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 손원재 장로)가 『초창기 한국교회 대사회 운동』 학술 세미나를 5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총회 회관 2층에서 개최하고 4 명의 전문 강사들을 통해 그 당시 한국 교회가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위원장 손원재 장로가 “오늘 강의를 맡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총회 역사위원회는 100회기 상설위원회 전환 이후로 총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복음적 신앙계승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109회기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백령도 두무진에 도착하여 성경을 배포한 지 16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가난하고 척박한 조선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오고 봉건국가에서 근대 국가로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선교사님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영향력과 역할은 실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에 끼친 공헌은 어느 종교나 어느 단체들보다도 교회와 기독교 정신의 단체가 앞장선 공은 크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 만 작금의 국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며 인정받지 못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금번 학술세미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근대사에 복음이 대한민국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탐구하기 위하여 “초창기 한국교회 대사회 운동”이라는 큰 주제 아래 1. 농촌운동 2. 절제운동 3. 진흥운동 4. 청년운동 5. 성경구락부 등으로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가 다시한번 대한민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바쁜 일정에도 열정으로 연구해주시고 발표 해주시는 김남식 목사님, 박창식 교수님, 신종철 목사님, 김병희 교수님, 김호욱 교수님, 이동식 목사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세미나 준비로 힘써주신 역사위원회 임원분들과 연구분과 위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참석 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총회역사위원회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예배는 역사위 서기 한민수 목사의 인도로 역사위 부위원장 석광희 목사가 기도, 역사위 회계 김기현 장로가 창 1:1을 봉독했다.
전 역사위원장 함성익 목사가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선교사들이 오기 전 믿기 시작한 신자들과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역사를 시작케 하셨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에 유례가 없다. 이후 기독교는 사회문제도 개선하는 일을 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확인하고 전해야 한다. 역사위는 신앙의 전통성을 계승하는 일을 해야 한다.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일을 해야하고 교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한국교회의 역사를 가르치고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전 역사위원장 문상무 목사가 “역사위는 묻혔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을 그동안 해오며 관점을 제시하는 일을 해왔다. 기독교 근대사를 세상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기독교가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격려사, 역사전문위원 장영학 목사가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역사 자료를 계속해서 수집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참고하고 있다. 역사위는 사적지를 살피는 일과 역사 세미나를 개최해 잘 하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고증하고 확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축사 후 역사위 총무 이진근 목사가 광고한 후 전 역사위원장 김정훈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학술 세미나는 총무 이진근 목사의 사회로 연구분과위 서기 박용배 목사의 기도로 시작했다.
첫 번째 강의는, 대신대학교 역사신학 김병희 교수가 ‘한국장로교회와 농촌운동’, ‘초기 한국교회의 절제운동 연구(장로교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토지가 일본인들에게 넘어감으로 농촌이 어려워져 교회가 농촌 운동을 하게 됐고 농촌 운동이 교회의 재정 문제, 민족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농촌 운동의 마지막은 협동조합이다. 농촌 수양회도 개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장로교의 농촌 운동이 중단되게 됐다”고 발제 후 “1920년대에 여러 절제 운동이 진행되어 금주, 금연, 아편, 공창 금지 운동을 했다. 초기에는 한국교회도 담배에 대해 허용했었으나 선교사들의 주도로 금주, 금연 운동을 하게 됐다. 이후 금주 운동이 입법화, 제도화 됐으나 공창, 아편에 대한 입법화는 이루지 못했다”라고 발제했다.
두 번째 강의는, 이동식 목사가 ‘한국교회 선교 초기(1892-1911)의 진흥 운동 연구(장로교를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한국기독교 초기에 교육과 의료 사역이 전개되고 이후 전도인이 활발히 활동하며 독노회가 설립됐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 진흥 운동은 전도 활동과 함께 크게 교육 진흥 운동과 의료 진흥 운동으로 나누어졌음을 확인 하였다. 진흥 운동은 한국교회 선교 초기의 대표적인 자생적 성장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외국 선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한국인 신자들이 주체적으로 신앙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며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세워나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진흥 운동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으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정체성 위기와 선교적 과제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선교의 본질이 단지 수적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삶의 일치를 이루는 '진정한 부흥'에 있음을 초기 한국교회의 실천은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라고 발제했다.
