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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순교 160주년 기념』 포럼...순교신앙 다짐하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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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부설 교회선교연구소(소장 유해석 교수)와 총회 토마스 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위원장 태준호 장로)가 주관한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가 3월 30일 오전 11시 총신대학교 신관 5층 콘서트홀에서 열려 예배하고 4명이 발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해석 교수는 『토마스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 발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포럼의 의의를 밝혔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16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순교 사건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신학적 담론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는 본 포럼의 개최는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1866년 평양에서 발생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 개신교 선교사의 기원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교회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를 둘러싼 담론들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초기 연구자들의 관점, 그리고 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제시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상충된 견해들이 형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포럼은 이러한 2세기에 걸친 토마스 담론들을 학문적으로 성찰하고 평가하는 의미 있는 자리입니다. 포럼의 발제자들은 토마스 선교사 연구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왜곡되거나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온 인식들을 바로잡고, 한국교회사 속에서 그의 위치를 올바로 정립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총신대학교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와 총회 토마스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포럼으로서, 학계와 교계의 높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백령도에 건립될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의 취지와도 뜻을 함께하며, 그의 선교와 순교가 지닌 의미를 오늘의 시점에서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본 포럼은 토마스 선교사 순교 160주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중심으로, 순교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담론의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 신학과 실천 속에서 재구성하며 선교적 열정을 새롭게 일깨우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1부 예배는 태준호 장로의 인도로 전 장로부총회장 김형곤 장로가 기도했다.
박성규 총장이 계 5:5-6을 본문으로 ‘사자와 어린 양’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포럼을 통해 한국교회가 무엇인지, 한국교회 성도가 누구인지, 한국교회를 어떻게 살린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자로서 왕이시다. 하지만 재물 되어 죽는 양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재림의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나 먼저 죽임 당하신 양으로 오신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해 확산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순교로서 세워진 교회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전했고,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고 순교했다. 순교의 정신이 교회를 순결하게 했다. 오늘 포럼은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날에 한다. 더 깊이 십자가를 생각하는 포럼이 되기를 바라고 순교에 동참하는 다짐이 있기를 바란다. 피를 뿌려 순교하지 않더라도 순교의 정신으로 욕망과 자아를 죽여 교회를 살리도록 하자.”라고 설교했다.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고광석 교수가 축도 후 교회선교연구소 소장 유해석 교수가 광고하고 예배를 마쳤다.
2부 포럼은 총신대학 선교대학원 김영민 교수가 사회했다.
첫 번째 발제는, 이은선 안양대학교 명예교수가 ‘해방 이전의 토마스 선교사 순교 담론 형성 과정 연구’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해방이전에 토마스의 순교 담론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했던 활동과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남아있는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들은 성경반포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적은 그가 나누어준 성경책을 받았거나 후에 신앙을 가져 토마스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질 수 밖에 없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1909년 이전에는 토마스의 성경반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마펫 선교사는 1893년에 부모가 토마스가 나누어 준 성경책을 받은 사람을 만났는데, 이것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1909년이다. 1894년에 그라함리 선교사는 개인 편지에서 토마스가 1865년에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고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와서 세상을 떠난 것을 설명한다.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년에 게일은 처음으로 증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조선군이 먼저 공격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변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1909년 마펫 선교사는 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토마스가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고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인이며 성서공회 소속 권서이며, 죽을 때까지 성경을 반포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여기서 그가 성경을 반포하다 죽었다는 언급이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1909년에 토마스 기념 위원회가 마펫을 의장으로 조직되어 1910년에 토마스 기념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다 하지 못하고 1915년에 해산되었다. 