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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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여전히 흥미로운 마음공부, 인생공부
    젊었을 때부터 심리, 상담은 흥미로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관련한 책들은 꾸준히 읽고 있다. 한때 심리나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책들은 흥미롭다. 재미있게 읽었다.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나이든 나로 살아갈 시간이 길어진만큼 다양한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진료실에서 10대 청소년부터 90대의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을 10대부터 90대까지 한평생 동안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이를 위해서는 8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여러 연령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10대부터 90대까지의 인생사를 전 체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20여 년 동안 이들의 삶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본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필요 한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과거의 나와 화해하자. 나이가 들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젊은 시절 왜 그렇게 살았는지 혹은 왜 그러지 못했는지 후회하거나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또 책망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해서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시절의 선택을 50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이를 먹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 시절보다 지혜로워졌다. 세상사를 보는 관점과 가치가 변했기 때문에 후회와 아쉬움은 당연하다. 그때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노력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50 이후에도 꿈을 가져 보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50대 이후에도 꿈이 필요하다는 것은 삶의 목표, 목적성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p. 39). 5060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고 싶다'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어떤 삶을 살고 싶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거나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여러 차례 장래 희망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때 품었던 꿈에 대한 관심이 식기도 하고 또 좌절되기도 한다. 이처럼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변할 수 있으며 이루지 못할 수 있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고수하던 사람은 그것이 좌절되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겠다는 목적, 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좌절을 잘 극복해 낼 수 있다. 그 좌절된 목표가 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은 나의 조건과 상황이 달라져도 삶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내 삶의 목표는 내가 발견한 마음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사람들과 나누고, 이를 통해 그들의 성장을 돕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진료를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그 목표는 내 삶의 중심을 잡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나이 듦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는 공부하는 자세이다. 노년의 공부는 새로운 지식이나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생에 대한 배움이다. 50 이후 자신을 이해하고 나이 듦에 대해 배우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성장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물론 용기를 내고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나이 듦과 관련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외모의 변화, 죽음, 은퇴, 신체 기(p. 40)능의 쇠퇴, 자녀의 독립,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나이 듦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것인가, 즉 나이 듦에 대한 태도이다. 내가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은 자녀를 포함한 인생의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늘 내가 걸어간 발 자국은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의 삶을 통해 배웠듯이 자녀들과 인생의 후배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인생과 나이듦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잘 나이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지 목표를 설정해 보자. 이것이 5060 이후 삶의 지향점이 되어 줄 것이다. 내 안의 소망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거나 글로 적어 보는 것은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것과는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다(p. 41).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반복되는 실패로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담받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들은 일견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삶의 영역은 좁아져 있고 인간관계도 소수의 친구나 가족에 국한된다. 성취와 성장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녀의 모습에 부모는 당황하고 안쓰러운 동시 에 화가 난다. 그런 자녀를 외면하고 눈감고 살거나 억지로 끄집어내 등 떠밀어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심각한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자녀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첫째,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을 선택한 자녀들에게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형제, 친구 누구라도 그를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둘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중요하다. 자신의 방 안에 숨어 버린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실패로 상처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마음을 열어 보인다. 셋째, 서로 간의 대화 즉 소통이 중요하다. 말로 하는 대화를 먼(p. 92)저 떠올리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심이다. 움츠러든 자녀는 그간 반복된 상처로 타인의 시선과 감정에 민감하게, 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아무리 친절한 말이라 하더라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진심이 전달되어야 마음을 열고 부모가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넷째, 자녀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자녀가 은둔하게 된 이유와 운둔의 상태는 다양하다. 일부는 비교적 단기간 지속되다가 스스로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와 달리 우울증이나 조현병처럼 비교적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잠복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은둔은 상당히 장기간 지속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 뒤늦게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다행이다. 하지만 일부는 이러한 은둔을 회복하지 못하고 후유와 장애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혹시 자녀의 은둔이 회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남겨 앞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봐서는 많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은 포기와 다르다.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가능한 성장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 그것을 통해 나름의 성장을 할 수 있다. 여섯째,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심해서 앞으로 경제 활동이(p. 93)나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라도 그 안에 도달 가능한 성장점이 반드시 있다.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삶의 기본이 되는 자조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스스로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하는 것을 돕고 빨래와 집 안 청소를 하는 것 등도 성장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일곱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때 자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이 치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에게 네가 문제가 있으니 그걸 고쳐야 한다라는 자세보다는 '부모와 가족 모두가 서로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지 배운다'는 마음으로 진료실을 찾아야 한다. 이런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압력에 시달려 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치료받는 것을 어린 시절에 부모 손에 이끌려 가기 싫은 학원에 갔던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진료받는 것을 자신이 부족하고 문제가 있으니 변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을 그들은 기민하게 알아 차리고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 자녀들이 치료를 거부한다면 우선 부모라도 먼저 전문가를 만나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향후 치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여덟째, 부모의 노력은 성실하게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를 하루 이틀 혹은 한두 달 실천하다가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실망하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p. 94)럴 때 '내가 이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너는 왜 달라지는 것이 없느냐' 혹은 '왜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기보다는, 내 마음 속에 현재 자녀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가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는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있다. 자녀에 대한 실망감, 미움, 분노, 화, 후회, 자책, 수치심,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식을 향해 미움을 느끼는 자신을 또 자책한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먼저 공감해야 한다. 인간이기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나의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 쏟아 내거나 억눌러서 우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의 꿈, 소망, 기대를 투영한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적인 자녀를 마음속에서 키워 온다. 이제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아 이를 떠나보내고, 내 앞에 있는 아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료실에서는 여러 유형의 부모를 만난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어머니들을 만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머니들 중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들은 자폐나 지적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다. 그분들은 성장의 한계를 예상할 수 있는 자녀들과 함께 평생을 걸어왔다. 수많은 실망의 날(p. 95)을 어떤 희망과 격려로 견뎌 오셨을까? 그분들은 매일 불행감에 압도되지 않고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 오셨다. 그것이 힘든 날들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은둔해 있는 자녀를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결국 부모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부모의 노력으로 자녀가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마음을 써서 노력해야겠지만 그런 노력이 점차 자녀와 삶을 대하는 태도로 정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녀의 상태가 어떻든 마음의 평화를 찾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과 자책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걸 보는 자녀들 역시 마음의 짐을 안게 된다. 부모가 먼저 현재의 상황을 받아 들이고 그걸 성장의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작은 의미와 행복을 매일의 삶에 추가한다면 물줄기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듯이 자녀와의 관계도 변화해 갈 것이며, 그 안에서 서로의 성장이 가능하다(p. 96). 사. 부부 싸움에는 여섯 명이 참전한다: 원가족의 그림자 부부가 싸움을 할 때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섯 명이 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여섯 명이란(p. 106)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두 사람의 부모를 뜻한다.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부부 싸움의 원인이 단순히 현재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각자의 원가족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부모와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갈등과 상처는 성인이 되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이로 인해 현재의 배우자에게 과거의 부모와 얽힌 감정과 갈등을 투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왜곡은 부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부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착각을 인식하고 걷어 내는 것이다.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사람 자체의 특성과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현재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부부 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성장이다(p. 107). 부부에게 외도 문제는 함께 극복해야 할 사건이다. 상처준 사람은 진정 어린 사과와 함께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보여야 한다. '성실하고 지속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한두 번의 사과로 사태가 일단락되기를 바라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다.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에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면 그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배우자를 공격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한다. 거친 감정 표현으로 부부 사이는 다시 갈등을 겪는다. 한두 번의 사과 후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처 준 사람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꺼내네요. 이제 그만할 만도 한데...도대체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재방송할까요?'라고 말한다. 배우자의 진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쌓여서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 상처받은 사람의 재방송은 멈출 것이다. 진정성은 외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늘 변함없는 진심 어린 태도만이 마이너스가 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다(p. 119).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타인과의 소통은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을 통한 소통이다. 말이 다 담지 못하는 감정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며 이것을 알아차리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공감적 대화는 갈등을 줄이고 관계의 질을 높여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준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겉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공감적인 대화가 반복되면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마찰이 생기고 대화가 단절 되기에 이른다. 그런 관계는 깊은 소통과 이해에 한계가 있고 친밀한 관계로 깊어지지 못해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소개한 하버드 대학의 성인 발달 연구는 친밀함으로 맺어진 좋은 관계가 좋은 인생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밝혀냈다. 50대 후반의 인생을 건강하고 의미 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가 중요하다. 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공감적인 대화가 필수적이다. 공감적인 대화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관계를 더욱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 50대와 60대가 감정과 공감을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감정적으로 성숙해지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중년 이후의 삶에서(p. 247)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p. 248).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이 줄어 들면서 이전보다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된다. 10대 아이들은 자신이 20대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30대와 40대에는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 본다.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미루며 산다. 하지만 50 이후에는 미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린 시절보다는 인생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인 생의 멋과 맛을 알게 되는 다른 이유이다. 무엇보다 50 이후에는 이전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어릴 때보다는 죽음이 공포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며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두렵긴 해도 한편으로는 매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삶'은 한 봉지의 비스킷이다. 비스킷을 개봉해서 먹기 시작할 때는 맛이 어떤지 몇 개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허겁지겁 먹는다. 비스킷을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TV를 시청하거나 다른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맛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러다 문득 비스킷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소중함과 아쉬움을 느낀다.그제야 비스킷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아껴 먹게 된다. 즉 나이가 들고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무한정하지 않으며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이별이 예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생(p. 259)을 이전보다 더 잘 음미하고 싶어지고 실제로 그럴 수 있게 된다(p. 260). 노년 초월성은 노화와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노년 초월성의 발달이 미약하면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중년기의 가치관, 신념, 관심사를 계속 유지하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동반되는 변화에 대해 저항하면 절망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나이 들어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운 삶의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다. 토른스탐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노년 초월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인구의 20% 정도만이 높은 수준의 노년 초월에 도달한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초월성을 키워 나가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초월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읽어 보면 짐작하겠지만 영적 성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것은 영적(p. 313)성장과 노년 초월이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명상과 마음 챙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기를 쓰는 것은 간단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은 노년 초월을 촉진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독서나 철학 탐구, 인문학 공부, 높은 수준의 초월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 종교 활동을 통한 영적 성장도 노년 초월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배우기, 사진 찍기 등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아 통합과 영적 초월을 도울 수 있다. 산책이나 등산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활동이나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여행을 하는 것도 좋다. 봉사 활동이나 재능 기부 등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활동이다. 친구나 가족, 혹은 동료와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불안을 줄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죽음 준비(유언장 작성, 장례 계획 등)는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남은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해 준다(p. 314). 어린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 맞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감추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지 않거나 그 주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아이가 그 상황을 이해하고 슬픔을 표현할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죽음을 당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열린 대화는 필요하며 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p. 315). 죽음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는 죽음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단계로서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만족스러운 노년기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노년기 삶 전체가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p.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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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7-04
  • 【북토크】 끊임없이 자기개발 하자
    모처럼 자기개발서를 읽었다. 매우 유익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독을 권한다. 당연함을 의심할 때 혁신이 시작된다 통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이 책이 통념에 저항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통념을 의심하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새로운 기회가 열리며 남다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속담은 통념의 대표적 집합체다. 오랜 세월 데이터가 축적(p. 15)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검증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통념이 늘고 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보자. 결혼보다 비혼을 선택하는 솔로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짚신도 짝이 있다면 결혼정보회사들이 성업할 리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은 더욱 그렇다. 가짜뉴스와 딥 페이크가 날뛰는 시대인데, 얼마든지 거짓 연기를 피울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제 통념에 저항해야 할까? 사업에서는 매출이 예전 같지 않을 때 통념을 의심해봐야 한다. 대부분은 "불황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불황 속에서도 잘되는 가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불황은 "기존의 상품, 서비스, 유통경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변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읽지 못한 채 낡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세상의 변화를 읽고,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그 변화에 맞춰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사업의 본질을 바꾸거나. 방법론에 혁신을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많은 통념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 변화하는 시대에 낡은 통념을 붙잡고 있는 한, 새로운 기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p. 16). 통념을 깨는 5가지 실천법 모든 변화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통념에 저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 한다. 1. 습관적으로 하는 일의 30%를 과감히 없애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불필요한 일을 정리하라. 가짜 일과 진짜 일을 구분하고,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재점검하라. 정리할 일을 4가지로 분류해보자. "하지 않아야 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나보다 남이 더 잘할 일". 이것들을 과감히 없애거나, 위임하거나, 외주를 주어라. 그리고 비로소 그 여유 공간에 새로운 도전을 채워 넣어라. 남들은 다 하는데 당신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 늘 하고 싶었지만 미뤄둔 일들을 시작하라. 2. 성공 경험에 안주하지 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고,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실패 위험도 커진다. 잘나가던 개인과 조직이 몰락하는 이유는 대개 잘못된 경험과 과도한 자기확신 때문이다. 해결책은 낯섦'을 찾아가는(p. 17)것이다. 비슷한 부류보다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 자신과 상관 없던 책이나 영상을 접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라. 딱딱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로 전환하라. 3. 생각의 자유를 지켜라 절대적 진리처럼 보이는 것도 의심하라. 모든 가설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라. 대중의 의견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라. 특히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을 경계하라. 확신이란 때때로 무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4. 안 했던 일은 새롭게 시작하고, 하던 일은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1818년 이전까지만 해도 정시 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화물선은 적재량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뉴욕의 해운사 블랙볼라인은 이 통념을 깼다. 벤저민 마셜은 엄청난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정시 출항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사업에서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길을 과감히 나서야 한다(p. 18). 5. 당연한 것을 의심하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함에 머무는 것보다는 당연을 의심할 때 사업의 기회를 볼 수 있다. 위기에 처했던 레고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함'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왜 레고는 움직이면 안 될까?", "왜 어른은 레고의 고객이 될 수 없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이 혁신의 시작이었다. 다만 기억하라. 모든 의문은 고객의 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처럼 통념에 저항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비즈니스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는 곳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가능 하다고 말하는 일에 도전했다. 심지어 회의 자료도 남들이 다 쓰는 파워포인트 대신 워드를 고집했다. 통념을 깨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p. 19). 7. 중간이 가장 위험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중간'을 선호한다. 강의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앞자리는 기피하고 뒷자리는 불안해하면서, 결국 중간쯤 자리를 잡는다. 이건 무리 속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이다. 하지만 이런 '중간 선호' 심리 가 직업 시장에서도 통할까?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과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값을 받지 못하고 끊임없는 원가 경쟁에 시달리다 결국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중간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강(p. 34)점, 즉 '나 아니면 안 되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중간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불안전한 자리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의 평균 키와 몸무게에 맞춰 제품을 만들면, 아무에게도 맞지 않는다. 