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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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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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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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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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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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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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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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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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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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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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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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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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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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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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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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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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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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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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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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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2】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선교적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되는데 담임목사의 선교이해가 너무나 중요하다. 담임목사는 매주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님들은 해외선교만을 선교라고 이해한다. 목사님들처럼 성도들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이주민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지 않아서 이주민선교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런데 나를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신 조원형 목사님(현재는 천산중앙교회 원로목사)은 국내에 온 이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가 이들을 품고 선교하시고 선교사로 파송하시고 국내에 들어 와서 선교하실 때에도 지원을 하여 주셨다. 그래서 몽골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페루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총회에서는 초대 총회 이주민선교협의회 회장을 맡으셔서 교단 내에 이주민선교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셨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는 연초에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부흥회를 하였다. 교회에 있는 필리핀, 몽골, 페루 성도들은 교회의 한 가족처럼 지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교회의 큰 행사에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필리핀 성도 중에 한 명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숙소에 와서 잠을 자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무관심하였다. 이때에 담임 목사님은 필리핀에 있는 사망한 가족들만 아니라 필리핀 동료 가족들 모두를 모든 비용을 교회가 마련해서 한국에 초청하여 관광을 하면서 모든 가족을 위로하였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 교회에 축복하셔서 630평의 공장 부지를 주셔서 그 땅이 지금 그 교회의 교육관과 선교관이 되었다. 담임목사가 선교를 해외선교만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도 중요한 선교로 이해하고 헌신 할 때에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나를 선교사로 파송한 천산중앙교회에서 눈으로 확인하였다.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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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2】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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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3】 왜 그리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이 책은 독서법에 대한 책이다. 20년 전에 출판되어 이제는 절판되었다. 읽던 책에서 소개되어 대출해서 읽었다. 독서에 관심이 많다보니 종종 독서 방법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다. 여러 가지로 유익을 얻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알고 교육 수준도 높은데,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문맹은 없어졌으나 책맹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장벽 못지 않게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 역시 높다. 다만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곧잘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p. 35). 어느 가난한 시인이 있었다. 시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야 했던 시인은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벗들과 더불어 술 한잔을 걸친 시인은 귀갓길에 그 거지를 보았다. 술도 한잔 걸쳤겠다, 마음이 들뜬 시인은 그날만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머니를 뒤(p. 59)져 보았으나, 역시 동전 한 닢 없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몇 푼도 모두 술값으로 써 버린 터였다. 거지에게 줄 것을 찾던 시인은 가지고 있던 책 한 권을 주었다. 자신이 읽고 있던 인생론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를 지나칠 때마다 늘 적선을 하고 싶었는데, 이 몸도 가진 것이 없어 줄 것이 없구료. 내 가진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받으시오." 거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먹지도 못하는 이 따위 책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시인은 거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을 준 뒤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후, 늘 같은 자리에서 구걸하던 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을 조금씩 읽어 나가던 거지가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이다. 거지가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몸의 장애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장애 때문이었고, 그는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p. 60). 그러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개인적인 이유를 살펴보자면, 책은 개인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과 지혜를 제공한다. 인간은 고작해야 평균 70여 년을 산다. 인간의 경험이란 시간적으로 짧을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매우 협소하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한계란 너무도 분명한(p. 61) 것이어서 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체험한 인생의 경험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러나 독서가는 책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와 무한대로 만난다. 니체는 독서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나를 다른 사람의 학문의 혼 속을 거닐게 한다."고 했다. 독서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보편적인 범주 안에서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독서는 개인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한다. 그 지혜를 얻은 사람은 인생에서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으며, 인생을 의미있게 살 수 있다. 인간의 생은 짧고 그런 만큼 인간은 허무와 공허감에 빠지기 쉽다. 그런 인생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또한 책은 모든 영감과 상상력의 가장 기본적인 원천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영감과 상상력이 샘솟지 않는다. 설사 타고난 상상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금세 바닥난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이 보고 듣는 것만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p. 62)문이다. 다음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사회적인 이유는, 세계가 이미 지적인 영역을 통해 인식되고 있고 그 지적 패러다임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설명을 위해 '한국'을 예로 들어 보자. 현재 우리가 실감하는 한국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영토와 사람과 통치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단일 민족이라는 혈통주의와 피억압의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미래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의식이 한국인을 움직인다. 그런데 '혈통주의'와 '역사의식'은 머릿속에서 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실체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주의'와 '역사의식'이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이 존재하고 그를 바탕으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있고 그를 바탕으로 현실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명인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정신적 동물이고, 이미 수많은 정신적 재부들이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상, 백지와 같은 순수한(p. 63) 정신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공교육에서 배우는 내용과 상식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수용되는 내용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적으로 오염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지성인 것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는 '우중 사회'가 된다. 우중 사회 속의 개인과 집단은 언제라도 사회적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데 동참할 수 있다(p. 64).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보라 누구든지 책을 독파하지는 못한다. 어느 대목에 한참 머물며 음미했어도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부분을 펴 보면 당신의 눈길이 머물렀던 그 문장의 새로움에 깜짝 놀랄 때가 있지 않은가.- 발터 벤야민 나의 독서 편력에도 슬럼프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지적 슬럼프에 빠져 도무지 더 이상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읽어도 더 진전 되는 느낌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책을 들기는 했지만 내 안에서 어떠한 지적 욕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동안 의욕 없이 지내던 나는 마침내 어떻게든 이 슬럼프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지적 모색이 필요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모두 정리했다. 당(p. 84)시 나는 약 1,000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절반 가량의 책들을 내다 버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새로운 지적 모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릴 책을 골라내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의 정신을 박제화시키고 있다고 판단되는 책과 또 하나는 다시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책들이었다. 전자에는 소위 운 동권 사회과학서적들이 포함되었고, 후자에는 구입할 당시에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담론의 유효기간이 지난 책들이 포함되었다. 그렇게 책을 정리하고 보니,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책들이 남게 되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책들이었다. 결국 남는 책은 고전이었다. 그때 나는 고전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왜 고전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책을 버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 나로서는 매우 절박한 문제였으며 그런 과정이 결국은 나의 지적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p. 85). 지적으로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책장에서 재독하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재독하고 싶은 책이 전체에서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독서 수준을 점검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재독하고 싶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좋은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수준 높은 독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책이 드물다면 독서 경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반드시 고전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양서'를 얼마나 읽어 왔는지 스스로 평가해 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다음에 책을 살 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인가?' 