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나라는 통증-하재영 저자(글), 문학동네 · 2025년

사람은 왜 글을 쓰고, 말을 하는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자가치료 하려는 본능이다. 다른 글보다 자신을 많이 노출하는 타인의 글을 읽고 공감하면서 우리도 치유를 경험한다. 이것이 에세이를 쓰고 읽어야 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정신의학과를 찾은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처음 내원한 이유는 신체형장애 somatoform disorder 때문이었다. 내과적 이상이 없는데도 나는 수년째 다양한 신체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원을 찾기 직전에는 간헐적이고 갑작스러운 복부통증, 식사가 어려울 정도의 소화불량, 혀가 불타는 듯한 구강작열감증후군, 수면중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하지불안증후군, 그 밖에도 불면증과 공황발작을 겪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내과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았다. 1년이 지난 뒤 내가 받은 추정 진단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e stress disorder, PTSD와 2형양극성장애bipolar II disorder였다. 정신의학과에 다니게 된 표면적 이유는 신체형장애였지만 실은 내밀한 동기도 있었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와도 같았다. 나를 이해하기, 그리하여 나를 벗어나기. 치료가 그저 의사에게 의존하거나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벗어난다는 것은 힘(p. 21)을 지니는 일이었다. 힘은 단순한 능력이나 역량이 아니며,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여성이, 특히 외상기억을 가진 여성이 힘을 얻으려면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은 안온한 세계를 스스로 부수어야 한다. 타자가 파괴한 자신을 복구하고, 식민화된 몸과 정신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헐벗은 땅에 헐벗은 벽을 세워 올리는" 일인지 모른다. 나에게 그 길을 알려준 여성의 이름은 안나 오다. 나는 이 이름을 장마르탱 샤르코, 피에르 자네, 요제프 브로이어, 지크문트 프로이트처럼 현대 심리치료의 근간을 만든 위대한 아버지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브로이어의 이름 없는 환자로 팔다리의 마비, 시각장애, 청각• 언어 장애, 환각, 의식상실 등 스트레스로 인한 다양한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를 겪고 있었다(p. 22).
내 나이 열세 살, 남자 동급생들은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쳐 속옷을 보곤 한다. 여자아이들이 모두 바지를 입자 이번에는 하의를 끌어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허리가 딱 맞는 청바지를 입고 주변을 경계하며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하지만 체육 수업이 시작되기 전, 방심한 채 운동장에 서 있다가 장*혁과 김*현에게 속수무책으로 그 짓을 당하고 만다. 헐렁한 고무줄로 만든 체육복은 벗겨지기 쉬운 옷이라 주의가 필요한데도, 다른 여자아이들은 수치 스러운 일을 당할까봐 무리를 지어 있었는데도, 나만 외따로 서서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달려온 장*혁과 김*현이 내 체육복 바지의 허리춤을 움켜쥔 뒤 끌어내린다. 이때 장*혁의 손이 팬티를 함께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햇볕이 쨍쨍한 운동장에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서 있게 된다.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를 황급히 추켜올리지만 몇몇 아이가 나의 그곳을 봤을 것 같다. 체육시간이 끝나(p. 113)고 여자아이들이 교사에게 이 일을 알린다. 교사가 나에게 말한다. "*혁이와 *현이가 너를 좋아하나보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또다른 '놀이'가 유행한다.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도망가는 것이다. 두세 번 그런 일을 당한 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긴다. 나와 함께 하교하는 *미는 2년 전이던 열한 살 때 월경을 시작했고 가슴이 여자 어른처럼 불룩하다. *미가 나에게 자신의 아래쪽이 털로 수북하다고 말한 다음부터 나는 그 아이가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하굣길,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한 아이가 *미의 가슴을 만지는 동시에 다른 아이가 *미의 사타구니를 움켜쥔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미를 일으켜세우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 낀다. 남자아이들이 돌아와 나에게도 같은 짓을 할 까봐 겁이 난다. 더는 *미와 함께 다니고 싶지 않다. 열다섯 살, 우리는 발육 상태와 무관하게 브래지어를 착용하라고 강요받는다. 이 규칙을 열렬히 수호하는 사람은 젊은 남자인 과학 교사다. 그는 지휘봉을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학생이나 불러(p. 114) 세워 지휘봉 끝을 학생의 등에 대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지휘봉에 브래지어끈이 걸리면 그냥 지나가지만 걸리지 않으면 한참 동안 꾸짖는다. 가끔 그는 여학생의 팔 안쪽에 손을 넣어 겨드랑이와 가까운 부위를 꼬집듯이 주무른다. 아이들 사이에서 는 그 부위의 살이 가장 연하다는 말이 나돈다. 열일곱 살, 밤늦게 학원이 끝나고 버스를 탄다. 귀가하는 학생과 퇴근하는 직장인으로 버스는 만원이다. 나는 뒷문 근처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교복 치마 뒤쪽이 스르르 올라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다. 사람들이 많아서 옷이 쓸려 올라갔겠거니 생각하며 치마를 끌어내린다. 잠시 후 다시 치마가 올라 간다. 뜨끈하고 축축한 손바닥이 내 허벅지 안쪽을 더듬거린다.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뒤를 힐끔거리다가 웬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그 남자는 재빨리 뒷문으로 내린다.
