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는 몸으로 살기-김진해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5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 나는 좋은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좋은 글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몸을 글쓰는 몸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매일 조금이라도 쓰자!

프롤로그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는 글쓰기
이 책을 기획하면서 처음 떠올린 제목은 '무적의 글쓰기'였습니다. 보통 '무적'은 '매우 강해 겨를 만한 적수가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더 이상 대적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쓰죠.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만나는 적마다 다 무찌르니까요. 요즘 말로 '원톱'이 되는 글쓰기랄까요. 저는 다른 뜻으로 새겨보았습니다. 한자를 가만히 쳐다보면 다르게 읽힙니다. '적이 없다' 적을 만들지 않는 글. 있던 적도 친구로 만드는 글. 어떤가요? 당신에게도 적이 있을 겁니다('척진 사람' 정도로 합시다). 말을 섞는 게 고통스럽고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죠. 되도록 한자리에 앉지 않으려 합니다. 살면서 그런 사람이 점점 늘면 힘듭니다. 내색은 안 하지만 글을 쓰는 많은 사람이 독자를 적으로 생각합니다. 설득하거나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요. 어리석으면 가르치려 들고, 강하면 논파해서 기어코 이겨먹으려 하죠. 글로(p. 4) 상대를 제압하고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공존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말을 눌러 천천히 글로 옮기는 것입니다. 쓰기란 상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내 쪽으로 당기는 일입니다. '당신이 틀렸어!'라고 말을 할 때도 종국에는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하자'고 하는 겁니다.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눈감자는 말이 아닙니다. 친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죠.. 성취하기 불가능하지만 추구해야 할 자세입니다.
무적이란 말엔 무적(無籍)이란 한자어도 있습니다. 소속이 없다, 달리 말하면 '고향이 없다' '근거가 없다'입니다. 글 쓰기는 한 편의 글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고체로 굳어버리지 않고 움직임 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잠시 움켜쥐었다가 이내 놓아주는 거죠. 글을 하나 썼다면 잠깐 안도했다가 이내 그 글에서 떠나야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글쓰기. 고향이 없으니 계속 떠나는 거죠. 쓰고, 떠나고, 다시 쓰고, 다시 떠나고. 같은 글 감으로 글을 써도 쓸 때마다 달라집니다.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자리에 눌러앉지 않고, 표표히 떠 나야 합니다.
무적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복을 통해 '쓰는 몸'을 만들어(p. 5)야 합니다. 반복은 자신의 몸속에 이미 들어와 있었지만 무심히 흘려보냈던 세계의 질서와 타인의 흔적을 찾아내고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낼 수 있는 감각을 갖춘 몸을 만들어 줍니다. 그 몸은 자신을 '쓰는 몸'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꾸준히 앉아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기 위해 막막함 속을 헤엄치면서 끝내 문장 하나를 써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새롭게 해석한 문장을 바느질하듯이 한 땀씩 이어갑니다. 무적의 글쓰기는 자신을 '쓰는 몸'으로 탈바꿈하여 삶을 이어가 보려는 사람의 글쓰기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쓰는 몸으로 살기' 로 바꾸었습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쓰는 몸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닌, 몸으로 쓰는 글 쓰기를 추구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살이 보이고 좌충우돌하는 삶이 녹아 있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p. 6).
좋은 글은 어떤 글인가
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독자(p. 16)의 머리끄덩이를 낚아채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 공명의 성격이나 진폭에 따라 공감을 얻기도 하고 마음에 격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결정적인 각성의 계기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건 오롯이 독자의 몫입니다. 글쓴이는 오직 겸손한 자세로 독자와 공명하려고 시도할 뿐입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좋은 글은 '그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백과사전이나 요리법처럼 어떤 정보를 알려주는 글을 보고 글쓴이가 궁금하지는 않잖아요. 촘촘한 논리나 멋진 표현이 아닌, 글 속에 글쓴이의 목소리와 체온이 담긴 글을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지죠. 살아오면서 한 가지 일만 했다면 어떻게 그리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버텨왔는지, 여러 우여곡 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을 지켜왔는지, 뭘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그 방황의 냄새와 깊이가 궁금합니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고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p. 17) 닿았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고요(p. 18).
