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10(화)
 
  •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홍은택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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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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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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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0】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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