라고 자문하고 책을 고른다면 한층 높은 안목으로 후회 없는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독하고 싶은 책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점검하면 자신이 왜 열정적인 독서가가 되지 못하는지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읽고 버릴 책들만 읽는 사람이 고급 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나, 얼마 못 가서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는(p. 86)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반대로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 성취가 있었다는 것이며, 지적 성취가 있는 만큼 독서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p. 87). 독서는 기본적으로 저자와의 대화이다. 저자의 관심사와(p. 132) 독자의 관심사가 다르면 그 대화가 재미있을 리 없고, 억지로 읽는다고 해서 머릿속에 들어올 리도 없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소위 지성인들이 추천해 주는 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부족한 독자들은 학자연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책에 누구나 한번쯤은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서울대가 추천하는 책 100선' 이나 '한국의 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책 100선' 같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독서 목록에는 주로 고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권장 도서가 초보 독자들에게는 약이 아니라 심지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눈높이에도 맞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의 책을 억지로 읽으려 하면 책에 흥미가 생기기는커녕 '역시 나에게 책은 무리인가 봐.'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책을 멀리하게 된다. 고전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p. 133). 독서의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데 있다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만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다.-멀린 C. 위트록 "당신은 책을 왜 읽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책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독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목적만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학원 같은 곳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배움은 독서의 기능 중 하나이지 전부는 아니다. 독자들이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독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만족감을 준다. 독서는 지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p. 225)고, 감동은 정서적 공감과 이성적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정서적 공감을 할 때 울고 웃는다.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를 읽을 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지닌 테스가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안타까움과 슬픔에 젖게 된다. 반면 성철 스님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때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교도소에서 살아 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부 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교회에서 찬송하는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렁찬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 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이런 글을 읽은 우리는 종교와 귀천과 인간과 자연을 뛰어(p. 226) 넘은 정신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정신 세계는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조화롭게 융화 될 수 있는 화엄의 세계이자 선과 악의 경계도 사라진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은 냉철한 깨달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스님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읽혀져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p.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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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3】 왜 그리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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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2】 외국의 젊은 장의사가 생각하는 죽음
- 미국의 젊은 장의사가 쓴 책이다. 미국은 장례식 때 시신을 단장해 조문객들에게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빼고 그 속에 방부제를 넣어야 한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례법이다. 저자는 수많은 장례를 치루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조건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버린다. 만약 죽음과 망자를 보고, 만지고, 잡을 능력이 있었다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p. 18). 몇 년 전에 우리 아버지는 낡은 86년형 포드 F-150의 범퍼에 "목사님이 장례식에서 거짓말하지 않게 살자!"는 스티커를 붙이셨다. 이 스티커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4,000건의 장례식을 치렀지만, 목사님이 고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신 고인이 천국에 있다는 추도 연설은 수없이 들었다. 목사님은 관대하고,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환상적인 설교를 만들어내곤 했다. 언젠가 신을 비롯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증오했던 어느 고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고인은 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을 좋아했어요. 밖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께서 바깥세상을 창조했으니까요. 이제 고인은 가장 넓은 바깥세상인 천국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차 범퍼에 붙여 놓았던 스티커에서처럼 목사님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들은 진심으로 고인이 신의 손길을 받기를 바란다(p. 38). 죽음은 우리의 생활을 잠깐 멈추게 만든다. 그렇다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에게 순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느끼고, 여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다. 크로노스를 잊고 카이로스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나는 홀로 차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며 그 순간을 맞았다. 할아버지를 기억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보고 그리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이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가끔은 삶을 잠깐 멈춰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마음으로 죽음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받아들이게 된 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애도하는 안식의 시간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p. 60). 쉽게 잊히고 무시되며, 매우 단출한 논리이다. 죽음을 많이 접할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망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죽음을 더 쉽게 수용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죽음과 아주 가까웠다. 현대에는 죽음과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이 너무 강해서 초월하기가 어렵다(p. 95). 사실 염은 단순히 체액을 바꾸는 작업이다. 즉 고인의 몸에서 피를 완전히 뺀 다음에 방부 처리가 된 용액으로 다시(p. 152) 채우는 것이다. 손가락을 자신의 목 오른쪽에 가만히 가져다 대보자. 심장 박동에 맞추어 경동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 동맥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목을 절개하고, 경동맥을 찾을 때까지 근육과 조직 사이를 훑는다(하지만 다른 동맥을 사용하는 장의사들도 있다). 경동맥 옆에는 경정맥이 있다. 염을 할 때는 이 두 가지 혈관을 모두 들어 올려서 분리해 묶고, 각 혈관에 작은 구멍을 뚫는다. 이 과정을 굳이 비유하자면 큰 볼 속에 스파게티 면을 담고 위에 토마토소스를 뿌려서 끈끈해진 면발 바닥 어딘가에 있는 펜네 스파게티면 하나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방부 처리를 위한 염 작업에 사용되는 기계는 매우 실용적이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Dr. Who)〉에 나오는 달렉(Dalck) 로봇처럼 생긴 이 기계의 이름은 포티 보이(Porti Boy)인데, 다른 재주라거나 스타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위쪽은 용액을 담는 용기로 되어 있고, 밑쪽엔 버튼이 달려 있다. 버튼을 돌리면 염을 위한 혼합액이 경동맥과 연결되어 있는 고무 튜브를 통해서 삽입된다. 포티 보이의 압력이 용액을 혈관으로 밀어 넣으면 경정맥으로 피가 빠져나온다. 도자기로 만든 염을 위한 테이블에 진홍색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진해졌다가 연해지기를 반복하면서 피가 넘실(p. 153)대는 모습은 맑은 가을날에 해가 지는 일몰을 저속으로 촬영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염 작업이 부담스럽지만, 훌륭하게 마무리된 염 작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기도 한다(p. 154). 나는 늘 죽음 가까이에 있고, 불임으로 고통받았다. 또 예레미야에 대한 줄리아의 사랑과 용기도 보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생명은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가 함께하는 매 순간, 아이와의 레슬링 한판, 함께 읽는 책 한 권, 함께하는 한 끼의 식사, 아이가 내게 하는 질문,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다. 심지어 어려운 시간에도 감사하며, 못된 행동에도 감사한다(아이만 못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못되게 행동할 때가 있다). 아이가 성질을 부릴 때, 투정이 도가 지나칠 때도 감사한다. 삶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고 있어서 나는 늘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마음은 피곤할 때, 퉁명스러워질 때, 인내심이 부족해질 때도 도움이 된다. 나는 절대 좋은 부모는 아니다. 하지만 죽음 가까이에 있고, 죽음을 알고 있어서 더 나은 부모가 된다. 아마도 삶의 고통과 상실을 알지 못(p. 246)했다면, 지금처럼 감사하고, 지금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처럼 현실에 충실하고, 지금처럼 예레미야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모든 면에서 나는 죽음이 가진 선함의 덕을 본 사람이다(p. 247). 어느 장의사의 열 가지 고백 우리 집은 대대로 죽음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지만, 10년 넘게 나는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나는 슬픔과 고통, 눈물, 콧물, 그리고 그보다 덜 매력적인 체액 주변에서 살고 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가야 하고, 장례식이나 묘지를 가장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날을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고, 맨 마지막으로 마무리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선택한 건 아니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결국 이 일을 갖게 된 데 감사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의미가 장의사라는 직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나 죽음의 의미 앞에서는 마음을 연다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삶의(p. 249) 한계를 슬퍼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는 오히려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며, 자신에게 더 진실하고, 우리 주변에 더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이례적인 일을 하면 할수록 죽음이 가진 의미 열 가지를 배우고 믿게 되었다. 이 책의 독자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자들이 이 열 가지 의미를 되새기며, 죽음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이 공포가 아닌 경건함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죽음이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진화가 만들어낸 유산이며, 각종 뉴스를 통해 일반화된 인식이다. 사람들이 의료 기관과 전문적인 장의 시설에서 죽은 고인과 그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숨기면서 더 악화되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다. 죽음을 건강하게 이해하게 될 때,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 죽음은 길들일 수 없다.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열 수도 있고, 마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죽음으로 마음을(p. 250) 연 사람들은 온정·이해·용서, 그 외의 여러 가지를 위한 여지를 찾는다. 마음을 열도록 노력해보자. ▲ 죽음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로 치부할 수도 없다. 죽음이 만드는 특별한 공간은 시간을 멈추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잠깐의 휴식기를 만들어준다. 죽음의 안식일을 갖게 하고, 삶을 반추하고,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 천국이나 사후 세계만 중요하게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가치나 죽음의 가치를 축소하고, 무시하게 된다. 이곳 지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 이곳의 장점과 죽음이 가진 장점도 찾게 된다. 죽음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고, 감사하게 만든다. ▲ 죽음은 목소리가 없다. 죽음의 침묵을 받아들이면, 죽음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침묵을 받아들이자. 침묵을 채워야 할 필요는 없다 ▲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죽음을 부끄럽게 여기(p. 251)도록 만든다. 긍정적인 인식은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다. 배우고, 성장하고, 극복하면서, 타인과 나 자신에게 인내심을 갖도록 하자. ▲ 가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서의 경험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한다. 