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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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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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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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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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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40대 초반의 케리어우먼이 유방암에 걸렸다. 이후 전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면서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 언젠가 암으로 진단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질병이든, 사고든, 죽음이든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삶의 길목에 선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철거덕 하고 닫혔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내던져졌다. ‘도대체 왜 내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가장 컸다. 2019년 12월,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SNS의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일과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 앞에선 나 역시 한없이 약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치료되지 않으면 어떡하(p. 5)지?, '전이되면 어떡하지?', '죽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그동안 고통이나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안온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경제적 어려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와의 이별, 허리 디스크와 같은 질병의 고통, 열정을 쏟았던 일의 중단 등 다양한 고통과 위기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기쁨과 행복,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삶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주가 내 삶 속에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암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암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암이 내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고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영영 무채색 같은 삶을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암 진단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과 행복과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여전히 삶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p. 6) 인생은 계속됐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는 삶도 내 인생이었고, 이 시간 또한 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기니 절망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어둠에서 나와보니,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강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암 진단 이전엔 지나치게 자아가 비대해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삶을 만들어야 만족했다면, 암 진단 이후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분이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훨씬 넓고 깊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항암-수술-방사선치료라는 3대 표준치료를 마친 나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 먹고 싸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알아버렸기에,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 잘 가고 한밤 중에 여러 번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유지만 되어도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크(p. 7)다.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동안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졌다. 그렇게 암은 내게 곰국처럼 진한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을 진단받고 처음의 내 모습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알아요."(p. 8). 밤 9시 반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여보세요. 양선아 씨죠? 저는 청주시 버스운전사인데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어요. 종점에서 버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지갑과 안경이 들어 있는 가방 주인 맞으시죠?" 세상에! 가방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으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후 2시 반께 버스에서 내렸으니, 가방이 온종일 버스 좌석에 놓여 있었을 텐데 아무도 가방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또 버스 기사님이 명함을 보고(p. 48) 연락을 해준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쳐 나는 기사님께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가방이 돌아왔어요! 가방도 돌아 오고 상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내일 항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항암 전날 대부분의 환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루 동안 급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그날 너무 피곤 해 '꿀잠'을 잤다. 버스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나비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날 나는 훈훈한 마음과 함께 친절과 배려, 정직의 미덕을 배웠다(p. 49).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방귀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배에서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 식구가 정말 질식사할 정도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 고통도 웃으면서 넘겼다(p. 65).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변비 특효약'을 떠올리셨다. 바로 키위! "선아야, 예전에 엄마도 수술했을 때 변비 때문에 엄청 고생한 적 있거든, 뭘 먹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키위 있잖아, 그 키위를 먹고 바로 시원하게 변을 봤어. 밤에 자기 전에 유산균을 먹고, 키위도 좀 먹어보자." 마트로 달려가 당장 골드키위를 샀다. 그리고 바로 키위 두 개를 흡입했다. 저녁에 유산균도 먹었다. 키위를 잔뜩 먹은 다음 날, 정확히 항암 뒤 7일째 되던 날이다. 그날도 아침 식사 뒤 키위를 먹고 있는데 신호가 왔다. 바로 화장실로 달렸다. 뿌지지지직....단단히 막혀 있던 변이 드디어 내 몸을 탈출했다. 쾌변이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행복감이 솟았다. 영유아 시기 아이들이 '배변 독립'을 할 때 이런 뿌듯함을 느끼려나.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그 날 이후 내 목소리도 낯빛도 달라졌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몸동작도 날렵해졌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웃고 다녔다. "이제 좀 살겠는갑네. 얼굴 보니까 살아났구만, 살아났어. 완전 다르네~"(p. 66). 남편이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항암 1차 이후 일주일, 똥에 죽고 똥에 산 한 주였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라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의 마지노선은 엄청 낮아졌고, 행복을 느끼는 빈도수는 늘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p. 67). 머리카락 빠지는 문제에 며칠 동안 부대끼면서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도 생긴다. 그래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기쁠 땐 제대로 기뻐하고 슬플 땐 제대로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 상실감으로 힘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시간이 너무 단축돼 편리했다. 머리를 말리거나 헤어스타일 고민할 필요 없이 비니 같은 모자만 쓰면 되니 간편했다. 또 기분 따라 가발로 헤어스타일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재밌었다. 원래 나는 모자도 좋아하는데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써보는 기회도 가질 수(p. 77)있었다. 더운 여름엔 비니만 간편하게 쓰고 시원하게 보내고, 겨울엔 가발로 따뜻하고 다채롭게 보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제는 새롭게 움튼 머리카락을 보며 또 다른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항암제 공격으로 두피 세포들도 힘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자란다. 1년 만에 미용실을 찾아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발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고 통쾌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구었던" 나무들이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이재무, 〈가을 나무로 서서〉, 《몸에 피는 꽃》, 창비, 1996)을 예고하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봄이 오고 있다(p. 78). 본 병원 의사와 면담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지만 한방 병원에서는 의사 면담을 30분 넘게 한다. 의사는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비급여 항목 치료가 많아 치료비가 비싼 만큼 암 치료 전문 한방병원 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담당 한의사는 상담 중 내가 눈물을 보이자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또 "지금은 울지만 백혈구 촉진제 맞으면 호중구 수치도 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비니 없나 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격리된 병실에서 후배가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봐요, 이렇게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힘내셔야죠"라며 격려해주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게는 '보약'이고 '치료제'였다(p. 84).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듯, 항암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을 수시로 만났다. 그때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혈관이 딱딱해지는 현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책이나 의사, 환우들에게 객관적인 정보 및 각종 경험담 수집)에 집중했다. 부작용 이야기를 들으니 굳이 무리해서 케모포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의사 의견대로 일단 팔 혈관으로 항암을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p. 115). 먹는 것이 고역인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먹방(먹는 방송)'이다. 항암 부작용으로 힘들어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나도 비로소 먹방 월드에 입성했다. 집에서는 친정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내 앞에 앉아 밥숟가락을 다 뜰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밥을 먹었다면, 병원에서는 먹방을 틀어놓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숟가락을 들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수미네 반찬〉, 〈신상출시 펀스토랑〉(p. 137), 〈맛남의 광장〉 등 먹방은 얼마나 다채롭고 끝이 없던지.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환호하고 맛을 즐기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과거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을 했고, 먹방은 상업적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다. 그런데 암 진단 뒤 혀의 감각을 잃고 매끼 챙겨 먹는 일이 고역이 된 뒤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껏 저렇게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먹은 적 있던가? 나는 나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렇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본 적 있던가?' 그동안 내게 식사 시간은 감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매 끼니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따라서 식사 시간은 내 시간을 빼앗는 무엇이었다. 취재원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음식보다는 취재원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하므로 음식을 먹 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은 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던가. 내가 먹는 것들은(p. 138) 내 세포를 만들고 몸 구석구석에 가서 내 몸과 마음이 잘 작동하도록 해주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병사 역할을 해준다. 그 고마운 음식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매끼 맛을 음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엄마가 정성들여 보내준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 139). 암 치료 관련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한다. '대사치료'의 대가 나샤 윈터스 박사는 저서 《대사치료, 암을 굶겨 죽이다》(처음북스, 2018)에서 암 치료에 있어 채소 섭취가 중요한 이유는 채소의 식물 영양소가 DNA 손상을 예방하고 결함이 있는 DNA를 복구시켜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이라는 질병은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해 통제 불가능하게 분열하고 신체 여러 부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DNA 손상을 예방해주는 채소를 평소 많이 챙겨 먹는다면 자연스럽게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윈터스 박사는 특히 십자화과 식물을 추천하는데, 십자화과 식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 콜리플라워, 콜라비, 무 등이 있다. 십자화과 식물은 우리 몸에서 잠재적인 발암물질을 제거하고 종양 억제(p. 141)" 유전자의 작용을 강화해준다고 한다(p. 142).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을 하고, 가슴 한쪽을 잘라낼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모든 일은 천둥 치듯 별안간 일어났고, 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내린 이 소낙비에 내 방식대로 대처해야 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편인 나는 비교적 빨리 암에 걸린 일을 수용했고, 항암치료라는 난관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8번의 항암 끝에 왼쪽 가슴을 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 그 느닷없는 삶의 '펀치'를 맞고 나는 한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p. 152)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감각을 마비시켜 비합리적인 사고를 확장시킨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지금 삶'마저 엉망으로 만든다(p. 153).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항암 8차를 하고 암의 사이즈를 줄여 부분절제를 하기를 원했던 나는 암 크기가 현격하게 줄지 않아 전절제를 해야 했다. 