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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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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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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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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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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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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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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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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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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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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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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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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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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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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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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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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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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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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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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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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꼴값 떠는 사람들...꼴뚜기인가?
- 총회 주변에 꼴값 떠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총회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거들먹 거린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꼴값 떤다’고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못난 사람이나 하찮은 존재가 전체의 망신을 시킨다"는 뜻의 속담이다. 그런면에서 꼴값 떠는 사람들은 꼴뚜기다. 사람이 꼴뚜기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이에 대한 정확한 뜻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다. 이 내용을 자주 봐서 나라도 꼴값 떨지 않고 살아야겠다. 구굴 AI 설명 ‘꼴값’은 격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으로, 주로 ‘꼴값 떨다’ 또는 ‘꼴값하다’의 형태로 쓰입니다. 1. 사전적 의미 꼴: 사람의 모양이나 겉모습을 낮잡아 이르는 말. 값: 물건이나 노력의 대가. 합친 의미: 얼굴값이나 모양새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넘은 짓을 한다는 비속어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확한 정의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 상황별 쓰임새 능력 밖의 허세를 부릴 때: 실력은 없으면서 잘난 척을 심하게 하는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진지한 자리에서 철없는 행동을 하거나,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할 때 씁니다. 3. 주의사항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강한 어조의 표현이므로, 공식적인 자리나 예의를 갖춰야 하는 상대에게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비슷한 의미의 속담으로는 ‘꼴값한다(얼굴값 한다)’가 있으며, 관련 어휘는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에서 더 상세히 검색해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 AI 설명 ‘꼴값’은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자, 격에 맞지 아니하는 아니꼬운 행동을 뜻합니다. 의미와 쓰임 ‘얼굴값’을 속되게 일컫는 말로 풀이됩니다. ‘격에 맞지 아니하는 아니꼬운 행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꼴값을 하다’는 ‘꼴에 어울리는 행동’을 뜻하며, 반어적으로 잘 쓰입니다. ‘꼴값 떨고 있네’처럼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원·변화 ‘꼴’은 본래 ‘골’에서 온 말로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를 뜻합니다. ‘골값’이 ‘꼴값’으로 변하며 ‘모양이나 됨됨이의 값어치’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뜻으로 사전 풀이됩니다. 관련 표현 ‘꼴값하다’는 ‘꼴값’의 파생동사입니다. ‘꼴같잖다’는 ‘꼴이 격에 어울리지 않아 아니꼽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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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꼴값 떠는 사람들...꼴뚜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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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4】 흥미로운 주제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 시민 누구에게나 일정액을 주는 기본소득, 그리고 청소년이 일정한 연령이 되면 주는 기초자산에 대한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처럼 몰랐던 것을 아는 신선함이 있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나 몰라라 했는데 관심 갖고 알아야 할 것 같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란 중산층이 유지하는 체제입니다. 상류층은 자신들을 규제하는 민주주의를 성가셔 하고, 하류층은 먹고살기에 바빠 민주주의 자체에 관심이 없지요. 소득과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집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p. 32)에 세계가 '포퓰리즘'에 빠져버렸다고. 소득과 부의 극심한 불평등이 야기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죠(p. 33). 2014년에 한 어머니가 두 자녀와 함께 연탄가스에 질식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생활 고를 비관한 자살이었죠. 그런데 이 어머니,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당시 60세였던 이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았습니다. 큰딸은 병을 앓고 있었지만 치료비가 없었고, 작은딸은 알바를 하고 있었지만 신용불량자였습니다. 그 와중에 아주머니가 몸을 다쳤습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가까스로 유지해오던 생활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아 주머니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이처럼 열심히 노동한다는 것과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그 연관성이 없을 때도 있을진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동하느냐에 소비능력이 달렸다고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크고 나쁜 거짓말입니다. 그 거짓말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삶을 게으른 자들로 만들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외면해도 좋을(p. 47) 비도덕적 인격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p. 48). 자동화된 세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까지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한 내용을 돌이켜보면 이 자동화된 세계가 여러분의 직업을 빼앗아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간병인이나 운전 사 같은 직업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자동화된 세계를 직업을 빼앗아가는 약탈자로 여겨야 하는 걸까요? 스위스의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이 세계가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합니다(p. 79). 자동화가 축복이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이 이제 그런 무의미한 노동에서 벗어나서 의미 있는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컨베이어벨트 옆에 인간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고 탄식만 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이룬 기술의 진보를 어떻게 복지로 연결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때다. 이들은 말합니다. "자동화된 세계가 우리를 더는 무의미한 노동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노동을 하게 해줄 것이다. 기계 옆에서 원망하는 대신 기술의 진보를 인간의 삶이 더 나아지는 데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진보를 어떻게 쓰겠다는 것일까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자동화에 대한 일종의 이익배당금이나 마찬가지다. 로봇은 소득이 필요 없지만 우리는 소득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가져가고 임금이 필요 없는 로봇 대신 우리가 그 임금을 받는 것이다. 곧 로봇이 일을 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보상을 모두가 나누어 받는 셈이다(p. 80). "기본소득을 자동화가 만들어내는 이익배당금으로 보자." "일자리는 로봇에게, 임금으로 쓰일 비용은 인간에게." 이를 두고 뭔 공상과학이야?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돈 벌고 싶은 사람에게는 '꿈'이나 다름없는 빌 게이츠가 2017년 『쿼츠Quartz』라는 IT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봇을 사용하는 회사가 로봇세를 내라. 이 로봇세 를 사회복지에 쓰자." 로봇이 일해서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닌 이상 세금을 내야만 하고, 로봇이 대체할 직업 때문에 일자리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 세금을 써야 한다는 게 빌 게이츠의 입장인 겁니다. 자동화된 세계에 대한 빌 게이츠의 입장과 스위스 기본소득주의자들의 의견이 사실상 같은 거지요. 빌 게이츠도 자동화가 어쩌면 인간에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p 81).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네요. '아, 이제 기원이나 역사 말고 대체 기본소득이 뭔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를 말해보라고!' 네, 이제 여러분의 요구에 본격적으로 부응 하겠습니다. 우선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조건 부과 없이,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노동할 의사가 있는지 묻지 않고 여러분이 속한 정치공동체가 모든 구성원에게 개인 단위로 지급하는 소득입니다. 조건 없이 기본소득.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산과 노동의사를 묻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부하는데 이걸 노동하지 말라고 왜곡해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은 기본적으로 수혜자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모든 사람은 시민만을 의미하는 거냐?' 이렇게 물을 수 있죠. 한데 대다수의 기본소득주의자는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비시민도 최소한의 거주기간, 규정된 거주조건 등을 바탕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답(p. 119)하고 있어요. 어떤 이들은 세금도 안 내는 사람들에게 이런 혜택을 줄 필요가 있느냐고 묻기도 하죠. 많은 사람이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해 외부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그 어떤 국가도 비시민들이라고 자기 영토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에게 세금을 안 내게 하지는 않으니까요. 자기 영토 내에서는 반드시 과세하게 됩니다(p. 120). 기본소득은 노동유인을 죽이지도, 죽일 수도 없다 자, 이제 기본소득이 뭔지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조건 부과 없이, 다시 말해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이다. 둘째, 기본소득은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다시 말해 부자들에게도 지급되며, 부자들이 받는 것이 빈자들에게도 이롭다. 셋째, 정치공동체가 일종의 배당으로 지급하는 일차적 소득(p. 136)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재분배가 아니다. 넷째, 지급하는 주체는 주로 국가지만, 반드시 국가일 필요는 없다. 다섯째, 기본소득의 재원은 다양하며, 어떤 재원을 확보하느나에 따라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 여섯째,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제 기본소득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를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질문, '기본소득이 노동할 유인을 죽이는가'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이 있습니다. 이건 마치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물게 되면 일할 의욕을 잃을 것인가'라는 멍청한 질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1억을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세금이 진짜 너무 빡세서 5,000만 원을 세금으로 냅니다. 우리나라의 2017년 중간연봉이 세전 2,225만 원입니 다. 세전 중간연봉으로 쳐도 2,700만 원 이상 더 버는 상황인 거죠. 그런데 세금을 많이 낸다는 이유로 이 차액 2,700만 원을 쉽사리 포기하고 대다수 사람이 2,225만 원만큼만 일할까요? 그게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혼자 산다고 생각하고 매달 기본소득 50만 원을 받는(p. 137)다고 가정해볼까요? 사실 50만 원으로 생활비 자체가 해결되지도 않겠죠. 당연히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일을 해서 벌어들일 소득을 이 50만 원에 더해서 150만 원이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여러분은 이 상황에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오히려 노동할 유인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기본소득의 핵심은 '기본소득 50만 원으로 행복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소득에 당신의 노력을 얹어보라'는 겁니다. 여기서 기본소득의 혜택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노동을 하지 않도록 해주고, 좀더 의미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로 노동을 쉬고 싶을 때는 쉬게 만들어줄 수도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강의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듯,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많은 실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실제 대다수 실험의 핵심적 질문은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이 계속 노동유인을 유 지할 수 있는가'입니다. 