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법의학, 예술작품을 해부하다-문국진 저자(글),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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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분야의 전문가는 제 역할을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사실을 표현할 때가 있다. 이를 법의학으로 해석할 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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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보이는 것

최근에 이르러서야 의사와 과학자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들이 털어놓은 '죽음의 이미지 체험'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특이한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임사체험 Near Death Experienc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임사체험자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현 상이 있다. 그 하나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이탈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이를 '체외이탈 Out of Body Experience' 이라고 한다. 체외이탈 현상과 더불어 빛이 온몸을 감싸기도 하며, 넓은 꽃밭을 거닐기도 하고, 죽은 가족들과 상봉하기도 한다(p. 17). 체외이탈 연구는 19세기 말 스위스의 지질학자 알베르트 하임이 시작했다. 그는 알프스를 등반하다가 조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사경을 헤매던 중 체외이탈을 경험했다. 그 후 하임은 비슷한 경험을 한 등산가와 군인 등의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미국에서는 체외이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신과 의사 레이먼드 무디 2세는 당시 사망 판정을 받은 후 살아난 사람들의 체험을 수집해 《사후의 세계》(1975)라는 책을 펴냈다. 그 후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도 체외이탈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사후 생》(1991)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렇게 보고된 사례가 지금까지 수십만 건에 달한다. 그들의 체험이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혼의 체외이탈 →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터널 체험 → 빛과의 만남 → 저승 도착 → 지나온 생에 대한 반성적 회고 → 장벽과의 만남 → 육체로의 회귀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촉감은 있지만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까지 보고된 체외이탈이나 임사체험 경험에 대해서는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적인 체험이건 아니면 단지 뇌에서 느낀(p. 18) 환각이나 환상이건 간에 그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다. 따라서 체외이탈과 임사체험처럼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 체험되는 현상을 묶어 '임사현상 Near Death Phenomena' 으로 표현하기로 한다(p. 19).

 

한편 임사 체험자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고백이 있다. "저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워 이승과 비교할 수도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저세상을 보고 난 후에는 이승에서의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예는 자살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외이탈을 체험한 뒤 아주 캄캄한 곳에 있었으며,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아 강한 고립감이 들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빛의 존재를 만난 이는 한 명도 없었다(p. 21).

 

이 글을 쓰면서 죽음의 이미지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 관심이 갔다. 임사현상 체험자들의 진술에(p. 22) 의하면 일단 죽음의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 순간 고통 없이 편안하며,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는 점에 주목 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는 인생의 마지막 여행으로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p. 23).

 

정신분석 전문가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작품에서 표현한 뇌전증과 살인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심리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웠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는 간질과 살인의 상관관계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에서 뇌전증 발작과 환희, 격분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것은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실제로 측두엽 뇌전증 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측두엽 뇌전증이란 무엇일까? 뇌전증의 일종인 측두엽 뇌전증은 의식의 상실이나 경련을 동반하지 않는다. 환자는 발작이 일어나면 청각, 시각, 후각 및 촉각에 이상을 느끼며 잠시 동안 망연자실 상태가 되거나 입을 씰룩거리며 움직이는 증상이 나타난다. 또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특색 있는 증상을 보이는 게슈빈트증후군Geschwind syndrome 이라는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종교나 도덕성에 과잉으로 집착하며, 성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글을 쓰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하이퍼그라피Hypergraphia라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p. 37).

 

고대 그리스의 신상들과 조각 작품은 모두 나체이다. 나체에는 평등사상인 '너나 나나 벗으면 똑같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것으로, 거짓의 옷을 벗어버린 인간의 진실함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 거짓이 없음을 의미한다. 클림트는 나체화를 그리는 확고한 신념에 의한 독창성과 예술적 특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들리는 잡음을 무시하고 극복할 수 있었다. 빈대학의 학부 회화를 둘러싼 잡음, 특히 나체의 여인에 대한 시비로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 하라는 제의는 단호하고 보기 좋게 거절 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았던 제작비(p. 69)는 전액 환불하고, '학부 회화' 최종판은 자신이 소유하였다. 만일 대학당국이 예술가는 장인과는 달리 어떤 구속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에서 영원한 것을 창조한다는 것을 참작하였다면, 작품에 대한 시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클림트는 여성성의 무한한 힘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나체의 진실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으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고고했던 대학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야기된 사건이었다(p. 70).