세 번째 강의는, 자문위원 김남식 목사가 ‘초기한국교회 사회운동: 청년 운동’이란 주제로 “청년 운동은 교회 밖 운동인 YMCA와 YWCA 그리고 교회 내 운동인 장로교의 면려운동(CE)과 감리교의 엡윗 청년회가 있었다. 1905-6년에 이미 면려회가 조직되어 있기에 다시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 청년운동은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으로 나아갔다. 결론적으로 초기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에서 청년운동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극대화시켰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대사회적 사명을 감당한 면에서 주목하여야 한다. 기독교 청년운동은 전도와 섬김 사역을 통하여 복음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여러 영역에서 구축이 된 지도자를 육성하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한 헌신자를 배출하였다. 이제 초기 한국교회가 가졌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계승하고 이것을 통해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제했다.
네 번째 강의는, 대신대학교 박창식 교수가 ‘성경구락부(Bible Club)운동의 한국교회사적 의의’란 제목으로 “구락부(俱樂部)란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성경구락부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구락부 운동은 북장로교회의 선교로 시작되었지만 결코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사역은 아니었다. 성경구락부의 초기 사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이미 형성된 한국교회라는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면에서 성경구락부는 선교사 일방이 아닌 한국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운동이기도 했다. 둘째, 성경구락부 운동이 빛났던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전쟁 시기였다. 한국 전쟁은 수많은 이재민과 전쟁고아들, 그리고 절대적 가난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미국선교부의 막대한 원조와 구호물자가 있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데 있어서 성경구락부는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피난민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구락부가 설치되면서 교회는 피난민들의 신앙을, 성경구락부는 그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함으로 미증유의 고난의 시기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셋째, 성경구락부 운동의 전성기였던 1960-1970년대에는 한국사회가 국가재건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산업화와 맞물려 수많은 사회적 문제가 양산되었다. 이 복잡다단한 삶의 현장에는 항상 성경구락부가 그 중심에 있었다. 농어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도시 산업의 현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과 개교회주의에 매몰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성경구락부는 기독교적 가치를 가지고 직간접적으로 한국교회와 연대하면서 그 사명을 다하였다. 넷째, 종합해 볼 때, 앞에서 논구한 대로 성경구락부 운동은 한국교회라는 통로나 매개가 없었다면 결코 전국적인 운동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실상부 성경구락부는 일방 통행식 선교가 아니라 한국교회와 그 궤를 함께한 선교운동이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구락부는 정부가 전혀 복지에 대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시기에 이런 시스템을 통하여 대사회적인 복지활동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구락부의 핵심은 교육활동에 있었다. 한국사회의 변천 속에서 정규 교육 과정에서 소외된 약 100만 명의 학생들을 기독교적 가치로 교육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일이다. 이 중에 약 70%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이 성경구락부야말로 진정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의 견인차였다는 증거이다. 한국교회는 성경구락부에 공간과 물질, 때로는 리더십을 공급했지만 그곳에서 양육된 사람들은 다시 한국교회에 들어가 기독교적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선순환의 구조를 이루었다. 프랜시스 킨슬러로 촉발된 성경구락부 운동은 한국교회사에서 교육과 사회 복지, 사회적 책임 등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요구를 채워주었다. 그런 연유로 수많은 청소년들을 자연스럽게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러면 현시대에 청소년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교회는 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교회는 급격한 인구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미래의 전망도 암울한 현실이다. 성경구락부가 1970년대 이후를 지나오면서 쇠락했던 그런 원인은 현대 교회에도 존재할 것이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의 간절한 욕구는 무엇인가. 현재 한국교회는 여기에 대답을 찾아 진지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변화무쌍한 한국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제했다.



끝으로 연구분과위원 회계 손성욱 목사의 기도로 의미있는 학술세미나를 마무리하고 애찬 후 역사위원회로 모여 발전적인 논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