힘을 빼면 생기는 일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젠체하며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글에도 그런 게 다 담깁니다. 그런 글은 내용이나 표현이 하나같이 진부하고 자기주(p. 18)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운동에서 코치가 선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힘 빼'라는 말입니다.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의 타격 자세를 보면 손과 허리에 힘을 빼고 바람을 가르듯이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축구공을 정확하게 멀리 차려면 발목에 힘을 빼야 합니다. 농구에서도 손목에 힘을 빼야 슛이 부드럽게 잘 들어갑니다. 힘을 바짝 줘야 할 것 같은 역도나 유도에서도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빼야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피는 여유가 생기고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빠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글도 마찬가지 입니다. 힘을 뺀 글이 좋습니다. 힘을 빼려면 글 쓰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느끼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상대를 의식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내 글이 상대방에게 가닿으려면 상대방의 기운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상상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글쎄요, 저도 어렵습니다. 눈앞에는 공책이나 모니터밖에 없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상대의 기운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래야 합니다. 글쓰기는 두 사람의 작업입니다. '둘의 경험'이랄까요. 작가와 독자의 대화.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쓰는 겁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마(p. 19)구 내뿜는 게 아니라, 독자의 기운을 느끼면서 그 독자에게 내 얘기를 간절하게 풀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얘기를 듣습니다. 이런저런 말도 하고요.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 얘긴 좀 긴걸 그건 말이 좀 안 된다." "다음 얘기가 궁금하군!" 어떤 글쓰기 책에서는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내 안에 있는 독자를 불러내어 이것저것 검토를 맡기라고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처음부터 독자가 곁에 있는 게 좋더군요. 상대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 몰래 '칼을 갈았다'는 느낌을 주는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그런 글쓰기가 아닙니다. 상대를 굴복시킬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존댓말로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도 그 독자였고요(p. 20).
1945년 연합군은 전쟁 포로와 유대인을 가둬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를 해방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들에게 어떤 구호품을 보내겠습니까? 먹고 입을 게 절실했을 테니, 빵이나 담요를 보냈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구호품이 도착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엄청난 양의 립스틱이었습니다. 어느 영국군 장교는 이 기이한 장면을 보고 일기장에 '천재적인 발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굶주림에 몸을 못 가누면서도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수감자들은 더 이상 팔에 문신을 새긴 숫자에 불과하지 않고 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본 거죠. 립스틱이(p. 34) 이들에게 다시 인간성을 되돌려줬다는 겁니다. 인간다움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나 봅니다. 이 예상 밖의 사건은 우리가 글을 쓸 때 가져야 할 핵심 목표인 '반전'에 대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아는 도덕이나 상식은 허위입니다. 반발심이 생기더라도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일단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진실은 도덕이나 상식과 거리가 멀고, 가끔은 도덕과 상식을 배신하기조차 합니다(배고픈 자에게 립스틱이라니!)(p. 35).
반전의 크기에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글은 반전을 노려야 합니다. 반전이 없는 글은? 쓰지 않는 게 낫습니다. 반전은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뒤집는 게 아닙니다. 반전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통념을 뒤집고 관습을 혁파합니다. 기존의 가치와 관점을 뒤바꾸는 겁니다. 확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섣부른 판단을 미루는 겁니다.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p. 38).
강약이 뒤바뀐 말을 위해
반전을 모색하려면 진리(참/거짓)보다는 개연성에 기대는 게 좋습니다. 개연성에 기대는 것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너그럽게 허용 하는 자세입니다. 예측 가능함을 어길 때 반전이 만들어집니다. 맞는 말, 똑 떨어지는 말, 진리를 담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말, 힘의 강약이 뒤바뀐 말을 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발견, 도덕을 거역하는 글이 좋은 글 입니다. '나쁜 시만이 가슴에 남는다'고 한 김수영의 말처럼 '나쁜 글'만이 가슴에 남습니다. 나쁜 글을 쓰려면 글감에 들러붙 어 있는 도덕과 상식이라는 나태한 먼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허를 찌르지?' 반전, 글쓰기의 핵심입니다(p. 41).
