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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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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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6-05-12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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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2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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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2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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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2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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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1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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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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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347】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의 지혜
    이 책의 저자는 호스피스 의사이다. 수많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한다’는 것이 큰 울림을 줬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됐지만 찾아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다잉 지도자 자격증도 보유하지 않았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냈거나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이나(p. 37) 장애인이 남들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해 생각한 다. 긍정적인 죽음관도 나쁜 소식을 안 후에야 가질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죽음관도 없는 셈이다. 문제는 가족 사이의 정이 두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알리는 걸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p. 38).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환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 쳐버린다(p. 45).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 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 49). 암 환자의 분노에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져야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그때 비로소 암(p. 75)성 통증도, 삶의 통증도 치유된다. 그래도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내쫓아줄 수 없으니, 의사로서 나는 늘 미안할 뿐이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아프지 않게 해드릴 자신은 있어요." "선생님이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병이 원래 그런걸요. 아프지만 않으면 되죠." 환자는 미안해하는 의사를 도로 위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의료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향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통찰력이 생기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늘도 나는 나의 환자들에게 미안하다(p. 76).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를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스피스가 하는 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 사는 것이 서툴러 노숙자가 된 사람,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사람.... 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마지막 남은 인생에 황금빛 석양이 비춰진다. 그때 컬러풀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p. 129).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4년에 발표한 《죽음의 춤》이라는 책에서 암과 싸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통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 며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썼다. 톱니바퀴로 배를 자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은 보부아르의 말처럼 무엇으로도 정당(p. 173)화할 수 없는 폭력일 것이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 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p. 174).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우리 안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은 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잉태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의학적인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리고 만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육신, 흔 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 암성 통증의 공포,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 호스피스 활동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적 자아를 만날 때,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사랑할 때, 우리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p. 189). 돌이켜보면 참 극성스럽게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살다 보면 도움이 되려니 싶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것저것 배우게 했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여가며(p. 205)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끌고 다녔고, 애들이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있으면 당장 큰 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야단을 치며 현미 채식을 하게 했다. 내일 편하기 위해 오늘을 피곤하게 보내라고 강요했고, 내일 건강하기 위해 오늘 맛있는 음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의 초점은 내일이었다. 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 지금 있는 오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집 안을 덜 쓸고 덜 닦는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 아이들에게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동기에 대해 묻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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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5
  • 【북토크346】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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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5
  • 【북토크345】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건들과 인간 사이에는 서사가 생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힌대로 나이를 먹으니 물건을 덜 사게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관계 맺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과 관계 맺지 않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고대 철학의 역사를 가볍게 풀어낸 책 《그리스 철학사 1》에서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페피노 루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인생철학'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물활론의 연장선에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모든 장난감이 즉시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 그 순간에는 그저 단순한 물건일 뿐이오. 그런데 어떤 어린애가 인형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영혼이 플라스틱 사이에 스며들어 생명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거요. 