바로 이 무렵 미국에서 감리고의 존스 선교사가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평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25년에 「평양노회 지경 각교회 사기」에서 처음으로 평양의 지도적인 목회자들인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 목사가 토마스를 순교자라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1926년부터 오문환이 적극적으로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공표하면서 사람들과 대담을 통해 증언을 채록하였고 외국에 편지를 보내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1926년 음력 7월 말에 평양양란에 대한 저술을 통해 토마스를 순교자라는 것과 첫 번째 장로교 목사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그 이후에 1928년에 『도마스 목사전」을 출판하였는데, 200여명의 증언을 통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이 순교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1866년 9월 5일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이러한 목격자들을 만나 그가 성경을 나누어주다가 죽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공표한 것이 1909년의 마펫 선교사였고, 그의 이야기를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면담하여 상세하게 밝혀낸 분이 오문환이다. 그러므로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사건의 목격자들이 한 증언들이 마펫, 오문환을 통해 모아져서 1920년대 중반에 확정 되어 한국교회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장로교 목사라는 것은 마펫 선교사에 의해 잘못 알려졌는데, 오문환은 1926년까지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는 1928년 『도마스 목사전』을 쓰면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새로운 사실들을 제시했다. 그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스 회중교회 출신이며, 1840년이 아니라 1839년에 태어났고, 런던대학교 뉴칼리지를 졸업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므로 1928년이 되면 오문환은 토마스 목사가 웨일스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이며 런던의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런던선교회에 소속되어 중국에 파송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토마스 선교사는 어떻게 장로교와 연결되나? 오문환은 토마스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권서로 한국에 온 것을 장로교회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마펫이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권서 토마스 선교사 - 만주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 -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로 연결시킨 것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28년에 이르러 오문환은 토마스 선교사가 웨일스 회중교회 목사라는 것을 밝혀내어 마펫의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라는 것은 바로잡으면서도 윌리엄슨과 연결되어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로 한국에 왔으므로 한국장로교회와 연결고리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오문환이 토마스 선교사를 순교자로 널리 알리면서 해밀턴과 해리 로즈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그를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토마스 목사를 우리나라에 온 첫 번째 선교사이자 첫 번째 순교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공표하고 기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28년에 나온 『장로회 사기 상권』이 천주교와 연결하여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서술하는 점에서 볼 때 그의 죽음을 순교로 공적으로 언급하고 확산시키는 데는 1920년대 진행된 천주교의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희생자 79명의 복자 시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토마스의 죽음은 1920-30년대에 걸쳐 순교라고 장로교회에서 인정되었고, 일반언론에까지 소개되었으며, 외국 선교사들도 그렇게 서술하였다. 그의 죽음은 기념의 대상이었지만, 초기에는 그의 죽음이 선교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그의 죽음의 기념이 천주교와 같이 의혈의 흘림이라는 평가에서 순교로 호명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담론은 평양 대동강변 사건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고, 평양에서 사역하며 그 증언을 전해들은 마펫이 1909년에 성경을 반포하다 죽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평가하였고, 1920년대에 평양의 한국인 목회자들과 오문환이 순교라고 공언한 후에 일반 언론에서도 보도하였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도 공유되었다. 그 사건의 현장에서의 목격자들의 증언이 그 출발이었고 그것이 후에 기억되고 전파 되어 그의 성경을 반포하다 죽은 선교의 헌신을 후대는 순교로 기억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발제는, 이영식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가 ‘토마스 선교사 내한활동과 순교에 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에 대한 연구’란 제목으로 “지금까지 토마스 선교사의 1차 및 2차 조선 입국과 그 활동, 순교까지의 여정과 그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핵심적인 내용을 여기서 몇 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마스 선교사의 내한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조선과 국제적 상황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국내적으로는 다섯 차례의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성경은 금서가 되었으며, 쇄국정책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국제법이 시행되고 있거나, 여행자의 안전과 자유가 보장되거나, 교통수단이 원활하거나 그러지 못했다. 그러한 시스템이 전무하거나 열악했다. 따라서 21세기 오늘날의 가치와 관점으로 19세기를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토마스의 내한활동과 순교에 관한 논의는 그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입국의 동기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로부터 시작되어야 명확해진다. 그의 조선 입국의 목적은 선 교사로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으로서 조선 백성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무참한 대량 학살" 실정을 알고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2차례 입국하여 성경을 배포했고, 조선인들은 목잘릴 위험을 감수하고 성경을 받았다. 