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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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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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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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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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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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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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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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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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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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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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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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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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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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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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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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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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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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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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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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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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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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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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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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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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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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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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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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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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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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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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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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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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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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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내가 사는 세상을 바르게 판단해 보고 싶다
-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히는 책이었다. 흥미롭게 읽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귀하다. 눈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한 개발도상국, 제3세계에 속했다. 선진국은 꿈같은 단어였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교실 뒤편이나 복도에는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 같은 구호가 요란했다. 그 말들에서 선진국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런데 살아서 그 선진국 국민이 됐다. 지금 한국은 부자 나라가 모였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경제력 중상위권에 드는 나라다. 세계적인 대기업도 여럿 있고, 세계인이 열광하는 대중문화도 풍요롭다.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자국 여권을 든 한국인이 세계로 나가는 동안, 여러 나라 사람들이 꿈(p. 4)과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온다.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이 있다. OECD 회원국이 되던 1995년에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8.3%였다. 100명 중 여덟 명쯤이 중위 소득의 절반을 못 버는 빈곤층이었다. 2020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5.3%, 100명 중 열다섯 명 정도가 빈곤층이다. 선진국이 됐는데 빈곤층 비율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orld Inequality Database에 따르면, 1995년 한국에서는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31.8%를 차지했다. 2021년에는 그 비율이 46.5%로 늘었다. 소득 상위 1%가 차지하는 몫은 7. 2%에서 14.7%로 두 배 이상 늘었다. 그만큼 중하층 몫이 줄었다. 현재의 노동에 비해 과거로부터 쌓여온 자산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피케티 지수는 1995년 5.8배에서 2021년 8.8배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서구 여러 나라는 지수가 대개 5~6배 전후를 오가는데도, 20세기 초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며 논란이 뜨겁다. 20세기 중반에는 2~3배 사이였다. 불평등이 심각해져서 비상이 걸린 중국이 2021년 기준 7.3배다. 한국의 피케티 지수는 아찔하다. 불평등이 심하다 보니 부자 나라가 됐는데도 사는 게 팍팍하다. 자살률은 줄곧 OECD 1위를 지키고 있고, 산재사망률도 최고 수준이다. 어려운 이웃에게도 모질다. 난민 보호율은, 세계 평균이 40%쯤 되는데 한국은 5% 정도다. 재난을 피해 찾아온 이들 대부분을 쫓아낸다. 코로나 19를 거치며 권위주의 성향도 강화됐다. 인권보호보다는 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졌다(p. 5). 어느 쪽이 진짜 한국의 모습일까? 둘 다 맞다. 한국은 불평등이 심한 선진국이 됐다. 어느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동안의 성취를 부정해서도 안 되고, 그 성취가 동반한 불의에 눈감아서도 안 된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동안의 성취를 바탕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뜻과 힘을 모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그럴 여력이 있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주체는 시민, 보통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다. 실제로는 '보통사람'은 선거 때 홍보 문구에만 등장하고, 엘리트가 정치를 주도한다. 정치인, 관료, 기업가, 언론인 등 힘센 사람들이 여론과 정책을 주무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폐해다. 이 폐해가 심해지면 썩은 세상 모조리 뒤집어엎자는 포퓰리즘의 분노 와 음모론이 창궐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은 기득권을 욕하지만 실제 공격하는 대상은 여성, 비정규직, 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다. 그들이 고통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을들끼리의 싸움이 격화 된다. 오늘날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좋은 정치를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 책은 지금 우리 정치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통, 현안들을 스물일곱 개의 키워드를 통해서 접근한다. 문제의 실상을 파악하 고,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며, 가능한 한 해법을 타진하고 향후 전망을 시도해 보았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다양하지만, 그 기초에는 모두 불평등을 확대하는 이윤 논리, 약육강식의 욕망이 (p. 6)있다. 연대와 협력을 통해 넘어서는 수밖에 없다. 두 개의 키워드를 통해 책 내용을 조금 엿보자. 첫째, 최저임금. 최저임금 결정 시즌이 되면 해마다 난리가 난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처지가 어려운데 최저임금을 올리려 한다며 보수언론•경제지 등에서 대서특필한다. 한국의 최저임금 수준이 OECD 중위권이라서 결코 낮지 않다며 근거도 댄다.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OECD 회원국 중 고소득 여덟 개 나라에는 최저임금제도가 아예 없다. 왜 없을까? 노동조합의 힘이 강하고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으니 그렇다. 이 여덟 개 나라를 빼고 난 다음 순위에서 중위권이니, 사실은 중위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노조도 약하고 복지도 빈약한 한국에서 최저임금은 서민의 삶을 지탱하는 보루다. 둘째, 사회적 가치. 이익이라는 경제적 가치만 절대시하는 경 쟁 자본주의 대신 협력과 연대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 활동을 사회적 경제라고 부른다. 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을 제어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협동조합 설립의 자유를 막아온 사회적 경제의 후진국이다. 2012년부터 비로소 설립이 자유화됐다. 미약한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2014년에 당시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등 142명의 여야 국회의원이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발의 했다. 사회적가치기본법도 발의됐다. 재계와 경제지, 보수언론 등이 반시장적 사회주의 법안이라며 대대적인 이념공세를 퍼부(p. 7)었다.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부문에 고용된 유급 노동자는 2016년 기준 0.82%에 불과하다. 한 줌도 못 된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유럽연합은 2015년 기준 전체 유급 노동자의 6.3%가 사회적 경제에서 일한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경제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사회적 경제의 비중이 높다. 보수가 곧잘 자유의 나라로 숭상하는 미국은 어떨까? 유럽과 기준이 달라서 사회적 경제가 아니라 비영리 부문이라고 부르는데, 2019년 기준 미국 전체 사적 영역 노동력의 10.2%를 비영리 부문이 고용하고 있다. 한국 재계와 보수언론의 논법대로라면 유럽과 미국은 빨갱이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 8).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힘센 사람들은 늘 선진국이 될 때 까지만 참으라고 말했다. 아직 형편이 어렵다며 대신 미래의 넉넉한 분배를 약속했다. 선진국이 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지금, 힘센 사람들의 말이 바뀌었다. 더 이상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정글이라서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능력있는 사람이 잘사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 가난과 고통은 스스로의 무능력 탓이라고 한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 탓에 기득권이 이렇게 무도해졌다. 힘센 사람들의 시혜로는 평등한 세상이 오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이 뜻과 힘을 모으는 수밖에 없다. 연대와 협력의 길이다. 역사는 연대와 협력이 성장에도 이로웠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장이 아니더라도 연대와 협력은 소중한 가치다(p. 9).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는 예외가 아니다 2020년 10월 12일, 한진택배 소속 택배 노동자 김동휘 씨(36세)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평소 지병이 없었기에 과로사가 의심됐지만, 사측은 고인의 평소 배달량이 하루 200개 정도로 평균보다 적은 편이었다며 과로사 가능성을 반박했다. 하지만 숨지기 4일 전 고인이 회사 선임자에게 남긴 문자 메시지가 발견되면서 과로사 가능성이 짙어졌다. 문자 메시지를 보면 고인은 당일 420개의 배달 물품을 배정 받았고, 오후 9시까지도 280개가 남아 있었다. 결국 새벽 4시 28분까지도 다 배달하지 못하고 귀가하면서 너무 힘들다며(p. 18) 메시지를 남겼다. 분류 작업을 위해 6시까지 다시 출근해야 하니 사실상 밤샘 격무를 한 것이다. 