열여덟 살, 이른 등굣길에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한적한 골목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른다. 학교에 하나뿐인 공중전화는 늘 아이들로 북새통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는 젊은 남자가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술냄새가 끼친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여자에(p. 115)게 애원하다가 고함을 지르고, 징징거리다가 화를 낸다. 그러다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나를 향해 소리친다. "씨발년아, 꺼져!" 열아홉 살, 친구와 식당에 갔다가 가게 바깥에 있는 공중화장실에 간다. 변기에 앉으려고 옷을 내리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어 칸막이 위를 올려다본다. 거기, 남자의 얼굴이 있다. 눈만 내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화장실을 뛰쳐나온다. 식당으로 달려가 방금 있었던 일을 주인에게 말하고 그와 함께 다시 화장실에 간다. 옆 칸의 변기는 뚜껑이 닫혀 있고 그 위에는 신발자국이 찍혀 있다. 주인이 근처를 둘러보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식당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남자가 들어와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간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본다. 하지만 끝내 그가 범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청소년기, 이차성징이 나타난 뒤부터 성인 여성이 되기 전까지 대략 6~7년 동안 벌어(p. 116)진 일의 '목록'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목록이고, 세부적인 사항을 묘파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족스러운 목록이며,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목록이다. 또한 성인 여성이 된 이후에 벌어질 사건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해서 본격적인 폭력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목록이다.
어릴 때부터 겪은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은 나에게 자기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불쾌한 일이 생기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를 오해하게 만들었는가? 나를 헤프게 여길 여지를 주었는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가? 그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나의 목소리이자 타인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의구심 섞인 다그침이 돌아올 것 같았다. '확실해? 네 잘못은 없어? 상황을 부풀려서 말하는 건 아니야?' 나는 증언하기도 전에 상상 속 목소리에게 추궁당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가 정말 상상 속에만 존재할까?) 왜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왜 오랫동안 그 일들에 관해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p. 117)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일에 관해 목록을 만든 것은 로라 베이츠의 『목록』을 읽고 나서였다. 베이츠는 서문에서 자신을 향한 농담, 장난, 놀이, 평가, 혐오, 차별, 희롱, 추행의 역사를 열 페이지 가까이 열거한 뒤 말한다. 이 일은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p. 118).
장례식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이것이다. 피피는 몇 개의 뼛조각이 되어 소각로를 나왔고, 직원은 그것을 수습해 구석의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믹서기가 놓여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그는 뼛조각을 믹서기에 넣고 전원을 눌렀다. '눈을 의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정확히 이해했다. 피피가 믹서기 안에서 갈리고 있었다. 지금도 내가 본 장면을 의심한다. 정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그날의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산소방, 빨리 가세요, 분홍색 수의, 고급형 유골함, 믹서기.
그날 이후에도 종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피피의 옷과 장난감을 깨끗이 빨아 상자에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깨달았다. '피피가 돌아오면, 필요할 테니까' 소각로에 불이 켜지던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그 아이를 산 채로 불태웠어.' 이 생각이 나에게는 전혀 비논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p. 140)장은 피피가 소각로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미지로 이어지고, 이미지는 다시 문장을 강화한다. '내가 그 아이를 산 채로 불태웠어.' 반면 사람들은 나에게 현실을 상기시키려 안달이 난 듯했다. 그때마다 화가 났다. 피피가 세상을 떠나고 처음 교회에 나간 날,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영혼이 없습니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죽으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부여하고 천국을 허락한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목사님은 내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피피가 천국에 가기를 매일 기도했던 나는 분노했다. 그리운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이면, 천국이 무슨 소용이지?(p. 141).
'솔직한 글'이라는 말에는 때로 환상이 덧씌워 있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타인의 벌거벗은 자아와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에세이는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재현하는 장르'라기보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과 솔직할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글쓰기'에 가깝다. 때로 글을 쓰는 이는 에세이라는 영토에서 자기 고통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치에 놓인다. 전자가 머뭇거리는 글쓰기라면, 후자는 정 치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복잡한 자리다. 고통의 재현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에 의한 구성이다. 아픔은 그 자체로 중립적 경험이 아니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주체(누가 말하는가?)와 해석되는 대상(누구의 고통 인가?) 사이에 권력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에세이는 '솔직함'을 명목으로 자신(그리고 연루된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 발설하는 장르가 아니라, '정직함'을 윤리의 기준으(p. 214)로 삼는 장르여야 하는지 모른다. 솔직함이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 굴복한다면, 정직함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를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이는 나의 고백에 연루된 타인의 비밀을 동의 없이 공개하는 것이나, 누군가의 '기억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이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무엇일 때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 유보한 채 기다리는 것도 정직함의 한 방식일 것이다. 고통에 관한 증언이 폭력이나 분출이 되지 않도록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경계에서 타인을 상상하는 일, 에세이의 균형은 솔직함이 아니라 그 상상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 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