평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엣지'가 있는가? 아니면 그저 수많은 진열대 위의 평범한 제품 중 하나같은 존재인가? 평균 뒤에 숨거나 안주하지 말라.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해 보이는 '평균'이 실은 가장 위험한 자리다. 차별화가 곧 생존이다(p. 35). 9. 좋아하는 일보다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자기계발 강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 그러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된다." 일리가 있고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 말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돈 버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 일이란 본질적으로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남의 돈을 정당하게 받아내는 과정이 즐거울 리 없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진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0.01%도 안 될 것이다. 그런 행운이 당신에게 올 확률은 무척 낮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대부분, 특히 젊은이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세상(p. 38) 모두가 힘들다고 할 때 기회가 있다. 경험도 부족한 20대에게 이런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무슨 일이든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기본적인 일조차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낭만을 즐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전략을 바꿔보자.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그리고 그 정반대 지점에서 당신의 진짜 열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실력을 쌓아라. 좋아하는 일은 그다음의 문제다(p. 39). 11. 글쓰기는 육체노동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회사원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일하는 작가다. 소설을 쓸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 작업한다. 오후에는 10km 달리기나 1.5km 수영을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아홉 시에 잠든다. 이 일과를 매일 반복한다. 긴 소설 쓰기는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하다. 신체적 강인함은 예술적 감수성만큼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연이어 히트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은 없다. 그저 44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은 것뿐이다.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p. 42). 여전히 달리기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달린다. 글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루키의 성 공 방정식은 단순하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글과 싸우는 것. 요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잘못된 통념도 많다. 가령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조용히 앉아 명상하면 글이 저절로 나올 것이라는 착각도 있다. 진실은 다르다. 글은 치열한 메모와 자료 수집의 전쟁터에서 태어난다. 밑천이 많아야 비로소 글이 나온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글은 온몸으로 쓴다는 사실이다. 영감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매일 아침 전장에 출전하듯 책상에 앉아 몇 시간씩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머리보다는 몸으로 하는 일이다. 작가는 지식노동자이자 육체노동자인 셈이다. 50권이 넘는 책을 쓴 나 역시 작년에만 5권을 출간했는데, 하루키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글쓰기는 지적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육체노동에 가깝다(p. 43). 18. 책 읽는 당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 유튜브, 틱톡 같은 영상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챗GPT 같은 AI가 순식간에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시대에 독서가 제공하는 고유한 가치가 더욱 빛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사고력을 기른다. 저자의 섬세한 유머 감각을 포착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과 문장을 만난다. 또한 읽은 내용이 머릿속의 다른 지식과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예상치 못한 통찰이 솟아나는 경험은 독서만이 선사하는 특권이다. AI는 우리에게 정확하고 즉각적인 답변을 제공하지만, 그(p. 56) 과정에서 우연한 실수로 얻는 영감이나 스스로 고민하며 발견하는 재미는 주지 못한다. 이는 마치 요리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것과 직접 요리를 실험하며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현대인의 독서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기회가 생긴다. 독서를 통해 얻는 깊이 있는 사고력과 창의적 통찰력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능력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곧 책 읽는 당신만의 강력한 차별화 포인트가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독서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탕누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문성이란 모르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능력이다. 그런 안목이 있어야 타인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이러한 전문가적 통찰력과 안목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디지털 시대의 홍수 속에서, 독서는 당신을 차별화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p. 57). 24. 사람은 바뀔 수 있는가?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의견은 갈린다. 변하지 않는다는 이도 있고, 변한다는 이도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처럼 견해가 나뉜다. 대부분 자기 경험에 기대어 판단하지만, 나는 '습관'을 바꾸면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일란성 쌍둥이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중 한 명은 술과 담배에 찌든 삶을 살고, 다른 한 명은 법정스님처럼 공부와 수행에 매진한다면, 그들을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겉모습만 봐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걸 보고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논어의 ‘성상근야, 습상원야’를 떠올린다(p. 68). 사람은 태어날 때는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비슷하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들이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 핵심은 바로 “배움, 학습"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책과 멀어진 사람과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워렌 버핏 과 찰리 멍거가 떠오른다.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은 워렌 버핏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주주총회에서 몇 시간 동안 다양한 질문에 통찰력 넘치는 답변을 쏟아낸다.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 역시 20년 넘게 책을 소개하고 써오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지만, 공부하면 변한다. 공부하면 유연해지고, 공부하지 않으면 고지식해진다. 변화의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p. 69). 28.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모르는 것 실패한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든다. 그것이 진실일까? 정말 그 사람의 역량이 출중한 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걸까? 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괘념치 마라. 세상이 알아준다고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너를 몰라준다고 네가 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p. 78). 나도 공감한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알아줄 만하니까 알아주는 것이고. 만약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아직 때가 아니거나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상품 광고와도 같다. 정말 좋은 상품은 광고가 필요 없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내고, 제품은 저절 로 팔린다. 반면 결함 있는 상품은 광고가 오히려 독이 된다. 단점이 더 빨리 드러나 시장에서 외면받기 때문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장관 후보가 되어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조용히 있었다면 모를 일을, 왜 자기를 드러내 저런 수모를 자초했을까? 스스로 한계를 알았다면 애초에 거절했어야 했는데.' 결국 진정한 실력자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실력을 쌓아갈 뿐이다. 때가 되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더 성장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p. 79). 29. 실패는 권장하되, 실수는 경계하라 혁신은 실패를 먹고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기에 실패를 권장한다는 얘기다.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패와 실수를 구분 하는 것이다. 흔히 실패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실수에 가깝다. 디테일이 부족하거나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 쓴맛을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 실패라기보다는 실수에 해당한다.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있지만, 두 번의 실수는 이미 습관이 된 것이다. 이런 실수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반면에 진정한 실패란 치밀한 준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p. 80)한다. 이런 실패는 오히려 혁신을 위해 필요하다. 새로운 시도에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교훈과 경험은 다음 도전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물론 아무리 가치 있는 실패라 해도 그 횟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실패가 반복되면 개인과 조직의 사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지인 중 한 명은 사회 초년에 크게 부도를 낸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처럼 실패가 주는 충격과 후유증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실수와 실패를 구분 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안일한 준비와 부족한 디테일에서 비롯된 실수는 단순한 시행착오에 불과하므로, 이는 철저히 예방해야 한다. 반면 치밀한 준비와 전략적 계획하에 시도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실패한 경우, 이는 오히려 혁신을 위한 값진 자산이 된다. 이러한 의미 있는 실패에서 얻은 깊이 있는 통찰은 다음 도전의 초석이 되며, 이런 경험들이 쌓여 결국 진정한 혁신의 발판이 된다(p. 81). 13. 착각도 때로는 약이 된다 인간은 왜 착각을 할까? 대부분 착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만, 착각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아는가? 《착각의 쓸모》(샹커 베단텀 지음, 반니)는 착각의 숨겨진 이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실제로 신체에 변화를 일으킨다. 미국 외과 의사 브루스 모슬리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그는 관절염 환자들에게 무작위로 플라시보 수술을 했다. 2년 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나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호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수술 자체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p. 114)사의 믿음직한 말 한마디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이 실제 치료 효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와인 실험도 흥미롭다. 싸구려 와인에 비싼 가격표를 붙여 마시게 했더니, 실제로 비싼 와인을 마실 때처럼 뇌의 쾌락 중추가 반응했다. 이는 현실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기만이 실제 신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자기기만은 불안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 때문에 착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닌, 생존의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 시스템의 복잡성, 불확실한 미래···이런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전진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적정 수준의 착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성과 조직의 리더들은 종종 '과도한 자신감'이나 '비현실적 낙관'이라 불릴 만한 착각을 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런 착각들이 만드는 미세한 균형점 위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는 완벽한 진실보다 유용한 착각을 선택했고, 그것이 인류를 지금까지 생존하게 만든 진화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결국 '적절한 자기기만'이야말로 우리가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가장 영리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p. 115). 16. 비결을 알면 오히려 성공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온갖 비결과 노하우가 넘쳐난다. 출세, 장사, 돈 버는 법, 인간관계, 건강, 행복 등 무엇이든 그에 대한 비법을 알려준다고 난리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든다. 이런 비결을 잔뜩 늘어놓은 사람들이 정말 그 분야에서 성공 한 사람들일까? 돈 버는 비결을 쓴 사람이 실제로 부자일까? 리더십에 대해 책을 쓴 사람은 진정한 리더일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비결을 접한 사람들이 과연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출세 비법을 읽고 그대로 따랐다고 해서 정말 출세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비결만 알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다. 어(p. 120)떤 일이든 전제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체력, 능력, 인품 같은 기본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은 채 비결만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이 만든 비결을 참고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비결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순 없다. 대신 기본에 충실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좌절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거치며 어느 순간 자신만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비결을 접한들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진정한 고수들은 남의 비결을 좇지 않는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깨달음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수될 수 없다. 마치 등산로를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해서 히말라야 정상 정복의 체험을 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비결이 아닌, 자신 만의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통찰이야말로 당신만의 비결이 된다(p. 121). 25. 과거의 성공이 독이 되는 순간 길을 걷다 "의사 전원 서울대 출신"이란 간판을 본다. 연대, 고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광고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저 병원, 내세울 게 학벌뿐이구나. 실력이나 경험, 환자 치료 결과 같은 진짜 중요한 걸 내세우지 못하니 낡은 타이틀로 포장하는구나." 명함에 무슨 학위를 잔뜩 늘어놓은 사람도 비슷하다. 왜 작은 명함을 그토록 복잡하게 만들까? 현재의 성과나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과거의 학위로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한 명사는 서울대 졸업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먼 훗날 당신이 진정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면, 서울대 졸업장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내세울 게 너무 많아서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p. 138)한다면, 서울대 졸업장이 유일한 자랑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여전히 학벌을 자랑하는가? 스카이 대학 나온 게 그렇게 뿌듯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좋은 대학 다닌 게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그건 꽤나 초라한 성장 궤적이 아닐까? 진정한 고수는 과거의 영광에 의지하지 않는다. 학벌이라는 허상을 내세울수록 현재의 공허함만 더 도드라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벌을 잊을 때, 과거의 성공을 내려놓을 때 당신의 진짜 실력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아이러니다(p. 139). 13.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은행권에서는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피크제를 적용한다. 공평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공평하지 않은 제도다. 또한 로테이션이라는 명목하에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수한 인력이 왔다가도 뚜렷한 주특기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반면 정치권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어 있다. 기업이라면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늘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현역이다 보니 실천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대교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성근(p. 176) 감독의 주장은 들어볼 만하다.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부터 원래 담겨 있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이런 것이 세대교체다. 컵에 있는 물을 전부 비우고 새로 넣는 게 아니다. 세상일은 원래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하는 것이고, 젊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한다. 가득염은 1969년생, 2007년 SK 왔을 때 내일모레 마흔이다. 그런데 4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경력이 많으니 위기에도 떨지 않고 대범하게 자기 볼을 던졌다. 한 마디로 나이 먹었다고 자르고, 젊다고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가득 같은 선수는 기용하고, 젊어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르라는 것이다. 컵에 있는 물을 쏟고 새 물을 채우는 대신 계속 새로운 물을 부으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젊기만 한 사람을 채우는 게 세대교체가 아니다. 제 역할을 잘하고 발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대교체다(p. 177). 19. 사과를 잘하는 사람의 연봉이 높은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과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강자는 사과를 잘하는 반면, 약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사과를 피하며 고집을 부린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I am sorry"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한다. 연봉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가 연간 2만 5천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사과를 한다 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느냐"는 질문에 연봉 10 만 달러 이상자의 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소득 구간이 낮아질수록 그 비율도 점차 줄어들어 2만5천 달러 이하 소득자의 경우 52%에 그쳤다. 이는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p. 188) 실수에서 배우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고소득자들은 보다 총명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경향이 있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조차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탈무드의 이 말은 사과와 성공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사과는 강자의 언어인 것이다. 오직 강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다. 사과는 과오를 끝내겠다는 의미이자, 과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과란 무엇일까? 사과는 '쏠 사'에 '과오 과'가 더해진 단어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 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사과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면에서 잘못했는지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과는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정작 자신은 빠져 있고, ,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는 사과가 아니라 변명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p. 189). 21. 몸이 마음을 결정한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나와 다른 나로 사는 건 효과도 없고 고통스러울 뿐 행복하지 않다." 이는 내가 한 때 의심 없이 믿었던 통념이었다. 그러나 백영옥의 칼럼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그 칼럼에서는 《프레즌스》의 저자 에이미 커디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에이미 커디는 19살에 자동차 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기억력 장애에 시달리며 움츠러들어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은 해법은 바로 "너 자신을 속여라"라는 것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움츠러든 어깨와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라(p. 194)고 조언한다. 즉,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라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찾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먼저 그려보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칼럼을 읽는 순간, 나는 골프선수 신지애의 일화가 떠올랐다. 슬럼프에 빠져 부진을 겪던 그녀에게 코치는 단 한 마디, "챔피언처럼 당당하게 걸으라"고 조언했다. 그 후 그녀는 본래의 기량을 되찾았다.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잘못된 모습을 진짜 자기 모습으로 여겨 거기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진정 되고 싶은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상상하고 마치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의 조언은 단순하다. "위를 보고 걷자."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걷는 대신,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보라. 그 걸음걸이 속에 당신이 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p. 195). 24. 굴러온 돌이 있어야 박힌 돌도 득을 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걸까? 아니다. 굴러온 돌은 정체된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역사를 살펴 보면, 개방적인 사회가 폐쇄적인 사회보다 더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어야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마케도니아 출신이란 이유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반면 로마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좋은 것이면 적의 것이라도 흡수 했고, 피지배민족인 그리스의 신들마저 받아들였다. 스페인은 달랐다. 순수한 사회를 지킨다며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배격했다. 처음엔 종교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모든 학문(p. 200)과 예술 분야로 확산되었다. 공포의 종교재판소가 커질수록 스페인은 역동성을 잃었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활력은 떨어졌다. 결국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두 종류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계속 드나드는 조직, 다른 하나는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도 않고 새로 들어오지도 않는 조직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 관이 후자에 속한다. 예전에는 대기업도 그랬지만, 공채제도가 사라지며 달라졌다. 이 두 조직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정체된 조직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은 고인 물을 빼고 새 물을 넣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며 반발한다. 하지만 박힌 돌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주기적으로 박힌 돌을 빼내고 굴러온 돌이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반짝이는 굴러온 돌들이 안주하는 박힌 돌을 자극해야 한다. 그때 박힌 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화하고 발전하거나, 물러나거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이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굴러온 돌이 계속해서 박힌 돌을 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조직은 발전한다(p. 201). 4. 인생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인사철이면 으레 승진자가 있는 만큼 퇴직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퇴직자들에게 소회를 물으면 너무 갑작스러워 당혹스럽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60을 앞둔 임원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남의 일로만 여겼던 퇴직이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몹쓸 병에 걸려도 사람들은 "하필 나한테 이런 병이 올 까?"라며 한탄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무슨 일이든 오늘 일어날 수 있다"Anything can happen today." 내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에게는(p. 222) 좋은 일만, 병은 없어야 하고, 내 자식들은 모두 잘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뜻밖의 일을 맞닥뜨리면 으레 'Why me' 라고 묻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말이다. 이는 잘못된 가정이고 잘못된 질문이다. 나만 피해 갈 수 있으리라 바라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누구에게나 비슷비슷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부자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병마가 비껴가는 건 아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받아 들여야 한다. 중요한 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를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다. 그래야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퇴직도, 질병도, 죽음도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죽음이 그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과,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삶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그때 우리는 "Why not me" 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을 지혜롭게 맞이하는 방법이다(p. 223). 16. 용서의 역설: 기억해야 자유로워진다 사람들은 종종 "다 잊고 용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마음먹은 대로 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다 잊었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아직 잊지 못했음을 뜻한다. 진정 잊었다면 떠 올릴 일조차 없어야 한다.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의미 있는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다. 잊힐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는 법이다. 까맣게 잊었 던 일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망각이란 우리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설령 잊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용서일까? 용서의 한자를 보면 "담다, 받아들이다"는 뜻의 '용'과 "마음이 같(p. 248)다"는 뜻의 '서'가 합쳐져 있다. 즉, 용서란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떠올려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셈이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우르술라 누버 지음, RHK)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용서하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지만 있어야 할 곳. 즉 과거로 추방된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현재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용서하려면 오히려 기억해야 한다. 자꾸 떠올리되, 원망이나 한탄에 빠지지 말고 객관적으로 바라 봐야 한다. 상처받은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의 입장도 헤아려 봐야 한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비록 그 행동이 잘못되긴 했어도, 그 심정만큼은 공감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밉기보다 불쌍해 보인다. 상대가 불쌍해지는 순간 내 마음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온다. 평정심이 생긴다. 그 일을 떠올려도 더는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 비로소 용서에 이른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불현듯 기억나도 아프지 않게 되는 것, 그(p. 249)것이 용서의 완성이다. 잊으려 하면 오히려 용서할 수 없다. 떠오를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용서하기 위해선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동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득 스쳐도 내 감정에 흔들림이 없다. 용서는 결국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평정심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참된 용서다(p.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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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7-04