그렇게 되면 비록 부서지고 상처 난 인형이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생명체 로 바뀌는 거고 말이오" 나는 이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홀로(p. 20)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단번에 할 수 없고 세월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물건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날이 작별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 나는 그 아침, 이 가혹하고 부조리한 진실을 깨닫고 눈앞이 빙빙 돈 것인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책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어떤 책장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고스란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 일터.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성급하게 풀지 않겠다(p. 21). 친구들의 하소연에서 시작된 비공식 탐구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얻었다. 엄마가 물려준 살림살이가 우리의 주방을, 아니 집 전체를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어도 딸들은 살림살이를 모으며 취향을 키우고 만족감을 느꼈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그 귀한 살림살이를 당근에 내놓자고 설득하는 딸들을, 혹은 몰래 내다 파는 딸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저 나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p. 48).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사지 않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을 사기,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남에게 주거나 버리기. 가만 보니 이 원칙은 새 인연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겠다. 특히 폐기가 쉽지 않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 바란다(p. 107). 한편 부모 잘 만난 번역 프리랜서가 뜨끈한 방구석 책상 머리에 앉아 맥이 어쩌고 윈도우가 저쩌고 인간성이 어쩌고 주체성이 저쩌고 할 때, 다른 한편에는 화장실에 갈 시(p. 140)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 일해도 하루 먹을 임금조차 주어 지지 않는다.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 로봇이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건만 반란은커녕 기계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날은 요원하고 일단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고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의 디자인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에 사람이 깔려 죽는 지금, 지금은 2022년이다(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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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5
  • 【양대식 목사 칼럼9】 리더는 도전해야 한다
    리더는 도전해야 한다 믿음은 도전입니다. 리더는 도전하고 모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 구원을 위해 하늘 보좌 버리시고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죽는 도전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긍정적인 자가 도전합니다.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면 도전하지 못합니다! 개척하고 유학 가고 이민 가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 도전입니다. 콜럼버스의 미국, 도전의 결과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는 갈렙의 도전입니다. 리더는 꿈을 가지고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는 도전의 역사입니다. 사업하고 직장 구하고 세계 여행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여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리더는 안주하려 하지 말고 무엇에든지 도전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도전입니다. 남녀가 데이트 하다가 결혼을 위해 프러포즈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글 쓰는 것도 도전입니다. 안 해 본 것을 해보려는 것도 도전입니다. 영적 전쟁 일반 전쟁도 도전입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도전이고 적응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대화해보는 것, 갈등 문제 해결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보는 것도 도전입니다. 리더는 도전 정신이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도전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은 도전이요 모험입니다.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나는 나의 삶에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여 성취된 여러 가지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 이민 목회(시카고), 시카고 교회 협의회 회장, 진주성남교회 담임목사, 미국 Judson University 이사, 총회 세계 선교회 GMS 이사장 등... 도전의 적은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담대히 도전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꿈꾸고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꿈을 가지고 도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도전은 삶의 지혜요 행복과 축복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계획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평생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는 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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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4
  • 【북토크344】 화가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는가?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데 화가가 그림으로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표현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글이 아니라 그림이기에 더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시간을 내어 미술관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 신화 속 인물인 이카로스(Icaros)의 추락을 내용으로 하는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년)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같은 주제의 다른 여러 그림 중에서도 독특합니다.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하늘을 날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카로스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림의 제목을 보지 못했다면, 대부분 여기서 이카로스를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 또는 거리두기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화 정도(p. 41)로 보입니다. 농부는 짐승에 의지해 밭을 갈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가축들은 평화롭습니다(도판 A). 저 멀리 바다에는 배가 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도판 B). 어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전경입니다. 그런데 그림 오른쪽 아래, 배 앞을 유심히 보면 이상한 물체가 보입니다. 사람의 다리입니다. 화가는 숨은 그림처럼 추락해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의 다리를 그렸습니다(도판 C). 하늘을 날거나 날다가 떨어지는 모습이 아닌, 떨어져 물속에 빠진 순간을 그렸으니 힌트가 없으면 알기 어렵지요. 여기에 하나 더해 주변 그 누구도 물에 빠진 이카로스를 의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매정해 보입니다. 브뤼헐은 자신의 그림 곳곳에 네덜란드(p. 42) 속담을 남겼는데, 이 그림에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질은 쉴 수 없다" 는 속담을 남겼습니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 의 아들로,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미궁에 갇힙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크레타를 탈출할 방안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새의 깃털을 모아 실로 엮고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어, 날아서 섬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비행연습을 시키고 탈출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에 의해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너무(p. 43) 높이 날지 말고, 반대로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기에 의해 날개가 무거워지니 하늘과 바다의 중간으로만 가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탈출하는 날,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카로스는 자유롭게 날게 되자 기분이 좋았던 나머지 너무 높게 날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밀랍이 녹고 맙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이카로스의 평소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미궁을 탈출했다는 것이 더없는 기쁨 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늘을 날며 탈출을 경험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이때 이카로스가 떨어져 죽은 바다는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뜻의 '이카리아 해'로, 오늘날 에게 해의 일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이카로스이지만, 사실 이카로스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그림이 오늘날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무관심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멀리, 저 멀리 밀어두거나 숨겨둡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나와 전혀 상관없는 척,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사는 모습이 바로 이 그림에서 이카로스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로 '풍덩'하고 빠졌는데 모를 수 없겠지요.