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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사람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세상을 본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돈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맞으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과연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책은 처음 봤다. 여러 만성 질병으로 시달리는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다르게, 낯설게 보는데 “아 그렇구나”하는 공감을 했다. 아마 나도 어떤 큰 질병에 걸리면 더 이 책에 공감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삶과 경험이 소중하고 필요하며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다른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것임을 절감한다. 동일한 고통은 없다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비정규직 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을수록 건강이 나쁘다. IMF 구제금융 직후 80퍼센트 이상의 가구가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고 하니, IMF 위기는 전 국민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질병이환율(질병에 걸리는 비율)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IMF 이전인 1995년에 비해 1998년에는 전체적으로 2.8배가 늘었고 급성의 경우 2.2배, 만성은 1.9배 늘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 힘들었지만, 그중 누가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들의 희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기록되지 않으면, 이렇듯 희생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더 쉽게 반복된다. ‘IMF 20년'을 주제로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의 의견이 대대적으로 쏟아진 바 있다. 그러나 맨 앞줄에서 희생을 감당하도록 떠밀려나간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과 분노가 일렁인다. IMF 구제금융을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극복했다면 그것은 분명 희생자들을 밟고 올라선 결과다. 당시 사회의 위험에 맞서 안전판과 에어백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그 고통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쌓이면서 통증과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그 고통은 몸에 스며들어 질병으로 확장 되기 쉽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이 더 나쁜 것은 분명한 차별의 결과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지만, 실제 건강수명은 그다지 나은 게 없다는 보고들은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 우선 해고와 일방적인 희생 분담으로 삶과 몸이 아팠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당신들의 고통과 질병이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결과였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큰글자책 pp. 240-242).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은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나는 할머니 손에 많이 자라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닮고 싶은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해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자주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결국 입원을 하셨다. 의사는 할머니의 몸 이곳저곳을 검사했고, 몸에 연결되는 기계가 하나둘 늘어났다. 검사를 위해 89세 노인의 팔에서 매일 피를 뽑자 손등과 발등은 온통 푸르고 붉은 멍으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다"며 집에 가고 싶어 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집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의사가 안 된다는데 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었다. 의사가 선택한 검사를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며 의료진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손가락에 연결시킨 기계를 뽑아 버리거나, 피검사를 하러 오면 받지 않겠다고 팔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여러 상황 끝에 의사는 할머니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제거했고, 퇴원을 허락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손수 링거 바늘을 뽑아 병실 바닥에 내던지고는 당당히 퇴원에 성공하셨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메주콩을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예전보다 느려진 손으로 어느 해보다 많은 양의 된장을 담갔다. 그렇게 얼마간 된장 담그기를 끝내고 장독대 정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평생 아들에게만 의지해온 당신답게, 이번이 아들에게 담가주는 마지막 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뒤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찬거리를 위해 시금치와 콩나물을 잔뜩 다듬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입맛이 없다며 끼니를 건너고 누웠다. 어머니가 죽을 챙겨드렸지만 한 모금도 들지 않고 그렇게 꼬박 하루 반을 보냈다. 이틀째 저녁 할머니는 찬물 한 잔을 아주 맛있게 들고, 주무시다가 영면에 드셨다. 그 이틀 내내 어머니는 할머니 곁에서 손과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50년 가까이 당신의 며느리로 살면서 서럽고 맺혔던 일에 대해 한없이 마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그 모든 일에 대해 마음으로 사과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평생 처음으로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다른 가족과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만 나누었으나, 자신이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과하고 조금은 가벼이 떠나셨다. 인간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떠나갈 때를 알고, 살아온 세월을 마무리하며, 사랑과 사과와 이별을 전하고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온전함으로 충만한 일인가! 하지만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제 드물다. 현대의학은 노화조차 질병으로 규정하고,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중환자 다루듯 치료하려 든다. 노인이 죽음과 가까워지며 겪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에 대해 표준 수치를 들어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요즘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에 머물다가도 입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부분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실제로는 서걱거리는 환자복을 입고 낯선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소생 불가능한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치료 효과도 없는 인공호흡기와 약물 등으로 연명치료를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환자는 결국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기도 한다. 그나마 이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평소 거부 의사를 밝혀놓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이 모두는 일상이나 종교 영역에 머물던 죽음을 의료가 관장하며 생긴 문화다. 나도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죽음이 삶을 마무리하기 시작했을 때, 몸으로 가늠하며 준비하고 싶다. 선명하게 찾아온 죽음을 첨단 의료로 늦추지 않고, 살아온 나날 속의 사람 관계 공간에 작별을 전하고 싶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몸의 흐름에 따라 가볍게 곡기를 줄이고, 홀가분하게 생을 떠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인류가 맞이해온 존엄한 죽음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내가 병원 침대가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는 돌봄노동이다. 할머니에게는 일방적인 헌신을 감내한 며느리가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할머니가 마지막 세대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보편화된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의료의 과정으로 흡수된 데 있지만, 죽어가 는 이를 집에서 돌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도 있다. 요양보호사 등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돌봄 노동을 100퍼센트 사회화하기는 어렵다. 집안 내 여성이 도맡아온 돌봄노동을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죽어가는 이를 돌보고 애도할 시간을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손상이 아닌, 삶의 충만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 모두의 죽음이 자연에 스미는 평온함이길 기원한다(큰글자책 pp. 33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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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최근 기독신문 사설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별 희한한 소리와 반응을 겪었다. 