죽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는 에덴동산과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공동체에 의지하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 죽음은 거대한 우주와 같아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넘어서, 함께 모일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 ▲ 능동적으로 고인을 기억하다 보면 슬픔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 삶 속에 사랑했던 고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열심히 기억하자. 고인이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p. 252) 것을 기억하자. ▲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죽음을 수용하고, 죽음을 더 가까이하고, 죽음을 제대로 바라볼 때,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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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2】 외국의 젊은 장의사가 생각하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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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1】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 출판사에서 아마도 책 판매를 위해 “도망친” “철없는”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쓴 것 같다. 이들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 해외살이를 하러 간 것이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결혼했는데 무슨 철이 없는가? 오히려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3개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을 기록한 책을 흥미롭게 봤다. 자기가 살아보고 싶은 삶을 살고 있으니 후회는 없을 것 같다. 통장에 여유가 조금 생기니 마음의 여유도 조금 더 생겼다. 결혼 후 바로 여행을 못 간다고 징징대며 세상 탓을 했었는데, 2년 동안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보니 그때의 내가 얼마나 현실감각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만약 그때 재테크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더라면, 비상 대책이 되어줄 그 무엇도 준비해놓지 않고 그대로 자동차 세계여행을 갔더라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돈이 문제가 되어 결국 6개월도 못 버티고 돌아 왔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아일랜드도 호주도,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말레이시아도 가보지 못한 채 한국에 취업해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코로나바이러스로 숨죽였던 2년이라는 기간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의 세계 모험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준 기회가 되었다(p. 31).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 부모님과의 갈등이 한창일 때 나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적었다. '가진 것을 놓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만, 그 두려움 보단 우리에게 들어올 새로운 것들에 대한 설렘이 더 크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보며 우리의 세계를 알록달록한 경험으로 겹겹이 쌓아가자.' 당연한 말이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우리가(p. 80)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리스크가 높은 삶을 선택했고,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처음에도 그랬 고,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이럴 것이다. 해외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이라는 불안, 남들처럼 살지 않고 방랑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불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도 시간이 지나니 점차 익숙해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 '자유에 대한 책임'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을 감당하는 마음이 더욱 단단해지길.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든 무사히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p. 81). "비자 나왔어! 이제 우리 돌아갈 수 있어!" 한국에 돌아온 지 2주 반 만에 말레이시아 비자가 나온 것이다. 진행상태가 30%에서 꿈쩍도 안 하기에, 크리스마스와 연말까지 한국에서 보낼 각오를 했었는데, 갑자기 80%까지 훌쩍 뛰다니. 나머지 20%는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뒤 해결해야 하는 거라 우리는 80%의 비자를 가지고, 다시 페낭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호화로웠던 제주에서의 7박 8일을 끝내고, 우리는 겨우 다시 페낭으로,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p. 195). 무비자로 들어와 다시 한국에 다녀와야 했던 비용 100만 원, 우린 그것을 '멍청비용 100만 원'이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페낭에서 호찌민으로, 호찌민에서 한국 부모님 댁으로 또 제주도로 갈 때의 우리는 그 심정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외국인이 해외에 살 때 무엇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비자이다. 우리는 이미 아일랜드에서 비자의 무서움을 겪어봤지만, 호주에서 너무 쉽게 비자를 얻어서인지, 가까운 나라이니 쉽게 줄 것이라고 생각한 오만함 때문인지 아무튼 말레이시아 비자를 얕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한국으로 쫓겨나서야 다시금 깨달은 비자의 중요성.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우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비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신중하게, 두 번 세 번 고민해서 결정하시길 바란다(p. 196). 영어는 결국 자신감이다. 그리고 기세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 외국인 앞에서 말을 못 하고 끝날 것이다.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다 알아듣는다. 그들은 우리가 원어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너 잘하고 있어! 그래그래 계속 해 봐!' 하며 응원하는 눈빛을 받기도 한다. 외국인이 더듬더듬 한국어를 할 때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자. 영어는 무작정 외국에 간다고 해서 느는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영어로 대화를 하는 자신감'을 배울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만 가지고 와도 8할은 성공이다. '내 영어는 완벽하지 않아'라고 생각해도 일단 말을 뱉어 보자. 그게 시작이 된다. 기억하자. 영어는 무조건 자신감!(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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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1】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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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0】 경험하지 못할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경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다. 단지 현상을 보고 추론해볼 뿐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전이의 사건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상징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죽음의 비밀에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큼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접근이 이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개별적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개별적인 동시에, 최후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서는 고유의 접근 방법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기에 그렇다(p. 38). 원초적 불안과 대상에 대한 경험은 근원적이고 존재를 뒤흔드는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 불안과 경험은 대부분 의식이 있는 현존재가 한계에 다다를 때 순수하게 일어나는 몸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경련, 불안, 가려움, 메스꺼움, 오한, 알레르기 반응, 경직으로 말이다.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안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나는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 누미노제의 불안을 느낀다. 드레버만은 신에 대한 원초적 불안을 언급하며, 이 불안에서 인간의 중요한 위기를 관찰한다. 이 위기는 다른 여러 위기들의 근간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불안과 함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p. 91)다. 내가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테러와 전쟁,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전염병과 고통, 마약 중독, 깡패와 폭력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기차를 놓칠까 봐 불안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혹은 '신 에 대한 두려움'은 모호하다는 다소 엉뚱한 대답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불안한 사건의 배경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니까 불안한 일들 뒤에 있는, 그 안에 내재된 원초적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육체적인 일차적 실존성에 위협을 느낀다.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원초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것, 압도적인 것, 탈출구가 없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불안의 대상이다(p. 92). 임종 준비란 죽어가는 사람의 내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이후에 그가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과정과 인지 감각의 변화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극받았던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제공했던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계속 머(p. 211)무르라고 말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를 떠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우리는 그들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의료 조치로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자아 안에 내재된, 곧 있을 결말을 미리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솔직한 대면을 통해 우리는 고통완화 단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심스레 꺼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임종 환자들 가운데 가끔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 번 더 '기운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요양원이나 그와 비슷한 시설로 보내라는 의료보험공단의 압박이 있음을 조심히 일러주어야 한다. 이를 전해들은 환자의 의료기에 갑자기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난다. 잠시 실망과 우울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죽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와 직면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 안에 있던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기 전에 숨을 거두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임종 준비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인도하는 도움의 손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제적인 한계가 종(p. 212)종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p. 213).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 전환이 우리에게 보여준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이다. 고통 완화 의사, 간호사, 간병인, 상담사 등의 의료 종사자들과 가족은 임종 환자들이 어느 순간에 그리고 언제든지 내적으로 다른 공간에 가 있다는 것을 귀담아듣는 게 좋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현세도 내세도 아닌 중립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곳에, 자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통과 실신에서 벗어난 다른 공간에 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 다. 죽음은 고통으로 삶을 채울 수도 있고 삶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으며 삶 전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할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거나 타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인 간은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고,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해, 죽음을 앞둔 현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죽음은 한마디로 강렬하고 극단적인 경험이다. 흔히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오산이다. 여기서 내가 자아 기능과 감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죽음을 설명했다면 나 역(p. 218)시 죽음을 왜곡했을 것이다. 가령 임종 환자를 병문안하러 온 한 방문객이 그의 고통이 안타까워 그 고통을 대신 젊어 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방문객은 극심한 고통에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면서, 숨쉬기도 힘겨워하면서 그를 대신해 '고생할 것' 같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실제로 고통에 시달리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로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은 상실된다. 종종 나는 이를 수면, 혼수상태 또는 마취와 비교해본다. 임종 환자들의 고통은 지속적이거나 우발적이지 않고 오히려 삶과의 이별 과정이나 변화를 향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의식을 갖고서 자기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는지, 결과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죽음을 수용하는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고통, 불안과는 무관하게 죽음의 상태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이 "괜찮아" "....좋아”라고 말한다(p. 219). 죽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 시공간을 넘어 - 좇고 있는 것은 궁극적, 신적인 완성임을 예감 할 수 있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마지막 비전과 반응을 살펴보면 나는 '최후의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한 일정한 앎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시간, 시간성과 현재, 현재성의 차원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동시성과 무시간성(영원)이라는 현존재 양식을 예고할 것이다. • 공간, 공간성의 차원이 변할 것이다: 많은 것들이 공간적인 무경계를 암시할 것이다. • 신체, 구체화, 경계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느낌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경계 없는 존재와 관계된 존재를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나는 존재자, 즉 실체와 에너지로서 이해되는 존재자라고 생각한다. • 중력에 대한 느낌이 변할 것이다: 신체적인 무게감은 와해되는 것처럼 보인다(p. 241). • 강렬함, 감성도 변할 것이다: 많은 것이 강도를 높인다는 걸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감각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적인 것이 배제되거나 무시되지는 않는다. • 좋거나 나쁘다는 식의 평가도, 방식도 사라질 것이다: 많은 것들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부분으로 쪼개지고 분열되었던 것들이 전체로 통합되는 것을 지시한다. • 의식: 무의식과 더불어 자아와 연결된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될 것이다.' • 기운, 분위기가 바뀔 것이다: 떠밀림에서 완성으로, 찾기와 기다림에서 발견으로, 대결에서 평온과 목표로, 불안에서 신뢰로 말이다. • 공동체: 죽어가는 사람들의 많은 표상들과 유대교, 기독교, 타 종교들에 산재한 텍스트는 분열이 집회, 공동(p. 242)체, 축제라는 새로운 질적인 특성으로 전환될 거라는 점을 암시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p.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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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0】 경험하지 못할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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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9】 세상은 요지경
