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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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책은 베트남전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휘말린 17세 두 청춘남녀 끼엔과 프엉의 인생이 얼마나 잔혹하게 망가지는지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종 북한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고통을 당하고 싶은가?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한국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전쟁은 영화가 아니다. 내게 전쟁은 인생에서 접한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전쟁은 내게 결코 바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날이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끈질긴 고통 중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나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던 이들이 본래는 서로를 존중하고 애정을 나누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존재들이건만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베트남, 한국, 미국의 수 십만 젊은이들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흐르는 핏물로 강물을 만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에 그 광기 어린 살육 행위의 원인은 서로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없고 공감이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젊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속아서 서로를 적개시하고 살육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1992년이 되어서 베트남과 한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그 이후로 두 나라의 협력 관계는 나날이 강력하고 견고하게 발전했습니다(p. 6. 작가의 머릿말). 그랬다. 그는 끔찍하게 변했지만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얼굴은 못생겼고 말수가 적었다. 그리고 눈빛이 야만적이었다. 말린 가죽처럼 쭈글쭈글한 피부는 건조하고 햇볕에 그을렸으며 땀구멍이 컸고 총상을 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입은 꽉 다물고 있었다. 뺨에는 광대뼈 가까이 총알이 스쳐 지나간 상처로 골이 패어 있었다. 우리는 어느 날 전장 길에서 만났다. 어깨에는 기관총을 메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붉은 먼지와 진흙 속을 함께 걸었다. 맨땅을 걸었다. 베트남 미국 전쟁에서 나는 그와 같았고, 평범한 병사들과 같았다. 같은 운명으로 수많은 우여곡절, 승리와 패배, 행복과 고통, 잃은 것과 남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들 개개인은 전쟁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되었다. 개개인이 마음속에서 개별적인 전쟁을 시작한 날부터 공통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싸움을 따로 하게 되었다. 사람 에 대해, 전쟁 시절에 대해 가슴 깊은 곳의 인식이 지극히 달랐으며, 당연히 전후의 운명이 제각각 달랐다. 우리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전쟁에 쫓고 쫓기는 심각한 과정 속에서, 서로 완전히 같아 보이는 환경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슬픔, 전쟁의 거대한 슬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행복보다 고귀한, 고상한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슬픔덕에 우리는 전쟁을 벗어 날 수 있었고, 만성적인 살육의 광경, 무기를 손에 쥔 괴로운 광경, 캄캄한 머릿속, 폭력과 폭행의 정신적 후유증에 매몰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고 죄악이 가득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길이다. 왜냐하면 평화로운 시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것이 작가가 작품에서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나에 비해서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전쟁의 슬픔이 더욱 심각했다. 슬픔은 오늘의 삶을 위해 조금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세월은 계속 뒷걸음질만 쳤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희망 없는 정신세계가 만들어 낸 비상식적이고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가 영원히 과거를 향해 돌아가는 길은 사뭇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영혼은 지난날에 대한 망각 없이, 영원히 봄날 같은 감정 속에 살아갈 것이다(p. 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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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9
  • 【북토크】 교육 현장에서 분투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나는 한 번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남교회 교인들의 생생한 간증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서문에서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라고 했다. 이들 중 총 18명의 교인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속해 있다.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 교수,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어떻게 교직에 발을 들였는지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과정까지 참으로 감동적으로 써나갔다. 이틀에 걸쳐 열심히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책의 살아있는 신앙 간증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신앙으로 교직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다. 그들은 새로남교회의 오정호 담임목사를 통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세워져 어려워도 교직을 잘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오 목사는 남다른 교육철학으로(오정호 목사는 총신대학 기독교교육과 출신이다) 새로남기독학교 초, 중, 고 과정을 운영하며 믿음의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우송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오덕성 장로는 담임목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4년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오정호 목사님께서 대전 새로남교회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서대문교회 출신이었고 아내는 내수동교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 목사님이 부임하신 새로남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좋은 교회, 그리고 귀한 목회자와 만남의 축복이 이루어졌다. 제자 •사역훈련 1기로 신앙생활을 재정비하고 기초부터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정도 목회의 철학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나고 이후 제자 • 사역훈련을 받고, 건축 위원장으로서 헌신하고 이단과 투쟁하는 현장에서 기도하며 목사님과 함께 훈련받은 대로 실천하였다. 장로로서 교회, 사회에서 선한 청지기 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삶의 기초를 단단히 세우는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p. 234). 읽기에 부담 없기에 모든 분의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묵묵히 교직을 감당하는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 교육자를 응원한다! 다음은 오정호 목사가 쓴 이 책의 서문이다. 교육자,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 제가 섬기는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 지난 2022년 『과학자, 하나님을 만나다』, 2023년 『공직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시리즈로 출간한 이후에 세 번째 후속편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기획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습니다.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초석이고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 백 년이 걸리며 그 백 년은 앞으로의 백 년을 결정합니다. 다음 세대는 교육자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참교육자를 통해 이뤄집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한계에 굴하지 않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이 책의 필진은 교육계에서 인정받는 분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신앙의 고백대로 정도를 걷고자 몸부림치는 열여덟 분의 글을 읽다 보면 하나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교육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책 안에는 그들이 만난 하나님의 생생한 이야기로 즐비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남기독학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설립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오로지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열정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교육은 열정만으로는 안 되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이라고 하는, 이른바 정신적 자본과 물적인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기에 학교를 세워 가는 일이 가능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학교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와 대학에서 쓰임 받는 교육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고 계십니다. 성경 교사 바울이 존재했기에 디모데라는 탁월한 목회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헬렌 켈러(Helcon Adim Kdllor)를 가르쳤던 앤 설리번(Anne Sullivan Macy)의 스승은 로라(Laura)였습니다. 로라에게 받은 교육과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아이가 헬렌 켈러였습니다. 제2의 디모데와 앤 설리번을 만드는 것이 교육자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아침에 씨를 뿌려서 저녁에 거두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 현장을 내실화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이를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자와 학교가 심사숙고하여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때 교육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삶의 모본을 가슴으로 보일 수 있는 교육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사조와 비진리적인 가치와의 충돌,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는 교육, 악법의 제정 시도의 현관에 있는 우리의 미래 세대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미래 교육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현실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교육자 지망생, 크리스천 교육자분들이 하나님의 손이 교육 현장을 이끌고 계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의 여러 어려움에서 지혜와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출생이라는 인구절벽의 위기 가운데 기도하는 교육자 한 사람을 통하여 반전과 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앞장서서 수고해 주신 오용준님, 박태호님, 서광남님, 채은영님, 이태규님, 정창호님, 이석님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전체 시리즈의 기획과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귀한 열매로 만들어 주신 두란노서원에 감사드립니다. 교육자로서 고뇌와 기도로 진솔한 원고를 내어주신 집필진 모든 분들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늘 동행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새로남기독학교 이사장 관련기사링크: 새로남교회새로남교회,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 출간 감사예배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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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3
  • 【북토크】 나를 두 번 울린 책