그 독한 항암제를 투입할 때도 씩씩하게 버텨온 나는 전절제 결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 더 슬퍼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어찌(p. 190)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최종 수술 결과를 보니 애초 발견된 암 외에도 그 옆에 제자 리암(암세포가 비정상적인 증식을 일으킨 부위가 상피 내에 국한 된 경우를 말하며 상피내암으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고 하니 전절제는 내게 딱 맞는 결정이었다. 제자리암은 유관이나 소엽의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아 덜 위험하다고 하지만, 제자리암이 또다시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분절제를 선택했다가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고 그 힘든 항암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봤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유방외과 의사의 전절제 결정은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섣불리 좋다 나쁘다 판단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나중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도 그 일로 되레 새로운 삶의 의미를(p. 191) 찾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보았다(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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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박완서 작가는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로서 여러 책을 읽었다. 하지만 사후 발간한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읽지 못한 나머지 책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한국전쟁 때 오빠를 잃었고, 57세 때 3개월 간격으로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잃었다. 이 고통을 글로 아로새기며 아픔을 삭였다. 작가의 고통은 수많은 책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 자기 삶을 책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유산이 될 것인가! 아무에게도 봉사하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 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설 쓰기를 이어간 것은 순전히 이기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에게 이 일은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 전신을 던진다는 것은 이기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p. 28)를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함이 있었기에 박완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살림에 치여, 그래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거 보여주었으면 됐지, 하고 그만두었을 일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요즘 여자들 글 쓰고 싶어들 하지요." 오한숙희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가 한 말인데, 제법 뼈 있게 들린다. 박완서가 중년에 맞이한 변화는 취미 하나 시작한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에게 등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여성동아〉 신인 작가상을 받은 후 글 몇 편 써보다 그만두었다면, 헛헛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p. 29).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인생 전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때이면서 사회와 문화가 자신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시기이지만, 인생 후반기는 주어진 규범과 사회적 인정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사는 시기라고 했다. 온전한 독립은 이때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사는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 후반기가 충만하지 못하다고 그는 말한다. 중년은 인생이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의 몸은 제법 공평하게 마흔 줄에 이르면 신호를 보낸다. 혹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으로 마흔이면 국가가 생애 전환기 건강검진 안내서를 챙겨서 보내준다. 평균 수명을 여든으로 본다면, 마흔은 인생의 딱 중간 지점이다. 작가 박완서도 딱 여든까지 살았다. 물론 누구나 그처럼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조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애 전환기에 한 번쯤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p. 35). 그것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예의라면 예외일 것이고, 그 인생의 주인인 자신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p. 36). 트라우마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와도 같다. 원한 있는 혼령들의 이야기가 많은 동양에서는 죽은 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귀들도 산 자를 통해서 해결을 보려 하므로 결국 트라우마는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이다. 트라우마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캐시 카루스 (Cathy Caruth)는 트라우마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서 반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괴롭힌다. 또한 트라우마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p. 89)에 반복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즉, 트라우마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경험에 대한 반복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사로잡는 기억이 반복해서 그것을 말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으며, 그 들음을 통해서 나의 트라우마는 타인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p. 90). 트라우마로서 박완서의 전쟁 경험은 1973년에 발표한 단편 〈부처님 근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증상들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특히, 떨칠 수 없는 그 기억이 어떻게 박완서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이 산 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자신이 실제로 느꼈던 것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았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게 박완서의 전쟁 경험 이야기들이 다른 어른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게 와닿는 이유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속성 때문이다. 박완서 자신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통해서 분단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고발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통일 주장도 직업이 될 만큼 분단 문제가 정치화되기만 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1981년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소감문에(p. 91)서 밝혔다. 박완서의 전쟁 경험의 핵심은 오빠의 죽음이다. 해방 후 잠시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오빠가 그 경력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어, 나머지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오빠를 기다렸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 살면서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꼈던 박완서는 큰 저항 없이 서울대 캠퍼스에 동원되어 몇 가지 일들을 했다. 그러나 이내 동조할 수 없어 슬쩍 빠졌는데, 서울 수복 후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심하게 심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서울이 수복된 후 오빠는 어찌어찌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이미 오빠는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박완서의 가족은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납북되었던 오빠가 한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시민증을 얻지 못해서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던 차에 친척의 도움으로 군속 신분으로 피난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부대에서 하루를 보내던 중 오빠가 사고(p. 92)로 양발에 총상을 당해 결국 온 가족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공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처음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리 피난을 독려하였기에 서울은 텅 비었고, 그 빈 도시에 그의 가족은 남았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는 텅 빈 서울에 남은 그가, 자신이 심문을 당하며 버리지 취급을 당한 것과 피난도 못 가고 서울에 자기 가족만 남게 된 이 기막힌 사연을 언젠가는 글로 쓰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박완서의 이러한 결의는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것을 증언하겠다는 욕구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p. 93)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p. 94). 마지막으로 박완서가 그 아름다움에 밤을 새웠다던,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t Lohfink)의 시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p. 136)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p. 137). 박완서는 갓 스물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넘나들었던 사선의 기억을 딛고 일가를 꾸려 자녀와 손자녀를 보며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57세의 나이에 남편과 아들을 다 잃으면서 다시 한 번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 후 그는 홀로서기에 주력(p. 160) 하면서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제는 조금씩 자신의 죽음도 준비했다. 그가 남기고 가고 싶어 한 것은 자식들이 품은 자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자신의 소유물도 남 기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부지런히 버렸다고 한다. 이는 소노 아야코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남편을 보내고 버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말을 2년 전 만났을 때 했다. 하지만 노년의 죽음 준비와는 다르게 중년의 죽음 준비에 생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과제일 것이다. 박완서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는 정신적 전성기는 전혀 늘어난 것 같지 않고 되레 후퇴한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이런 유치한 감정적 반응과 생각이 올라온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우리 시대가 어른보다는 같이 놀아줄 친구를 더 요구한다는 것도 어른 노릇을(p. 161)꺼리게 하는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성숙하게 사는 시기가 길어진 게 아니라 미숙하게 사는 시기만 늘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축복이기 힘들 것이다. 중년은 이 '한 사람의 몫' 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는 때이고, 그것이 중년의 죽음 준비가 가질 수 있는, 노년과는 다른 생산성이라고 생각한다(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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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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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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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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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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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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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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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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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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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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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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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 40대 초반의 케리어우먼이 유방암에 걸렸다. 이후 전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면서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 언젠가 암으로 진단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질병이든, 사고든, 죽음이든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삶의 길목에 선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철거덕 하고 닫혔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내던져졌다. ‘도대체 왜 내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가장 컸다. 2019년 12월,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SNS의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일과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 앞에선 나 역시 한없이 약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치료되지 않으면 어떡하(p. 5)지?, '전이되면 어떡하지?', '죽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그동안 고통이나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안온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경제적 어려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와의 이별, 허리 디스크와 같은 질병의 고통, 열정을 쏟았던 일의 중단 등 다양한 고통과 위기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기쁨과 행복,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삶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주가 내 삶 속에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암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암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암이 내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고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영영 무채색 같은 삶을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암 진단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과 행복과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여전히 삶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p. 6) 인생은 계속됐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는 삶도 내 인생이었고, 이 시간 또한 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기니 절망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어둠에서 나와보니,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강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암 진단 이전엔 지나치게 자아가 비대해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삶을 만들어야 만족했다면, 암 진단 이후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분이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훨씬 넓고 깊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항암-수술-방사선치료라는 3대 표준치료를 마친 나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 먹고 싸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알아버렸기에,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 잘 가고 한밤 중에 여러 번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유지만 되어도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크(p. 7)다.