 

채플린 친자확인 사건

한평생 웃음을 전하며 살아온 20세기 최고의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 1889~1977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과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에서 우리는 슬픔을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은 남을 웃기고 돌아서서 혼자 울던 사람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영화인 채플린의 사생활은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다. 특히나 여자관계가 복잡했는데, 어린 여자들과의 스캔들로 '병아리 잡는 매Chicken Hawk'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채플린이 배우 지망생 조안 배리Joan Barry 1920~1996를 알게 된 것은 1941년이었다. 그는 배리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보고 연극학교에 입학 시켰으며, 그녀를 배우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1942년 이상행동을 일삼으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보이는 배리와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후 배리가 임신을 해 1943년 10월에 출산을 했다는 점이다. 배리는 갓 태어난 아기가 채플린의 아이라고 말했고, 채플린은 이를 부인해 결국 소송으로 번지게 되었다. 수태일수와 배란일수를 계산한 결과, 배리는 1942년 12월 23일에서 24일 사이에 임신했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보고가 나왔다. 따라서 문제(p. 133)는 임신 가능한 날짜인 12월 23일을 전후해 3일이라는 기간 동안 두사람이 동침한 사실이 있는가의 여부로 집중되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는 이 사실에 대해 채플린은 없다고 했고, 배리는 있다고 주장했다. 배리의 진술에 의하면 1942년 2월까지 채플린과 동거한 것이 사실이며, 두 사람이 헤어진 후 채플린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채플린은 더 이상 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리는 채플린에게 집착했다. 급기야 1942년 12월 23일 밤 권총을 숨기고 채플린을 찾아갔는데, 그가 만나주지 않자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자고 있던 채플린은 깜짝 놀랐고, 총을 들고 있는 배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날 밤 두 사람은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이상은 배 리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이를 적극 부인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친자확인 혈형검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채플린은 0형이었고, 배리는 A형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B형이었다. 0형의 아버지와 A형의 어머니 사이에서는 B형의 아이가 출생할 수 없다. 결국 ABO식 혈형검사로 채플린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검증은 재판의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배심원들은 배리의 손을 들어주었고, 재판을 담당한 킨케트 판사는 채플린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양육비로 주급 75달러와 변호사료 5,000달러 지급을 명하였다(1945년 5월 2일의 판결)(p. 134).

이렇게 확실한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고 비논리적 판결을 내린 이면에는 배리의 법정 증언이 큰 역할을 했다. 배리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채플린을 살해할 생각으로 권총까지 준비해 찾아갔다. 하지만 놀라고 당황한 채플린이 거짓으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결과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고 배심원들에게 눈물로 호소한 것이다. 배리는 또한 재판 결과에 따라 아이와 함께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쳤다. 그녀의 연기에 사로잡힌 배심원들은 그녀를 동정하여 채플린 패소라는 판결 을 내렸다. 이렇듯 배심원제 재판은 법 이외의 여러 요소에 의해 좌지우지될 우려가 다분히 있다. 지금도 이러한 판례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최첨단 기술의 특허 침해를 놓고 미국의 배심원제 재판과 한국 법원의 판결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는 것도 이러한 사례로 볼 수 있다(p. 135).

 

두 화가의 다르게 표현된 그림으로 제롬이 그린 밧세바는 '요부'에 해당되며, 팡탱 라투르가 그린 밧세바는 '숙명의 여인'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 만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밧세바가 왜 하필 그날 저녁에 목욕을 했느냐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달거리가 끝나면 몸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하여 정결례(레 12:2)로 몸을 씻어야 했다. 사실 밧세바는 월경을 막 마친 후였고, 율법대로 부정함을 씻기 위해 정결례로서 목욕을 한 것이었다.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하거나, 왕을 유혹하기 위한 목욕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기록을 보더라도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p. 143).

 

한편, 단 한 번의 육체적 관계로 임신이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한 논란은 강간 사건에서 자주 등장한다. 동물들의 배란 양식은 여러 형태인데, 야생 토끼나 낙타는 수컷이 있어야만, 즉 수컷이 교미 동작을 취해야만 배란이 되고 평소에는 배란이 되지 않는다. 원숭이처럼 공포를 느껴야 배란이 되는 동물도 있다. 그래서 수 원숭이는 교미 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암컷이 안고 있는 새끼를 뺏어서 던지고 때리기까지 한다. 새끼 원승이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암컷은 공포를 느끼게 되면서 배란이 이루어지고, 발정이 되며, 교미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공포 배란 현상이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강간이나 간음같이 공포나 불안감이 조성되는 분위기에서 배란이 되는 여성이 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성교로 임신이 되었다는 예는 강간이 나 간음 사건에서 드문 현상은 아니다(p. 152). 앞에서 월경이 막 끝나고 정결례를 하는 밧세바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그녀는 요부가 아니며, 다윗 왕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술수를 부린 것도 아니라고 얘기하였다. 이번에는 밧세바의 임신에 대해 여러 정황을 기반으로 추측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밧세바가 다윗 왕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무언가 공포나 불안을 느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공포 배란으로 임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밧세바를 요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다(p. 154).