    얼마 전 내가 속한 파이디온선교회 단톡에 김혜한 선배가 본인이 쓴 책을 소개했다(나는 총신 85학번이고, 김혜한 선배는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82학번으로 보인다.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본 적은 없다). 최근 총신대학 총동창회 총회를 취재하러 갔는데 박성규 총장이 선물 받은 책 30권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우연히 이 책을 받고 읽게 되었다. 사모로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 책을 읽다가 두 번 울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말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남이 보면 참 우스웠을 것이다. 중늙은이가 책을 보다 울고 있으니 말이다. 눈물이 난 대목은 다음과 같다. ①부르심을 점검하다 "사모님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까? 하나님 이 나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이 맞다면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 장로님이 떠올랐다. 사모축제도 끝나고 인사를 한번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평소 연락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았겠지만, 이날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장로님! 오늘 갑자기 장로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보기 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만나서 장로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김혜한 선교사를 왜 만나야 하나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살림하다 아껴둔 비상금을 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장로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물질을 지원한 적이 없기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이어서 여쭙기를 "우수리는 뗄까요?"라고 물으셨다고 하신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우수리도 떼지 말고 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다 들고 왔다고 마음을 나눠 주셨다(pp. 56-47). ②아버지 마음 지금도 그때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려 한다. 남편의 신장 이식을 위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간 후원하던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환난이 오고 재정의 어려움이 오니 작은 물질도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럼에도 양심상 사역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동기인 금신이에게 연락할 차례가 되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기독 동기 모임을 매달 가졌던 금신이는 동기 모임에서 매달 정한 금액을 전하는 회계 역할을 맡아 왔다. "금신아, 남편이 신장 이식을 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어, 지금까지 후원해 줘서 고마워." 해야 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전화선 저쪽에서 금신이의 대답이 들려왔고,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끊었는지, 뭐라 말하고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184-185). 왜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울었던가? 내 마음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말로 나는 목회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회에서 사임 처리했다. 그리고 12월에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갔다. 그동안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경력을 쌓아 담임으로 나갔는데 40살에 시작해 55살에 목회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사임키로 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 나이에는 다른 교회로 부임하기 쉽지 않다. “사임한” 혹은 “사임당한” 목사라는 꼬리표가 있는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이후 딱 한 군데 동네에 있는 교회에 지원을 해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얼떨결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임 후 아내는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았다. 군목 시절에 만난 아내는 이후 부목사, 담임 때 많지는 않아도 사례비로 생활했다. 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임 후 나는 비정규직 인생이 됐다. 친구들은 마을버스 운전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언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는 않는다. 총신대학에 500만 원 후원도 했다. 총신대 종합관 도너월에 보면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5년 차 기자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취재하러 가서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달 평타는 치면서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 하늘을 보며 울었던 기억도 있다. 교회 봉사를 할 때는 정규직으로 매달 생활비가 나왔으나 이제는 자영업자로 돌아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다. 그래도 그동안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살았던 것은 특혜였다. 이제 비로소 돈벌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선배의 이야기를 보면서 5년간 겪었던 “서러움”이 떠올라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집돌이” 인생이 이제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다. 지금, 이 글도 전남 영암 행사를 취재하고 올라가는 KTX에서 쓴다. 아침 6시 21분에 KTX 타고 내려와 이제 올라간다. 40세에 담임으로 나가 정년 70의 30년 절반을 목회하고 남은 기간은 기자로 살아갈 것 같다. 이 길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감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한 물질을 채우고 계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 굶지 않게 하신다. 내가 지금도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인생이다. 오늘도 사모들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 “사서 고생하시는” 선배의 인생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어진 항아리 같은 선배의 인생에 물을 넘치게 부으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깨어진 항아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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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1
  • 【북토크】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가?
    글쓰기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요즘 이 저자에 꽂혀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글쓰기를 삶의 형태라고 할 때, 글을 쓰는 이유(자기 표현)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글은 몸의 형식(form)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재현의 양식이 다를 뿐이다. 다만, 글쓰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모차르트처럼 네 살부터 작곡을 하고, 강-약을 조절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있는 존재다. 수많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유년 시절 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살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낱말을 익힐 수는 있다).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이 생각으로 조직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요건은 적어도 10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들이 극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역시 1970년대 훈육 세대에서나 가능하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쥔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글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삼십 세를 이립(而立),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생각이고, 현대 철학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다. 나는 서른 살에 어렴풋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았 다. 나의 위치(position)를 깨달았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특정한 사유나 사람 등 의미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를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는 운에 달렸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다. 나의 계급과 젠더, 건강과 나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개인적 캐릭터.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당시 나는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약자라고 생각했다. 한마 디로, 나는 '돈 없는+ 여자'였다. 나는 약자로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 방법이 성차별 사회에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를 보호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답'은 금 방 나왔다. 글쓰기였다. 물론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의 영향, 제도 교육의 세례, 당시 이삼십 대의 몸, 그리고 기호 식품과 여행, 미팅, 소비 생활 등이 전무한 초간단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남들에 비해 무한히 많은 시간 같은 자원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글쓰기라는 직업 훈련'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용이 덜 든다. 한때 외국 유학 준비를 위해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나는 평생 사교육비를 쓴 적이 없다. 나는 걸어서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찾고 읽을 수 있었 다. 메모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메일로 전송했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글쓰기와 관 런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는 두 가지다. 사회적 편견(무지), 난센스. 어처구니없는 이들과 싸워야 할 때, 그리고 간혹 독자나 출판 관계자로부터 내 글이 내가 가장 비판하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노동 의욕이 사라진다.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말은 당연히 논쟁적이다. 나부터 의심스럽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선악과 시비, 승부는 누가 정하는가. 선악은 규범적이지만, 강약은 맥락적인 개념이다. 갑을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세상은 갑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갑을에 속하지 않은, ‘병정무기경신임계’도 있다. 이는 본디 순서(위계)가 아니라 순환이다. 고정된 약자나 강자는 없다. 관계 속에서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를 찾아야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작 영화의 제목 ‘그린 북(Green Book)’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주유소, 식당 등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은 ‘흑인 전용 여행 가 이드북’을 가리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장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백인’, 비고 모텐슨 분)와 돈 셜리 박사(‘흑인’, 마허살라 알리 분)가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극중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로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품위(dignity)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 대사가 좋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정의는커녕 의리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품위라니? 나 역시, 토니처럼 '욱' 하는 성격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결국 내 분노는 다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방관자이고 싶지 않은 정의감(?)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린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 설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참고 사는데, 당신은 하루도 못 참냐."고. 그렇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 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pp.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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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3
  • 【북토크】 글 감옥의 마력