-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들이다. 재미로 한 번 읽을 만한데 현재 이 책은 품절되었다.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저지르다 고대 그리스에는 인신공양 제도가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남녀 두 명의 부랑자를 1년간 나랏돈으로 먹여 살렸다. 곡식을 수확하기 전 축제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들을 무화과 나뭇가지 로 때리며 마을 구석구석으로 끌고 돌아다녔다. 그들의 역할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떠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에게는 마을 변두리로 끌려가 절벽 위에서 떨어뜨리 거나 화형을 당하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죽으면 사람들은 그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제물의 몸이 무로 돌아감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의 죄도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의 식민지 마살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_-옮긴이)에서도 마을에 역병이 돌 때마다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제물이 되는 사람은 나랏돈으로 부양한 부랑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제물에게 화관을 씌우고 축제 의상을 입혀서 마을 여기저기(p. 32)로 끌고 다닌다. 길에서 제물을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퍼부어 자기에게 닥칠 위험과 재앙을 모조리 떠넘긴다. 그렇게 마을을 다 돈 후에는 제물을 인정사정없이 절벽 위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죄가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무거워지지 않았을까?(p. 33). 사람 가죽 벗기기 사람 가죽 벗기기, 즉 '생피박리형'은 살아 있는 죄수의 피부를 벗기는 형벌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면 그의 온몸은 피가 뿜어 나오는 상처로 뒤덮인 것과 같다. 햇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겉으로 드러난 혈관은 연신 바들바들 떨린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는가?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자기 직무를 태만히 한 판사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후임자의 의자를 만들었다. 캄비세스Cambyses 왕이 지배하던 시대, 어느 신임 판사는 법정에서 아버지의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기도 했다. 아버지인 시삼네스 Sisamnes 판사가 불공정한 판결을 내려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이 벗겨졌기 때문이다(p. 34). 그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인간의 피부를 가늘게, 둥글게, 넓적하게 등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벗겨냈다. 때로는 머리에서 몸 쪽을 향해 5~10센터 미터 폭의 가느다란 띠 모양으로 가죽을 벗기기도 했는데, 훗날 순교자 성 바르톨로메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 옮긴이) 도 이 방법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이 벗겨졌다고 한다(p. 35). 끔찍한 화형 이야기 유럽에 마녀 사냥의 광풍이 일었을 때 자주 사용된 처형법이 바로 화형이었다. 사실 화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운이 나쁜 사람은 잔 다르크처럼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에 처해졌지만, 운이 좋은 사람은 사형집행인에 의해 목이 졸려 목숨이 끊어진 다음에 화형에 처해졌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을 당하는 것은 죽고 나서 화형을 당하는 것과 당연히 고통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의 경우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문드러져도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일반적으로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30분 이상 미칠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에 처해졌을까? 그것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거나 일단 인정했다 나중에 말을 뒤집는 경우였다. 화형을 하는 도중에 사형수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면 얼굴(p. 53)에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게 하거나, 아니면 불에 물을 뿌려 불기운을 약하게 하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피는 잔혹한 방법도 취해졌다. 그것은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들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었을까? 화형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형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작이나 지푸라기를 높이 쌓아서 불태우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형수가 빠른 시간에 질식사하기 때문에 비교적 온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장작을 쌓은 후 사형수를 기둥 높이 묶어 화형에 처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것은 아래부터 시작해서 불길이 천천히 위쪽으로 솟구치는 만큼, 사형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p. 55). 마녀 사냥이 성행했던 진짜 이유 일단 마녀로 지목되면 빠져나갈 구멍은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화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에 드는 비용, 감옥에서의 식사비, 몸을 묶는 밧줄비, 화형에 필요한 장작비, 재판관과 관리와 사형집행인의 수당 일체를 본인이 지불해야 했다. 때문에 정부의 관리는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체포함과 동시에 그녀의 집을 수색해서 모든 것을 압수했다. 동산과 부동산을 몰수함은 물론이고, 그녀가 남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 상대를 찾아내 원금을 회수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형당한 마녀를 대신해서 정부의 관리가 빛을 받으러 다닌 것이다. 사실 당시 마녀 사냥이 횡행한 원인 중 하나는 이런 재산몰수 때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마녀의 재산몰수를 금지했던 1630년에서 1631 년까지 마녀 적발이 급격히 감소한 것이 그 증거다(p. 80). 반베르크에서만 해도 1629년까지는 매년 100명 정도의 마녀가 처형 되었는데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p. 81). 장미 가시에 찔려 죽다 20세기의 천재 시인인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유달리 장미를 좋아했는데, 그가 만년에 살았다는 론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오래된 성의 정원에는 지금도 수많은 종류의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차가운 돌로 지어진 오래된 성에서 수도승처럼 혼자 살며 시를 지었던 릴케. 그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정원까지 배웅하다 나무 뒤에 피어 있는 장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장미 가시에 손가락(p. 159)이 찔리는 바람에 패혈증으로 고생하다 그해 12월 29일에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실제 사인이 백혈병임에도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릴케라는 시인의 섬세한 이미지와 함께 생전에 그가 기이할 정도로 장미를 좋아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p. 160). 허니문의 기원 '허니문'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떠나는 신혼여행을 이르는 다른 표현이다. 허니문은 결혼식을 마친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의식으로, 원래는 한 달 동안 매일 밤 '봉밀주'를 마시는 관습이었다. 여기에서 허니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허니문에는 재미있는 기원이 있다. 오랜 옛날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가 힘으로 여자의 부모로부터 여자를 훔쳐내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때 여자를 되찾으려 쫓아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두 사람이 숨어 지내던 관습이 오늘날 두 사람만의 허니문으로 변한 것이다(p. 182). 명작동화의 작가는 로리콘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았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책을 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가 동료이자 고전학자인 리델의 딸 앨리스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쓴 작품이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어린 소녀에게 집착했다. 그에게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었는데 항상 어린 소녀의 사진만 찍었다. 지금도 그가 찍은 수많은 소녀들의 사진이 남아 있는 데, 그 안에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는 소녀, 어른스럽게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 등 기묘한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찬 소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p. 239). 루이스 캐럴은 전차에서 만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아무도 몰래 연애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어쨌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진정 '로리콘'이었다. 심한 경우 소녀유괴나 소녀감금에까지 이르게 되는 롤리타 콤플렉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현실이 아닌 동화 속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을 정복했다(p. 241). 우발적 연애를 즐긴 사르트르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첫 번째 철학교수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러자 약혼자의 부모는 재빨리 그와의 결혼을 파기해버렸다. 그 후 그는 한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듬해인 1929년에 치른 두 번째 시험에서 놀랍게 도 1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그때 2등으로 합격한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그녀는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이윽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지독한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되었다. 하루는 사르트르가 이렇게 말했다. "연애에는 필연적 연애와 우발적 연애가 있다. 양쪽 모두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면서 보부아르에게 '2년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이성과 우발적 연애를 즐겨도 좋지만 서로에게 비밀은 없어야 한다는(p. 256) 것이 조건이었다. 순진했던 보부아르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하지만 계약 결혼 후 우발적 연애를 즐긴 사람은 사르트르뿐이었다. 대신 보부아르는 항상 질투에 몸을 떨어야 했다.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새 애인을 만들어서 보부아르를 고뇌에 빠트렸으며, 40세가 넘어서도 그의 우발적 연애는 끝나지 않았다. 여배우, 유명인의 아내, 제자 등등... 그는 여자들을 교묘하게 '관리'했다. 연애가 끝난 후에도 헤어지지 않고 '보관'하면서 그녀들에게 아낌없이 '재투자'한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힘과 재능, 지식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상대가 여배우라면 희곡을 써주고, 타이피스트라면 자기 소설의 타이핑을 맡겼다. 덕분에 연인 관계가 끊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자들은 그를 '좋은 친구'로 여겼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 조차 사르트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사강이 무려 20페이지에 이르는 정열적인 러브레터를 사르트르에게 보내 보부아르를 질투에 불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p. 258). 치열한 음식물 전쟁 파푸아뉴기니의 카라우나 족은 무기가 아니라 음식을 이용해서 적과 싸운다. 어느 쪽이 상대에게 더 많은 음식을 보낼 수 있는지 경쟁하는 것이다. 카라우나 족 남자들은 상대로부터 모욕을 당한 경우 -가령 아내를 빼앗겼다든지-그 즉시 복수에 착수한다. 상대가 갚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보내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소에 밭에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수확해 보관한다. 물론 태풍이나 기근 등의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부족과 적대관계가 되었을 때 무기로 삼기 위해서다. 카라우나 족의 유력자가 다른 부족과 적대관계가 되었을 때, 그는 일단 부하에게 감자를 주어 동이 트기 전에 적의 진영으로 보낸다(p. 294). 그것을 받아든 적은 도전에 응한다는 표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와 사자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우리가 이것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우리에게 돼지가 없는 줄 아느냐? 우리가 농사짓는 방법을 모를 줄 아느냐? 어디 두고 보자. 누가 더 맛있는 감자를 가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이렇게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감자를 보낸 후 카라우나 족은 부족의 창고를 전부 뒤지고 밭을 파내어 찾아낸 음식을 한곳에 모은다. 다음 날 적의 사자에게 내줄 감자와 고구마, 바나나, 돼지 등의 음식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 적의 사자가 모아둔 음식을 모두 가져간다. 