같은 날 쿠팡의 장덕준 씨(27세)가 사망했고, 그 보다 며칠 전인 8일에는 CJ대한통운의 김원종 씨(48)가 사망했다. 모두 별 다른 지병 없이 건강한 이들이었다. 코로나19 탓에 택배 수요가 폭발하면서 2020년 한 해 동안에만 16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했다. 택배 노동자들은 분류작업만이라도 제외해달라며 작업 거부, 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분류작업이란 택배기사들이 서브 터미널에서 물량을 나눈 뒤 차에 싣는 과정을 가리킨다. 택배 배달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택배 노동자들 입장에서 분류작업은 사실상 '공짜 노동'이나 다름없고, 과로의 주범이다. 2021년 1월, 노사정 합의로 분류업무를 제외하기로 결정했지만 사측은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같은 해 6월에 택배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면서 6월 15일에는 집회도 열었다. 집회는 코로나 19를 이유로 당국에 의해 금지됐다.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30여 명은 감염병예방법 등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결국 파업 뒤에야 2차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후(p. 19)에도 계속 잡음이, 무엇보다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시절 택배 노동자의 처지는 현대의 노동자가 마주 하고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그들이 수행하는 필수노동은 우리가 팬데믹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대신 그들의 목숨이 갈려나갔다. 택배노동자의 상황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보건의료나 청소 같은 필수노동의 영역부터 제조업, 농업, 건설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비정규직, 불완전 노동이 창궐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50%를 넘어선 지 한참이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현저히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신분, 위험한 근로조건을 감수하며 차별받는다. 이들에게는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라는 신분이 오히려 특권으로 보인다. 이토록 열악한 상황은 한국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며,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생소한 단어는 이런 불안정한 노동자의 처지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새롭게 부상했다. 그것은 새로운 모순,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노동자, 프레카리아트 프레카리아트를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기는 어렵다. '불안정한 노동자' 정도로 번역하는 게 그나마 가장 무난할 듯하다. 영어를 기준으로 보면 '불안정하다' '위태롭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p. 20) 프리케어리어스Precarlous에서 앞부분 preca-를 가져오고,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단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lariat에서 뒷 부분 -riat를 가져와서 조합한 단어다. 《뉴욕 타임스》는 십자말 퀴즈에서 프레카리아트를 "직업 안정성이 거의 또는 전혀 없기 때문에 삶이 불안정한 사람들의 계급"으로 풀이했다. 이 단어는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지위 하락을 고발하는 단어다. 임시직, 파트타임, 프리랜서 등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불안정한 직업 안정성 탓에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세 자영업자, 영세 노인, 청소년, 실업자 등 기존의 상식으로는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프레카리아트에 포함하기도 한다.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은 아니며, 여전히 형성 중이면서 논란에 휩싸여 있는 개념이다(p. 21). 상속세가 이중과세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소득을 얻었을 때 이미 소득세를 냈는데 상속시에 또 세금을 내라니 이중과세라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소득세 내고 남은 돈으로 하는 경제 행위에 부과되는 모든 세금이 이중과세가 된다. 물건 살 때마다 내는 제품 가격에는 부가가치세 10%도 포함 돼 있는데 이것도 이중과세다. 자동차를 산다면 부가세, 개별 소비세, 교육세, 취득세도 내야 하니 오중과세라고 할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어거지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국가는 소득세 말고 걷을 수 있는 세금이 거의 없다. 이중과세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재산을 상속받은 274만 명 중에 상속세를 납부한 사람은 불과 1.9%밖에 안 된다. 과표 기준이 높고 각종 공제가 많기 때문에 사실은 한국에서 상속세 내는 사람 안에 드는 것은 쉽지 않다. 웬 만큼 잘 살아도 걱정 안 해도 될 일이고, 만약 걱정이 되는 사람이라면 꽤 큰 부자라는 말이니까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p. 36). 부작용이 정말 감수할 만한 것일까? 2021년 8월에 감사원이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 대응 실태 감사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2018년 기준 지방대 졸업생 열 명 중 네 명(39.5%)이 수도권에 일자리를 얻는 반면 수도권 대학 졸업자는 열 명에 한 명 정도(11.7%)가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수도권 대학 졸업자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청년 세대의 수도권 집중은 어마어마하다. 수도권에 집중된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 과도한 주거비용 등으로 출산율도 낮다. 2020년 기준 합계출산율의 전국 평균이 0.84명인데, 서울은 0.64명이다. 광역자치단체 중 꼴찌다. 2021년 기준으로는(p. 50) 0.81명 대 0.63명이다. 생활이 안정된 공무원조차 서울과 지방의 출산율이 다르다. 세종으로 이전한 공무원의 평균 자녀 수는 1.89명인데 서울에 계속 머문 공무원들의 평균 자녀수는 1.36명이다. 차이가 크다. 지금처럼 젊은 인구가 수도권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고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 계속된다면 한국 자체가 소멸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2022년 9월,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총인구에서 생산가능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71.0%에서 2070년 46.1%로 급감 한다. 당연히 OECD 최저다. 대표적인 초고령 국가로 꼽히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생산가능인구 비중도 같은 기간에 각각 8.1%포인트, 11.7%포인트 감소할 뿐이다. 한국의 24.9% 포인트 감소라는 수치가 유독 두드러진다.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돼가고 있다(p. 51). 한국사회에서 공공임대 주택은 중산층이 아니라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복지'의 영역으로만 간주된다. 적어도 내 집은 아니다. 아니면 젊어서 잠깐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정권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지속된 분양 중심, 소유 중심의 주택정책이 낳은 결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금리 인상으로 2022년 상반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냉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몇 년간 부동산 시장의 급상승, 특히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좌절했다.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잃은 이들이 허탈감에 빠졌다. 이는 한국에서 부동산 정책이 늘 '자가 소유'를 중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분양가, 매매가, 전세가의 동향이 부동산 정책과 이슈를 결정하는 변수가 돼왔다. 공공임대 주택의 양이 충분하고 질도 좋으면서 차별 없이 살 수 있다면 공공임대 주택은 주택시장의 가격 폭등을 막고 주거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공공임대 주택이 전체 주택 재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9년 기준 7.6%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상당수는 분양 전환되는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개인 소유 주택으로 바뀐다. 공공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다. 반면 서구 복지 선진 공공임대 주택(p. 81)국들의 경우 공공임대 주택(사회주택이라고 부른다) 재고가 전체 주택 재고의 20~30%를 넘나든다. 사회주택의 양이 많다 보니 수준도 다양해서 중산층, 심지어 상류층도 사회주택에 사는 경우가 있다.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니라 사는 (living) 것이라고들 한다. 이 말이 현실성을 얻으려면 지금까지의 주택정책으로는 불가능하다. 주택정책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 뀌어야 한다(p. 82). 빌 게이츠나 마크 주커버거 같은 IT 업계 거인들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보기 때문이다. 자동화와 로봇 도입으로 일자리가 줄어들면 그만큼 수요도 줄어든다. 따라서 이들은 로봇세를 도입해서 그걸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주자고 주장한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연봉 5만 달러를 받는다면 그에 따른 세금을 낸다." "로봇이 동일한 일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빌 게이츠의 말이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자리잡게 된 1950~ 1960년대를 돌이켜 보면 직장은 대체로 안정적이었고 실업은 일시적이었다. 실업 때만 실업수당을 받으면 됐다. 지금은 대다수 직장이 불안정해졌고, 실업은 만성적 현상이다. 일시적 실업을 전제로한 복지제도로는 감당이 안 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지금 복지제도 아래서 이뤄지는 소득, 자산 조사의 부작용이다. 받(p. 92)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지급하므로 정확한 조사가 필수다. 행정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완벽한 조사가 불가능해 부정 수급자 문제로 사회적 갈등비용이 늘어난다. 자격 심사를 엄격하게 하면 될 것 같지만, 자격 심사를 강화할수록 다시 행정비용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생긴다. 게다가 수급자는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낙인찍기가 일어나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도 심각한 자괴감에 빠지는 일이 적지 않다. 사례 연구들을 보면 정당한 수급 자격이 있어도 이런 심사과정에서 곧잘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입게 되고, 이 자체가 또 사회문제가 된다. 자격이 있어도 이 낙인이 공포스러워서 아예 신청을 회피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p. 93). 최저임금 제도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고, 복지제도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에서 오히려 의미가 크다. 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앵글로 색슨 중심 국가들에서 최저 임금 제도가 발전한 이유다. 한국과 일본도 여기에 포함된다. 또 미국의 경우 연방제 국가로서 주별로 최저임금이 모두 다르고, 스위스도 전국 단위의 최저임금 제도는 없지만 일부 주에서 최저임금 제도를 실시한다. 최저임금의 산정 범위도 나라별로 조금씩 다르다. 최저임금의 국제 비교가 쉽지 않은 이유다. 특히 나라마다 복지예산의 비중이 다르다는 사실은 최저임금의 효과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라마다 전(p. 108)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복지예산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얻는 전체 소득 중 시장에서 얻는 소득과 복지로 얻는 소득의 비중도 다르게 된다. 복지로 얻는 소득, 즉 사회임금의 비중이 높은 나라는 시장임금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예를 들어 스웨덴, 프랑스 같은 나라는 사회임금이 전체 소득 의 50%에 육박한다. 주거, 의료, 교육, 육아, 노후 대비 등에 지출하는 비용을 개인이 시장에서 직접 임금으로 벌어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낮은 것이다. 반면 한국은 사회임금의 비중이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복지가 허약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즉 시장임금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90% 가까운 소득을 시장에서의 각자도생으로 해결해야 하는 나라다. 그만큼 최저임금의 역할도 큰 나라인 것이다. 자영업자의 타격이 크다거나, 실업률이 올라간다며 최저임금을 올리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이 대신 복지를 그만큼 늘리자고 한다면 진정성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서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 된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은 더 어려워지라고 하는 말과 같다. 옳지 않다(p. 109). 케네스 로고프는 2020년 3월 17일 미국 방송 CNBC에 출연해서, 코로나19 비상사태에 맞서 미국 정부가 수조 달러의 경기 부양책을 쓰고 양적완화를 하면서 빚잔치를 벌이는데, 이래도 되는 거냐는 앵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전쟁입니다. 재정건전성을 쳐다볼 수 없습니다. 경기부양을 해야만 합니다." 건전재정의 주창자 로고프조차 재정지출의 긴(p. 122)박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미국도, 유럽연합도 감염병 위기 동안 재정준칙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타격을 입고 있는 기업과 서민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퍼 부어야 했던 것이다. 반면 세계에서 재정이 가장 건전한 편에 속하는 한국은 이 비상시국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겠다며 재정 준칙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보수언론은 기껏 몇십 만 원 수준의 재난지원금을 줄 때마다 재정이 파탄 난다고 아우성을 질렀다. 서민은 죽어가더라도 정부는 아무 일 하지 말라는 것 일까?(p. 123). 쿠팡이 뉴욕 증시로 간 이유가 차등의결권 때문? 2021년 3월 11일, 로켓배송으로 유명한 온라인 종합쇼핑몰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쿠팡 주식은 공모가인 35달러에서 40.7%가 오른 49.25달러로 마감됐고, 쿠팡의 시가총액은 종가 기준 한화 100조 원을 넘어섰다. 