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동안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졌다. 그렇게 암은 내게 곰국처럼 진한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을 진단받고 처음의 내 모습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알아요."(p. 8). 밤 9시 반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여보세요. 양선아 씨죠? 저는 청주시 버스운전사인데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어요. 종점에서 버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지갑과 안경이 들어 있는 가방 주인 맞으시죠?" 세상에! 가방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으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후 2시 반께 버스에서 내렸으니, 가방이 온종일 버스 좌석에 놓여 있었을 텐데 아무도 가방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또 버스 기사님이 명함을 보고(p. 48) 연락을 해준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쳐 나는 기사님께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가방이 돌아왔어요! 가방도 돌아 오고 상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내일 항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항암 전날 대부분의 환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루 동안 급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그날 너무 피곤 해 '꿀잠'을 잤다. 버스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나비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날 나는 훈훈한 마음과 함께 친절과 배려, 정직의 미덕을 배웠다(p. 49).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방귀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배에서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 식구가 정말 질식사할 정도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 고통도 웃으면서 넘겼다(p. 65).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변비 특효약'을 떠올리셨다. 바로 키위! "선아야, 예전에 엄마도 수술했을 때 변비 때문에 엄청 고생한 적 있거든, 뭘 먹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키위 있잖아, 그 키위를 먹고 바로 시원하게 변을 봤어. 밤에 자기 전에 유산균을 먹고, 키위도 좀 먹어보자." 마트로 달려가 당장 골드키위를 샀다. 그리고 바로 키위 두 개를 흡입했다. 저녁에 유산균도 먹었다. 키위를 잔뜩 먹은 다음 날, 정확히 항암 뒤 7일째 되던 날이다. 그날도 아침 식사 뒤 키위를 먹고 있는데 신호가 왔다. 바로 화장실로 달렸다. 뿌지지지직....단단히 막혀 있던 변이 드디어 내 몸을 탈출했다. 쾌변이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행복감이 솟았다. 영유아 시기 아이들이 '배변 독립'을 할 때 이런 뿌듯함을 느끼려나.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그 날 이후 내 목소리도 낯빛도 달라졌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몸동작도 날렵해졌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웃고 다녔다. "이제 좀 살겠는갑네. 얼굴 보니까 살아났구만, 살아났어. 완전 다르네~"(p. 66). 남편이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항암 1차 이후 일주일, 똥에 죽고 똥에 산 한 주였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라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의 마지노선은 엄청 낮아졌고, 행복을 느끼는 빈도수는 늘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p. 67). 머리카락 빠지는 문제에 며칠 동안 부대끼면서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도 생긴다. 그래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기쁠 땐 제대로 기뻐하고 슬플 땐 제대로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 상실감으로 힘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시간이 너무 단축돼 편리했다. 머리를 말리거나 헤어스타일 고민할 필요 없이 비니 같은 모자만 쓰면 되니 간편했다. 또 기분 따라 가발로 헤어스타일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재밌었다. 원래 나는 모자도 좋아하는데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써보는 기회도 가질 수(p. 77)있었다. 더운 여름엔 비니만 간편하게 쓰고 시원하게 보내고, 겨울엔 가발로 따뜻하고 다채롭게 보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제는 새롭게 움튼 머리카락을 보며 또 다른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항암제 공격으로 두피 세포들도 힘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자란다. 1년 만에 미용실을 찾아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발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고 통쾌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구었던" 나무들이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이재무, 〈가을 나무로 서서〉, 《몸에 피는 꽃》, 창비, 1996)을 예고하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봄이 오고 있다(p. 78). 본 병원 의사와 면담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지만 한방 병원에서는 의사 면담을 30분 넘게 한다. 의사는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비급여 항목 치료가 많아 치료비가 비싼 만큼 암 치료 전문 한방병원 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담당 한의사는 상담 중 내가 눈물을 보이자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또 "지금은 울지만 백혈구 촉진제 맞으면 호중구 수치도 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비니 없나 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격리된 병실에서 후배가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봐요, 이렇게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힘내셔야죠"라며 격려해주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게는 '보약'이고 '치료제'였다(p. 84).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듯, 항암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을 수시로 만났다. 그때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혈관이 딱딱해지는 현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책이나 의사, 환우들에게 객관적인 정보 및 각종 경험담 수집)에 집중했다. 부작용 이야기를 들으니 굳이 무리해서 케모포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의사 의견대로 일단 팔 혈관으로 항암을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p. 115). 먹는 것이 고역인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먹방(먹는 방송)'이다. 항암 부작용으로 힘들어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나도 비로소 먹방 월드에 입성했다. 집에서는 친정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내 앞에 앉아 밥숟가락을 다 뜰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밥을 먹었다면, 병원에서는 먹방을 틀어놓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숟가락을 들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수미네 반찬〉, 〈신상출시 펀스토랑〉(p. 137), 〈맛남의 광장〉 등 먹방은 얼마나 다채롭고 끝이 없던지.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환호하고 맛을 즐기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과거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을 했고, 먹방은 상업적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다. 그런데 암 진단 뒤 혀의 감각을 잃고 매끼 챙겨 먹는 일이 고역이 된 뒤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껏 저렇게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먹은 적 있던가? 나는 나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렇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본 적 있던가?' 그동안 내게 식사 시간은 감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매 끼니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따라서 식사 시간은 내 시간을 빼앗는 무엇이었다. 취재원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음식보다는 취재원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하므로 음식을 먹 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은 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던가. 내가 먹는 것들은(p. 138) 내 세포를 만들고 몸 구석구석에 가서 내 몸과 마음이 잘 작동하도록 해주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병사 역할을 해준다. 그 고마운 음식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매끼 맛을 음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엄마가 정성들여 보내준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 139). 암 치료 관련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한다. '대사치료'의 대가 나샤 윈터스 박사는 저서 《대사치료, 암을 굶겨 죽이다》(처음북스, 2018)에서 암 치료에 있어 채소 섭취가 중요한 이유는 채소의 식물 영양소가 DNA 손상을 예방하고 결함이 있는 DNA를 복구시켜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이라는 질병은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해 통제 불가능하게 분열하고 신체 여러 부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DNA 손상을 예방해주는 채소를 평소 많이 챙겨 먹는다면 자연스럽게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윈터스 박사는 특히 십자화과 식물을 추천하는데, 십자화과 식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 콜리플라워, 콜라비, 무 등이 있다. 십자화과 식물은 우리 몸에서 잠재적인 발암물질을 제거하고 종양 억제(p. 141)" 유전자의 작용을 강화해준다고 한다(p. 142).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을 하고, 가슴 한쪽을 잘라낼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모든 일은 천둥 치듯 별안간 일어났고, 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내린 이 소낙비에 내 방식대로 대처해야 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편인 나는 비교적 빨리 암에 걸린 일을 수용했고, 항암치료라는 난관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8번의 항암 끝에 왼쪽 가슴을 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 그 느닷없는 삶의 '펀치'를 맞고 나는 한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p. 152)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감각을 마비시켜 비합리적인 사고를 확장시킨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지금 삶'마저 엉망으로 만든다(p. 153).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항암 8차를 하고 암의 사이즈를 줄여 부분절제를 하기를 원했던 나는 암 크기가 현격하게 줄지 않아 전절제를 해야 했다. 그 독한 항암제를 투입할 때도 씩씩하게 버텨온 나는 전절제 결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 더 슬퍼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어찌(p. 190)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최종 수술 결과를 보니 애초 발견된 암 외에도 그 옆에 제자 리암(암세포가 비정상적인 증식을 일으킨 부위가 상피 내에 국한 된 경우를 말하며 상피내암으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고 하니 전절제는 내게 딱 맞는 결정이었다. 제자리암은 유관이나 소엽의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아 덜 위험하다고 하지만, 제자리암이 또다시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분절제를 선택했다가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고 그 힘든 항암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봤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유방외과 의사의 전절제 결정은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섣불리 좋다 나쁘다 판단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나중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도 그 일로 되레 새로운 삶의 의미를(p. 191) 찾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보았다(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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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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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 박완서 작가는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로서 여러 책을 읽었다. 하지만 사후 발간한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읽지 못한 나머지 책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한국전쟁 때 오빠를 잃었고, 57세 때 3개월 간격으로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잃었다. 이 고통을 글로 아로새기며 아픔을 삭였다. 작가의 고통은 수많은 책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 자기 삶을 책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유산이 될 것인가! 아무에게도 봉사하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 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설 쓰기를 이어간 것은 순전히 이기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에게 이 일은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 전신을 던진다는 것은 이기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p. 28)를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함이 있었기에 박완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살림에 치여, 그래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거 보여주었으면 됐지, 하고 그만두었을 일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요즘 여자들 글 쓰고 싶어들 하지요." 