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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7】 사랑받는 비결
사랑받는 비결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간에게 사랑받는 자는 길이 열리고, 성공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비결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겸손히 섬겨주고, 헌신, 희생하는 자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고,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 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하면 희생하는 것이 짐이 아니고, 기쁨입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이 없고, 희생 없이 열매 맺는 것은 없습니다. 리더는 섬기고, 희생하는 자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이 좋은데, 지혜가 없어 자기 유익만 구하고, 이기적이며, 꾀를 부리는 자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섬기고, 희생하는 자는 점점 잘 되고,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희생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꾀부리고, 요령 피우는 자는 시간이 갈수록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정받고, 신뢰 얻는 것이 삶의 축복입니다. 말세는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인데,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리더들은 희생의 본을 보여 준 자들입니다. 희생 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희생하는 자는 누구나 좋아하고, 좋은 소문과 평판이 나서 관계가 좋아지고,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사람들도 나의 삶을 지켜봅니다. 누가 꾀부리고, 요령 피우고, 희생하는지 보고, 마음으로 평가합니다. 누구나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에 나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고, 실천 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리더가 먼저 희생할 때, 리더가 섬기는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전도가 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구원받는 길이 열립니다. 나누고, 도와주고, 돈을 주고, 대접하고, 헌신하며, 희생하는 자를 누구나 좋아합니다. 말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으며, 희생으로 모든 것이 세워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내게 기억되고 생각나는 자는 나에게 선물 주고, 대접하고, 사랑 주었던 자들입니다. 순간마다 쉽게 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희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는 것 같으나 계속 속지 않으며, 희생한 자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을 시킬 때, 감사함으로 희생하고 일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사랑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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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6】 선교사의 낙심
선교사의 낙심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로는 마음이 낙심될 때가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하고 선교지에 간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음이 낙심이 되면 삶의 여러 부분이 힘들어진다. 몽골에 선교사로 가서 빠른 시간에 성도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에서 만나던 성도들이 모여들고 가족들까지 함께 교회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에 출석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한 동기는 한국에서 자신들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차 나온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교회에 출석하던 성도들이 점점 나오지 않고 지도자로 양육하는 두 사람만 나오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낙심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선교를 하다가 이들을 본국에서도 잘 정착시키려는 사명을 가지고 선교사로 온 나에게는 사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다가 몽골에 선교사로 왔을 때 몽골의 선교사들 중에서도 일부 선교사들은 외국인 노동자선교를 한국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몽골까지 와서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외국인노동자 선교의 초기이기에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때라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지도자로 양육하고 있는 강볼트와 에르뜨네 두 사람만 남았다. 그 중에 한명도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흔들렸다. 당시에 아직 신학교에 가지 않은 상태인데 교회의 일에만 충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부인의 반대에 부딪혀서 택시운전을 하려고 신학교 가려던 것을 접고 일터로 나갔다. 낙심된 마음에 점점 사명을 잃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에서 방문한 선교팀이 위로해 주어서 힘이 되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몽골에 가족들과 함께 와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교의 좋은 열매입니다.’ 라는 격려의 말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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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6】 서운한 감정을 이기는 비결
서운한 감정을 이기는 비결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웃고 울고 서운함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어서 내가 조금 못 해주면 서운함을 가지게 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서운해합니다. 조금만 방심하고 무관심하면 서운해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운함을 이겨 내야 합니다. 자족해야 서운함을 이겨냅니다.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 하기를 배웠노니 인간은 욕심이 있고 이기적이기에 서운해합니다. 너무 잘해주다가 조금 잘 못 해주면 서운해하기에 잘해주는 것도 조절해야 하고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 자주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조절해야 합니다. 대접하고 선물 주는 것도 약간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조절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거절당할 때 서운함을 느끼기에 거절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왜 거절하는지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예와 아니오를 잘 설명해야 합니다. 기대가 클수록 서운한 감정이 커집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고 기대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고 나누고 선을 행하는 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주고 나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서운함을 이기려면 지금 내게 잘못해도 지난날 내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불만족과 내 중심 욕심이 있으면 계속 서운해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스트레스이고 불행입니다. 인간은 내게 잘해주기도 하고 못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서운함을 이겨냅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어렵고 무엇인가에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내게 잘못하고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나를 돕지 않으면 신기하게 다른 방법으로 까마귀의 역사로 나의 힘이 되고 공급자가 되어 주는 것도 경험합니다. 인생의 삶에 필요한 것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공급하심을 믿을 때 인간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다스리게 됩니다. 서운함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서운함을 느낍니다. 마음이 좁은 자가 서운함을 많이 가집니다.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넓습니다. 욕심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전화나 연락이 끊어지거나 잘 안되면 서운함을 느낍니다. 전화나 연락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는 잘되는 것보다 깨지기가 쉽습니다. 관심받지 못할 때 서운합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전화도 자주 하거나 못하면 서운함을 느낍니다.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인데 나만 계속 주고 상대방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서운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입니다. 은혜 떨어지고 믿음 식어지면 사소한 것 가지고 서운해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은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가까운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서운함을 견뎌내고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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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5】 강한 사람을 다루는 비밀