쿠팡의 기존 주주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얻었다. 30억 달러를 투자한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클래스A 주식 기준 37%의 지분을 얻었다. 거기에 더해 대략 일곱 배쯤의 투자수익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이 무렵 국내 경제지, 보수언론들은 쿠팡이 국내 증시가 아(p. 158)니라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이유가 차동의결권 때문이라며 여기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기업이 중시에 주식을 상장하면 외부로부터 자본을 투자받는 대신 창업자의 지분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경영권을 위협받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미국에는 차등의결권 제도라는 것이 있어 자본투자도 받고 경영권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원래 주식회사의 의결권은 1주 1표 원칙을 따른다. 반면 차등의결권은 창업자 등 특수관계인에게 최대 1,000배까지 많은 의결권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복수의결권이라고도 부른다. 쿠팡의 경우 창업자 김범석 회장의 지분은 상 장 직후 10.2%에 그쳤지만, 1주에 29표의 차등의결권을 행사 할 수 있는 클래스B 보통주를 포함하면 76.7%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경영권 행사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다. 국내 경제지와 보수언론들은 차등의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증시를 비판했다. 미국처럼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호 해주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쿠팡이 미국 증시에 상장한 이유가 차등의결권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실 노골적인 선동이라고 봐도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쿠팡은 처음부터 미국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상장 전 쿠팡의 기업 지배구조는 기묘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주)쿠팡의 지분 100%를 미국 델라웨어의 지주회사 쿠팡LCC가 갖고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뉴욕 증시에 상장한 회사는 한국(p. 159)기업 (주)쿠팡이 아니라 본사인 미국 기업 쿠팡LCC 였다. 게다가 쿠팡의 창업자 김범수 회장은 본명 Bom Kim인 미국 국적자이며, 이사 또한 전원 미국 국적자이다. 경영진 전원이 미국인인 미국 기업이 미국 증시에 상장하지 한국 증시에 상장할 이유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더욱이 거액의 투자를 한 손정의 회장 등 외국인 투자자들이 규모도 작은 한국 증시에 상장하자고 그 큰돈을 투자했을 리도 없다. 그러니 차등의결권 여부는 애당초 고려대상이었을 리도 없다. 아마 한국증시 상장은 상상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왜 쿠팡은 한국에서 사업하면서 본사를 미국에 두었을까? 아마도 한국 내의 규제와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실은 이것도 매우 중요한 논점이지만 지금의 주제는 아니다. 경제지, 보수언론들이 이 정도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랬다면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참에 재계에서 줄곧 주장해온 차등의결권 도입을 이슈화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선동이라고 보는 이유다. 그동안 재계는 이른바 오너의 경영권 보장 차원에서 상법을 개정해 차등의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반면 정치권에서는 여론의 비판과 부작용 탓에 도입에 신중한 편이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총선 공약 2호로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창업자에게 10년 기한으로 1주에 10표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을 도입하겠다고 공약하면서 논의의 물꼬가 트였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이런 내용(p. 160)을 담고 있는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2020년 12월에 국회에 제출했다(법안에서는 복수의결권으로 표현). 개정안은 소관 상임위원회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바로 통과했지만, 2022년 11월 현재까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만약 법안이 통과된다면 논의의 지평이 달라질 것이다. 재벌까지 포함한 일반 기업들이 벤처기업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일 것이고, 결국 차등의결권이 전면 허용될 수도 있다. 과연 어떻게 될까? 차등의결권의 실제 차등의결권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경영권 안정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기업이 성장하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투자받는 대가로 창업자나 기존 지배주주의 지분이 줄고 경영 권이 위협받게 된다면, 투자 유치에 소극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구글, 페이스북같은 세계적인 혁신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를 받고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차등의결권을 통해서 경영권을 보장받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런 이유로 미국, 캐나다, 영국,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 차등의결권을 인정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미국도 차등의결권을 인정하는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차등의결권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제도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p. 161)의견을 내세우며 제도화할 것을 주장한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주주가치 자본주의'의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창업자나 지배주주라고 해도 대개 전체 지분 중에서는 일부만 갖게 마련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그 일부 지분으로 기업 전체를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창업자와 지배주주의 이해관계는 더 많은 주주들과 충돌할 때도 있고, 나아가 기업 자체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도 있다. 편법을 동원한 '오너' 경영과 경영권 세습이 지배적인 한국 기업 환경에서는 이런 우려가 매우 현실적이다. 삼성이나 대한항공, 금호 등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 이른바 오너로 인해 벌어지는 오너 리스크는 한국 재벌, 대기업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런데 이들이 차등의결권까지 가지고 아무런 견제 없이 마음대로 기업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p. 162). 사실을 적시해서 비판한다고해서 모두 유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위법성 조각사유', 즉 그 행위의 위법성이 배제되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면 위법이 아니다. 정부나 기업에 대한 언론의 비판 보도는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도 문제다.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실을 적시하여 누군가를 비판할 때 공익 목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치과 임플란트 피해자의 경우도 법원에서 공익 목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경우다. 즉 지금의 법리대로라면 공익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아무리 사실이라도 비판적 표현의 자유 자체가 부정된다.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상황이다. 국제적으로 살펴보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범죄로 처벌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피해를 배상하게 한다. 그래서 유엔 인권이사회나 인권조약기관인 '자유권규약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 여러 국제 인권(p. 208)기구들이 우리 정부에 대해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사회적 약자가 권력을 가진 공인이나 기업 등을 자유롭게 비관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명예훼손죄 자체를 형사범죄로 다루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형사가 아닌 민사소송으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만약 형사상 명예훼손죄가 아예 없으면 허위 사실을 마구 유포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특히 돈 많은 사람은 민사소송 배상금 따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악의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명예훼손죄 자체의 폐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고, 대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서만 그 존폐 여부를 두고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2017년, 헌법재판소에 제기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헌법소원의 결과가 주목을 받았다. 2021년 2월 25일,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규정하고 있는 “형법 제307조는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을 헌재는 합헌 5 대 위헌 4 의견으로 기각했다.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해야 위헌판결이 나는데 두 명이 모자랐다. 명예훼손 비범죄화의 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폐지되고 민사(p. 209)소송을 통해 해결하는 추세임은 분명하다. 이른바 '비범죄화'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가벼운 사안은 결코 아니다. 진실한 사실 또한 얼마든지 개인의 인격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커밍아웃 하지 않은 동성애자 A에 대해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린다면 A의 입장에서는 돈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게 된다. 성폭력 피해를 밝히지 않은 B의 피해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실한 사실이라고 하더라 도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인격적 존엄의 손상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가벼운 사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초래할 수 있는 명백한 피해의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비범죄화가 대세인 이유는 앞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권력에 대한 비판, 고발을 원천봉쇄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p. 210). 리를 듣기 위해 번영신학이 특히 미국에서 발생하고 성장한 데는 유럽과는 다른 미국 역사의 특수성이 있다.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산업혁명과 도시화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고도성 장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존의 정통 개신교단들은 제도적으로 잘 정비된 기성교회로 변신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중산층 중심의 교회로 변화했다.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한 목회자들이 신학적 논리에 기반해서 이성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성적 신앙은 산업화 와중에 가난해진 빈곤층의 마음에는 별로 위로가 못됐다. 빈곤층은 중산층 중심의 교회 질서 안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신앙에 의한 치유나 방언,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 같은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게 됐다. 기존의 중산층 중심, 이성적 논리 중심의 신앙과 달리 뜨거운 가슴과 직접적인 신앙 체험에 호소하는 흐름이 부상한 것이다. 신앙을 가지면 영적 구원은 물론 물질적 부와 건강,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성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물론 개신교의 본고장이기도 한 유럽에서 번영신학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p. 218) 역사적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과 가장 큰 차이는 좌파정당과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컸다는 점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을 거치며 공산당, 사회민주당, 노동당 같은 노동계층 중심의 좌파정당이 부상하며 하층계급의 이해와 정서를 대변하게 됐다. 20세기 후반에는 복지국가가 성장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열정을 반영하고 흡수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은 같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라고 해도 미국에 비해서 종교가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하다. 종교가 세속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미국은 유럽 보다는 차라리 이슬람사회에 가깝다. 두 사회 모두 무신론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번영신학이 크게 성장한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 베니 힌 Toufilk Benedictus Hinn, T. D. 제이크스,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등 스타 목회자들이 번영신학의 논리 위에 엄청난 규모의 대형 교회(메가처치), 초대형 교회(기가처치)를 성장시켰다. 특히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긍정적 언어로 표현하고 자기 계발에 열중하게 만드는 로버트 슐러,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 등의 '긍정의 힘' 설교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논리와 맞물리며 번영신학의 부흥에 힘을 보탰다. 