    작가들이 책을 쓸 때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글쓰기의 마력때문인 것 같다. 마치 마라토너가 달릴 때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이 있기에 계속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하고, 쓸 소재가 있어야 하고, 잘 써야 한다. 고통 속에서도 좋은 책을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글쓰기와 마감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은 왜일까. 모종의 피학 취미 때문일까. 작가 김초엽은 2020년 〈한겨레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마감이 닥쳐왔을 때 발휘되는 창의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똥줄이 타도록 마감에 쫓겼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문장이 떠 오르며 글이 술술 풀렸다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종종 듣게 된다. 마감은 창작의 촉매요, 뮤즈로 구실하기도 하는 것이다. 2022년 4월 이웃 나라 일본에 문을 연 '원고 집필 카페'는 바로 마감이 강제하는 창의력에 기댄 공간이다. 이 카페는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입장할 때 접수처에 그날 써야 할 원고 양과 마감 시각을 적어내야 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 시간마다 찾아와서 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손님이 사전에 선택한 강도에 따라 마감을 독려하거나 다그치거나 한다. 카페 이용 요금은 시간당 300엔 (최초 삼십 분은 150엔)인데, 사전에 신고한 대로 원고를 끝내지 못하면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카페에서 나갈 수 없다.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 《작가 소설》에 실린 「글 쓰는 기계」라는 단편을 보자. 출판사 편집장이 신진 소설가를 출판사 지하의 수상쩍은 방으로 안내하는데, '글 쓰는 기계'라는 이름이 붙은 그 방에서 작가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오로지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서 작가는 책상을 떠나지 못하도록 수갑이 채워진 채 안락한 의자에 앉혀지며, 글이 진행되지 않으면 작가가 앉은 의자가 조금씩 뒤로 밀려나 결국에는 깜깜한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거꾸로, 글을 부지런히 쓰면 의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쓰지 않으면 죽고, 써야만 살 수 있는 극한의 조건이다. 이런 장치가 현실에 있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그렇지만 비슷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김승옥이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해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중편 〈서울의 달빛0장>은 잡지 《문학사상》을 발행하던 평론가 이어령이 김승옥을 강제로 호텔에 투숙시키고 편집자들이 옆방에 머무르며 감시하며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 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3부작을 완성하느라 두문불출하며 글쓰기에만 일로매진한 이십 년 세월을 '글 감옥'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 분간은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 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작가의 마감〉에 실린 아쿠타가와의 고백이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학질을 떼는 심정으로 마감을 했음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다시 그리워져서는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마감이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지. 아쿠타가와는 비록 '천벌'이 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보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채지 못할쏘냐. 그래서, 그 덕분에, 글쓰기는, 문학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진다는 해피엔딩인 셈인가(pp.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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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북토크】 국어 교육의 문제...血의 淚
    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 최초 근대소설이 ‘血의 淚’라고 배웠다. 풀이하면 ‘피눈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최근 봤다. 약 40여년의 간격이다. 한숨이 나온다. 血의 淚가 나온다. 왜 학교에서는 이 소설에 대해 설명만 하고 직접 읽게 하지는 않았는가? 나름 재밌게 읽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게 된 옥련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소설을 읽게하고, 시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시를 읽게하면 소설이나 시에 대해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지나보니 참 한심한 학교 교육이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글쎄다. 옥련이는 아무리 조선 계집아이이나 학문도 있고 개명한 생각도 있고, 동서양으로 다니면서 문견이 높은지라. 서슴지 아니하고 혼인 언론 대답을 하는데, 구씨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 하기를 청하는 유지한 말이라. 옥련이가 구씨의 권하는 말을 듣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으니,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세상에 제 목적을 제가 자기하는 것같이 즐거운 일은 다시없는지라. 구완서와 옥련이가 나이 어려서 외국에 간 사람들이라. 조선 사람이 이렇게 야만 되고 이렇게 용렬한 줄을 모르고, 구씨든지 옥련이든지 조선에 돌아오는 날은 조선도 유지한 사람이 많이 있어서 학문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찬성하여 구씨도 목적대로 되고 옥련이도 제 목적대로 조선 부인이 일제히 내 교육을 받아서 낱낱이 나와 같은 학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려니 생각하고, 일변으로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제 나라 형편 모르고 외국에 유학한 소년 학생 의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구씨와 옥련이가 그 목적대로 되든지 못 되든지 그것은 후의 일이 거니와, 그 날은 두 사람의 마음에는 혼인 언약의 좋은 마음은 오히려 둘째가 되니, 옥련 낙지 이후에는 이러한 즐거운 마음이 처음이라(pp.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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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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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책은 베트남전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휘말린 17세 두 청춘남녀 끼엔과 프엉의 인생이 얼마나 잔혹하게 망가지는지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종 북한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고통을 당하고 싶은가?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한국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전쟁은 영화가 아니다. 내게 전쟁은 인생에서 접한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전쟁은 내게 결코 바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날이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끈질긴 고통 중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나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던 이들이 본래는 서로를 존중하고 애정을 나누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존재들이건만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베트남, 한국, 미국의 수 십만 젊은이들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흐르는 핏물로 강물을 만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 생각에 그 광기 어린 살육 행위의 원인은 서로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해가 없고 공감이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특히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젊은이들이 정치권력에 속아서 서로를 적개시하고 살육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1992년이 되어서 베트남과 한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그 이후로 두 나라의 협력 관계는 나날이 강력하고 견고하게 발전했습니다(p. 6. 작가의 머릿말). 그랬다. 그는 끔찍하게 변했지만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얼굴은 못생겼고 말수가 적었다. 그리고 눈빛이 야만적이었다. 말린 가죽처럼 쭈글쭈글한 피부는 건조하고 햇볕에 그을렸으며 땀구멍이 컸고 총상을 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입은 꽉 다물고 있었다. 뺨에는 광대뼈 가까이 총알이 스쳐 지나간 상처로 골이 패어 있었다. 우리는 어느 날 전장 길에서 만났다. 어깨에는 기관총을 메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붉은 먼지와 진흙 속을 함께 걸었다. 맨땅을 걸었다. 베트남 미국 전쟁에서 나는 그와 같았고, 평범한 병사들과 같았다. 같은 운명으로 수많은 우여곡절, 승리와 패배, 행복과 고통, 잃은 것과 남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들 개개인은 전쟁에 의해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되었다. 개개인이 마음속에서 개별적인 전쟁을 시작한 날부터 공통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싸움을 따로 하게 되었다. 사람 에 대해, 전쟁 시절에 대해 가슴 깊은 곳의 인식이 지극히 달랐으며, 당연히 전후의 운명이 제각각 달랐다. 우리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전쟁에 쫓고 쫓기는 심각한 과정 속에서, 서로 완전히 같아 보이는 환경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슬픔, 전쟁의 거대한 슬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행복보다 고귀한, 고상한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슬픔덕에 우리는 전쟁을 벗어 날 수 있었고, 만성적인 살육의 광경, 무기를 손에 쥔 괴로운 광경, 캄캄한 머릿속, 폭력과 폭행의 정신적 후유증에 매몰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마도 전혀 행복하지 않고 죄악이 가득할 수 있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길이다. 왜냐하면 평화로운 시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것이 작가가 작품에서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나에 비해서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전쟁의 슬픔이 더욱 심각했다. 슬픔은 오늘의 삶을 위해 조금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세월은 계속 뒷걸음질만 쳤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희망 없는 정신세계가 만들어 낸 비상식적이고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가 영원히 과거를 향해 돌아가는 길은 사뭇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영혼은 지난날에 대한 망각 없이, 영원히 봄날 같은 감정 속에 살아갈 것이다(p. 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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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9