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며 여기고, 보이는 반응은 무관심입니다(p. 44).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p. 55). 그래서 죽음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두렵습니다. 물론 그런 반응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마주하고 가까이하여 친구가 된다면, 죽음은 오히려 성장의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삶에서 죽음을 마주할 때면 슬픔과 두려움, 안타까움이 몰려 옵니다. 나는 살아 있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니 서로 분리되는 관계에 슬픔이 찾아옵니다. 또 질병 등으로 인해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이를 바라보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죽음,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을 볼 때면 불쌍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시선을 바꾸어 죽음에서 삶을 볼 때면 간절함과 신중함에 새로운 열망이 생깁니다. 삶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갈급함, 삶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삶의 소중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금까지 허락되었던 삶에 고마운 마음도 들고요. 그리고 이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삶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p. 56).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란 결국 시간을 먹으며 이어가는 삶이기에, 주어진 시간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마지막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이겠지요. 지금의 건강도 재산도 지식도 관계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때로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소멸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실존적 특성이며 또 우리 삶의 시간, 인생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이라는 시간의 빈 그릇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아는 것은, 죽음의 때를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된 삶의 지혜입니다(p. 90). 남녀노소, 신분이나 그 무엇에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알아내려 했고 또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죽음과 관련해 아는 것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것, 미리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이 역시 모른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죽음 준비가 필요하고,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수 있음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 갑자기 일어났을 때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경감시킬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죽(p. 100)음을 알 때 오늘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내가 누구인지 깊이 성찰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 성찰로부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p. 101). '지나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 두 가지 함축된 상징을 발견합니다. 먼저는 앞서 이야기한 지금의 영광과 즐거움이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있음을 알기에, 오늘을 겸허히 살게 됩니다. 동시에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사라질 때가 있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p. 118)이지요. 일부러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짐이고 일이라면, 지나갈 때를 기대하는 중에 기다리며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나 고통이든, 영광이나 즐거움이든 지나갈 것임을 깨달을 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의 때라면 지나갈 때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끝나고 이전과는 다른 순간이 펼쳐질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두 가지 상징을 동시에 가집니다. 슬픔과 고통의 끝이라는 것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요. 절망과 단절만이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무조건 도망치려 하거나 모른 척만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죽을 존재인 것을 인정하며 삶을 살 때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시간이 지나고 다가 올 죽음을 인식함으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을 품은 인간 본연의 존재와 만나는 때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t)에서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하나의 존재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죽음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p. 119).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비롯해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상황에 자신을 둘 때 거기에서부터 내가 누구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직하게 묻게 됩니다(p. 120).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첫 걸음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어진 삶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죽음의 속성을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이곳에서 함께하는 이들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만일 지금 나의 죽음 이후를 보았다면, 오늘 어떤 결정과 선택 속에서 삶을 살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시간은 모아둘 수도 없고 잡아둘 수도 없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귀합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p. 175). 어느 날일지 모르는 내 삶의 마지막 언제일지 모를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봅니다. 그때 일상에 찾아온 죽음이 너무 낯설어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맞이하고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평안한 가운데 이르는 죽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따스함을 전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 가면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기념도서관이 있습니다. 2018년 2월 이곳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99년의 일기로 모셔졌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2007년 먼저 세상을 떠난 빌리 그레이엄의 아내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앞 비석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End of Construction - Thank you for your patience. 공사 끝!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묘비명을 정하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남편과 자주 운전하며 가던 길에서 늘 보던 "공사 중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공사(p. 183) 표지판이 "공사 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표지판으로 바뀌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든 루스 여사는 남편에게 그것을 묘비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 이 묘비명이 되었습니다. 하나 더 특별한 것은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던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난 루스 여사는 좋아하던 중국어 '의'(義) 자를 묘비에 크게 써 넣었습니다. 자신의 인생 즉 '공사구간'에서 적지 않은 허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셨고 또 자신을 아는 많은 이들이 잘 참아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잊고 살았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p. 184). 삶과 죽음은 둘 다 공통적으로 일상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삶과 죽음은 매일 이어집니다.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단절로 엉망이 되는 건 아닙니다. 놀랍게도 죽음의 순간은 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이 질문은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닫혔던 삶의 지평이 열리면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함축적인 시간이 펼쳐지고 농밀한 삶의 순간과 만나는 때입니다(p. 217). 오늘 나의 삶은, 죽음으로 인해 다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생각할 때 더욱 선명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이 삶에 들려주는 잊지 말아야 할 대답입니다(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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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2-13