과거 가난한 민중에 대한 세속적 위안의 신학으로 출발했던 번영신학은 오늘날 성공한 기득권을 찬미하는 참회 없는 신학이 됐다. 지금 한국 개신교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번영신학(p. 220)의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성장하면서 번영신학을 수용했다. 가난한 계층이 의지할 좌파정당이 부재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다투는 한국의 초대형 교회 대부분은 1960~1970년대, 서울로 몰려들던 가난한 민중에게 엄숙한 자기 희생의 신학이 아니라 즉자적인 위안과 세속적 성공의 희망을 제공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해 지고, 영적으로 평안해진다"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대표적이다. 그는 CBS 방송에서 "헌금 많이 하면 복을 많이 받고, 현금 적게 하면 복을 적게 받습니다"라며 노골적으로 기복신앙을 설교하기도 했다. 가난한 민중의 헌금과 봉사의 바탕 위에 성장한 초대형 교회들은 이제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세속적 성공을 스스로 축복하고 옹호하는 기득권 질서의 핵심 세력이 돼 있다(p. 221). 능력주의의 확산에 따라 능력 측정의 방법으로서 시험, 학력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어느 정도는 세계적인 경향이다. 서구에서도 영미권이 좀 더 심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하다. 대학입시, 공채, 고시, 등단과 같은 '결정적 시험'들을 통과하면 이후에는 실제 성과나 기여와는 무관하게 계속 큰 보상을 받는다. 능력주의의 나라 미국에서는 엘리트들이 시험 통과 후에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요구받고 검증받는다. 한국의 능력주의가 제대로 된 능력주의도 못되고, 승자독식 시스템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왜 능력 평가의 수단으로 유독 시험이 중시될까?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점이 곧잘 꼽힌다. '2020 레가툼 번영지수'에서 한국의 종합점수는 167개국 중 28위. 그러나 사회적 신뢰는 139위로 최하위권이다. 공정한 규칙과 심판(p. 230)에 대한 신뢰가 낮다 보니,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적은 시험에 매달리는 경향이 나타난다. 실제 성과나 경력 등 능력을 측정 할 수 있는 더 좋은 수단들이 있지만, 공정하게 측정한다는 신뢰가 없기 때문에 적용할 수가 없다. 결국 믿을 것은 시험밖에 없다는 것이다(p. 232). 하지만 막상 아담 스미스 자신의 생각은 저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이기심을 인정한 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도 중시했다. 그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생각한 《도덕감정론》은 '연민, 공감이 인간 본성의 첫 번째'라고 주장한다. 연민과 공감이 없이는 사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p. 252)이다. 〈국부론〉에서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누진세, 의무교육, 노동자 보호 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타인의 기쁨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고, 타인의 슬픔에 순수하게 슬퍼할 수 있는 성향이 인간 본성이라고 보았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의 정글에 불과하다는 말,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를 애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을 균형 있게 파악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적 개인으로서 행동하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협력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 개인을 강조한다. 너무나 치열한 경쟁 풍조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승자조차도 행복하지 않고, 늘 불안에 시달린다.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다. 그러다 보니 참사 앞에서 희생자를 모욕하는 풍조까지 나오고 있다. 더 무너지기 전에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p. 254). 사회학자 전상진은 저서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자들이 비합리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합리주의의 과잉에 시달린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는 어떤 우연도 있을 수 없고, 모든 중요한 사건의 배후에 누군가의 의도와 개입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음모론자들은 지나치게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는 진단이다. 이 세계에는 고통이 존재하고, 우리는 거기에 슬퍼하고 분노한다. 예전이라면 신의 뜻에서 그 고통의 원인을 헤아렸겠지(p. 264)만, 오늘날 종교의 힘은 크게 약화됐다. 대신 음모론이 그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추》는 음모론을 진실로 믿는 이들이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사실을 '창조'해내고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는 늘 음모가 있다. 합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음모론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 결국 그 음모조차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p. 266). 미국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행 이후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미국 내 증오범죄 신고 사이트인 '스톱AAPI 헤이트(아시아계 혐오를 멈춰라)'에 따르면 2020년 3월 19일부터 2021년 6월 30일까지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가 모두 9,081건 보고됐다. 2020년 4,585건, 2021년 상반기 4,533건으로 1년 사이에 1.5배 이상 증가하는 추세다. 16개 대도시의 경우 네 배 이상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 스, 중국 무술 쿵푸에 빗댄 쿵 플루kung flu 등으로 부르며 노골적으로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 적지 않은 한국인이 트럼프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백인 못지않게 중국인을 혐 오하지만, 미국 안에서 보기엔 어차피 똑같은 아시아계일 뿐이다.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의 피해자 여섯 명 중 한 명 (16.8%)이 한국인이다. 중국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중국계 는 43.5%, 필리핀계 9.1%, 일본계 8.6%, 베트남계 8.2% 순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이 중의 약자인 아시아계 여성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 중국인 혐오에 앞장서는 한국인은, 본의는 아니겠지만 한국인을 향한 미국 내 증오범죄에 힘을 싣고 있는 셈이다. "나는 중국계가 아니다"라며 범인에게 출신 확인 후 증오범죄를 저질러달라고 호소하는 게 해결책일까? 물론 말도 안 된(p. 314)다. . “너희 때문에 이렇게 됐다"며 중국계를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무슨 책임이 있는가? 사실은 중국의 중국인에게조차 책임을 묻기 어렵다. 정부와 인민을 동일시할 수 없고, 무엇보다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조사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정부의 적반하장격 태도에 대한 분노와는 분리해서 생각할 일이다. 좀 더 나아가 보자. 100여 년 전에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로 꼽히는 스페인독감의 발원지로는 미국이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미국이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과를 안 했으니 이제 미국인에 대한 혐오를 시작해야 할까? 아니, 누가 사과를 요구한 적이라도 있는가? 그러니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증오범죄는 비합 리적이고 치우친 견해, 즉 편견에 기반한다. 문제는 편견이다. 편견으로 핍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p. 315). 혐오의 피라미드를 경계하자 편견과 혐오에 기반한 범죄를 증오범죄라고 분류한다. 증오범죄의 뿌리에 편견이 있다. 공정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선택된 정보에 근거한 편견이 범죄를 일으키게 된다. 특히 증오범 죄는 성별 출신지역•출신국가•종교•학력•민족•인종 등에(p. 318)대한 편견에 좌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정한 사례에 기초해서 전체 집단의 속성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합리적인 반 론이나 반증이 나타나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편견은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증거에 저항적이다. 편견과 다른 사실을 접하면 예외로 치부한다. 편견과 관련된 정신영역의 문이 결코 열리지 않는 이른바 잠금강화 장치라는 현상이다. 우리는 대부분은 크든 작든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믿는다. 증오범죄의 뿌리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 왜 우리 인간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편견, 혹은 무의식적 편향 자체는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했던 형질로서 우리 내면에 정착했을 것이다. 거친 수렵채집 생활에 서는 최대한의 정보를 모아 자세히 처리하기보다는, 조금은 부정확하더라도 위험신호를 빨리 처리하는 쪽이 생존에 유리했다. 원시뇌에 속하는 변연계에 위치한 편도체는 이런 부정적 자극을 삽시간에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편견이 심했던 덕에 살아남은 조상들의 후예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늑대나 호랑이가, 이웃 부족이 호시탐탐 우리 목숨을 노리는 수렵채집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우리는 낯선 타인과의 협력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복잡한 거대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 과학자들은 편견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해도, 문화적 맥락에 따라서는 약화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는(p. 320) 것도 발견했다. 미국에서 흑인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던 백인우 월주의자 KKK단이 난무하던 시대와, 증오범죄가 있어도 그것을 범죄로 간주하고 누구도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못하는 오늘 날의 차이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편견을 극복함으로써 문명을 발전시킨 조상의 후예이기도 하다. 증오범죄의 뿌리에는 보통사람의 일상 속에 흔하게 존재하는 사소한 편견의 감정이 있다. 이것이 자라나서 큰 비극을 넣게 된다. 심리학자 고든 윌라드 올포트Gordon Wilard Allport는 '부정적 발언' → 소수자에 대한 '기피' → 고용, 학교 등에서 의 실제 '차별' → 소수자에 대한 '물리적 공격' → '절멸'(제노 사이드) 등 5단계로 강화되는 척도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 1단계는 부정적 발언의 단계다. "외국인은 범죄율이 높다" "여성은 관리자로서 부적합하다" "성소수자는 문란하다" 같은 발언들이다. "말만 하는 건데 어떠냐" "표현의 자유도 없냐" 이렇게 합리화를 한다. 2단계는 기피다. 쉽게 말해 왕따를 시키는 것이다. 상대를 안 해준 것일 뿐 직접 피해준 건 없다며 합리화를 한다. 근래에 미투 폭로가 이어지자 남성들 중에는 펜스룰을 수행한다며 아예 여성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겠다는 경우가 있다. 기업에서 여성은 배제하고 남성끼리만 회식하는 상황 같은 것이다. 이런 걸 거치며 혐오가 강화된다. 3단계는 차별이다. 고용, 승진, 교육기회, 정치적 권리 등 여러 영역에서 차별이 일어난다. 4단계는 단순폭행에서 살인에 이르(p. 321)기까지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증오범죄의 단계다. 마지막 5단계는 절멸 단계인데, KKK단의 흑인에 대한 집단적 공개처형이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같은 것이 대표 사례일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일상에서의 사소한 혐오 표현이나 왕따 시키기가 점점 자라서 비극적인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범인을 규탄하고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범인이 보통사람과 달리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간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사회가 그런 혐오 표현을 용인하거나 옹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혐오가 피라미드의 계단을 밟듯 상승하다가 비극적이고 끔찍한 범죄가 일어난다. 우리는 좀 더 섬세해져야 한다(p.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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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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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내가 사는 세상을 바르게 판단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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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쟁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