기본소득주의자들은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답하고 싶어하죠. 앞에서 당장 강의하고 있는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이 근본적으로는 기본소득에 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기본소득 자체의 목적은 노동유인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복지 국가의 복지정책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을 겁니다(p. 138). 기본소득이 기본소득다우려면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이 계속 노동유인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아주 부차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순간, 또 이 질문에 답하 는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순간, 노동이 우리 삶을 다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의 답은 오히려 '노동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때, 그래도 괜찮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p. 139). 우리나라 부의 분배 상황. 2013년 기준으로 우리 나라 소득 상위 10%는 전체 부의 66%를, 하위 50%는 1.7%를 가지고 있는 이 현실. 그런데 이 통계를 만든 김낙년 교수님이 하나 더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소득 상위 0.01%(3,895명)의 평균소득(27억 3,084만 원)이 전체 국민(20세 이상 성인) 평균소득(1,639만 원)의 167배에 이른다"는 겁니다(『한겨레』, 2015년 1월 13일).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가 훤히 드러나죠. 이 통계가 진짜 '한번 흙수저는 평생 흙수저'라는 젊은이들의 한탄을 한눈에 뒷받침하는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저립니다(p. 166). 상속은 노동이라는 전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회적 제도입니다. 솔직히 상속만큼 철저하게 개인이 타고난 운에 의지하고 있는 제도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일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재능은 있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혹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흔히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죠. '네가 조금만 더 여유로운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부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찢어질 듯한, 그런 때가 종종 있어요. 더 놀라운 건, 아니 좀 부끄러운 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면서도, 그랬(p. 172)으면 하고 바라는 나 자신을 볼 때가 있다는 거예요. 갑자기 이야기가 조금 슬퍼지는 것 같네요. 자, 이제 기분을 바꿔볼까요? 세상의 현실이 이런 걸 알고 '부모가 상속할 수 없다면, 국가가 상속해주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 성년에 이르렀을 때 국가가 그 아이들에게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종잣돈을 주자! 부모가 상속을 할 때 자식들에게 노동의 조건을 걸지 않듯이, 사회도 상속하면서 노동의 조건을 걸지 말자! 이제 조금 기분이 나아지셨나요? 부모 대신 국가가 성년에 이른 시민들에게 일정 정도의 자본을 목돈의 형태로 제공하는 제도, 바로 기초자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이 기초자본이 기본소득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간단하게 '난 종잣돈이 좋아요! 큰돈이 좋아요!'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p. 173). 기초자본의 목표는 '한 정치공동체 혹은 국가에 속한 구성원들이 출발선상의 평등을 최소한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하자'(p. 174)는 겁니다. 그래서 매달 소비할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 연령에 이른 구성원들에게 자기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목돈, 소위 종잣돈을 지급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18세, 21세 등 일정 연령에 이르렀을 때 국가가 성년이 되어 자기 인생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2,000만 원이든 3,000만 원이든 목돈을 한꺼번에 주자는 겁니다. 기초자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목돈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p. 175).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의다 '모든 시민이 일정 연령에 이르면 일정한 자원의 지분을 나누어주자.'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우리 사회가 공산주의 체제냐?'고 반박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시장을(p. 199)믿지 않지만, 기본소득주의자건 기초자본주의자건 아무도 시장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자들도 있어야 하고 투자한 기금이 굴러가기 위해 시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인간은 반드시 노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공산주의는 노동자가, 노동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의 자격을 가진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기초자본을 주장하는 애커먼도, 알스톳도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단연코 노동가치 이론을 거부한다!" 솔직히 자유주의자로서 저도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노동하는 자 만이 자격이 있다는 이 이론을 단연코 거부합니다. 그렇기에 기초자본 이론은 사회민주주의 이론도 아닙니다. 애커먼과 알스톳이 지적하듯이 '사회민주주의는 임금노동을 사회정의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시스템입니다. 그 자체로는 거부 할 것도, 비판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발상은 '임금노동만이 좋은 삶'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금노동이, 노동윤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모(p. 200)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고 정의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게으름뱅이들조차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심각하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남성 중심적인 복지국가의 근본도 의심합니다. 그래서 애커먼과 알스톳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민주의는 너무 많은 인간을 사회생활의 중심에서 밀어낸다.(••). 사민주의는 수천만의 일반인을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킨다. 사민주의는 유급노동을 기준으로 존엄성을 판단한다. 고용보조, 근로소득보전세제, 노동연계 복지와 같은 정책들은 빈민에게 노동을 조건으로 사회적 보상을 제공한다. (••••) 그러나 노동조건부 급여는 자유주의적 정의가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계약조건을 요구받지 않는다. 이 제도를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비난하고 싶은 분들은 좀 아쉬울 겁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지분은 '노동하는 삶만이 가치 있다'는 전제를 단연코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인 분배의 상상력이라는 점을 거듭 말씀드립니다(p. 201). 일자리가 늘어나는 일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장기적 대안을 생각하면서 분배정책을 준비해야 합니다. 인구가 줄어들 테니 괜찮다는 멍청한 소리는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한편에서는 인구가 줄어든다고 출산장려책을 쓰면서, 미래의 일자리 대비는 인구가 줄어들 테니 괜찮다고 하는 건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라 고려할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도 오래 살아가야 할 21세기에 상응하는, 21세기다운 분배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야말로 21세기 분배의 상상력에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p. 222). '무엇이 문제일까?' 몇 번이고 묻고 답하며 저 나름의 결론이 섰습니다. 제게 대한민국은 '소득과 부가 사회적 인정투쟁'의 중심에 있는 곳입니다. 이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대학생 일 때부터 탐구해오던 주제, '소득과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로 관심을 되돌렸지요. 바로 '재산소유 민주주의'에 바탕을(p. 251)둔 '기본소득'과 '기초자본' 논쟁이 떠올랐습니다. "적절한 소득과 부의 소유가 실질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고 불의를 향해 '아니요'라고 말할 힘을 준다"는 전제에 기반을 둔 분배의 상상력입니다. 돌이켜보면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낡은 서랍에 넣어둔 반가운 편지처럼 이 발상들을 꺼내들고 다시 하나씩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타자에 대한 혐오가 언제나 자기혐오에서 출발하고 그 혐오가 차별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면, 제가 대안으로 제시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은 '각 개인이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만한 제도'여야 했습니다(p.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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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4】 흥미로운 주제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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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뒤끝 작렬.... 자랑할게 못 된다
- 때로 어떤 사람들은 대놓고 “나 뒤끝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뒤끝’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은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을 뜻한다고 한다. 과연 뒤끝 있는 것이 좋은 것인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적당한 때에 끝낼 것은 끝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으로 수년, 수십 년을 산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 있게 자신이 뒤끝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언제라도 뒤끝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끝 작렬’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좋지 않은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남아 표출되는 ‘뒤끝’을 강조해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일상에서는 “뒤끝 작렬”처럼 강한 뒤끝을 강조해 표현한다고 한다. ‘뒤끝 있는 사람’, ‘뒤끝 작렬하는 사람’을 멀리해야겠다. 언젠가는 화를 입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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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뒤끝 작렬.... 자랑할게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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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나잇값 못하는 노인들
- 인터넷을 검색하니, “나잇값은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흔히 ‘하다·못하다’와 함께 쓴다.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치한 언행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나잇값을 못 하고 그저 나이만 먹은 노인들을 본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이다. 나이 많은 것을 때로는 공격적으로 때로는 방어적으로 사용한다. 그저 세월이 흘러 늙었을 뿐 나잇값을 못 하는 노인들이 있다. 그것도 많다. 나이에 걸맞은 성숙함이 없이 그저 늙어간 것이다. 그래서 기품도, 혜안도, 지혜도, 관용도 없이 그저 과거의 자기 세상에 갇혀서 민폐만 끼친다. 나도 이제 내년이면 60살이다. 나잇값을 하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고 싶다.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악취를 풍기는 노인들을 볼 때 ‘저렇게 늙으면 안 되는데’ 하는 두려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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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나잇값 못하는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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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준다고 다 갔다가는 망할 수 있다...낄끼빠빠하자
- 일부 총회 임원들이 벌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총회 내에 일파만파의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분쟁 교회 한편에서 제명출교 된 목사의 위임식을 강행했다. 법적으로 담임목사 지위를 갖고 있는 반대편에서는 이 위임식에 참석해 순서를 맡은 자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들이 그 교회 상황을 제대로 알고 그 자리에 갔는지 묻고 싶다. 법적으로 문제 있는 교회에 총회 임원들이 개입함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을 만들었고, 이들도 결국 화염에 휩싸이게 됐다. 다들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다. 참석 인사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자칭 타칭 법통인 목사다. 그는 700여 명으로 이뤄진 총회 헌법에 대해 자문하는 단톡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목사가 이 문제 많은 그리고 앞으로 파편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쟁 교회에 가서 축사하는 순서를 맡았다. 그러면 총회 법에 대해 자문하는 이 목사는 그날 위임식이 정당했다고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불러주어서 간 것인가? 만약 자칭 타칭 법통이 아니라면 문제가 덜 될 수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다툼이 있는 교회 한편에서 강행하는 행사에 참석했다면, 그리고 그가 교회 분쟁 등에 대해 법적인 자문을 하는 위치에 있다면 이는 문제가 달라진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부정적인 여론에 도매금으로 난타를 당할 것으로 보인다. 불러준다고 다 갔다가는 망할 수 있다. 특별히 어떤 위치에 있을수록 처신을 잘해야 한다. 쓸데없는 구설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순서를 맡아 발언하면 폼날 수 있다. 그래서 우쭐거리기도 한다. 또 거마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일생을 망칠 에서의 팥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이 먹고, 지위에 있을수록 소탐대실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반면교사 교보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살아갈수록 낄끼빠빠를 잘 해야 한다. 이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로, 눈치껏 행동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빠빠’를 못하면 ‘빠빠이’를 당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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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준다고 다 갔다가는 망할 수 있다...낄끼빠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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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3】 깊은 성찰을 담은 에세이 읽기의 즐거움
