망한 게 맞다. 아들을 명문대에 입학시킬 때 내 시부모님이 꿈꿨을 미래와는 너무나 먼 길로 왔다. 그 귀한 외동아들이 직장도 없이 전세 6천5백만 원짜리 다 허물어져가는 단독주택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살 때 시부모님은 얼마나 가슴을 쳤을 까? (시어머니는 가슴이 아파서 우리 집에는 못 오겠다고 했고, 우리(p. 241) 엄마는 비가 많이 올 때마다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물었다. "너희 집 안 떠내려갔니?”) 나는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었으나 집안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다니던 회사마다 때려치우던 남편은 결국 영세자영업자가 되었고, 아이들은 공부를 못한다. 심지어 나는 불안장애와 우울증까지 걸렸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 걸로 치자면 우리는 망한 게 맞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망함을 이미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쿨하게 인정하자. 나는 망했다. 망한 인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서 공과금도 내고 국민연금도 건강보험료도 밀리지 않고 내고 있다. 하루 세끼 맛있는 밥도 먹고 커피도 맥주도 사 마신다. 웃기도 자주 웃고 친구도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어디 아픈 데도 없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빚도 없고 저축도 꾸준히 하고 있다. 어 뭐지? 나 분명히 망했는데...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게 된 것도 망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는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우리 애들이 나쁜 애들도 아니고 쓸모없는 애들도 아니(p. 242)다. 공부를 못해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우리 애들은 인간으로서 유한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며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무한한 잠재력' 같은 말은 쓰지 말자. 인간의 잠재력은 아무리 봐도 유한하다), 마음씨가 착하고, 최소한의 예의와 매너를 지킬 줄 안다. 무엇보다 이 아이들은 마음이 건강하다. 찌들어본 적이 없어서 건강하다. 어린 시절을 자유롭게 뛰놀며 보냈기 때문에 건강하다. 공부를 잘하는 데 있어서는 망했으나 인생이 망한 것은 아니다. 하긴, 인생에 망하고 홍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성공과 실패가 어디 있는가. 그냥 사는 거지. 그냥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의 정의는 다르게 쓰여야 한다. 나는 얼마 전에야 그 말의 뜻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 놓인 징검다리들이다. 그걸 밟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거다. 성공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성공한 뒤에 바로 죽어버릴 게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실패도 성공도 그저 과정에 지나지(p. 243) 않는다.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지나치는 깃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생은 그냥 가는 길일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니 실패하고 망하자. 실패하고 망하는 거, 해보니까 별거 아니네! 실패하고 망해도 계속 살아지네! 하고 통쾌하게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진정 용기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그래 보자. 용기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달성하는 거니까. 그래서 닌텐도 게임 속 슈퍼 마리오가 하나씩 따는 동전은 사실은 용기인지도 모른다. 주머니 가득 두둑하게 용기를 채워가면서 용암을 건너 괴물을 물리치고 끝내 공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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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7】 자신의 약함이 남에게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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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6】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특징
-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특징 (로마서 12:11)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기도 제목이 "하나님, 나를 사용해 주세요."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열정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부지런과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열심은 열정이고 미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열정의 영입니다. 열정이 넘치는 베드로 예수님께 미친, 그리고 전도에 미친 바울을 하나님께서 사용했습니다. 미지근한 자 사용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명감에 불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적당히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쓰임 받고 게으르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언제나 부지런해야 합니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시킨 후 용서해 주시고 사용하십니다. 죄짓고 회개하지 않은 자는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한 어거스틴, 베드로, 바울을 귀하게 사용했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십니다. 모세의 40년 광야와 40년 학문 연구는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지적, 영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공부하고 훈련받는 것, 경험과 연단 받는 것도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준비된 바울을 하나님은 귀히 사용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준비입니다.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거짓되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성경은 진실합니다. 성령은 정직의 영이십니다. 정직해야 신뢰 얻게 됩니다. 마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긍정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자였습니다. 긍정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언어의 힘이 큽니다. 말대로 되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자를 사용하십니다. 부정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은 성실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무엇을 하든지 신실하고 성실해야 인정받고 신뢰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들은 성실한 자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성령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인데 하나님은 믿음 가진 자를 사용하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욕심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포기는 희생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물과 어부의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을 사용했습니다. 모세도 세상 것 포기했을 때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은혜받은 자가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보다 강하고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받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 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한번 사는 인생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최고의 복이고 버림받는 것이 최고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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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6】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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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밀도 있는 삶
- 최근 어느 책을 보니 자신은 50대인데 300년은 산 것 같은 밀도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했다. 순간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이 왔다. 그렇다! 길이가 아니라 밀도이다. 같은 한 시간도 누구는 1분 같이 낭비하고, 누구는 1년 같은 결과물을 만든다. 이제 60살. 물리적인 시간은 많지 않다. 이제는 더 밀도있게 살아야한다. 허투로 낭비하지 말고, 더 보람있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내 삶은 몇배, 몇십배의 밀도를 만들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이 적으니 이제는 양이 아니라 질로 살아야 한다. 더욱 밀도 있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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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밀도 있는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