-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전쟁 포로의 어려움을 이겨낸 피해자와 가해자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어떻게 용서하는지가 잘 그려져 있다. 일독을 권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절판됐다. 기회가 되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라도 읽기를 추천한다. 기차와 철도를 향한 열정은 치유불가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문이 남긴 상처를 치유할 방도도 없다. 이 두 가지 불치병이 내 삶의 여정에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운과 은총의 우연한 조합(p. 10) 덕분에 나는 그 질곡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장장 5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p. 11). 1942년 2월 15일 일요일. 나는 한 장교로부터 우리가 곧 항복하게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날 저녁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우리 요새를 감쌌다. 통신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밀려오는 절망과 피곤을 이기지 못한 채 케이블과 전화선 위에 그대로 매트리스를 깔고 쓰러져 누웠다. 몇 주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긴장의 끈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10시간을 내리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밖으로 걸어 나와보니 4대의 차 량이 차창 옆에 작은 일장기를 휘날리며 천천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군인들은 양팔을 옆구리에 단단히 붙인 채 정좌자세로 앉은 모습이었다. 정문 앞에 차를 줄줄이 세우자마자 일단의 일본군 장교들이 차례로 내렸다. 암록색 제복에 장도가 든 칼집을 차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그 일본군들이 우리 요새 안으로 자신만만하게 걸어 들어왔다. 말라야를 접수한 그들은 인도에서 폴리네시아(태평양 중남부에 널리 산재하는 작은 섬들의 총칭.- 옮긴이)에 이르는 바다까지 장악했다. 아시아에서 최소 3개 유럽국가의 힘을 꺾어놓은 것이다. 나는 이제 전쟁포로가 되었다(p. 91).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캠프를 나서는데 길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 장대 위에 잘려진 머리 6구가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모두 중국인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핼러윈 가면 같았다. 날마다 우리는 그 끔찍한 광경을 지나쳐 행군했다. 그 즈음 일본군이 싱가포르 내 국민당 음 모 혐의자들을 처단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야만적 행위조차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 봐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미 면역된 상태였기 때문일까? 참수당한 머리들은 저들에겐 태평양전쟁에서 얻은 트로피나 다름없었다. 그때 나는 잔인성이라는 게 한번 분출되기 시작하면 통제불능으로 치닫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p. 98). 그 외의 여정은 별다른 사건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나는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1945년 10월 31일. 드디어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했다. 1941년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군악대가 〈영국은 영원하리〉를 연주해주었지만 이번 귀향 분위기는 겨울 초입 으슬으슬한 잿빛 하늘 아래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우편물이 갑판에 전달되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였다. 어머니가 싱가포르 함락 1개 월 후쯤인 3년 반 전에 돌아가셨으며, 64세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실종자로 보도된 아들이 이미 사망한 줄 알고 몹시 상심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얼마 전 재혼하셨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재혼 상대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 아니 아버지의 친구였다. 내가 한 번도 친근하게 여긴 적 없는, 진중하지 못하고 집착증이 있는 여자였다. 그 동안 꿈꿔왔던 아늑한 가정의 이미지는 이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내 가슴을 휘저어놓았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바뀌었다(p. 253). 전쟁포로가 겪는 가장 힘겨운 일 중 하나는 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원치 않는 제안이나 지시에 '싫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되찾는 것이다. 완강하게 버틸 힘은 있어도 자신의 견해를 끝까지 고수할 의지를 내보이는 일이 내게는 특히 더 어려웠다. 반면 내 고갈된 에너지(p. 256)만으로는 외부적인 사건들, 특히 자유를 찾은 첫 몇 달간 일어난 사건들에 휩쓸리기가 매우 쉬웠다. 이런 부정적인 힘과 정착하고 싶은 긍정적인 욕구가 한데 뒤섞인 가운데 1944년 내가 창이에서 받은 보살핌과 유사한 감정적 도피처를 한시 바삐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쟁포로들은 정착하는 걸 몹시 힘겨워한다. 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어도 마찬가지다. 극동지역 전쟁포로였던 내 또래의 어느 남성은 매일 아침 집을 나와 어두워질 때까지 온종일 걷고 또 걷는다. 편히 앉지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그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 증상을 알코올로 달래느라 여러 해 동안 술집을 드나들더니 얼마 안가 알코올중독 증세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고생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을 시작했지만 애초부터 일은 그에게 버거운 짐이었다. 그나마 일이 그에게 닻을 매다는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코올중독 치료재단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은퇴자 신세가 되어버리자 그는 또다시 물에 띄운 배처럼 자신만 아는 물길을 따라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극동지역에서 살아 돌아온 이래 평생토록 그를 짓누른 불안증세를 막아줄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불안 증세가 오히려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p. 257). 결혼이 열쇠 없는 감옥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한 쪽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대립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냉담한 분노 속에 홀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 나를 껍질로 둘러싸고 아예 꽉 닫아버리는 행동이 아마 우리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치와 갈등은 내 존재 자체를 위협했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건 말 그대로 비극이었다. 밀실공포증 같은 불안감은 교회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사나운 세력다툼, 허세와 거리두기, 빈정섞인 분개가 자리싸움으로 분출되곤 했다. 30년 동안 교회를 다닌 한 여성은 어느 날 나와 내 아내가 자기 자리라 생각하는 곳에 무심코 앉았다며 큰 소리로 화를 냈 다. 그들의 무지와 위선에 진절머리가 났다(p. 267). 반쪽짜리 생각에 불과한 이 욕구조차 실제로 표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은 이제 그만 용서하고 잊으라고 조언했다. 보통 나는 웬만해선 대놓고 논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나도 의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서하라고 충고를 건넨 대다수는 내가 치른 종류의 경험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용서할 의향이 없다. 아직까지는, 아니 아마도 절대로(p. 298). 나가세는 이후 여러 차례 태국을 방문해 생존한 아시아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벌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전후에도 인도나 말라야 같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철도역 인근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나가세는 콰이 강의 다리에 평화의 사찰을 건립하고 군국주의에 소리 높여 반대했다. 존경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모든 내용을 놀랍도록 초연하게 읽어내려갔다. 내 속에서 강렬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저 방관자로 내 고문 현장을 바라보는 듯 묘한 기분 외에는 모든 게 공허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그의 감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은 그를 용서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 한낱 인간의 용서와는 다른 문제이니까 말이다. 나는 책을 치워버렸다.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 패티가 그 책을 집어들더니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칸부리 전쟁묘지에서의 경험을 적은 대목이 나오자 아내는 분노했다. 내가 느낀 감정 그 이상이었다. 그 녀는 나가세가 어떻게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했(p. 311)다. 죄의식이란 게 어떻게 그냥 '사라져' 버릴 수 있는가? 아무도, 더구나 나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분노감을 주체하지 못한 패티는 나가세에게 당장 편지를 쓰겠다며 내 허락을 구했다. 그녀는 결국 편지를 썼고 1991년 10월 말, 나가세에게 그 편지를 보냈다. 내 사진 한 장을 동봉해서. 이제 그와 갑자기 대면하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p. 312). 나가세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우리가 다른 환경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잘 지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책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으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칸부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가 점점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주말에 일본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 와중에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용서였다. 나가세를 가장 괴롭힌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구현하고 있지 않느냐, 혹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꺼내기에 새삼스럽진 않느냐는 식의 생각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다. 일단 누구든 용서를 문제로 삼는 순간 자칫 판결자의 자리에 서려는 우를 범하기 쉽다. 다만 나는 내 결정의 구속력을 의식하고 있는 나가세에게 어떻게든 응답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 주 우연히 만난 한 태국 여성이 불교에서 말하는 용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이승에서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악(p. 331)행을 속죄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까지 반드시 자신에게 되풀이된다는 얘기였다. 나가세는 지옥을 두려워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 서로의 삶을 이미 지옥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내가 불교신앙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용서를 거부함으로써 더 이상 그를 괴롭게 만들 이 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정작 중요한 건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새롭게 맺은 관계이며 나아가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명백한 뉘우침 그리고 부질없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딛고 우리의 만남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상호적인 요구였다. 우리 삶이 겪은 고통과 피해로부터 가능한 한 충분히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어떤 절차를 통해 용서의 뜻을 전할까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p. 332). 나는 미리 써둔 짧은 편지를 그에게 찬찬히 읽어주었다. 그가 모든 문장을 이해하고 있는지, 중간중간 멈추고 확인하면서. 나는 그가 이 편지를 정중한 격식을 담은 내용으로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전쟁은 이미 50년도 전에 다 끝난 일이라는 단언과 함께 나가세가 겪었을 고통, 화해를 위해 그가 한 노력들, 그리고 군국주의에 대항한 그의 용기 있는 자세를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1943년 칸부리에서 겪은 일을 결코 잊을 수는 없지만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용서합니다."(p.339). 옮긴이의 말 전쟁과 야만, 용서에 관한 어느 전쟁포로의 가슴 저린 이야기 이 책은 철도와 증기기관차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바로 그 기차와 철도로 인해 아이러니한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담은 실화다. 타고난 운명 혹은 '팔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평생 철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레일웨이 맨》이라는 책 제목마저 절묘하다 못해 기묘하게까지 들린다. 에릭 로맥스는 어려서부터 기차와 철도에 깊이 매료된 철도광railway mania 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장교로 군에 입대한 그는 싱가포르 함락과 동시에 일본군 포로가 되어 버마-시암 간 죽음의 철도를 건설하는 현장에 철도노동자로 징용된다. 그러다 라디오를 제작하고 철도 지(p. 342)도를 그려 소지했다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심지어 종전 후에 그가 거친 주요 이력 중에도 철도 관련 직무가 포함되어 있다. 훗날 고문 당시 통역자였던 나가세 다카시의 정체를 알게 된 것도 나가세가 철도 희생자들의 유해와 묘지를 찾는 활동에 헌신한 덕분이다. 이후 그의 삶을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운명의 여인 패티를 만난 것도 바로 기차역에서였다. 또한 이 책의 첫머리는 자신의 집에 걸린 던컨 맥켈러의 그림 속 기차역 풍경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해 나가세 다카시 부부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에 관한 회상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듯 자신의 생각이나 심리 보다는 상황과 주변환경 묘사에 치중해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여러 인물들의 이름과 직책을 포함해 특정 장소는 물론 정확한 날짜와 시각까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펼쳐놓았다. 