강한 사람을 다루는 비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지혜가 리더십입니다.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다루려면 내가 더 강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강해야 한다는 의미는 사나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외유내강입니다. 약하면 쓰러지고 실패합니다. 실패하면 비참합니다. 마귀의 역사가 강한데,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받아 마귀보다 더 강해야 마귀를 이기게 됩니다. 강하고 억세다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두려워 떨면 상대가 영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담대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세게 말하면 나는 더 세게 말해야 합니다. 사람은 강자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목소리가 센 자가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면서 때로는 강합니다. 하나님의 강함 앞에 사탄은 굴복하게 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연단, 훈련, 고난을 통해 강해집니다. 겸손해야 하나, 때로는 강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온유하면서 때로는 강했습니다. 십자가에 끝까지 못 박히신 예수님은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어 쫓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한 것은 예수님의 강함입니다. 믿음은 약함이 아니고 강함입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고백은 에스더의 강한 여성의 리더십입니다. 마음과 의지가 강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심한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고 더 강하게 대처하는 것이 강함입니다. 나라도 약한 나라, 가난하고 후진국이 강한 나라, 선진국에게 절하고 구걸하게 됩니다. 대인관계도 때로는 강해야 합니다. 강해야 부탁도 할 수 있습니다. 면역력이 강해야 병을 예방하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소심하고, 두렵고, 마음이 약하면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문제 만드는 자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강함이 문제를 예방하고, 문 제를 해결합니다. 마음이 강해야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담대히 말하고, 지적하고, 충고하고, 요구할 것도 요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강함이요, 담대함입니다. 두려움이 크고, 비겁한 자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강해야 도전하게 됩니다. 인간은 대단해 보여도, 누구도 두려움이 있고, 고민이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병들고 죽게 되는 약한 인간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강해야 합니다. 강의나 세미나, 설교할 때도 사람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한 자는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은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강하게 외쳤습니다. 강한 자가 순교도 했습니다. 강함이 영성입니다. 강해야 분위기를 잡게 됩니다. 약함과 강함의 균형이 있어야 하나, 위기 때는 강해야 합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주나, 성령님은 강하고 담대함을 줍니다. 성경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디에서 강하고 고집이 센 자가 있는데, 강한 자가 있을 때 내가 더 강해야 승리합니다. 더욱 강함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강함이 없고 약하면 우습게 여깁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 앞에서 더 강해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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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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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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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7】 사랑받는 비결
- 사랑받는 비결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간에게 사랑받는 자는 길이 열리고, 성공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비결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겸손히 섬겨주고, 헌신, 희생하는 자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고,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 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하면 희생하는 것이 짐이 아니고, 기쁨입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이 없고, 희생 없이 열매 맺는 것은 없습니다. 리더는 섬기고, 희생하는 자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이 좋은데, 지혜가 없어 자기 유익만 구하고, 이기적이며, 꾀를 부리는 자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섬기고, 희생하는 자는 점점 잘 되고,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희생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꾀부리고, 요령 피우는 자는 시간이 갈수록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정받고, 신뢰 얻는 것이 삶의 축복입니다. 말세는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인데,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리더들은 희생의 본을 보여 준 자들입니다. 희생 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희생하는 자는 누구나 좋아하고, 좋은 소문과 평판이 나서 관계가 좋아지고,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사람들도 나의 삶을 지켜봅니다. 누가 꾀부리고, 요령 피우고, 희생하는지 보고, 마음으로 평가합니다. 누구나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에 나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고, 실천 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리더가 먼저 희생할 때, 리더가 섬기는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전도가 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구원받는 길이 열립니다. 나누고, 도와주고, 돈을 주고, 대접하고, 헌신하며, 희생하는 자를 누구나 좋아합니다. 말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으며, 희생으로 모든 것이 세워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내게 기억되고 생각나는 자는 나에게 선물 주고, 대접하고, 사랑 주었던 자들입니다. 순간마다 쉽게 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희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는 것 같으나 계속 속지 않으며, 희생한 자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을 시킬 때, 감사함으로 희생하고 일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사랑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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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6】 선교사의 낙심
- 선교사의 낙심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로는 마음이 낙심될 때가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하고 선교지에 간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음이 낙심이 되면 삶의 여러 부분이 힘들어진다. 몽골에 선교사로 가서 빠른 시간에 성도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경험했다. 한국에서 만나던 성도들이 모여들고 가족들까지 함께 교회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에 출석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한 동기는 한국에서 자신들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차 나온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교회에 출석하던 성도들이 점점 나오지 않고 지도자로 양육하는 두 사람만 나오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낙심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선교를 하다가 이들을 본국에서도 잘 정착시키려는 사명을 가지고 선교사로 온 나에게는 사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다가 몽골에 선교사로 왔을 때 몽골의 선교사들 중에서도 일부 선교사들은 외국인 노동자선교를 한국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몽골까지 와서 외국인노동자선교를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외국인노동자 선교의 초기이기에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때라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지도자로 양육하고 있는 강볼트와 에르뜨네 두 사람만 남았다. 그 중에 한명도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흔들렸다. 당시에 아직 신학교에 가지 않은 상태인데 교회의 일에만 충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부인의 반대에 부딪혀서 택시운전을 하려고 신학교 가려던 것을 접고 일터로 나갔다. 낙심된 마음에 점점 사명을 잃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에서 방문한 선교팀이 위로해 주어서 힘이 되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몽골에 가족들과 함께 와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교의 좋은 열매입니다.’ 라는 격려의 말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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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6】 서운한 감정을 이기는 비결
- 서운한 감정을 이기는 비결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웃고 울고 서운함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어서 내가 조금 못 해주면 서운함을 가지게 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서운해합니다. 조금만 방심하고 무관심하면 서운해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운함을 이겨 내야 합니다. 자족해야 서운함을 이겨냅니다.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 하기를 배웠노니 인간은 욕심이 있고 이기적이기에 서운해합니다. 너무 잘해주다가 조금 잘 못 해주면 서운해하기에 잘해주는 것도 조절해야 하고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너무 자주 잘해주고 싶은 마음도 조절해야 합니다. 대접하고 선물 주는 것도 약간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조절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거절당할 때 서운함을 느끼기에 거절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왜 거절하는지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예와 아니오를 잘 설명해야 합니다. 기대가 클수록 서운한 감정이 커집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고 기대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고 나누고 선을 행하는 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주고 나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서운함을 이기려면 지금 내게 잘못해도 지난날 내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불만족과 내 중심 욕심이 있으면 계속 서운해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스트레스이고 불행입니다. 