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주제: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
  • 아이들 포함 300여명 참석해 뜨거운 관심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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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사진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부설 교회선교연구소(소장 유해석 교수)와 총회 토마스 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위원장 태준호 장로)가 주관한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가 3월 30일 오전 11시 총신대학교 신관 5층 콘서트홀에서 열려 예배하고 4명이 발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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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석 교수는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 발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포럼의 의의를 밝혔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16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순교 사건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신학적 담론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는 본 포럼의 개최는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1866년 평양에서 발생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 개신교 선교사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교회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를 둘러싼 담론들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초기 연구자들의 관점, 그리고 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제시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상충된 견해들이 형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포럼은 이러한 2세기에 걸친 토마스 담론들을 학문적으로 성찰하고 평가하는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 포럼의 발제자들은 토마스 선교사 연구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왜곡되거나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온 인식들을 바로잡고, 한국교회사 속에서 그의 위치를 올바로 정립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총신대학교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와 총회 토마스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포럼으로서, 학계와 교계의 높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백령도에 건립될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의 취지와도 뜻을 함께하며, 그의 선교와 순교가 지닌 의미를 오늘의 시점에서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본 포럼은 토마스 선교사 순교 160주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중심으로, 순교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담론의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 신학과 실천 속에서 재구성하며 선교적 열정을 새롭게 일깨우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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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도하는 태준호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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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김형곤 장로 

1부 예배는 태준호 장로의 인도로 전 장로부총회장 김형곤 장로가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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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총장이 계 5:5-6을 본문으로 ‘사자와 어린 양’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포럼을 통해 한국교회가 무엇인지, 한국교회 성도가 누구인지, 한국교회를 어떻게 살린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자로서 왕이시다. 하지만 재물 되어 죽는 양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재림의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나 먼저 죽임 당하신 양으로 오신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해 확산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순교로서 세워진 교회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전했고,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고 순교했다. 순교의 정신이 교회를 순결하게 했다. 오늘 포럼은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날에 한다. 더 깊이 십자가를 생각하는 포럼이 되기를 바라고 순교에 동참하는 다짐이 있기를 바란다. 피를 뿌려 순교하지 않더라도 순교의 정신으로 욕망과 자아를 죽여 교회를 살리도록 하자.”라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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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하는 고광석 목사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고광석 교수가 축도 후 교회선교연구소 소장 유해석 교수가 광고하고 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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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포럼은 총신대학 선교대학원 김영민 교수가 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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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제는, 이은선 안양대학교 명예교수가 ‘해방 이전의 토마스 선교사 순교 담론 형성 과정 연구’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해방이전에 토마스의 순교 담론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했던 활동과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남아있는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들은 성경반포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적은 그가 나누어준 성경책을 받았거나 후에 신앙을 가져 토마스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질 수 밖에 없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1909년 이전에는 토마스의 성경반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마펫 선교사는 1893년에 부모가 토마스가 나누어 준 성경책을 받은 사람을 만났는데, 이것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1909년이다. 1894년에 