나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문장 표현의 모호함 그리고 오류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찌라시 언론이 기독신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 남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왜 남의 언론을 공격하느냐? 이런 글 쓰게 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너에게 어드바이스 해달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앞으로 기독신문 기사를 자세히 읽겠다”라는 것이냐 등등의 말을 들었다. 방금 어느 한 책을 읽다가 이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이런 데서 위로를 편집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물었다. 교정지에 손 많이 대고 참견이나 꼬투리 잡는 멘트 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고, 많이 고칠수록 고맙다고 했다. 신초샤(일본 출판사)는 워낙 꼼꼼해 교정지가 새까맣게 돼서 오는데 정말 고맙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교정지도 그렇게 새까맣게 온다고 하니 교정지가 빨갛게 와도 좌절하지 마세요, 동료 여러분(권남희,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pp. 55). 교단 소식지인 기독신문 글에 오류가 있어 애정으로 지적한 것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참으로 노답이다. 만약 내가 다른 언론사 글이라면 이렇게 여러 번 읽고 오류를 지적하는 피드백을 썼을까?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언론사의 글은 잘 읽지도 않지만, 우연히 봤는데 오타가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다. 반면 친근한 언론사같은 경우 오타를 알려준다. 오타 하나가 그 기사와 신문사의 격을 얼마나 떨어트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내 기사를 읽고 오타를 지적해 주면 너무나 감사하다. 그만큼 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기사는 내용은 말할 것 없이 오타와의 전쟁이다. 부목사 때 주보 제작을 맡으면 오타와의 전쟁이었다. 오타가 나서 욕을 먹기도 하고, 주보 전체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정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까다로운 장로 이름이 잘 못 나가 소동이 나기도 하는 등의 일을 겪다 보니 책을 읽으면 오타가 자주 눈에 띈다. 내 기사도 여러 번 교정하는데, 나중에 읽다 보면 또 오타가 있는 것을 볼 때 등에 식은땀이 난다. 그나마 인터넷 신문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지면 신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인지라 오타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매사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걸 지적했다고 이런 말들이 들리니 이제 기독신문에서 오타와 非文을 발견하면 타산지석으로 삼고 끝내야겠다. 나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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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기독신문 2월 4일 자 사설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기에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관심 두고 읽었다. 기독신문은 우리 교단의 교단지이며 사설은 그 신문사의 격(格)을 보여주는 논조 글이기에 몇 가지를 지적할까 한다. 첫째, 논조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논자는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신학교와 관련한 가짜뉴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앞에서 가짜뉴스로 피해를 당한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는데 “신학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신학교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짜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둘째, 非文이 눈에 띈다. 비문은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 뉴스에 흔들려 교계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가? 교계가 거짓 뉴스에 휘둘려 사탄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 아닌가?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이것은 앞 문단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사설 분량이 많이 신문사 담당자가 문장을 잘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기독신문사 정도면 기사를 체크하는 담당자들이 여럿일 텐데 이런 명백한 오류가 수정되지 않은 것을 보니 놀랍다. 지면 신문이야 수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인터넷판이라도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사설 제목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 사설의 제목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온상(溫床)이란 “범죄의 온상”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상, 세력 따위가 자라나는 바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사설의 제목 뜻은 『교계가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교계가 어떻게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될 수 있는가? 교계가 가짜뉴스의 생산지라는 것인가? 가짜 뉴스는 일반 언론계가 극심하다고 본다. 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그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고 본다. 교계의 가짜 뉴스는 그에 비하면 덜하고 금방 탄로난다. 어떤 매체고 어느 기자가 썼는지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굳이 제목을 그렇게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라리 『교계에서 가짜뉴스를 퇴출하자』, 『교계의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말자』등으로 하는 것이 사설 논지와 더 맞지 않겠는가? 교단의 회원으로서, 작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언론인으로서 앞으로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을 자세히 봐야겠다. 그래서 오류가 줄어들 수 있다면 이 또한 교단을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설]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세상은 가짜뉴스로 홍역을 앓고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퍼뜨리기 위해 뉴스가 아닌데도 뉴스의 형식으로 퍼뜨리는 정보 또는 그 매개체 등을 의미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오보나 날조, 거짓 정보, 루머, 유언비어, 패러디, 풍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뉴스 전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가짜뉴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는 파급력이 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가 퍼진 게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사상이나 돈 그리고 여자문제와 관련된 가짜뉴스는 참으로 치명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본인이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고 그 피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일반국민의 가짜뉴스에 대한 인식’을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해당 내용 중에 왜곡된 가짜뉴스에 관해서 응답자의 40.1%만이 가짜뉴스로 인식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잘못된 가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어 버린다는 것에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가짜뉴스의 피해는 너무도 크다. 이미 퍼진 가짜뉴스를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진실이 밝혀졌더라도 가짜 정보의 속성상 모든 잘못을 다시 완벽하게 주워 담고 정확하게 수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는 어느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도 총회장을 비롯해 앞장서 일하는 이들이 무차별적 폭격 대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소한 교계에선 가짜뉴스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각종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실정이다. 가짜뉴스의 근원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을 악용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더욱 비열하고 악하다. 이제는 가짜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근거 없이 확인 안 된 것을 퍼 나르기만 해도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에서 정부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목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해당 뉴스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며, 특별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재미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도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게 사회법이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유튜브를 통한 공격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서 정직해야 한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로 인해 상대방에게 엄청난 상처는 물론 회복 불가능 상태로 몰고 가는 경우가 참 많다. 