  • 【단상】 세월은 빠르다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6-02-09
  • 【북토크343】 사별, 그 무엇보다 큰 상실감
    이 책의 저자는 40년간 결혼생활을 해오던 남편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사별하게 된다. 이후 생겨진 마음의 굴곡을 책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때 당시 결혼한 딸이 아팠었는데 그 딸도 몇 년 후 사망하게 된다. 작가도 2021년 작고했다. 사망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옅어지는 가운데 함께 가야 한다. 그런면에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판됐다. UCLA에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뉴욕에서건 캘리포니아에서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건,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은 아주 성공한 사람들 특유의 사고방식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자신의 수완을 전적으로 신뢰 했다. 그들은 손에 쥔 전화번호와 알맞은 의사, 주요 장기 기증자, 정부나 사법부에서 편의를 도모해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들의 수완은 사실상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의 힘은 사실상 천하무적이었다. 나도 거의 평생 동안 그들처럼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만약 어머니가 튀니스에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면 나는 미국 영사를 통해 어머니에게 영자신문을 보내고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파리에서 오빠를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만약 퀸태나가 니스공항에서 갑자기 발이 묶이면 브리(p. 130)티시 에어웨이의 누군가에게 연락해 그 회사 여객기를 타고 런던에서 사촌을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어느 정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내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는 것(p. 131). 나는 1년 내내 작년 달력을 보며 날짜를 따졌다. 작년 이날에는 무슨 일을 했더라? 어디에서 저녁을 먹었더라? 작년 이날에 퀸태나의 결혼식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날아갔던가? 작년 이 날에 파리에서 돌아왔던가?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렉싱턴가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다.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인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신탁계좌의 이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물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물속으로 쉽게 떠나보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p. 283)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차들을 잊어버렸다(p. 284). 역자 후기 나는 집착하기 쉬운 내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집착할 만한 대상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이것 역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착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며, 이로 인한 괴로움이 생긴다. 집착은 원래 독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집착 중에서도 가장 독한 것이 인간에 대한 집착이며, 가장 나쁜 것 또한 인간에 대한 집착이다. 태생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 만의 하나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니까. 하지만 과연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상실』은 조앤 디디온의 집착과 그로 인한 슬픔에 관한 책이다. 40여 년을 함께했던 남편을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건네는 작별의 인사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집착과 죄책감이 이 책에서 유난히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거의 날마다 한 공간에서 보낸 이들 부부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장영희 선생님도 극찬한 저자의 필력 때문이기도 할 텐데, 아무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막막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쓸쓸하고 아득하고(p. 286) 외로운 그 단어가 이 책의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행간을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역자가 되고 싶었다. 이 책에서 행간은, 냉정으로 무장한 저자의 가면 뒤로 드러나는 시뻘건 생살과 같았다. 의연한 표정 사이로 터지는 흐느낌과 같았다. 나는 원서를 읽었을 때 처음에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로 그런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디디온의 능력에 놀라워했고, 그 다음으로는 그 느낌을 과연 제대로 살릴 수 있을까 두려워했다. 원문의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 옮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내가 원서를 접했을 때 경험했던 막막함을 느낀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6월 이은선 덧붙임: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난 뒤 어느 서평에서 그녀의 딸 퀸태나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님을 알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따름이다(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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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9
  • 【북토크342】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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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7
  • 【양대식 목사 칼럼8】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만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리더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인격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듣고 멘토에게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성장이 없고 퇴보하는 리더는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겸손해야 배우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해야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여 여러 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무엇인가에 도전하면서 성장합니다. 말하는 기술도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강의하면서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사람 됨됨이 입니다. 인격에 문제가 있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인간미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인격도 성숙해집니다. 인격의 성숙은 내면의 평안, 정직, 겸손, 배려심, 이해심으로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격의 성숙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인격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도 온유와 정직한 삶을 삽니다. 인격이 성숙해야 존경받고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나의 삶을 보고 영감을 받고 누군가가 도전받아야 합니다. 리더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이 없으면 매력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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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7
  • 【북토크341】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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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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