이제는 적들이 음식을 모을 차례다. 하루가 지나 아침이 되면 이번에는 카라우나 족의 사자가 적의 마을에 가서 적이 모아놓은 음식을 가져 온다. 결정적인 순간이다. 만일 적에게서 가져온 음식이 자신들이 보낸 음식 보다 많은 경우, 다시 그보다 많은 음식을 끌어 모아야 한다. 이렇게 전쟁은 계속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든 지든 산더미만 한 음식이 남게 되니까 양쪽 모두 큰 손해는 아니다...'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얄팍한 우리 문명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들이 느끼는 패배에 대한 수치나 승리에 대한 기쁨은 물질로 채울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일 테니까(p. 295). 에펠탑보다 인기 있었던 관광코스는? 19세기 에펠탑 관광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이 바로 단두대 처형 관광이었다. 영국 여행사 토머스 쿡에서는 단두대 처형을 구경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대형마차 7대를 준비하는 등 관광객 모집에 열을 올렸다. 당시 단두대 처형은 대개 아침 일찍 이루어졌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전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마차 7대에 마련된 40석의 자리는 언제나 모두 팔려나갔다. 또한 처형장이 보이는 창문과 테라스, 나무 위에는 꼭두새벽부터 나온 구경꾼이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처형장이 잘 보이는 방은 늘 엄청난 가격으로 몇 달 전에 예약이 끝나 있었다. 처형 당일 단두대 주위에는 피에로나 장사꾼 그리고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천박한 농담을 주고받았다(p. 314). 처형될 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던 죄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 세상에 인간보다 더 잔인한 동물은 없으리라(p. 315). 하늘나라로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1982년 4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회사의 광고가 실렸다. 저세상에 있는 고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 전달자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었다. 고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그 환자에게 전할 내용을 알려주면 그가 메시지를 머릿속에 넣고 저세상으로 가져간다. 요금은 보통편은 100단어에 60달러, 특급편은 50단어에 100달러였고, 과격한 내용이나 지옥으로 가는 메시지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 중에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존 F. 케네디나 마릴린 먼로, 존 레논에게 보내는 것도 있었다(p.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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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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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9】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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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8】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 각 분야의 전문가는 제 역할을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사실을 표현할 때가 있다. 이를 법의학으로 해석할 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을 때 보이는 것 최근에 이르러서야 의사와 과학자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들이 털어놓은 '죽음의 이미지 체험'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특이한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임사체험 Near Death Experienc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임사체험자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현 상이 있다. 그 하나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이탈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이를 '체외이탈 Out of Body Experience' 이라고 한다. 체외이탈 현상과 더불어 빛이 온몸을 감싸기도 하며, 넓은 꽃밭을 거닐기도 하고, 죽은 가족들과 상봉하기도 한다(p. 17). 체외이탈 연구는 19세기 말 스위스의 지질학자 알베르트 하임이 시작했다. 그는 알프스를 등반하다가 조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사경을 헤매던 중 체외이탈을 경험했다. 그 후 하임은 비슷한 경험을 한 등산가와 군인 등의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미국에서는 체외이탈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신과 의사 레이먼드 무디 2세는 당시 사망 판정을 받은 후 살아난 사람들의 체험을 수집해 《사후의 세계》(1975)라는 책을 펴냈다. 그 후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도 체외이탈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사후 생》(1991)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렇게 보고된 사례가 지금까지 수십만 건에 달한다. 그들의 체험이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혼의 체외이탈 →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터널 체험 → 빛과의 만남 → 저승 도착 → 지나온 생에 대한 반성적 회고 → 장벽과의 만남 → 육체로의 회귀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촉감은 있지만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까지 보고된 체외이탈이나 임사체험 경험에 대해서는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적인 체험이건 아니면 단지 뇌에서 느낀(p. 18) 환각이나 환상이건 간에 그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다. 따라서 체외이탈과 임사체험처럼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 체험되는 현상을 묶어 '임사현상 Near Death Phenomena' 으로 표현하기로 한다(p. 19). 한편 임사 체험자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고백이 있다. "저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워 이승과 비교할 수도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저세상을 보고 난 후에는 이승에서의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예는 자살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외이탈을 체험한 뒤 아주 캄캄한 곳에 있었으며,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아 강한 고립감이 들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빛의 존재를 만난 이는 한 명도 없었다(p. 21). 이 글을 쓰면서 죽음의 이미지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 관심이 갔다. 임사현상 체험자들의 진술에(p. 22) 의하면 일단 죽음의 과정에 들어서게 되는 순간 고통 없이 편안하며,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는 점에 주목 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는 인생의 마지막 여행으로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p. 23). 정신분석 전문가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작품에서 표현한 뇌전증과 살인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심리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웠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는 간질과 살인의 상관관계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작품 속에서 뇌전증 발작과 환희, 격분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것은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실제로 측두엽 뇌전증 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측두엽 뇌전증이란 무엇일까? 뇌전증의 일종인 측두엽 뇌전증은 의식의 상실이나 경련을 동반하지 않는다. 환자는 발작이 일어나면 청각, 시각, 후각 및 촉각에 이상을 느끼며 잠시 동안 망연자실 상태가 되거나 입을 씰룩거리며 움직이는 증상이 나타난다. 또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특색 있는 증상을 보이는 게슈빈트증후군Geschwind syndrome 이라는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종교나 도덕성에 과잉으로 집착하며, 성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 중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글을 쓰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가는 하이퍼그라피Hypergraphia라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p. 37). 고대 그리스의 신상들과 조각 작품은 모두 나체이다. 나체에는 평등사상인 '너나 나나 벗으면 똑같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는 것으로, 거짓의 옷을 벗어버린 인간의 진실함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 거짓이 없음을 의미한다. 클림트는 나체화를 그리는 확고한 신념에 의한 독창성과 예술적 특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들리는 잡음을 무시하고 극복할 수 있었다. 빈대학의 학부 회화를 둘러싼 잡음, 특히 나체의 여인에 대한 시비로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 하라는 제의는 단호하고 보기 좋게 거절 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았던 제작비(p. 69)는 전액 환불하고, '학부 회화' 최종판은 자신이 소유하였다. 만일 대학당국이 예술가는 장인과는 달리 어떤 구속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에서 영원한 것을 창조한다는 것을 참작하였다면, 작품에 대한 시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클림트는 여성성의 무한한 힘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나체의 진실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으로 그림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고고했던 대학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야기된 사건이었다(p. 70). 채플린 친자확인 사건 한평생 웃음을 전하며 살아온 20세기 최고의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 1889~1977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과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에서 우리는 슬픔을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은 남을 웃기고 돌아서서 혼자 울던 사람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영화인 채플린의 사생활은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다. 특히나 여자관계가 복잡했는데, 어린 여자들과의 스캔들로 '병아리 잡는 매Chicken Hawk'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채플린이 배우 지망생 조안 배리Joan Barry 1920~1996를 알게 된 것은 1941년이었다. 그는 배리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보고 연극학교에 입학 시켰으며, 그녀를 배우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1942년 이상행동을 일삼으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보이는 배리와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후 배리가 임신을 해 1943년 10월에 출산을 했다는 점이다. 배리는 갓 태어난 아기가 채플린의 아이라고 말했고, 채플린은 이를 부인해 결국 소송으로 번지게 되었다. 수태일수와 배란일수를 계산한 결과, 배리는 1942년 12월 23일에서 24일 사이에 임신했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보고가 나왔다. 따라서 문제(p. 133)는 임신 가능한 날짜인 12월 23일을 전후해 3일이라는 기간 동안 두사람이 동침한 사실이 있는가의 여부로 집중되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는 이 사실에 대해 채플린은 없다고 했고, 배리는 있다고 주장했다. 배리의 진술에 의하면 1942년 2월까지 채플린과 동거한 것이 사실이며, 두 사람이 헤어진 후 채플린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채플린은 더 이상 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리는 채플린에게 집착했다. 급기야 1942년 12월 23일 밤 권총을 숨기고 채플린을 찾아갔는데, 그가 만나주지 않자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자고 있던 채플린은 깜짝 놀랐고, 총을 들고 있는 배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날 밤 두 사람은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이상은 배 리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이를 적극 부인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이의 친자확인 혈형검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채플린은 0형이었고, 배리는 A형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B형이었다. 0형의 아버지와 A형의 어머니 사이에서는 B형의 아이가 출생할 수 없다. 결국 ABO식 혈형검사로 채플린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검증은 재판의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배심원들은 배리의 손을 들어주었고, 재판을 담당한 킨케트 판사는 채플린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양육비로 주급 75달러와 변호사료 5,000달러 지급을 명하였다(1945년 5월 2일의 판결)(p. 134). 이렇게 확실한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고 비논리적 판결을 내린 이면에는 배리의 법정 증언이 큰 역할을 했다. 배리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채플린을 살해할 생각으로 권총까지 준비해 찾아갔다. 하지만 놀라고 당황한 채플린이 거짓으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결과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고 배심원들에게 눈물로 호소한 것이다. 배리는 또한 재판 결과에 따라 아이와 함께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쳤다. 그녀의 연기에 사로잡힌 배심원들은 그녀를 동정하여 채플린 패소라는 판결 을 내렸다. 이렇듯 배심원제 재판은 법 이외의 여러 요소에 의해 좌지우지될 우려가 다분히 있다. 지금도 이러한 판례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최첨단 기술의 특허 침해를 놓고 미국의 배심원제 재판과 한국 법원의 판결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는 것도 이러한 사례로 볼 수 있다(p. 135). 두 화가의 다르게 표현된 그림으로 제롬이 그린 밧세바는 '요부'에 해당되며, 팡탱 라투르가 그린 밧세바는 '숙명의 여인'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 만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밧세바가 왜 하필 그날 저녁에 목욕을 했느냐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달거리가 끝나면 몸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하여 정결례(레 12:2)로 몸을 씻어야 했다. 사실 밧세바는 월경을 막 마친 후였고, 율법대로 부정함을 씻기 위해 정결례로서 목욕을 한 것이었다.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하거나, 왕을 유혹하기 위한 목욕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기록을 보더라도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p. 143). 