  • 【북토크】 얼떨결의 은혜...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총신79회이신 이정훈 목사님이 37년 4개월의 목회 사역을 마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용신교회를 개척해 별 탈 없이 목회 여정을 보내고 그간의 사역을 돌아보는 책 ‘얼떨결의 은혜’를 출간했다. 얼떨결에 취재하러 가서 은혜로운 원로목사 추대, 위임목사 임직식을 보고 받아온 책을 몇 시간에 걸쳐 다 읽었다. 한 목회자의 일생, 목회 이야기를 몇 시간 만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책만이 줄 수 있는 혜택이다. 목사님의 좌충우돌 개척교회 목회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 모든 것이 목사님 표현처럼 ‘얼떨결의 은혜’였다. 영문으로 표현하면 An Unexpected Grace다. 담임목회 15년 하다가 중단하고 ‘얼떨결에 기자’가 된 내 입장에서 봐도 모든 것이 다 얼떨결의 은혜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시중 판매용이 아니기에 읽기를 원하시면 용신교회에 문의 전화해 보시기 바란다(031-409-7336). 이정훈 목사 원로목사 추대, 이믿음 목사 담임목사 위임, 출판감사예배 관련 기사 링크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583 3. 예수님을 만남 인쇄소 다니며 견습 과정을 거쳐 기술을 배워 정판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던 무렵, 이제 군 입대할 나이가 다가오던 1974년 가을, 직장을 마치고 올 때 집 앞에서 윗집 선배를 만났는데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 하는 전도를 받게 되었다. 선배의 만날 때마다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라" 하는 전도를 받으면서 마음 가운데 '교회 한번 나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75년 2월 2일 주일 아침에 윗집에 찾아가서 "오늘 교회 한 번 가보려고 한다." 고 하니 너무 좋아했다. 선배를 따라 처음으 로 교회 갔다. 첫날부터 교회가 너무 좋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날 처음 교회를 나간 날부터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 청년예배, 토요일 중고등부 예배 모든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심지어 주일 학교 예배도 나갔다. 누가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그날부터 새벽예배도 나갔다. 내게 교회 생활은 새로운 세상, 너무 좋았다. 교회가 좋으니까 교회 가는 날, 교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전에는 직장 중심으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교회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내가 직장을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상도 많이 받고 선배 기술자들이 '저놈은 지독한 놈이야 어떻게 젊은 놈이 놀러 다니지도 않나? 할 정도였다(p. 61). 교회를 다니면서 수요일 주일에는 직장이 아닌 교회를 우선으로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처음 교회 나온 나에게 청년회장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권면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이원세 청년회장은 당시 서울 대학을 다녔다. 50년의 세월이 지난 그는 변호사로서 사역하고 있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대뜸 반감이 들었고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죄 짓고 경찰서, 형무소 들어가는 그런 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안에서, 동네에서 '착하다'는 말을 듣던 나는 '죄에 대해서 회개' 하라는 말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청년회장은 이상하게 다음 주일에도 똑같은 말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나는 즉시 "지난 주에 말했는데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나에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안 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새벽 예배 때 체험하도록 하셨다. 나는 처음 교회 나가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즉시 새벽기도를 나갔다. 어떻게 예배드리는지도 몰랐기에 먼저 오신 성도님들을 보면서 따라서 했다. 성도님들은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p. 62). 그래서 나도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는 줄 알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우선 암송을 한 주기도문을 계속 암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교회에 오자마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는데 갑자기 환상으로 스크린 같은 것이 펼쳐지 면서 청년회장과 나의 대화 장면이 나오고 청년회장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하고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 스크린에 글자가 타이프로 치듯 글자가 쓰 였다. "죄란 무엇인가" 하면서 그 가운데 글자가 크게 두드러지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고 쓰였다. 나는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산 것이 죄구나" 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정말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듯 한동안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이 몰려왔다. 죄를 용서받은 죄사함의 평안이 마음에 넘쳤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을 들으면 감사의 눈물이 흘러넘쳤다.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가대도 서게 되었고 주일 학교 보조교사도 했다. 여름성경학교 때 나를 전도한 홍경산 선배가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할 전할 때 보조교사로 뒤에 앉아 은혜받으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p. 63). 9. 용신교회 개척 수원 창훈대교회에서 사무장,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무렵, 총신신대원 79회 동창 방종현 전도사가 수원 우만동 지역에서 출석한 강소를 찾고 있었는데 동창인 나에게 연락이 와서 들이 함께 지역을 돌아보며 개척 장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방종현 전도사가 함께 동역 개척하자는 제안에 내가 수락하였고 갑자기 교회 개척하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담임목사님인 한명수 목사님에게 상의를 못한 것을 보면 목사님이 외국 출타 중이든지 교회에 계시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의 했다면 목사님은 반대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전도사의 동역 개척은 교회부지는 내가 아는 집사님 땅을 빌리고 내가 아는 건축하는 집사님이 교회를 건 축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공 예배도 드리고 '다사랑교회'라는 교회 이름도 지었다. 반지하 본당에 위에는 똑같이 설계된 두 집이 지어졌고 가운데는 공동 서재도 만들었다. 성전을 짓고 개척 예배도 드리고 은혜롭게 공동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목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본래 교회 건축하고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방종현 전도사의 지인 권사님이 '개척하면 교회를 지어 주겠다'로 시작되었다(p. 90). 하지만 2400만원 든 건축비용에 못 미치는 1000만원 헌금만 해 주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200만원까지 해서 1200만원이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져 공동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수개 월이지만 교인들도 양분된 상황이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 방 전도사를 따라온 개척 멤버들, 그래서 방종현 전도사가 맡아서 교회를 잘 정리하기로 하고 나는 떠났다. 창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손충식 목사님이 목회하는 아주대 앞에 있는 경성교회로 옮겨 부교역자로 사역하게 되었다. 경성교회에서 청빙한 사역이 아니었기에 1년을 무보수로 사역했다. 그곳에서 강도사 인허도, 1987년 가을에는 목사안수도 받았다. 경성교회에서의 1년 사역은 비록 무보수에 어려운 여 건이었지만 청년부를 맡고 교회 여러 가지 사역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새해 1988년을 맞이하는데 손충식 목사님이 조용히 부르더니 "이 목사 개척을 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부 교역자로 내정해 놓은 친구 사역자가 있어 나까지 부교역자로 임명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혀 경험이 없는 나는 개척교회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경성교회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손 목사님과 함께 안산이라는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는 전도사님이 안산에 개척 교회를 하려고 지하실을 계약했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계약이 중단된 상태인 건물이었다. 안산 지금의 상록수역 근처 가구거리 중간쯤 되는 건물 지하였다(p. 91).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고 도로가 정비되고 건물이 몇 개 지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직 동네가 형성되지 않았다. 손 목사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야 전망이 좋다"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는 순간 속으로 말했다. '전망 좋으면 자기가 와서 하지 집도 몇 채 없고 동네도 없는데 무슨 전망이 좋아'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개척교회가 뭔지? 어떻게 개척교회를 해야되는지 모르지만 안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세 800만원인데 수중에는 전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6만원으로 계약했다. 우선 보증금 500만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창훈대교회 사모님께 500만원을 지인을 통해 빌려 달라고 부탁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100만원으로 지하실을 꾸몄다. 지하 3분의 1을 막아서 예배실과 사택을 꾸몄다. 지인의 도움으로 강대상과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1988년 1월 8일, 드디어 안산으로 이사 오는데 바람이 몹시 불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다섯 살, 이제 막 여덟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1988년 2월 24일이 개척 예배를 드렸다. 교회 명칭은 동네 지명을 따라서 지으려고 했는데 확정된 지명이 없었다. 당시 공사중이던 전철역이 '용신역'이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인 최용신 선생의 이름을 따서 용신역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이름을 '용신교회'로 지었다(p. 92). 막상 개통될 때는 '상록수역' 전철역이 되었다. 사람의 이름 보다 '상록수‘가 소설로 많이 알려졌기에 상록수역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도 감사한 것은 용신교회 이름은 전국에 단 하나뿐인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세워주신 용신교회, 이 용신의 이름 에는 아주 중요하고 좋은 세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얼굴 용자에 믿음 신으로 [믿음의 얼굴], 또 쓰일 용에 믿음 신으로 [쓰이는 믿음], 그리고 용신할 수 없을 만큼(마가복음 2장 2절)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뜻으로 정리했다(p. 93).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된 후 하나님은 더욱 부흥을 주셨다. 주일 낮 예배드리는 성도가 200명에 달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앞으로의 목회에 대한 비전을 구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보내 주신 교인들을 관리하는 관계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번에도 하나님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목회가 아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도전 을 주시면서 성도들을 영적 지도자로 세우는 「훈련 목회」를 시도하도록 하셨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양육, 훈련과정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NCD - 자연적 교회 성장을 만나게 하셨다. 독일의 슈바르트 박사가 교회의 영적 건강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셀 교회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한국교회의 셀 교회의 전파자라 할 수 있는 빌백햄 목사와 셀 교회 이론을 정리하여 셀 교회 아버지라 불리는 랄프 네이버 목사의 방한으로 「셀 교회」 컨퍼런스가 여러 차례 열렸다. 교회마다 목회자들 사이에 건강한 교회와 교회 본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p. 107).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세미나, 컨퍼런스, 소그룹 모임 등에 참석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 「셀 교회」의 비전을 품고 교회에 비전을 선포했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에게는 훈련받는 신앙생활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 파장으로 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났다. 그래도 성경적인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를 꿈꾸며 훈련과정이 시작되었다. 2년의 양육과정을 통해 성도들이 변화하는 것 같았다. 사명감에 불타고 뜨거운 열정들이 생기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셀리더 양육과정 1기를 마치고 졸업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나 2기, 3기, 4기 기수를 거듭할수록 양자는 줄어들었다. 결론을 말하면, 교회가 기도의 동역화, 전도 집중에 실패하면 무슨 프로그램도 열매 맺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변화될 줄 알았던 셀리더들은 원위치로 돌아갔다. 셀리더가 목회자의 마인드를 갖고 셀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전처럼 친교 모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셀 교 회에 대한 명칭이나 시스템은 그대로 사용하고 전통교회의 형태로 다시 돌아갔다. 성가대를 다시 세우고, 남전도회 • 여전도회 조직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용신교회 첫 장로님을 세우고 당회를 조직했다.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위해서였다(p. 108). 나는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도 체계적인 말씀 훈련도 영적인 체험도 없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래서 행인지 불행인지 뭔지를 모르고 그냥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대로... 그런데 하나님이 다 하셨다. 믿음대로 해 주셨다. 감사할 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p. 115). 22. 교회사역 마무리 새로운 사역의 출발 이제 2025년 6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우리 용신 교회에서 [이정훈목사 원로 추대식과 이믿음목사 위임식]이 진행된다. 이로써 1988년 2월 24일 용신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해 온 37년 4개월의 용신교회 담임목사의 사역을 내려놓는다. 많은 목사님이 교회 사역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하셨다'고 모두 말한다. 나 역시 '하나님이 용신교회를 시작하셨고 여기까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뿐이다. 1987년 목사 안수 받고 어느 교회에서도 사역자로 불러주지 않고 교회를 개척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게 된 교회 개척이었다. 그때 어느 교회든 어느 목사님이든 [우리 교회에 와서 사역을 하라]고 했다면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부교역자 사역을 했을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모르겠고 열심히는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전부니까. 그런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개척을 하게 하신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교회 개척을 하도록 다른 사역지를 주지 않은 것 같다. 용신 교회 37년 사역은 무엇도 모르고 무조건 이것저것 열심히 한 것 뿐이다. 열심히 배우러 다니고 열심히 가르쳤다. 좋다고 하는 것은 가서 배웠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쳤다. 물론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지만 열심히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p. 203). 성도들이 잘 배우든 못 배우든 나는 모른다. 나는 배운 것을 열심히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배우려 다니고 나와 같이 하고 싶은 것을 다 가르친 목회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상황, 받아들이는 분위기 등을 고려해서 나와 같이 훈련받았는데 교회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목회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목사님 판단에 배운 것이라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고 싶은데 교인들 의 반대로 가르치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목회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다면,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역에 힘을 낼 수가 있겠는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함께 훈련받고 미국 비전트립을 함께 다녀와서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교회 목회에 적용해 보려고 했다가 교회에서 쫓겨나는 상황도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이 배움을 허락한 모든 것을 다 가르쳤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고, 만족하고, 후회가 없다.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봤으니까. 누구도 방해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속으로, 뒤에서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좋아서, 원해서 배우고 따라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럼에도 목회자를 믿고 따라와 주어서 감사하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것을 거의 다 한 것 같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교회가 크게 부흥했을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p. 204). 때론 부흥하다, 때론 한꺼번에 떠나기도 했다. 한꺼번에 35명, 90여명으로 교인 수가 늘다가 두 번째 교회를 지을 때 한꺼번에 교인 33명이 떠났다. 어떤 때는 60명이 이렇게 저렇게 떠났다. 교인이 몰려오는 것도 한꺼번에 떠나는 것도 사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점 때문에 떠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어떤 성도가 우리 용신교회에 왔다가 떠났다. 이사 가야 할 형편 때문에, 교인 간에 시험이 들어서, 목회자의 목회 방향이 맞지 않아서 등등 많은 이유로 우리 용신교회를 왔다가 떠났다. 지금 37년의 목회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느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는 생각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찬송가 가사처럼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유기는 후 물로나 혹 불로나 정결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고백하며 목회 사역을 마무리할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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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북토크】고통에 대한 한 편의 심오한 설교와 같은 철학책
    한병철은 한국에 잘 알려진 재독철학자다. 그의 책은 여러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철학책이라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는 아니다. 깊이 생각하며 읽으면 많은 공감이 일어난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목회자들이라면 한 번 읽어봐야 할 것이다. 피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심오한 설교를 목적하는 목회자라면 철학책을 가까이하며 자신의 사상을 깊게 만들어야 한다. ‘값싼 은혜’와 같이 가볍고 값싼 설교가 너무 많아 공해가 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깊이 있는 설교가 그립다.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에른스트 융어의 이 구절은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p. 9).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규율주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사회에서 지시와 금지 혹은 처벌과 같은 부정성은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 혹은 자아실현과 같은 긍정성에 밀려난다. 훈육공간은 안락영역으로 대체(p. 20)된다. 고통은 권력 및 지배와의 모든 연관을 잃어버린다. 고통은 탈정치화되어 의학적 문제가 된다. 행복하라는 것이 새로운 지배공식이다.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는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주는데, 큰 비용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속된 자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줄 안다. 외부의 강제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자아실현을 하는 줄 알고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자유는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착취된다. 자유로우라는 말은 복종하라는 말보다 더 파괴적인 강제를 낳는다(p. 21).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 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피로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성적인 고통은 어떤 항의도 낳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의(p. 24) 피로는 나의 피로로 간주되고, 이런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이 피로는 혹사된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결합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화한다. 그러므로 이 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피로와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피로는 혁명을 막는 최상의 예방약이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행복을 사물화한다. 하지만 사실 행복은 더 큰 성과를 약속하는 긍정적 감정들의 합계 이상의 것이다.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 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격정은 고통과 행복을 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과 행복은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 있는 형제이며 쌍둥이 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p. 25)에 이르지 못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무한한 눈보라처럼 쏟아지고, 고통의 가장 강력한 번개 또한 그에게 떨어진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p. 26). 팬데믹에 직면한 생존사회는 부활절 예배마저 금지한다. 성직자들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마스크를 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신앙을 온전히 희생한다. 역설적이게도 이웃 사랑이 거리두기로 표현된다. 이웃은 잠재적인 바이러스 운반자다. 바이러스학이 신학을 무력화 한다. 절대적 해석주권을 획득한 바이러스학자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부활의 서사는 건강과 생존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자리를 내어준다. 바이러스 앞에서 신앙은 추락하여 익살극이 된다. 신앙은 중환자실과 인공호흡기로 대체된다. 매일 사망자 숫자가 집계된다. 죽음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 죽음은 삶을 비워서 생존으로 만든다(p. 29). 존재는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멂 속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가까움"을 들을 수 있다. 고통은 인간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에게 멈출 곳과 머무를 곳을 제공 해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고통은 인간의 현존재를 떠받쳐준다. 이 점에서 고통은 쾌감과 다르다. 고통은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p. 71)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멂이 가까워지게, 그리고 가까움이 떨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를 조정하여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에 조응하는 '정조',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p. 72).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 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p. 93). 역자 후기 고통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음을 불쾌한 감각, 감정 등으로 알려주고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경고 신호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고가 적절히 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을 확실히 낳으려면 고통은 분명히 느껴지고 의식되어야 한 다. 고통의 강도는 해결해야 할 문제의 심각성, 시급성에 비례해야 할 것이다. 고통이라는 신호가 부재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무시되면 그 신호가 가리키는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결국 치명적인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직접적인 고통이 지배수단으로 사용되었다(p. 101). 중세의 고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고문은 규율로 대체되었다. 처벌을 통한 통제 대신 규율을 통한 통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이런 규율사회는 오늘날 성과사회로 다시 바뀐다. 성과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착취하게 한다. 성과사회에 와서 지배의 비용은 최소화된다. 굳이 권력장치들을 운용하지 않아도, 굳이 고통을 수반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체제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스스로를 착취하면서도 이로 인한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고통을 건강을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고통은 약함의 징후로 여겨져서 부정되고 억압되고 은폐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고통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신호로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으로 간주할수록 고통 자체를 회피하려는 욕망은 강화되고, 우리는 작은 고통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민감성이 강화될수록 우리가 체감하는 고통은 오히려 커지며, 이에 따라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이 더 커지는 악순 환이 발생한다(p. 102). 고통을 회피하는 기술은 의학이 담당한다. 그래서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의학적 문제로 취급된다. 고통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의학은 고통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고통 자체만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데 집중하며, 이를 위해 진통과 마취의 방법을 적용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의학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긍정심리학"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세계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으로 여기는 긍정심리학은 고통을 초래한 현실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대신 심리적 조작을 통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동기부여 등으로 고통을 덮는 방법을 권장하며, 심리적 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진통제를 투입한다. 이렇게 긍정심리학은 고통의 원인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으며, 우리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킨다. 긍정심리학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를 가상의 매트릭스 안의 고통 없는 상태로 집어넣는 것이다. 이런 긍정심리학은 모든 고통의 원인을 개인 안에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은폐한다. 모든 고통은 너의 마음이 잘못되어서 생긴 것이니 너의 마음만 고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긍정심리학의 제1 명제다. 이런 긍정심리학은 고통의 원인인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사회적 문제를(p. 103)해결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회적 갈등이나 대결은 일반적인 고통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임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결 자체를 악으로 보고 그것들을 억압하면 그것들을 초래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심화된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은 고통을 온전히 제거할 수 없다. 집중적이고 전면적인 고통을 산만하고 흐릿한 만성적인 고통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고통은 우울을 낳는다. 고통은 일시적으로 억압될 수는 있지만,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의 징후인 고통을 회피하고 안락함과 쾌적함을 직접 추구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 진다. 안락함과 쾌적함은 익숙한 것 안에 머물 때 가능하며, 이질적이거나 낯선 것은 내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된다. 사회 안에는 이질적인 경험과 특성을 지닌 개인 및 집단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타자들"은 나의 안락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기피된다. 