그는 그의 입국 목적대로 실천하다가 대동강변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죽기 직전에도 성경을 전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말한다. 그의 활동과 순교는 우상과 미신으로 점철되어 있던 한반도에 세워지게 되는 교회의 씨가 되었고, 한민족 복음화의 토대가 되었다 셋째, 본 연구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을 받았지만, 기존에 이름 정도로만 알려졌 던 이들을 사료를 통해서 별도로 조명함으로써, 토마스의 선교활동의 실천을 확인해 보고자 했다. 12세에 3권의 성경을 받고 평양 최초의 신자가 되었으며, 장대현교회 집사, 오촌교회 장로로 섬겼던 최치량, 19세에 두 세 명의 친구들과 구경갔다가 성경을 받았고 하리칠동교회를 설립하고 집사로 섬겼던 홍신길 그리고 같은 교회 장로로 섬겼던 그의 아들 홍성준, 평양지역 최초의 여성 수세자이며 최초의 여성전도회를 조직했던 이신행 등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넷째, 토마스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초기 선교사들의 인식은 대체로 셔먼호의 "승객" 으로 승선하여, "선교사", "런던선교회 선교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권서"로서 성경 배포 활동을 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순교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토마스 목사도 목숨을 잃었지만, 죽기 전에 많은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순교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교라는 표현은 1910년대 존스(G. H. Jones) 선교사, 1927년 해밀톤(F. E. Hamilton)에 와서 분명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순교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교라는 표현은 1910년대 존스(G. H. Jones) 선교사, 1927년 해밀톤(F. E. Hamilton)에 와서 분명하게 등장하게 되고 이후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노회와 총회의 인식은 1909년 독노회의 초기 토마스 기념위원회 조직을 통하여 그의 희생적 죽음을 기리고자 했고, 1920년대의 역사자료편찬을 통해서 순교정신을 부각시켰다. 토마스가 순교한 대동강 및 평양지역의 교회설립과 발전을 총망라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1925)와 『조선야소교장로회사기』 상권(1928)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하고 있다. 이는 오문환이 주도하고 1926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적으로 시작한 '토마스 기념식'과 이어지는 '순교자 추도회'와 함께 토마스의 순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섯째,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의 활동과 순교에 대한 역사를 한국교회에 부각시키는 데 오문환 장로의 공헌이 컸다. 그는 런던대학교, 런던선교회, 미국정부의 외교문서철, 토마스 후손 및 친구와의 3천 통의 서신, 국내 고서, 대동강 주변을 비롯하여 서북지역 600여리를 탐방하며 200명의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선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요”(1926)과 「도마스 목사전」(1928) 등의 논저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6년 토마스 기념회, 1927년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회, 1932년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예배당 건립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장로교 교단에서 토마스 순교정신을 앙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곱째, 초기 선교사들의 순교에 대한 인식,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받고 교인이 되었던 이들, 장로교 노회와 총회에서의 기념사업, 한국장로교회의 고전자료, 오문환 장로의 연구, 백낙준 박사의 박사논문, 이후 선교사들의 저술과 한국교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한 한국기독교에 내려온 전통적 인식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인정하고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 순교정신은 오늘날에도 세상의 조류에 흔들릴 수 있고, 느슨해질 수 있는 한국교회에 도전과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 순교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입장과는 다른 부정적 입장이 있다. 북한과 반기독교세력의 공격적인 비판이 있고, 순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소수의 국 내 신학자들도 있다. 접전을 벌였던 우리 조선 측의 「고종실록』의 기록처럼, 토마스가 셔먼호를 인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의 죽음이 순교라고 할 수 있는가?"라면서 순교를 부정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셔먼호를 이끌고 온 것이 아니다. 셔먼호는 소유주와 선장과 그 동료와 선원들이 있었다. 셔먼호는 교통이 열악한 시대에 토마스의 한민족 복음화를 위한 그 비전을 위해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교통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통상을 목적으로 한 셔먼호와 복음 및 성경 전파를 목적으로 승선한 토마스를 분리해야 할 것이다. 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토마스의 입국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그 실천 과정에 목숨을 잃었던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 문헌에 대해 학문적 비평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비평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사료를 통한 치열하게 연구된 결과물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객관성을 주장하다가 자칫 자기 주관성을 관철하려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가치와 관점에서, 160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반도에 복음을 증거하다 맞이했던 젊은 선교사의 순교를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발제는, 하광민 총신대학 통일개발대학원 주임교수가 ‘토마스 선교사 순교 사건에 대한 북한 선교의 실천적 방향’이란 제목으로 “본 연구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남북한이 어떻게 전혀 다른 담론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 담론이 실제 북한 주민의 의식 속에 얼마나 내재화되어 있는지를 탈북민 설문조사를 통해 실증하였다. 이 작업을 통해 본 연구는 북한의 반기독교 담론이 단순한 역사 왜곡을 넘어 반미의식·백두혈통 정통성•반기독교 정서를 동시에 생산하는 다기능적 프로파간다 체계임을 밝혔으며, 이 체계가 약 40년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서사 구조를 유지하며 북한 주민의 의식 속에 중층적으로 각인되어 왔음을 확인하였다. 동시에 본 연구는 이 내재화가 결코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실증하였다. 