 

수많은 걸작을 남긴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 1840~1917은 작품 만큼이나 여성 편력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공분을 산 것은 젊고 유망한 여류 조각가의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버림으로써 정신이상이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조각가 지망생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파리의 에콕 데 보자르라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당시 최고의 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학교 교장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로명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때 카미유의(p. 173)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로댕은 마흔두 살이었다. 처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고, 로댕은 그녀에게 작품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제안 했다. 로댕의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했던 카미유는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였다. 로댕의 많은 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인 것은 역시 카미유이었다. 로댕 역시 그녀의 실력을 신뢰하여서 작품의 섬세한 마무리 단계를 그녀에게 맡기곤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여 빛나는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고, 이렇게 작품의 작업을 함께해 나가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적으로 혼인관계는 아니었지만, 로댕은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로즈 역시 열여덟 살 때 로댕의 모델이 되었는데, 그 후 1년 뒤에 로댕의 아이를 낳게 된다. 로댕이 로즈를 모델로 택했던 것은 농촌 출신이었던 그녀의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 때문이었는데, 바로 로댕이 원했던 모델이었다. 또 그녀는 매우 순종적이었다. 그래서 로댕은 그녀를 말할 때 "로즈는 동물적이야"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녀와 일생을 같 이 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물적이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댕은 자신의 화실에 불러들인 모델을 작업만 마치고 그대로 보낸 적이 없었다. 모델들은 한결같이 그의 뜨거운 입김을 쏘이고 나서야 화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여성 편력은 매우 심해 관계를 맺은 여인은 알려진 것만도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로즈는 그의 난잡한 여자관(p. 174)계에 대해 단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어떨 때는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 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로댕은 일생을 그녀와 함께하였고, 죽기 16일 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로댕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포즈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다는 구실로 모델들의 몸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이에 에밀 졸라는 "그는 모델들의 아름다운 나신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을 눈으로 애무하고, 때로는 손으로 애무하면서 키스하고 어루만졌으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녀들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낮에는 그녀들을 그렸고, 밤에는 그녀들을 품에 안았다. 그의 여자 누드 작품의 중심축은 그와 모델들 간의 섹스였던 것이다." 로댕이 카미유를 유혹할 때도 이러했다. 카미유는 로댕과 동거중인 로즈를 신경 쓰며 이야기하면 로댕은 "너하고 정식으로 결혼할 거야" 라는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로댕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모델들과의 난잡한 관계를 이어갔다. 로댕은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여인을 농락했고, 카미유도 로댕에게는 그런 여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자 1890년 결국 카미유는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였다(p. 175).

 

뱀의 독이 사람 몸에 들어오면 어떤 변화와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을(p. 214)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죽음에 뱀독을 이용했다는 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나토 의과대학의 비오 그란 마레 박사는 독사설이나 핀에 의한 독액 설을 부정하였다. 또 여왕의 명에 의해 방문을 꼭 잠갔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클레오파트라는 탄이 연소될 때 발생되는 유독가스의 효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장례를 구실로 탄과 이를 태울 도구를 쉽게 방에 들여올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사망 상황을 묘사한 글에서 여왕은 침대 위에, 한 몸종은 발밑에 그리고 또 다른 몸종(p. 215)은 방문을 향해 쓰러져 죽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일산화탄소 중독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의 장면은 프랑스의 화가 릭싱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1874)이라는 작품에 마레 박사의 설명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과 마레 박사의 의견은 법의학적으로도 수긍이 간다. 여러 명의 사람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 그대로 누워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식중에 살기 위해 문 쪽을 향해 기어가다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망자가 여러 방향의 체위를 취하고 죽는 것이 집단으로 연탄가스에 중독사했을 때 보이는 특이한 현상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상황이 화가 릭싱의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와 두 몸종의 동시 죽음을 보았을 때 일산화탄소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생존 시 여왕은 향료를 매일같이 사용하여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향기가 풍기는 향의 애호가로, 평생을 향기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최후에 이르러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무취의 일산화탄소를 맡으며 그 속으로 사라졌다(p. 217).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대한 의문