글 쓰는 목적을 '순수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랑과 연민, 이 두 가지 감정을 분출하는 걸 글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내 진실에 다가가기. 내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기.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써서 내가 다른 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려고 쓰는 것입니다(p. 58).
나만의 문체를 찾는 법
이렇듯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엄마가 죽었다'라는 문장만이 'My mother died'라는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과 글 사이에 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지 '말아야'합니다. 도리어 틈을 더 많이 벌려야 합니다. 특히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일상의 경험과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경험과 직접 연결된 말, 머릿속에 가장 빠르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 이게 글쓰기의 독입니다. 경험과 연결된 언어는 생활언어에 속합니다. 절경을 보고 '와, 멋지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열 받네', 벽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 '아, 아파라', 피곤할 때 '아, 졸려' 이런 것들이죠. 그게 경험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현실적 감각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언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생각과 글은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경험과 글도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I don't know myself'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곧바로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라고 쓰고 만족해(p. 107) 하는 게 아니라, 멈칫하고 이를 어떤 '문장'으로 '번역'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나만의 문체를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나는 내가 낯설다' '나는 내가 그립다' '내 속엔 수많은 타인이 앉아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따위의 문장을 떠올려야자 기만의 문체가 마련됩니다. 글을 여러 번 썼는데도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려운 것은 매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썼기 때문 아닐까요. 멈춰서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번역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낯선 언어'로 바꾸려는 자세로 쓰지 않으면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렵습니다. 문체에 대한 감각은 말에 대한 감각입니다. 말을 외국어처럼 쓰려고 해야 합니다. 술술 나오는 걸 과신하지 말고, 머뭇거리거나 더듬거리며 어렵게 나오는 말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미처 나오지 않은 말을 갈망해야 합니다. 다행히(!) 생각에 비해 글은 느립니다.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쓸 수 있죠(p. 108).
간결한 마음이 명확한 문장을 만든다
이런 자세로 문장을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문장이 짧아집니다. 묘하게도 문장은 짧을수록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 '간결하게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결하게 쓰려는 마음을 갖추면, 길어도 생각이 명확히 담기는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헤어hair가 있어야 헤어스타일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데 머리모양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옷장에 옷이 몇 벌 걸려 있어야 상황에 맞게 멋을 부릴 수 있죠. 어느 정도 글이 쌓여야 자기 문체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문체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기 위해서는 '자기 글'이라는 옷을 여러벌 쌓아놓아야 합니다(p. 111).
저는 학생들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의 방식을 변형한 '15분 글쓰기'라는 걸 합니다(자유 글쓰기 free writing 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많이들 합니다). 온라인카페에 학생 이름을 하나씩 넣은 게시판을 만듭니다. 학생들은 아무 때나 들어와서 들어온 시간을 먼저 적고 글을 씁니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쓰되, 멈추지 말고 고치지 않고 쓰기. 어떤 학기에는 '글 쓰는 몸'을 만들어주겠다며 '100일 15분 글쓰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학생이 쓴 글의 내용, 형식, 분량 등 어떤 것에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읽어보지도 않을 테니 마음껏 쓰되, 15분 동안 글 한 편을 끝까지 쓰라고 합니다(p. 154).
글쓰기를 가로막는 건 생각
15분 글쓰기는 도움이 될까요?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15분 글쓰기는 우리가 글쓰기에 대해 가진 오해와 편견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생각'입니다. 정확 히는 '쓰지 않고 하는 생각'입니다. 저의 글쓰기는 늘 이런 흐름이었습니다. '글감 찾기→ 마구 쓰기→ 고쳐 쓰기. '마구 쓰기'의 핵심은 '끝까지 쓰기'입니다.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어떻게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글쓰기'와 '생각하기'를 의식적으로 구분합니다. 앞뒤를 나누어 따로따로 작업합니다. 글을 쓰려고 어떤 글감을 택하겠죠. 그런데 그 글감으로 뭘 써야 할지 '정확히' 모릅니다. 뿌옇습니다. 처음에는 글감이 '뿌옇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글감으로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택했지만, 아직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뿌연 글감을 선명하게 만드는 건 '생각'이 아니라 마구 써내려간 '글'입니다. 그 속에서 '새로움'이 나옵니다. 생각에서 새로움이 나오는 게 아니라 쓴 글 속에서 새로움이 나옵니다. 늘 그랬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쓰고 나서야, 정확하게는 '쓰면서' 글감에 대해 할 말이 선명해집니다(p. 155).
