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저자(글), 문학동네 · 2021년
우연히 알게 된 문유석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전직 부장판사라는 경력도 관심을 끌고 그가 쓴 책이 꼴통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사람이 안정적인 밥 벌이 하느라고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퇴직하고 법조인들이 가는 로펌이나 변호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돈 벌려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법이란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라고 말한다.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와는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법, 재미없는 법 그러나 결국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p. 41)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 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p. 42).
물론 국민에게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복지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아름다운 약속들은 써놓았으되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를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국가가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목표(p. 66)는 여러 가지다. 어느 나라든 국방 예산이 최우선 순위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아직 사치라는 논리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세상이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아직도 인간 세상은 대부분 국가 안보, 경제 발전, 민족의 융성, 선진국 진입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권리인 사회적 기본권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라고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가치다. 그게 '존엄'의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당연한 천부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헌법은 세상에서 완성된다(p. 67).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p. 100)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같은 말도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왠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을 강조하셨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가짐까지 포함한다. 인격 수양을 위한 자세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p. 101)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 해보자. 홀로 있을 때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최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 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p. 102),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000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p. 103).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p. 104)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진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 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p. 105)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p. 106) 관계없이 톡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만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였(p. 107)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 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p. 108)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 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p. 109).
전통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범죄의 중함을 그 결과의 외형적 크기, 즉 사망, 전치 몇 주의 상해인지, 손해액이 얼마인지 등으로만 비교하려는 경향을 띤다.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법감정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로 보곤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근친상간, 아동 성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등 터부와 연결되고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유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들이다)을 파괴하는 범죄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본능적 분노를 야기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폭력인 법이 이를 충분히 응보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법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져 사회 존속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p. 158)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은 온갖 인지적 편향과, 이성 이상으로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면 법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p. 159).
성폭력은 자유에 대한 죄
사람들은 왜 성폭력에 대해 유독 분노할까. 성폭력은 단순히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이나 상해와 다르다. 모든 폭력은 사람의 정신에도 충격을 가하지만, 성폭력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오랜 정신적 상흔을 남기기에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어땠을까.
형법상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 아래 강제 추행죄,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함께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12월 29일자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다. 대체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p. 160) 첫번째 뜻으로 '정절'과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정절'을 다시 찾아보면 '여자의 곧은 절개'다. 두번째 뜻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니는 일'이란다.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하면, '기혼 여성의 남편과만 섹스해야 할 의무'와 '미혼 여성의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의무'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도 아닌, 서태지 박진영 신해철이 톱스타로 활약하던 <응답하라 1994> 시절 이야기다. 물론, 설마하니 이 당시까지 법학자나 판사 들이 강간죄를 '정절'과 '순결'을 침해하는 죄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973 년에 발간된 서울법대 유기천 교수의 『형법학』 (개정9판) 교과서를 보면 강간죄는 '인간의 애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다(애정의 자유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지지만). 내가 공부하던 1980년대 후반의 형법 교과서에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가 보호법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1995년 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형법전의 항목 제목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정조에 관한 죄'란 일본의 구형법, 즉 일제강점기 형법의 잔재인 것 같다. 간통죄를 포함한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죄 등과 함께 묶어서 건전한 사회 풍속을 해하는 범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 법익에 관한 죄'로 규정했었는데, 광복 후 1953년 우리 형법이(p. 161) 제정되면서 강간죄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항목 쪽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이다. 당시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인식의 발전이었겠지만, 사회적 인식까지 크게 변화했었는지 의문이다. 그 유명한 보호가치 있는 정조라는 말이 판결문에 등장했을 정도니까. 1955년 7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재판부는 현역 장교를 사칭하며 '댄스홀' 등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바로 파기되었지만, 당시의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회 인식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을 돌이 켜봐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성범죄 사건을 재판할 때마다 변호인들이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법 교과서에 강간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에 관한 죄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부 변호사님들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여성, 나이트클럽에 자주 가는 여성, 과거에 바든 카페든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여성은 그런 자유가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오히려 사회 인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은 지(p. 162)금까지도 적지 않다. 성범죄 피고인의 부모가 낸 탄원서를 보면 피해자가 학교나 회사 내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로 유명한 여자였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남자들과 섹스한 적이 있는 여자는 아무 남자의 섹스 제의에도 당연히 자유롭게 응했을 거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어지곤 했다.
젊은 세대는 당연히 강간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간죄를 폭력범죄, 상해죄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친 곳도 없지 않느냐 후유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좀 무섭게 말은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다'••••• 몸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 즉 '몸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라고 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한다. 강간이란 '누구와 섹스할지, 언제 섹스할지, 어디서 섹스할지, 어떻게 섹스할지, 왜 섹스할지 각자 알아서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죄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의 권리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든, 클럽에서 매일 밤 원나이트를 하는 여성이든, 5분 전에 당신과 섹스를 마친 여성이든,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당신을 보며(p. 163) 계속 웃음을 보인 여성이든,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섹스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이중 어떤 경우에도 발생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모두를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즉 상당히 무거운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억지로 성행위를 한 경우에만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법은 섹스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모든 자유로운 주체 간의 행위들처럼, 자유무역처럼, 동업처럼, 부동산 매매처럼, 코스프레 동호회 사진 촬영회처럼, 합창단 공연처럼, 길거리농구처럼, 자유롭게 그걸 원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상 법은 시민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입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래 말로는 싫다고 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냐고? 말로 싫다면 싫은 거다. 인간은 원래 말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나요. 그래도 자신 없으면 간단하다. 애매한 사이에서는 안 하면 되는 거다. 눈만 맞으면 서로 알아서 이불 까는, 상호 합의 과정이 이미 충분히 이행된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으로 모든(p. 164) 애매한 신호를 자기 성기 측에 유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떻게 초면에 그렇게 과감한지.
남성들에게 불공정한 점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법익으로 하면서도 강간죄의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했었던 과거의 형법 조문이 그랬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여성들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남성들의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므로 침해당할 우려도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했다. 무려 2012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 대신 '사람'으로 개정되어 남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했다. 남성들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폭력으로 박탈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p. 165).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능력이다"라고 썼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 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p. 221)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p. 222)
인간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해 노동시간은 계속 감소했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서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 해서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단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p. 223)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극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p. 224).
에필로그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헌법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개념이나 제도보다도 '사고방식'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를 만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사고방식, 판결문을 작성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다시 말하면 '법학적 사고방식'이자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p. 248)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 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 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 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 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p. 249)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 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수호지」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호결이 악질적인 부잣(p. 250)집을 습격하여 일가족을 죽이는데, 갓난아기를 발견하고는 그 아기마저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아기이지만 언젠가는 커서 복수심에 불타는 화근이 될 것이라 면서. 조선 시대에 누구 하나를 역적으로 몰면 삼족을 멸한 것 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은 특정 단계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제자, 친구, 이웃, 은혜를 입은 자, 가혹함에 분노했던 자들에 의해 언젠가는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역사에서 진짜 '청산'이라고 할 만한 일은 로마가 카르타고에 행한 복수 정도다.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등 카르타고는 여러 번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이 숙적을 철저히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부녀자와 노인은 아프리카 오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의 흔적조차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등 모든 건 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다. 아예 한 나라를 역사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 정도를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끝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공존하려면 일정 정도에서 그치고 타협할 수밖(p. 251)에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윤: 음..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그럼 언제 놀아?
선 :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p. 252)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p. 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