인간은 내게 잘해주기도 하고 못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서운함을 이겨냅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어렵고 무엇인가에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내게 잘못하고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나를 돕지 않으면 신기하게 다른 방법으로 까마귀의 역사로 나의 힘이 되고 공급자가 되어 주는 것도 경험합니다. 인생의 삶에 필요한 것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공급하심을 믿을 때 인간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다스리게 됩니다. 서운함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서운함을 느낍니다. 마음이 좁은 자가 서운함을 많이 가집니다.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넓습니다. 욕심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전화나 연락이 끊어지거나 잘 안되면 서운함을 느낍니다. 전화나 연락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는 잘되는 것보다 깨지기가 쉽습니다. 관심받지 못할 때 서운합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전화도 자주 하거나 못하면 서운함을 느낍니다.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인데 나만 계속 주고 상대방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서운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입니다. 은혜 떨어지고 믿음 식어지면 사소한 것 가지고 서운해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은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가까운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서운함을 견뎌내고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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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6】 서운한 감정을 이기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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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5】 강한 사람을 다루는 비밀
- 강한 사람을 다루는 비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지혜가 리더십입니다.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다루려면 내가 더 강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강해야 한다는 의미는 사나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외유내강입니다. 약하면 쓰러지고 실패합니다. 실패하면 비참합니다. 마귀의 역사가 강한데,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받아 마귀보다 더 강해야 마귀를 이기게 됩니다. 강하고 억세다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두려워 떨면 상대가 영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담대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세게 말하면 나는 더 세게 말해야 합니다. 사람은 강자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목소리가 센 자가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면서 때로는 강합니다. 하나님의 강함 앞에 사탄은 굴복하게 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연단, 훈련, 고난을 통해 강해집니다. 겸손해야 하나, 때로는 강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온유하면서 때로는 강했습니다. 십자가에 끝까지 못 박히신 예수님은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어 쫓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한 것은 예수님의 강함입니다. 믿음은 약함이 아니고 강함입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고백은 에스더의 강한 여성의 리더십입니다. 마음과 의지가 강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심한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고 더 강하게 대처하는 것이 강함입니다. 나라도 약한 나라, 가난하고 후진국이 강한 나라, 선진국에게 절하고 구걸하게 됩니다. 대인관계도 때로는 강해야 합니다. 강해야 부탁도 할 수 있습니다. 면역력이 강해야 병을 예방하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소심하고, 두렵고, 마음이 약하면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문제 만드는 자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강함이 문제를 예방하고, 문 제를 해결합니다. 마음이 강해야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담대히 말하고, 지적하고, 충고하고, 요구할 것도 요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강함이요, 담대함입니다. 두려움이 크고, 비겁한 자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강해야 도전하게 됩니다. 인간은 대단해 보여도, 누구도 두려움이 있고, 고민이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병들고 죽게 되는 약한 인간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강해야 합니다. 강의나 세미나, 설교할 때도 사람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한 자는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은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강하게 외쳤습니다. 강한 자가 순교도 했습니다. 강함이 영성입니다. 강해야 분위기를 잡게 됩니다. 약함과 강함의 균형이 있어야 하나, 위기 때는 강해야 합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주나, 성령님은 강하고 담대함을 줍니다. 성경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디에서 강하고 고집이 센 자가 있는데, 강한 자가 있을 때 내가 더 강해야 승리합니다. 더욱 강함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강함이 없고 약하면 우습게 여깁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 앞에서 더 강해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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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5】 강한 사람을 다루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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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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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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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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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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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를 하다
-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한 지 꼭 12,000일 되는 날이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그동안 바쁜 관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 먼저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신경직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지 벌써 올해로 만 11년 하고도 10개월째, 그리고 2017년 3월 17일 금요일, 김선호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지 만 6년하고도 2개월째, 두 친구를 보고 싶어서 각각 오산리에 있는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와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는 청아공원을 찾았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신경직 목사를 보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묵상하고 아내와 사진 한장을 찍고, 나온 후 영산수련원에 새로 생긴 "아리아1968"이라고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점심겸 커피한 잔과 빵으로 점심을 먹은 후 많이 변한 영산수련원과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트레킹 길로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 걸리더라). 그 옛날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서 내가 먼저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후 이듬해 사랑하는 아내가 이곳 최자실 기념금식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많이 변한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아공원으로 향했다. 청아공원에 도착하여 예전대로 기독교관 1층(내 느낌엔 지하 2층 같은 느낌이지만, 그곳에서는 1층이라고 부르더라)에 위치한 <은혜홀 파> 방으로 들어갔더니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김선호 목사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사무처로 문의 후 3층의 <믿음홀 다>방으로 아들 예찬 군이 작년에(5주기 때)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음홀 다 A1-02 > 김선호 목사가 새롭게 자리잡고 위치한 방이다. 김선호 목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을 생각하다가 묵상기도를 한 후 아내와 간단하게 사진 한 장을 찍고 청아공원 주변을 잠시 걸었다. 누가 가보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꼭 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이 두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끊을래야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인연인 것 같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이 두 친구와 지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잠시 이야기 해 주었다. 언젠간 나도 먼저 간 두 친구처럼 저렇게 추모공원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있겠지...그때 잊지 않고 날 찾아줄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악착같이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오래 살아 남아야겠지...먼저 간 두 친구는 참 배짱도 좋다. 그렇게 먼저 가 놓고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숙제를 주는 것인가... 오늘 나는 두 친구가 내게 준 숙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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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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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동반자법』, 무엇이 문제인가?