한편, 단 한 번의 육체적 관계로 임신이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한 논란은 강간 사건에서 자주 등장한다. 동물들의 배란 양식은 여러 형태인데, 야생 토끼나 낙타는 수컷이 있어야만, 즉 수컷이 교미 동작을 취해야만 배란이 되고 평소에는 배란이 되지 않는다. 원숭이처럼 공포를 느껴야 배란이 되는 동물도 있다. 그래서 수 원숭이는 교미 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암컷이 안고 있는 새끼를 뺏어서 던지고 때리기까지 한다. 새끼 원승이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암컷은 공포를 느끼게 되면서 배란이 이루어지고, 발정이 되며, 교미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공포 배란 현상이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강간이나 간음같이 공포나 불안감이 조성되는 분위기에서 배란이 되는 여성이 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성교로 임신이 되었다는 예는 강간이 나 간음 사건에서 드문 현상은 아니다(p. 152). 앞에서 월경이 막 끝나고 정결례를 하는 밧세바에 대한 기록을 예로 들어 그녀는 요부가 아니며, 다윗 왕을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술수를 부린 것도 아니라고 얘기하였다. 이번에는 밧세바의 임신에 대해 여러 정황을 기반으로 추측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밧세바가 다윗 왕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무언가 공포나 불안을 느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공포 배란으로 임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밧세바를 요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다(p. 154). 수많은 걸작을 남긴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 1840~1917은 작품 만큼이나 여성 편력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공분을 산 것은 젊고 유망한 여류 조각가의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버림으로써 정신이상이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조각가 지망생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파리의 에콕 데 보자르라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당시 최고의 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학교 교장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로명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때 카미유의(p. 173)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로댕은 마흔두 살이었다. 처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고, 로댕은 그녀에게 작품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제안 했다. 로댕의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했던 카미유는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였다. 로댕의 많은 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인 것은 역시 카미유이었다. 로댕 역시 그녀의 실력을 신뢰하여서 작품의 섬세한 마무리 단계를 그녀에게 맡기곤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여 빛나는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고, 이렇게 작품의 작업을 함께해 나가면서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적으로 혼인관계는 아니었지만, 로댕은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로즈 역시 열여덟 살 때 로댕의 모델이 되었는데, 그 후 1년 뒤에 로댕의 아이를 낳게 된다. 로댕이 로즈를 모델로 택했던 것은 농촌 출신이었던 그녀의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 때문이었는데, 바로 로댕이 원했던 모델이었다. 또 그녀는 매우 순종적이었다. 그래서 로댕은 그녀를 말할 때 "로즈는 동물적이야"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녀와 일생을 같 이 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물적이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로댕은 자신의 화실에 불러들인 모델을 작업만 마치고 그대로 보낸 적이 없었다. 모델들은 한결같이 그의 뜨거운 입김을 쏘이고 나서야 화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여성 편력은 매우 심해 관계를 맺은 여인은 알려진 것만도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로즈는 그의 난잡한 여자관(p. 174)계에 대해 단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어떨 때는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 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로댕은 일생을 그녀와 함께하였고, 죽기 16일 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로댕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포즈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다는 구실로 모델들의 몸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이에 에밀 졸라는 "그는 모델들의 아름다운 나신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을 눈으로 애무하고, 때로는 손으로 애무하면서 키스하고 어루만졌으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녀들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낮에는 그녀들을 그렸고, 밤에는 그녀들을 품에 안았다. 그의 여자 누드 작품의 중심축은 그와 모델들 간의 섹스였던 것이다." 로댕이 카미유를 유혹할 때도 이러했다. 카미유는 로댕과 동거중인 로즈를 신경 쓰며 이야기하면 로댕은 "너하고 정식으로 결혼할 거야" 라는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로댕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모델들과의 난잡한 관계를 이어갔다. 로댕은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여인을 농락했고, 카미유도 로댕에게는 그런 여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자 1890년 결국 카미유는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였다(p. 175). 뱀의 독이 사람 몸에 들어오면 어떤 변화와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을(p. 214)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죽음에 뱀독을 이용했다는 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나토 의과대학의 비오 그란 마레 박사는 독사설이나 핀에 의한 독액 설을 부정하였다. 또 여왕의 명에 의해 방문을 꼭 잠갔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클레오파트라는 탄이 연소될 때 발생되는 유독가스의 효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장례를 구실로 탄과 이를 태울 도구를 쉽게 방에 들여올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사망 상황을 묘사한 글에서 여왕은 침대 위에, 한 몸종은 발밑에 그리고 또 다른 몸종(p. 215)은 방문을 향해 쓰러져 죽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일산화탄소 중독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의 장면은 프랑스의 화가 릭싱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1874)이라는 작품에 마레 박사의 설명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과 마레 박사의 의견은 법의학적으로도 수긍이 간다. 여러 명의 사람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 그대로 누워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식중에 살기 위해 문 쪽을 향해 기어가다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망자가 여러 방향의 체위를 취하고 죽는 것이 집단으로 연탄가스에 중독사했을 때 보이는 특이한 현상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상황이 화가 릭싱의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와 두 몸종의 동시 죽음을 보았을 때 일산화탄소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생존 시 여왕은 향료를 매일같이 사용하여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향기가 풍기는 향의 애호가로, 평생을 향기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최후에 이르러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무취의 일산화탄소를 맡으며 그 속으로 사라졌다(p. 217).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대한 의문 차이콥스키의 사인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그가 콜레라로 사망하였다고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즉 차이콥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이 된 콜레라에 감염된 것은 11월 1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그대로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1세기 동안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자살설이 제기되었다. 자살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이콥스키가 정성을 다하여 작곡했다고 자랑하는 〈비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그리 시원(p. 221)치 않은 것에 참담함을 느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인에 대해 일종의 강요된 자살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차이콥스키 박물관의 기록 보관소에 근무하던 알렉산드라 오르로와라는 여직원의 증언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녀는 1940년 차이콥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준비하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발견 하였다. 주치의가 차이콥스키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세밀하였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 의심되는 점은 콜레라는 전염병인데 기록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격리되지도 않았고 면회도 자유로웠다. 그래서 오르로와 여사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이에 대해 알아봤는 데, 차이콥스키는 그 당시 권세가였던 스텐보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공작은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고, 황제는 당시 검찰 부총장이던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야코비에게 그의 처벌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 동성애는 신에 대한 모독이며, 최대의 파렴치범으로 여겨져 극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다. 야코비 부총장은 차이콥스키와는 법률학교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동기생(대법관, 판사, 변호사 등)들이 모여 상의한 끝에 불명예스러운 사형이나 시베리아 유형보다는 명예재판을 열어 그가 수용한다면 비밀리에 사약을 내리기로 한다.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제안에 응했고, 순순히 사약을 받았다(p. 222).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입원 당시의 차트를 보면 콜레라의 중요한 증상 중 하나인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필자는 오르로와 여사의 수기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 조문객들이 줄을 지었는데, 조문객들은 그의 손이나 이마에 입맞춤하였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이를 보면 그의 사망이 콜레라가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재판 후에 사약설이 맞는데 과연 독극물 중에서 복용 하면 쌀뜨물 같은 설사를 하는 증상을 보이는 독물이 있는지이다. 법의학적 기록에는 극량에 달하는 비소를 복용하는 경우 콜레라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가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발표하기에 앞서 상당한 검토와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콜레라로 발표해도 될 만한 증거를 구비한 후 사약을 내린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p. 223). 우리나라에도 유디트와 같이 적장을 술로 유인해 살해한 의녀로는 주논개가 있다. 논개에 대 한 기록은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 전해지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있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은 논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여식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읜 채 어머니와 함께 숙부에게 의탁하게 된다. 숙부는 이웃 마을의 김동헌이라는 사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버린다. 이를 알게 된 논개 모녀는 외가로 피신했지만, 잡혀 관아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감 최경회에 의해 무죄 방면된다.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고마운 처사에 감동한 논개는 자원해서 최 현감의 시중을 들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다. 이에 최 현감이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최 연감은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1593년에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고, 진주성에서(p. 253)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공세에 밀려 불리해졌고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함으로써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고 만다. 논개는 원수를 갚기 위해 적장을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기회만 엿보던 중 왜군이 진주성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연다는 소문에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논개는 적의 선봉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지목하여 술을 권하고 교태를 부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동료 기생들에게 반지와 가락지를 달라고 하여 열 손가락에 모두 끼고는 촉석루 아래로 내려가 물위에 솟아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게야무라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바위로 건너가 논개를 끌어안았다. 논개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적장의 몸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왜병들은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속으로 들어간 게야무라와 논개는 영영 떠오르지 못하고, 세차게 흐르는 남강의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불렀으며, 1956년에는 '논개사당'을 건립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을 열고 있다. 두 사람의 의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굳은 결심으로 적장을 유(p. 254)인하여 살해하였다. 그러나 여인으로써 과연 가능하겠는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한다. 아무리 술에 만취되었다 할지라도 적장의 목이 그렇게 쉽게 날아갈 수 있을까? 틴토레토와 젠틸레스키의 그림처럼 유디트 혼자서가 아니라 하녀가 도왔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 논개의 경우를 보면 가녀린 여인의 팔로 적장의 몸을 꽉 껴안았다고 해도, 과연 힘이 센 남자가 뿌리칠 수 없을까? 이를 예측한 논개는 동료 기생들의 가락지와 반지를 받아 열 손가락에 모두 끼었다. 일단 손깎지를 끼면 자물쇠처럼 물리게 하여 풀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법의학적인 조언을 하면 사람이 죽을 때 극도로 긴장하고, 어떤 근육에 힘을 강하게 주고 죽으면 그 근육에 죽음과 동시에 강직이 일어난다. 이것을 즉시성 시강이라고 한다. 논개의 경우에도 즉시성 시강이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힘이 센 남자라 할지라도 꼼짝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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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8】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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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0】 성품과 문제