생각을 먼저 한다고 글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첫 문장을 쓰고 나면 그 문장 때문에 두 번째 문장이 튀어나오고, 두 번째 문장을 쓰고 나면 다음 문장이 이어집니다. 이어지지 않는다고 요? 조금 기다려 보세요. 그래도 안 나온다고요?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고요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글이 스스로 글을 밀고 간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가보는 겁니다. 이 장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고를 어떻게든 끝까지 씁니다. 그러곤 출력해서 큰 소리로 읽습니다. 읽으면서 두 가지를 살핍니다. 첫째, 내 글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흐르고 있는 가? 둘째, 읽으면서 '다른'(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가? 그걸 바탕으로 고칩니다. 하나의 결론을 향하지 않는 것들은 잘라냅니다. 무려 절반 가량이 잘려나갔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생각을 덧댑니다. 빨리 쓴 초고가 없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쓰면서 선명해진다
글이 할 일과 생각이 할 일을 분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보기 바랍니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입니다. 글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생각을 정 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뿌옇게 뒤(p. 156)엉킨 생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글이 할 일에 여러분의 생각이 간섭하지 않도록 하세요. 생각은 진부합니다. 그러니 글쓰기 실력을 높이려면 무조건 초고를 빨리 써야 합니다. 저는 뼈에 사무쳐야 글을 쓰는 '형편없는 말'이지만, 글은 저에게 그래도 버티며 자유와 사랑의 길을 가라고 가르쳐줬습니다(p. 157).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말자
물론 수정을 거듭해 완성된 마지막 글이 앞의 글보다 나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맞춤법은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나아지긴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기대 속에서 성큼 발을 내디딘 겁니다. 새로운 글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 그 모험을 즐기는 겁니다. 한차례 쓰고 다시 쓰는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와, 내 속에 이런 면이 있구나. 다 버릴 수 있어' 버리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고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않게 됩니다. 꽃은 사랑해도 지고, 잡초는 싫어해도 핀다는 삶의 이 치를 글쓰기에서 배웁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여러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글쓰기를 통해 삶과 생명을 긍정하기 위해 쓴다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내 삶의 우여곡절도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에 다시 놀라기 위해(p. 167).
글의 정서가 느껴지도록
저는 글의 주제보다는 글의 정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긍정적인가 비관적인가, 기쁜가 슬픈가, 경쾌한가 무거운가, 격정적인가 차분한가, 화려한가 담백한가 하는 느낌 말입니다. 그런 정서를 갖게 하려면, 독자를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머릿속에서 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식당에 가득 앉은 손님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 하나를 찾아 그 사람만 그리듯이 글도 그래야 합니다.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면 주제와 직접 관련 있는 캐릭터를 장면 속에 등장시켜야 합니다. 저처럼 평면적인 얼굴은 그림의 대상으로 포착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p. 184). 군중 속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과 사건이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죠. 영화의 주인공은 1명(또는 2명)이듯이, 글에서도 하나의 캐릭터가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조연입니다. 조연은 주인공이 주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죠. 주제를 드러내지 못하는 건 과감히 지우거나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글감을 여러 개 떠올렸다고 그것들이 모두 같은 무게를 차지하면 안 됩니다. 나를 사로잡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줄 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p. 185).
좋은 묘사는 대상을, 세계를, 현재를, 감정을 충실히 감각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만끽하고 나면 친절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지지 않아서 잘 못하는 겁니다. 마음에 새겨진 걸 풀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해서 대상을 만끽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체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됩니다(p. 197).
은유, 말의 세계를 짓는 망치
우리가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버린 게 바로 '은유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걸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온 은유를 우리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 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건설한다'는 말이 가장 잘 적용 되는 곳이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은유는 낡은 세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세웁니다. 은유 없는 글쓰기는 맨주먹으로 못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은유는 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입니다(이것도 은유네요)(p. 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