- 이 책은 깊은 깨달음을 담은 에세이라 좋다.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각자의 삶을 통해 독자에게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세이를 자주 찾아 읽는지도 모른다. 한 시절을 함께 견딘 사람, 스승 지금도 스승의 날만 되면 학교 현장에서 불리곤 하는 강소천 작시의 〈스승의 노래〉는, 듣는 스승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급기야는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라는 최고 예우의 비유로 시작하는 이 노래 1절은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을 "마음의 어버이'로 칭송함으로 써 마무리된다. 전인격적 스승의 역할을 양도한 채 얼마간 기능적 전문직에 기울어진 길을 걷고 있는 대학교수들에게, 이 노랫말은 적지 않은 자괴감과 민망함과 당혹감을 던져준다. 물론 어떤 날을 기념하는 노래들이 나름대로 대상에 대한 송가의 속성을 띤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스승의 노래〉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같은 구체성 있는 언어로 우리를 감읍케 했던 양주동 작시의 〈어머니날 노래〉(물론p. 34 지금은 '어버이날'이다. 한때 우리는 어머니께만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던 '어머니날'을 기념한 바 있다)에 비해서도 훨씬 추상적 과장과 미화가 심하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같은 은혜는 고사하고, 나는 '참되거라 바르거라' 하고 가르친 적이 도대체 없다. 어떤 인문학자가 그렇게 명료하고도 단선적인 '참됨'과 '바름'을 학생들에게 권면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참됨'과 '바름'의 자명함을 의심하면서 그런 윤리적 가치나 지표들이 구성되는 사회적 합의 방식 혹은 체계들을 비판적으로 읽을 것을 주문해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나는, 스승의 언어는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내려가는 순리의 언어가 아니라, 때로는 솟구치기도 하고 소용돌이도 치는 역리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서구 계몽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학교 하나를 지으면 감옥 하나를 부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사회의 야만 상태를 문명 상태로 끌어올리는 학교의 긍정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한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는 학교 하나를 늘리면 고스란히 감옥 하나가 늘어나는 아이러니를 보이는 방향으로 흘렀다. 학교가 곧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우리 기억 속에서 학교는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라, 제도적 강제로 주어진 타율적 집합소 같은 곳이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교육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탈학교화 사회Deschooling p. 35 Society』라는 책에서 아예 학교에 대한 급진적 비판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렇듯 학교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급진적 비판이 공존 하는 현상은, 학교가 사회 체제에 의해 견고하게 결속된 기구이면서 동시에 그 견고함을 깨뜨릴 수 있는 창조적 균열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장소임을 알려준다. 학교의 구성원인 스승과 제자는 이러한 결속과 균열을 함께 지고 있는 양대 축인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야말로 좋은 스승과 제자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힘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드문 사례일 것이다. 모교에 새로 부임한 키팅 선생은 자신을 선장 captain 이라고 부르라면서 첫 시간부터 파격적 방식으로 제자들을 대한다. 그의 교육 방법은, 죽어 있는 지식을 전수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경험을 제자들과 공유하는 데 집중된다. 어느 날 그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제자들 몇몇이 그 모임을 이어가기로 작정하면서 영화는 진경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학교 뒷산에 있는 동굴에서 시를 낭송한다든가 연극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매혹적 자아상 을 구축해간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학생 하나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게 되면서, 학교측에서는 이런 불온사상을 유포한 당사자로 키팅을 지목하 고 그를 파면하려 한다. 학교를 떠나는 스승 앞에서 몇몇 제자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는 마지(p. 36)막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자신들의 삶에 새로운 결속과 창조적 균열을 선사해주었던 스승께 파격적이고 전폭적인 헌사를 보내는 이 장면은, 키팅의 교육적 퍼포먼스가 감동적 동의agreement를 이끌어내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진정성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수용자들의 폭넓은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을 이 영화는 감동 깊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우리의 기억 속에 마치 '대안 교육'의 전범 같은 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 키팅의 교육이 여타의 것들을 압도하는 최량의 것이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우스 갯소리로, 키팅이 우리나라에서 그리했다면 벌써 인터넷 게시판에 난리가 나고 퇴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몇몇 제자들이 보여준 마지막 동의의 결단은, 키팅에 의해 전달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삶과 언어의 매혹을 경험하게 하려 했던 키팅의 의도가 발견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매혹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장 멋진 스승임을, 그리고 좋은 스승good leader 만큼 좋은 수용자good follower가 중요함을 이 영화는 새삼 깨우쳐준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아니한다'고 했던가. 스승에 대한 배타적 외경을 담은 표현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공자는 "三人行 必有我師"라고 함으로써, 어디든 있는 잠재적 스승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주문하였다. 스승이란 성역에 있는 존재가 아니(p. 37)라 새롭게 구성되어가는 존재임을 말한 것일 터이다. 나는 대학에서의 진정한 스승이란, 자신의 그림자도 나누어 가지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 대한 동의를 얻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이, 좋은 수용자들에게 발견되기를 희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고단한 대학 구성원으로서의 공동 운명을 나누면서 한 시절을 제자들과 함께 견딘 사람일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썼지만, 제자들을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분주하고 무력하기만 한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는, 함께 견딤의 윤리와 열정을 통해 새로운 결속과 균열의 힘으로 '스승' 역할을 힘겹게 해나갈 뿐이다. 그때 비로소 하늘 같은 은혜는 아닐지라도 마음의 어버이 같은 스승의 쓸쓸한 그림자가 비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자들은 그 '그림자'를 같이 밟으면서, 스승의 뒷모습을 발견해주지 않겠는가(p. 38). 가을에 읽는 책 - 늦은 나이란 없다 가을은 만물이 소멸하는 계절이다.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잎사귀들을 떨구어 뿌리로 돌려보내고, 들녘은 가을걷이 후의 허허로움과 적막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 을은 만물이 결실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희망과 여름의 시련을 거친 후의 가을 풍경은 수확 뒤 기뻐하는 농부의 얼굴을 닮았다. 시인 릴케도 "최후의 단맛을 포도송이에 저며넣"( 「가을날」)고 있는 가을의 풍요를 노래한 바 있지 않은가. 그만큼 가을은 소멸과 결실의 모순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을은 인생의 중년과 꽤 흡사하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청년기의 열정을 잃어버린 허전함이 있는 나이, 생의 여유로 인한 넉넉함과 노년기로 나아가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나이, 그것이 바로 인생의 중년이니 가을은 여러모로(p. 74) 중년과 닮아 있다. 이 가을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을 들라면 많은 이들은 흔쾌히 '독서'를 꼽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익숙한 표어가 곧바로 연상되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기온이 책을 읽기에 퍽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가을은 그동안 분주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을 성찰하고 사색하는 데 알맞은 계절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책 읽기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다양해진 매체 환경이 우리의 시선을 책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온통 쏠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와 지식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아가 우리 시대는 다양한 매체가 한꺼번에 공존하면서 서로 경합하는 다매 체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화 사회'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책'보다는 '영상' 쪽으로, 깊은 '생각'보다는 가벼운 '유희' 쪽으로, 지속적인 '지성'보다는 일회적인 '감각' 쪽으로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독서보다는 스포츠나 여행, 영화 관람 등이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점령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책'이 가지는 문화적 위상은 지난 시대에 비해 매우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p. 75). 일찍이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교제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하나가 동성 간의 우정이요, 둘이 이성 간의 연애요. 셋이 책과의 교제인 독서다. 내일을 위 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처럼, 독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활자와 사귀는 일종의 교제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만나는 일이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그 여름에 읽은 책」) 이 또한 독서를 통해 우리가 망각했던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과 만나야 한다는 목소리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가을에 독서를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은, 현란한 광고로 치장된 처세술이나 효율성으로 무장한 경영 전략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날과 다시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그러려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좋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잊힌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독서의 대상이 활자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도심 대형 서점은 책으로 넘쳐난다. 넘친다고는 하지만 정작 좋은 책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홍수 때 먹을 물이 귀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가을엔 좋은 책을 손에 쥐자. 자신을 찾아 나서는 오랜 여행을 떠나자. 그 대상이 두툼한 볼륨에 정장을(p. 76)한 양장본일 수도 있고 얄팍한 두께에 무선제책을 한 문고본일 수도 있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비극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도 좋고, 온갖 난관을 뚫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인간의 의지를 담은 논픽션도 좋다. 1년 가야 한 번 떠들어볼까 말까한 고급 도록이나 화첩이면 어떤가.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다. 소멸의 안타까움과 결실의 즐거움이 공존하는 이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계절에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을 잡자. 늦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리하자. 책을 읽는 데 늦은 나이란 없다(p. 77). 선택에 대한 긍정과 사랑 다음 시편은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다. 가끔씩 생의 어떤 분기점에 이를 때마다 불쑥불쑥 솟아나 너그러운 자긍과 겸손의 마음을 환기해주는 작품이다. 한번 읽어보자. 원 문을 소개하기는 어려운 터라 피천득 선생 번역으로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 번역시편을 처음 접했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p. 156)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몇몇 '길'의 이미지가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름다운 영화 〈길〉, 프랭크 시내트라의 장중한 노래 〈마이 웨이〉 등은 '길'(p. 157)을 상징의 차원으로까지 각인한 명품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편 「가지 않은 길」은 가장 선명한 기억의 '길'을 뚜렷한 심상으로 선사한 바 있다. 시의 화자는 어느 가을날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난다. 얼마나 망설일 것인가. 그래서 그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중에서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게 보이는 길을 선택한다. 도전과 개척의 의미를 품은 이 선택은, 다른 한 길에 대해서는 "다음 날을 위하여" 남겨두는 것을 수반하게 된다. 물론 이 갈림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경에 이르러 자신이 선택한 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회상하게 된다. 흔히 우리 삶의 과정은 '길'에 비유되곤 한다. 그 길은 삶의 과정을 가장 적절하게 은유하면서 순간순간 우리에게 여러 갈래의 선택지로 다가온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길만 주어지고 그저 우리는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평화롭고 단조로울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 속에서 특유의 긴장과 활력을 가지는 법이다. 그런데 '선택'이 다른 것들의 '배제'나 '포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다른 것들을 배제하거나 포기하면서 '길'을 선택해간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자긍과(p. 158) 겸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어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없을 것인가. 나는 이 시편에 담긴 시인의 삶의 여정, 곧 망설이고 아쉬워 하면서도 중국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흐름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불가피한 선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지 않은 길을 상상적으로 그리워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을 오늘도 걷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끔씩 그 선택에 회한과 아쉬움을 느끼면서, 더없는 감사를 드리면서 말이다(p. 159). 섭리와 운명 사이의 생성적 지혜 30여 년 전에 개봉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를 질투했던 한 궁정음악가의 생애를 다루어 우리에게 깊은 기억을 안겨준 바 있다. 