- 2023년 4월 26일에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이란 그 사람 자체가 곧 입법기관이며 법을 잘 만들라고 국회의원 본인과 보좌관에게 연간 약 8억 원의 세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세비 지원과 함께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은 나라를 위한 좋은 법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데 이번에 용혜인이 발의한 법안을 들여다보면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라 나라를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우리의 미래 세대를 망치는 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나쁜 법이다.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이란 도대체 내용이 무엇이며 그 속에 어떤 문제점이 들어있길래 그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그리고 용혜인은 국회의원으로서 도대체 왜 그런 악법을 발의했단 말인가? “여기 새로운 가족이 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의 정식 명칭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인데 해당 법안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권인숙, 김두관, 김한규, 유정주, 이수진 의원,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이 공동발의자들 가운데 정의당 장혜영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사람이며 그 법안은 지금도 국회에 계류중이다. 이처럼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있어서 다 한통속이다. 『생활동반자법』의 골자는 결혼하지 않아도 성인 2명이 합의해서 동반자 관계가 되면 이들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정춘숙 의원 두 사람이 2021년에 각각 대표 발의했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과 큰 틀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역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 개념을 삭제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다수 국민의 반대에 막혀 현재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용혜인이 주장하는 가족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하면 된다. 결혼식까지도 필요 없고 단순히 혼인신고만 해도 된다. 만일 결혼과 혼인신고 하는 것이 싫으면 혼자 살든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면 된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결혼제도를 파괴하려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혜인은 왜 그런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또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발의했을까? 용혜인이라는 사람을 따로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녀는 젠더 이데올로기, 성 혁명 세력의 일원이거나 혹은 그들의 지지와 사주를 받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성 혁명 세력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해체주의자들로서 국가와 교회와 가정이라는 기본 질서를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성 혁명 세력이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정상 가족 신화”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은 타파해야 할 “신화” 혹은 “미신”이다. 그래서 가정을 생명처럼 지키는 교회와 성경은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 성 혁명 세력은 집요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 해체를 추진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들은 우리나라에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23개나 존재함에도 동성애 합법화를 포함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저들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통해서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가정을 허물려는 자들이다. 저들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조기 성애화하고 유년기부터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듦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망치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5년마다 새로 만드는 교과과정에 성 혁명 사상을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발각되었고 우리가 사생결단 투쟁해서 바로잡아놓은 상태이다. 금번에 용혜인이 개인적 소신으로 발의했는지 혹은 성 혁명 세력의 지침에 따라 누군가 만들어준 법안에 이름만 올렸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사실이 어떠하든지 『생활동반자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악법이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이런 법이 제정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서서 이를 막아낼 것이다. (※ 해당 법안은 용혜인 의원이 국회 소통관에서 발의한다고 발표했고 KBS와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했으나 막상 의안현황에는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절한 발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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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동반자법』,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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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목사 전성시대
- 가짜목사 전성시대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사람이 감옥에서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었고, 목사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센세이셔널하다. 어쩌면 복음의 능력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생생한 증거일 수도 있다. 한때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세상의 영화를 다 버리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불교의 스님이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아주 흥미롭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 인기리에 초청되기도 한다. 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교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한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믿음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에, 디모데전서 3:6에서는 직분자를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함부로 세우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급하게 목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다. 그렇게 양산된 목사들이 사실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목사가 되었다던 그 사람은 여전히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목사가 되었다는 그 연예인은 불륜에 폭력에 온갖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고, 선교 사역을 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일까?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가짜 신앙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가짜 성도 가짜 목사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털을 입은 이리인지 분별하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니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사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돈과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이 땅에서 탐욕을 추구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먹고 배불렀던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사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가짜 목사들도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한다. 가짜 목사의 비리와 행태를 종종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같은 영적인 식구니까 감싸고 돌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도 똑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교회는 거룩성을 추구해야 한다(고전 5:11-13).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로 권징을 들었는데, 이는 거룩성을 추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시대는 가짜 목사 전성시대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럴 것이라고 예언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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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목사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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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친구들