탈북민 응답자의 92.3%가 남한 정작 이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고 응답하였으며, 그 변화의 핵심 동력은 관계적 접촉과 외부 정보의 결합이었다. 이는 북한 선교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음을 신학적·실증적으로 동시에 확인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몇 가지 한계를 지닌다. 우선 표본의 규모와 기독교 신앙을 가진 탈북민 비율(91%)의 편중으로 인해 결과의 일반화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본 조사는 탐색적 성격을 지니며, 향후 100명 이상의 확대 표본과 비기독교 탈북민 집단을 포함한 비교 연구를 통해 결과의 대표성을 제고하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본 연 구는 탈북민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인식 지형을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바, 향후 북한 내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직접 조사가 가능해질 경우 본 연구의 가설들을 보다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연구 과제로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탈북민 인식 변화의 종단적(longitudinal) 추적 연구이다. 남한 정착 이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북한 담론의 탈내재화가 어떤 속도와 패턴으로 진행되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북한선교 전략의 시간적 설계 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둘째, 북한 담론 내재화의 지역별•세대별 차이 분석이다. 본 연구에서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는바, 평양•평안도 출신 탈북민과의 비교 분석은 담론 내재화의 지역적 편차를 드러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셋째, 토마스 순교 담론과 한국 개신교 타 순교 서사와의 비교 연구이다. 토마스 담론이 북한선교의 서사적 자원으로서 다른 순교 서사들에 비해 어떤 독특한 강점과 한계를 갖는지를 비교 검토하는 것은, 담론 재구성 전략의 정교화에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북한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셔먼호 격침 기념비를 세우고, 재현 행사를 반복하며, 교과서와 선전물을 통해 토마스 선교사의 이름을 지우려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대동강에서 27세의 청년 선교사가 뿌린 씨앗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 남한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 가는 탈북민들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가에 뿌린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지금 대한민국과 교회의 모습이다'라는 그들의 고백이, 이를 가장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통일 이후 북한 지역 교회 개척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앞에 두고, 오늘의 선교는 토마스의 씨앗이 마침내 온전한 열매를 맺는 그 날을 향해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네 번째 발제는, 유해석 소장이 ‘토마스 선교사의 내륙 선교관: 19세기 중후반 내륙 선교 전략의 맥락에서’란 제목으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복음에 대한 깊은 열정과 확고한 선교 소명을 가지고 조선 땅을 향해 나아갔으며, 결국 1860년 대동강 변에서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로 기억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이를 복음 전파의 출발점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이념적 변화 속에서 토마스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의 연관성은 그를 침략의 동조자로 해석하려는 시각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은 제한된 사료와 초기 연구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으며, 그 결과 토마스의 생애와 선교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그의 전체 생애 가운데 극히 짧은 기간에 해당하며, 이를 중심으로 토마스의 선교사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사료적 검토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그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는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개척 선교지로 향한 선교사로서의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토마스의 조선 선교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내륙 선교(Inland Mission) 운동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토마스는 회중교회 전통 속에서 형성 된 선교적 확신과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접근이 어려웠던 조선의 내륙에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의 조선 방문과 마지막 항해는 고립된 개인의 충동적 행동이 아니라 당시 세계 선교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선교적 결단이자 내륙 선교 정신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토마스는 단순히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땅을 향해 나아간 선교사였으며, 내륙 선교의 정신을 조선 땅에서 구현하려 했던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의 순교는 실패한 시도가 아니라, 복음이 조선에 전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한국 개신교의 형성과 성장에 중요한 신학적•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따라서 토마스는 순교자라는 신앙적 정체성과 더불어 19세기 세계 선교의 흐름 속에서 내륙 선교를 실천한 선교사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평가는 토마스를 둘러 싼 오해를 바로잡고, 그의 생애와 죽음이 지닌 한국 교회사적 의미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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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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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3】 각자에게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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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2002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지금부터 24년 전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다. 석고 작업을 하는 주인공이 만난 두 여자를 통해 삶의 틀, 아픔의 틀을 깨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가들의 역량은 역시 대단하다. 한강 작가의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나, 앞으로 여기 안 와요."