  • 【북토크】 교육 현장에서 분투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나는 한 번도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새로남교회 교인들의 생생한 간증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서문에서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라고 했다. 이들 중 총 18명의 교인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속해 있다. 평교사에서 교감, 교장, 교수,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어떻게 교직에 발을 들였는지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과정까지 참으로 감동적으로 써나갔다. 이틀에 걸쳐 열심히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 책의 살아있는 신앙 간증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신앙으로 교직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다. 그들은 새로남교회의 오정호 담임목사를 통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세워져 어려워도 교직을 잘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오 목사는 남다른 교육철학으로(오정호 목사는 총신대학 기독교교육과 출신이다) 새로남기독학교 초, 중, 고 과정을 운영하며 믿음의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우송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오덕성 장로는 담임목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4년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오정호 목사님께서 대전 새로남교회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서대문교회 출신이었고 아내는 내수동교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 목사님이 부임하신 새로남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좋은 교회, 그리고 귀한 목회자와 만남의 축복이 이루어졌다. 제자 •사역훈련 1기로 신앙생활을 재정비하고 기초부터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정도 목회의 철학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이끄시는 목사님을 만나고 이후 제자 • 사역훈련을 받고, 건축 위원장으로서 헌신하고 이단과 투쟁하는 현장에서 기도하며 목사님과 함께 훈련받은 대로 실천하였다. 장로로서 교회, 사회에서 선한 청지기 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삶의 기초를 단단히 세우는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p. 234). 읽기에 부담 없기에 모든 분의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묵묵히 교직을 감당하는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 교육자를 응원한다! 다음은 오정호 목사가 쓴 이 책의 서문이다. 교육자,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들 제가 섬기는 대전에는 약 600개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안학교, 특수학교가 있고 19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정학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새로남교회에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많이 계십니다. 지난 2022년 『과학자, 하나님을 만나다』, 2023년 『공직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시리즈로 출간한 이후에 세 번째 후속편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를 기획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습니다. 교육은 국가와 사회 발전의 초석이고 백 년 앞을 내다보는 큰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데 백 년이 걸리며 그 백 년은 앞으로의 백 년을 결정합니다. 다음 세대는 교육자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참교육자를 통해 이뤄집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한계에 굴하지 않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이 책의 필진은 교육계에서 인정받는 분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하나님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입니다. 신앙의 고백대로 정도를 걷고자 몸부림치는 열여덟 분의 글을 읽다 보면 하나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교육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책 안에는 그들이 만난 하나님의 생생한 이야기로 즐비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남기독학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설립한 지 올해로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 옆도 뒤도 안 돌아보고 오로지 아이들의 눈망울만 바라보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열정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교육은 열정만으로는 안 되고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이라고 하는, 이른바 정신적 자본과 물적인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으로 인도해 주셨기에 학교를 세워 가는 일이 가능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학교뿐만 아니라 일반학교와 대학에서 쓰임 받는 교육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고 계십니다. 성경 교사 바울이 존재했기에 디모데라는 탁월한 목회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헬렌 켈러(Helcon Adim Kdllor)를 가르쳤던 앤 설리번(Anne Sullivan Macy)의 스승은 로라(Laura)였습니다. 로라에게 받은 교육과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아이가 헬렌 켈러였습니다. 제2의 디모데와 앤 설리번을 만드는 것이 교육자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아침에 씨를 뿌려서 저녁에 거두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 현장을 내실화하는 것에 힘써야 하고 이를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자와 학교가 심사숙고하여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때 교육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삶의 모본을 가슴으로 보일 수 있는 교육자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사조와 비진리적인 가치와의 충돌,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는 교육, 악법의 제정 시도의 현관에 있는 우리의 미래 세대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미래 교육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현실입니다. 저는 기대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교육자 지망생, 크리스천 교육자분들이 하나님의 손이 교육 현장을 이끌고 계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의 여러 어려움에서 지혜와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출생이라는 인구절벽의 위기 가운데 기도하는 교육자 한 사람을 통하여 반전과 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앞장서서 수고해 주신 오용준님, 박태호님, 서광남님, 채은영님, 이태규님, 정창호님, 이석님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전체 시리즈의 기획과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귀한 열매로 만들어 주신 두란노서원에 감사드립니다. 교육자로서 고뇌와 기도로 진솔한 원고를 내어주신 집필진 모든 분들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늘 동행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 오정호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새로남기독학교 이사장 관련기사링크: 새로남교회새로남교회, 『교육자, 하나님을 만나다』 출간 감사예배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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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2-03
  • 【북토크】 나를 두 번 울린 책
    얼마 전 내가 속한 파이디온선교회 단톡에 김혜한 선배가 본인이 쓴 책을 소개했다(나는 총신 85학번이고, 김혜한 선배는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82학번으로 보인다.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본 적은 없다). 최근 총신대학 총동창회 총회를 취재하러 갔는데 박성규 총장이 선물 받은 책 30권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우연히 이 책을 받고 읽게 되었다. 사모로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 책을 읽다가 두 번 울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말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남이 보면 참 우스웠을 것이다. 중늙은이가 책을 보다 울고 있으니 말이다. 눈물이 난 대목은 다음과 같다. ①부르심을 점검하다 "사모님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까? 하나님 이 나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이 맞다면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 장로님이 떠올랐다. 사모축제도 끝나고 인사를 한번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평소 연락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았겠지만, 이날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장로님! 오늘 갑자기 장로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보기 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만나서 장로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김혜한 선교사를 왜 만나야 하나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살림하다 아껴둔 비상금을 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장로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물질을 지원한 적이 없기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이어서 여쭙기를 "우수리는 뗄까요?"라고 물으셨다고 하신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우수리도 떼지 말고 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다 들고 왔다고 마음을 나눠 주셨다(pp. 56-47). ②아버지 마음 지금도 그때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려 한다. 남편의 신장 이식을 위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간 후원하던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환난이 오고 재정의 어려움이 오니 작은 물질도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럼에도 양심상 사역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동기인 금신이에게 연락할 차례가 되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기독 동기 모임을 매달 가졌던 금신이는 동기 모임에서 매달 정한 금액을 전하는 회계 역할을 맡아 왔다. "금신아, 남편이 신장 이식을 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어, 지금까지 후원해 줘서 고마워." 해야 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전화선 저쪽에서 금신이의 대답이 들려왔고,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끊었는지, 뭐라 말하고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184-185). 왜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울었던가? 내 마음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말로 나는 목회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회에서 사임 처리했다. 그리고 12월에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갔다. 그동안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경력을 쌓아 담임으로 나갔는데 40살에 시작해 55살에 목회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사임키로 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 나이에는 다른 교회로 부임하기 쉽지 않다. “사임한” 혹은 “사임당한” 목사라는 꼬리표가 있는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이후 딱 한 군데 동네에 있는 교회에 지원을 해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얼떨결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임 후 아내는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았다. 군목 시절에 만난 아내는 이후 부목사, 담임 때 많지는 않아도 사례비로 생활했다. 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임 후 나는 비정규직 인생이 됐다. 친구들은 마을버스 운전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언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는 않는다. 총신대학에 500만 원 후원도 했다. 총신대 종합관 도너월에 보면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5년 차 기자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취재하러 가서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달 평타는 치면서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 하늘을 보며 울었던 기억도 있다. 교회 봉사를 할 때는 정규직으로 매달 생활비가 나왔으나 이제는 자영업자로 돌아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다. 그래도 그동안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살았던 것은 특혜였다. 이제 비로소 돈벌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선배의 이야기를 보면서 5년간 겪었던 “서러움”이 떠올라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집돌이” 인생이 이제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다. 지금, 이 글도 전남 영암 행사를 취재하고 올라가는 KTX에서 쓴다. 아침 6시 21분에 KTX 타고 내려와 이제 올라간다. 40세에 담임으로 나가 정년 70의 30년 절반을 목회하고 남은 기간은 기자로 살아갈 것 같다. 이 길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감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한 물질을 채우고 계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 굶지 않게 하신다. 내가 지금도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인생이다. 오늘도 사모들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 “사서 고생하시는” 선배의 인생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어진 항아리 같은 선배의 인생에 물을 넘치게 부으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깨어진 항아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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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1
  • 【북토크】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가?