그라함리 선교사는 개인 편지에서 토마스가 1865년에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고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와서 세상을 떠난 것을 설명한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년에 게일은 처음으로 증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조선군이 먼저 공격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변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1909년 마펫 선교사는 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토마스가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고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인이며 성서공회 소속 권서이며, 죽을 때까지 성경을 반포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여기서 그가 성경을 반포하다 죽었다는 언급이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1909년에 토마스 기념 위원회가 마펫을 의장으로 조직되어 1910년에 토마스 기념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다 하지 못하고 1915년에 해산되었다. 바로 이 무렵 미국에서 감리고의 존스 선교사가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평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25년에 「평양노회 지경 각교회 사기」에서 처음으로 평양의 지도적인 목회자들인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목사가 토마스를 순교자라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1926년부터 오문환이 적극적으로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공표하면서 사람들과 대담을 통해 증언을 채록하였고 외국에 편지를 보내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1926년 음력 7월 말에 평양양란에 대한 저술을 통해 토마스를 순교자라는 것과 첫 번째 장로교 목사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에 1928년에 『도마스 목사전」을 출판하였는데, 200여명의 증언을 통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이 순교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1866년 9월 5일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이러한 목격자들을 만나 그가 성경을 나누어주다가 죽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공표한 것이 1909년의 마펫 선교사였고, 그의 이야기를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면담하여 상세하게 밝혀낸 분이 오문환이다. 그러므로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사건의 목격자들이 한 증언들이 마펫, 오문환을 통해 모아져서 1920년대 중반에 확정 되어 한국교회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장로교 목사라는 것은 마펫 선교사에 의해 잘못 알려졌는데, 오문환은 1926년까지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는 1928년 『도마스 목사전』을 쓰면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을 제시했다. 그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스 회중교회 출신이며, 1840년이 아니라 1839년에 태어났고, 런던대학교 뉴칼리지를 졸업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므로 1928년이 되면 오문환은 토마스 목사가 웨일스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이며 런던의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런던선교회에 소속되어 중국에 파송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토마스 선교사는 어떻게 장로교와 연결되나? 오문환은 토마스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권서로 한국에 온 것을 장로교회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마펫이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권서 토마스 선교사 - 만주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 -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로 연결시킨 것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28년에 이르러 오문환은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스 회중교회 목사라는 것을 밝혀내어 마펫의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라는 것은 바로잡으면서도 윌리엄슨과 연결되어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로 한국에 왔으므로 한국장로교회와 연결고리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오문환이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널리 알리면서 해밀턴과 해리 로즈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그를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토마스 목사를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자 첫 번째 순교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공표하고 기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28년에 나온 『장로회 사기 상권』이 천주교와 연결하여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서술하는 점에서 볼 때 그의 죽음을 순교로 공적으로 언급하고 확산시키는 데는 1920년대 진행된 천주교의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희생자 79명의 복자 시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토마스의 죽음은 1920-30년대에 걸쳐 순교라고 장로교회에서 인정되었고, 일반언론에까지 소개되었으며, 외국 선교사들도 그렇게 서술하였다. 그의 죽음은 기념의 대상이었지만, 초기에는 그의 죽음이 선교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그의 죽음의 기념이 천주교와 같이 의혈의 흘림이라는 평가에서 순교로 호명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담론은 평양 대동강변 사건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고, 평양에서 사역하며 그 증언을 전해들은 마펫이 1909년에 성경을 반포하다 죽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평가하였고, 1920년대에 평양의 한국인 목회자들과 오문환이 순교라고 공언한 후에 일반 언론에서도 보도하였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도 공유되었다. 그 사건의 현장에서의 목격자들의 증언이 그 출발이었고 그것이 후에 기억되고 전파 되어 그의 성경을 반포하다 죽은 선교의 헌신을 후대는 순교로 기억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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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제는, 이영식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가 ‘토마스 선교사 내한활동과 순교에 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연구’란 제목으로 “지금까지 토마스 선교사의 1차 및 2차 조선 입국과 그 활동, 순교까지의 여정과 그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핵심적인 내용을 여기서 몇 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마스 선교사의 내한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조선과 국제적 상황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국내적으로는 다섯 차례의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성경은 금서가 되었으며, 쇄국정책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국제법이 시행되고 있거나, 여행자의 안전과 자유가 보장되거나, 교통수단이 원활하거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한 시스템이 전무하거나 열악했다. 