안락함이 목적일 때, 우리는 경험의 확장도, 세계에 대한 인식의 깊이도,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안락함의 온실 속에 머무르면서 바깥 세상이 온실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온실 바깥을 경험하(p. 104)는 것을 회피해야 할 고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 만의 온실에 머무르려는 욕망은 개인들을 자기중심적이 고 나르시시즘적으로 닫힌 공간 안에 고립시키고 개인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막으며, 이로써 사회 변화의 동력을 억압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온실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머무르기 원하는 온실을 지켜낼 수 없다. 그래서 의학과 긍정심리학에 마음의 조작과 진통 기술로 실재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을 무력화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저자는 팬데믹이 이런 개인들의 연대 상실과 고립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한다. 팬데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넣고, 우리의 관심을 생존에 집중시킨다. 팬데믹의 상황에서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여타의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진다. 삶의 의미는 오로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축된다. 긍정심리학이 만들어낸 고통 없는 매트릭스의 가상은 깨어지지만, 현실 감각의 복구에도 불구하고 좋은 삶과 나쁜 삶의 구별은 죽음이라는 위협 앞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좋은 삶에 필요한 사회적 교류도 기꺼이 희생된다. 이런 팬데믹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속도를 방해하지만, 자본주의 바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p. 105). 개인들이 공감과 연대로부터 더 멀어지고 서로 격리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잠시 느려지고 제한될 뿐이다. 상품미학은 우리의 안락함 추구에 영합하고 이런 추구를 강화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상품은 판매량의 증가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있고, 판매량을 증가시키려면 최대 다수 구매자들의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상품 미 학은 진정 새로운 미적 대상을 창조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기존 취향의 안전한 틀 안에 머무르면서도 추가 적인 구매를 유발하기 위해 가짜 새로움을 연출할 뿐이다. 이런 새로움은 "동일한 것의 변주"(15쪽)에 불과하다. 이렇게 고통에 민감하여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을 강 하게 느끼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사랑은 나와 이 질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이런 타자의 이질성은 내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욕망의 직접적 실현을 방해하거나 욕망과 충돌함으로써 내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고통의 억압과 은폐는 모든 변화와 발전과 창조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는 예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창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불만과 결핍의 의식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것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예술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가장 전형적으(p. 106)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기존의 것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하며 교란시킨다. 이렇게 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예술적 창조력 또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결핍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예술은 이런 불만과 결핍의 의식 없이는 창조력을 상실하고 만다. 고통과 예술의 이런 관계를 알고 있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창조를 위해 고통을 필요로 했고, 그래서 프루스트는 "고통이 나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은 일이다"(56쪽)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예술은 수용자에게 만족과 즐거움을 줄 것을 요구받는다. 예술 시장에서 그런 쾌감을 주는 작품들이 선호되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물론 고통이 예술적 창조를 낳는다고 해서 곧바로 고통 자체를 옹호할 수는 없다. 고통은 창조와 발전의 동력이다. 그러나 창조와 변화와 발전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목적인지는 불확실하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헤겔은 고통을 통해서만 정신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했고, 고통 이 없다면 예술적 창조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창조와 발전이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가치라면 창조와 발전의 계기인 고통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창조와 발전이 고통의(p. 107) 극복 혹은 제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면 고통 자체를 정당화할 근거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 을 것이다. 현실에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변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고통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통도 예술도 삶의 지속적인 동반자이며, 지속적인 변화의 동력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실제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주목함으로써 그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을 요구한다.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는 예술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고통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의식을 무력화하고 모든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 후 개인의 고통을 조작과 은폐를 통해 제거하는 것이 성과사회의 고통 처리 방식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개인들이 소마라는 알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현실과 무관한 행복감에 젖어 살아가 게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헉슬리의 디스토피아가 이미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판단일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경제력과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는 정도로 낮으며,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고통을 성공서사에 편입시키려는(p. 108)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분명히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디스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다. 고통에 대한 강한 의식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여전히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역설적인 판단은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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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6-24
  • 【북토크】 다른 인생을 느껴보는 한 방법, 소설 읽기
    소설은 잘 안 읽게 된다.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으로 한 권 혹은 몇 권을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소설을 멀리했다. 그러다 책을 읽다 추천한 소설을 가끔 읽는데 이 책도 그것이다. 교통 사고로 죽은 딸을 대신해서 성인식에 참석하는 부모 이야기(성인식), 치매 초기의 불편했던 어머니를 찾아가는 딸의 이야기(언젠가 왔던 길), 한 늙은 이발사의 회한(비다가 보이는 이발소)등 단편집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소설을 통해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소설을 읽는 한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기 인생 하나만 살기 때문이다. 소설은 가상의 남의 인생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를 준다. -성인식- 스즈네가 내 얼굴은 쳐다보지 않은 채, 이틀 만에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머플러가 화해의 표시인 듯하다. 나는 입가가 벌어지는(p. 14) 걸 참으면서 머쓱해서 오히려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래, 빨리 가. 20분밖에 안 남았다." 그것이 스즈네와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구두를 다 신기도 전에 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 속으로 혼자 뛰어나갔다. 말 그대로, 뛰어가고 말았다. '20분'은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날 후로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다. 교통사고였다. 스즈네는 신호가 없는 도로를 건너다 트럭에 치였다. 그때 재촉하는 말 대신 '너무 서두르지 마라.' '차 조심해라. 하는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을, 또는 머쓱해하지 말고 불러 세워 '아빠랑 저기까지 같이 가자'고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지금도 상상한다. 스즈네와 같이 집을 나서 버스 정거장 까지 함께 걸어가는 정경을. 상상 속의 스즈네는 발을 동동 구르듯 서둘러 걷고 있다. "빨리 가야돼, 나, 지각한단 말이야." 상상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이해심이 많다. "괜찮아. 아빠도 옛날에 툭하면 지각했어." 그리고 정문보다 가까운 담을 기어올라 운동장을 뛰어갔(p. 15)던 중학교 시절의 전과를 들려준다. 말을 바꾸고 장면을 바꿔가며 온갖 상상을 계속하지만, 스즈네는 무사하고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결말이다. 몇 초만 늦게 길을 건넜더라도, 아니 몇 초만 빨랐더라도 스즈네는 죽지 않았다. 현실의 나는 정거장에서 버스에 올라탔을 때,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노파가 혼자서 중얼 거렸다. "아침부터 왜 이리 시끄러워. 무슨 일이 생겼나." 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참 시끄럽네, 하고(p. 16). -언젠가 왔던 길- "있지, 기억나? 내게 했던 말." 엄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테레빈유를 사각 팔레트에 부어 물감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 자기 생활도 반듯하게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릴 자격도 살 자격도 없다고." 끝이 둥그런 붓을 쥔 엄마는 캔버스를 향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가라면 불필요한 색은 절대 칠하지 않는다. "잊었다고 하면 안 되지." 나는 그 말에 옭매여 살아왔다. 믿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 일하든(p. 87).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사생활도 엉망이 되는 법인가 봅니다. 제가 술을 좋아해서 말이죠. 취하면 주사가 심한 편이라. 어느 날부터 그만 마누라에게 손을 올려붙이게 된 겁니다. 말수도 적고 얌전한 여자였으니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없었지요. 말대답 하나 하지 않고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제가 던져 깨진 컵과 술병 조각을 묵묵히 치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 후학을 위한다 생각하시고 들어보세요. 말 수가 적고 얌전한 여자만큼 끔직한 것도 없더군요. 어느 날, 제가 상점회 친목 여행을 다녀와 보니 마누라가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옷가지와 소지품도 함께 말입니다. 쓰레기통에는 마권을 맞출 때마다 좋아하겠다 싶어서 제가 사다 준 스카프며 머리핀이며 액세서리가 죄다 버려져 있고 말이죠. 그리고 얼마 후, 아키타로 돌아간 마누라에게서 이혼서류가 날아왔습니다. 자식도 없었으니 주저 않고 도장을 찍었죠. 십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저와 그 사람, 거울의 이쪽과 저쪽에 있었던 거겠죠....서로 손을 내밀어봐야 반대쪽이나 악수(p. 122)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 혹시 가려운 곳은 없으신지요(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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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북토크】 나도 남극에 가고 싶다
    내 나이 60살. 아직 가보지 못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싶고, 남극에도 가보고 싶다.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큰 아쉬움도 없다. 지구 한 귀퉁이에서 꼬물꼬물 거리다가 사라질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 대신 가본 사람의 글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봤다. 갈 곳은 많은데 여력과 기회는 없고 인생은 참으로 짧다! 눈으로는 망원경을 바라보지만 머리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뭔가가 석연찮은지를. 그런 끝에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뼈아픈 사실'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태까지 해온 패턴대로 남극 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각심도 들었다. 남극은 원래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고, 기지는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들이 모인 일종의 '피난처'였다. 겨우 이틀 경험했고 심지어 여름인데도 당연히 추웠고 바람이 강했고 길은 매끈하지 않았다. 외출을 위해서는 늘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내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했고 내 생활은 모두와 결속되어 있었다. 익(p. 75)명 속에 시간을 보내며 종일 하는 말이란 "아이스라테 한 잔 주세요"뿐인 대도시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었다. 나는 그날 다이어리에 "공동생활"이라고 적고 "사람들은 지금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나를 알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오해가 쌓이지 않게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설명해야 한다고(p. 76). 에이레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 유령을 본 적이 있어" 하고 말했다. "유령을, 봤다고?" 나는 과거 시제를 강조하며 다시 물었다. 에이레네는 중성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마치 남극풍이 깃 든 것처럼. "응, 봤어?" 나는 유령을 믿지 않지만 유령이라는 단어를 좋아 한다. 그 텅 빈 존재가 지나갈 때 즉물적 사고에 빠져 있는 우리의 뒷덜미를 으스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으스스함으로 우리는 돌아보게 되고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 유령은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으레 유령들도 존재한다. 에이레네는 남극 곳곳에서 유령을 느꼈고 그것은 주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과 관련 있는 듯했다. 유령을 보았다는 말의 놀라움은 이후 떠난 이들에 대(p. 202)한 애도로 이어졌다. 사실 이곳에 온 내내 내 평온을 간섭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평전에서 읽은 대목인데 배가 좌초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선원들이 가까스로 육지에 닿자 공포에서 벗어난 긴장과 분노를 펭귄을 살생하며 풀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남극을 탐험한 대부분의 사람이 펭귄을 요리해 먹었지만 그 살생은 폭력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인간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그래서 위험의 정도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을 생명들은 오직 분노의 발산을 위해 희생되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대륙, 여름볕 아래 생동하는 오늘의 남극은 그런 죽음의 이야기들을 곳곳에 품고 있었다. 섀클턴은 유능한 리더십을 발휘해 선원 모두를 감동적인 귀환으로 이끌었지만 그중 몇몇은 고향에 돌아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육체는 남극에서 돌아왔지만 이곳에서 겪은 트라우마는 유령처럼 그들의 삶을 맴돌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남극은 그들의 고난을 품어주었지만 도시는 그를 인간세계 에 섞여들지 못하는 유령으로 만들었을지도(p. 203). 펭마는 지난번과 다르게 한적했다. 내가 젓갈 냄새라고 미화했던 펭귄 분변 냄새도 훨씬 덜했다. 조약돌을 소중히 모아 만든 젠투펭귄들의 집은 비어 있었다. 밀려(p. 280)난 게 아니라 스스로 떠난 길이었다. 더 큰 세상으로. 좀 더 걸어가니 절벽 쪽에 한 무리의 젠투펭귄들이 모여 있었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으면 3월 이건만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권도 개중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아기 펭귄들은 내가 들고 있는 등산 스틱을 톡톡 쪼았다. 뾰족한 부분이 내 부리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나름 다정한 인사를 한 거라고.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 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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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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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여전히 흥미로운 마음공부, 인생공부
    젊었을 때부터 심리, 상담은 흥미로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관련한 책들은 꾸준히 읽고 있다. 한때 심리나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책들은 흥미롭다. 재미있게 읽었다.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나이든 나로 살아갈 시간이 길어진만큼 다양한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진료실에서 10대 청소년부터 90대의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을 10대부터 90대까지 한평생 동안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이를 위해서는 8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여러 연령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10대부터 90대까지의 인생사를 전 체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20여 년 동안 이들의 삶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본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필요 한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과거의 나와 화해하자. 나이가 들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젊은 시절 왜 그렇게 살았는지 혹은 왜 그러지 못했는지 후회하거나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또 책망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해서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시절의 선택을 50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이를 먹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 시절보다 지혜로워졌다. 세상사를 보는 관점과 가치가 변했기 때문에 후회와 아쉬움은 당연하다. 그때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노력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50 이후에도 꿈을 가져 보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50대 이후에도 꿈이 필요하다는 것은 삶의 목표, 목적성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p. 39). 5060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고 싶다'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어떤 삶을 살고 싶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거나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여러 차례 장래 희망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때 품었던 꿈에 대한 관심이 식기도 하고 또 좌절되기도 한다. 이처럼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변할 수 있으며 이루지 못할 수 있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고수하던 사람은 그것이 좌절되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겠다는 목적, 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좌절을 잘 극복해 낼 수 있다. 그 좌절된 목표가 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은 나의 조건과 상황이 달라져도 삶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내 삶의 목표는 내가 발견한 마음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사람들과 나누고, 이를 통해 그들의 성장을 돕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진료를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그 목표는 내 삶의 중심을 잡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나이 듦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는 공부하는 자세이다. 노년의 공부는 새로운 지식이나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생에 대한 배움이다. 50 이후 자신을 이해하고 나이 듦에 대해 배우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성장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물론 용기를 내고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나이 듦과 관련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외모의 변화, 죽음, 은퇴, 신체 기(p. 40)능의 쇠퇴, 자녀의 독립,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나이 듦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것인가, 즉 나이 듦에 대한 태도이다. 내가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은 자녀를 포함한 인생의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늘 내가 걸어간 발 자국은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의 삶을 통해 배웠듯이 자녀들과 인생의 후배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인생과 나이듦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잘 나이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지 목표를 설정해 보자. 이것이 5060 이후 삶의 지향점이 되어 줄 것이다. 내 안의 소망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거나 글로 적어 보는 것은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것과는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다(p. 41).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반복되는 실패로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담받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들은 일견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삶의 영역은 좁아져 있고 인간관계도 소수의 친구나 가족에 국한된다. 성취와 성장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녀의 모습에 부모는 당황하고 안쓰러운 동시 에 화가 난다. 그런 자녀를 외면하고 눈감고 살거나 억지로 끄집어내 등 떠밀어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심각한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자녀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첫째,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을 선택한 자녀들에게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형제, 친구 누구라도 그를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둘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중요하다. 자신의 방 안에 숨어 버린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실패로 상처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마음을 열어 보인다. 셋째, 서로 간의 대화 즉 소통이 중요하다. 말로 하는 대화를 먼(p. 92)저 떠올리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심이다. 움츠러든 자녀는 그간 반복된 상처로 타인의 시선과 감정에 민감하게, 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아무리 친절한 말이라 하더라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진심이 전달되어야 마음을 열고 부모가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넷째, 자녀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자녀가 은둔하게 된 이유와 운둔의 상태는 다양하다. 일부는 비교적 단기간 지속되다가 스스로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와 달리 우울증이나 조현병처럼 비교적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잠복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은둔은 상당히 장기간 지속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 뒤늦게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다행이다. 하지만 일부는 이러한 은둔을 회복하지 못하고 후유와 장애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혹시 자녀의 은둔이 회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남겨 앞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봐서는 많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은 포기와 다르다.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가능한 성장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 그것을 통해 나름의 성장을 할 수 있다. 여섯째,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심해서 앞으로 경제 활동이(p. 93)나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라도 그 안에 도달 가능한 성장점이 반드시 있다.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삶의 기본이 되는 자조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스스로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하는 것을 돕고 빨래와 집 안 청소를 하는 것 등도 성장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일곱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때 자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이 치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에게 네가 문제가 있으니 그걸 고쳐야 한다라는 자세보다는 '부모와 가족 모두가 서로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지 배운다'는 마음으로 진료실을 찾아야 한다. 이런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압력에 시달려 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치료받는 것을 어린 시절에 부모 손에 이끌려 가기 싫은 학원에 갔던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진료받는 것을 자신이 부족하고 문제가 있으니 변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을 그들은 기민하게 알아 차리고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 자녀들이 치료를 거부한다면 우선 부모라도 먼저 전문가를 만나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향후 치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여덟째, 부모의 노력은 성실하게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를 하루 이틀 혹은 한두 달 실천하다가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실망하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p. 94)럴 때 '내가 이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너는 왜 달라지는 것이 없느냐' 혹은 '왜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기보다는, 내 마음 속에 현재 자녀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가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는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있다. 자녀에 대한 실망감, 미움, 분노, 화, 후회, 자책, 수치심,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식을 향해 미움을 느끼는 자신을 또 자책한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먼저 공감해야 한다. 인간이기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나의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 쏟아 내거나 억눌러서 우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의 꿈, 소망, 기대를 투영한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적인 자녀를 마음속에서 키워 온다. 이제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아 이를 떠나보내고, 내 앞에 있는 아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료실에서는 여러 유형의 부모를 만난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어머니들을 만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머니들 중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들은 자폐나 지적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다. 그분들은 성장의 한계를 예상할 수 있는 자녀들과 함께 평생을 걸어왔다. 수많은 실망의 날(p. 95)을 어떤 희망과 격려로 견뎌 오셨을까? 그분들은 매일 불행감에 압도되지 않고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 오셨다. 그것이 힘든 날들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은둔해 있는 자녀를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결국 부모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부모의 노력으로 자녀가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마음을 써서 노력해야겠지만 그런 노력이 점차 자녀와 삶을 대하는 태도로 정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녀의 상태가 어떻든 마음의 평화를 찾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과 자책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걸 보는 자녀들 역시 마음의 짐을 안게 된다. 