오한숙희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가 한 말인데, 제법 뼈 있게 들린다. 박완서가 중년에 맞이한 변화는 취미 하나 시작한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에게 등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여성동아〉 신인 작가상을 받은 후 글 몇 편 써보다 그만두었다면, 헛헛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p. 29).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인생 전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때이면서 사회와 문화가 자신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시기이지만, 인생 후반기는 주어진 규범과 사회적 인정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사는 시기라고 했다. 온전한 독립은 이때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사는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 후반기가 충만하지 못하다고 그는 말한다. 중년은 인생이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의 몸은 제법 공평하게 마흔 줄에 이르면 신호를 보낸다. 혹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으로 마흔이면 국가가 생애 전환기 건강검진 안내서를 챙겨서 보내준다. 평균 수명을 여든으로 본다면, 마흔은 인생의 딱 중간 지점이다. 작가 박완서도 딱 여든까지 살았다. 물론 누구나 그처럼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조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애 전환기에 한 번쯤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p. 35). 그것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예의라면 예외일 것이고, 그 인생의 주인인 자신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p. 36). 트라우마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와도 같다. 원한 있는 혼령들의 이야기가 많은 동양에서는 죽은 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귀들도 산 자를 통해서 해결을 보려 하므로 결국 트라우마는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이다. 트라우마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캐시 카루스 (Cathy Caruth)는 트라우마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서 반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괴롭힌다. 또한 트라우마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p. 89)에 반복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즉, 트라우마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경험에 대한 반복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사로잡는 기억이 반복해서 그것을 말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으며, 그 들음을 통해서 나의 트라우마는 타인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p. 90). 트라우마로서 박완서의 전쟁 경험은 1973년에 발표한 단편 〈부처님 근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증상들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특히, 떨칠 수 없는 그 기억이 어떻게 박완서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이 산 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자신이 실제로 느꼈던 것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았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게 박완서의 전쟁 경험 이야기들이 다른 어른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게 와닿는 이유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속성 때문이다. 박완서 자신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통해서 분단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고발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통일 주장도 직업이 될 만큼 분단 문제가 정치화되기만 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1981년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소감문에(p. 91)서 밝혔다. 박완서의 전쟁 경험의 핵심은 오빠의 죽음이다. 해방 후 잠시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오빠가 그 경력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어, 나머지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오빠를 기다렸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 살면서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꼈던 박완서는 큰 저항 없이 서울대 캠퍼스에 동원되어 몇 가지 일들을 했다. 그러나 이내 동조할 수 없어 슬쩍 빠졌는데, 서울 수복 후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심하게 심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서울이 수복된 후 오빠는 어찌어찌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이미 오빠는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박완서의 가족은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납북되었던 오빠가 한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시민증을 얻지 못해서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던 차에 친척의 도움으로 군속 신분으로 피난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부대에서 하루를 보내던 중 오빠가 사고(p. 92)로 양발에 총상을 당해 결국 온 가족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공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처음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리 피난을 독려하였기에 서울은 텅 비었고, 그 빈 도시에 그의 가족은 남았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는 텅 빈 서울에 남은 그가, 자신이 심문을 당하며 버리지 취급을 당한 것과 피난도 못 가고 서울에 자기 가족만 남게 된 이 기막힌 사연을 언젠가는 글로 쓰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박완서의 이러한 결의는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것을 증언하겠다는 욕구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p. 93)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p. 94). 마지막으로 박완서가 그 아름다움에 밤을 새웠다던,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t Lohfink)의 시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p. 136)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p. 137). 박완서는 갓 스물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넘나들었던 사선의 기억을 딛고 일가를 꾸려 자녀와 손자녀를 보며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57세의 나이에 남편과 아들을 다 잃으면서 다시 한 번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 후 그는 홀로서기에 주력(p. 160) 하면서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제는 조금씩 자신의 죽음도 준비했다. 그가 남기고 가고 싶어 한 것은 자식들이 품은 자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자신의 소유물도 남 기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부지런히 버렸다고 한다. 이는 소노 아야코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남편을 보내고 버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말을 2년 전 만났을 때 했다. 하지만 노년의 죽음 준비와는 다르게 중년의 죽음 준비에 생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과제일 것이다. 박완서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는 정신적 전성기는 전혀 늘어난 것 같지 않고 되레 후퇴한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이런 유치한 감정적 반응과 생각이 올라온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우리 시대가 어른보다는 같이 놀아줄 친구를 더 요구한다는 것도 어른 노릇을(p. 161)꺼리게 하는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성숙하게 사는 시기가 길어진 게 아니라 미숙하게 사는 시기만 늘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축복이기 힘들 것이다. 중년은 이 '한 사람의 몫' 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는 때이고, 그것이 중년의 죽음 준비가 가질 수 있는, 노년과는 다른 생산성이라고 생각한다(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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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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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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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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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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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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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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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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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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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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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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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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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 40대 초반의 케리어우먼이 유방암에 걸렸다. 이후 전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면서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 언젠가 암으로 진단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질병이든, 사고든, 죽음이든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삶의 길목에 선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철거덕 하고 닫혔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내던져졌다. ‘도대체 왜 내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가장 컸다. 2019년 12월,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SNS의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일과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 앞에선 나 역시 한없이 약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치료되지 않으면 어떡하(p. 5)지?, '전이되면 어떡하지?', '죽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그동안 고통이나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안온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경제적 어려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와의 이별, 허리 디스크와 같은 질병의 고통, 열정을 쏟았던 일의 중단 등 다양한 고통과 위기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기쁨과 행복,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삶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주가 내 삶 속에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암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암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암이 내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고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영영 무채색 같은 삶을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암 진단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과 행복과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여전히 삶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p. 6) 인생은 계속됐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는 삶도 내 인생이었고, 이 시간 또한 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기니 절망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어둠에서 나와보니,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강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암 진단 이전엔 지나치게 자아가 비대해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삶을 만들어야 만족했다면, 암 진단 이후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분이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훨씬 넓고 깊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항암-수술-방사선치료라는 3대 표준치료를 마친 나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 먹고 싸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알아버렸기에,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 잘 가고 한밤 중에 여러 번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유지만 되어도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크(p. 7)다.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동안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졌다. 그렇게 암은 내게 곰국처럼 진한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을 진단받고 처음의 내 모습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알아요."(p. 8). 밤 9시 반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여보세요. 양선아 씨죠? 저는 청주시 버스운전사인데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어요. 종점에서 버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지갑과 안경이 들어 있는 가방 주인 맞으시죠?" 세상에! 가방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으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후 2시 반께 버스에서 내렸으니, 가방이 온종일 버스 좌석에 놓여 있었을 텐데 아무도 가방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또 버스 기사님이 명함을 보고(p. 48) 연락을 해준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쳐 나는 기사님께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가방이 돌아왔어요! 