- ‘어떤 친구’ (23. 4. 16.) 1. 밴드활성화로 요즘 초중고 동창들의 소식을 종종 접한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동창들도 밴드를 통해서는 만난다. 모두들 세월의 무게감이 얼굴에 묻어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릴 때의 모습이 세월에 익은 지금의 얼굴 속에서도 여전히 배어있다. 밴드에 몇 번 글을 썼더니 다들 좋아하고 공감하면서 옛 추억을 주제삼아 도란도란 나눔의 장이 되었다. 지난주는 한 친구의 부고소식도 들렸다. 학창시절 키가 크고 늘 싱겁게 웃는 모습이 선한데 유명을 달리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고인의 부고소식에 이렇게 댓글을 달면서 아쉬워했다. “무정타 이 사람아 뭐가 그리 바쁘든가? 그리 빨리 가야 되던가? 에라이 몹쓸 놈아 잘 가게~ 잘 가시게 친구여~” 2. 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시골이라 또래는 대부분 중,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친구는 순진하고 착했다. 그는 교회 다니는 나를 좋아했다. 어느 해는 짝꿍이 되었다. 그만큼 친했다. 그는 자두나무가 많은 동네에 살아서 수확 철이 되면 가방에 가득 넣고 와 우리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했다. 자두를 많이 먹어 그런지 친구의 얼굴도 자두같이 작고 동글동글했다. 친구의 도시락도 단조로운 내 것과는 달리 화려했다. 그래서 친구와 먹는 점심시간이 행복했다. 그렇게 우리는 중, 고등학교 6년을 친하게 지내다가 졸업 후 서로 연락이 끊겼다. 나는 신학교에 진학했고, 친구는 대학에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 한참 시간이 흘렀다. 시골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그는 나에게 계속 성경이야기를 하면서 공격적으로 질문해댔다. 뭔가 이상했다. 신학생의 예리한 영적촉각을 세워 몇 마디 나눠보니 그의 실체가 보였다. 친구는 ‘여호와증인’이란 이단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였는데 이단에 빠지자 대화가 합일점이 없이 평행선만 달렸다. 그날 둘 중에 하나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1시간 이상 목이 쉬도록 토론했다. 토론이라기보다 서로 자기주장을 하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한바탕 성경이야기로 다툰 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후에 소식이 들렸다. 그는 군에도 집총 거부해 영창 살다가 제대했노라고. 그의 생은 뻔하다. 평생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단에 빠져 맹신하다가 그의 영혼은 피폐되었을 거다. 언젠가 그 동네 동창을 만나면 그의 소식을 한번 물어보고 싶다. 4. 최근 넷플릭스 채널에서 ‘나는 신이다’란 프로를 통해 한국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사이비 이단의 실체를 파헤쳤다. JMS 정명석,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아가동산 이기순 등... 이들 외에도 성락교회 김기동, 신천지 이만희,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장길자)등은 영혼 파괴자들이다. 그래서 거기에 빠지면 영혼은 피폐되고, 사람과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결국에는 인생 자체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이들의 포교활동이 노골화되고 있다. 직접 카페를 경영하면서 행복, 힐링, 여가, 건강 등의 주제로 영혼을 유혹한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밖에서 성경공부나, 큐티 모임 같은 것을 하자고 제안하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 자기 인생은 각자 책임이다. 그러기에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달콤함에 속지 말라. 그 속에는 당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들어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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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 어제 아침, 교회에 가니 택배 상자가 있었다. 택배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주소를 확인하니 내게 온 게 맞았다. 군용 건빵이었다. 그것도 무려 7종류의 건빵이었다. “21곡물 가득 참깨 건빵”, “땅콩건빵”, “참깨건빵”, “야채건빵”, “검은깨건빵”, “쌀건빵”, “건빵”. 총회 군선교사회에서 보낸 거였다. 보암직 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건빵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내 손이 간 곳은 아무 수식어도 없는 ‘건빵’ 봉지를 집고서 뜯었다. 건빵 2개에 별사탕 1개를 입 안에 넣고 어저께 산 ‘구쯔 커피’를 내려 한 모금을 마셨다. 환상적이다. 카페에서 달달한 빵과 먹는 것보다 이게 훨씬 맛있다.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는데 자꾸 옛 생각이 난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2월,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기 전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양주 가래비에서 훈련받았다. 따뜻한 경상도 사람이 전방에 가니 너무 추웠고, 배고픔에다가교육사단이라 훈련도 빡세고, 행군도 3번에 걸쳐 총 160km를 걸었으니 하루하루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전우들 때문이었다. 내 훈련번호는 67번이었고, 앞 66번은 착하고 순한 포항 출신 ‘양0원’이가 뒤 68번은 사회에서 유흥업소에서 지루박, 탱고 등 각종 춤과 여자를 일찍이 마스터한 ‘이0출’이란 친구가 배치되었다. ‘이0출’은 훈련하다가 휴식 시간이 되면 남들은 담배 한 개를 장전할 때 조교의 부름을 받아 앞에 나가 어김없이 멋진 춤사위를 벌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도 사회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웅담 삼아 내게 곧잘 이야기해 주었다. ‘이0출’의 영웅담은 교회에서 율동할 때 외에는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 없는 순둥이 청년인 내게는 신세계였다. 그렇게 종일 훈련을 마치고 저녁 먹고 10시 취침에 들면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좌우에 누운 66번과 68번 그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얼굴이 검고 담배를 많이 피워 검붉은 입술을 가진 우리 소대 선임하사인 그놈이 훈련병 누군가를 깨웠다. 그리곤 페치카 옆에서 단둘이 ‘아작아작 ’소리 내며 뭔가를 먹는 게 아닌가? ‘건빵’이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부러운지 밖에서는 쳐다보지 않았던 건빵이 너무 먹고 싶어 눈물이 찔끔거렸다. 나중에 보니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지난달 초에 동기 임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임 목사님은 우리 교단 군선교사회 회장이다. 임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 목사님들이 자비량으로 군선교사로 활동하시는데 2월말, 1박 2일로 전략 캠프 수련회를 준비하는 중에 후원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임목사님은 10년 넘게 군선교사로 활동하지만 단한번도 도와달라고 전화하지 않았던 분이다. 오죽했으면 전화까지 했을까 싶어 집에 있는 돈을 싹 끌어모아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편지와 함께 건빵을 보내 감사를 표했던 거였다. 요즘 군인들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만원 넘는 월급에 이렇게 맛난 건빵까지 마음껏 먹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우리에겐 배부른 요즘애들이 가질수 없는 건빵 추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 건빵 추억이 오늘 이렇게 글감이 되어 내 인생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건빵 다 먹었다. 은근히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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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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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부재 1년
- 벌써 1년이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이사 가신지. 시골집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낡은 대문, 현관 경사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장독대, 집안에 가재도구 등...단지 어머니만 계시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계신 것처럼 구석구석 흔적은 여전히 묻어있다. 어저께 오전, 온 형제들이 시골집에 모여 어머니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누나들이 끓어 놓은 청도추어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내게 청도추어탕은 어머니 냄새다. 맑은 추어탕에 제피가루 듬뿍 넣어 먹는 맛은 시골 가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 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청도추어탕을 맛볼 수 없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웠다. 혹시 수도권에 청도 추어탕집이 있나 검색해 봐도 없었다. 청도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에 전화해서 가격도 물어봤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누나들은 아재 밭에서 냉이를 캐고, 나는 잠깐 동네 산책을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따뜻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인적이 예전만 못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빈집도 더러 보인다. 