따라서 21세기 오늘날의 가치와 관점으로 19세기를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토마스의 내한활동과 순교에 관한 논의는 그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입국의 동기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로부터 시작되어야 명확해진다. 그의 조선 입국의 목적은 선 교사로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으로서 조선 백성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무참한 대량 학살" 실정을 알고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2차례 입국하여 성경을 배포했고, 조선인들은 목잘릴 위험을 감수하고 성경을 받았다. 그는 그의 입국 목적대로 실천하다가 대동강변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죽기 직전에도 성경을 전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말한다. 그의 활동과 순교는 우상과 미신으로 점철되어 있던 한반도에 세워지게 되는 교회의 씨가 되었고, 한민족 복음화의 토대가 되었다 셋째, 본 연구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을 받았지만, 기존에 이름 정도로만 알려졌 던 이들을 사료를 통해서 별도로 조명함으로써, 토마스의 선교활동의 실천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 12세에 3권의 성경을 받고 평양 최초의 신자가 되었으며, 장대현교회 집사, 오촌교회 장로로 섬겼던 최치량, 19세에 두 세 명의 친구들과 구경갔다가 성경을 받았고 하리칠동교회를 설립하고 집사로 섬겼던 홍신길 그리고 같은 교회 장로로 섬겼던 그의 아들 홍성준, 평양지역 최초의 여성 수세자이며 최초의 여성전도회를 조직했던 이신행 등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넷째, 토마스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초기 선교사들의 인식은 대체로 셔먼호의 "승객" 으로 승선하여, "선교사", "런던선교회 선교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권서"로서 성경 배포 활동을 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순교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토마스 목사도 목숨을 잃었지만, 죽기 전에 많은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순교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교라는 표현은 1910년대 존스(G. H. Jones) 선교사, 1927년 해밀톤(F. E. Hamilton)에 와서 분명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순교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교라는 표현은 1910년대 존스(G. H. Jones) 선교사, 1927년 해밀톤(F. E. Hamilton)에 와서 분명하게 등장하게 되고 이후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노회와 총회의 인식은 1909년 독노회의 초기 토마스 기념위원회 조직을 통하여 그의 희생적 죽음을 기리고자 했고, 1920년대의 역사자료편찬을 통해서 순교정신을 부각시켰다. 토마스가 순교한 대동강 및 평양지역의 교회설립과 발전을 총망라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1925)와 『조선야소교장로회사기』 상권(1928)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하고 있다. 이는 오문환이 주도하고 1926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적으로 시작한 '토마스 기념식'과 이어지는 '순교자 추도회'와 함께 토마스의 순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째,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의 활동과 순교에 대한 역사를 한국교회에 부각시키는 데 오문환 장로의 공헌이 컸다. 그는 런던대학교, 런던선교회, 미국정부의 외교문서철, 토마스 후손 및 친구와의 3천 통의 서신, 국내 고서, 대동강 주변을 비롯하여 서북지역 600여리를 탐방하며 200명의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선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요”(1926)과 「도마스 목사전」(1928) 등의 논저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6년 토마스 기념회, 1927년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회, 1932년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예배당 건립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장로교 교단에서 토마스 순교정신을 앙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곱째,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에 대한 인식,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받고 교인이 되었던 이들, 장로교 노회와 총회에서의 기념사업, 한국장로교회의 고전자료, 오문환 장로의 연구, 백낙준 박사의 박사논문, 이후 선교사들의 저술과 한국교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한 한국기독교에 내려온 전통적 인식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인정하고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 순교정신은 오늘날에도 세상의 조류에 흔들릴 수 있고, 느슨해질 수 있는 한국교회에 도전과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 순교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입장과는 다른 부정적 입장이 있다. 북한과 반기독교세력의 공격적인 비판이 있고, 순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소수의 국 내 신학자들도 있다. 접전을 벌였던 우리 조선 측의 「고종실록』의 기록처럼, 토마스가 셔먼호를 인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의 죽음이 순교라고 할 수 있는가?"라면서 순교를 부정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셔먼호를 이끌고 온 것이 아니다. 셔먼호는 소유주와 선장과 그 동료와 선원들이 있었다. 셔먼호는 교통이 열악한 시대에 토마스의 한민족 복음화를 위한 그 비전을 위해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교통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통상을 목적으로 한 셔먼호와 복음 및 성경 전파를 목적으로 승선한 토마스를 분리해야 할 것이다. 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토마스의 입국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그 실천 과정에 목숨을 잃었던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 문헌에 대해 학문적 비평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비평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사료를 통한 치열하게 연구된 결과물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객관성을 주장하다가 자칫 자기 주관성을 관철하려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가치와 관점에서, 160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반도에 복음을 증거하다 맞이했던 젊은 선교사의 순교를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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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발제는, 하광민 총신대학 통일개발대학원 주임교수가 ‘토마스 선교사 순교 사건에 대한 북한 선교의 실천적 방향’이란 제목으로 “본 연구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남북한이 어떻게 전혀 다른 담론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 담론이 실제 북한 주민의 의식 속에 얼마나 내재화되어 있는지를 탈북민 설문조사를 통해 실증하였다. 