부모가 먼저 현재의 상황을 받아 들이고 그걸 성장의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작은 의미와 행복을 매일의 삶에 추가한다면 물줄기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듯이 자녀와의 관계도 변화해 갈 것이며, 그 안에서 서로의 성장이 가능하다(p. 96). 사. 부부 싸움에는 여섯 명이 참전한다: 원가족의 그림자 부부가 싸움을 할 때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섯 명이 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여섯 명이란(p. 106)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두 사람의 부모를 뜻한다.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부부 싸움의 원인이 단순히 현재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각자의 원가족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부모와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갈등과 상처는 성인이 되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이로 인해 현재의 배우자에게 과거의 부모와 얽힌 감정과 갈등을 투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왜곡은 부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부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착각을 인식하고 걷어 내는 것이다.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사람 자체의 특성과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현재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부부 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성장이다(p. 107). 부부에게 외도 문제는 함께 극복해야 할 사건이다. 상처준 사람은 진정 어린 사과와 함께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보여야 한다. '성실하고 지속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한두 번의 사과로 사태가 일단락되기를 바라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다.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에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면 그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배우자를 공격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한다. 거친 감정 표현으로 부부 사이는 다시 갈등을 겪는다. 한두 번의 사과 후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처 준 사람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꺼내네요. 이제 그만할 만도 한데...도대체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재방송할까요?'라고 말한다. 배우자의 진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쌓여서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 상처받은 사람의 재방송은 멈출 것이다. 진정성은 외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늘 변함없는 진심 어린 태도만이 마이너스가 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다(p. 119).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타인과의 소통은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을 통한 소통이다. 말이 다 담지 못하는 감정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며 이것을 알아차리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공감적 대화는 갈등을 줄이고 관계의 질을 높여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준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겉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공감적인 대화가 반복되면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마찰이 생기고 대화가 단절 되기에 이른다. 그런 관계는 깊은 소통과 이해에 한계가 있고 친밀한 관계로 깊어지지 못해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소개한 하버드 대학의 성인 발달 연구는 친밀함으로 맺어진 좋은 관계가 좋은 인생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밝혀냈다. 50대 후반의 인생을 건강하고 의미 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가 중요하다. 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공감적인 대화가 필수적이다. 공감적인 대화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관계를 더욱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 50대와 60대가 감정과 공감을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감정적으로 성숙해지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중년 이후의 삶에서(p. 247)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p. 248).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이 줄어 들면서 이전보다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된다. 10대 아이들은 자신이 20대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30대와 40대에는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 본다.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미루며 산다. 하지만 50 이후에는 미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린 시절보다는 인생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인 생의 멋과 맛을 알게 되는 다른 이유이다. 무엇보다 50 이후에는 이전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어릴 때보다는 죽음이 공포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며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두렵긴 해도 한편으로는 매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삶'은 한 봉지의 비스킷이다. 비스킷을 개봉해서 먹기 시작할 때는 맛이 어떤지 몇 개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허겁지겁 먹는다. 비스킷을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TV를 시청하거나 다른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맛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러다 문득 비스킷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소중함과 아쉬움을 느낀다.그제야 비스킷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아껴 먹게 된다. 즉 나이가 들고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무한정하지 않으며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이별이 예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생(p. 259)을 이전보다 더 잘 음미하고 싶어지고 실제로 그럴 수 있게 된다(p. 260). 노년 초월성은 노화와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노년 초월성의 발달이 미약하면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중년기의 가치관, 신념, 관심사를 계속 유지하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동반되는 변화에 대해 저항하면 절망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나이 들어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운 삶의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다. 토른스탐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노년 초월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인구의 20% 정도만이 높은 수준의 노년 초월에 도달한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초월성을 키워 나가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초월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읽어 보면 짐작하겠지만 영적 성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것은 영적(p. 313)성장과 노년 초월이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명상과 마음 챙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기를 쓰는 것은 간단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은 노년 초월을 촉진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독서나 철학 탐구, 인문학 공부, 높은 수준의 초월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 종교 활동을 통한 영적 성장도 노년 초월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배우기, 사진 찍기 등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아 통합과 영적 초월을 도울 수 있다. 산책이나 등산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활동이나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여행을 하는 것도 좋다. 봉사 활동이나 재능 기부 등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활동이다. 친구나 가족, 혹은 동료와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불안을 줄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죽음 준비(유언장 작성, 장례 계획 등)는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남은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해 준다(p. 314). 어린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 맞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감추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지 않거나 그 주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아이가 그 상황을 이해하고 슬픔을 표현할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죽음을 당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열린 대화는 필요하며 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p. 315). 죽음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는 죽음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단계로서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만족스러운 노년기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노년기 삶 전체가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p.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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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7-04
  • 【북토크】 끊임없이 자기개발 하자
    모처럼 자기개발서를 읽었다. 매우 유익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독을 권한다. 당연함을 의심할 때 혁신이 시작된다 통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이 책이 통념에 저항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통념을 의심하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새로운 기회가 열리며 남다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속담은 통념의 대표적 집합체다. 오랜 세월 데이터가 축적(p. 15)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검증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통념이 늘고 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보자. 결혼보다 비혼을 선택하는 솔로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짚신도 짝이 있다면 결혼정보회사들이 성업할 리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은 더욱 그렇다. 가짜뉴스와 딥 페이크가 날뛰는 시대인데, 얼마든지 거짓 연기를 피울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제 통념에 저항해야 할까? 사업에서는 매출이 예전 같지 않을 때 통념을 의심해봐야 한다. 대부분은 "불황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불황 속에서도 잘되는 가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불황은 "기존의 상품, 서비스, 유통경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변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읽지 못한 채 낡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세상의 변화를 읽고,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그 변화에 맞춰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사업의 본질을 바꾸거나. 방법론에 혁신을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많은 통념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 변화하는 시대에 낡은 통념을 붙잡고 있는 한, 새로운 기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p. 16). 통념을 깨는 5가지 실천법 모든 변화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통념에 저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 한다. 1. 습관적으로 하는 일의 30%를 과감히 없애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불필요한 일을 정리하라. 가짜 일과 진짜 일을 구분하고,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재점검하라. 정리할 일을 4가지로 분류해보자. "하지 않아야 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나보다 남이 더 잘할 일". 이것들을 과감히 없애거나, 위임하거나, 외주를 주어라. 그리고 비로소 그 여유 공간에 새로운 도전을 채워 넣어라. 남들은 다 하는데 당신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 늘 하고 싶었지만 미뤄둔 일들을 시작하라. 2. 성공 경험에 안주하지 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고,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실패 위험도 커진다. 잘나가던 개인과 조직이 몰락하는 이유는 대개 잘못된 경험과 과도한 자기확신 때문이다. 해결책은 낯섦'을 찾아가는(p. 17)것이다. 비슷한 부류보다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 자신과 상관 없던 책이나 영상을 접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라. 딱딱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로 전환하라. 3. 생각의 자유를 지켜라 절대적 진리처럼 보이는 것도 의심하라. 모든 가설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라. 대중의 의견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라. 특히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을 경계하라. 확신이란 때때로 무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4. 안 했던 일은 새롭게 시작하고, 하던 일은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1818년 이전까지만 해도 정시 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화물선은 적재량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뉴욕의 해운사 블랙볼라인은 이 통념을 깼다. 벤저민 마셜은 엄청난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정시 출항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사업에서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길을 과감히 나서야 한다(p. 18). 5. 당연한 것을 의심하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함에 머무는 것보다는 당연을 의심할 때 사업의 기회를 볼 수 있다. 위기에 처했던 레고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함'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왜 레고는 움직이면 안 될까?", "왜 어른은 레고의 고객이 될 수 없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이 혁신의 시작이었다. 다만 기억하라. 모든 의문은 고객의 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처럼 통념에 저항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비즈니스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는 곳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가능 하다고 말하는 일에 도전했다. 심지어 회의 자료도 남들이 다 쓰는 파워포인트 대신 워드를 고집했다. 통념을 깨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p. 19). 7. 중간이 가장 위험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중간'을 선호한다. 강의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앞자리는 기피하고 뒷자리는 불안해하면서, 결국 중간쯤 자리를 잡는다. 이건 무리 속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이다. 하지만 이런 '중간 선호' 심리 가 직업 시장에서도 통할까?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과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값을 받지 못하고 끊임없는 원가 경쟁에 시달리다 결국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중간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강(p. 34)점, 즉 '나 아니면 안 되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중간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불안전한 자리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의 평균 키와 몸무게에 맞춰 제품을 만들면, 아무에게도 맞지 않는다. 평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엣지'가 있는가? 아니면 그저 수많은 진열대 위의 평범한 제품 중 하나같은 존재인가? 평균 뒤에 숨거나 안주하지 말라.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해 보이는 '평균'이 실은 가장 위험한 자리다. 차별화가 곧 생존이다(p. 35). 9. 좋아하는 일보다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자기계발 강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 그러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된다." 일리가 있고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 말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돈 버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 일이란 본질적으로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남의 돈을 정당하게 받아내는 과정이 즐거울 리 없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진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0.01%도 안 될 것이다. 그런 행운이 당신에게 올 확률은 무척 낮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대부분, 특히 젊은이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세상(p. 38) 모두가 힘들다고 할 때 기회가 있다. 경험도 부족한 20대에게 이런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무슨 일이든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기본적인 일조차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낭만을 즐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전략을 바꿔보자.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그리고 그 정반대 지점에서 당신의 진짜 열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실력을 쌓아라. 좋아하는 일은 그다음의 문제다(p. 39). 11. 글쓰기는 육체노동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회사원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일하는 작가다. 소설을 쓸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 작업한다. 오후에는 10km 달리기나 1.5km 수영을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아홉 시에 잠든다. 이 일과를 매일 반복한다. 긴 소설 쓰기는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하다. 신체적 강인함은 예술적 감수성만큼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연이어 히트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은 없다. 그저 44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은 것뿐이다.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p. 42). 여전히 달리기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달린다. 글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루키의 성 공 방정식은 단순하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글과 싸우는 것. 요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잘못된 통념도 많다. 가령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조용히 앉아 명상하면 글이 저절로 나올 것이라는 착각도 있다. 진실은 다르다. 글은 치열한 메모와 자료 수집의 전쟁터에서 태어난다. 밑천이 많아야 비로소 글이 나온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글은 온몸으로 쓴다는 사실이다. 영감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매일 아침 전장에 출전하듯 책상에 앉아 몇 시간씩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머리보다는 몸으로 하는 일이다. 작가는 지식노동자이자 육체노동자인 셈이다. 50권이 넘는 책을 쓴 나 역시 작년에만 5권을 출간했는데, 하루키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글쓰기는 지적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육체노동에 가깝다(p. 43). 18. 책 읽는 당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 유튜브, 틱톡 같은 영상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챗GPT 같은 AI가 순식간에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시대에 독서가 제공하는 고유한 가치가 더욱 빛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사고력을 기른다. 저자의 섬세한 유머 감각을 포착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과 문장을 만난다. 또한 읽은 내용이 머릿속의 다른 지식과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예상치 못한 통찰이 솟아나는 경험은 독서만이 선사하는 특권이다. AI는 우리에게 정확하고 즉각적인 답변을 제공하지만, 그(p. 56) 과정에서 우연한 실수로 얻는 영감이나 스스로 고민하며 발견하는 재미는 주지 못한다. 이는 마치 요리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것과 직접 요리를 실험하며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현대인의 독서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기회가 생긴다. 독서를 통해 얻는 깊이 있는 사고력과 창의적 통찰력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능력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곧 책 읽는 당신만의 강력한 차별화 포인트가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독서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탕누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문성이란 모르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능력이다. 그런 안목이 있어야 타인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이러한 전문가적 통찰력과 안목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디지털 시대의 홍수 속에서, 독서는 당신을 차별화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p. 57). 24. 사람은 바뀔 수 있는가?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의견은 갈린다. 변하지 않는다는 이도 있고, 변한다는 이도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처럼 견해가 나뉜다. 대부분 자기 경험에 기대어 판단하지만, 나는 '습관'을 바꾸면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일란성 쌍둥이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중 한 명은 술과 담배에 찌든 삶을 살고, 다른 한 명은 법정스님처럼 공부와 수행에 매진한다면, 그들을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겉모습만 봐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걸 보고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논어의 ‘성상근야, 습상원야’를 떠올린다(p. 68). 사람은 태어날 때는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비슷하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들이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 핵심은 바로 “배움, 학습"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책과 멀어진 사람과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워렌 버핏 과 찰리 멍거가 떠오른다.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은 워렌 버핏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주주총회에서 몇 시간 동안 다양한 질문에 통찰력 넘치는 답변을 쏟아낸다.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 역시 20년 넘게 책을 소개하고 써오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지만, 공부하면 변한다. 공부하면 유연해지고, 공부하지 않으면 고지식해진다. 변화의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p. 69). 28.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모르는 것 실패한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든다. 그것이 진실일까? 정말 그 사람의 역량이 출중한 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걸까? 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괘념치 마라. 세상이 알아준다고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너를 몰라준다고 네가 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p. 78). 나도 공감한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알아줄 만하니까 알아주는 것이고. 만약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아직 때가 아니거나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상품 광고와도 같다. 정말 좋은 상품은 광고가 필요 없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내고, 제품은 저절 로 팔린다. 반면 결함 있는 상품은 광고가 오히려 독이 된다. 단점이 더 빨리 드러나 시장에서 외면받기 때문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장관 후보가 되어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조용히 있었다면 모를 일을, 왜 자기를 드러내 저런 수모를 자초했을까? 스스로 한계를 알았다면 애초에 거절했어야 했는데.' 결국 진정한 실력자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실력을 쌓아갈 뿐이다. 때가 되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더 성장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p. 79). 29. 실패는 권장하되, 실수는 경계하라 혁신은 실패를 먹고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기에 실패를 권장한다는 얘기다.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패와 실수를 구분 하는 것이다. 흔히 실패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실수에 가깝다. 디테일이 부족하거나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 쓴맛을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 실패라기보다는 실수에 해당한다.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있지만, 두 번의 실수는 이미 습관이 된 것이다. 이런 실수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반면에 진정한 실패란 치밀한 준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p. 80)한다. 이런 실패는 오히려 혁신을 위해 필요하다. 새로운 시도에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교훈과 경험은 다음 도전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물론 아무리 가치 있는 실패라 해도 그 횟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실패가 반복되면 개인과 조직의 사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지인 중 한 명은 사회 초년에 크게 부도를 낸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처럼 실패가 주는 충격과 후유증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실수와 실패를 구분 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안일한 준비와 부족한 디테일에서 비롯된 실수는 단순한 시행착오에 불과하므로, 이는 철저히 예방해야 한다. 반면 치밀한 준비와 전략적 계획하에 시도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실패한 경우, 이는 오히려 혁신을 위한 값진 자산이 된다. 이러한 의미 있는 실패에서 얻은 깊이 있는 통찰은 다음 도전의 초석이 되며, 이런 경험들이 쌓여 결국 진정한 혁신의 발판이 된다(p. 81). 13. 착각도 때로는 약이 된다 인간은 왜 착각을 할까? 대부분 착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만, 착각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아는가? 《착각의 쓸모》(샹커 베단텀 지음, 반니)는 착각의 숨겨진 이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실제로 신체에 변화를 일으킨다. 미국 외과 의사 브루스 모슬리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그는 관절염 환자들에게 무작위로 플라시보 수술을 했다. 2년 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나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호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수술 자체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p. 114)사의 믿음직한 말 한마디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이 실제 치료 효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와인 실험도 흥미롭다. 싸구려 와인에 비싼 가격표를 붙여 마시게 했더니, 실제로 비싼 와인을 마실 때처럼 뇌의 쾌락 중추가 반응했다. 이는 현실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기만이 실제 신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자기기만은 불안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 때문에 착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닌, 생존의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 시스템의 복잡성, 불확실한 미래···이런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전진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적정 수준의 착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성과 조직의 리더들은 종종 '과도한 자신감'이나 '비현실적 낙관'이라 불릴 만한 착각을 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런 착각들이 만드는 미세한 균형점 위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는 완벽한 진실보다 유용한 착각을 선택했고, 그것이 인류를 지금까지 생존하게 만든 진화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결국 '적절한 자기기만'이야말로 우리가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가장 영리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p. 115). 