그것은 조금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결의가 들어간 말씨라는 점만 달랐다. "이제부터 다이어트할 거예요. 휴학하구, 다음 학기에 놀랄 만한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 눈빛두 그때쯤은 달라져 있겠죠." L의 얼굴은 진지했고, 차라리 결연했다. 그녀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 아이에게 이런 결단력이, 강(p. 121)한 의지가 있었나. "아저씨가 그랬죠. 내가 예쁘다구. 살이 찐 다음부터, 난 한 번도 내가 예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해봤어요. 그런데 아저씨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까 행복했어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나도 모르게 자신감두 생겼구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내 욕심이 지나친 건 아니겠죠. 그 사람 말예요. 그 사람이 나한테 예쁘다구 말해 주면, 그날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가냘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건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잠시 후 그녀의 거대한 몸이 떠나가자, 작업실은 예전보다 넓고 헐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을 뿐, 더 이상 배웅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짧은 헤어짐의 절차조차 그녀에게는 지루하고 갑갑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3시쯤 나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다. 불을 켜고 찬 물 한 잔을 마신 뒤. 나는 뜻 없이 작업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농담 삼아 말했던 대로, 고개를 웅크리고 L의 틀집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잡았던 포즈대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틀집은 안락 하였다. 누군가 틀집의 앞면을 끌어다 붙여주기만 하면 관(棺)은 완성될 것이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는 그녀의 등이 닿(p. 122)았던 실팍한 곡선 위로 몸을 기댔다.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감은 눈 위로 겹쳐진 것은 L의 눈이었다. 언제나 젖어 있는 것 같던 그녀의 말간 두 눈이 어룽어룽 내 이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조심스럽게 틀집 밖으로 나오고 나자 나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누구든, 자신의 관 속에 미리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낡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나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아침을 기다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공간에 버티고 있었던 L의 육중한 양감이 떠나갔음을,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염려했던 환멸은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3년이 지난 뒤 그녀를 우연히, 그렇듯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p. 123).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p. 312)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p. 313).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 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 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p. 328)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p.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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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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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2】 인간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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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의 원작 소설이다. 나는 재미있게 봤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가 재밌었기에 원작 소설을 보고 싶어 읽게 됐다.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봉 감독이 책의 주요 모티브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창작한 것이다. 이 책에 있듯이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 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소설과 영화다운 상상이고 그 안에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흥미로웠다.
사실 내가 미드가르드에서 겪고 있던 그 문제는 미드가르드를 떠날 때도 불거졌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엔지니어도 아니었다. 예술이나 오락, 글쓰기에도 재능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면 별 볼 일 없는 학문이나 연구하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도서관에서 찾은 별 의미도 없는 책을 뒤적이며 아무도 읽지 않을 연구 논문을 썼을 것이다. 그보다 이전에 태어났다면 공장이나 광산, 군대에 일생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드가르드에는 별 볼 일 없는 학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웬이 아주 친절하게 지적했듯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큘러를 한 번 깜박이면, 또는 태블릿을 몇 번만 두드리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수고를 들이는 사람도 없기는 했다(p. 43).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이런 이유로 예나 지금이나 무료한 청춘들이 으레 그래 왔듯, 나 역시 틈만 나면 사고 칠 궁리를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p. 44).
나는 맛없는 아침 식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나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식 스가 죽었을 때보다도, 파이브한테 일이 생겼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어. 종료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는 네가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계속 통신 가능한 거리에서 비행하고 있었어. 결국 포기하고 돔 격납고로 돌아온 다음에도 조종석에 앉아서 한 시간을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불멸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렇지?"(p. 83).
유니언에 속한 세계 수백 개 중에서 인류와 토착 생명체가 공생하는 장소는 딱 하나뿐이다. 이 행성은 은하계 나선형 팔의 거의 끝에 있는 M형 항성을 홀로 공전하는 작은 왜성으로 가장 가까운 개척지와 20광년 떨어져 있다. 인류가 가장 먼 곳 까지 나가 개척지 건설에 성공한 사례였다.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행성을 롱샷이라 불렀다. 이 개척지의 성공 뒤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애초에 롱샷 행성에는 나무에 서식하는 두족류가 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이동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숲 지붕 색에 맞춰 색을 바꾸기 때문에 적외선 카메(p. 371)라 없이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은 행성에 하나뿐인 대륙의 중앙 고원에 모여 살았다. 처음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 이들은 과학 기술이나 문화 면에서 미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능력은 농업이 발달하기 이전의 인류보다 크게 앞서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다. 내가 본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원래 인간이 무기와 거주지, 플리터와 우주선을 발전시키게 된 이유가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너무 서툴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롱샷의 토착 생물들은 생태계의 일원이 되는 데 서툴지 않았다. 그들은 총 없이도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다.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륙거점은 해안에 있었고 해안은 그들이 서식하는 산지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개척민들도 토착 생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들이 낯을 가리고 일부 지역에서만 사는 데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착륙 후 20년이 흐르도록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남이 왜 다른 거점과는 달랐는지까지 역사책에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세워 볼 수 있다.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개척민들은 끊임없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성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간. 시간이 열쇠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p.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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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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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1】 조력 사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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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조력 사망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조력 사망이 합법화된 주는 별로 없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죽음의 방법에 대한 논의는 멀기만하다. 과연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흥미롭게 읽었다.