왕실의 궁정음악가 살리에리는 천재 작곡가로 소문이 난 모차르트의 연주를 듣고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하지만 그 천재는 참으로 오만방자했고 여성들을 희롱하거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등 한마디로 미성숙한 철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철부지가 천부적인 음악적 소질을 가졌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살리에리는, 정작 자신에게는 그러한 재능을 주지 않은 신에 대한 항의와 절망으로 모차르트에 대한 한없는 적대감을 키워 간다. 그 결과 살리에리가 의도적으로 모차르트를 파멸시켜간다는 것이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이때 살리에리가 외친,(p. 225) "신이시여, 주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절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말씀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음악으로 찬미하길 원하지 않으신 다면 왜 그런 갈망은 심어주셨습니까? 갈망을 심으시곤 왜 재능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마지막 대사는, 자신의 재능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적 외침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을 게다. 재능에 대한 감별력은 주었지만 정작 그것을 펼칠 능력은 주지 않은 신의 처사에 대한 항변은, 그것이 섭리이든 운명이든 예술가가 견지하는 욕망과 재능 사이의 관계와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천분의 불가항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해준다. 이와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 최인훈의 단편 「라울전」이다. 최인훈은 「광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본격적인 분단소설의 출발을 알린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이다. 「광장」에서 작가는 북쪽 사회가 가지는 폐쇄성과 집단의식의 강제성을 비판하고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자유방임에 가까운 개인주의를 고발 하였다. 그런 최인훈이 「광장」 한 해 전인 1959년에 발표한 소설이 「라울전」이다. 주인공인 라울과 사울은 석학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랍비가 된 동급생 친구이다. 라울이 학구파이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사울은 성깔 있는 한량에 가까운 편이었다. 라울은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그가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어보지만, 사울은 바로 예수를 탄압하기 시작(p. 226)한다. 그런데 정작 부활한 예수는 라울이 아니라 사울을 찾아가 그를 회심시킴으로써 사도로 삼는다. 이때 라울은 "신은, 왜 골라서, 사울 같은 불성실한 그리고 전혀 엉뚱한 자에게 나타났느냐? 이 물음을 뒤집어놓으면, 신은 왜 나에게, 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적어도 절반은 인식했던! 나에게, 나타나지를 아니하였는가?"라는 말로 항변한다. 이는 그대로 궁정예술사 살리에리의 외침을 닮았다. 이때 사울은 성경의 비유를 들어 "옹기가 옹기장이더러 나는 왜 이렇게 못나게 빚었느냐고 불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옹기장이는 자기가 좋아서 못생긴 옹기도 만들고 잘생긴 옹기도 빚는 것이니"라고 일갈함으로써 신의 의지에 따른 섭리의 전권을 다시금 설파하게 된다. 이 두 편의 예술적• 종교적 서사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살리에리와 라울의 운명과 항의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고뇌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섭리와 운명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상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백석 시편 「흰 바람벽이 있어」의 마지막 구절은 매우 융융한 시사를 던져준다. 백석은 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섭리이든 운명이든 가장 귀한(p. 227)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이 '사랑=슬픔'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과 슬픔의 생성적 지혜를 발견하면서 섭리나 운명의 속뜻을 헤아려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살리에리와 라울의 불행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발견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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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3】 깊은 성찰을 담은 에세이 읽기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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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2】 성실한 삶의 본을 보인 부모에 대한 추억
- 재미있게 읽었다. 열심히 사는 젊은이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는 없다'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다. 물질이 아닌 삶의 태도를 자녀에게 물려주어야한다.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는 없다 나는 금수저, 은수저도 아니지만 흙수저도 아니다. 일 억만금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바로 아빠의 피 끓는 유전자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듯이 나도 유별난 점이 하나 있는데, 지치지 않는 체력과 실행력이 그것이다. 친구들이 내 일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살이 날 것 같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무술용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으로 손을 안 대어본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유통하고 제작했고,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온라인 마켓에 상품을 홍보했(p. 13)다. 그로 인해 온라인 창업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상품을 판매해 본 사이트가 워낙 많다 보니 도맡아 하는 과목도 여러 가지가 되었다. 취미가 돈 벌기라 할 만큼 20대 중반부터는 일에만 매진했는데 취미로 했던 에어비앤비 운영, 스톡 사진작가, 블로그 운영 등으로 쏠쏠한 수익을 얻었으며 이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서른 살, 나에게도 1억이 모였다』를 펴내어 또 다른 수익 구조를 만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아빠는 지금의 나보다 더욱 열심히 살았다. 아빠는 재직 중에도 주말이면 늘 새로운 일을 찾아다녔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의 한 장면이 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 겨울, 졸업 시즌이었다. 아빠는 꽃시장에서 꽃을 도매로 구입해 졸업식이 열리는 어느 학교 앞에 자리를 잡고 꽃다발을 팔기 시작했다. 졸업식장 앞에는 아빠처럼 꽃을 판매 하려는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아빠와 아빠의 친구 부부가 꽃을 판매하는 틈을 타 내가 고사리손으로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5천 원, 5천 원!"을 부르자 한 아저씨가 그 많은 상인 중에(p. 15) 나에게로 와서 꽃을 사는 것이 아닌가. "꼬마야, 꽃 한 다발 줄래?" 바밤바 하나가 단 돈 백 원에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5천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처음 쥐어본 나는 눈이 휘동그레지고 말았다. 내가 아빠를 도왔다는 기쁨과 내 손으로 무언가를 팔았다는 희열에 5천 원을 부르짖는 내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엄마의 만류로 두 번째 꽃다발을 팔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나는 친구들 서넛이 모이면 집 안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고 시장놀이를 하는 데 푹 빠졌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친구와 동업으로 일본식 꼬치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아빠는 격주로 주말에 쉬었는데 그 쉬는 날마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쓰리잡을 뛰었다. 또 하나 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집에 웬 스티커가 배달되어 있었다. 전봇대에 광고용으로 붙이는 네모반듯한 스티커였다. 그런데 거기에 우리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아직 그 옛집의 전화번호를 잊지 못하는 것은 분명 그 스티커의 잔상 때문일 것이다(p. 16) 네모난 칸에 가지런히 우리 집 전화번호가 적힌 스티커 1천 장이 놓여 있었다. 지금도 스티커를 사 모으는 스티커 마니아인 내가 안방 바닥에 늘어져 있던 이 스티커를 보고 여덟 살 인생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새로운 아파트들이 들어서며 안전 고리, 보조 열쇠가 유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은 새로 짓는 아파트 주변의 전봇대를 찾아 광고 스티커를 붙였고, 평일에 엄마가 전화로 예약을 받으면 아빠는 주말을 이용해 드릴을 들고 가 열쇠를 시공했다. 서른 살 중반의 부모님이 일하는 곁에서 아기였던 동생과 나는 매주 만나는 새 아파트의 새 놀이터를 접수하느라 마냥 신이 났다. 그 후로도 아빠는 끊임없이 엄마와 함께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고 그렇게 나와 동생은 부모님의 땀과 노동을 먹고 커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집은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노래방을 오픈했다. 밤늦게까지 영업을 해야 했던지라 늘 피곤함에 절어 있던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얼른 커서 나도 한 몫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시절 아빠(p. 17)는 또 한 번 슈퍼마켓을 운영하여 다들 픽픽 쓰러져가던 IMF를 극복했고, 이미 키가 성인만큼 자랐던 나는 이때 슈퍼마켓 계산대를 꿰차고 앉았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동네에서 슈퍼집 아가씨로 불렸다. 동네 슈퍼를 어떻게든 키워 보려고 나는 과자를 묶음으로 할인해서 팔기도 했고, 화이트데이가 아직 어른들에게 생소하던 시절, 사탕을 상자에 포장해놓고 담배를 사 가던 아저씨 고객들을 사로잡았으며 부모님이 시키지도 않은 음료수 가격표를 프린터로 뽑아서 정리하기 등의 일을 도맡아 했다. 슈퍼를 운영하는 일이 그리 힘든 줄 처음 알았다. 모든 동네 사람이 한 번씩 거쳐가며 한 마디씩 거드는 곳이 동네 슈퍼였던 것이다. 나는 때로는 친절하다가도 때로는 손님들과 맞짱 뜨고 싸우면서 장사를 배워갔다. 슈퍼 계산대에 앉아 거의 모든 고객들의 다양한 유형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 장사를 할 때는 평정심을 갖고 아무리 고객님이 이상 현상(!)을 보여도 꾹 참고 친절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큰 내가 장사를 안 하면 이상(p. 18)한 일이다. 이 시절 아빠는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저녁 7시에 퇴근해서 슈퍼에서 일을 하다 저녁 11시에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철인의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며 딸 둘을 유학에 대학원까지 보내며 아르바이트 한 번 시키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하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연금 외에도 월세를 받으며 노후 걱정을 덜었으니 부모님의 인생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아빠의 인생을 모두 봐 온 딸이 어찌 아빠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깊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피곤하다고 축 처져 있거나 티브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는 아빠의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래 사람이란 주말에도 쉬지 않는 것이 정상인 줄 알았다. 또한 지금 마음 편 히 몸 편히 큰 걱정 없이 사는 아빠를 보며 나도 열심히 일을 해 놓은 다음은 편하게 사는 날이 올 줄을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젊은 날 그리 불같이 일하던 아빠의 모습이 멋져 보여서 자꾸만 따라 하고 싶은 것 아닌가!(p. 19) 아빠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이 열심히 사는 유전자. 몸소 보여준 성실함이다. 아무리 아빠가 스트레스를 받은 날 술 한 잔 마시고 도깨비 흉내를 낸 적 있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었음을 딸은 보고 느낀다. 아빠는 긴가민가하며 이루었던 것을, 나는 아빠를 보며 강한 확신을 가지고 노력한다. 아빠가 내 삶의 본보기요, 내 모습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어 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금송아지였다. 금수저를 쥐어 주는 대신 내 몸뚱이를 황금알을 낳는 오리로 만들어 주었으니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맞다. 성공은 운이 붙어야 한다. 번번이 쉬지 않고 아빠는 세상에 부딪혔지만 세상은 아빠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빠의 노력만 보면 준 재벌쯤은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늘 아빠, 엄마가 배운 게 많이 없어서 항상 힘든 일로 돈을 버니 너희들은 많이 배워서 조금 더 세상을 편히 살라고 했다.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은 학교를 많이 다녀서(p. 20)가 아니다. 순전히 열심히 살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일을 왜 그리 많이 하느냐고, 힘들지 않냐고, 쉬었다 하라고 말한다. 늘 말하지만 힘든 걸 꾹 참고 한 것이 아니라 힘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어릴 적부터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빠, 엄마를 보아서, 부모님의 그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힘든 줄을 모르고 일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게 없다고 가끔 친구들과 비교하던 아빠는 여전히 나에게 물려준 게 없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나야말로 금수저다(p. 21). 우리는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다. 어떤 만남도 헤어짐을 전제로 하고 만나는 것을 안다. 부모님과 나는 서로 어떤 모습으로 헤어지게 될까. 아마도 엉엉 울겠지. 아주 오랫동안 서러워할 테지.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기에 그 헤어짐이 되도록 아주 먼 미래이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고민한다. 나 하나 챙기기에 바쁜 시대에 부모님 챙길(p. 286) 여유가 있을까. 과연 어떻게 효도할 수 있을까. 해답이 없는 이 질문에 시원한 답을 남기지 못하고 결국 물음표로 글을 마무리 한다. 부모님이 곁에 있다는 이 기회의 시간 동안, 나는 과연 효도하며 살 수 있을까?(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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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2】 성실한 삶의 본을 보인 부모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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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1】 다른 사람의 일상, 에세이 읽기는 재미있다