    글쓰기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요즘 이 저자에 꽂혀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글쓰기를 삶의 형태라고 할 때, 글을 쓰는 이유(자기 표현)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글은 몸의 형식(form)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재현의 양식이 다를 뿐이다. 다만, 글쓰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모차르트처럼 네 살부터 작곡을 하고, 강-약을 조절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있는 존재다. 수많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유년 시절 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살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낱말을 익힐 수는 있다).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이 생각으로 조직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요건은 적어도 10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들이 극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역시 1970년대 훈육 세대에서나 가능하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쥔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글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삼십 세를 이립(而立),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생각이고, 현대 철학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다. 나는 서른 살에 어렴풋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았 다. 나의 위치(position)를 깨달았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특정한 사유나 사람 등 의미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를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는 운에 달렸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다. 나의 계급과 젠더, 건강과 나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개인적 캐릭터.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당시 나는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약자라고 생각했다. 한마 디로, 나는 '돈 없는+ 여자'였다. 나는 약자로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 방법이 성차별 사회에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를 보호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답'은 금 방 나왔다. 글쓰기였다. 물론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의 영향, 제도 교육의 세례, 당시 이삼십 대의 몸, 그리고 기호 식품과 여행, 미팅, 소비 생활 등이 전무한 초간단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남들에 비해 무한히 많은 시간 같은 자원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글쓰기라는 직업 훈련'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용이 덜 든다. 한때 외국 유학 준비를 위해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나는 평생 사교육비를 쓴 적이 없다. 나는 걸어서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찾고 읽을 수 있었 다. 메모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메일로 전송했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글쓰기와 관 런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는 두 가지다. 사회적 편견(무지), 난센스. 어처구니없는 이들과 싸워야 할 때, 그리고 간혹 독자나 출판 관계자로부터 내 글이 내가 가장 비판하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노동 의욕이 사라진다.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말은 당연히 논쟁적이다. 나부터 의심스럽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선악과 시비, 승부는 누가 정하는가. 선악은 규범적이지만, 강약은 맥락적인 개념이다. 갑을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세상은 갑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갑을에 속하지 않은, ‘병정무기경신임계’도 있다. 이는 본디 순서(위계)가 아니라 순환이다. 고정된 약자나 강자는 없다. 관계 속에서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를 찾아야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작 영화의 제목 ‘그린 북(Green Book)’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주유소, 식당 등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은 ‘흑인 전용 여행 가 이드북’을 가리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장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백인’, 비고 모텐슨 분)와 돈 셜리 박사(‘흑인’, 마허살라 알리 분)가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극중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로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품위(dignity)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 대사가 좋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정의는커녕 의리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품위라니? 나 역시, 토니처럼 '욱' 하는 성격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결국 내 분노는 다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방관자이고 싶지 않은 정의감(?)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린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 설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참고 사는데, 당신은 하루도 못 참냐."고. 그렇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 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pp.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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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3
  • 【북토크】 글 감옥의 마력
    작가들이 책을 쓸 때 힘들어 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글쓰기의 마력때문인 것 같다. 마치 마라토너가 달릴 때 고통스러우면서도 희열이 있기에 계속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하고, 쓸 소재가 있어야 하고, 잘 써야 한다. 고통 속에서도 좋은 책을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글쓰기와 마감이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작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은 왜일까. 모종의 피학 취미 때문일까. 작가 김초엽은 2020년 〈한겨레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마감이 닥쳐왔을 때 발휘되는 창의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똥줄이 타도록 마감에 쫓겼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문장이 떠 오르며 글이 술술 풀렸다는 작가들의 경험담을 종종 듣게 된다. 마감은 창작의 촉매요, 뮤즈로 구실하기도 하는 것이다. 2022년 4월 이웃 나라 일본에 문을 연 '원고 집필 카페'는 바로 마감이 강제하는 창의력에 기댄 공간이다. 이 카페는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데, 입장할 때 접수처에 그날 써야 할 원고 양과 마감 시각을 적어내야 한다. 글을 쓰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 시간마다 찾아와서 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손님이 사전에 선택한 강도에 따라 마감을 독려하거나 다그치거나 한다. 카페 이용 요금은 시간당 300엔 (최초 삼십 분은 150엔)인데, 사전에 신고한 대로 원고를 끝내지 못하면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카페에서 나갈 수 없다.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집 《작가 소설》에 실린 「글 쓰는 기계」라는 단편을 보자. 출판사 편집장이 신진 소설가를 출판사 지하의 수상쩍은 방으로 안내하는데, '글 쓰는 기계'라는 이름이 붙은 그 방에서 작가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으며 오로지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서 작가는 책상을 떠나지 못하도록 수갑이 채워진 채 안락한 의자에 앉혀지며, 글이 진행되지 않으면 작가가 앉은 의자가 조금씩 뒤로 밀려나 결국에는 깜깜한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거꾸로, 글을 부지런히 쓰면 의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쓰지 않으면 죽고, 써야만 살 수 있는 극한의 조건이다. 이런 장치가 현실에 있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그렇지만 비슷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김승옥이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해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중편 〈서울의 달빛0장>은 잡지 《문학사상》을 발행하던 평론가 이어령이 김승옥을 강제로 호텔에 투숙시키고 편집자들이 옆방에 머무르며 감시하며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아 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 3부작을 완성하느라 두문불출하며 글쓰기에만 일로매진한 이십 년 세월을 '글 감옥'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다 쓰고 나면 언제나 녹초가 된다. 