가짜뉴스는 분명 큰 죄악이다.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거룩성의 핵심은 정직함에 있다. 무분별한 정보 홍수 시대다. 누구나 영상과 글을 올릴 수 있는 시대를 살지만, 거기에 따르는 윤리 지침이나 실천 방안은 너무도 걸음마 수준이다. 지금의 천박한 가짜뉴스 전성시대에 우리 교단이 선제적으로 적극적인 가짜뉴스 퇴치 운동과 정보클린 운동을 펼쳐나가기를 바란다.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기독교 문화를 우리 교단부터 만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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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탈무드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친구와 정치, 종교 및 돈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최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국일보 2월 3일 인터넷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대전서부경찰서는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A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일 오전 2시 20분쯤 대전 서구 도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50대 B씨를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범행 직후 119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B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경찰에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이 격해져서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범행 경위를 조사한 뒤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도 여야로 나뉘어 원수 사이가 됐다. 과거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우익이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현재 상황이 그렇다고 본다. 실제 극우는 지난달에 서부지방법원을 난입해 때려 부수는 폭거를 벌였다. 방화에 실패하고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제 폭도들은 사법부의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생을 망칠 것이다. 자기 정치 견해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이에 대해 논쟁하지도 말자. 그런다고 바뀌지도 않는다. 감정만 상할 뿐이다. 너무 정치에 매몰되지 말고, 우선은 헌법재판부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 대책이 없다. 국가를 위해서도 빨리 이 혼란이 종식되어야 한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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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 말이 많다. “죄가 있다”, “죄가 없다”는 말이다. 단톡이 뜨겁고, 포털 기사에 대한 댓글이 뜨겁다. 글 하나로 친구가 원수가 되고, 단톡이 폭파된다. 정말 전국이 난리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윤석열에 대한 최종 판단은 헌재에서 결정 난다. 그 결정에 따라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하든지 아니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뭐라 떠들든지 아무 소용 없고, 쓸데없다. 아무리 어떤 주장을 한다 해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논쟁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다. 나 또한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생각과 주장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 현 정권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은 헌법재판관들이 쥐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일 것이다. 원치 않는 대통령들이 있던 많은 지난 세월을 살아왔는데 2년 반 정도 못 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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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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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 사람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세상을 본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돈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맞으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과연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책은 처음 봤다. 여러 만성 질병으로 시달리는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다르게, 낯설게 보는데 “아 그렇구나”하는 공감을 했다. 아마 나도 어떤 큰 질병에 걸리면 더 이 책에 공감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삶과 경험이 소중하고 필요하며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다른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것임을 절감한다. 동일한 고통은 없다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비정규직 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을수록 건강이 나쁘다. IMF 구제금융 직후 80퍼센트 이상의 가구가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고 하니, IMF 위기는 전 국민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질병이환율(질병에 걸리는 비율)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IMF 이전인 1995년에 비해 1998년에는 전체적으로 2.8배가 늘었고 급성의 경우 2.2배, 만성은 1.9배 늘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 힘들었지만, 그중 누가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들의 희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기록되지 않으면, 이렇듯 희생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더 쉽게 반복된다. ‘IMF 20년'을 주제로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의 의견이 대대적으로 쏟아진 바 있다. 그러나 맨 앞줄에서 희생을 감당하도록 떠밀려나간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과 분노가 일렁인다. IMF 구제금융을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극복했다면 그것은 분명 희생자들을 밟고 올라선 결과다. 당시 사회의 위험에 맞서 안전판과 에어백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그 고통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쌓이면서 통증과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그 고통은 몸에 스며들어 질병으로 확장 되기 쉽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이 더 나쁜 것은 분명한 차별의 결과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지만, 실제 건강수명은 그다지 나은 게 없다는 보고들은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 우선 해고와 일방적인 희생 분담으로 삶과 몸이 아팠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당신들의 고통과 질병이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결과였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큰글자책 pp. 240-242).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은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나는 할머니 손에 많이 자라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닮고 싶은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해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자주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결국 입원을 하셨다. 의사는 할머니의 몸 이곳저곳을 검사했고, 몸에 연결되는 기계가 하나둘 늘어났다. 검사를 위해 89세 노인의 팔에서 매일 피를 뽑자 손등과 발등은 온통 푸르고 붉은 멍으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다"며 집에 가고 싶어 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집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의사가 안 된다는데 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었다. 의사가 선택한 검사를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며 의료진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손가락에 연결시킨 기계를 뽑아 버리거나, 피검사를 하러 오면 받지 않겠다고 팔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여러 상황 끝에 의사는 할머니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제거했고, 퇴원을 허락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손수 링거 바늘을 뽑아 병실 바닥에 내던지고는 당당히 퇴원에 성공하셨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메주콩을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예전보다 느려진 손으로 어느 해보다 많은 양의 된장을 담갔다. 