-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의 신변잡기를 쓴 책이지만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자신의 삶을 열어보여준 작가가 고맙다. 그런데 절판됐다. 관심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으시기를. 잠깐 멈춤의 기술 2000년에 대기업 계열사인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받은 내 인생 첫 명함에는 '카피라이터'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평생 카피라이터 해야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도 카피라이터 김하나라고 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이란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내가 일을 그다지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한테서 받는 스트레스도 심했다. 많은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리지 못하는 나였기에 더더욱 대기업 문화에 적응하기(p. 32)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시 몇 가지 일을 겪으며 광고라는 것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생을 바칠 만큼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일한 지 3년 가까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곧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였다. 광고를 만들면 성우와 자주 일을 하게 되는데 그날은 '특A급'으로 분류되는 중년여성 성우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지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멋진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명함을 건네며 "안녕하세요, 카피라이터 김하납니다" 했더니 그분이 나를 빤히 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 성우를 한번 해봐요. 카피라이터도 좋은 직업이지만, 성우도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일단 칭찬이니 기분이 좋았고, 유명한 성우시니 만나는 사람도 무척 많을 텐데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건네지는 않으리라 싶어서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것도 이미 번듯하게 들리는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 해준 말이니 말이다. 그러잖아도 그 무렵 나는 성우라는 직업이 꽤 매력적이라고 느끼던 중이었다. 같은 카피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p. 33) 그 힘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목소리는 마치 잘 부푼 커피 원두에 천천히 물을 부었을 때 다양하고 매력적인 향기가 뿜어나오듯 문장에 담긴 감성을 풍부하게 끌어올려 표현해주었다. 어떤 목소리는 단 한 문장만 읽어도 냉철하고 정연한 지성을 느끼게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우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해서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성우는 태생적으로 남들과 다른 사람들일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분의 말씀이 자꾸만 맴돌았다. 어쩌면 내게도 계발되지 않은 목소리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나는 '해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정말 성우 수업을 들었다. 방송사 아카데미에 성우반이 있었다. 발성의 원리를 익히고 발성 연습, 낭독, 연기, 더빙 연 습 등을 했다. 몇 달 과정의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수강생들 몇몇을 따라 성우 공채를 준비하는 스터디 그룹에 합류 했다. 극단 단원들처럼 소극장 같은 곳에서 아침 일찍 모여 신체 단련으로 시작을 했다. 신체 단련을 하고 나면 발성 연습을 정석대로 했다. 가! 갸! 거! 겨! 고! 교! 규!(p. 34)나! 냐! 너! 녀!…." 등의 루틴을 여럿이서 단전에 힘을 주고 쩌렁쩌렁 울리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대본을 가지고 연기하는 걸 녹음해서 들어보고 합 평을 하기도 했다. 나는 특히 내레이션 연습을 좋아했다. 내 목소리가 내레이션에 어울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나 스스로도 내레이션에 매력을 느꼈다. 나는 항상 감정을 잘 표현하는 예쁜 목소리보다 건조하고 지적인 목소리에 끌렸다. 그러면서 성우 공부의 재미에 흠뻑 빠져버렸다. 나도 그럴 줄 몰랐다. 배우고 훈련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1년 정도를 꽤 몰입해서 했다. 학창시절에 공부에도 그렇게 매진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고3 때도 그랬다. 시험을 잘 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바짝 벼락치기를 하는 식이었지, 평소에는 공부에 별로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그런데 성우 공부는 달랐다. 늘 좀더 잘하고 싶고, 몸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해 더 나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이룬다'는 말은 '공채 성우가(p. 35)된다'는 종류를 뜻하지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전장에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녁을 정확히 맞히려고 매일 활쏘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과도 비슷했다. 내친김에 방송사 공채 시험도 보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도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내가 발전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성우 공부에 매진한 기간을 두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성우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포즈pause' 즉 잠깐 멈춤의 중요성이었다. 말의 매력과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이 '잠깐 멈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기술이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그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다. 말을 매력적으로, 힘있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말을 끊고 다시 이어가는지를 관찰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다. 특히 법정 드라마의 변론 등을 유심히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근에 나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샤론 최의 동시통역과 함께 두 언어의 호흡을 어떻게 끊고 이어가는지를 관찰하며(p. 36)또 많이 배웠다. 이 기술을 잘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문장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하고 본능적인 타이밍 감각도 필요 하다. 그렇지만 분명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기술이다. 돈이 다 떨어진 나는 마침 운좋게도 내게 오라고 손짓 해준 두번째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은 첫번째 회사의 4분의 1 정도 규모였고 단체활동이 적었으며 팀 단위의 게릴라 조직처럼 움직여서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이 일하기에 훨씬 나았다. 그리고 광고의 윤리 문제에 대해서도 회사를 떠나 있던 기간 동안 질문하고 숙고한 끝에 나름의 답과 신념을 갖게 되었다. 두번째 회사에서 나는 회의를 할 때나 발표를 할 때 목소리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거나 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곧잘 들었다. 이 회사에서 나는 제법 일 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었고, 이후로 오래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살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 내겐 명함이 없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 명함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서다. 대충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내가 하(p. 37)고 있는 여러 일들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팟캐스터'로서의 일이다. 2000년에 내가 처음 '카피라이터'로서 명함을 받았을 때, 세상에 팟캐스트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싶었던 당시의 나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 인생은 꽤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다. 뜬금없이 성우 공부를 했던 1년은 내 직업 인생에서 '잠깐 멈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기엔 곁길로 샌 것 같았겠지만 내겐 무척 중요한 1년이었다. 처음 만난 내게 대뜸 성우가 되어보라고 권했던 옛날의 그분께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분이 툭 건넨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이제 말하기 책을 쓰는 사람까지 되었으니까. 말의 힘이 이토록 크다(p. 38). 그 무렵 혼자 남미로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수첩에 호기롭게 이렇게 썼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되자! 여행에서 만날 낯선 사람과 새로운 경험에 열린 적극적인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옛날 중학교 안에서는 활발하지만 학교를 나서면 다시 쭈그러들었던 나처 럼, 지금 나의 태도가 이 좋은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만 유지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상황,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첫 기착지였던 홍콩에서 여섯 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항 안에서만 머물기엔 어중간한 시간이라 관광안내소에 조언을 구한 뒤 침사추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의 위층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중간의 정류장에서 인도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타더니 내 옆에 앉았다. 다른 자리도 텅텅 비어 있는데 하(p. 52)필 왜 내 옆자리에·•••·•? 처음엔 좀 의아하고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애기를 나눠보니 그 사 람은 인도에서 홍콩을 자주 오가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2층 버스의 맨 앞자리야말로 홍콩 관광의 백미라고 했다. 과연 거기 앉아서 보니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홍콩의 이국적인 네온사인이 눈높이에서 양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가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은 이유였다. 그는 내게 침사추이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곳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릴 정류장보다 한 정류장 더 가서 나와 함께 내려 다시 한번 친절하게 곳곳의 위치를 알려준 뒤 뒤돌아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여행의 시작에서 있었던 이 경험은 나에게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멋지게 일깨워주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나는 이 친절한 아저씨를 불편하고 찜찜하게만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반복된 경험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매너를 갖추어 말을 걸면 상대 또한 잠시나마 자신의 세계를 내게 보(p. 53)여주었다. 나는 그로부터 반년 동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모로코, 스페인을 거쳤다. 인도인 비즈니스맨 아저씨를 필두로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때 언어가 통하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마음을 열려는 태도다. 미리 재단하려는 마음 없이. 여기서 세계를 파악하는 두 태도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즉 세계를 화분들의 집합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이해하느냐. 좁은 화분을 벗어나 울창한 숲속으로 나아가려면 우선 내 마음이라는 화분부터 깨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p. 56).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 카피라이터가 하는 일의 본질은 칭찬거리 찾기다. 내가 광고할 브랜드나 제품이 다른 브랜드나 제품과 어느 면에서 다르고 더 나은가를 찾아내어 알리는 일이다. 모든 면에서 칭찬거리가 많은 품목도 있겠으나 선뜻 칭찬거리를 찾기 힘들 때도 있다. 그래도 세상 모든 제품은, 하다못해 엇비슷한 생수 한 병이라 하더라도 성분이나 가격, 접근성, 패키지 디자인 등에서 단 하나라도 강점이 있다. 어떤 제품은 품질이 뛰어나고 어떤 제품은 값이 싸다. 어떤 제품은 손쉽게 구할 수 있어 편리하고 어떤 제품은 손쉽게 구(p. 128)할 수 없어 독특하다. 같은 요소라도 카피라이터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칭찬거리가 될 수 있다. 광고 교과서에 실리곤 하는 사례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1959년 독일 자동차 폭스바겐 비틀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의 일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큼지막하고 과시적인 디자인의 자동차가 인기였다. 거기에 조그맣고 실용적인 '딱정벌레차' 비틀이 등장하며 내걸었던 캠페인 슬로건은 Think small(작게 생각하라)이었다. 거리의 빌보드 광고판이나 신문광고에서도 여백을 텅 비운 채 안 그래도 작은 차를 딱정벌레처럼 더 조그마하게 보여주고 작은 차의 칭찬거리를 강조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광고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오랫동안 이어지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크게 히트했다. 그중에는 웃음이 터지는 이런 헤드라인도 있었다. 'It makes your house look bigger(이 차는 당신의 집을 더 커 보이게 합니다)' 이 조그만 차를 집 앞에 세워놓으면 상대적으로 집이 커 보이는 효과가 있다니, 정말이지 생각도 못한 칭찬거리다. 유명한 카피라이터 데이비드 오길비는 이런 말을 했(p. 129)다. "재미없는 제품은 없다. 재미없는 카피라이터가 있을 뿐이다." 카피라이터로 오래 일한 나는 브랜드나 제품뿐 아니라 책이나 사람에게서도 칭찬거리를 잘 찾아낸다. 아니, 오히려 카피라이터로 오랜 기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데는 숨은 칭찬거리를 발굴해내기를 좋아하는 천성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팟캐스트를 통해 작가 인터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책과 작가의 남다른 장점을 찾아내 칭찬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칭찬폭격기'라는 별명이 내게 붙어 있었다. 작가가 미처 겸양을 차릴 새도 없이 면전에서 칭찬을 퍼부어 '초토화(?)'해버린다는 의미다. 작가님들은 곧잘 말씀하기를, 자신이 책을 쓸 때 알아봐 주길 바라며 공들였던 부분을 내가 정확하게 끄집어내 칭찬해줘서 놀랐고 고맙다고 한다. 나는 그럴 때가 참 즐겁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데 에너지를 쓸 때가.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부분에 조명을 비추어 아름다움이 환하게 드러나 보이도록 하는 게 카피라이터 출신인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칭찬거리를 구체적으로 찾아내 정확하게 칭찬하는 일. 어떤 청취자들은 이미 읽은 책인데도 팟캐스(p. 130)트를 듣고 나면 그런 포인트가 있었구나 싶어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마인드맵 워크숍을 할 때면 '자신의 신체적 단점에서 장점 찾기'를 마인드맵으로 작성해보라고 한다. 생각 못한 답들이 많이 나온다. '시력이 안 좋다'는 단점에는 '지저분한 게 눈에 덜 띄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안경의 변화로 다양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키가 작다'는 단점에는 '연애할 때 품에 쏙 안긴다' '술 취하면 친구들이 들어서 옮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하체가 굵다'는 단점에는 '다리가 튼튼해 산행에서 지치지 않는다' '버스가 흔들려도 안정적으로 서 있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무언가를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이 창의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나 남이 지닌 장점에서조차 기어이 단점을 찾아내 미워하곤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되도록 내가 지닌 창의성을 칭찬거리를 발견해내는 데 쓰고 싶다. 세상사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결국(p. 131) 본인의 환경을 더 나은 것으로 여기게끔 한다. 또 주변의 좋은 것을 찾아내 칭찬하는 일을 계속하면 좋은 것이 무럭 무럭 자라날 테니 실제로도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 나아 질 것이다. 좋은 환경 속에 나를 놓아두면 나는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 좋은 것을 더 많이 발견하고 칭찬하게 되므로 선순환이 일어난다. 내가 다니는 길가에 꽃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는 것과 같다. 그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이 아닐까? 