집은 곳곳이 무너졌고,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옛날 반들거리던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을 맨 위에 사시는 아재 집에 가면서 빈집을 가리키며 형에게 물어봤다. “이 집이 누구 집인교?” “내 친구 00집이다” 그 집 앞 담벼락에는 깨진 벽들이 두 개씩 겹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난 설에 보니 양지바른 그곳은 ‘미륵땡~’이라고 불리는 그 동네 아지매들이 겹쳐진 벽돌 위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 나누던 아지트였다. 아재를 뵙고 내려오면서 보니 옛 점빵도 보인다. 요즘으론 미니슈퍼다. 역시 텅텅 비어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라면부터 새우깡, 맛동산, 초코파이 등이 없는 것이 없었다. 밤마다 용띠 형들에 이어 양띠인 우리까지 뻔질나게 찾아가 내 친구 상이 어무이를 깨우며 많이들 외상으로 사 먹었다. 외상값은 다 갚았는지 모르겠다. 동네 냇가도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에는 물도 많았고 피레미, 버들치, 중태기 등 물고기들도 많았다. 초여름부터 우리들이 뻔질나게 멱감았던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향 생각날 때마다 보려고 몇 장 더 찍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 토요일을 바쁜 날이라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누나들이 어머니가 담은 마지막 된장이라 하면서 담아준다. 간수를 뺀 소금 자루도 있어 챙겼다.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수건 하나를 챙겼다. 수건이 없어서 챙긴 게 아니다. 집에는 삶아 뽀송뽀송한 깨끗한 수건이 많다. 하지만 시골집 수건이 좋다. 그 수건에는 고향 집 특유의 향이 나기 때문이다. 그 향은 내게 어머니 향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다 그 향을 맡고 싶다. 그날 하루 왕복 8시간 운전했다. 설교 준비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곧바로 꿈이 꾸였다. 꿈에 어머니가 옛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꿈결에 어머니 소리마저 들렸다. 너무 생생했다.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잠깐 내 곁에 내려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을 토닥여주고 간 것 같았다. 감사함이 넘치는 고향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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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부재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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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 3년 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아는 게 없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공부 할래요” “무슨 공부?” “상담공부요.” 아내는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서울여자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가족상담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30년 만에 시작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컴퓨터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했고, 눈도 침침해 돋보기를 껴야만 책을 읽을 수 있어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평소 코를 전혀 골지 않았는데 공부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코를 골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교수에게 계속 질문하였고, 배운 내용은 끊임없이 내게 말하면서 익혔다. 덕분에 내가 야매로 상담 공부한 셈이다. 무엇보다 교수들이 추천한 전공서적은 모두 사서 줄을 치면서 읽고 또 읽었다. 솔직히 나도 학위공부 했지만 아내처럼 그렇게 전공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하지는 못했다. 예전에 내가 공부할 때 아내가 최선을 다해 도왔듯이 이제는 내가 도울 일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코로나 기간이라 시간적 여유로움이 생겨 도울 수 있었다. 라면과 김치찌개 정도 끓일 줄 알았는데, 유트뷰 선생들의 친절한 설명을 보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보니 재미있었다. 요리가 별것 없었다. 짠맛과 단맛의 적절한 조화와 그 맛을 내는 재료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공부할수록 컴퓨터 다루는 실력이 늘어가는 아내의 손놀림과 요리할수록 양파, 대파, 마늘 등을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는 나의 손놀림은 비례하였다. 집에 있는 세 여자는 모두 공부한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유일한 남자인 나는 어설픈 칼질을 하면서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역할의 역전이 코로나 기간 우리 가정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공부를 곧잘했다. 첫 학기부터 성적이 좋더니 꾸준하였다. 하지만 4학기 째 논문과목은 너무 힘들어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문은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다. 국제신대원에서 논문 지도한 경험을 살려 아내를 도와주니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무사히 그 과목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4-5학기 때가 되니 상담인턴 과정까지 겹쳐 아내는 정말 바빴다. 놀이치료를 통한 아이와 부모 상담, 게다가 교회 등록한 새 가족들 상담 등 아내의 일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더니 무사히 모든 학위과정을 마쳤다. 며칠 전 대학원 교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모든 과목에서 에이 플러스 받아 석사과정 전체에서 수석 했다고 하면서 졸업식 날 석사학위증을 대표로 받아야 한다고. 오늘 아내는 길고 길었던 학위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3년 만에 대강당에서 행해지는 서울여대 졸업식은 찬양과 기도와 축복이 어우러진 은혜롭고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두 딸과 함께 가서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최선을 다한 아내가 멋있었고 아름다웠다. 앞으로의 아내의 사역도 많아질 것 같다. 이전보다 깨어진 영혼들이 더 많은 시대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다쳐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내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녀와 28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아내를 믿는다. 아내는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러기에 내담자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고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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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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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 법원에 의해 한기총 대표회장직을 2년 넘게 수행하고 있는 김현성 변호사가 최근 『한국기독교이야기』를 발간했다. 대표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에 일부를 발제, 연제하여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 기독교의 민낯을 보고자한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면담을 요청해온 목사들을 모두 만나 경청하기로 하고 일단 많은 목사들과 면담했다. 예상했던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목사들은 각자 당신의 입장에서 한기총의 현황을 설명했고, 당신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와 해법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특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기총 목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고, 자신 또는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는 목사도 있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를 믿으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느니 오히려 인간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 수는 있으나 목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박장대소(拍掌大笑)했지만 뼈있는 말이었다. 어떤 목사는 한기총에는 "영(靈)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육(肉)적인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한기총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뱀 같은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며 이름을 일일이 거명 하기도 하였다. '먹사', '개독교'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써가며 자신을 포함한 목사들을 싸잡아 스스로 비판하는 목사도 있었다. 증경대표회장 중 한 분은 당신이 한기총의 역사 그 자체이며 누구보다도 현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필자에게 '어중이떠중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만날 필요가 없으며 당신말만 듣고 그대로 행하면 칭송받을 것이라며 다른 목사들과 필자의 만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단 논란이 있는 목사에 대해 이단 해제 명목으로 부동산이나 거액의 금품이 오고 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수년 전 이단 해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수억을 수수하여 현재 형사재판 중인 사람도 있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신학 문제에 금품이라니?