쓰는 일만큼은 이제 당 분간은 거절하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주일쯤 아무것도 안 쓰고 있으면 적적해서 견딜 수 없다. 뭔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또 앞의 순서를 되풀이한다. 이래서는 죽을 때까지 천벌을 받을 성싶다." <작가의 마감〉에 실린 아쿠타가와의 고백이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학질을 떼는 심정으로 마감을 했음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다시 그리워져서는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마감이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 아닐지. 아쿠타가와는 비록 '천벌'이 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보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채지 못할쏘냐. 그래서, 그 덕분에, 글쓰기는, 문학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진다는 해피엔딩인 셈인가(pp.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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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북토크】 국어 교육의 문제...血의 淚
    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 최초 근대소설이 ‘血의 淚’라고 배웠다. 풀이하면 ‘피눈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최근 봤다. 약 40여년의 간격이다. 한숨이 나온다. 血의 淚가 나온다. 왜 학교에서는 이 소설에 대해 설명만 하고 직접 읽게 하지는 않았는가? 나름 재밌게 읽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게 된 옥련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소설을 읽게하고, 시에 대해 가르치지 말고 시를 읽게하면 소설이나 시에 대해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지나보니 참 한심한 학교 교육이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글쎄다. 옥련이는 아무리 조선 계집아이이나 학문도 있고 개명한 생각도 있고, 동서양으로 다니면서 문견이 높은지라. 서슴지 아니하고 혼인 언론 대답을 하는데, 구씨의 소청이 있으니, 그 소청인즉 옥련이가 구씨와 같이 몇 해든지 공부를 더 힘써 하여 학문이 유여한 후에 고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옥련이는 조선 부인 교육을 맡아 하기를 청하는 유지한 말이라. 옥련이가 구씨의 권하는 말을 듣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으니,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세상에 제 목적을 제가 자기하는 것같이 즐거운 일은 다시없는지라. 구완서와 옥련이가 나이 어려서 외국에 간 사람들이라. 조선 사람이 이렇게 야만 되고 이렇게 용렬한 줄을 모르고, 구씨든지 옥련이든지 조선에 돌아오는 날은 조선도 유지한 사람이 많이 있어서 학문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찬성하여 구씨도 목적대로 되고 옥련이도 제 목적대로 조선 부인이 일제히 내 교육을 받아서 낱낱이 나와 같은 학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려니 생각하고, 일변으로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제 나라 형편 모르고 외국에 유학한 소년 학생 의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구씨와 옥련이가 그 목적대로 되든지 못 되든지 그것은 후의 일이 거니와, 그 날은 두 사람의 마음에는 혼인 언약의 좋은 마음은 오히려 둘째가 되니, 옥련 낙지 이후에는 이러한 즐거운 마음이 처음이라(pp.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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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0
  • 【북토크】 표절은 도적질이다
    표절은 자주 언급되는 일이다. 공직자 청문회에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다. 또한 대중가요도 표절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고, 목사들도 설교 표절로 곤혹을 치루거나 혹은 사임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표절은 남의 노력을 훔치는 도적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 표절이 문제인 건 단순히 타인의 지식을 가져다 썼기 때문만이 아니다. 저작권(copyright) 개념에 저항하는 지식 공유 운동인 카피레프트(copyleft)도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어쨌든 간에 '좋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인데 표절이 이 과정을 방해한다. 표절은 인생을 건 총체적 노동을 하지 않아도 쉽게 학위 소지자가 되고, 이들이 지식 생산을 저지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생 공부를 포함해 공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상, 읽기, 여행, 경험과 그 해석, 인간관계, 쓰기... 그중에서도 나는 '쓰기'가 공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중 쓰기가 가장 어렵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 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수학 공부의 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 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진도가 안 나가는 상황이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이다. 이럴 때는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쓰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틀(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애초에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다거나.....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은 연습을 거듭 한다.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 이유다. '훈'은 해석, 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몸에 도장을 ‘새길 만큼’ 익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 인생은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나는 부동산 구입으로 인한 불로소득보다 표절로 인한 불로소득이 더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금도 내고 비난도 받는다. 발품도 팔아야 한다. 표절할 땐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표절 문화는 우주로 떠나고 싶을 만큼의 절망이다. 한국 지식 사회의 절도 문화는 왜 이리 당당할 까.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pp. 13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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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6
  • 【북토크】 윤락녀 생활 20년의 진솔한 이야기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윤락녀로 20년을 살았던 한 여성의 진솔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어떤 책을 보다 추천 받아 읽게 되었는데 한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고 짓밟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20년 만에 그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일상을 살아가니 다행이다. 한때 이혼남과 결혼해 평범한 가정생활을 살기 원했으나 그도 잠깐만에 폭력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그녀의 피난처가 되어준 곳이 바로 교회였기에 감사했다. 교회나마 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여자의 성(性)을 돈으로 팔고 사는 죄 많은 세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아이들도 맞아서 울고 나도 맞아서 울었다. 그 날 이후 그 남자의 폭력은 더욱더 심해졌다. 하루는 결국 나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댔다. 내 비명소리를 들은 큰아이가 그 남자를 말렸고,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는 필사적으로 집 밖으로 도망쳤다. 갈 곳도 없는 나는 울면서 거리를 배회하다가 교회로 향했다. 사모님은 깜짝 놀라면서 교회에 딸려 있는 작은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방에 보일러를 켜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이불을 덮어쓰고도 내 몸은 심하게 떨렸다. 그 남자가 나를 찾아낼까 봐 겁에 질려 눈에서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방이 따뜻해지고 어느덧 잠든 나는 밤새 앓았다. 꿈조차 꾸지 않는 어둠이 차라리 위안이었다. 내일이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돌아갈 곳 없는 내 처지가 슬펐다. 다시 그 남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몸은 괜찮냐고 묻는 사모님의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사모님은 그 남자의 전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단한 시집살이와 그 남자의 폭력으로 이혼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자가 여러 여자들과 동거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오후에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큰아이에게 밥은 먹었냐고 하니 고개를 저으며 할머니가 엄마 욕을 너무 많이 해서 집에 들어가기도 싫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미안했다. 