16. 비결을 알면 오히려 성공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온갖 비결과 노하우가 넘쳐난다. 출세, 장사, 돈 버는 법, 인간관계, 건강, 행복 등 무엇이든 그에 대한 비법을 알려준다고 난리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든다. 이런 비결을 잔뜩 늘어놓은 사람들이 정말 그 분야에서 성공 한 사람들일까? 돈 버는 비결을 쓴 사람이 실제로 부자일까? 리더십에 대해 책을 쓴 사람은 진정한 리더일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비결을 접한 사람들이 과연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출세 비법을 읽고 그대로 따랐다고 해서 정말 출세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비결만 알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다. 어(p. 120)떤 일이든 전제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체력, 능력, 인품 같은 기본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은 채 비결만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이 만든 비결을 참고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비결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순 없다. 대신 기본에 충실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좌절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거치며 어느 순간 자신만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비결을 접한들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진정한 고수들은 남의 비결을 좇지 않는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깨달음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수될 수 없다. 마치 등산로를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해서 히말라야 정상 정복의 체험을 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비결이 아닌, 자신 만의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통찰이야말로 당신만의 비결이 된다(p. 121). 25. 과거의 성공이 독이 되는 순간 길을 걷다 "의사 전원 서울대 출신"이란 간판을 본다. 연대, 고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광고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저 병원, 내세울 게 학벌뿐이구나. 실력이나 경험, 환자 치료 결과 같은 진짜 중요한 걸 내세우지 못하니 낡은 타이틀로 포장하는구나." 명함에 무슨 학위를 잔뜩 늘어놓은 사람도 비슷하다. 왜 작은 명함을 그토록 복잡하게 만들까? 현재의 성과나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과거의 학위로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한 명사는 서울대 졸업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먼 훗날 당신이 진정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면, 서울대 졸업장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내세울 게 너무 많아서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p. 138)한다면, 서울대 졸업장이 유일한 자랑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여전히 학벌을 자랑하는가? 스카이 대학 나온 게 그렇게 뿌듯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좋은 대학 다닌 게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그건 꽤나 초라한 성장 궤적이 아닐까? 진정한 고수는 과거의 영광에 의지하지 않는다. 학벌이라는 허상을 내세울수록 현재의 공허함만 더 도드라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벌을 잊을 때, 과거의 성공을 내려놓을 때 당신의 진짜 실력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아이러니다(p. 139). 13.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은행권에서는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피크제를 적용한다. 공평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공평하지 않은 제도다. 또한 로테이션이라는 명목하에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수한 인력이 왔다가도 뚜렷한 주특기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반면 정치권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어 있다. 기업이라면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늘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현역이다 보니 실천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대교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성근(p. 176) 감독의 주장은 들어볼 만하다.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부터 원래 담겨 있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이런 것이 세대교체다. 컵에 있는 물을 전부 비우고 새로 넣는 게 아니다. 세상일은 원래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하는 것이고, 젊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한다. 가득염은 1969년생, 2007년 SK 왔을 때 내일모레 마흔이다. 그런데 4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경력이 많으니 위기에도 떨지 않고 대범하게 자기 볼을 던졌다. 한 마디로 나이 먹었다고 자르고, 젊다고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가득 같은 선수는 기용하고, 젊어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르라는 것이다. 컵에 있는 물을 쏟고 새 물을 채우는 대신 계속 새로운 물을 부으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젊기만 한 사람을 채우는 게 세대교체가 아니다. 제 역할을 잘하고 발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대교체다(p. 177). 19. 사과를 잘하는 사람의 연봉이 높은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과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강자는 사과를 잘하는 반면, 약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사과를 피하며 고집을 부린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I am sorry"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한다. 연봉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가 연간 2만 5천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사과를 한다 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느냐"는 질문에 연봉 10 만 달러 이상자의 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소득 구간이 낮아질수록 그 비율도 점차 줄어들어 2만5천 달러 이하 소득자의 경우 52%에 그쳤다. 이는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p. 188) 실수에서 배우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고소득자들은 보다 총명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경향이 있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조차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탈무드의 이 말은 사과와 성공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사과는 강자의 언어인 것이다. 오직 강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다. 사과는 과오를 끝내겠다는 의미이자, 과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과란 무엇일까? 사과는 '쏠 사'에 '과오 과'가 더해진 단어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 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사과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면에서 잘못했는지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과는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정작 자신은 빠져 있고, ,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는 사과가 아니라 변명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p. 189). 21. 몸이 마음을 결정한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나와 다른 나로 사는 건 효과도 없고 고통스러울 뿐 행복하지 않다." 이는 내가 한 때 의심 없이 믿었던 통념이었다. 그러나 백영옥의 칼럼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그 칼럼에서는 《프레즌스》의 저자 에이미 커디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에이미 커디는 19살에 자동차 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기억력 장애에 시달리며 움츠러들어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은 해법은 바로 "너 자신을 속여라"라는 것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움츠러든 어깨와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라(p. 194)고 조언한다. 즉,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라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찾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먼저 그려보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칼럼을 읽는 순간, 나는 골프선수 신지애의 일화가 떠올랐다. 슬럼프에 빠져 부진을 겪던 그녀에게 코치는 단 한 마디, "챔피언처럼 당당하게 걸으라"고 조언했다. 그 후 그녀는 본래의 기량을 되찾았다.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잘못된 모습을 진짜 자기 모습으로 여겨 거기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진정 되고 싶은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상상하고 마치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의 조언은 단순하다. "위를 보고 걷자."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걷는 대신,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보라. 그 걸음걸이 속에 당신이 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p. 195). 24. 굴러온 돌이 있어야 박힌 돌도 득을 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걸까? 아니다. 굴러온 돌은 정체된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역사를 살펴 보면, 개방적인 사회가 폐쇄적인 사회보다 더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어야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마케도니아 출신이란 이유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반면 로마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좋은 것이면 적의 것이라도 흡수 했고, 피지배민족인 그리스의 신들마저 받아들였다. 스페인은 달랐다. 순수한 사회를 지킨다며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배격했다. 처음엔 종교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모든 학문(p. 200)과 예술 분야로 확산되었다. 공포의 종교재판소가 커질수록 스페인은 역동성을 잃었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활력은 떨어졌다. 결국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두 종류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계속 드나드는 조직, 다른 하나는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도 않고 새로 들어오지도 않는 조직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 관이 후자에 속한다. 예전에는 대기업도 그랬지만, 공채제도가 사라지며 달라졌다. 이 두 조직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정체된 조직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은 고인 물을 빼고 새 물을 넣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며 반발한다. 하지만 박힌 돌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주기적으로 박힌 돌을 빼내고 굴러온 돌이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반짝이는 굴러온 돌들이 안주하는 박힌 돌을 자극해야 한다. 그때 박힌 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화하고 발전하거나, 물러나거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이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굴러온 돌이 계속해서 박힌 돌을 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조직은 발전한다(p. 201). 4. 인생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인사철이면 으레 승진자가 있는 만큼 퇴직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퇴직자들에게 소회를 물으면 너무 갑작스러워 당혹스럽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60을 앞둔 임원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남의 일로만 여겼던 퇴직이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몹쓸 병에 걸려도 사람들은 "하필 나한테 이런 병이 올 까?"라며 한탄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무슨 일이든 오늘 일어날 수 있다"Anything can happen today." 내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에게는(p. 222) 좋은 일만, 병은 없어야 하고, 내 자식들은 모두 잘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뜻밖의 일을 맞닥뜨리면 으레 'Why me' 라고 묻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말이다. 이는 잘못된 가정이고 잘못된 질문이다. 나만 피해 갈 수 있으리라 바라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누구에게나 비슷비슷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부자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병마가 비껴가는 건 아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받아 들여야 한다. 중요한 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를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다. 그래야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퇴직도, 질병도, 죽음도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죽음이 그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과,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삶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그때 우리는 "Why not me" 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을 지혜롭게 맞이하는 방법이다(p. 223). 16. 용서의 역설: 기억해야 자유로워진다 사람들은 종종 "다 잊고 용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마음먹은 대로 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다 잊었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아직 잊지 못했음을 뜻한다. 진정 잊었다면 떠 올릴 일조차 없어야 한다.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의미 있는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다. 잊힐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는 법이다. 까맣게 잊었 던 일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망각이란 우리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설령 잊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용서일까? 용서의 한자를 보면 "담다, 받아들이다"는 뜻의 '용'과 "마음이 같(p. 248)다"는 뜻의 '서'가 합쳐져 있다. 즉, 용서란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떠올려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셈이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우르술라 누버 지음, RHK)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용서하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지만 있어야 할 곳. 즉 과거로 추방된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현재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용서하려면 오히려 기억해야 한다. 자꾸 떠올리되, 원망이나 한탄에 빠지지 말고 객관적으로 바라 봐야 한다. 상처받은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의 입장도 헤아려 봐야 한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비록 그 행동이 잘못되긴 했어도, 그 심정만큼은 공감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밉기보다 불쌍해 보인다. 상대가 불쌍해지는 순간 내 마음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온다. 평정심이 생긴다. 그 일을 떠올려도 더는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 비로소 용서에 이른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불현듯 기억나도 아프지 않게 되는 것, 그(p. 249)것이 용서의 완성이다. 잊으려 하면 오히려 용서할 수 없다. 떠오를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용서하기 위해선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동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득 스쳐도 내 감정에 흔들림이 없다. 용서는 결국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평정심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참된 용서다(p.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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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7-04
  • 【북토크】 얼떨결의 은혜...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총신79회이신 이정훈 목사님이 37년 4개월의 목회 사역을 마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용신교회를 개척해 별 탈 없이 목회 여정을 보내고 그간의 사역을 돌아보는 책 ‘얼떨결의 은혜’를 출간했다. 얼떨결에 취재하러 가서 은혜로운 원로목사 추대, 위임목사 임직식을 보고 받아온 책을 몇 시간에 걸쳐 다 읽었다. 한 목회자의 일생, 목회 이야기를 몇 시간 만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책만이 줄 수 있는 혜택이다. 목사님의 좌충우돌 개척교회 목회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 모든 것이 목사님 표현처럼 ‘얼떨결의 은혜’였다. 영문으로 표현하면 An Unexpected Grace다. 담임목회 15년 하다가 중단하고 ‘얼떨결에 기자’가 된 내 입장에서 봐도 모든 것이 다 얼떨결의 은혜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시중 판매용이 아니기에 읽기를 원하시면 용신교회에 문의 전화해 보시기 바란다(031-409-7336). 이정훈 목사 원로목사 추대, 이믿음 목사 담임목사 위임, 출판감사예배 관련 기사 링크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583 3. 예수님을 만남 인쇄소 다니며 견습 과정을 거쳐 기술을 배워 정판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던 무렵, 이제 군 입대할 나이가 다가오던 1974년 가을, 직장을 마치고 올 때 집 앞에서 윗집 선배를 만났는데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 하는 전도를 받게 되었다. 선배의 만날 때마다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라" 하는 전도를 받으면서 마음 가운데 '교회 한번 나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75년 2월 2일 주일 아침에 윗집에 찾아가서 "오늘 교회 한 번 가보려고 한다." 고 하니 너무 좋아했다. 선배를 따라 처음으 로 교회 갔다. 첫날부터 교회가 너무 좋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날 처음 교회를 나간 날부터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 청년예배, 토요일 중고등부 예배 모든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심지어 주일 학교 예배도 나갔다. 누가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그날부터 새벽예배도 나갔다. 내게 교회 생활은 새로운 세상, 너무 좋았다. 교회가 좋으니까 교회 가는 날, 교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전에는 직장 중심으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교회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내가 직장을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상도 많이 받고 선배 기술자들이 '저놈은 지독한 놈이야 어떻게 젊은 놈이 놀러 다니지도 않나? 할 정도였다(p. 61). 교회를 다니면서 수요일 주일에는 직장이 아닌 교회를 우선으로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처음 교회 나온 나에게 청년회장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권면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이원세 청년회장은 당시 서울 대학을 다녔다. 50년의 세월이 지난 그는 변호사로서 사역하고 있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대뜸 반감이 들었고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죄 짓고 경찰서, 형무소 들어가는 그런 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안에서, 동네에서 '착하다'는 말을 듣던 나는 '죄에 대해서 회개' 하라는 말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청년회장은 이상하게 다음 주일에도 똑같은 말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나는 즉시 "지난 주에 말했는데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나에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안 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새벽 예배 때 체험하도록 하셨다. 나는 처음 교회 나가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즉시 새벽기도를 나갔다. 어떻게 예배드리는지도 몰랐기에 먼저 오신 성도님들을 보면서 따라서 했다. 성도님들은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p. 62). 그래서 나도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는 줄 알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우선 암송을 한 주기도문을 계속 암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교회에 오자마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는데 갑자기 환상으로 스크린 같은 것이 펼쳐지 면서 청년회장과 나의 대화 장면이 나오고 청년회장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하고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 스크린에 글자가 타이프로 치듯 글자가 쓰 였다. "죄란 무엇인가" 하면서 그 가운데 글자가 크게 두드러지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고 쓰였다. 나는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산 것이 죄구나" 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정말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듯 한동안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이 몰려왔다. 죄를 용서받은 죄사함의 평안이 마음에 넘쳤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을 들으면 감사의 눈물이 흘러넘쳤다.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가대도 서게 되었고 주일 학교 보조교사도 했다. 여름성경학교 때 나를 전도한 홍경산 선배가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할 전할 때 보조교사로 뒤에 앉아 은혜받으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p. 63). 9. 용신교회 개척 수원 창훈대교회에서 사무장,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무렵, 총신신대원 79회 동창 방종현 전도사가 수원 우만동 지역에서 출석한 강소를 찾고 있었는데 동창인 나에게 연락이 와서 들이 함께 지역을 돌아보며 개척 장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방종현 전도사가 함께 동역 개척하자는 제안에 내가 수락하였고 갑자기 교회 개척하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담임목사님인 한명수 목사님에게 상의를 못한 것을 보면 목사님이 외국 출타 중이든지 교회에 계시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의 했다면 목사님은 반대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전도사의 동역 개척은 교회부지는 내가 아는 집사님 땅을 빌리고 내가 아는 건축하는 집사님이 교회를 건 축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공 예배도 드리고 '다사랑교회'라는 교회 이름도 지었다. 반지하 본당에 위에는 똑같이 설계된 두 집이 지어졌고 가운데는 공동 서재도 만들었다. 성전을 짓고 개척 예배도 드리고 은혜롭게 공동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목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본래 교회 건축하고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방종현 전도사의 지인 권사님이 '개척하면 교회를 지어 주겠다'로 시작되었다(p. 90). 하지만 2400만원 든 건축비용에 못 미치는 1000만원 헌금만 해 주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200만원까지 해서 1200만원이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져 공동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수개 월이지만 교인들도 양분된 상황이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 방 전도사를 따라온 개척 멤버들, 그래서 방종현 전도사가 맡아서 교회를 잘 정리하기로 하고 나는 떠났다. 창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손충식 목사님이 목회하는 아주대 앞에 있는 경성교회로 옮겨 부교역자로 사역하게 되었다. 경성교회에서 청빙한 사역이 아니었기에 1년을 무보수로 사역했다. 그곳에서 강도사 인허도, 1987년 가을에는 목사안수도 받았다. 경성교회에서의 1년 사역은 비록 무보수에 어려운 여 건이었지만 청년부를 맡고 교회 여러 가지 사역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새해 1988년을 맞이하는데 손충식 목사님이 조용히 부르더니 "이 목사 개척을 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부 교역자로 내정해 놓은 친구 사역자가 있어 나까지 부교역자로 임명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혀 경험이 없는 나는 개척교회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경성교회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손 목사님과 함께 안산이라는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는 전도사님이 안산에 개척 교회를 하려고 지하실을 계약했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계약이 중단된 상태인 건물이었다. 안산 지금의 상록수역 근처 가구거리 중간쯤 되는 건물 지하였다(p. 91).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고 도로가 정비되고 건물이 몇 개 지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직 동네가 형성되지 않았다. 손 목사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야 전망이 좋다"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는 순간 속으로 말했다. '전망 좋으면 자기가 와서 하지 집도 몇 채 없고 동네도 없는데 무슨 전망이 좋아'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개척교회가 뭔지? 어떻게 개척교회를 해야되는지 모르지만 안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세 800만원인데 수중에는 전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6만원으로 계약했다. 우선 보증금 500만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창훈대교회 사모님께 500만원을 지인을 통해 빌려 달라고 부탁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100만원으로 지하실을 꾸몄다. 지하 3분의 1을 막아서 예배실과 사택을 꾸몄다. 지인의 도움으로 강대상과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1988년 1월 8일, 드디어 안산으로 이사 오는데 바람이 몹시 불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다섯 살, 이제 막 여덟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1988년 2월 24일이 개척 예배를 드렸다. 교회 명칭은 동네 지명을 따라서 지으려고 했는데 확정된 지명이 없었다. 당시 공사중이던 전철역이 '용신역'이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인 최용신 선생의 이름을 따서 용신역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이름을 '용신교회'로 지었다(p. 92). 막상 개통될 때는 '상록수역' 전철역이 되었다. 사람의 이름 보다 '상록수‘가 소설로 많이 알려졌기에 상록수역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도 감사한 것은 용신교회 이름은 전국에 단 하나뿐인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세워주신 용신교회, 이 용신의 이름 에는 아주 중요하고 좋은 세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얼굴 용자에 믿음 신으로 [믿음의 얼굴], 또 쓰일 용에 믿음 신으로 [쓰이는 믿음], 그리고 용신할 수 없을 만큼(마가복음 2장 2절)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뜻으로 정리했다(p. 93).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된 후 하나님은 더욱 부흥을 주셨다. 주일 낮 예배드리는 성도가 200명에 달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앞으로의 목회에 대한 비전을 구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보내 주신 교인들을 관리하는 관계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번에도 하나님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목회가 아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도전 을 주시면서 성도들을 영적 지도자로 세우는 「훈련 목회」를 시도하도록 하셨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양육, 훈련과정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NCD - 자연적 교회 성장을 만나게 하셨다. 독일의 슈바르트 박사가 교회의 영적 건강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셀 교회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한국교회의 셀 교회의 전파자라 할 수 있는 빌백햄 목사와 셀 교회 이론을 정리하여 셀 교회 아버지라 불리는 랄프 네이버 목사의 방한으로 「셀 교회」 컨퍼런스가 여러 차례 열렸다. 교회마다 목회자들 사이에 건강한 교회와 교회 본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p. 107).