칭찬폭격기라는 별명이 썩 마음에 든다. 칭찬폭격은 무얼 파괴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북돋우는 일이니, 세상의 폭격이란 폭격 중에 가장 좋은 축에 들 것이다(p. 132).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 TV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게 하려면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같은 얘기가 나오면 엄마는 "저거 다 거짓말이다"라고 한다. 내가 어릴 적부터 나의 부모님은 주구장창 책을 읽어왔다. 아빠는 문학 선생님이었고 아빠보다 더 다독가인 엄마는 아이 둘을 낳고도 깨알 같은 세로쓰기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댔다. TV에서 말하는 이론에 따르면 자식들은 자연스레 책에 흥미를 보여야 하나 나와 오빠는 책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랐다고 한다. 나는 책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오빠는 그렇지가 않(p. 176)았다. 책에 좀 흥미를 붙여주려고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같은 걸 사주면 어린 내가 먼저 열광하며 읽고는 범인을 말하고 싶어 안달인 반면 오빠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걸 보며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취향 같은 것은 누가 본을 보이건 말건 간에 타고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자 오빠의 취향은 책이 아니라 영화와 여행으로 드러났다. 40대 중반의 직장인이며 아이 둘의 아빠인 오빠는 걸핏하면 온 가족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다닌다. 주말이면 조조영화부터 하루에 두 번씩도 극장에 가고 자신만의 DVD 컬렉션을 쌓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오빠를 흥미롭게 관찰하며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 그게 꼭 책일 필요는 없지."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게 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아무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내가 책을 읽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쓰(p. 177)지 않으셨다. 친구네 집에 가면 번듯한 명작 동화 전집들이 꽂혀 있곤 했는데 나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꺼내서 읽었지만 정작 그 친구들은 몇 권 빼고는 손도 안 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집에는 동화 전집 같은 게 없었고 엄마 아빠가 보는 어른용 책들만 많았다. 나는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는커녕 책 읽기를 칭찬하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책을 숙제 같은 것이 아닌 친구처럼 여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 나는 더더욱 시키면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6년 내내 숙제를 한 번도 안 해가서 선생님한테 혼나곤 했다. 당시엔 체벌이 있어서 손바닥에 멍이 들 정도로 맞기도 했건만 그런데도 왜 숙제를 안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방 꼴이 엉망이라 더 이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막 방 청소를 시작하려다 가도 마침 그때 문을 연 엄마나 아빠가 "너 방 꼴이 이게 뭐야! 청소 좀 해라!" 하고 잔소리를 하면 딱 하기 싫어지(p. 178)는 것.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광고와 브랜딩을 하면서 얻은 큰 깨달음 중 하나는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고 이성적으로 설득되어서 움직이기보다는 일단 매혹된 것에 이성적인 듯한 이유를 갖다붙이려는 심리가 있다. 이런 심리 작용이 드러난 에피소드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중 페인트칠 이야기일 것이다. 화창한 날 친구들이 놀러가는 동안 톰 소여는 벌로 담장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약올리려는 친구 벤 앞에서 톰은 페인트칠이 너무 재미있어서 심취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나 한 번만 칠해볼게"라는 벤에게 안 된다고 거절하기까지 한다. 점점 '정말인가?' 싶어진 벤은 결국 뇌물로 사과까지 바치면서 페인트칠을 자청해서 하게 된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여럿 와서 뇌물을 줘가며 너도나도 신이 나서 페인트칠을 하는 통에 톰 소여는 담장을 여러 번 덧칠까지 해서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만약 여기서 톰이 벤에게 "너도 페인트 한 번 칠해봐! 정말 재미있을걸?"이라고 먼저 제안했다면 벤(p. 179)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1. 사람들은 재미있어 보이는 것에는 사례를 지불해 가면서까지 하려고 든다. 2. 누가 시키면 하기 싫지만 같은 일도 자발적으로는 기꺼이 한다. 다독가 중의 다독가이자 평생을 도서관지기로 살았던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해요." 『개인주의자 선언』 『미스 함무라비』의 저자 문유석 작가님이 《책읽아웃>에 나오셨을 때 이야기 나눈 신간의 제목은 『쾌락독서』였다. 문유석 작가님이 평생 즐거움을 위해 읽어온 책들을 다른 책이었다. 엄마는 이 책이 나왔을 때 제목을 보고는 내게 "하나야, 이게 바로 우리가 평생 해 온 얘기 아이가?"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절대 하지 않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책 읽으라는 잔소리다. '여러분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말고 고전을 읽으(p. 180)세요 책을 많이 읽으면 길이 보입니다' 같은 관습적인 말은 오히려 책을 숙제처럼 여기게 하는 잔소리들이다. 나의 오빠가 애호하는 영화와 비교해보자. '여러분 영화를 많이 봐야 합니다' '지금 흥행하는 영화들 말고 고전 영화를 보세요' '영화를 많이 보면 길이 보입니다'.... 영화 전공 학생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자주 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영화들을 자발적으로 즐긴다. 오빠가 주 말 아침 일찍 일어나 조조 영화를 보러 가게 하는 힘은 그런 잔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책 읽기 자체를 교양의 척도로 삼고 관습적으로 남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말들이 정작 사람들을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잔소리라고 생각한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말들 말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책도 있고 안 읽는 게 차라리 나은 책도 있다. 고상한 책도, 지적인 책도 있겠으나 책을 읽는 행위 자체는 고상할 것도 지적일 것도 없다. 내게 책 읽기는 어디까지나 즐거운 취미이고 엔터테인먼트다. 어렵고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는 것도 암벽등반 같은 재미를 준다. 암벽등반이 누가 시켜서 하는 고행이 아니듯, 책 읽기도 스스로가(p. 181)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책 읽으라는 잔소리를 일절 하지 않지만 놀랍게도 〈책 읽아웃〉의 '영업력'은 엄청나다. 박서련 작가님은 어느 날 본인의 저서인 『체공녀 강주룡』의 판매 지수가 솟구친 것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날 '삼천포책방'에서 이 책을 재미있게 소개했기 때문이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 85-2 도덕과 노동과 운동 편). '삼천포책방'에서 우리는 그저 각자 재미있게 읽은 책을 가지고 와서 마치 어제 본 드라마 얘기하듯 신나게 책 수다를 떨 뿐이다(아무도 드라마를 많이 보라고 권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우리의 목표는 책 판매고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독서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끼리 책 놓고 떠드는 수다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청취자들은 왠지 모르게 우리의 책 수다를 들으면 나도 얼른 그 책을 읽고 이 수다에 동참해야겠다는 욕구가 들끓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업력'의 비밀이다. 잔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 마치 톰 소여의 페인트칠처럼.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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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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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1】 다른 사람의 일상, 에세이 읽기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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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0】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즐기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 그 앞에는 한 마디가 더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뜻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두 개념을 연결하면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그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가 된다. 살아가는 동안 이 두 문장을 늘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러면 죽음 앞에서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수많은 죽음의 모습이 바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물론 죽음의 슬픔은 한 순간 쉽게 전환될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죽음 을 배우고 또 받아들이며 삶 속에서 가까이 둘 수 있다면, 죽음 이야말로 우리 삶의 방향성을 가늠하고 되새기게 하는 강렬한 계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두려워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삶(p. 20)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더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되돌아보고 싶은 것도 결국 '인생'이다.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맞이할 '죽음'에 대해서 배우고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총 3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고, 꼭 나누고 싶은 3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나에게 그랬듯이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도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깊어지고 넓어질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고를 써 내려갔다. 첫째, 죽음을 배우는 과정은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과정이다. 유한한 시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매 순간을 귀하게 여길 수 있고, 선택과 행동에 신중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순간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죽음을 의식하면 삶에 더 겸손해지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된다. 유한한 생 앞에서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며, 더 온전히 살아가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간과하는 것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단순한 일상의 기쁨 등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삶에서 중요한 것은(p. 21) 진정 무엇인지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를 극복하게 돕는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임을 이해하게 된다면, 불안보다는 평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타인의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넬 수 있게 한다. 셋째, 삶을 기록하는 과정은 자신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남기고, 다음 세대에게 삶과 죽음의 가치를 전하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며,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삶의 마지막 준비를 도우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장례, 연명의료, 유산 등 죽음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미리 정리하고 준비한다면, 남겨진 사람들에게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면서 남겨진 이들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1년 6개월 전,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그 이별은 감당하기 어려운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애도의 시간을 지나며 어머니의 삶이 내게 남긴 크나큰 용기를 배울 수 있었다(p. 22). 무엇보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이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삶이 남긴 흔적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여정임을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무거운 고민이 짓누를 때,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할 때,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 속에서 길을 헤맬 때, 그리고 삶의 목적이 흐려졌다고 느낄 때, 독자 여러분께 따뜻한 위로와 방향을 건네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을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면, 이 책을 통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또한,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다시금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배움의 기회로 삼아 현재를 더욱 충만하게 살아갈 동기를 얻었으면 한다. 우리는 죽음을 상상할 수 있기에,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p. 23). 사별로 인한 분노와 화는 결국 직접 쓰는 글, 감정의 표현 등 언어로 바꿔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 역시 친구나 가족, 심리상담가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등 외부 자원의 도움을 받기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분노를 신체적 에너지로 승화해 대화를 통한 표현, 운동, 춤 또는 노래 등으로 해소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 후 공포나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에 의미가 없다고 지속적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일상에 빨리 복귀하는 것이 좋다. 주변 사람에게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이 감정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려 그들의 수용과 이해를 구할 수 있도록 하자(p. 54).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애도의 과정을 보내야 할까? 먼저 상실 그 자체를 현실로 인정했으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오랫동안 인간이 경험해온 사건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보편적 인 운명이다. 상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초기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과 회피에 사로잡히게 되면 애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슬픔의 심연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결국 누구나 언젠가 겪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p. 61) 둘째, 상실로 인한 고통을 온전히 겪어내는 것이다. 애도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과 슬픔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억누르는 경우, 신체적 통증이나 부적응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이별 앞에서 더 깊이 절망하게 된다. 