그렇게 얼마간 된장 담그기를 끝내고 장독대 정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평생 아들에게만 의지해온 당신답게, 이번이 아들에게 담가주는 마지막 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뒤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찬거리를 위해 시금치와 콩나물을 잔뜩 다듬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입맛이 없다며 끼니를 건너고 누웠다. 어머니가 죽을 챙겨드렸지만 한 모금도 들지 않고 그렇게 꼬박 하루 반을 보냈다. 이틀째 저녁 할머니는 찬물 한 잔을 아주 맛있게 들고, 주무시다가 영면에 드셨다. 그 이틀 내내 어머니는 할머니 곁에서 손과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50년 가까이 당신의 며느리로 살면서 서럽고 맺혔던 일에 대해 한없이 마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그 모든 일에 대해 마음으로 사과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평생 처음으로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다른 가족과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만 나누었으나, 자신이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과하고 조금은 가벼이 떠나셨다. 인간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떠나갈 때를 알고, 살아온 세월을 마무리하며, 사랑과 사과와 이별을 전하고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온전함으로 충만한 일인가! 하지만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제 드물다. 현대의학은 노화조차 질병으로 규정하고,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중환자 다루듯 치료하려 든다. 노인이 죽음과 가까워지며 겪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에 대해 표준 수치를 들어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요즘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에 머물다가도 입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부분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실제로는 서걱거리는 환자복을 입고 낯선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소생 불가능한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치료 효과도 없는 인공호흡기와 약물 등으로 연명치료를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환자는 결국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기도 한다. 그나마 이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평소 거부 의사를 밝혀놓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이 모두는 일상이나 종교 영역에 머물던 죽음을 의료가 관장하며 생긴 문화다. 나도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죽음이 삶을 마무리하기 시작했을 때, 몸으로 가늠하며 준비하고 싶다. 선명하게 찾아온 죽음을 첨단 의료로 늦추지 않고, 살아온 나날 속의 사람 관계 공간에 작별을 전하고 싶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몸의 흐름에 따라 가볍게 곡기를 줄이고, 홀가분하게 생을 떠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인류가 맞이해온 존엄한 죽음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내가 병원 침대가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는 돌봄노동이다. 할머니에게는 일방적인 헌신을 감내한 며느리가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할머니가 마지막 세대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보편화된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의료의 과정으로 흡수된 데 있지만, 죽어가 는 이를 집에서 돌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도 있다. 요양보호사 등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돌봄 노동을 100퍼센트 사회화하기는 어렵다. 집안 내 여성이 도맡아온 돌봄노동을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죽어가는 이를 돌보고 애도할 시간을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손상이 아닌, 삶의 충만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 모두의 죽음이 자연에 스미는 평온함이길 기원한다(큰글자책 pp. 33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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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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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 최근 기독신문 사설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별 희한한 소리와 반응을 겪었다. 나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문장 표현의 모호함 그리고 오류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찌라시 언론이 기독신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 남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왜 남의 언론을 공격하느냐? 이런 글 쓰게 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너에게 어드바이스 해달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앞으로 기독신문 기사를 자세히 읽겠다”라는 것이냐 등등의 말을 들었다. 방금 어느 한 책을 읽다가 이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이런 데서 위로를 편집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물었다. 교정지에 손 많이 대고 참견이나 꼬투리 잡는 멘트 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고, 많이 고칠수록 고맙다고 했다. 신초샤(일본 출판사)는 워낙 꼼꼼해 교정지가 새까맣게 돼서 오는데 정말 고맙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교정지도 그렇게 새까맣게 온다고 하니 교정지가 빨갛게 와도 좌절하지 마세요, 동료 여러분(권남희,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pp. 55). 교단 소식지인 기독신문 글에 오류가 있어 애정으로 지적한 것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참으로 노답이다. 만약 내가 다른 언론사 글이라면 이렇게 여러 번 읽고 오류를 지적하는 피드백을 썼을까?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언론사의 글은 잘 읽지도 않지만, 우연히 봤는데 오타가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다. 반면 친근한 언론사같은 경우 오타를 알려준다. 오타 하나가 그 기사와 신문사의 격을 얼마나 떨어트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내 기사를 읽고 오타를 지적해 주면 너무나 감사하다. 그만큼 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기사는 내용은 말할 것 없이 오타와의 전쟁이다. 부목사 때 주보 제작을 맡으면 오타와의 전쟁이었다. 오타가 나서 욕을 먹기도 하고, 주보 전체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정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까다로운 장로 이름이 잘 못 나가 소동이 나기도 하는 등의 일을 겪다 보니 책을 읽으면 오타가 자주 눈에 띈다. 내 기사도 여러 번 교정하는데, 나중에 읽다 보면 또 오타가 있는 것을 볼 때 등에 식은땀이 난다. 그나마 인터넷 신문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지면 신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인지라 오타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매사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걸 지적했다고 이런 말들이 들리니 이제 기독신문에서 오타와 非文을 발견하면 타산지석으로 삼고 끝내야겠다. 나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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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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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 기독신문 2월 4일 자 사설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기에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관심 두고 읽었다. 기독신문은 우리 교단의 교단지이며 사설은 그 신문사의 격(格)을 보여주는 논조 글이기에 몇 가지를 지적할까 한다. 첫째, 논조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논자는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신학교와 관련한 가짜뉴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앞에서 가짜뉴스로 피해를 당한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는데 “신학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신학교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짜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둘째, 非文이 눈에 띈다. 비문은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 뉴스에 흔들려 교계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가? 교계가 거짓 뉴스에 휘둘려 사탄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 아닌가?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이것은 앞 문단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사설 분량이 많이 신문사 담당자가 문장을 잘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기독신문사 정도면 기사를 체크하는 담당자들이 여럿일 텐데 이런 명백한 오류가 수정되지 않은 것을 보니 놀랍다. 