이제야 겨우 나에게 정을 주고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줘서 마음이 아팠다. 사모님의 배려로 아이들과 식사를 같이 했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모님은 나에 제 몸을 추스를 때까지 교회에서 지내라고 했다.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모님이 친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다시는 그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몸이 회복되며 마음도 편안해졌다. 팔순 노모가 교회로 나를 찾아와서 "여자가 함부로 집을 나가고, 어디서 배운 짓이냐?" 하고 화를 냈다. 그러면서 생선 가게가 너무 바쁘니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맞아서 몸이 상한 나에게 가게가 바쁘다고 말하는 팔순 노모가 미웠다. 그 남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몸과 마음이 다친 나는 더이상 가정부로, 하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단호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팔순 노모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다 교회 사모님이 시킨 짓이라고 악담을 퍼부으면서 돌아갔다. 며칠 후 술에 취한 그 남자가 교회에 왔다. 교회 앞마당에서 고함을 지르며 목사님을 불렀다. 교회가 시끄러워져서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죄송했다. 목사님은 그 남자를 조용히 달랬고, 한동안 말이 없던 그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 옥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역겹고 비릿한 생선 냄새를 맡아가며 시장에서 일을 했고,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 내 마음은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그 남자와의 관계도 이제 끝이 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그 남자와 살면서 시달렸던 폭력을 끝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내 과거를 들먹이는 그 남자의 폭력에 힘들었지만 20여 년간 온갖 학대를 받았던 업소로 돌아가지 않으려 그 폭력을 참아냈다.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보탬이 된 시간보다 빛을 갚기 위해 산 시간이 더 길었기에 언제나 미안했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돌아가서도 많은 좌절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한 폭력을 벗어나고 싶었다. 사모님과 함께 그 남자의 집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내가 사용하던 화장품과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주방과 욕실에서도 내가 사용하던 물건을 정리했다. 이 집에서 내가 머물렀던 흔적을 모두 정리하고 싶어서 쓰레기통이 넘치도록 짐을 버렸다. 마을에 오일장이 섰는지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시장 좌판에서 파는 운동복 한 벌과 5000원짜리 신발을 샀다. 그 남자 집에서 가져온 물건은 화장품과 속옷이 전부였기에 입고 다닐 옷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그동안 민폐만 끼치고 간다며 인사를 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었고 내 손에 차비를 쥐어주었다. 사모님은 늘 기도하겠다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다음에 좋은 얼굴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이 메어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한 채 버스 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이 마을의 전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간들이 상처로 남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픔이 되었다. 버스 안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싶은 마음에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pp. 3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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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3
  • 【북토크】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라
    생태학자 최재천 박사에 대한 책을 대출하면서 함께 대출받았는데 동명이인이었다. 책을 고르는데 실패했지만 내용은 성공적이었다. 살면서 도전하는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이 책은 실패에 대한 책이다. 실패를 가지고 책 한권을 썼다는 것도 대단한데 내용이 읽을만했다.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한 번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패를 예배하라, 실패를 장례하라 “인생의 90%는 실패의 연속이며, 실패를 묻어 두면 계속 실패하고, 실패에서 배우면 성공한다.”-하타무라 요타로(도쿄대 명예교수, 실패학 창시자) 세계 실패의 날 10월 13일은 세계 ‘실패의 날(Day of Failure)’이다. 우리도 이 날을 기념하는 이들이 있다. 유래가 있다. 2010년 10월 13일, 핀란드에서다. 핀란드 알토대학의 창업동아리인 ‘알 토이에스(AaltEs)’는 실패의 날 행사를 열었다. 벤처 성공의 경험이 아닌, 실패의 경험을 나누고 소개하고 무엇을 배웠는지를 털어놓는 행사를 개최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핀란드의 로비오 엔터테인먼트가 앵그리버드라는 게임으로 성공하기까지 52개의 게임을 출시했다가 쫄딱 망해 파산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가 공유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창업동아리의 행사였지만 기업들이 참여했다. 다음 해에는 핀란드를 대표했던 요르마 올릴라 노키아 명예회장이 자신의 실패 경험을 공개하기도 했다. 더불어 핀란드 정부가 후원에 나서면서 실패의 날은 세계적인 운동이 됐다. 이미 적었듯 실리콘밸리의 표어는 '일찍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고, 진취적으로 실패하라'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일 수 없다. 당연하게도 실패의 날과 비슷한 행사가 실리콘밸리에서도 열리고 있다. 실패를 공유하는 콘퍼런스 형식인데, '페일콘(FilCon)'이라 부른다. 2009년 시작됐다. 역설적으로 실리콘밸리의 ‘정상회담’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리콘 밸리를 대표하는 창업자들이 참여해 실패의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희극성 무대일까.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는 실패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실패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숨겨야 할 그 무엇도 아니다. 정직한 패배가 부끄러움이 아니듯, 성실한 실패는 결코 음습한 절망일 수 없다. 실패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하게 실패를 드러내 보이고, 그 실패의 원인과 과정을 토론하고 그 경험을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와 세상과 공유할 때 실패의 가능성은 축소되고, 성공의 가능성은 확장된다. 모두가 나서서 실패의 날을 기념해야 한다. 실패 장례식 이번엔 장례식이다. 실패와 이별을 고하는 장례식. 2014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실패 공유 네트워킹 운동 ‘퍽업 나이츠(FuckUp Nignt)’의 일부다. '퍽업'은 '개판'이라는 의미다. 재밌게 표현하자면 '개판 쳐 본 사람들'끼리 모여 경험을 공유하자는 행사다. 우리나라에서도 열리고 있다. 이 중 하나로 실패한 벤처기업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퍼포먼스를 열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후원회사가 주류회사라는 점. 슬로건은 "장례식에 재미를"이다. 종교 행사가 된 사례도 있다. 미국의 닉슨 매킨스라는 소셜 미디어 회사는 매달 ‘실패의 예배’를 개최한다. 고해 성사의 시간도 있다. 하지만, 공개적이다. 예배는 늘 박수와 함성의 찬양으로 끝맺는다. 축하파티도 있다. ‘클래시 오브클랜’, ‘클래시 로얄’등 모바일 게임을 히트시킨 핀란드 게임사 슈퍼셀은 2010년에 시작한 스타트업이다. 2016년 중국 텐센트가 인수했는데, 금액이 무려 10조 원에 달했다. 회사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가 “실패 축하 파티”다. 프로젝트의 실패가 확인되는 순간 샴페인을 터뜨린다. 실패를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 실패를 지원했을 때 더한 벤처 정신이 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글의 CEO였던 에릭 슈밋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회사를 이끌었다. 그의 말이다. "구글은 실패를 축하하는 기업입니다." 실패 박람회도 있다. 2018년, 우리나라 행안부와 중소 벤처기업부가 공동으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1회 행사의 모토는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에요!’ 우리 사회도 실패의 경험이 사회의 자산일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다들 왜 이러는 걸까. 어느 나라건 실패는 감추고 싶은 문화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는 자산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떤 형식을 빌리더라도 실패를 공개하고, 공유하고, 사회적 자산으로 만들 때둘 사회의 한 사회의 성공이 재촉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얀색 콜라, 보라색 케첩 ‘콜라 색’이 있다. 어떤 색인지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색깔이 없는 무색의 콜라가 있다면? 그걸 ‘크리스털 콜라’라고 불렀다. 1992년 펩시가 시장에 내놓았다. 첫해에는 반응이 뜨거웠는데 다음 해에는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럼, 케첩의 색깔은 무슨 색이어야 할까. 2000년 하인즈는 보라색 케첩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열광했지만, 나중에 징그럽다며 시장에서 쫓겨났다. 어디로 갔을까. 실패박물관으로 모여들었다. 미국 미시간주에는 실패박물관이 있다. 처음에는 실패 박물관이 아니었다. 신제품 작업소였다. 로버트 맥메스라는 이가 1960년대 말부터 신제품들만을 모으기 시작했다. 