꺼이꺼이 울어도 괜찮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슬퍼해도 괜찮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충분히, 그리고 깊게 슬퍼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셋째, 애도의 단계에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원망의 대상은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에 돌본 의료진일 수도 있고, 주변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내면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 감정을 정화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슬픔이 분노로 전이되면서 다듬어지지 않으면, 부정적인 에너지가 누적되어 증오의 마음이 될 수 있다. 증오는 그 자체로 자신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에, 애도의 단계에서 원망의 감정을 잘 인지하고, 보살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넷째, 사랑하는 이가 없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가 없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어느 날 떠난 이가 떠오르는 일을 막을 길이 없기에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을 일 깨우기 일쑤다. 그러한 순간들을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p. 62)지 보여주는 결과로 받아들이자. 일상생활에 적응하다 보면 떠난 이에 대한 슬픔이 점차 그리움으로, 또 애틋한 기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만일 떠난 이의 생각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면,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거나 상담을 받는 등 다양한 자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애도의 과정에서 마지막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고인에 대한 사랑과 기억을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떠난 이를 잊을 방 법'이란 없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삶의 유한성을 인지하고, 내 삶을 소중히 다루고 유지하는 것이다(p. 63). 미국의 유명 드라마인 〈CSI : 라스베이거스〉에서 주인공 그리섬 반장은 "마지막에 어떻게 죽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과정으로 암을 선택한다. 신체적 기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그 기능을 상실해가며 생을 보낼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사망 전 항암 치료를 받는 비율이 미국에 비해 3배 정도 높다고 알려져 있다. 연명의료 직전까지 치료를 고집하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마지막 준비를 할 여력 없이 보내(p. 69)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의 마지막을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튜브가연 결된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며 고통 속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까지 치료를 받는 것이 가족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 어서 현재도 병원에서 여생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p. 70).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에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즐기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 그 앞에는 한 마디가 더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뜻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두 개념을 연결하면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그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가 된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을 건네는 구절이다(p. 75).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다면, 적어도 죽음이 찾아올 때 후회할 일이 적지 않을까? 탄생에서 죽음으로 완결되는 것을 삶이라고 본다면, 죽음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지루한 영원성에 갇혀 삶의 모든 행위에 허무와 공허만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자아를 실현하는 것도 언제까지나 미룰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기에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좋은 삶'의 끝에는 '좋은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p. 76). 그렇다면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특히 죽음이 멀게 느껴지는 젊고 건강할 때, 생의 마지막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길 권한다. 먼저, 오늘의 삶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오늘의 삶을 잘 준비 하는 것이 곧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p. 79)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하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재정적 건전성이다. 몸의 건강은 근력, 유연성, 그리고 지구력에 의해 좌우된다. 이 세 가지를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다양한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또한 긍정적 태도를 지니고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있다면 마음이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명상, 묵상, 심리치료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재정적 건전성은 욕구 충족의 삶을 살 것인지, 혹은 소욕지족의 삶을 살 것인지와 같이 삶의 태도를 어떤 방식으로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실적으로는 젊고 건강할 때부터 저축과 건전한 투자를 통해 장기적인 재정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차근차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내가 하고 싶은 것bucket list과 하고 싶지 않은 것duck-it 1ist을 정리해보자.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못한 것과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좋은 죽음을 위한 준비는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시기부터 자신의 삶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들'과 '하(p. 81)면 후회할 일들'의 목록을 정리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고 하나씩 실천해보자. 셋째,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발전시켜 새로운 경력이 되도록 하자. 생활인으로서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 이럴 때 자신의 직업에 대해 불만을 품고 소홀히 하기보다는 현재의 직업에 충실 하면서 동시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런 일을 취미로 병행하면서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되 본업 못지않게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보자. 취미를 발전시키다 보면 어느새 그 취미는 제2의 본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언가에 몰두하면서 배우는 삶을 살게 될 때 죽음을 향한 여정에 더 큰 의미가 생긴다. 넷째, 식탁 위에서 죽음을 이야기하자. 일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일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만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에 무궁무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주제도 없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라고 죽음을 에둘러 표현하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평소에 마음을 터(p. 82)놓고 지내는 가족,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 편한데, 그러한 분위 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족 중 연장자가 솔선수범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가 먼저 자녀들에게 자신의 죽음관을 알리고, 가족들이 식사를 하면서도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라면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기초가 단단하다고 본다. 다섯째,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해보자. 죽음은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간접적인 경험이라도 그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은 크다. 죽음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써 나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을 통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이외에도 죽음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이 많기 때문에 토론의 소재로 삼기에 더없이 좋다. 죽음학을 공부하는 모임이나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죽음을 직시할 힘을 키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이나 부고를 직접 써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호스피스 기관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을(p. 83) 돕는 봉사활동을 하게 되면 간접적인 죽음 경험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은 물론, 세상에 남게 되는 가족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호스피스 기관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봉사를 통해서 배우고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섯째, 죽음과 관련된 서류를 미리 작성해두자.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기(운명)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결정권 행사를 위해서는 법적 효력이 있는 서류 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리 준비해두면 도움이 되는 서류로는 유언장,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장기기증 서약서, 법적 대리인 지정서 등이 있다. 유언장 작성은 물질적 유산뿐 아니라 장례식 절차, 자녀들에게 남기는 글 등 정신적 유산까지 모두 유언에 포함하도록 한다. 이런 서류를 작성할 때는 법적 요건을 갖추어 작성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 공증 절차를 밟아야 사후에 법적 효력을 인정 받을 수 있다(p. 84).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작성할 수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정한 의료기관과 사회단체를 방문하여 정확한 설명을 직접 듣고 작성해야 하고, 작성 후에는 국가기관에 등록된다. 장기기증을 원하는 경우에는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사랑의장기기증 운동본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등에 등록할 수 있다. 이같은 서류들은 온전히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토대로 하는 것이므로 언제라도 그 내용을 바꾸거나 철회할 수 있다. 일곱째, 의료 문제를 의논할 주치의를 정하고 의료대리인 제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자. 현재 우리나라에는 장애인 주치의 제도는 있으나 일반 주치의 제도는 없다. 따라서 누구든 진료를 받고자 하면 가장 적절한 전문 진료 의원이나 2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1,2차 의료기관에서 진료확인서를 받아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 이같은 의료전달체계 때문에 환자들이 여러 병의원의 전문 진료과를 방문하는 의료 쇼핑과 소수의 3차 의료기관에 환자가 집중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와 같지만 가까운 의원이나 병원에 자신의 건강 전반을 상담할 수 있는 주치의를 정해두었으면 한다(p. 85). 평소에는 소소한 건강 문제까지도 모두 의논할 수 있고, 위급한 의료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보다 효율적으로 상급병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주치의를 통해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의료대리인이란 의료 문제와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대리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법적으로도 의료 대리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가속화되고 1인 가족이 급증하는 실정에서 앞으로 의료대리인의 필요성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의료대리인에 대한 인식 개선과 제도 도입이 사회적으로 논의되었으면 한다. 여덟째,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고,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자.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운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편안하고 안정된 장소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것만으로도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마지막 시간을 평안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평소에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집이든 요양시설이든 의(p. 86)료기관이든 어디에 있든지 가장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이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건강하게 해결해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과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생의 마지막 시간을 준비하게 된다면, 언제 어떻게 맞닥뜨릴지 모르는 죽음을 더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속에 녹아 있는 죽음 준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p. 87). 행복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적인 태도이다. 삶을 어떻게 살아왔든, 마지막 순간은 우리가 그간의 여정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마무리를 지을 기회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준비된 마음과 계획이 필요하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정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공유하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장기기증 서약, 자산 정리, 그리고 유 언 작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남겨진 사람들이 상실 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삶을 충실히 사는 자세가 요구된다. 삶을 진심으로 살며 사랑하고, 감사하자.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행복한 마무리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결국, 삶의 마무리는 살(p. 230)아온 방식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시간, 연결되지 않은 관계, 미루어 둔 감사일 것이다. 행복한 마무리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셋째, 죽음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죽음을 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죽음을 삶의 적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여길 때 우리는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삶의 일부로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가족이나 친구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죽음을 배우고 준비한다는 것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누구와 연결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면, 지금 보다 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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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0】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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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19】 죄와 벌 그리고 참회의 역설인 세상살이