지면 신문이야 수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인터넷판이라도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사설 제목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 사설의 제목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온상(溫床)이란 “범죄의 온상”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상, 세력 따위가 자라나는 바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사설의 제목 뜻은 『교계가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교계가 어떻게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될 수 있는가? 교계가 가짜뉴스의 생산지라는 것인가? 가짜 뉴스는 일반 언론계가 극심하다고 본다. 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그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고 본다. 교계의 가짜 뉴스는 그에 비하면 덜하고 금방 탄로난다. 어떤 매체고 어느 기자가 썼는지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굳이 제목을 그렇게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라리 『교계에서 가짜뉴스를 퇴출하자』, 『교계의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말자』등으로 하는 것이 사설 논지와 더 맞지 않겠는가? 교단의 회원으로서, 작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언론인으로서 앞으로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을 자세히 봐야겠다. 그래서 오류가 줄어들 수 있다면 이 또한 교단을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설]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세상은 가짜뉴스로 홍역을 앓고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퍼뜨리기 위해 뉴스가 아닌데도 뉴스의 형식으로 퍼뜨리는 정보 또는 그 매개체 등을 의미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오보나 날조, 거짓 정보, 루머, 유언비어, 패러디, 풍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뉴스 전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가짜뉴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는 파급력이 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가 퍼진 게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사상이나 돈 그리고 여자문제와 관련된 가짜뉴스는 참으로 치명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본인이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고 그 피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일반국민의 가짜뉴스에 대한 인식’을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해당 내용 중에 왜곡된 가짜뉴스에 관해서 응답자의 40.1%만이 가짜뉴스로 인식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잘못된 가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어 버린다는 것에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가짜뉴스의 피해는 너무도 크다. 이미 퍼진 가짜뉴스를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진실이 밝혀졌더라도 가짜 정보의 속성상 모든 잘못을 다시 완벽하게 주워 담고 정확하게 수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는 어느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도 총회장을 비롯해 앞장서 일하는 이들이 무차별적 폭격 대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소한 교계에선 가짜뉴스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각종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실정이다. 가짜뉴스의 근원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을 악용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더욱 비열하고 악하다. 이제는 가짜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근거 없이 확인 안 된 것을 퍼 나르기만 해도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에서 정부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목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해당 뉴스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며, 특별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재미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도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게 사회법이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유튜브를 통한 공격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서 정직해야 한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로 인해 상대방에게 엄청난 상처는 물론 회복 불가능 상태로 몰고 가는 경우가 참 많다. 가짜뉴스는 분명 큰 죄악이다.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거룩성의 핵심은 정직함에 있다. 무분별한 정보 홍수 시대다. 누구나 영상과 글을 올릴 수 있는 시대를 살지만, 거기에 따르는 윤리 지침이나 실천 방안은 너무도 걸음마 수준이다. 지금의 천박한 가짜뉴스 전성시대에 우리 교단이 선제적으로 적극적인 가짜뉴스 퇴치 운동과 정보클린 운동을 펼쳐나가기를 바란다.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기독교 문화를 우리 교단부터 만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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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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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 탈무드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친구와 정치, 종교 및 돈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최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국일보 2월 3일 인터넷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대전서부경찰서는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A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일 오전 2시 20분쯤 대전 서구 도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50대 B씨를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범행 직후 119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B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경찰에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이 격해져서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범행 경위를 조사한 뒤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도 여야로 나뉘어 원수 사이가 됐다. 과거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우익이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현재 상황이 그렇다고 본다. 실제 극우는 지난달에 서부지방법원을 난입해 때려 부수는 폭거를 벌였다. 방화에 실패하고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제 폭도들은 사법부의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생을 망칠 것이다. 자기 정치 견해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이에 대해 논쟁하지도 말자. 그런다고 바뀌지도 않는다. 감정만 상할 뿐이다. 너무 정치에 매몰되지 말고, 우선은 헌법재판부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 대책이 없다. 국가를 위해서도 빨리 이 혼란이 종식되어야 한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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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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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 말이 많다. “죄가 있다”, “죄가 없다”는 말이다. 단톡이 뜨겁고, 포털 기사에 대한 댓글이 뜨겁다. 글 하나로 친구가 원수가 되고, 단톡이 폭파된다. 정말 전국이 난리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윤석열에 대한 최종 판단은 헌재에서 결정 난다. 그 결정에 따라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하든지 아니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뭐라 떠들든지 아무 소용 없고, 쓸데없다. 아무리 어떤 주장을 한다 해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논쟁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다. 나 또한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생각과 주장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 현 정권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은 헌법재판관들이 쥐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일 것이다. 