- 성품과 문제 사람마다 성품이 다릅니다. 어떤 성품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타고난 성품과 기질이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품이 나쁘고 과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온유와 양선은 좋은 성품입니다. 성품이 부드러우면 관계가 잘 되고 갈등이 적어집니다. 성품은 타고나면서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해 성품이 다듬어지게 됩니다. 성품의 변화가 최고의 기적입니다. 성령 받고 은혜받아야 성품이 변화됩니다. 모세는 성품과 기질이 고집스럽고 강했는데 40년 광야 연단 받은 후 성품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해결합니다. 사도행전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 착한 성품으로 격려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성품이 선해야 관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성품이 악하고, 강하고, 교만한 자는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성품이 악하고, 과격하고, 급하면 함부로 말하고 폭언하게 되어 공동체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한 번 쏟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절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언어는 성품과 인격의 열매입니다. 폭언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문제가 생기고 후회하게 됩니다. 성품이 온유한 자는 인내하고 누구와도 다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부딪치면 문제가 생기고 관계가 깨지며 후회하게 됩니다. 성품이 삶의 능력입니다. 성품이 좋은 자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덮어주고 해결합니다. 성품은 인격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역해야 합니다. 성품이 사납고 악하여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리더의 성품이 중요합니다. 성품이 선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인데 닮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삭은 온유한 성품으로 다투지 않고 양보함으로 존경받게 됐습니다. 외유내강의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됐습니다. 나쁜 기질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성품이 최고의 성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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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1】 88 올림픽과 외국인 노동자 선교
- 88 올림픽과 외국인 노동자 선교 1988년은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함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국민의 응원의 함성과 성공적 개최는 국민의 사기를 높여 주었고 세계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Korean dream을 꿈꾸며 몰려 오기 시작했다. 당시의 한국의 경제 상황은 좋은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로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경제적인 부를 얻고자 하는 세계인들의 수요가 맞물려서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다수의 외국인들 중에 중국동포들이 많았다. 당시 서울역 근처는 한약을 판매하기 위해서 모여든 중국인들이 가득 메웠다. 그 이후 중국인들만 아니라 동남아의 여러 나라, 남미 등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몰려든 외국인들에게 많은 사회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돕기 시작했다. 이 때에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회를 찾은 외국인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교회가 돌보기 시작했다. 의료진료, 한글공부, 상담, 이미용 봉사 등 다양한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은 관광 비자를 가지고 들어와서 일하는 불법자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일부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불법자들을 보호하면서 돕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와야 한다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고 헌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레위기 19:33-34 “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이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교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본인도 선교사로 헌신하고 훈련을 받는 중에 부목사로 부천의 천산중앙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이 때에 교회 근처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일에 교회를 찾아옴으로서 이들과 만나게 되어서 외국인노동자 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국동포가 약을 팔기 위해서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필리핀 노동자들. 그 후에는 몽골인 노동자들, 남미의 페루인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천산중앙교회는 이들을 가족처럼 환영하고 모든 성도들이 이들을 맞이했다. 교회의 중강당을 외국인 노동자의 예배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어권별로 칸을 막아서 몽골어 권, 영어권. 스페인어 권으로 구분하고 동시 통역사들을 세우고 11시 예배에 한국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는 언어권별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며 성도들이 한 가족처럼 대하니까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 사랑이 넘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다. “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행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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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1】 88 올림픽과 외국인 노동자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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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7】 글을 쓰자...그것도 늘 글을 쓰자
-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 나는 좋은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좋은 글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몸을 글쓰는 몸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매일 조금이라도 쓰자! 프롤로그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는 글쓰기 이 책을 기획하면서 처음 떠올린 제목은 '무적의 글쓰기'였습니다. 보통 '무적'은 '매우 강해 겨를 만한 적수가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더 이상 대적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쓰죠.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만나는 적마다 다 무찌르니까요. 요즘 말로 '원톱'이 되는 글쓰기랄까요. 저는 다른 뜻으로 새겨보았습니다. 한자를 가만히 쳐다보면 다르게 읽힙니다. '적이 없다' 적을 만들지 않는 글. 있던 적도 친구로 만드는 글. 어떤가요? 당신에게도 적이 있을 겁니다('척진 사람' 정도로 합시다). 말을 섞는 게 고통스럽고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죠. 되도록 한자리에 앉지 않으려 합니다. 살면서 그런 사람이 점점 늘면 힘듭니다. 내색은 안 하지만 글을 쓰는 많은 사람이 독자를 적으로 생각합니다. 설득하거나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요. 어리석으면 가르치려 들고, 강하면 논파해서 기어코 이겨먹으려 하죠. 글로(p. 4) 상대를 제압하고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공존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기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말을 눌러 천천히 글로 옮기는 것입니다. 쓰기란 상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내 쪽으로 당기는 일입니다. '당신이 틀렸어!'라고 말을 할 때도 종국에는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하자'고 하는 겁니다.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눈감자는 말이 아닙니다. 친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죠.. 성취하기 불가능하지만 추구해야 할 자세입니다. 무적이란 말엔 무적(無籍)이란 한자어도 있습니다. 소속이 없다, 달리 말하면 '고향이 없다' '근거가 없다'입니다. 글 쓰기는 한 편의 글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고체로 굳어버리지 않고 움직임 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잠시 움켜쥐었다가 이내 놓아주는 거죠. 글을 하나 썼다면 잠깐 안도했다가 이내 그 글에서 떠나야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글쓰기. 고향이 없으니 계속 떠나는 거죠. 쓰고, 떠나고, 다시 쓰고, 다시 떠나고. 같은 글 감으로 글을 써도 쓸 때마다 달라집니다.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자리에 눌러앉지 않고, 표표히 떠 나야 합니다. 무적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복을 통해 '쓰는 몸'을 만들어(p. 5)야 합니다. 반복은 자신의 몸속에 이미 들어와 있었지만 무심히 흘려보냈던 세계의 질서와 타인의 흔적을 찾아내고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낼 수 있는 감각을 갖춘 몸을 만들어 줍니다. 그 몸은 자신을 '쓰는 몸'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꾸준히 앉아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기 위해 막막함 속을 헤엄치면서 끝내 문장 하나를 써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새롭게 해석한 문장을 바느질하듯이 한 땀씩 이어갑니다. 무적의 글쓰기는 자신을 '쓰는 몸'으로 탈바꿈하여 삶을 이어가 보려는 사람의 글쓰기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쓰는 몸으로 살기' 로 바꾸었습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쓰는 몸은 끊임없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닌, 몸으로 쓰는 글 쓰기를 추구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살이 보이고 좌충우돌하는 삶이 녹아 있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p. 6). 좋은 글은 어떤 글인가 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독자(p. 16)의 머리끄덩이를 낚아채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 공명의 성격이나 진폭에 따라 공감을 얻기도 하고 마음에 격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결정적인 각성의 계기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건 오롯이 독자의 몫입니다. 글쓴이는 오직 겸손한 자세로 독자와 공명하려고 시도할 뿐입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좋은 글은 '그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백과사전이나 요리법처럼 어떤 정보를 알려주는 글을 보고 글쓴이가 궁금하지는 않잖아요. 촘촘한 논리나 멋진 표현이 아닌, 글 속에 글쓴이의 목소리와 체온이 담긴 글을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지죠. 살아오면서 한 가지 일만 했다면 어떻게 그리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버텨왔는지, 여러 우여곡 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을 지켜왔는지, 뭘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그 방황의 냄새와 깊이가 궁금합니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고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p. 17) 닿았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고요(p. 18). 힘을 빼면 생기는 일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젠체하며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글에도 그런 게 다 담깁니다. 그런 글은 내용이나 표현이 하나같이 진부하고 자기주(p. 18)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운동에서 코치가 선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힘 빼'라는 말입니다.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의 타격 자세를 보면 손과 허리에 힘을 빼고 바람을 가르듯이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축구공을 정확하게 멀리 차려면 발목에 힘을 빼야 합니다. 농구에서도 손목에 힘을 빼야 슛이 부드럽게 잘 들어갑니다. 힘을 바짝 줘야 할 것 같은 역도나 유도에서도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빼야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피는 여유가 생기고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빠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글도 마찬가지 입니다. 힘을 뺀 글이 좋습니다. 힘을 빼려면 글 쓰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느끼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상대를 의식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내 글이 상대방에게 가닿으려면 상대방의 기운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상상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글쎄요, 저도 어렵습니다. 눈앞에는 공책이나 모니터밖에 없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상대의 기운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래야 합니다. 글쓰기는 두 사람의 작업입니다. '둘의 경험'이랄까요. 작가와 독자의 대화.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쓰는 겁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마(p. 19)구 내뿜는 게 아니라, 독자의 기운을 느끼면서 그 독자에게 내 얘기를 간절하게 풀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얘기를 듣습니다. 이런저런 말도 하고요. "좀 더 자세히 말해봐" "그 얘긴 좀 긴걸 그건 말이 좀 안 된다." "다음 얘기가 궁금하군!" 어떤 글쓰기 책에서는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내 안에 있는 독자를 불러내어 이것저것 검토를 맡기라고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처음부터 독자가 곁에 있는 게 좋더군요. 