- 깊은 내용을 잘 읽히게 쓴 소설이다. 어떤 책에서 소개받고 읽었는데 좋았다. 죄의 문제, 살인의 문제, 유족의 고통 등등. 많은 것들을 다루고 있다. 살인자는 회개하지 않고 사형 당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라는 말로 나온다. 반면 진정으로 반성하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이 역설과 아이러니가 잘 버무려진 수작이다. 하지만 그에게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운명밖에는 관심이 없었지요.....사형이 집행된 것은 아시나요?(p. 200) "알고 있습니다.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었지요." 사형 판결이 나고 나서 2년쯤 지났을 때였다.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당시 범인의 사형이 집행됐는데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그는 물론 거절했다. 그것 말고 재판소 등 공적 기관에서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신문사의 전화가 없었으면 아직도 몰랐을지 모른다. "히루카와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나카하라는 즉시 대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무엇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래?'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요." "그렇겠지요. 그리고 히루카와도 결국 진정한 의미의 반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형 판결은 그를 바꾸지 못했지요." 히라이는 약간 사시인 눈으로 나카하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p. 201). 그녀는 여기에서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딸이 살해된 사건에서도 히루카와는 입만 열면 사죄도 하고 반성도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연기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히루카와는 교도소에(p. 211)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교회에도 참석했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했다면 어금니를 숨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다니, 지방갱생보호위원회 위원의 눈은 그냥 뚫려 있는 구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석방은 결국 교도소가 가득 찼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무책임한 행위일 뿐이다. 만약 최초의 사건에서 히루카와를 사형에 처했다면 내 딸은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히루카와지만, 그를 살려서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것은 국가다. 즉, 내 딸은 국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획적이든 아니든, 충동적이든 아니든, 또 사람을 죽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기형을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징역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재범률이 높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갱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완벽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면, 갱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형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마무리했다(p. 212).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p. 213). 하나에는 죽을힘을 다해 호소했다. 하지만 사요코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사요코는 담담하게 말했다(p. 404). "이러지 마세요. 난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아무리 갓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어엿한 인간이에요. 그 생명을 빼앗고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기에 사오리 씨는 지금까지 괴로워했어요. 당신 남편도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 해요." "남편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알고 있어요. 그 래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왔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게 사는지는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성실하게 사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죠." 사요코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가령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거니까요. 아무리 반성해도, 아무리 후회해도, 한 번 잃어버린 생명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그 세월에 어떤 의미가 있죠? 당신도 아이가 있잖아요. 누군가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를 죽인 사람이 20년간 반성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나요?" 하나에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사(p. 405)요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난 당신 남편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요. 지금의 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니까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돼요. 당신 남편을 그냥 봐주면 모든 살인을 봐줘야 할 여지가 생기게 돼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올게요. 내 마음은 바뀌지 않으니까 남편과 잘 얘기해보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요코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하나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p. 406). 하나에는 혀로 입술에 침을 묻힌 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제 남편은 계속 속죄를 했어요!" 그녀는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도 닦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남편은 지금까지, 21년 전 사건에 대해 계속 속죄하면서 살아왔어요. 사요코 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저도 처음 알았어요.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계속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저 같은 한심한 여자와 결혼했을까 하는 의문이 겨우 풀렸지요. 제 아이의 친아빠는 남편이 아니에요. 제가 못된 남자에게 속아서 가진 아이지요. 하지만 남편은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받아줬어요. 그것이 남편 나름대로 속죄하는 방법이었던 거죠. 아버지를 보살펴준 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마 옆방에서 사요코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갚기 위해 그렇게(p. 412)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죠. 만약에 그때...." 눈물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그녀는 침을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때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면 전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아이도 태어나지 못했을 거고요. 그래요, 남편은 분명히 21년 전에 한 생명을 죽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이후에 두 생명을 구했어요. 그리고 의사로서 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어요. 남편 덕분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아이들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지 아세요? 남편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작은 생명들을 구하고 있어요. 그래도 남편이 지금까지 속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도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목소리의 톤이 계속 높아지면서 마지막은 날카로운 비명처(p. 413)럼 들렸다(p. 414). "사요코 씨를 왜.." 그녀는 신음하듯 간신히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여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어. 우리 사위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성인군자지. 그 사람 덕분에 우리 딸은 행복해질 수 있었어. 딸만이 아니야. 나 같은 쓰레기까지 돌봐주고 있지. 지금 그 사람이 없어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지 알아? 20여 년 전, 철없을 때 낳은 아이를 죽인 게 뭐가 대단하다고 이 난리야? 그건 중절 수술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들이 누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누구를 슬프게 했다는 거지? 아이의 유족은 누구지? 당신들이 가해자이자 곧 유족이잖아. 그 아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들이고, 그 아이를 위해 슬퍼한 사람도 당신들뿐이잖아.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감옥에 가야 한다고? 가족 과 헤어져서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한번 말해봐. 당신이 지금 자수해서 감옥에 가면 뭐가 좋지?(p. 428) 그냥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잖아?"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의 폭풍우에 사오리는 한마디도 대꾸 할 수 없었다. 후미야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생각한 적이 없다. 자수해서 교도소에 가면 뭐가 좋은지도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수하려고 한 것뿐이다. 죄와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자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단, 그것이 자신의 의사인지 사요코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녀는 후회했다. 역시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비밀은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묻어두었어야 했다. 그녀는 무릎부터 무너졌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내가 왜 사요코 씨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되돌릴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자책감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p. 429). 옮긴이의 말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이번엔 사형 제도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나카하라. 그는 강도에게 사랑하는 외동딸을 잃는다. 아내인 사요코가 잠시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간 사이 딸이 강도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그 이후, 그의 목표는 오직 범인의 사형뿐! 마침내 범인은 사형을 당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허탈감과 깨어진 가정뿐이다. 그들 부부는 결국 아픔만 껴안은 채 이별을 선택한다. 딸을 잃은 지 11년 후, 한 형사가 그를 찾아온다. 사요코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는 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때 사요코와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p. 443)혼하지 않았다면 또 유족이 될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사요코의 살인 사건을 접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은 지금까지 딸의 사건에서 도망치려고만 했는데, 사요코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책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요코의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항상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어떤 작품이든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만들고, 어떤 작품이든 가슴이 쿵쾅거리게 만든다. 또 어떤 작품이든 심장이 덜컹 내려앉게 만들고, 어떤 작품이든 진한 눈물을 쏟게 만든다.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항상 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미성년자의 범죄에 관해서, 『교통 경찰의 밤』에서는 교통사고법의 문제점에 관해서, 『아내가 사랑한 여자』에서는 인간은 왜 반드시 여자가 아니면 남자여야 하는가, 하는 사회문제에 관해서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p. 444). 이번에도 그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토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에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함과 동시에, 잇달아 쏟아지는 사회문제에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렸다. 그 때문에 다음 내용을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과, 잠시 고민하고 생각하기 위해 멈추는 손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유족. 그것도 살인 사건의 유족.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범인의 사형뿐이다. 그러나 범인이 사형을 당한다고 해서 처참하게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의 유족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까? 이 작품의 제목인 '공허한 십자가'는 원래 사요코가 쓰고 있던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란 원고에 나오는 대목이다. 흔히 죄를 지은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산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유족이 아닐까?(p. 445). 사형은 무력하다? 사형은 무력하지 않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면, 사람을 죽인 사람은 무엇으로 심판해야 할까? 속죄는 무엇일까? 꼭 교도소에 들어가야만 속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면, 가해자는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그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기 때문이리라(p. 446). 2014년 9월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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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19】 죄와 벌 그리고 참회의 역설인 세상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