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세미나, 컨퍼런스, 소그룹 모임 등에 참석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 「셀 교회」의 비전을 품고 교회에 비전을 선포했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에게는 훈련받는 신앙생활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 파장으로 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났다. 그래도 성경적인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를 꿈꾸며 훈련과정이 시작되었다. 2년의 양육과정을 통해 성도들이 변화하는 것 같았다. 사명감에 불타고 뜨거운 열정들이 생기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셀리더 양육과정 1기를 마치고 졸업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나 2기, 3기, 4기 기수를 거듭할수록 양자는 줄어들었다. 결론을 말하면, 교회가 기도의 동역화, 전도 집중에 실패하면 무슨 프로그램도 열매 맺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변화될 줄 알았던 셀리더들은 원위치로 돌아갔다. 셀리더가 목회자의 마인드를 갖고 셀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전처럼 친교 모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셀 교 회에 대한 명칭이나 시스템은 그대로 사용하고 전통교회의 형태로 다시 돌아갔다. 성가대를 다시 세우고, 남전도회 • 여전도회 조직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용신교회 첫 장로님을 세우고 당회를 조직했다.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위해서였다(p. 108). 나는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도 체계적인 말씀 훈련도 영적인 체험도 없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래서 행인지 불행인지 뭔지를 모르고 그냥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대로... 그런데 하나님이 다 하셨다. 믿음대로 해 주셨다. 감사할 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p. 115). 22. 교회사역 마무리 새로운 사역의 출발 이제 2025년 6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우리 용신 교회에서 [이정훈목사 원로 추대식과 이믿음목사 위임식]이 진행된다. 이로써 1988년 2월 24일 용신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해 온 37년 4개월의 용신교회 담임목사의 사역을 내려놓는다. 많은 목사님이 교회 사역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하셨다'고 모두 말한다. 나 역시 '하나님이 용신교회를 시작하셨고 여기까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뿐이다. 1987년 목사 안수 받고 어느 교회에서도 사역자로 불러주지 않고 교회를 개척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게 된 교회 개척이었다. 그때 어느 교회든 어느 목사님이든 [우리 교회에 와서 사역을 하라]고 했다면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부교역자 사역을 했을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모르겠고 열심히는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전부니까. 그런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개척을 하게 하신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교회 개척을 하도록 다른 사역지를 주지 않은 것 같다. 용신 교회 37년 사역은 무엇도 모르고 무조건 이것저것 열심히 한 것 뿐이다. 열심히 배우러 다니고 열심히 가르쳤다. 좋다고 하는 것은 가서 배웠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쳤다. 물론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지만 열심히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p. 203). 성도들이 잘 배우든 못 배우든 나는 모른다. 나는 배운 것을 열심히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배우려 다니고 나와 같이 하고 싶은 것을 다 가르친 목회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상황, 받아들이는 분위기 등을 고려해서 나와 같이 훈련받았는데 교회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목회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목사님 판단에 배운 것이라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고 싶은데 교인들 의 반대로 가르치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목회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다면,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역에 힘을 낼 수가 있겠는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함께 훈련받고 미국 비전트립을 함께 다녀와서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교회 목회에 적용해 보려고 했다가 교회에서 쫓겨나는 상황도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이 배움을 허락한 모든 것을 다 가르쳤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고, 만족하고, 후회가 없다.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봤으니까. 누구도 방해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속으로, 뒤에서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좋아서, 원해서 배우고 따라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럼에도 목회자를 믿고 따라와 주어서 감사하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것을 거의 다 한 것 같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교회가 크게 부흥했을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p. 204). 때론 부흥하다, 때론 한꺼번에 떠나기도 했다. 한꺼번에 35명, 90여명으로 교인 수가 늘다가 두 번째 교회를 지을 때 한꺼번에 교인 33명이 떠났다. 어떤 때는 60명이 이렇게 저렇게 떠났다. 교인이 몰려오는 것도 한꺼번에 떠나는 것도 사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점 때문에 떠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어떤 성도가 우리 용신교회에 왔다가 떠났다. 이사 가야 할 형편 때문에, 교인 간에 시험이 들어서, 목회자의 목회 방향이 맞지 않아서 등등 많은 이유로 우리 용신교회를 왔다가 떠났다. 지금 37년의 목회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느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는 생각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찬송가 가사처럼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유기는 후 물로나 혹 불로나 정결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고백하며 목회 사역을 마무리할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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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북토크】고통에 대한 한 편의 심오한 설교와 같은 철학책
    한병철은 한국에 잘 알려진 재독철학자다. 그의 책은 여러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철학책이라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는 아니다. 깊이 생각하며 읽으면 많은 공감이 일어난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목회자들이라면 한 번 읽어봐야 할 것이다. 피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심오한 설교를 목적하는 목회자라면 철학책을 가까이하며 자신의 사상을 깊게 만들어야 한다. ‘값싼 은혜’와 같이 가볍고 값싼 설교가 너무 많아 공해가 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깊이 있는 설교가 그립다.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에른스트 융어의 이 구절은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p. 9).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규율주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사회에서 지시와 금지 혹은 처벌과 같은 부정성은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 혹은 자아실현과 같은 긍정성에 밀려난다. 훈육공간은 안락영역으로 대체(p. 20)된다. 고통은 권력 및 지배와의 모든 연관을 잃어버린다. 고통은 탈정치화되어 의학적 문제가 된다. 행복하라는 것이 새로운 지배공식이다.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는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주는데, 큰 비용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속된 자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줄 안다. 외부의 강제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자아실현을 하는 줄 알고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자유는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착취된다. 자유로우라는 말은 복종하라는 말보다 더 파괴적인 강제를 낳는다(p. 21).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 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 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피로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성적인 고통은 어떤 항의도 낳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의(p. 24) 피로는 나의 피로로 간주되고, 이런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이 피로는 혹사된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결합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화한다. 그러므로 이 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피로와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피로는 혁명을 막는 최상의 예방약이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행복을 사물화한다. 하지만 사실 행복은 더 큰 성과를 약속하는 긍정적 감정들의 합계 이상의 것이다.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 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격정은 고통과 행복을 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과 행복은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 있는 형제이며 쌍둥이 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p. 25)에 이르지 못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무한한 눈보라처럼 쏟아지고, 고통의 가장 강력한 번개 또한 그에게 떨어진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p. 26). 팬데믹에 직면한 생존사회는 부활절 예배마저 금지한다. 성직자들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마스크를 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신앙을 온전히 희생한다. 역설적이게도 이웃 사랑이 거리두기로 표현된다. 이웃은 잠재적인 바이러스 운반자다. 바이러스학이 신학을 무력화 한다. 절대적 해석주권을 획득한 바이러스학자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부활의 서사는 건강과 생존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자리를 내어준다. 바이러스 앞에서 신앙은 추락하여 익살극이 된다. 신앙은 중환자실과 인공호흡기로 대체된다. 매일 사망자 숫자가 집계된다. 죽음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 죽음은 삶을 비워서 생존으로 만든다(p. 29). 존재는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멂 속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가까움"을 들을 수 있다. 고통은 인간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에게 멈출 곳과 머무를 곳을 제공 해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고통은 인간의 현존재를 떠받쳐준다. 이 점에서 고통은 쾌감과 다르다. 고통은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p. 71)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멂이 가까워지게, 그리고 가까움이 떨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를 조정하여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에 조응하는 '정조',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p. 72).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 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p. 93). 역자 후기 고통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음을 불쾌한 감각, 감정 등으로 알려주고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경고 신호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고가 적절히 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을 확실히 낳으려면 고통은 분명히 느껴지고 의식되어야 한 다. 고통의 강도는 해결해야 할 문제의 심각성, 시급성에 비례해야 할 것이다. 고통이라는 신호가 부재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무시되면 그 신호가 가리키는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결국 치명적인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직접적인 고통이 지배수단으로 사용되었다(p. 101). 중세의 고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고문은 규율로 대체되었다. 처벌을 통한 통제 대신 규율을 통한 통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이런 규율사회는 오늘날 성과사회로 다시 바뀐다. 성과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착취하게 한다. 성과사회에 와서 지배의 비용은 최소화된다. 굳이 권력장치들을 운용하지 않아도, 굳이 고통을 수반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체제에 맞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스스로를 착취하면서도 이로 인한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고통을 건강을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고통은 약함의 징후로 여겨져서 부정되고 억압되고 은폐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고통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신호로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으로 간주할수록 고통 자체를 회피하려는 욕망은 강화되고, 우리는 작은 고통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민감성이 강화될수록 우리가 체감하는 고통은 오히려 커지며, 이에 따라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이 더 커지는 악순 환이 발생한다(p. 102). 고통을 회피하는 기술은 의학이 담당한다. 그래서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의학적 문제로 취급된다. 고통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의학은 고통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고통 자체만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데 집중하며, 이를 위해 진통과 마취의 방법을 적용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의학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긍정심리학"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세계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으로 여기는 긍정심리학은 고통을 초래한 현실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대신 심리적 조작을 통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동기부여 등으로 고통을 덮는 방법을 권장하며, 심리적 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진통제를 투입한다. 이렇게 긍정심리학은 고통의 원인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으며, 우리를 진실로부터 격리시킨다. 긍정심리학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를 가상의 매트릭스 안의 고통 없는 상태로 집어넣는 것이다. 이런 긍정심리학은 모든 고통의 원인을 개인 안에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은폐한다. 모든 고통은 너의 마음이 잘못되어서 생긴 것이니 너의 마음만 고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긍정심리학의 제1 명제다. 이런 긍정심리학은 고통의 원인인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사회적 문제를(p. 103)해결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회적 갈등이나 대결은 일반적인 고통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임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결 자체를 악으로 보고 그것들을 억압하면 그것들을 초래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심화된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은 고통을 온전히 제거할 수 없다. 집중적이고 전면적인 고통을 산만하고 흐릿한 만성적인 고통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고통은 우울을 낳는다. 고통은 일시적으로 억압될 수는 있지만,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의 징후인 고통을 회피하고 안락함과 쾌적함을 직접 추구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 진다. 안락함과 쾌적함은 익숙한 것 안에 머물 때 가능하며, 이질적이거나 낯선 것은 내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된다. 사회 안에는 이질적인 경험과 특성을 지닌 개인 및 집단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타자들"은 나의 안락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거부되고 기피된다. 안락함이 목적일 때, 우리는 경험의 확장도, 세계에 대한 인식의 깊이도,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안락함의 온실 속에 머무르면서 바깥 세상이 온실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온실 바깥을 경험하(p. 104)는 것을 회피해야 할 고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 만의 온실에 머무르려는 욕망은 개인들을 자기중심적이 고 나르시시즘적으로 닫힌 공간 안에 고립시키고 개인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막으며, 이로써 사회 변화의 동력을 억압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온실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머무르기 원하는 온실을 지켜낼 수 없다. 그래서 의학과 긍정심리학에 마음의 조작과 진통 기술로 실재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을 무력화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다. 저자는 팬데믹이 이런 개인들의 연대 상실과 고립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한다. 팬데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넣고, 우리의 관심을 생존에 집중시킨다. 팬데믹의 상황에서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여타의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진다. 삶의 의미는 오로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축된다. 긍정심리학이 만들어낸 고통 없는 매트릭스의 가상은 깨어지지만, 현실 감각의 복구에도 불구하고 좋은 삶과 나쁜 삶의 구별은 죽음이라는 위협 앞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좋은 삶에 필요한 사회적 교류도 기꺼이 희생된다. 이런 팬데믹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속도를 방해하지만, 자본주의 바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p. 105). 개인들이 공감과 연대로부터 더 멀어지고 서로 격리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잠시 느려지고 제한될 뿐이다. 상품미학은 우리의 안락함 추구에 영합하고 이런 추구를 강화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상품은 판매량의 증가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있고, 판매량을 증가시키려면 최대 다수 구매자들의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상품 미 학은 진정 새로운 미적 대상을 창조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기존 취향의 안전한 틀 안에 머무르면서도 추가 적인 구매를 유발하기 위해 가짜 새로움을 연출할 뿐이다. 이런 새로움은 "동일한 것의 변주"(15쪽)에 불과하다. 이렇게 고통에 민감하여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을 강 하게 느끼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사랑은 나와 이 질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이런 타자의 이질성은 내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욕망의 직접적 실현을 방해하거나 욕망과 충돌함으로써 내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고통의 억압과 은폐는 모든 변화와 발전과 창조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는 예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창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불만과 결핍의 의식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것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예술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가장 전형적으(p. 106)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기존의 것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하며 교란시킨다. 이렇게 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예술적 창조력 또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결핍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예술은 이런 불만과 결핍의 의식 없이는 창조력을 상실하고 만다. 고통과 예술의 이런 관계를 알고 있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창조를 위해 고통을 필요로 했고, 그래서 프루스트는 "고통이 나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은 일이다"(56쪽)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예술은 수용자에게 만족과 즐거움을 줄 것을 요구받는다. 예술 시장에서 그런 쾌감을 주는 작품들이 선호되기 때문이다. 이런 예술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물론 고통이 예술적 창조를 낳는다고 해서 곧바로 고통 자체를 옹호할 수는 없다. 고통은 창조와 발전의 동력이다. 그러나 창조와 변화와 발전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목적인지는 불확실하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헤겔은 고통을 통해서만 정신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했고, 고통 이 없다면 예술적 창조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창조와 발전이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가치라면 창조와 발전의 계기인 고통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창조와 발전이 고통의(p. 107) 극복 혹은 제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면 고통 자체를 정당화할 근거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 을 것이다. 현실에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변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고통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통도 예술도 삶의 지속적인 동반자이며, 지속적인 변화의 동력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실제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주목함으로써 그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을 요구한다.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는 예술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고통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의식을 무력화하고 모든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 후 개인의 고통을 조작과 은폐를 통해 제거하는 것이 성과사회의 고통 처리 방식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개인들이 소마라는 알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현실과 무관한 행복감에 젖어 살아가 게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헉슬리의 디스토피아가 이미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판단일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경제력과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는 정도로 낮으며,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고통을 성공서사에 편입시키려는(p. 108)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분명히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디스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다. 고통에 대한 강한 의식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여전히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역설적인 판단은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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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06-24
  • 【북토크】 다른 인생을 느껴보는 한 방법, 소설 읽기
    소설은 잘 안 읽게 된다.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으로 한 권 혹은 몇 권을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소설을 멀리했다. 그러다 책을 읽다 추천한 소설을 가끔 읽는데 이 책도 그것이다. 교통 사고로 죽은 딸을 대신해서 성인식에 참석하는 부모 이야기(성인식), 치매 초기의 불편했던 어머니를 찾아가는 딸의 이야기(언젠가 왔던 길), 한 늙은 이발사의 회한(비다가 보이는 이발소)등 단편집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소설을 통해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소설을 읽는 한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기 인생 하나만 살기 때문이다. 소설은 가상의 남의 인생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를 준다. -성인식- 스즈네가 내 얼굴은 쳐다보지 않은 채, 이틀 만에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머플러가 화해의 표시인 듯하다. 나는 입가가 벌어지는(p. 14) 걸 참으면서 머쓱해서 오히려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래, 빨리 가. 20분밖에 안 남았다." 그것이 스즈네와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구두를 다 신기도 전에 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 속으로 혼자 뛰어나갔다. 말 그대로, 뛰어가고 말았다. '20분'은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날 후로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다. 교통사고였다. 스즈네는 신호가 없는 도로를 건너다 트럭에 치였다. 그때 재촉하는 말 대신 '너무 서두르지 마라.' '차 조심해라. 하는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을, 또는 머쓱해하지 말고 불러 세워 '아빠랑 저기까지 같이 가자'고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지금도 상상한다. 스즈네와 같이 집을 나서 버스 정거장 까지 함께 걸어가는 정경을. 상상 속의 스즈네는 발을 동동 구르듯 서둘러 걷고 있다. "빨리 가야돼, 나, 지각한단 말이야." 상상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이해심이 많다. "괜찮아. 아빠도 옛날에 툭하면 지각했어." 그리고 정문보다 가까운 담을 기어올라 운동장을 뛰어갔(p. 15)던 중학교 시절의 전과를 들려준다. 말을 바꾸고 장면을 바꿔가며 온갖 상상을 계속하지만, 스즈네는 무사하고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결말이다. 몇 초만 늦게 길을 건넜더라도, 아니 몇 초만 빨랐더라도 스즈네는 죽지 않았다. 현실의 나는 정거장에서 버스에 올라탔을 때,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노파가 혼자서 중얼 거렸다. "아침부터 왜 이리 시끄러워. 무슨 일이 생겼나." 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참 시끄럽네, 하고(p. 16). -언젠가 왔던 길- "있지, 기억나? 내게 했던 말." 엄마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테레빈유를 사각 팔레트에 부어 물감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이렇게 말했잖아. 자기 생활도 반듯하게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릴 자격도 살 자격도 없다고." 끝이 둥그런 붓을 쥔 엄마는 캔버스를 향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가라면 불필요한 색은 절대 칠하지 않는다. "잊었다고 하면 안 되지." 나는 그 말에 옭매여 살아왔다. 믿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 일하든(p. 87).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사생활도 엉망이 되는 법인가 봅니다. 제가 술을 좋아해서 말이죠. 취하면 주사가 심한 편이라. 어느 날부터 그만 마누라에게 손을 올려붙이게 된 겁니다. 말수도 적고 얌전한 여자였으니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없었지요. 말대답 하나 하지 않고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제가 던져 깨진 컵과 술병 조각을 묵묵히 치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 후학을 위한다 생각하시고 들어보세요. 말 수가 적고 얌전한 여자만큼 끔직한 것도 없더군요. 어느 날, 제가 상점회 친목 여행을 다녀와 보니 마누라가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옷가지와 소지품도 함께 말입니다. 쓰레기통에는 마권을 맞출 때마다 좋아하겠다 싶어서 제가 사다 준 스카프며 머리핀이며 액세서리가 죄다 버려져 있고 말이죠. 그리고 얼마 후, 아키타로 돌아간 마누라에게서 이혼서류가 날아왔습니다. 자식도 없었으니 주저 않고 도장을 찍었죠. 십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저와 그 사람, 거울의 이쪽과 저쪽에 있었던 거겠죠....서로 손을 내밀어봐야 반대쪽이나 악수(p. 122)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 혹시 가려운 곳은 없으신지요(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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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북토크】 나도 남극에 가고 싶다