가방도 돌아 오고 상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내일 항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항암 전날 대부분의 환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루 동안 급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그날 너무 피곤 해 '꿀잠'을 잤다. 버스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나비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날 나는 훈훈한 마음과 함께 친절과 배려, 정직의 미덕을 배웠다(p. 49).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방귀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배에서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 식구가 정말 질식사할 정도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 고통도 웃으면서 넘겼다(p. 65).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변비 특효약'을 떠올리셨다. 바로 키위! "선아야, 예전에 엄마도 수술했을 때 변비 때문에 엄청 고생한 적 있거든, 뭘 먹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키위 있잖아, 그 키위를 먹고 바로 시원하게 변을 봤어. 밤에 자기 전에 유산균을 먹고, 키위도 좀 먹어보자." 마트로 달려가 당장 골드키위를 샀다. 그리고 바로 키위 두 개를 흡입했다. 저녁에 유산균도 먹었다. 키위를 잔뜩 먹은 다음 날, 정확히 항암 뒤 7일째 되던 날이다. 그날도 아침 식사 뒤 키위를 먹고 있는데 신호가 왔다. 바로 화장실로 달렸다. 뿌지지지직....단단히 막혀 있던 변이 드디어 내 몸을 탈출했다. 쾌변이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행복감이 솟았다. 영유아 시기 아이들이 '배변 독립'을 할 때 이런 뿌듯함을 느끼려나.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그 날 이후 내 목소리도 낯빛도 달라졌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몸동작도 날렵해졌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웃고 다녔다. "이제 좀 살겠는갑네. 얼굴 보니까 살아났구만, 살아났어. 완전 다르네~"(p. 66). 남편이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항암 1차 이후 일주일, 똥에 죽고 똥에 산 한 주였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라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의 마지노선은 엄청 낮아졌고, 행복을 느끼는 빈도수는 늘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p. 67). 머리카락 빠지는 문제에 며칠 동안 부대끼면서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도 생긴다. 그래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기쁠 땐 제대로 기뻐하고 슬플 땐 제대로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 상실감으로 힘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시간이 너무 단축돼 편리했다. 머리를 말리거나 헤어스타일 고민할 필요 없이 비니 같은 모자만 쓰면 되니 간편했다. 또 기분 따라 가발로 헤어스타일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재밌었다. 원래 나는 모자도 좋아하는데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써보는 기회도 가질 수(p. 77)있었다. 더운 여름엔 비니만 간편하게 쓰고 시원하게 보내고, 겨울엔 가발로 따뜻하고 다채롭게 보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제는 새롭게 움튼 머리카락을 보며 또 다른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항암제 공격으로 두피 세포들도 힘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자란다. 1년 만에 미용실을 찾아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발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고 통쾌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구었던" 나무들이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이재무, 〈가을 나무로 서서〉, 《몸에 피는 꽃》, 창비, 1996)을 예고하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봄이 오고 있다(p. 78). 본 병원 의사와 면담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지만 한방 병원에서는 의사 면담을 30분 넘게 한다. 의사는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비급여 항목 치료가 많아 치료비가 비싼 만큼 암 치료 전문 한방병원 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담당 한의사는 상담 중 내가 눈물을 보이자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또 "지금은 울지만 백혈구 촉진제 맞으면 호중구 수치도 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비니 없나 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격리된 병실에서 후배가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봐요, 이렇게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힘내셔야죠"라며 격려해주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게는 '보약'이고 '치료제'였다(p. 84).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듯, 항암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을 수시로 만났다. 그때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혈관이 딱딱해지는 현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책이나 의사, 환우들에게 객관적인 정보 및 각종 경험담 수집)에 집중했다. 부작용 이야기를 들으니 굳이 무리해서 케모포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의사 의견대로 일단 팔 혈관으로 항암을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p. 115). 먹는 것이 고역인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먹방(먹는 방송)'이다. 항암 부작용으로 힘들어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나도 비로소 먹방 월드에 입성했다. 집에서는 친정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내 앞에 앉아 밥숟가락을 다 뜰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밥을 먹었다면, 병원에서는 먹방을 틀어놓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숟가락을 들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수미네 반찬〉, 〈신상출시 펀스토랑〉(p. 137), 〈맛남의 광장〉 등 먹방은 얼마나 다채롭고 끝이 없던지.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환호하고 맛을 즐기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과거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을 했고, 먹방은 상업적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다. 그런데 암 진단 뒤 혀의 감각을 잃고 매끼 챙겨 먹는 일이 고역이 된 뒤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껏 저렇게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먹은 적 있던가? 나는 나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렇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본 적 있던가?' 그동안 내게 식사 시간은 감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매 끼니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따라서 식사 시간은 내 시간을 빼앗는 무엇이었다. 취재원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음식보다는 취재원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하므로 음식을 먹 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은 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던가. 내가 먹는 것들은(p. 138) 내 세포를 만들고 몸 구석구석에 가서 내 몸과 마음이 잘 작동하도록 해주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병사 역할을 해준다. 그 고마운 음식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매끼 맛을 음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엄마가 정성들여 보내준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 139). 암 치료 관련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한다. '대사치료'의 대가 나샤 윈터스 박사는 저서 《대사치료, 암을 굶겨 죽이다》(처음북스, 2018)에서 암 치료에 있어 채소 섭취가 중요한 이유는 채소의 식물 영양소가 DNA 손상을 예방하고 결함이 있는 DNA를 복구시켜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이라는 질병은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해 통제 불가능하게 분열하고 신체 여러 부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DNA 손상을 예방해주는 채소를 평소 많이 챙겨 먹는다면 자연스럽게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윈터스 박사는 특히 십자화과 식물을 추천하는데, 십자화과 식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 콜리플라워, 콜라비, 무 등이 있다. 십자화과 식물은 우리 몸에서 잠재적인 발암물질을 제거하고 종양 억제(p. 141)" 유전자의 작용을 강화해준다고 한다(p. 142).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을 하고, 가슴 한쪽을 잘라낼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모든 일은 천둥 치듯 별안간 일어났고, 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내린 이 소낙비에 내 방식대로 대처해야 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편인 나는 비교적 빨리 암에 걸린 일을 수용했고, 항암치료라는 난관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8번의 항암 끝에 왼쪽 가슴을 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 그 느닷없는 삶의 '펀치'를 맞고 나는 한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p. 152)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감각을 마비시켜 비합리적인 사고를 확장시킨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지금 삶'마저 엉망으로 만든다(p. 153).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항암 8차를 하고 암의 사이즈를 줄여 부분절제를 하기를 원했던 나는 암 크기가 현격하게 줄지 않아 전절제를 해야 했다. 그 독한 항암제를 투입할 때도 씩씩하게 버텨온 나는 전절제 결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 더 슬퍼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어찌(p. 190)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최종 수술 결과를 보니 애초 발견된 암 외에도 그 옆에 제자 리암(암세포가 비정상적인 증식을 일으킨 부위가 상피 내에 국한 된 경우를 말하며 상피내암으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고 하니 전절제는 내게 딱 맞는 결정이었다. 제자리암은 유관이나 소엽의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아 덜 위험하다고 하지만, 제자리암이 또다시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분절제를 선택했다가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고 그 힘든 항암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봤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유방외과 의사의 전절제 결정은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섣불리 좋다 나쁘다 판단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나중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도 그 일로 되레 새로운 삶의 의미를(p. 191) 찾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보았다(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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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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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 박완서 작가는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로서 여러 책을 읽었다. 하지만 사후 발간한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읽지 못한 나머지 책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한국전쟁 때 오빠를 잃었고, 57세 때 3개월 간격으로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잃었다. 이 고통을 글로 아로새기며 아픔을 삭였다. 작가의 고통은 수많은 책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 자기 삶을 책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유산이 될 것인가! 아무에게도 봉사하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 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설 쓰기를 이어간 것은 순전히 이기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에게 이 일은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 전신을 던진다는 것은 이기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p. 28)를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함이 있었기에 박완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살림에 치여, 그래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거 보여주었으면 됐지, 하고 그만두었을 일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요즘 여자들 글 쓰고 싶어들 하지요." 오한숙희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가 한 말인데, 제법 뼈 있게 들린다. 박완서가 중년에 맞이한 변화는 취미 하나 시작한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에게 등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여성동아〉 신인 작가상을 받은 후 글 몇 편 써보다 그만두었다면, 헛헛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p. 29).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인생 전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때이면서 사회와 문화가 자신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시기이지만, 인생 후반기는 주어진 규범과 사회적 인정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사는 시기라고 했다. 온전한 독립은 이때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사는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 후반기가 충만하지 못하다고 그는 말한다. 중년은 인생이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의 몸은 제법 공평하게 마흔 줄에 이르면 신호를 보낸다. 혹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으로 마흔이면 국가가 생애 전환기 건강검진 안내서를 챙겨서 보내준다. 평균 수명을 여든으로 본다면, 마흔은 인생의 딱 중간 지점이다. 작가 박완서도 딱 여든까지 살았다. 물론 누구나 그처럼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조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애 전환기에 한 번쯤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p. 35). 그것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예의라면 예외일 것이고, 그 인생의 주인인 자신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p. 36). 트라우마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와도 같다. 원한 있는 혼령들의 이야기가 많은 동양에서는 죽은 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귀들도 산 자를 통해서 해결을 보려 하므로 결국 트라우마는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이다. 트라우마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캐시 카루스 (Cathy Caruth)는 트라우마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서 반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괴롭힌다. 