성장 과정과 기차에 관해 길게 서술한 첫 장은 그의 성품과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단원이며 2장과 3장에서는 시시각각 전쟁이 다가오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그러다 4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저자의 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4장은 생각지도 못한 전쟁포로가 되어버린 심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5장과 6장의 '라디오 사전'과 고문 현장으로 넘어가면 마치 기록영화를 보듯 가슴이 아프도록 생생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가령 수용소 앞마당에서 심한 체벌과 구타를 당하는 과정은 원문의 무려 6페이지, 그리고 물고문의 전 과정은 2페이지에 걸쳐 세밀하게 기록돼(p. 343)있다. 7장과 8장에서는 죽기 일보직전의 극한상황까지 몰린 포로생활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서대문 형무소나 거제도 포로수용소,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둘러보며 막연히 떠올리던 전쟁의 참상이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오는 대목들이다. 9장과 10장에서는 전쟁이 끝난 직후의 혼란스런 주변상황, 기대와는 다르게 닥친 현실과 심리적인 후유증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 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온 과정을 보면(포로생활 중 용기를 내 감행한 일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지닌 불굴의 인간정신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온다. 1995년 영국에서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용서의 문제를 다른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용서에 관한 내용은 뒷부분에 짤막하게 나온다. 게다가 11장 대부분은 지난하고 고통스런 나가세 추적 과정임을 감안할 때, 용서의 문제를 다룬 대목은 패티의 편지를 매개로 직접 만나 용서를 전하는 12장에 한정돼 있다. 물론 로맥스와 나가세 두 사람의 화해에 결정적 계기가 된 두 개의 편지 전문(패티의 편지와 나가세의 답장)을 비롯해 사건 당사자들이 반세기 동안 겪어온 고통과 화해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더할 나위없이 감동적이다. 하지만 로맥스가 말한 대로 '뜻하지 않은 행운과 운총이 결합된' 이 특별한 사연을 '이상 적인 용서'의 대표 사례로 미화해 '용서에 관한 책'으로 보는 것은 다소(p. 344) 경계해야 할 시각이라 여겨진다. 그보다는 "일본인들이 철도노동자들에게 전혀 무관심한 걸로 비춰지는 게 두려웠다."라고 말하며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태도에서 탈피해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나가세 다카시와 혹독한 포로생활과 전후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도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에릭 로맥스, 강인하고 올곧은 두 사람이기에 이뤄낸 '특별하고 아름다운 재회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 속에서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물론 우리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도 많다. 유럽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과 유대인 대량학살은 여간해선 못 믿겠다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또렷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겪은 경험이 참담한 역사의 한 페이지 끄트머리로 무조건 격하되어야 할까? 영국인 대다수는 극동지역 전쟁범죄 재판에 별 관심이 없다. 게다가 공식 정책마저 일본을 서구사회의 동맹국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그 사건들을 폄하했다. 칸부리 사건이 그저 사소한 범죄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재판에 회부된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에게 그 사건은 결코 사소하거나 부차적일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치의 만행에 관해서는 《안네의 일기》나 〈쉰들 러리스트〉 〈게르니카〉 등 대표적인 도서와 영화, 미술작품이 넘쳐나는 데 비해 일제의 만행을 다룬 내용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안타까운(p. 345) 현실을 돌이켜볼 때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해주길 기대해본다(p.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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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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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쟁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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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흥미로운 역사 이면의 인간 군상
- 요즘 조형근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유익하고 재미있다. 이 책은 역사 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흥미로웠다. 2014년 9월 7일, 한때 리샹란이었던 야마구치 요시코가 죽었다. 그해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하며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이 호소문마저 삭제했다. '리샹란을 지키는 모임' 중 한 명이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주 아베 총리가 벌인 일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이끈 아베는 2022년, 연설 중 암살됐다. 아베를 향해 사죄를 촉구하던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3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2024년 6월 14일 현재, 한국 정부에 등록된 240명 중 232명이 세상을 떠나고 여덟 명만이 남았다. 2023년 4월,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은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p. 30)일 수 없습니다." 역사적 책임에 관한 오랜 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그 말들 속에서 증발했다.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 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p.31). 두 편의 〈너의 이름은〉이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혜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둘의 의미가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2016년의 〈너의 이름은〉은 침략 을 은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두 편의 〈너의 이름은〉은 여전히 닮았다. 분명한 원인과 책임이 있는 인간의 비극을 천재지변으로 묘사하는 것, 직면해야 할 정치사회적 문제를 개인들 간의 연결이라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건 동형적이다. 한국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p. 44)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어느 조사관이 쓴 표현처럼 "그날 지켜본 것은 배 한 척의 침몰이 아니라, 사회의 참담한 실패였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거기에 연루된 우리 자신의 고통스러운 변화도 필요했다. 초기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공유됐다. 2014년 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라 는 대표 슬로건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진행 과정은 달랐다. 처벌은 선원과 출동한 해경, 해운 회사, 해운업계 등 직접 관련자와 하급자들에게 집중됐다. 구조 책임을 진 해경 지휘부와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조사와 책임 규명은 회피됐다. 그렇게 되자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와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 사회적사특별조사위원회를 거 치면서 논의는 책임을 회피한 나쁜 개인을 찾아내는 데 집중됐다. 사과를 보관한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썩은 사과' 한 알만 골라내면 된다는 '썩은 사과' 프레임이 논의를 지배했다. 안전 사회를 위한 구조적 개혁,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라는 과제는 계속 미뤄졌다. 슬픔에 공감한다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도, 희생자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비극이 남긴 과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데 있다. 3•11과 4•16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질문이다(p. 45).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가해자였다. 이런 사례들을 근거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현실적 함의는 일본에 동조한 같은 전범국이니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책임 부인에 동조하는 논리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한편에는 그들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그저 순전한 피해자일 뿐이 라는 생각이 있다.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p. 62)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p. 63). 윤치호(1865~1945)도 미국 유학 중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인종차별을 겪고 오히려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의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 물론 윤치호는 유길준보다는 내면이 복잡한 인물이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과 사회진화론 사이의 부조화로 고민했다. 1892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고뇌한다. "나의 신앙이나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은 인종 간의 불평등 과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여러 해악들이다. 왜 하나님께서 코카 시안과 몽골리안, 아프리카인 등에게 평등한 기회와 동등한 심신의 능력을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자 하심에도 못 하셨을까? 그렇다면 그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일부러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오호, 수수께끼로다!"(p. 95).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윤치호의 말은 유명하다. 1919년 3월 2일의 일기에서 그는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물리적 진압이라는 당장의 결과만 보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3•1운동이 조 선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염원을 남겨놓았는지, 일제가 3•1운동으로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한국인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피 지배자가 이런 자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면 지배자로서는 최상이었다(p. 96).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였다. 크리스처럼 잠시 베트남에 온 미군의 시각으로는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베트남전쟁은 30여 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인도차이나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이 진주한다. 나치의 괴뢰 비시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군은 전투도 없이 일본군의 온순한 포로가 됐다. 종전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이, 북부에는 중국군이 진주한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프랑스군에게 다시 무기를 쥐여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지배하겠다고 선언한다. 일본군과 싸우면서 베트남 북부 상당 지역을 스스로 해방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던 호찌민(1890~1969) 등 독립 운동 세력과 베트남인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호찌민은 그래도 프랑스와의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다. 파리 해방 전투의 영웅이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이던 르클레르 장군과 협상하여 당분간 독립 대신 자치에 만족한다는 합의에 이른다. 피를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정식 협정을 맺기 위해 파리로 향하지만, 본국 정부의 대답은 자치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피를 뿌리기로 결심한 쪽은 프랑스였다. 협상 결렬 후 프랑스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북베트남은 공산당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독(p. 141)립 운동 세력의 연합정권하에 있었다. 이 전쟁의 본질이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연장하려는 더러운 전쟁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유다. 이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1954년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뒀다. 기적 같은 승리였다. 중립국 등 관련 9개국이 참가한 제네바협정에서 2년 내 자유 총선거거 실시와 단일 정부 수립이 합의됐다. 막상 당사자인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합의 이행을 거부했다. 질게 뻔한 선거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내세웠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내쫓고 좀 더 유능해 보이던 응오딘 지엠의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지엠 정권은 비판자들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정권은 극도로 부패했고, 지배층은 나라를 사익을 위한 사기업으로 여겼다. 