    내 나이 60살. 아직 가보지 못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싶고, 남극에도 가보고 싶다.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큰 아쉬움도 없다. 지구 한 귀퉁이에서 꼬물꼬물 거리다가 사라질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 대신 가본 사람의 글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봤다. 갈 곳은 많은데 여력과 기회는 없고 인생은 참으로 짧다! 눈으로는 망원경을 바라보지만 머리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뭔가가 석연찮은지를. 그런 끝에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뼈아픈 사실'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태까지 해온 패턴대로 남극 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각심도 들었다. 남극은 원래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고, 기지는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들이 모인 일종의 '피난처'였다. 겨우 이틀 경험했고 심지어 여름인데도 당연히 추웠고 바람이 강했고 길은 매끈하지 않았다. 외출을 위해서는 늘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내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했고 내 생활은 모두와 결속되어 있었다. 익(p. 75)명 속에 시간을 보내며 종일 하는 말이란 "아이스라테 한 잔 주세요"뿐인 대도시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었다. 나는 그날 다이어리에 "공동생활"이라고 적고 "사람들은 지금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나를 알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오해가 쌓이지 않게 그때그때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설명해야 한다고(p. 76). 에이레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 유령을 본 적이 있어" 하고 말했다. "유령을, 봤다고?" 나는 과거 시제를 강조하며 다시 물었다. 에이레네는 중성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마치 남극풍이 깃 든 것처럼. "응, 봤어?" 나는 유령을 믿지 않지만 유령이라는 단어를 좋아 한다. 그 텅 빈 존재가 지나갈 때 즉물적 사고에 빠져 있는 우리의 뒷덜미를 으스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으스스함으로 우리는 돌아보게 되고 의문을 갖게 된다. 그렇다, 유령은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으레 유령들도 존재한다. 에이레네는 남극 곳곳에서 유령을 느꼈고 그것은 주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과 관련 있는 듯했다. 유령을 보았다는 말의 놀라움은 이후 떠난 이들에 대(p. 202)한 애도로 이어졌다. 사실 이곳에 온 내내 내 평온을 간섭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평전에서 읽은 대목인데 배가 좌초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선원들이 가까스로 육지에 닿자 공포에서 벗어난 긴장과 분노를 펭귄을 살생하며 풀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남극을 탐험한 대부분의 사람이 펭귄을 요리해 먹었지만 그 살생은 폭력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인간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그래서 위험의 정도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을 생명들은 오직 분노의 발산을 위해 희생되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대륙, 여름볕 아래 생동하는 오늘의 남극은 그런 죽음의 이야기들을 곳곳에 품고 있었다. 섀클턴은 유능한 리더십을 발휘해 선원 모두를 감동적인 귀환으로 이끌었지만 그중 몇몇은 고향에 돌아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육체는 남극에서 돌아왔지만 이곳에서 겪은 트라우마는 유령처럼 그들의 삶을 맴돌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남극은 그들의 고난을 품어주었지만 도시는 그를 인간세계 에 섞여들지 못하는 유령으로 만들었을지도(p. 203). 펭마는 지난번과 다르게 한적했다. 내가 젓갈 냄새라고 미화했던 펭귄 분변 냄새도 훨씬 덜했다. 조약돌을 소중히 모아 만든 젠투펭귄들의 집은 비어 있었다. 밀려(p. 280)난 게 아니라 스스로 떠난 길이었다. 더 큰 세상으로. 좀 더 걸어가니 절벽 쪽에 한 무리의 젠투펭귄들이 모여 있었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으면 3월 이건만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권도 개중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아기 펭귄들은 내가 들고 있는 등산 스틱을 톡톡 쪼았다. 뾰족한 부분이 내 부리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나름 다정한 인사를 한 거라고.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 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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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4
  • 【북토크】 글쓰기는 방법론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남의 관심을 끄는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인데 주로 소설 쓰기에 관련된 것들이다. 소설가가 이 방법을 잘 숙지하면 제대로 된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설 창작이 아니라도 글쓰기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매우 유익한 책이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모든 지혜를 어떻게 이해시키고, 전달하며, 설득하고, 강요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에 직면했고, 해법을 찾아냈다. 스토리텔링이 답이다. 이야기야말로 뇌가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인간의 모든 사회와 문화를 퍼뜨린 도구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로 사고한다.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이야기는 인간을 둘러싼 이 어마어마한 세계에 전략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뇌는 유입되는 모든 정보로부터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생존을 위해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낸다. 그리고 과거에 겪었던 경험, 지금 느껴지는 감정,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토대로 해서 그 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뇌는 단순히 모든 것을 선착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다음 자신의 경험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편집하여 재구성한다. 기억과 생각과 사건 사이에 논리적 상관관계를 만들고 지도를 그려, 미래에 언제든 다시 참고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이야기는 경험의 언어다. 내 경험이든, 타인의 것이든, 허구의 주(p. 19)인공들 것이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 만큼이나 중요하다. 스스로의 경험에만 의존해야 했다면 아마 우린 아직 아기 옷을 벗지 못했을 것이다(p. 20). 그러면 대체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야기란, 달성하기 어려운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나중에 그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를 문학용어로 바꾸면 이렇다. '일어나는 일'은 플롯이다. '누군가'는 주인공이다. '목표'는 독자가 품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키는가'가 실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p. 23)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야기란 플롯이나 줄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의 변화에 관한 무엇이다. 이야기가 우리가 플롯을 따라 나아가게끔 허락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이야기는 결코 외부로의 여행이 아니다. 이야기는 내면으로의 여행이다(p. 24). 다른 사람들의 의견 어떤 시점에 이르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짜로 작품 전체를 읽어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생긴다. 당신이 아무리 고통스럽게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 않게 냉철했고 이야기의 모든 요소를 면밀히 조사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걸 한 사람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아무리 잘 해냈다고 해도, 결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p. 352)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이미 당신 안에 있다. 이야기 속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 글자들이 타인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마술을 부릴 거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이 오직 페이지 위에 적힌 단어만을 읽어야 하는 이들이? “지식의 저주”라는 말을 기억하라. 당신은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가장 무자비한 '독 자의 시선'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이 독자는 자신이 신뢰하는 작가 친구들일 수도 있고 일종의 작가 모임일 수도 있으며 돈을 받는 전문가일 수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세 개 다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건 마치 이웃 사람들한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좀 해주세요!’라는 부탁을 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쏠 것이다. 독자에겐 그 아이들이 당신 만큼 사랑스러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그들은 단순히 이야기에 방해가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유머작가 프랭클린 존스가 말했듯이 "솔직한 비평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친구, 친척, 지인,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서라면 더 욱더"(p. 353). 천재일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인내심이다.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드는 것은 오직 ‘글을 쓰는’ 행위다. 의자에 앉아라. 매일 매일, 어떤 핑계나 변명도 대지 말고. 잭 런던이 말한 것처럼 "빈둥거리면서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마라. 대신 몽둥이를 들고 그 뒤를 쫓아라". 헤밍웨이의 결론은 이렇다. "매일 작업하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일어나서 미루지 말고 써라."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은 오직 이렇게 했을 때뿐이다.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에 다가갈 때, 독자가 첫 문장에서부터 찾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진실이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말대로 "수많은 조각 과 부분들을 합쳐놓았을 때, 전체는 단순한 합계보다 더 크다.....창발성의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부분에도 내재되지 않은 것이 전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드러나게 될 것은 당신의 상상력이다. 독자는 이를 보고 또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뭘 기다리는가? 써라!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도, 독자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벌써부터 궁금해 하고 있다(p.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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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북토크】 평범하게 쓰는 것이 비범함이다
    일본 작가가 중국의 역사 인물을 통해 쓴 소설이다. 평이하게 읽었는데 출판사는 그를 "요절한 천재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내가 이 작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도 더 읽어 봐야겠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의 일일세. 여행을 떠나 여수 강가에서 묵던 날 밤이었네. 한숨 자고 나서 눈을 떴더니, 문밖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그 소리를 좇아 밖으로 나가 보았지. 그 소리는 어둠 속으로 멀어지면서 자꾸 나를 불렀네. 나는 생각 없이 그 소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 했네. 정신없이 달리는 동안 어느새 길은 숲속으로 접어들었고, 나도 모르게 네 발로 달리고 있지 뭔가. 어떤 이상한 힘이 몸속에 가득 찬 느낌이 들어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과 팔꿈치에 털이 난 듯했네. 조금 밝아진 후 골짜기 물에 내 모습을 비추었더니 난 이미 호랑이로 변했더군. 처음에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네. 이것은 꿈일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꿈속에서도 꿈을 꾼 적이 있거든.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망연자실했네. 그리고 두려웠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너무도 무서웠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일이야. 이유도 모른 채 주어진 현상과 상황을 받아들여 그저 살아가는 것이 우리 짐승들의 운명이라네(p. 37). 나는 곧 죽으려고 했지. 하지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눈 앞에서 달려가는 것을 본 순간, 내 안의 인간의 모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네. 다시 내 안의 인간이 눈을 떴을 때 내 입은 토끼의 피로 얼룩지고 주변은 토끼의 털로 어지럽혀져 있었다네. 이것이 호랑이로서의 첫 경험이었지. 그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어떤 짓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자네의 상상에 맡기겠네. 그래도 하루에 몇 시간 동안은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돌아온다네. 그때는 예전처럼 인간의 말도 할 수 있고 복잡한 사고도 견딜 수 있지. 경서의 장과 구절도 떠올라 읊조릴 수 있다네. 인간의 마음으로 호랑이로서의 자신이 저지른 잔악한 행동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돌이켜 볼 때가 가장 한심하고 두렵고 분하기도 하지. 그러나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그 몇 시간도 날이 거듭되면서 점차 줄어간다네. 이제까지는 줄곧 내가 왜 호랑이가 되었을까 이상하게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왜 이전에 인간이었을까 생각하고 있질 않겠나. 참으로 무서운 일일세. 이제 조금 더 지나면 내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p. 38)은 짐승으로서의 습관 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릴 걸세. 옛 궁궐의 초석이 차츰 모래흙 속에 묻혀 버리듯이 말일세. 그렇게 되면 결국 나는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고 한 마리의 호랑이로서 미쳐 돌아다니며 오늘처럼 길에서 자네를 만나도 몰라보고, 자네를 잡아먹고도 아무런 죄의식조차 갖지 못할 걸세. 인간이나 짐승이나 원래는 다른 존재였던 것 일까? 처음에는 그것을 기억하다가 점차 잊어버리고는, 아예 처음부터 자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의 짐승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p. 39) 자공이 공자에게 기묘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죽은 사람은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죽은 후 지각의 유무, 혹은 영혼의 멸불멸에 대한 의문이었다. 공자의 답 또한 묘했다. "죽은 이가 지각이 있다고 하면 효자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장례를 치르려고 함이 염려스럽고, 또 죽은 이가 지각이 없다고 하면 불효 자식들이 그 부모를 버리고 장례를 치르려 하지 않음이 걱정스럽도다." 예상이 빗나간 대답이었기 때문에 자공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물론 공자도 자공이 질문한 의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인 공자는 이 똑똑한 제자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바꾸어 보려고 한 것이었다. 자공은 스승의 대답이 자못 불만스러워 자로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자로는 그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죽음 자체보다도 스승의 사생관을 알고 싶은 생각이(p. 102) 조금 일었기 때문에, 언젠가 죽음에 관해 여쭤 보았다. "아직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관해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공자의 대답이었다. "과연!" 하고 자로는 아주 탄복해 버렸다. 그러나 자공 은 또 한 번 골탕을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p. 103). 5개월 후 사마천은 다시 붓을 잡았다. 기쁨도 흥분도 없는 그저 일의 완성에 대한 의지만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p. 183)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목적지를 향해 가는 나그네같이. 천천히 원고를 써 내려갔다. 이미 태사령 직에서는 면직되었다. 그 후 무제는 조금 후회가 되었는지 그를 중서령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에게 관직의 출척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전의 논객 사마천은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웃는 일도 화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결코 초연한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악령에 흘린 듯 침묵하는 그의 풍모 속에서 굉장한 무엇을 느꼈다. 밤에 잠자는 시간을 아껴 가며 그는 일을 계속했다. 가족에게는 그가 자살할 자유를 누리고 싶어 일을 서두르는 것으로 보였다. 처참한 노력을 1년 정도 계속한 후, 그제야 그는 삶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쁨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그의 완강한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고, 풍모 속의 굉장한 무엇에도 부드러움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원고를 계속 써 가는 중에 환관이라든가 엄노라든가 하는 문구를 써야 하는 대목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혼자 거실에 있을 때에도, 밤에 침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문득 이 굴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갑자기 인두에 데인 듯(p. 184)한 뜨거운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나 신음하며 사방을 서성이다가, 이윽고 이를 악물고 자신을 진정시키곤 했다(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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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6
  • 【북토크】 책, 인간의 놀라운 발명품
    1881년에 영국에서 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당시에도 책을 수집하거나 심지어 도둑질하는 일들이 있었다. 책은 오늘날 손쉽게 구해 읽을 수 있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필사본으로 밖에 볼 수 없어 책은 귀했고 비쌌다. 이때에도 고서의 가치를 알고 수집하는 이들이 있었다. 책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나름 흥미로운 책이었다. 변변치 않은 2펜스짜리 보고에서 찾아낸 평범한 책을 둘러싼 일화들도 있다. 이런 일화에서 우리는 수집가(p. 52)가 지닌 열정의 속성, 그 순수한 기쁨의 성격을 사소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다. 수집가는 이따금 단순한 초판본이 아니라 좀더 개인적인 성격의 문학적 유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최근 운 좋은 한 수집가는 고서 거리에서 한때 셸리가 소장하던, 속표지에 시인의 서명이 들어 있는 『오시안ossian』을 사들였다. 다른 수집가는 희귀본으로 통하는, 브뤼셀의 출판업자 포펀스가 펴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운명의 양극단에 맞서는 강건한 현자 Le Sage Resolu conte lune et lautre Fortune』를 한 권 갖고 있다. 한때 나폴레옹의 간수였던 허드슨로 경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다. 이 책은 어쩌면 그 금욕적인 격언을 통해 세인트헬 레나섬에 갇힌 수인, 양극단의 운명을 모두 겪었던 인물의 영혼을 다독여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인 유물로서의 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장 자크 루소의 소유였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mitatio Christi』다. 최근 이 책의 행복한 소유주가 된 트낭 드 라투르 씨가 어떻게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1827년 라투르 씨는 루브르강변을 걷고 있었다. 강변의 고서점에 진열된 책 중에서 라투르 씨는 낡아빠진(p. 53)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발견했다. 다른 애서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라투르 씨에게는 엘제비어판이 아닌 이상, 시장에 돌아다니는 이 작품의 판본을 일일이 조사하는 습관이 없었다. 엘제비어에서 찍어낸 그 유명한 연대 불명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가치는 상당하다. 그러나 그날 어떤 행운의 작용으로, 아마도 어떤 소크라테스적 악마의 속삭임으로 인해 라투르 씨는 낡아빠진 작은 책 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은 1751년 파리에서 출간된 판본으로 헛장에 어떤 이름이 적혀 있었다. 라투르 씨는 '장 자크 루소'라는 글씨를 읽어냈다. 루소의 친필이 틀림없었다. 훌륭한 애서가라면 응당 그렇듯 라투르 씨도 루소의 필적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라투르 씨는 책값으로 75상 팀을 낸 다음 퐁 데자르 다리를 건너 자신의 장정기술 자가 일하는 가게로 향했다. 그곳에 루소의 필적을 복제한 글씨가 수록된 루소의 저작 한 권을 맡겨두었기 때문이다. 라투르 씨는 걸어가면서 책을 들춰보았고 여백에서 루소가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복제본과 비교한 결과 그 이름이 루소의 친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행복에 젖은 라투르 씨는 자신이 일하는 관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친구인 V 후작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p. 54)자에 정통한 후작은 루소의 서명을 알아보았지만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전에 라투르 씨는 신성한 책장 사이에서 시든 꽃잎 몇 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꽃잎이 루소가 가장 좋아한 페리윙클의 꽃잎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의 친구였다. 젊은 시절의 루소처럼 진정한 프랑스인이었던 라투르 씨는 페리윙클 꽃잎을 보고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라투르 씨는 얼마나 흥분했던지 그날 밤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한 가지 수수께끼는 라투르 씨가 루소의 모든 저작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언급한 부분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 이 낡은 책은 제본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러시아 가죽 상자 안에 고이 모셔졌다. 라투르 씨는 "이 비천한 세상에서 애서가가 누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기쁨"이 더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오직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투르 씨는 루소의 『미발표 전집oeuvres Inedites』을 뒤적거리던 중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1763년 쓴 그 편지에서 루소는 모티에 트 라베르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권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1764년은 기억할 만한 해였다. 루소의 『고백록』(p. 55)에 따르면 이 해는 샤르메트 Ies Charmetes 마을에서 바랑 부인이 페리윙클 이야기를 한 이래 처음으로 폐리윙클 한 송이를 눈여겨본 루소가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때였다. 트닝 드 라투르 씨가 발견한 것은 장 자크 루소의 고결한 눈을 감성의 눈물로 적시게 했던, 바로 그 페리윙클의 꽃잎이었던 것이다(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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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5
  • 【북토크】 인류 건강을 위한 의료진의 희생적인 노력들
    코로나19는 내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전염병이었다. 메르스와 사스도 있었지만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대규모 전염병은 앞으로도 더 발병할 것이다. 과거 큰 질병이 국가와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우리가 공동으로 살고 있는 지구를 잘 관리하는 것이 이러한 질병을 피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스페인독감이 남긴 교훈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염병의 범유행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과학자들은 여전히 스페인독감이 남긴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이 병이 어떻게 그토록 광범위하게, 그토록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는지를 이해하는 한편 병의 확산을 늦추는 데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스페인독감에는 효과적인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유행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전염병학자들이 '비약물적 중재 조치(Non-pharmaceutical Intervention, NPI)'라고 부르는 방법에 의지해야 했다. 비약물적 중재 조치로는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집에 머무르기, 외출할 경우 다른 사람과 안전한 거리 유지하기, 모임 안 하기 등이 있다. 2020년 초반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가면서 공중보건 당국에서는 사람들에게 1918년에도 효과가 있었던 규칙을 그대로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 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약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비약물적(p. 153) 중재 조치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학교와 회사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집에 머물면서 오로지 식료폼을 구하기 위해서만 외출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해야 하는지에(p. 154)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이 갈렸다. 이 문제에 대해 스페인독감을 겪었던 도시들의 경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1918년의 자료를 연구한 전염병학자들은 시기가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교회나 극장, 학교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발 빠르게 폐쇄한 도시들에서는 감염률이 낮았고 사망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규칙을 완화하자마자 독감은 다시 돌아왔다. 과학자들은 1918년 범유행 당시 도시들의 유행 곡선을 비교한 결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계속 실천한 도시에서는 2차 유행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스페인독감(p. 155) 유행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집에 머무는 것이었다(p. 156). 에볼라가 걸어온 길 과학자들은 기상 위성의 자료를 이용하여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를 유행시킨 환경 조건의 퍼즐을 다음과 같이 완성했다. 기나긴 가뭄이 몇 주 동안 이어진 비로 끝이 났다. 마침내 기니의 도시와 마을 주변의 농장과 과수원에 열매가 가득 맺혔다. 잘 익은 과일 향기가 배고픈 동물들을 숲 밖으로 이끌었다. 유인원과 박쥐 들은 나무 아래 한데 모여 잔치를 벌였다. 과일박쥐는 먹이를 지저분하게 먹는 동물로, 반쯤 먹다 남긴 과일을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p. 184) 과일 조각을 먹은 유인원은 과일에 묻은 박쥐의 침이나 배설물을 통해 병원균을 섭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유인원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사냥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에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p. 185).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답을 알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언제 이 모든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손쉬운 대답은 “신규 감염률이 감소할 때 이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 일 것이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집단 면역”을 형성하게 된 결과, 바이러스가 더는 새로운 숙주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는 백신이 개발될 수도 있다. 같은 질문에 대한 어려운 대답은 "앞으로 우리 삶은 절대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일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코로나19는 동물 몸 안에 사는 바이러스에서 시작되었다.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졌고 그 후 고작 몇 주 만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와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세계에 알리는 경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우리 이웃 생태계와 균형을 맞추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인류의 건강은 야생생물의 건강, 그리고 야생생물 안에 살고 있는 미생물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숲의 나무를 쓰러트리고 개간한다면, 그 행동은 우리 자신의 안전에 해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p. 246). 1918년 스페인독감이라는 마지막 범유행을 겪고 난 뒤 사람들은 그 사건을 과거로 묻어 두고 새로운 세기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고, 그 새로운 세기에 질병을 물리치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모든 전염병의 유행과 범유행을 통해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는 기억하고 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전염병을 다룬 이 책을 덮을 준비가 되었을 때, 이것이 우리 미생물 친구에게 듣는 마지막 소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좋든 나쁘든 미생물도 우리 세계의 일부이며 미래에는 아마도 더 많은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전염병 유행과 범유행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인간 전염병학자와 동물 전염 병학자를 포함한 질병 탐정들에게 계속 의지할 것이다(p. 247). 장구한 전염병의 역사를 보면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100년마다 범유행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19세기에는 콜레라가 대유행했고, 20세기 초에는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인플루엔자가 유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급격한 생태 환경의 파괴로 동물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이된 경우다. 21세기에 들어 전 지구적인 온난화 현상과 생태 환경의 파괴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도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전염병은 인간에게 여전히 위협적이며 한 사회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앞으로 21세기는 코로나19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뉠 것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새로운 사회로 가는 계기를 전염병이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고 있다(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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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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