원치 않는 대통령들이 있던 많은 지난 세월을 살아왔는데 2년 반 정도 못 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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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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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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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 사람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세상을 본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돈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맞으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과연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책은 처음 봤다. 여러 만성 질병으로 시달리는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다르게, 낯설게 보는데 “아 그렇구나”하는 공감을 했다. 아마 나도 어떤 큰 질병에 걸리면 더 이 책에 공감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삶과 경험이 소중하고 필요하며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다른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것임을 절감한다. 동일한 고통은 없다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비정규직 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을수록 건강이 나쁘다. IMF 구제금융 직후 80퍼센트 이상의 가구가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고 하니, IMF 위기는 전 국민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질병이환율(질병에 걸리는 비율)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IMF 이전인 1995년에 비해 1998년에는 전체적으로 2.8배가 늘었고 급성의 경우 2.2배, 만성은 1.9배 늘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 힘들었지만, 그중 누가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들의 희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기록되지 않으면, 이렇듯 희생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더 쉽게 반복된다. ‘IMF 20년'을 주제로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의 의견이 대대적으로 쏟아진 바 있다. 그러나 맨 앞줄에서 희생을 감당하도록 떠밀려나간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과 분노가 일렁인다. IMF 구제금융을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극복했다면 그것은 분명 희생자들을 밟고 올라선 결과다. 당시 사회의 위험에 맞서 안전판과 에어백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그 고통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쌓이면서 통증과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그 고통은 몸에 스며들어 질병으로 확장 되기 쉽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이 더 나쁜 것은 분명한 차별의 결과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지만, 실제 건강수명은 그다지 나은 게 없다는 보고들은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 우선 해고와 일방적인 희생 분담으로 삶과 몸이 아팠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당신들의 고통과 질병이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결과였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큰글자책 pp. 240-242).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은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나는 할머니 손에 많이 자라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닮고 싶은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해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자주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결국 입원을 하셨다. 의사는 할머니의 몸 이곳저곳을 검사했고, 몸에 연결되는 기계가 하나둘 늘어났다. 검사를 위해 89세 노인의 팔에서 매일 피를 뽑자 손등과 발등은 온통 푸르고 붉은 멍으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다"며 집에 가고 싶어 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집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의사가 안 된다는데 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었다. 의사가 선택한 검사를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며 의료진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손가락에 연결시킨 기계를 뽑아 버리거나, 피검사를 하러 오면 받지 않겠다고 팔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여러 상황 끝에 의사는 할머니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제거했고, 퇴원을 허락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손수 링거 바늘을 뽑아 병실 바닥에 내던지고는 당당히 퇴원에 성공하셨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메주콩을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예전보다 느려진 손으로 어느 해보다 많은 양의 된장을 담갔다. 그렇게 얼마간 된장 담그기를 끝내고 장독대 정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평생 아들에게만 의지해온 당신답게, 이번이 아들에게 담가주는 마지막 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뒤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찬거리를 위해 시금치와 콩나물을 잔뜩 다듬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입맛이 없다며 끼니를 건너고 누웠다. 어머니가 죽을 챙겨드렸지만 한 모금도 들지 않고 그렇게 꼬박 하루 반을 보냈다. 이틀째 저녁 할머니는 찬물 한 잔을 아주 맛있게 들고, 주무시다가 영면에 드셨다. 그 이틀 내내 어머니는 할머니 곁에서 손과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50년 가까이 당신의 며느리로 살면서 서럽고 맺혔던 일에 대해 한없이 마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그 모든 일에 대해 마음으로 사과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평생 처음으로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다른 가족과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만 나누었으나, 자신이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과하고 조금은 가벼이 떠나셨다. 인간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떠나갈 때를 알고, 살아온 세월을 마무리하며, 사랑과 사과와 이별을 전하고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온전함으로 충만한 일인가! 하지만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제 드물다. 현대의학은 노화조차 질병으로 규정하고,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중환자 다루듯 치료하려 든다. 노인이 죽음과 가까워지며 겪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에 대해 표준 수치를 들어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요즘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에 머물다가도 입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부분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실제로는 서걱거리는 환자복을 입고 낯선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소생 불가능한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치료 효과도 없는 인공호흡기와 약물 등으로 연명치료를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환자는 결국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기도 한다. 그나마 이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평소 거부 의사를 밝혀놓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이 모두는 일상이나 종교 영역에 머물던 죽음을 의료가 관장하며 생긴 문화다. 나도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죽음이 삶을 마무리하기 시작했을 때, 몸으로 가늠하며 준비하고 싶다. 선명하게 찾아온 죽음을 첨단 의료로 늦추지 않고, 살아온 나날 속의 사람 관계 공간에 작별을 전하고 싶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몸의 흐름에 따라 가볍게 곡기를 줄이고, 홀가분하게 생을 떠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인류가 맞이해온 존엄한 죽음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내가 병원 침대가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는 돌봄노동이다. 할머니에게는 일방적인 헌신을 감내한 며느리가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할머니가 마지막 세대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보편화된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의료의 과정으로 흡수된 데 있지만, 죽어가 는 이를 집에서 돌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도 있다. 요양보호사 등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돌봄 노동을 100퍼센트 사회화하기는 어렵다. 