나라를 지킬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때 프랑스를 앞세우며 전비의 80퍼센트를 댔던 미국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는 아예 직접 나섰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쓴 전비만큼을 퍼부었다. 그러고도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패배였다. 이 쉬운 전쟁에서 미국은 왜 졌을까? 그들이 지켜주겠다던 남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국민 절대다수가 전쟁의 명분에 수긍하지 않았다. 남베트남 정권이 정통성도 없고 부패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근본 적인 이유가 있었다. 남베트남은 농민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농업 사회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기득권이던 소수 대지주가 토지를 장악하고, 절대다수 농민은 고율의 소작료(p. 142)로 고통받고 있었다. 농지개혁이 지상 과제였지만 바오다이 정권도, 지엠 정권도 계속 거부했다. 1956년, 지엠 정권은 농지 소 유 불평등이 가장 극심하던 곡창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마지 못해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농촌 인구의 0.025퍼센트에 불과한 대지주 2500명이 쌀 생산 농지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개혁안은 농지 소유 상한선을 100헥타르(30만 2500 평)로 정했다. 남베트남 농지개혁 몇 년 전에 실행된 남한, 일본, 대만 농지개혁에서의 상한선인 3정보(9000평)의 33배가 넘는 크기였다. 지주도 소작농도 사라지고 자기 땅 가진 소농들의 평등한 나라가 된 이 동아시아 3국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경제 기적을 이뤘다. 반면 응오 딘 지엠 정권의 농지개혁안은 대지주 체제를 온존하겠다는 방안이니 개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극소수 대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는 부패한 정부를 농민이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이익을 보위하자는 전쟁을 지지할 이유도 없었다(p. 143).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비 '검은 벽'에는 전몰자 5만 80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베트남전쟁에 종군한 영(p. 144)국 사진작가 필립 존스 그리피스는 통계 수치를 계산해본다. "미국 전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워싱턴 D.C의 주모비는 약 137미터다. 같은 간격으로 베트남 전몰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비를 만든다면 아마 15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다." 베트남 사람 300만 명이 그 전쟁에서 죽었다. 〈미스 사이공〉도, 《지옥의 묵시록》도, 그리고 오바마도 침묵하는 사실이다. 베트남전쟁으로 상처 입은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 5000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그중 5000여 명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미국 다음으로 전쟁에 깊이 개입한 나라가 한국이다. 왜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한국이 연루되어야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제대로 묻기 어렵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항의를 했다. 전몰자를 추념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당연한 권리라며 한국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면 한국 정부와 여론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 논리와 똑같은 논리를 한국 정부와 사람들이 내세웠다. 일본에게 이런 것까지 배웠다.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한사코 외면하면서. 참전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연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 먹고 살려고, 가족을 도우려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쟁에 나섰고 피를 흘렸다. 침략 전쟁이라는 걸 알고 간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p. 145)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p. 146). 과학은 세상을 구원했지만, 막상 세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국들의 팽창 욕망은 비료 따위로 채워지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왕국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사건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하버는 이 전쟁에 열광했다. 이후 염소가스 제조법 발명으로 화학전의 길을 열었다. 1915년 벨기에 전선에서 치러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 실행됐고, 6만 7000명 이 상이 사망했다(p. 156). 하버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최초의 여성 화학박사였다. 여권운동에도 참가할 정도로 여성 인권에도 열정적이었다. 화학자 동료인 하버와의 결혼으로 화학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하버는 마리 퀴리를 전폭 지원한 피에르 퀴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코 앞치마를 벗을 틈이 없었다" 하버와 연구서 《기체반응의 열역학》을 공동 집필했지만, 사람들은 하버가 혼자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버의 독가스 개발에 대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규율을 타락시키는 야만성"의 상징이라며 반대했다. 제2차 이프르전투의 참상이 전해지고, 하버가 다시 독가스 공격을 위해 전선으로 떠나려던 날, 클라라 임머바르는 그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하버는 어린 아들에게 장례를 맡기고 전선으로 떠났다. 1991년 국제핵전 쟁예방의사연맹 독일지부는 과학의 악용에 죽음으로 항거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클라라 임머바르상'을 제정했다. 독가스 개발로 비난받게 되자 하버는 항변했다. "평화의 시기에 과학자는 세계에 속하지만, 전쟁의 시기에 그는 조국에 속한다." 가정 파괴를 무릅쓸 정도로 독일에 대한 애국심이 넘쳤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망명을 떠나야 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이듬해 스위스에서 죽었다. 하버가 개발진으로 참여해서 만든 살충제 치클론 B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널리 쓰였다. 즉사시키지 않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만드는 참혹한 독가스였다. 그가 이 참극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장남 헤르만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46년에 미국에서 자살했다. 헤(p. 157)르만의 딸 클레어는 미국에서 화학자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염소가스의 해독제를 개발하는 데 전념하던 중 연구 예산이 핵폭탄 개발에 우선 투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었다. 1949년이었다. 과학이 세상을 구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던 어떤 과학자를 구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p. 158). 나치 친위대였던 '전후 독일의 양심' 그리고 이제 귄터 그라스Gunter Grass(1927~2015)의 양파 껍질을 벗길 차례가 왔다. 2006년 8월 12일, 유소년 시절을 담은 회고록 《양파껍질을 벗기며》의 출간을 앞두고 《슈피겔》과 인터뷰를 하던 중 그라스는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정규군인 방공부대에서 복무했다고 수십 년간 거짓말을 해왔으며, 실은 친위대로 복무한 자발적 나치였다는 것이다. 그라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는 열다섯 살 때 자발적으로(p. 261) 잠수함부대에 입대하려 했지만 어리다며 거절당했고, 이듬해에는 제국노동대에 징집됐다. 노동대가 너무 싫어서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4년에 다시 입대를 자원했지만 그곳이 친위대인 줄은 배치받은 다음에야 알았다고 한다. 무장친위대 제10기갑 사단에 입대하여 종전까지 무장친위대원으로 복무했다. 약칭 SS로 불리는 친위대는 정규군과는 달리 징병이 아니라 자원으로 들어가는 특권 집단이었다. 히틀러 광신자들의 집합체였고, 인종 청소 등 반인륜 범죄의 대명사였다. 물론 나치가 붕괴하던 전쟁 말기에는 그런 구별도 희미해져서 친위대 입대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기도 했다. 친위대인 줄 모르고 자원했다는 그라스의 해명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당시 그는 기껏 열일곱 살이었고, 이른바 '히틀러 청소년단 세대'이기도 했다. 문제는 고백이 너무 늦었다는 것(p. 262)이었다. 오랫동안 다른 이의 고백과 반성을 촉구해온 그가 아니었던가? 위선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노벨상을 반납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는 복무하는 동안 총알 한 발 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치친위대 복무 당시에는 전혀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었 다". 문제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다음이었다. . “어떤 범죄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했다." 그라스의 뒤늦은 고백은 독일 과거사 극복의 전형적인 패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진실에 대한 뒤늦은 자각과 죄책감의 뒤늦은 증폭. 그리고 이어지는 비난과 논란. 한국에서는 과거사에 대해 매우 무책임한 일본과 대비하여 독일의 과거사 처리가 곧잘 칭송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일본과 비교할 때 독일이 낫다고 해도, 독일의 사정이 그리 명쾌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인들이 패배하자마자 곧장 과거와 단절하고 반성했을까? 천만에, 사람들은 어제까지의 그 독일인이었고, 사회 곳곳에는 예전의 나치가 가득했다(p. 263).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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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흥미로운 역사 이면의 인간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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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인간의 모든 행위는 통제 되어야 한다
- 의사들은 인간의 질병을 고친다는 미명하에 인간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이것을 문제삼지 않았으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에 대한 무한 신뢰는 그들의 방종을 불러 올 수 있다. 천연두 백신의 숨은 진실 가엾은 꼬마 캐서린이 투베르쿨린 주사를 맞기 100여 년 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관한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 대상은 당시 8 세였던 정원사의 아들 제임스 핍스였다. 에드워드 제너는 제임스의 팔에 낙농장 여인 손에 돋아난 우두 종기에서 뺀 고름을 집어넣었다. 제임스는 천연두를 가볍게 앓았다. 1개월 후, 제너는 이번엔 소년의 팔에 치명적인 천연두 종기 딱지에서 뽑은 고름을 집어넣었다. 천연두 고름이 여러 번 몸에 들어갔지만 소년은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너는 우두(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소에서 뽑은 면역 물질-옮긴이)가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험 대상자가 된 제임스 핍스가 제너의 실험에 동의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아직 어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제너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실험을 거부하기가 힘들었으리라 짐작된다. 게다가 1800년대와 1900년대에는 아이나 성인에게 치료를 할 때 오늘날처럼 꼭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치료를 하기 전에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의료법은 현대에 만들어졌다. 그때는 실험을 할 때 지켜야 할 지침을 정한 그 어떤 법도 없었다. 의(p. 23)사에게는 치료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1865년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의사가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거나 시험할 때 도덕적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또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말한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항상 명심하라고도 했다. 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중대한 실험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베르나르도 죽음을 앞에 둔 여성에게 하는 실험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이나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들은 따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여성 사형수는 베르나르가 시키는 대로 억지로 애벌레를 삼켜야 했다. 이 사형수는 죽은 후 애벌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해부되었다. 베르나르는 이 여성은 환자가 아니라 실험 대상 일 뿐이라고 해명했다(p. 25). 앨라배마에서는 외과 의사 제임스 매리언 심스가 노예들에게 소름끼치는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심스는 흑인 유아의 머리뼈를 열어서, 농장 아이들에게 심각한 근육 경련을 일으키던 칼슘 경직(혈액 속 칼슘 농도가 낮아져서 생기는 질병-옮긴이) 치료법을 찾아내려 했다. 심스는 구두 수선 도구로 아이의 머리뼈를 으스러뜨렸고, 출산 도중 뼈의 변형 때문에 칼슘 경직이 일어난다는 잘못된 이론을 주장했다. 심스는 여성 노예들에게 한층 더 소름끼치는 수술을 실시했다. 출산 도중 문제가 생긴 노예들은 소변과 대변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질과 방광 사이에 구멍이 생겨서 질 안으로 오줌이 새어 들어오는 '방광질샛길'이라는 병 때문이었다. 1840년대에 심스는 이 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여성 노예들에게 여러 가지 수술을 실험했다. 