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 선거비용이 들어 모두가 금권선거라고 개탄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금횡령으로 형사 고발된 한기총 목사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모금한 각종 성금이나 헌금, 연회비 등을 횡령한 사건들이었고, 실제로 통장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필자가 해임한 목사도 있었다. 지도자급 목사들이 모인 한기총에서 성금 횡령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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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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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1.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자연이나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명을 이루고 기술과 과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들의 도전 정신은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류는 여전히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서 언젠가 이르게 될 끝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력 중에 하나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종교적 성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 종교에는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는 믿음과 내세관을 갖고 있다. 종교는 오죠 라즈니쉬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하고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여러 성찰과 해석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종교의 역할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입을 상처를 위로하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한다. 아울러 죽음의 절망 앞에서 연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서 이 땅에서부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의 많은 종교 중에서도 우리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 된 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무속종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 한국에는 역사 이래로 우리 한민족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무속종교의 기반 위에 유교·불교·도교와 여러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에서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무속종교의 죽음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봉착하는 실천신학적 문제들과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해서 목회적으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1. 유교적 관점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유교는 현재 우리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그 특징이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하고 내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현세 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곧 유교의 주된 관심사에 대해서 유학주임교수실 편에 보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인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유교의 인(仁)의 원리이다”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교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적인 요소로서, 이러한 유교의 영향력에 대해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유교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한 이성개를 비롯한 개국파의 정치적 기조에 따라서 조선왕조 500여 년(1392-1910) 동안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 양반들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처럼 숭배되어진 사상이다. 곧 유교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일반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 계층의 종교이며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사상을 넘어 정치적인 필요와 힘에 의해 종교처럼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 사회구조, 생활양식, 각종의례와 예의범절을 총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영향력이 오늘까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음관과 관련하여 상장례와 조상제례에 미친 유교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조상제례는 조선 후기 이래 마치 국교와도 같이 신봉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 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인(仁)을 주요 사상의 원리로 주장하는 유교를 부모의 죽음 이후에 조상제례를 통해 부모를 늘 기억하게 함과 동시에 국가와 지배계층은 어버이와 같으므로 그렇게 부모를 섬기듯이 최고의 충성을 끝까지 바쳐야 할 것을 주입하는 정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조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적 유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교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우리 한민족의 사고와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유교에서 생각하는 죽음관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정영희는 “유교에서는 생과 사의 문제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고 보고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하늘에 맡기는 순천명(順天命)이 자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유교는 현재적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데 우선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종교학회의 연구에서는 “유교는 기철학을 인간 생명에 대한 사상의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불멸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교의 죽음관과 내세관의 기초이다”라고 말한다. 유교에서는 인간은 기(氣)와 정선된 물질적인 힘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 천지음양의 기가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鬼)가 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정(精), 기(氣), 신(神)의 결합체인 혼백으로 일정 기간 존속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면 혼은 양(陽)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陰)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유교에서 죽음은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자연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유교에 대해서 최영갑은 “종교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삶에서의 윤리와 도리를 중요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계속적으로 "유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분명한 내세관이 없으며, 죽음 이후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혼백의 존재를 믿는 믿음, 특히 조상의 혼백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효의 연장 선장에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준행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곧 유교에서는 삶 속에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 제사를 통해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후손)의 세계로 돌아와 만나게 된다는 신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유교에서는 생활 공동체를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와 더불어 이루는 공동체로 여기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제사를 절대적인 사회 규범으로 하는 것은 삶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의 이러한 제사 문제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여기지 않는 유교의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추도 예배 등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처럼, 여전히 성도들도 조상에 대한 생각과 숭배의 마음, 그리고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성도들을 잘 목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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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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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5. 