이 작업을 통해 본 연구는 북한의 반기독교 담론이 단순한 역사 왜곡을 넘어 반미의식·백두혈통 정통성•반기독교 정서를 동시에 생산하는 다기능적 프로파간다 체계임을 밝혔으며, 이 체계가 약 40년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서사 구조를 유지하며 북한 주민의 의식 속에 중층적으로 각인되어 왔음을 확인하였다. 동시에 본 연구는 이 내재화가 결코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실증하였다. 탈북민 응답자의 92.3%가 남한 정작 이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고 응답하였으며, 그 변화의 핵심 동력은 관계적 접촉과 외부 정보의 결합이었다. 이는 북한 선교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음을 신학적·실증적으로 동시에 확인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몇 가지 한계를 지닌다. 우선 표본의 규모와 기독교 신앙을 가진 탈북민 비율(91%)의 편중으로 인해 결과의 일반화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본 조사는 탐색적 성격을 지니며, 향후 100명 이상의 확대 표본과 비기독교 탈북민 집단을 포함한 비교 연구를 통해 결과의 대표성을 제고하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본 연 구는 탈북민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인식 지형을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바, 향후 북한 내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직접 조사가 가능해질 경우 본 연구의 가설들을 보다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연구 과제로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탈북민 인식 변화의 종단적(longitudinal) 추적 연구이다. 남한 정착 이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북한 담론의 탈내재화가 어떤 속도와 패턴으로 진행되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북한선교 전략의 시간적 설계 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둘째, 북한 담론 내재화의 지역별•세대별 차이 분석이다. 본 연구에서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는바, 평양•평안도 출신 탈북민과의 비교 분석은 담론 내재화의 지역적 편차를 드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셋째, 토마스 순교 담론과 한국 개신교 타 순교 서사와의 비교 연구이다. 토마스 담론이 북한선교의 서사적 자원으로서 다른 순교 서사들에 비해 어떤 독특한 강점과 한계를 갖는지를 비교 검토하는 것은, 담론 재구성 전략의 정교화에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북한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셔먼호 격침 기념비를 세우고, 재현 행사를 반복하며, 교과서와 선전물을 통해 토마스 선교사의 이름을 지우려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대동강에서 27세의 청년 선교사가 뿌린 씨앗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 남한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 가는 탈북민들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가에 뿌린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지금 대한민국과 교회의 모습이다'라는 그들의 고백이, 이를 가장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통일 이후 북한 지역 교회 개척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앞에 두고, 오늘의 선교는 토마스의 씨앗이 마침내 온전한 열매를 맺는 그 날을 향해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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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발제는, 유해석 소장이 ‘토마스 선교사의 내륙 선교관: 19세기 중후반 내륙 선교 전략의 맥락에서’란 제목으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복음에 대한 깊은 열정과 확고한 선교 소명을 가지고 조선 땅을 향해 나아갔으며, 결국 1860년 대동강 변에서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로 기억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이를 복음 전파의 출발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이념적 변화 속에서 토마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의 연관성은 그를 침략의 동조자로 해석하려는 시각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은 제한된 사료와 초기 연구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으며, 그 결과 토마스의 생애와 선교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그의 전체 생애 가운데 극히 짧은 기간에 해당하며, 이를 중심으로 토마스의 선교사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사료적 검토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그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는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개척 선교지로 향한 선교사로서의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토마스의 조선 선교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내륙 선교(Inland Mission) 운동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토마스는 회중교회 전통 속에서 형성 된 선교적 확신과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조선의 내륙에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의 조선 방문과 마지막 항해는 고립된 개인의 충동적 행동이 아니라 당시 세계 선교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선교적 결단이자 내륙 선교 정신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토마스는 단순히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땅을 향해 나아간 선교사였으며, 내륙 선교의 정신을 조선 땅에서 구현하려 했던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의 순교는 실패한 시도가 아니라, 복음이 조선에 전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한국 개신교의 형성과 성장에 중요한 신학적•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따라서 토마스는 순교자라는 신앙적 정체성과 더불어 19세기 세계 선교의 흐름 속에서 내륙 선교를 실천한 선교사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평가는 토마스를 둘러 싼 오해를 바로잡고, 그의 생애와 죽음이 지닌 한국 교회사적 의미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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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순교 160주년 기념』 포럼...순교신앙 다짐하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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