또한 트라우마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p. 89)에 반복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즉, 트라우마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경험에 대한 반복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사로잡는 기억이 반복해서 그것을 말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으며, 그 들음을 통해서 나의 트라우마는 타인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p. 90). 트라우마로서 박완서의 전쟁 경험은 1973년에 발표한 단편 〈부처님 근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증상들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특히, 떨칠 수 없는 그 기억이 어떻게 박완서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이 산 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자신이 실제로 느꼈던 것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았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게 박완서의 전쟁 경험 이야기들이 다른 어른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게 와닿는 이유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속성 때문이다. 박완서 자신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통해서 분단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고발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통일 주장도 직업이 될 만큼 분단 문제가 정치화되기만 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1981년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소감문에(p. 91)서 밝혔다. 박완서의 전쟁 경험의 핵심은 오빠의 죽음이다. 해방 후 잠시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오빠가 그 경력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어, 나머지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오빠를 기다렸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 살면서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꼈던 박완서는 큰 저항 없이 서울대 캠퍼스에 동원되어 몇 가지 일들을 했다. 그러나 이내 동조할 수 없어 슬쩍 빠졌는데, 서울 수복 후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심하게 심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서울이 수복된 후 오빠는 어찌어찌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이미 오빠는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박완서의 가족은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납북되었던 오빠가 한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시민증을 얻지 못해서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던 차에 친척의 도움으로 군속 신분으로 피난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부대에서 하루를 보내던 중 오빠가 사고(p. 92)로 양발에 총상을 당해 결국 온 가족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공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처음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리 피난을 독려하였기에 서울은 텅 비었고, 그 빈 도시에 그의 가족은 남았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는 텅 빈 서울에 남은 그가, 자신이 심문을 당하며 버리지 취급을 당한 것과 피난도 못 가고 서울에 자기 가족만 남게 된 이 기막힌 사연을 언젠가는 글로 쓰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박완서의 이러한 결의는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것을 증언하겠다는 욕구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p. 93)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p. 94). 마지막으로 박완서가 그 아름다움에 밤을 새웠다던,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t Lohfink)의 시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p. 136)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p. 137). 박완서는 갓 스물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넘나들었던 사선의 기억을 딛고 일가를 꾸려 자녀와 손자녀를 보며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57세의 나이에 남편과 아들을 다 잃으면서 다시 한 번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 후 그는 홀로서기에 주력(p. 160) 하면서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제는 조금씩 자신의 죽음도 준비했다. 그가 남기고 가고 싶어 한 것은 자식들이 품은 자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자신의 소유물도 남 기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부지런히 버렸다고 한다. 이는 소노 아야코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남편을 보내고 버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말을 2년 전 만났을 때 했다. 하지만 노년의 죽음 준비와는 다르게 중년의 죽음 준비에 생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과제일 것이다. 박완서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는 정신적 전성기는 전혀 늘어난 것 같지 않고 되레 후퇴한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이런 유치한 감정적 반응과 생각이 올라온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우리 시대가 어른보다는 같이 놀아줄 친구를 더 요구한다는 것도 어른 노릇을(p. 161)꺼리게 하는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성숙하게 사는 시기가 길어진 게 아니라 미숙하게 사는 시기만 늘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축복이기 힘들 것이다. 중년은 이 '한 사람의 몫' 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는 때이고, 그것이 중년의 죽음 준비가 가질 수 있는, 노년과는 다른 생산성이라고 생각한다(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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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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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3】 왜 그리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이 책은 독서법에 대한 책이다. 20년 전에 출판되어 이제는 절판되었다. 읽던 책에서 소개되어 대출해서 읽었다. 독서에 관심이 많다보니 종종 독서 방법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다. 여러 가지로 유익을 얻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알고 교육 수준도 높은데,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문맹은 없어졌으나 책맹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장벽 못지 않게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 역시 높다. 다만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곧잘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p. 35). 어느 가난한 시인이 있었다. 시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야 했던 시인은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벗들과 더불어 술 한잔을 걸친 시인은 귀갓길에 그 거지를 보았다. 술도 한잔 걸쳤겠다, 마음이 들뜬 시인은 그날만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머니를 뒤(p. 59)져 보았으나, 역시 동전 한 닢 없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몇 푼도 모두 술값으로 써 버린 터였다. 거지에게 줄 것을 찾던 시인은 가지고 있던 책 한 권을 주었다. 자신이 읽고 있던 인생론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를 지나칠 때마다 늘 적선을 하고 싶었는데, 이 몸도 가진 것이 없어 줄 것이 없구료. 내 가진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받으시오." 거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먹지도 못하는 이 따위 책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시인은 거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을 준 뒤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후, 늘 같은 자리에서 구걸하던 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을 조금씩 읽어 나가던 거지가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이다. 거지가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몸의 장애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장애 때문이었고, 그는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p. 60). 그러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개인적인 이유를 살펴보자면, 책은 개인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과 지혜를 제공한다. 인간은 고작해야 평균 70여 년을 산다. 인간의 경험이란 시간적으로 짧을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매우 협소하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한계란 너무도 분명한(p. 61) 것이어서 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체험한 인생의 경험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러나 독서가는 책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와 무한대로 만난다. 니체는 독서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나를 다른 사람의 학문의 혼 속을 거닐게 한다."고 했다. 독서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보편적인 범주 안에서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독서는 개인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한다. 그 지혜를 얻은 사람은 인생에서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으며, 인생을 의미있게 살 수 있다. 인간의 생은 짧고 그런 만큼 인간은 허무와 공허감에 빠지기 쉽다. 그런 인생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또한 책은 모든 영감과 상상력의 가장 기본적인 원천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영감과 상상력이 샘솟지 않는다. 설사 타고난 상상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금세 바닥난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이 보고 듣는 것만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p. 62)문이다. 다음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사회적인 이유는, 세계가 이미 지적인 영역을 통해 인식되고 있고 그 지적 패러다임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설명을 위해 '한국'을 예로 들어 보자. 현재 우리가 실감하는 한국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영토와 사람과 통치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단일 민족이라는 혈통주의와 피억압의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미래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의식이 한국인을 움직인다. 그런데 '혈통주의'와 '역사의식'은 머릿속에서 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실체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주의'와 '역사의식'이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이 존재하고 그를 바탕으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있고 그를 바탕으로 현실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명인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정신적 동물이고, 이미 수많은 정신적 재부들이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상, 백지와 같은 순수한(p. 63) 정신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공교육에서 배우는 내용과 상식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수용되는 내용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적으로 오염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지성인 것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는 '우중 사회'가 된다. 우중 사회 속의 개인과 집단은 언제라도 사회적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동참할 수 있다(p. 64).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보라 누구든지 책을 독파하지는 못한다. 어느 대목에 한참 머물며 음미했어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 보면 당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그 문장의 새로움에 깜짝 놀랄 때가 있지 않은가.- 발터 벤야민 나의 독서 편력에도 슬럼프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지적 슬럼프에 빠져 도무지 더 이상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읽어도 더 진전 되는 느낌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책을 들기는 했지만 내 안에서 어떠한 지적 욕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동안 의욕 없이 지내던 나는 마침내 어떻게든 이 슬럼프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지적 모색이 필요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모두 정리했다. 당(p. 84)시 나는 약 1,000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절반 가량의 책들을 내다 버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지적 모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릴 책을 골라내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의 정신을 박제화시키고 있다고 판단되는 책과 또 하나는 다시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책들이었다. 전자에는 소위 운 동권 사회과학서적들이 포함되었고, 후자에는 구입할 당시에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담론의 유효기간이 지난 책들이 포함되었다. 그렇게 책을 정리하고 보니,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책들이 남게 되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책들이었다. 결국 남는 책은 고전이었다. 그때 나는 고전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왜 고전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책을 버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 나로서는 매우 절박한 문제였으며 그런 과정이 결국은 나의 지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p. 85). 지적으로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책장에서 재독하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재독하고 싶은 책이 전체에서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독서 수준을 점검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재독하고 싶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좋은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수준 높은 독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책이 드물다면 독서 경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반드시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양서'를 얼마나 읽어 왔는지 스스로 평가해 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다음에 책을 살 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인가?' 