집안 내 여성이 도맡아온 돌봄노동을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죽어가는 이를 돌보고 애도할 시간을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손상이 아닌, 삶의 충만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 모두의 죽음이 자연에 스미는 평온함이길 기원한다(큰글자책 pp. 33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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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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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 최근 기독신문 사설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별 희한한 소리와 반응을 겪었다. 나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문장 표현의 모호함 그리고 오류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찌라시 언론이 기독신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 남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왜 남의 언론을 공격하느냐? 이런 글 쓰게 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너에게 어드바이스 해달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앞으로 기독신문 기사를 자세히 읽겠다”라는 것이냐 등등의 말을 들었다. 방금 어느 한 책을 읽다가 이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이런 데서 위로를 편집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물었다. 교정지에 손 많이 대고 참견이나 꼬투리 잡는 멘트 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고, 많이 고칠수록 고맙다고 했다. 신초샤(일본 출판사)는 워낙 꼼꼼해 교정지가 새까맣게 돼서 오는데 정말 고맙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교정지도 그렇게 새까맣게 온다고 하니 교정지가 빨갛게 와도 좌절하지 마세요, 동료 여러분(권남희,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pp. 55). 교단 소식지인 기독신문 글에 오류가 있어 애정으로 지적한 것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참으로 노답이다. 만약 내가 다른 언론사 글이라면 이렇게 여러 번 읽고 오류를 지적하는 피드백을 썼을까?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언론사의 글은 잘 읽지도 않지만, 우연히 봤는데 오타가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다. 반면 친근한 언론사같은 경우 오타를 알려준다. 오타 하나가 그 기사와 신문사의 격을 얼마나 떨어트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내 기사를 읽고 오타를 지적해 주면 너무나 감사하다. 그만큼 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기사는 내용은 말할 것 없이 오타와의 전쟁이다. 부목사 때 주보 제작을 맡으면 오타와의 전쟁이었다. 오타가 나서 욕을 먹기도 하고, 주보 전체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정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까다로운 장로 이름이 잘 못 나가 소동이 나기도 하는 등의 일을 겪다 보니 책을 읽으면 오타가 자주 눈에 띈다. 내 기사도 여러 번 교정하는데, 나중에 읽다 보면 또 오타가 있는 것을 볼 때 등에 식은땀이 난다. 그나마 인터넷 신문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지면 신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인지라 오타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매사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걸 지적했다고 이런 말들이 들리니 이제 기독신문에서 오타와 非文을 발견하면 타산지석으로 삼고 끝내야겠다. 나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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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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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 기독신문 2월 4일 자 사설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기에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관심 두고 읽었다. 기독신문은 우리 교단의 교단지이며 사설은 그 신문사의 격(格)을 보여주는 논조 글이기에 몇 가지를 지적할까 한다. 첫째, 논조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논자는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신학교와 관련한 가짜뉴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앞에서 가짜뉴스로 피해를 당한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는데 “신학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신학교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짜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둘째, 非文이 눈에 띈다. 비문은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 뉴스에 흔들려 교계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가? 교계가 거짓 뉴스에 휘둘려 사탄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 아닌가?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이것은 앞 문단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사설 분량이 많이 신문사 담당자가 문장을 잘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기독신문사 정도면 기사를 체크하는 담당자들이 여럿일 텐데 이런 명백한 오류가 수정되지 않은 것을 보니 놀랍다. 지면 신문이야 수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인터넷판이라도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사설 제목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 사설의 제목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온상(溫床)이란 “범죄의 온상”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상, 세력 따위가 자라나는 바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사설의 제목 뜻은 『교계가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교계가 어떻게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될 수 있는가? 교계가 가짜뉴스의 생산지라는 것인가? 가짜 뉴스는 일반 언론계가 극심하다고 본다. 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그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고 본다. 교계의 가짜 뉴스는 그에 비하면 덜하고 금방 탄로난다. 어떤 매체고 어느 기자가 썼는지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굳이 제목을 그렇게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라리 『교계에서 가짜뉴스를 퇴출하자』, 『교계의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말자』등으로 하는 것이 사설 논지와 더 맞지 않겠는가? 교단의 회원으로서, 작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언론인으로서 앞으로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을 자세히 봐야겠다. 그래서 오류가 줄어들 수 있다면 이 또한 교단을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설]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세상은 가짜뉴스로 홍역을 앓고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퍼뜨리기 위해 뉴스가 아닌데도 뉴스의 형식으로 퍼뜨리는 정보 또는 그 매개체 등을 의미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오보나 날조, 거짓 정보, 루머, 유언비어, 패러디, 풍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뉴스 전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가짜뉴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는 파급력이 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가 퍼진 게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사상이나 돈 그리고 여자문제와 관련된 가짜뉴스는 참으로 치명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본인이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고 그 피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일반국민의 가짜뉴스에 대한 인식’을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해당 내용 중에 왜곡된 가짜뉴스에 관해서 응답자의 40.1%만이 가짜뉴스로 인식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잘못된 가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어 버린다는 것에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가짜뉴스의 피해는 너무도 크다. 이미 퍼진 가짜뉴스를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진실이 밝혀졌더라도 가짜 정보의 속성상 모든 잘못을 다시 완벽하게 주워 담고 정확하게 수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는 어느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도 총회장을 비롯해 앞장서 일하는 이들이 무차별적 폭격 대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소한 교계에선 가짜뉴스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각종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실정이다. 가짜뉴스의 근원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을 악용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더욱 비열하고 악하다. 