과학적 관점,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 셸리 케이건의 책, 를 중심으로 과학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근거를 둔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최윤배는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단순하며, ‘세속적 죽음 이해’ 혹은 ‘비종교인의 죽음 이해’라고 정의한다. 곧 과학에 있어서 죽음이란 유기체적 생명의 끝, 곧 삶의 끝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죽음 이해에서 죽음이란,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러한 과학적 죽음의 이해, 곧 세속적 죽음의 이해는 자연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배경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김영규는 자신의 책 <철학판타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7세기부터 서양 사람들은 ‘모든 실체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으로 양분 된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신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창조의 법칙을 찾아냈기 때문에 신이 하던 일도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중세 천 년 동안 서양 사람들은 신중심주의 속에서 살았는데 과학혁명과 함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이 했던 모든 일을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생산주의 혹은 구성주의라고 하며, 세계는 전체가 나라의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따라서 인간이 그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도 있다는 환원주의,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인간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위가 근대라고 불리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온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이제 이성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이 신과 같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땅 위에 천국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 시작인 것이다. 곧 계몽주의는 이성이라는 빛으로 중세 천 년 동안 신도 만들어주지 못했던 자유, 평등, 박애가 넘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에 선포된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과 독립선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영향을 따라서 과학적 죽음관은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관은 신이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육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육체)만 중요하게 다룬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지식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과학적 죽음관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현재 예일대의 교수로 있으며 (2013)를 쓴 셸리 케이건이다. 죽음에 대한 접근법에서부터 그 동안의 방법과 다르게 논리와 이성으로 접근하여 설명을 하는 케이건의 죽음 이해는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 입각한 죽음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기계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이며, 우주에는 물질이라는 하나의 실재만 있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윤배는 “그는 일원론을 다시 물리주의(physicalism)와 유심론(idealism)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일원론은 영혼 없는 육체나 또는 육체 없는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신기계론적 사상을 따라서 인간은 영혼이 없는 육체만의 존재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김균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간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케이건은 인간에 대해 영어 단어에 기계를 의미하는 ‘machine’을 사용하는데, 정확하게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곧 단지 로봇보다는 좀 더 나은 기계에 불과한 존재로 설명한다. 본래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 기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케이건이 이해하는 죽음의 본질과 철학적 배경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케이건은 죽음을 점점 낡아져 부품을 교체하다가 결국 고장이 나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상태,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 그의 적나라한 표현대로 하자면 결국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곧 케이건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 이해는 결국 인간의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신비로 보지 않고 과학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죽음 이해의 가장 큰 특징이다. 결국 이런 사상은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해하는 것이다. 곧 케이건의 과학주의적인 죽음관에 의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투사물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아울러 케이건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질문, 곧 ‘사후의 삶은 존재하는가?’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자기 모순적인 질문이며 착각에 불과한 질문이라고 강조하면서 대답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죽고 나서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역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곧 죽은 다음에 살아간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모순이므로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영혼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악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혼과 사후의 삶, 부활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죽음 이해를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케이건은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다음에 인용하는 여러 말을 통해서 확실하게 결론짓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케이건. p 245).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케이건, 266). “내가 알고 있는 한 내 육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케이건, 294).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케이건, 295).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이건과 그의 저서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특히 신계론적 생명 이해의 패러다임 속에서 여러 형태의 유전자 조작이 시도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신기계론적 인간 이해가 일반인들의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려 영혼과 정신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성을 상실함으로써 더욱더 물질적인 가치만 지향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오늘날 배아 복제 및 줄기세포연구, 유전자 조작이 지지를 받는 배경은 신기계죽의적 인간관의 세력 확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학에 기반을 둔 세속적 죽음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계와 같은 물리적인 육체만 갖고 있는 인간이 죽음 이후에는 기계가 폐기되듯이 모든 것이 다 폐기되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남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 곧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부활과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학적 죽음관을 따른다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이 땅에서만 과학과 물질의 혜택을 누리면서 각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주의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인간의 가치가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부여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는 배격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마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건이 영혼의 존재와 사후의 삶, 부활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을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직결되므로 죽음에 대해 바른 이해가 형성되도록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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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