라고 자문하고 책을 고른다면 한층 높은 안목으로 후회 없는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독하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점검하면 자신이 왜 열정적인 독서가가 되지 못하는지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읽고 버릴 책들만 읽는 사람이 고급 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나, 얼마 못 가서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p. 86)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반대로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 성취가 있었다는 것이며, 지적 성취가 있는 만큼 독서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p. 87). 독서는 기본적으로 저자와의 대화이다. 저자의 관심사와(p. 132) 독자의 관심사가 다르면 그 대화가 재미있을 리 없고, 억지로 읽는다고 해서 머릿속에 들어올 리도 없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소위 지성인들이 추천해 주는 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부족한 독자들은 학자연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책에 누구나 한번쯤은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서울대가 추천하는 책 100선' 이나 '한국의 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책 100선' 같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독서 목록에는 주로 고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권장 도서가 초보 독자들에게는 약이 아니라 심지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눈높이에도 맞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의 책을 억지로 읽으려 하면 책에 흥미가 생기기는커녕 '역시 나에게 책은 무리인가 봐.'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책을 멀리하게 된다. 고전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p. 133). 독서의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데 있다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만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다.-멀린 C. 위트록 "당신은 책을 왜 읽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책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독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목적만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학원 같은 곳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배움은 독서의 기능 중 하나이지 전부는 아니다. 독자들이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독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만족감을 준다. 독서는 지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p. 225)고, 감동은 정서적 공감과 이성적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정서적 공감을 할 때 울고 웃는다.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를 읽을 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닌 테스가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안타까움과 슬픔에 젖게 된다. 반면 성철 스님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때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교도소에서 살아 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부 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교회에서 찬송하는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 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이런 글을 읽은 우리는 종교와 귀천과 인간과 자연을 뛰어(p. 226) 넘은 정신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정신 세계는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조화롭게 융화 될 수 있는 화엄의 세계이자 선과 악의 경계도 사라진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은 냉철한 깨달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스님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읽혀져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p.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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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2】 외국의 젊은 장의사가 생각하는 죽음
- 미국의 젊은 장의사가 쓴 책이다. 미국은 장례식 때 시신을 단장해 조문객들에게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빼고 그 속에 방부제를 넣어야 한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례법이다. 저자는 수많은 장례를 치루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조건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버린다. 만약 죽음과 망자를 보고, 만지고, 잡을 능력이 있었다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p. 18). 몇 년 전에 우리 아버지는 낡은 86년형 포드 F-150의 범퍼에 "목사님이 장례식에서 거짓말하지 않게 살자!"는 스티커를 붙이셨다. 이 스티커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4,000건의 장례식을 치렀지만, 목사님이 고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신 고인이 천국에 있다는 추도 연설은 수없이 들었다. 목사님은 관대하고,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환상적인 설교를 만들어내곤 했다. 언젠가 신을 비롯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증오했던 어느 고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고인은 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을 좋아했어요. 밖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께서 바깥세상을 창조했으니까요. 이제 고인은 가장 넓은 바깥세상인 천국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차 범퍼에 붙여 놓았던 스티커에서처럼 목사님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들은 진심으로 고인이 신의 손길을 받기를 바란다(p. 38). 죽음은 우리의 생활을 잠깐 멈추게 만든다. 그렇다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에게 순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여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다. 크로노스를 잊고 카이로스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나는 홀로 차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며 그 순간을 맞았다. 할아버지를 기억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보고 그리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이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가끔은 삶을 잠깐 멈춰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마음으로 죽음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받아들이게 된 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애도하는 안식의 시간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p. 60). 쉽게 잊히고 무시되며, 매우 단출한 논리이다. 죽음을 많이 접할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망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죽음을 더 쉽게 수용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죽음과 아주 가까웠다. 현대에는 죽음과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이 너무 강해서 초월하기가 어렵다(p. 95). 사실 염은 단순히 체액을 바꾸는 작업이다. 즉 고인의 몸에서 피를 완전히 뺀 다음에 방부 처리가 된 용액으로 다시(p. 152) 채우는 것이다. 손가락을 자신의 목 오른쪽에 가만히 가져다 대보자. 심장 박동에 맞추어 경동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 동맥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목을 절개하고, 경동맥을 찾을 때까지 근육과 조직 사이를 훑는다(하지만 다른 동맥을 사용하는 장의사들도 있다). 경동맥 옆에는 경정맥이 있다. 염을 할 때는 이 두 가지 혈관을 모두 들어 올려서 분리해 묶고, 각 혈관에 작은 구멍을 뚫는다. 이 과정을 굳이 비유하자면 큰 볼 속에 스파게티 면을 담고 위에 토마토소스를 뿌려서 끈끈해진 면발 바닥 어딘가에 있는 펜네 스파게티면 하나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방부 처리를 위한 염 작업에 사용되는 기계는 매우 실용적이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Dr. Who)〉에 나오는 달렉(Dalck) 로봇처럼 생긴 이 기계의 이름은 포티 보이(Porti Boy)인데, 다른 재주라거나 스타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위쪽은 용액을 담는 용기로 되어 있고, 밑쪽엔 버튼이 달려 있다. 버튼을 돌리면 염을 위한 혼합액이 경동맥과 연결되어 있는 고무 튜브를 통해서 삽입된다. 포티 보이의 압력이 용액을 혈관으로 밀어 넣으면 경정맥으로 피가 빠져나온다. 도자기로 만든 염을 위한 테이블에 진홍색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진해졌다가 연해지기를 반복하면서 피가 넘실(p. 153)대는 모습은 맑은 가을날에 해가 지는 일몰을 저속으로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염 작업이 부담스럽지만, 훌륭하게 마무리된 염 작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기도 한다(p. 154). 나는 늘 죽음 가까이에 있고, 불임으로 고통받았다. 또 예레미야에 대한 줄리아의 사랑과 용기도 보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생명은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가 함께하는 매 순간, 아이와의 레슬링 한판, 함께 읽는 책 한 권, 함께하는 한 끼의 식사, 아이가 내게 하는 질문,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다. 심지어 어려운 시간에도 감사하며, 못된 행동에도 감사한다(아이만 못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못되게 행동할 때가 있다). 아이가 성질을 부릴 때, 투정이 도가 지나칠 때도 감사한다. 삶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고 있어서 나는 늘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마음은 피곤할 때, 퉁명스러워질 때, 인내심이 부족해질 때도 도움이 된다. 나는 절대 좋은 부모는 아니다. 하지만 죽음 가까이에 있고, 죽음을 알고 있어서 더 나은 부모가 된다. 아마도 삶의 고통과 상실을 알지 못(p. 246)했다면, 지금처럼 감사하고, 지금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처럼 현실에 충실하고, 지금처럼 예레미야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모든 면에서 나는 죽음이 가진 선함의 덕을 본 사람이다(p. 247). 어느 장의사의 열 가지 고백 우리 집은 대대로 죽음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지만, 10년 넘게 나는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나는 슬픔과 고통, 눈물, 콧물, 그리고 그보다 덜 매력적인 체액 주변에서 살고 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가야 하고, 장례식이나 묘지를 가장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날을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고, 맨 마지막으로 마무리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선택한 건 아니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결국 이 일을 갖게 된 데 감사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장의사라는 직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나 죽음의 의미 앞에서는 마음을 연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삶의(p. 249) 한계를 슬퍼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는 오히려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며, 자신에게 더 진실하고, 우리 주변에 더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이례적인 일을 하면 할수록 죽음이 가진 의미 열 가지를 배우고 믿게 되었다. 이 책의 독자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자들이 이 열 가지 의미를 되새기며, 죽음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이 공포가 아닌 경건함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죽음이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유산이며, 각종 뉴스를 통해 일반화된 인식이다. 사람들이 의료 기관과 전문적인 장의 시설에서 죽은 고인과 그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숨기면서 더 악화되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다. 죽음을 건강하게 이해하게 될 때,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 죽음은 길들일 수 없다.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열 수도 있고, 마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죽음으로 마음을(p. 250) 연 사람들은 온정·이해·용서, 그 외의 여러 가지를 위한 여지를 찾는다. 마음을 열도록 노력해보자. ▲ 죽음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로 치부할 수도 없다. 죽음이 만드는 특별한 공간은 시간을 멈추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잠깐의 휴식기를 만들어준다. 죽음의 안식일을 갖게 하고, 삶을 반추하고,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 천국이나 사후 세계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가치나 죽음의 가치를 축소하고, 무시하게 된다. 이곳 지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 이곳의 장점과 죽음이 가진 장점도 찾게 된다. 죽음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고, 감사하게 만든다. ▲ 죽음은 목소리가 없다. 죽음의 침묵을 받아들이면, 죽음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침묵을 받아들이자. 침묵을 채워야 할 필요는 없다 ▲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죽음을 부끄럽게 여기(p. 251)도록 만든다. 긍정적인 인식은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다. 배우고, 성장하고, 극복하면서, 타인과 나 자신에게 인내심을 갖도록 하자. ▲ 가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서의 경험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한다. 죽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는 에덴동산과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공동체에 의지하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 죽음은 거대한 우주와 같아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넘어서, 함께 모일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 ▲ 능동적으로 고인을 기억하다 보면 슬픔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 삶 속에 사랑했던 고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열심히 기억하자. 고인이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p. 252) 것을 기억하자. ▲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죽음을 수용하고, 죽음을 더 가까이하고,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때,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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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2】 외국의 젊은 장의사가 생각하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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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1】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 출판사에서 아마도 책 판매를 위해 “도망친” “철없는”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쓴 것 같다. 