"나는 평생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어요. 항상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좋은 영화를 보려고 애썼죠. 늘 스스로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게 완전히 무의미해진 거예요.” 켄이 멈칫하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래를 뱉어내고 숨을 골랐다. "현대 의학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늙다리들은 한참 전에 사라졌겠죠." 그는 다른 아파트와 연결된 복도를 고개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엄청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목숨에 매달려요. 정말 그렇게 매달릴 만한 가치는 없는데."(p. 25).
의료 조력 사망은 정신이 온전한 성인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받은 치사 약물을 섭취해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할 경로이다. 미국에서 진행성 치매 같은 중증 인지장애 환자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어도 조력 사망법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조력 사망법은 환자가 스스로 치사 약물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의사가 치사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는 안락사는 절대 금지다(p. 38).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 중 상당수는 다른 모든 걱정, 심지어 물리적 통증에 관한 걱정보다 더 극심한 실존의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벌어진 상처만큼 아프고 쓰라릴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가 더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앞으로 비참한 날들만 남았을 때는 죽음 자체보다 살아간다는 것이 더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p. 91).
조력 사망 자격 심사를 통과한 환자 중 일부는 결국 치사 약물을 사용하지 못한다. 약을 섭취하기 전에 사망하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약을 섭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다.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오리건주 존엄사법이 통과된 후 23년 동안 2,895명이 법에 따라 처방전을 받았고 그중 1,905명이 치사 약물로 사망했다. 조력 사망을 신청한 환자 중 3분의 1이 끝까지 약을 섭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p. 236).
조처럼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면 큰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조력 사망법을 이용하는 모든 환자가 안도감을 느끼려고 무조건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병세가 악화할 경우 대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환자들도 있다. 은퇴한 종양 전문의로 엔드 오브 라이프 초이스 오리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마크 래릭은 처방전을 받는 것이 미래의 돌연한 악화 가능성에 따른 보험이나 보증처럼 작용한다고 확신 한다. 그가 약을 처방해준 많은 환자가 실제로 복용하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 약을 받아갔으나 끝내 복용하지 않았다(p. 246).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한 죽음이라 해도 유족에게는 죽음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조력 사망은 가정에서의 호스피스 임종보다 더 명확한 측면이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의 호스피스 기관 베이헬스Bayhealth는 3년에 걸쳐 의료 조력 사망과 전통 호스피스 임종에 따른 애도 경험을 비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은 호스피스 임종에 입회한 유족보다 미련이 덜 남았고, 임종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컸다고 답했다.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이 착잡함과 비탄을 호소한 사례는 두 가지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환자의 결정에 반대한 유족과, 치사 약물을 복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러기(p. 279) 전에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었다. 후자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껴 회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p. 280).
환자가 죽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은 난감한 화해의 과업을 회피하곤 한다. 심지어 호스피스 임종의 경우에도 환자가 언제쯤 사망할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p. 281) 조력 사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부정할 수 없다.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날을 알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얻는다. 많은 유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돕는 과정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게 사실이긴 해도, 사회적으로는 사별 이후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 삶을 마쳤다는 데 대한 사회적 낙인 탓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기도 한다. 고인이 조력 사망을 실행하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친척, 친구, 동료에게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족이 많다. 사별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허용 하지 않는 경우를 숨겨진 애도, 즉 '박탈당한 애도'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죽음에 비해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자살, 약물 과다 복용, 유산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다. 유족이 타인에게 받는 비난은 매우 미묘할 수 있다. 그런 비난은 사람들의 무심한 언행, 움칫하는 몸짓, 어떤 단어의 억양 등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침묵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p. 282).
삶의 마지막을 다소나마 통제하길 원하는 환자의 선택지를 개선하는 데 어떤 과제가 남아 있을까? 최우선 과제는 50개 주 모두에서 조력 사망법이 통과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미국인의 80퍼센트가 합법적으로 조력 사망을 시도할 수 없는 주에 살고 있다. 이들이 삶의 마지막에 심각한 고통을 피하려면 은밀하고 위험할 수 있는 자력 구제에 의존해 죽음을 앞당 기거나, 음식물 섭취를 자발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스위스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아픈 사람들과 조만간 아플 사람들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과제는 조력 사망을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력 사망을 '자살'로 칭하기를 그만두고 의료 행위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조력 사망은 그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 법적 범주를 이루므로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그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또(p. 302) 다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임종 돌봄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필수 과목으로 포함하고, 조력 사망 신청에 관심 있는 임상의에게 대응 방법을 교육하며, 조력 사망에 반대하는 의료인을 위한 보편적 위탁 조항을 도입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임종 환자 돌봄 인력 양성과 관리에 크게 기여할 호스피스나 완화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미 일부 진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 환자의 자문 의사 역할을 맡는 의사들이 나타났고, 캘리포니아와 오리건과 워싱턴의 일부 호스피스는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명시했다. 버클리에서 임종 과학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의사 로니 샤벨슨은 결국에는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을 삶의 마지막 선택지 중 하나이자 치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p. 303).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끈질기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적으로 여기면 죽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 할 경우 그 불가피성을 직면하기가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진다. 죽음을 향한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려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과의 관계를 탐구할 공간과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일찍부터 삶의 마지막을 두고 대화를 시작하면 죽음에 관한 사회적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무상함을 깊이 인식하고 애도 상담부터 호스피스 치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p. 306).