아나차라는 노예는 30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심스는 수술을 할 때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마취제인 에테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심스는 마침내 '방광질샛길'의 치료법을 찾았고 연습을 통해 수술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이러한 성과를 발판으로 심스는 '미국 산부인과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심스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고, 세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단 동상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내과 의사들은 '치료'라는 명목으로 흑인 노예들에게 저지르는 실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에게 하는 실험은 옳고 그름에 대해 논쟁했다. 1874년, 30세의 지적 장애인 매리 래퍼티에게 행한 실험은 엄청난 비(p. 29)난을 받았다. 오하이오 주의 의사들은 래퍼티의 두피에 생긴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버츠 바솔로라는 의사는 래퍼티가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뇌에 고통스러운 전극 실험을 하기로 했다. 열려 있던 뇌에 전류가 흐르자 래퍼티는 극심한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었고 비명을 질렀다. 래퍼티가 죽은 후 부검을 통해 그녀의 뇌가 손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바솔로는 미국 의사 협회로부터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질책을 당했다. 과학 실험으로 환자에게 상처를 입힐 정당한 이유는 없다며 말이다. 바솔로는 래퍼티의 동의를 구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 장애인의 동의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p. 30). 수많은 독일인 의사들이 인종 위생학(독일의 우생학-옮긴이)에 끌렸다. 위생학 정책이 독일의 미래 세대를 특정 질병으로부터 막아줄 거라고 기대했다. 범죄 행동 같은 사회적 질병도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 아래, 의사들은 독일 사회에 만연한 '전염병'을 '치료'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나치 정부는 인종 위생학을 실행하기 위한 법률과 정책을 만들었다. 그중에는 실명이나 난청, 신체 기형 같은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불임 수술을 강요하는 단종법도 있었(p. 50)다. 이 법률에 따라 35만여 명 이상의 독일인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1939년, 독일 의사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정신 질환자와 장애인, 그리고 계속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유대인 또한 열등하다고 생각됐고 '게토'라는 비좁고 더러운 빈민가에 강제로 몰려 살았다. 1941년에 나치는 거리에서 체포한 유대인들을 가스실 안에 몰아넣고 가스를 살포하거나 총으로 쏴서 죽였다. 유대인 수백 만 명이 쌍둥이 자매 에바와 미리암처럼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독일 의사들은 인종 위생학을 실행하기 위한 법률과 정책이 마련되자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 사람들에게 온갖 잔혹한 실험을 했다. 유대인을 비롯해 집시, 동성애자, 기형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 러시아인과 폴란드인 같은 슬라브인들도 실험에 동원되었다. 나치 정부에 반대하거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처럼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진 사람들 또한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나치가 볼 때, 이 열등한 사람들은 실험 대상으로 아주 적합했다(p. 51). 미국의 우생학 독일 정부는 인종 위생학을 국가 정책으로 정해서 잔인하고 극단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를 실행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생각이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1883년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사촌 형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이런 생각을 가리키는 '우생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골턴과 다른 우생학자들은 인간 종족을 개선하기 위해 최고의 자질을 지닌 사람들끼리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00년대와 1900년 초에 유대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같은 유럽 대륙의 다른 민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자 우생학자들은 미국인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범죄자들, 지적 장애인들이 정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어 세금이 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했다. 1910년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우생학 기록 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사무소는 인종과 유전, 그리고 이와 비슷한 문제에 대한 자료를 보관했다. 수많은 사회 저명인사들이 우생학을 지지했는데, 그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찰스 윌리엄 엘리엇 하버드대학 총장도 있었다. 나치들은 미국의 우생학 운동을 부러워했다. 히틀러는 미국의 우생학자들에게 우생학에 관한 책을 써준 것에 대해 편지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 발 앞서 완벽한 인종 개량을 이룰까 봐 걱정했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우생학을 이유로 전 세계 32개 나라에서 불임 수술이 실시되었다. 미국에서만 6만여 명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강제 불임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정신 질환자나 가난한 10대, 강간당한 어린 소녀들, 뇌전증(간질)을 앓는 사람들과 정신 지체자들이었다(p. 56). 연구의 윤리성은 결국 연구를 시행하는 사람들 손에 달려 있다. 규칙의 개정은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이 있다. 그리고 사회는 연구자에게 적절한 배려의 수준을 결정해야 한다. 언제까지 조작하기 쉽고 속이기 쉬운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을 상대로 임상시험을 계속할 것인가? 누군가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위험의 부담을 짊어지워도 되는 것일까? 의학 임상 연구 윤리는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도덕 수준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 발전은 중요하다. 사회는 엄청난 의학적 발견과 치료법 덕에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학 연구는 어떤 경우라도 생명 존중과 혜택과 정의라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사회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가 대립할 때 우리는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이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p. 149). 믿을 수 없는 실험들 731부대에서는 31가지 정도의 다양한 인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일본 의사들은 우선 나치 의사들이 자행했던 동상 실험과 감압 실험을 하며 인간에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와 그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자세히 관찰했다. 또 인간이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실험,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죽음에 이르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사람을 죽게 하는 방사능의 양은 얼마인지 알아보는 실험, 독가스 실험, 체액 대용으로 쓰일 생리 식염수를 찾기 위해 사람 몸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실험, 사람의 몸에 말의 피를 주입하고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실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형 원심분리기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고속으로 회전시키는 실험,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실험 대상의 피부를 살아 있는 상태에서 벗겨 내는 실험,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하여 각각 상(p. 160)대방에게 이식하는 성전환 수술 실험, 성병 실험, 세균을 배양하여 인간의 몸에 주입시킨 후 경과를 살펴보는 실험 등 온갖 잔혹한 실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 같은 실험을 진행한 후에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 대상을 모두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해부했다. 또 해부된 몸에서 꺼낸 장기는 포르말린 액이 든 병에 담아 진열실에 보관했다고 한다. 731부대가 자행한 일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들이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실험을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험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세균전을 위해 세균 무기와 독가스탄을 만들어 민간에 살포했는데, 총 1600차례에 걸쳐 중국 일대에 살포된 독가스탄으로 인해 무려 57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 다른 731부대 더욱 놀라운 것은 이처럼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자행된 생체 실험 부대가 731부대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00부대(창춘), 8604부대(광저우),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516부대(치치하얼), 543부대(하이라얼),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부대들 역시 731부대와 비슷하거나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뒷받침 하는 역할을 했다(p. 162). 묻지 않은 범죄의 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의 만행은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계속된 패배와 8월 8일 구 소련의 선전포고로 인해 전쟁의 패망을 예견함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 731부대는 비밀리에 철수를 준비했다. 이시이 시로는 중요한 실험 자료만 일본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증거 인멸을 위해 모두 소각했다. 세균 연구실과 특별 감옥 등 731부대의 모든 건축물도 함께 폭파했다. 그리고 특수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실험 대상자들은 독가스를 살포하여 모두 살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세균 무기 연구와 생체 실험 문제로 재판이 열렸다. 모두가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는 악랄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이들은 대부분 죄를 묻지 않고 석방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731부대의 연구 자료들 때문이었다. 731부대는 오랜 시간 다양한 생체 실험을 한 끝에 수많은 연구 자료와 실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이 자료들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731부대의 연구 자료만 얻게 된다면 세계 의학계를 좌지우지하고 눈부신 의학 발전과 수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 실험 기록과 일본의 세균전 실험 자료 등을 넘겨받는 대가로 731부대 책임자들을 석방하게 된다.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치 의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비윤리적인 행위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부족하(p. 163)게나마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았고, 그들의 행위를 함께 지켜본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본보기 삼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진행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인 뉘른베르크 강령을 제정했다. 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들의 죄는 철저히 가려지고 숨겨졌다. 731부대의 주요 책임자들은 전후 일본의 고위 관직에 올랐고, 일본 정계 및 의료계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731부대에서 얻은 생체 실험의 결과를 활용하며 호위호식했다. 반성하지 못한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기타노 마사지와 나이토 료이치는 731부대 공개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 때, 전쟁으로 혈액이 부족해지자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비싸게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경제적 부를 얻게 된 두 사람은 일본 최대 제약사인 녹십자를 세우고 이후 에이즈 약해 사건(혈우병 환자들이 오염 된 혈액으로 만든 치료제 주사를 맞고 에이즈에 감염된 사건. 이 약으로 일본에서 1800여 명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그중 400여 명이 숨졌다)의 주범이 된다. 이처럼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역사는 언제든 다시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들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불편한 역사를 똑똑히 지켜보고 성찰해야 한다. 인간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줬다. 하지만 우리는 과(p. 164)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 과학이 인간을 희생시키며 나아가도 되는 거냐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개인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냐고 말이다. 이러한 성찰과 고민들은 우리가 자칫하면 잊기 쉬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과학의 길을 알려 줄 것이다(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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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인간의 모든 행위는 통제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