이제는 가짜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근거 없이 확인 안 된 것을 퍼 나르기만 해도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에서 정부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목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해당 뉴스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며, 특별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재미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도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게 사회법이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유튜브를 통한 공격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서 정직해야 한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로 인해 상대방에게 엄청난 상처는 물론 회복 불가능 상태로 몰고 가는 경우가 참 많다. 가짜뉴스는 분명 큰 죄악이다.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거룩성의 핵심은 정직함에 있다. 무분별한 정보 홍수 시대다. 누구나 영상과 글을 올릴 수 있는 시대를 살지만, 거기에 따르는 윤리 지침이나 실천 방안은 너무도 걸음마 수준이다. 지금의 천박한 가짜뉴스 전성시대에 우리 교단이 선제적으로 적극적인 가짜뉴스 퇴치 운동과 정보클린 운동을 펼쳐나가기를 바란다.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기독교 문화를 우리 교단부터 만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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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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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 탈무드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친구와 정치, 종교 및 돈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최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국일보 2월 3일 인터넷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대전서부경찰서는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A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일 오전 2시 20분쯤 대전 서구 도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50대 B씨를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범행 직후 119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B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경찰에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이 격해져서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범행 경위를 조사한 뒤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도 여야로 나뉘어 원수 사이가 됐다. 과거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우익이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현재 상황이 그렇다고 본다. 실제 극우는 지난달에 서부지방법원을 난입해 때려 부수는 폭거를 벌였다. 방화에 실패하고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제 폭도들은 사법부의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생을 망칠 것이다. 자기 정치 견해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이에 대해 논쟁하지도 말자. 그런다고 바뀌지도 않는다. 감정만 상할 뿐이다. 너무 정치에 매몰되지 말고, 우선은 헌법재판부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 대책이 없다. 국가를 위해서도 빨리 이 혼란이 종식되어야 한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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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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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 말이 많다. “죄가 있다”, “죄가 없다”는 말이다. 단톡이 뜨겁고, 포털 기사에 대한 댓글이 뜨겁다. 글 하나로 친구가 원수가 되고, 단톡이 폭파된다. 정말 전국이 난리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윤석열에 대한 최종 판단은 헌재에서 결정 난다. 그 결정에 따라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하든지 아니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뭐라 떠들든지 아무 소용 없고, 쓸데없다. 아무리 어떤 주장을 한다 해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논쟁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다. 나 또한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생각과 주장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 현 정권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은 헌법재판관들이 쥐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일 것이다. 원치 않는 대통령들이 있던 많은 지난 세월을 살아왔는데 2년 반 정도 못 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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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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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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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40년 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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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급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제 곧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흩어지는 병사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하나님께 엎드렸다. 하지만 사무엘은 책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새로운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사울에게 있어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그 성공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하나님도 수단이었을 뿐이다. 위급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 말이다. 다급할 때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삼상 28:7-11). 사울에게는 무당이든 우상이든 상관없었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울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3계명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해버리고 모독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이 예배인 줄 알고 도와준다. 나무도 가져와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준다. 옆에서 짐승도 잡아준다.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지만 예배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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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울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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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 무속(巫俗)은 “무당과 관련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모처럼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좌우를 보니 여전히 무당집이 건재하다. 나는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 동네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으로 배정됐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미아리 고개를 넘는 동안 3년간 지겹게 점집들을 봤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구약 성경을 다 외운다는 김건희 씨는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웬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천공, 건진법사 등등이 등장하고, 여론 조작에 앞장선 명태균은 자기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주도한 전직 장성 중에는 점집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이런 무속인들이 난리를 치니 어지럽다. 이 시국에 한국교회와 목사, 장로, 신자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결코 변하지 않을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자신과 무고한 후대가 져야 할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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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힘이 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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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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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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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