'웰다잉' 욕구는 의료와 장례 영역에서 삶의 마지막에 관한 통제권을 찾으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일환이다.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가 이런 노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장, 가정에서의 임종 돌봄, 수분해당, 시신 퇴비화, 수목장 등의 선택지를 조사한다. 자신의 추모사와 부고장을 작성하고, 생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기 장례식 배경음악 목록을 만들거나 관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한다. 죽음에 관한 논의를 정상화하려는 '죽음 긍정death-positive' 운동 (최근 급성장 중이다)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좋은 죽음good death'이 현대인의 또 다른 의무('생산적 삶과 성공적 죽음')로 둔갑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웰다잉이 여력 있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성급한 우리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고통에 간편하고 기계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쉽다. 조력 사망은 어디까지나 중증 환자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p. 307).
이 책은 단기간의 관찰 결과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후 치사 약물 조합이 일부 바뀌었고 부분적이나마 법안 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의 조력 사망 경험은 전반적 으로 변한 것이 없다. 조력 사망 자격은 여전히 획득하기 어렵다. 병세가 지나치게 악화했거나 반대로 처방전을 받을 만큼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여전히 법조문에 구속받는다. 그리고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에 겪는 고통을 덜어주려 헌신해온 의사들은 의심과 비난에 시달린다.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마땅하다. 세계적 팬데믹의 여파와 씨름하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관념이 개인에게 더 밀접하게 다가오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바로 지금이 만사를 다르게 처리하고 더욱 온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떠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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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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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0】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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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책이든 심리치료의 도구는 다양하다. 이 책은 정신과의사의 관점으로 영화를 분석한 것이다. 흥미롭게 봤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마음의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그것이 좋은 영화를 봐야할 이유이다.
극단적인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섣불리 고통의 현실을 직면하라고 요구하는 원칙론적인 접근보다 먼저 그들이 한숨을 돌리고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것은 피해자 대부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필요한 자극이 되기 쉽습니다.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정서적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부적응적인 행동까지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안정감과 연결감(p. 28)을 느낄 수가 있어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p. 29).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와는 아주 다릅니다. 트라우마는 기본적으로 1) 미리 예측할 수 없고, 2) 미리 대비할 수도 없으며, 3) 또한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도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위협에 대항을 해볼 수도 없고 도망을 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기본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강렬한 두려움, 공포, 무력감, 불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데 피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이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압도적인 상황의 경험'이 바로 트라우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뇌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한다고 이러한 변화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트라우마는 우리 인간의 뇌의 신경회로를 압도적으로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피부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듯이, 마음의 상처도 저절로 치유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상처의 깊이와 무게에 따라 치유(p. 46)의 방법과 시간에 큰 차이를 보이겠지만 어쨌든 불가항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의 치료는 큰 진전을 보이는 것입니다(p. 47).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은 감정을 마비시컴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자극이 될지 모를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제한하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합니다. 극단적으로 수동적이 되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삶에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적이고 무미건조한 삶의 지루한 반복이 결코 그들의 삶을 만족스럽게,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아무런 행복도 느낄 수 없는 답답한 자신의 삶에 대한 염증도 느 끼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수동성에 대한 혐오감도 점차 더해질 테니까요. 무미건조한 삶은 트라우마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트라우 마의 영향력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의 기회, 삶의 새로운 즐거움 • 기쁨• 성취감의 기회를 제한시키기 때문이지요. 다양한 긍정적인 경험들이야말로 트라우마의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감정의 마비' 라는 방어기전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환자에게 일시적인 안 정감은 줄 수 있지만 그만큼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더 길게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 인 셈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 여성부 실태 조사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은 고작 2.3%라고 합니다. 여전히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나 아동들은 자신들이 받은 트라우마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도움을 받고(p. 140) 이러한 피해자들이 결국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한참 전에 벌어진 일을 잊고 이제 현재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내면에는 가해자에 의해 황폐 해져버린 삶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변화와 상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요. 