애써 모았더니 신제품의 80%가 실패한 제품이 되더라는 것. 7만 점 이상을 수장하게 되자 마케팅 전문가들이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MBA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1990년 실패박물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실패학의 성지가 됐다. 2017년 6월, 스웨덴 헬싱보리에도 실패박물관이 개관됐다. 대표적인 전시품 중 하나가 오토바이 제조사 할리 데이비슨이 1996년 출시한 향수인'핫 로드'다.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은 그들만의 액세서리를 선호한다. 향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라이더들의 옷깃에 바람이 스쳐 가듯 향수는 실패했다. 박물관은 최고의 유산만 보존된 곳이 아니다. 아니, 실패 또한 인류 최고의 유산일 수 있다. 실패박물관은 인간의 본질인 실패의 역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곳이다. 인간의 특성인 호기심을 수장하는 곳이다. 인간의 모험과 시도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자랑하는 곳이다. 모든 박물 관이 그러하듯 실패를 기억하는 곳이다. 실패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곳이다. 간접 체험하는 곳이다. 실패의 경험을 컨설팅하고, 반면교사 삼는 곳이다. 실패가 인류의 자산이요, 지식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곳이다. 우리도 이제 실패박물관을 건립할 때가 됐다. 이를테 면, 2021년 궤도 안착에 실패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1995년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서 있었던 애니콜 화형식에서의 휴대전화 등등을 전시한다면 박물관으로서의 가치는 넘쳐날 것이다. 실패를 포상한다 미국의 신용정보회사인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Dun and Bradstreet)에는 '실패의 벽'이 있다. 안내문 내용이다. “1.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2.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쓰세요. 3.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실패에 대한 자기 고백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는 장이다. 실패를 배우는 방식은 이렇듯 다양하다. 단순한 고백을 넘어 아예 실패를 포상하는 기업들이 있다. 가장 큰 실패, 가장 훌륭한 실패에 상을 준다. 대표적인 회사가 일본 혼다 자동차가 시행 중인 '올해의 실패 왕’이다. 한 해 동안 가장 크게 실패한 연구원에게 수여한다. 상금은 우리 돈으로 약 1,000만 원 정도. 혼다의 창업자 소이치로 혼다가 말했다. "성공이란 당신의 일에서 그저 1%의 비율로 존재할 뿐이고, 나머지 99%는 실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가 아닌 그 99%에서 가치를 찾아 내려는 것이다. 미국 3M은 2003년부터 '퍼스트 펭귄 어워드'라는 포상 제도를 실시해 오고 있다. 다른 펭귄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맨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이 있다. 그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 부른다. 선구자 또는 도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관용어다. 그런데 수상자는 선구자도, 도전자도, 성공자도 아니다. 실패자다. 프로젝트에서 실패한 사람만이 수상 자격을 갖는다. 대신 이들은 자신의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유를 발표해야 한다. 이미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가 한 말이 있다. "탁월한 실패에는 상을 주고, 평범한 성공에는 벌을 주어라" 왜 그랬을까. 실패를 공포와 손잡게 해서는 안 된다. 실패는 버려서는 안 될 기업의 자산이다. 실패를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하고, 고무하고, 찬양하는 데서 모험은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실패를 어떻게든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세계적 흐름이다. 성공과 실패에 겸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질문을 던져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혼자서는 해결이 안 되어서다.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지점이다. 첫째, 성공과 실패의 상대성이다. 어느 게 성공이고, 어느 게 실패일까, 성공과 실패라는 판정은 늘 공정하고 정확할까. 둘째, 성공과 실패의 시간성이다.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시장에서 외면받아 실패라고 낙인찍히는 발명품들이 있다. 세상의 무지 때문에 실패한 이론들도 있다. 지동설 같은 경우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성공과 실패의 순환 혹은 부조화다. 한편에서는 실패였지만, 엉뚱하게도 다른 한편에서는 성공으로 평가되는 경우다. 숨겨진 효능이 발견되는 의약품의 경우가 그렇다.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건이 있다. 독일의 상품명을 따서 일명 ‘콘테르간(contergan) 스캔들’이라고도 한다. 현대 의학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다. 1957년 산모들 입덧 방지제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입덧 방지제로서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성공이 성공이 아니었다. 약을 복용한 산모에게서 사지 기형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끔찍한 실패였다. 판매가 금지되기 전까지 5년 동안, 전 세계에서 1만 2000여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하지만, 미국은 예외였다. 미국 FDA에는 켈시상이 있다. 1960년 탈리도마이드 약효를 끝까지 의심하고, 실패 여부를 끝까지 확인하면서 승인을 거부했던 프랜시스 켈시 박사를 기리기 위한 상이다. FDA는 미국에서의 판매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온전히 켈시 박사의 공로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만큼은 이 약의 실패 사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성공과 실패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의학자들은 먼 훗날 탈리도마이드에서 다른 효능을 찾아낸다. 1998년 미국 FDA는 탈리도마이드를 한센병 합병증 치료제로 승인한다. 2006에는 다발성 골수 종양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사용을 승인하기도 했다. 하나의 약품이 어느 때는 성공이고 어느 때는 실패로, 또 어느 기관, 어느 학자, 어느 질병에 따라서는 성공으로, 실패로 인정되거나 평가받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pp. 11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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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10-03
  • 【북토크】 이상과 현실의 괴리
    재밌게 읽었다. 여러 철학자들, 사상가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살거나 자기 뜻을 펼쳤는지를 돌아보는 책이다. 맹자가 오래 전 권력자 앞에서 폐위 운운했다는 것은 목숨을 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대로 그의 목을 치지 않은 권력자도 나름 위대하다. 자기 생각, 뜻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과거보다 현재가 더 나아졌는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다 학식과 덕망으로 유명해진 맹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가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할 때였다. 그의 뒤로는 수레 수십 대가 넘는 긴 행렬과 제자 수백 명이 따랐다. 그 모습은 멀리에서 보기에도 그야말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호탕하게 열국을 향해 진군했다.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를 가졌던 그는 왕들에게 이상 정치(왕도 정치)를 시행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만난 것은 53세 때였다. 혜왕은 자기 나라가 점차 약화되는 것을 염려하여 사방에서 현인들을 초빙했다. 이에 맹자가 찾아가니 혜왕은 매우 기뻐하며 나라에 도움이 될 방법을 물었다. 맹자는 "만일 왕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들도 반드시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득만을 다툰다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이어서 그는 "신하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여 임금을 섬기고, 자식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멸망하지 않은 경우는 여태껏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이른바 모든 일에 개인의 공명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하루는 맹자가 왕에게 물었다. "형리가 자기가 맡고 있는 감옥 내의 질서를 바로잡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형리를 파면시켜야 한다." "나라 전체가 문란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왕은 다른 이야기로 말꼬리를 흐렸다. 맹자에 따르면, 군주의 의무를 게을리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이나 불평을 듣는 자는 마땅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또 왕이 자리에 연연하여 독재를 하거나 백성들을 억압하려 든다면 살해되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임금과 신하의 의리 혹은 명분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둘 사이에는 벌써 군신간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pp. 8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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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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