이들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 해외살이를 하러 간 것이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결혼했는데 무슨 철이 없는가? 오히려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3개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을 기록한 책을 흥미롭게 봤다. 자기가 살아보고 싶은 삶을 살고 있으니 후회는 없을 것 같다. 통장에 여유가 조금 생기니 마음의 여유도 조금 더 생겼다. 결혼 후 바로 여행을 못 간다고 징징대며 세상 탓을 했었는데, 2년 동안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보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현실감각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만약 그때 재테크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더라면, 비상 대책이 되어줄 그 무엇도 준비해놓지 않고 그대로 자동차 세계여행을 갔더라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돈이 문제가 되어 결국 6개월도 못 버티고 돌아 왔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아일랜드도 호주도,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말레이시아도 가보지 못한 채 한국에 취업해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코로나바이러스로 숨죽였던 2년이라는 기간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의 세계 모험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준 기회가 되었다(p. 31).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 부모님과의 갈등이 한창일 때 나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적었다. '가진 것을 놓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만, 그 두려움 보단 우리에게 들어올 새로운 것들에 대한 설렘이 더 크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보며 우리의 세계를 알록달록한 경험으로 겹겹이 쌓아가자.' 당연한 말이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우리가(p. 80)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리스크가 높은 삶을 선택했고,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처음에도 그랬 고,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이럴 것이다. 해외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이라는 불안, 남들처럼 살지 않고 방랑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불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시간이 지나니 점차 익숙해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 '자유에 대한 책임'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을 감당하는 마음이 더욱 단단해지길.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든 무사히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p. 81). "비자 나왔어! 이제 우리 돌아갈 수 있어!" 한국에 돌아온 지 2주 반 만에 말레이시아 비자가 나온 것이다. 진행상태가 30%에서 꿈쩍도 안 하기에, 크리스마스와 연말까지 한국에서 보낼 각오를 했었는데, 갑자기 80%까지 훌쩍 뛰다니. 나머지 20%는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뒤 해결해야 하는 거라 우리는 80%의 비자를 가지고, 다시 페낭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호화로웠던 제주에서의 7박 8일을 끝내고, 우리는 겨우 다시 페낭으로,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p. 195). 무비자로 들어와 다시 한국에 다녀와야 했던 비용 100만 원, 우린 그것을 '멍청비용 100만 원'이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페낭에서 호찌민으로, 호찌민에서 한국 부모님 댁으로 또 제주도로 갈 때의 우리는 그 심정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외국인이 해외에 살 때 무엇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비자이다. 우리는 이미 아일랜드에서 비자의 무서움을 겪어봤지만, 호주에서 너무 쉽게 비자를 얻어서인지, 가까운 나라이니 쉽게 줄 것이라고 생각한 오만함 때문인지 아무튼 말레이시아 비자를 얕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한국으로 쫓겨나서야 다시금 깨달은 비자의 중요성.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우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비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신중하게, 두 번 세 번 고민해서 결정하시길 바란다(p. 196). 영어는 결국 자신감이다. 그리고 기세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 외국인 앞에서 말을 못 하고 끝날 것이다.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다 알아듣는다. 그들은 우리가 원어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너 잘하고 있어! 그래그래 계속 해 봐!' 하며 응원하는 눈빛을 받기도 한다. 외국인이 더듬더듬 한국어를 할 때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자. 영어는 무작정 외국에 간다고 해서 느는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영어로 대화를 하는 자신감'을 배울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만 가지고 와도 8할은 성공이다. '내 영어는 완벽하지 않아'라고 생각해도 일단 말을 뱉어 보자. 그게 시작이 된다. 기억하자. 영어는 무조건 자신감!(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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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1】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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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0】 경험하지 못할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경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다. 단지 현상을 보고 추론해볼 뿐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전이의 사건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상징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죽음의 비밀에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큼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접근이 이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개별적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개별적인 동시에, 최후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서는 고유의 접근 방법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기에 그렇다(p. 38). 원초적 불안과 대상에 대한 경험은 근원적이고 존재를 뒤흔드는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 불안과 경험은 대부분 의식이 있는 현존재가 한계에 다다를 때 순수하게 일어나는 몸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경련, 불안, 가려움, 메스꺼움, 오한, 알레르기 반응, 경직으로 말이다.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안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나는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 누미노제의 불안을 느낀다. 드레버만은 신에 대한 원초적 불안을 언급하며, 이 불안에서 인간의 중요한 위기를 관찰한다. 이 위기는 다른 여러 위기들의 근간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불안과 함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p. 91)다. 내가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테러와 전쟁,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전염병과 고통, 마약 중독, 깡패와 폭력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기차를 놓칠까 봐 불안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혹은 '신 에 대한 두려움'은 모호하다는 다소 엉뚱한 대답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불안한 사건의 배경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니까 불안한 일들 뒤에 있는, 그 안에 내재된 원초적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육체적인 일차적 실존성에 위협을 느낀다.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원초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것, 압도적인 것, 탈출구가 없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불안의 대상이다(p. 92). 임종 준비란 죽어가는 사람의 내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이후에 그가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과정과 인지 감각의 변화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극받았던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제공했던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계속 머(p. 211)무르라고 말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를 떠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우리는 그들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의료 조치로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자아 안에 내재된, 곧 있을 결말을 미리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솔직한 대면을 통해 우리는 고통완화 단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심스레 꺼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임종 환자들 가운데 가끔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 번 더 '기운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요양원이나 그와 비슷한 시설로 보내라는 의료보험공단의 압박이 있음을 조심히 일러주어야 한다. 이를 전해들은 환자의 의료기에 갑자기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난다. 잠시 실망과 우울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죽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와 직면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 안에 있던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기 전에 숨을 거두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임종 준비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인도하는 도움의 손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제적인 한계가 종(p. 212)종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p. 213).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 전환이 우리에게 보여준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이다. 고통 완화 의사, 간호사, 간병인, 상담사 등의 의료 종사자들과 가족은 임종 환자들이 어느 순간에 그리고 언제든지 내적으로 다른 공간에 가 있다는 것을 귀담아듣는 게 좋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현세도 내세도 아닌 중립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곳에, 자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통과 실신에서 벗어난 다른 공간에 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 다. 죽음은 고통으로 삶을 채울 수도 있고 삶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으며 삶 전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할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거나 타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인 간은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고,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해, 죽음을 앞둔 현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죽음은 한마디로 강렬하고 극단적인 경험이다. 흔히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오산이다. 여기서 내가 자아 기능과 감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죽음을 설명했다면 나 역(p. 218)시 죽음을 왜곡했을 것이다. 가령 임종 환자를 병문안하러 온 한 방문객이 그의 고통이 안타까워 그 고통을 대신 젊어 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방문객은 극심한 고통에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면서, 숨쉬기도 힘겨워하면서 그를 대신해 '고생할 것' 같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실제로 고통에 시달리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로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은 상실된다. 종종 나는 이를 수면, 혼수상태 또는 마취와 비교해본다. 임종 환자들의 고통은 지속적이거나 우발적이지 않고 오히려 삶과의 이별 과정이나 변화를 향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의식을 갖고서 자기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는지, 결과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죽음을 수용하는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고통, 불안과는 무관하게 죽음의 상태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이 "괜찮아" "....좋아”라고 말한다(p. 219). 죽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 시공간을 넘어 - 좇고 있는 것은 궁극적, 신적인 완성임을 예감 할 수 있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마지막 비전과 반응을 살펴보면 나는 '최후의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한 일정한 앎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시간, 시간성과 현재, 현재성의 차원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동시성과 무시간성(영원)이라는 현존재 양식을 예고할 것이다. • 공간, 공간성의 차원이 변할 것이다: 많은 것들이 공간적인 무경계를 암시할 것이다. • 신체, 구체화, 경계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느낌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경계 없는 존재와 관계된 존재를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나는 존재자, 즉 실체와 에너지로서 이해되는 존재자라고 생각한다. • 중력에 대한 느낌이 변할 것이다: 신체적인 무게감은 와해되는 것처럼 보인다(p. 241). • 강렬함, 감성도 변할 것이다: 많은 것이 강도를 높인다는 걸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감각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적인 것이 배제되거나 무시되지는 않는다. • 좋거나 나쁘다는 식의 평가도, 방식도 사라질 것이다: 많은 것들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부분으로 쪼개지고 분열되었던 것들이 전체로 통합되는 것을 지시한다. • 의식: 무의식과 더불어 자아와 연결된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될 것이다.' • 기운, 분위기가 바뀔 것이다: 떠밀림에서 완성으로, 찾기와 기다림에서 발견으로, 대결에서 평온과 목표로, 불안에서 신뢰로 말이다. • 공동체: 죽어가는 사람들의 많은 표상들과 유대교, 기독교, 타 종교들에 산재한 텍스트는 분열이 집회, 공동(p. 242)체, 축제라는 새로운 질적인 특성으로 전환될 거라는 점을 암시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p.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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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0】 경험하지 못할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