아무리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트라우마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잃어버린 다리가 다시 생겨날 수도 없고, 보이지 않게 된 눈이 다시 보이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원하지 않은 변화와 상실을 겪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충분히 표현되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과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속에서나 상상 속에서라도 가해자들에게 화를 표현하고 그들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야 피해자들의 마음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과 분노가 더 이상 그들(p. 151)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게 될 때 피해자들은 비로소 트라우마 이전의 자신과 트라우마 이후의 자신을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어?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하잖아" 라는 말보다는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볼까?" 하는 말이야말로 이런 피해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위로의 말일 것입니다(p. 152).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사고의 전환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마쓰시타 고노스케)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항을 미친 경영자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일 겁니다. 잘 알려진 대로 마쓰시타는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 시타전기산업의 창업자입니다. 일본의 전자 산업하면 우리들은 소니를 떠올리지요. 소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일본 내에서의 평판이나 인기는 마쓰시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한번 고용하면 평생 같이 가는 가족적인 일본식 기업 문화는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초등학교 중퇴자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를 동기 부여로 바꿔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가난 덕(p. 236)분에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고의 전환' 이었습니다. 즉 매사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임한 결과 인생의 장애물을 인생 도약의 뜀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쓰시타는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지요. 긍정적 사고와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인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긍정적 사고와 희망 이상의 치유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p. 237).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자 고통입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겪은 많은 사람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트라우마의 기억을 피하려 하듯이 상실감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조반니처럼 "내가 그때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어쩌면 상실감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책을 하는 것이 덜 괴롭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늦추기만 할 뿐이지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상실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을 적응적인 애도 반응adaptive grieving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애도 반응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쯤 끝나야 한다는 원칙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슬퍼하고 원망하고 애통해해도 됩니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인생의 중심에서 멀어져가면 됩니다. 이렇게 상실감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살아남은 자의 몫입니다(p. 271).
험난한 이 세상,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커다란 풍랑에 휩싸이지 않고 별 기복 없이 순탄하게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뜻하지 않게 큰 사고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고, 협박당할 수 도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두 명 중 한 명은 일생에서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정면으로 트라우마와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 그 충격과 후유증의 흔적이 얼마나 깊게 남을 것이냐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가족 • 친구 • 연인 • 배우자의 태도입(p. 277)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은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가장 커다란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해와 지지, 공감을 받지 못할 경우 트라우마의 상처는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의 공감의 결여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제 2의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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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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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천목사, 『빛나는 가우디 마음건축 시집』 출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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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교회를 섬기며 활발하게 시 저술을 하고 있는 박재천 목사가 13번째 시집 『빛나는 가우디 마음건축 시집』을 출간하고 3월 29일 오후 5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1308호에서 많은 하객들과 함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저자 박재천 목사가 “지난 번 시집 판매 대금으로 아프리카에서 수술비로 사용했다. 이 시집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선교 사역에 사용하도록 하겠다.”라고 인사말했다.
예배는 박상진(한동대 교수) 목사의 인도로 김시우 장로가 기도, 글로리아코랄이 특송, 박다혜(손녀)가 대금 연주했다.
안명환(전총회장)목사가 시 150편을 봉독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하고 권성묵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덕담
2부에 권성묵 CTS목자교회회장이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시를 쓸 수 있도록 목사님께 시심을 주셨다고 본다.”라고, 정상문 목양문학회장이 “시를 계속 쓰셔서 많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란다.”라고, 최재걸 아프리카미래재단이사장이 “이번 시는 시조 형식으로 곡을 붙이면 노래가 될 수 있다. 앞으로도 좋은 시를 많이 쓰시기 바란다.”라고, 총신64회 이해연 목사가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활동해 자랑스럽고 감사드린다.”라고, 조재신 일산CBMC가김시 “목사님의 시로 AI를 통해 노래를 만들었다.”라고, 안명복 목사가 “앞으로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 바란다.”라고, 장남철 목사가 “특별시에 사시는 목사님께서 앞으로도 ‘특별시’를 많이 쓰시기 바란다.”라고, 김시우 박사가 “효와 충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 김찬배 목사가 “목사님께서 스페인 다녀오신 후 많이 강건해 지셨다.”라고, 김희숙 교수가 “목사님의 시라면 믿을 수 있기에 많은 분들에게 추천한다.”라고, 박화현 장로가 “박 목사님 때문에 시를 쓰게 되어 감사하다.”라고, 이모세 전도사가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인도로 잘 되시기를 바란다.”라고, 김상영 장로가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셨다. 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 바란다.”라고, 임오혁 집사가 “시집 발간을 축하드린다.”라고 덕담 후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합심기도한 후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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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