차이콥스키의 사인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그가 콜레라로 사망하였다고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즉 차이콥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이 된 콜레라에 감염된 것은 11월 1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그대로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1세기 동안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자살설이 제기되었다. 자살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이콥스키가 정성을 다하여 작곡했다고 자랑하는 〈비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그리 시원(p. 221)치 않은 것에 참담함을 느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인에 대해 일종의 강요된 자살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차이콥스키 박물관의 기록 보관소에 근무하던 알렉산드라 오르로와라는 여직원의 증언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녀는 1940년 차이콥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준비하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발견 하였다. 주치의가 차이콥스키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세밀하였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 의심되는 점은 콜레라는 전염병인데 기록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격리되지도 않았고 면회도 자유로웠다. 그래서 오르로와 여사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이에 대해 알아봤는 데, 차이콥스키는 그 당시 권세가였던 스텐보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공작은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고, 황제는 당시 검찰 부총장이던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야코비에게 그의 처벌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 동성애는 신에 대한 모독이며, 최대의 파렴치범으로 여겨져 극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다.

야코비 부총장은 차이콥스키와는 법률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동기생(대법관, 판사, 변호사 등)들이 모여 상의한 끝에 불명예스러운 사형이나 시베리아 유형보다는 명예재판을 열어 그가 수용한다면 비밀리에 사약을 내리기로 한다.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제안에 응했고, 순순히 사약을 받았다(p. 222).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입원 당시의 차트를 보면 콜레라의 중요한 증상 중 하나인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필자는 오르로와 여사의 수기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 조문객들이 줄을 지었는데, 조문객들은 그의 손이나 이마에 입맞춤하였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이를 보면 그의 사망이 콜레라가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재판 후에 사약설이 맞는데 과연 독극물 중에서 복용 하면 쌀뜨물 같은 설사를 하는 증상을 보이는 독물이 있는지이다. 법의학적 기록에는 극량에 달하는 비소를 복용하는 경우 콜레라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가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발표하기에 앞서 상당한 검토와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콜레라로 발표해도 될 만한 증거를 구비한 후 사약을 내린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p. 223).

 

우리나라에도 유디트와 같이 적장을 술로 유인해 살해한 의녀로는 주논개가 있다. 논개에 대 한 기록은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 전해지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은 논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여식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채 어머니와 함께 숙부에게 의탁하게 된다. 숙부는 이웃 마을의 김동헌이라는 사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버린다. 이를 알게 된 논개 모녀는 외가로 피신했지만, 잡혀 관아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감 최경회에 의해 무죄 방면된다.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고마운 처사에 감동한 논개는 자원해서 최 현감의 시중을 들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다. 이에 최 현감이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최 연감은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1593년에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고, 진주성에서(p. 253)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공세에 밀려 불리해졌고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함으로써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고 만다.

논개는 원수를 갚기 위해 적장을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기회만 엿보던 중 왜군이 진주성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연다는 소문에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논개는 적의 선봉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지목하여 술을 권하고 교태를 부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동료 기생들에게 반지와 가락지를 달라고 하여 열 손가락에 모두 끼고는 촉석루 아래로 내려가 물위에 솟아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게야무라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바위로 건너가 논개를 끌어안았다. 논개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적장의 몸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왜병들은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속으로 들어간 게야무라와 논개는 영영 떠오르지 못하고, 세차게 흐르는 남강의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1956년에는 '논개사당'을 건립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을 열고 있다. 두 사람의 의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굳은 결심으로 적장을 유(p. 254)인하여 살해하였다. 그러나 여인으로써 과연 가능하겠는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한다. 아무리 술에 만취되었다 할지라도 적장의 목이 그렇게 쉽게 날아갈 수 있을까? 틴토레토와 젠틸레스키의 그림처럼 유디트 혼자서가 아니라 하녀가 도왔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 논개의 경우를 보면 가녀린 여인의 팔로 적장의 몸을 꽉 껴안았다고 해도, 과연 힘이 센 남자가 뿌리칠 수 없을까? 이를 예측한 논개는 동료 기생들의 가락지와 반지를 받아 열 손가락에 모두 끼었다. 일단 손깎지를 끼면 자물쇠처럼 물리게 하여 풀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법의학적인 조언을 하면 사람이 죽을 때 극도로 긴장하고, 어떤 근육에 힘을 강하게 주고 죽으면 그 근육에 죽음과 동시에 강직이 일어난다. 이것을 즉시성 시강이라고 한다. 논개의 경우에도 즉시성 시강이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힘이 센 남자라 할지라도 꼼짝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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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8】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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