상대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 몰래 '칼을 갈았다'는 느낌을 주는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그런 글쓰기가 아닙니다. 상대를 굴복시킬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존댓말로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도 그 독자였고요(p. 20). 1945년 연합군은 전쟁 포로와 유대인을 가둬둔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를 해방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들에게 어떤 구호품을 보내겠습니까? 먹고 입을 게 절실했을 테니, 빵이나 담요를 보냈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구호품이 도착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엄청난 양의 립스틱이었습니다. 어느 영국군 장교는 이 기이한 장면을 보고 일기장에 '천재적인 발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굶주림에 몸을 못 가누면서도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수감자들은 더 이상 팔에 문신을 새긴 숫자에 불과하지 않고 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본 거죠. 립스틱이(p. 34) 이들에게 다시 인간성을 되돌려줬다는 겁니다. 인간다움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나 봅니다. 이 예상 밖의 사건은 우리가 글을 쓸 때 가져야 할 핵심 목표인 '반전'에 대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아는 도덕이나 상식은 허위입니다. 반발심이 생기더라도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일단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진실은 도덕이나 상식과 거리가 멀고, 가끔은 도덕과 상식을 배신하기조차 합니다(배고픈 자에게 립스틱이라니!)(p. 35). 반전의 크기에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글은 반전을 노려야 합니다. 반전이 없는 글은? 쓰지 않는 게 낫습니다. 반전은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뒤집는 게 아닙니다. 반전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통념을 뒤집고 관습을 혁파합니다. 기존의 가치와 관점을 뒤바꾸는 겁니다. 확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섣부른 판단을 미루는 겁니다.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p. 38). 강약이 뒤바뀐 말을 위해 반전을 모색하려면 진리(참/거짓)보다는 개연성에 기대는 게 좋습니다. 개연성에 기대는 것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너그럽게 허용 하는 자세입니다. 예측 가능함을 어길 때 반전이 만들어집니다. 맞는 말, 똑 떨어지는 말, 진리를 담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말, 힘의 강약이 뒤바뀐 말을 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발견, 도덕을 거역하는 글이 좋은 글 입니다. '나쁜 시만이 가슴에 남는다'고 한 김수영의 말처럼 '나쁜 글'만이 가슴에 남습니다. 나쁜 글을 쓰려면 글감에 들러붙 어 있는 도덕과 상식이라는 나태한 먼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허를 찌르지?' 반전, 글쓰기의 핵심입니다(p. 41). 글 쓰는 목적을 '순수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랑과 연민, 이 두 가지 감정을 분출하는 걸 글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내 진실에 다가가기. 내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기.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써서 내가 다른 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려고 쓰는 것입니다(p. 58). 나만의 문체를 찾는 법 이렇듯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엄마가 죽었다'라는 문장만이 'My mother died'라는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각과 글 사이에 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지 '말아야'합니다. 도리어 틈을 더 많이 벌려야 합니다. 특히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일상의 경험과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경험과 직접 연결된 말, 머릿속에 가장 빠르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 이게 글쓰기의 독입니다. 경험과 연결된 언어는 생활언어에 속합니다. 절경을 보고 '와, 멋지다', 무례한 사람을 만났을 때 '열 받네', 벽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 '아, 아파라', 피곤할 때 '아, 졸려' 이런 것들이죠. 그게 경험을 가장 잘 나타내는 현실적 감각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언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생각과 글은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경험과 글도 일대일 관계가 아닙니다. 'I don't know myself'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곧바로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라고 쓰고 만족해(p. 107) 하는 게 아니라, 멈칫하고 이를 어떤 '문장'으로 '번역'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나만의 문체를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나는 내가 낯설다' '나는 내가 그립다' '내 속엔 수많은 타인이 앉아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따위의 문장을 떠올려야자 기만의 문체가 마련됩니다. 글을 여러 번 썼는데도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려운 것은 매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썼기 때문 아닐까요. 멈춰서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번역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낯선 언어'로 바꾸려는 자세로 쓰지 않으면 나만의 문체를 찾기 어렵습니다. 문체에 대한 감각은 말에 대한 감각입니다. 말을 외국어처럼 쓰려고 해야 합니다. 술술 나오는 걸 과신하지 말고, 머뭇거리거나 더듬거리며 어렵게 나오는 말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미처 나오지 않은 말을 갈망해야 합니다. 다행히(!) 생각에 비해 글은 느립니다.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쓸 수 있죠(p. 108). 간결한 마음이 명확한 문장을 만든다 이런 자세로 문장을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문장이 짧아집니다. 묘하게도 문장은 짧을수록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 '간결하게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결하게 쓰려는 마음을 갖추면, 길어도 생각이 명확히 담기는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헤어hair가 있어야 헤어스타일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데 머리모양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옷장에 옷이 몇 벌 걸려 있어야 상황에 맞게 멋을 부릴 수 있죠. 어느 정도 글이 쌓여야 자기 문체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문체를 갖고 있는가?'라고 묻기 위해서는 '자기 글'이라는 옷을 여러벌 쌓아놓아야 합니다(p. 111). 저는 학생들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의 방식을 변형한 '15분 글쓰기'라는 걸 합니다(자유 글쓰기 free writing 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많이들 합니다). 온라인카페에 학생 이름을 하나씩 넣은 게시판을 만듭니다. 학생들은 아무 때나 들어와서 들어온 시간을 먼저 적고 글을 씁니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쓰되, 멈추지 말고 고치지 않고 쓰기. 어떤 학기에는 '글 쓰는 몸'을 만들어주겠다며 '100일 15분 글쓰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학생이 쓴 글의 내용, 형식, 분량 등 어떤 것에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읽어보지도 않을 테니 마음껏 쓰되, 15분 동안 글 한 편을 끝까지 쓰라고 합니다(p. 154). 글쓰기를 가로막는 건 생각 15분 글쓰기는 도움이 될까요?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15분 글쓰기는 우리가 글쓰기에 대해 가진 오해와 편견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글쓰기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생각'입니다. 정확 히는 '쓰지 않고 하는 생각'입니다. 저의 글쓰기는 늘 이런 흐름이었습니다. '글감 찾기→ 마구 쓰기→ 고쳐 쓰기. '마구 쓰기'의 핵심은 '끝까지 쓰기'입니다.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어떻게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글쓰기'와 '생각하기'를 의식적으로 구분합니다. 앞뒤를 나누어 따로따로 작업합니다. 글을 쓰려고 어떤 글감을 택하겠죠. 그런데 그 글감으로 뭘 써야 할지 '정확히' 모릅니다. 뿌옇습니다. 처음에는 글감이 '뿌옇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글감으로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택했지만, 아직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뿌연 글감을 선명하게 만드는 건 '생각'이 아니라 마구 써내려간 '글'입니다. 그 속에서 '새로움'이 나옵니다. 생각에서 새로움이 나오는 게 아니라 쓴 글 속에서 새로움이 나옵니다. 늘 그랬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쓰고 나서야, 정확하게는 '쓰면서' 글감에 대해 할 말이 선명해집니다(p. 155). 생각을 먼저 한다고 글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첫 문장을 쓰고 나면 그 문장 때문에 두 번째 문장이 튀어나오고, 두 번째 문장을 쓰고 나면 다음 문장이 이어집니다. 이어지지 않는다고 요? 조금 기다려 보세요. 그래도 안 나온다고요?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고요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글이 스스로 글을 밀고 간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가보는 겁니다. 이 장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고를 어떻게든 끝까지 씁니다. 그러곤 출력해서 큰 소리로 읽습니다. 읽으면서 두 가지를 살핍니다. 첫째, 내 글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흐르고 있는 가? 둘째, 읽으면서 '다른'(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가? 그걸 바탕으로 고칩니다. 하나의 결론을 향하지 않는 것들은 잘라냅니다. 무려 절반 가량이 잘려나갔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생각을 덧댑니다. 빨리 쓴 초고가 없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쓰면서 선명해진다 글이 할 일과 생각이 할 일을 분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보기 바랍니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입니다. 글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생각을 정 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뿌옇게 뒤(p. 156)엉킨 생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글이 할 일에 여러분의 생각이 간섭하지 않도록 하세요. 생각은 진부합니다. 그러니 글쓰기 실력을 높이려면 무조건 초고를 빨리 써야 합니다. 저는 뼈에 사무쳐야 글을 쓰는 '형편없는 말'이지만, 글은 저에게 그래도 버티며 자유와 사랑의 길을 가라고 가르쳐줬습니다(p. 157).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말자 물론 수정을 거듭해 완성된 마지막 글이 앞의 글보다 나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맞춤법은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나아지긴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기대 속에서 성큼 발을 내디딘 겁니다. 새로운 글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신뢰, 그 모험을 즐기는 겁니다. 한차례 쓰고 다시 쓰는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와, 내 속에 이런 면이 있구나. 다 버릴 수 있어' 버리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고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않게 됩니다. 꽃은 사랑해도 지고, 잡초는 싫어해도 핀다는 삶의 이 치를 글쓰기에서 배웁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여러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글쓰기를 통해 삶과 생명을 긍정하기 위해 쓴다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내 삶의 우여곡절도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에 다시 놀라기 위해(p. 167). 글의 정서가 느껴지도록 저는 글의 주제보다는 글의 정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따뜻한가 차가운가, 긍정적인가 비관적인가, 기쁜가 슬픈가, 경쾌한가 무거운가, 격정적인가 차분한가, 화려한가 담백한가 하는 느낌 말입니다. 그런 정서를 갖게 하려면, 독자를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머릿속에서 뭔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식당에 가득 앉은 손님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 하나를 찾아 그 사람만 그리듯이 글도 그래야 합니다.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면 주제와 직접 관련 있는 캐릭터를 장면 속에 등장시켜야 합니다. 저처럼 평면적인 얼굴은 그림의 대상으로 포착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p. 184). 군중 속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과 사건이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죠. 영화의 주인공은 1명(또는 2명)이듯이, 글에서도 하나의 캐릭터가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조연입니다. 조연은 주인공이 주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죠. 주제를 드러내지 못하는 건 과감히 지우거나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글감을 여러 개 떠올렸다고 그것들이 모두 같은 무게를 차지하면 안 됩니다. 나를 사로잡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줄 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p. 185). 좋은 묘사는 대상을, 세계를, 현재를, 감정을 충실히 감각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만끽하고 나면 친절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지지 않아서 잘 못하는 겁니다. 마음에 새겨진 걸 풀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해서 대상을 만끽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체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됩니다(p. 197). 은유, 말의 세계를 짓는 망치 우리가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버린 게 바로 '은유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걸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온 은유를 우리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 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건설한다'는 말이 가장 잘 적용 되는 곳이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은유는 낡은 세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세웁니다. 은유 없는 글쓰기는 맨주먹으로 못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은유는 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입니다(이것도 은유네요)(p.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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