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죽는 날-애니타 해닉 저자(글) · 신소희 번역, 수오서재 · 2025년

이 책은 미국의 조력 사망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조력 사망이 합법화된 주는 별로 없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죽음의 방법에 대한 논의는 멀기만하다. 과연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흥미롭게 읽었다.

"나는 평생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어요. 항상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좋은 영화를 보려고 애썼죠. 늘 스스로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게 완전히 무의미해진 거예요.” 켄이 멈칫하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래를 뱉어내고 숨을 골랐다. "현대 의학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늙다리들은 한참 전에 사라졌겠죠." 그는 다른 아파트와 연결된 복도를 고개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엄청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목숨에 매달려요. 정말 그렇게 매달릴 만한 가치는 없는데."(p. 25).
의료 조력 사망은 정신이 온전한 성인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받은 치사 약물을 섭취해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할 경로이다. 미국에서 진행성 치매 같은 중증 인지장애 환자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어도 조력 사망법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조력 사망법은 환자가 스스로 치사 약물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의사가 치사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는 안락사는 절대 금지다(p. 38).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 중 상당수는 다른 모든 걱정, 심지어 물리적 통증에 관한 걱정보다 더 극심한 실존의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벌어진 상처만큼 아프고 쓰라릴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가 더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앞으로 비참한 날들만 남았을 때는 죽음 자체보다 살아간다는 것이 더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p. 91).
조력 사망 자격 심사를 통과한 환자 중 일부는 결국 치사 약물을 사용하지 못한다. 약을 섭취하기 전에 사망하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약을 섭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다.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오리건주 존엄사법이 통과된 후 23년 동안 2,895명이 법에 따라 처방전을 받았고 그중 1,905명이 치사 약물로 사망했다. 조력 사망을 신청한 환자 중 3분의 1이 끝까지 약을 섭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p. 236).
조처럼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면 큰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조력 사망법을 이용하는 모든 환자가 안도감을 느끼려고 무조건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병세가 악화할 경우 대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환자들도 있다. 은퇴한 종양 전문의로 엔드 오브 라이프 초이스 오리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마크 래릭은 처방전을 받는 것이 미래의 돌연한 악화 가능성에 따른 보험이나 보증처럼 작용한다고 확신 한다. 그가 약을 처방해준 많은 환자가 실제로 복용하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 약을 받아갔으나 끝내 복용하지 않았다(p. 246).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한 죽음이라 해도 유족에게는 죽음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조력 사망은 가정에서의 호스피스 임종보다 더 명확한 측면이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의 호스피스 기관 베이헬스Bayhealth는 3년에 걸쳐 의료 조력 사망과 전통 호스피스 임종에 따른 애도 경험을 비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은 호스피스 임종에 입회한 유족보다 미련이 덜 남았고, 임종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컸다고 답했다.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이 착잡함과 비탄을 호소한 사례는 두 가지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환자의 결정에 반대한 유족과, 치사 약물을 복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러기(p. 279) 전에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었다. 후자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껴 회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p. 280).
환자가 죽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은 난감한 화해의 과업을 회피하곤 한다. 심지어 호스피스 임종의 경우에도 환자가 언제쯤 사망할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p. 281) 조력 사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부정할 수 없다.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날을 알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얻는다. 많은 유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돕는 과정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게 사실이긴 해도, 사회적으로는 사별 이후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 삶을 마쳤다는 데 대한 사회적 낙인 탓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기도 한다. 고인이 조력 사망을 실행하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친척, 친구, 동료에게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족이 많다. 사별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허용 하지 않는 경우를 숨겨진 애도, 즉 '박탈당한 애도'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죽음에 비해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자살, 약물 과다 복용, 유산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다. 유족이 타인에게 받는 비난은 매우 미묘할 수 있다. 그런 비난은 사람들의 무심한 언행, 움칫하는 몸짓, 어떤 단어의 억양 등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침묵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p. 282).
삶의 마지막을 다소나마 통제하길 원하는 환자의 선택지를 개선하는 데 어떤 과제가 남아 있을까? 최우선 과제는 50개 주 모두에서 조력 사망법이 통과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미국인의 80퍼센트가 합법적으로 조력 사망을 시도할 수 없는 주에 살고 있다. 이들이 삶의 마지막에 심각한 고통을 피하려면 은밀하고 위험할 수 있는 자력 구제에 의존해 죽음을 앞당 기거나, 음식물 섭취를 자발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스위스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아픈 사람들과 조만간 아플 사람들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과제는 조력 사망을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력 사망을 '자살'로 칭하기를 그만두고 의료 행위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조력 사망은 그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 법적 범주를 이루므로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그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또(p. 302) 다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임종 돌봄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필수 과목으로 포함하고, 조력 사망 신청에 관심 있는 임상의에게 대응 방법을 교육하며, 조력 사망에 반대하는 의료인을 위한 보편적 위탁 조항을 도입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임종 환자 돌봄 인력 양성과 관리에 크게 기여할 호스피스나 완화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미 일부 진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 환자의 자문 의사 역할을 맡는 의사들이 나타났고, 캘리포니아와 오리건과 워싱턴의 일부 호스피스는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명시했다. 버클리에서 임종 과학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의사 로니 샤벨슨은 결국에는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을 삶의 마지막 선택지 중 하나이자 치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p. 303).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끈질기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적으로 여기면 죽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 할 경우 그 불가피성을 직면하기가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진다. 죽음을 향한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려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과의 관계를 탐구할 공간과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일찍부터 삶의 마지막을 두고 대화를 시작하면 죽음에 관한 사회적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무상함을 깊이 인식하고 애도 상담부터 호스피스 치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p. 306).
'웰다잉' 욕구는 의료와 장례 영역에서 삶의 마지막에 관한 통제권을 찾으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일환이다.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가 이런 노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장, 가정에서의 임종 돌봄, 수분해당, 시신 퇴비화, 수목장 등의 선택지를 조사한다. 자신의 추모사와 부고장을 작성하고, 생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기 장례식 배경음악 목록을 만들거나 관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한다. 죽음에 관한 논의를 정상화하려는 '죽음 긍정death-positive' 운동 (최근 급성장 중이다)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좋은 죽음good death'이 현대인의 또 다른 의무('생산적 삶과 성공적 죽음')로 둔갑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웰다잉이 여력 있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성급한 우리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고통에 간편하고 기계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쉽다. 조력 사망은 어디까지나 중증 환자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p. 307).
이 책은 단기간의 관찰 결과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후 치사 약물 조합이 일부 바뀌었고 부분적이나마 법안 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의 조력 사망 경험은 전반적 으로 변한 것이 없다. 조력 사망 자격은 여전히 획득하기 어렵다. 병세가 지나치게 악화했거나 반대로 처방전을 받을 만큼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여전히 법조문에 구속받는다. 그리고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에 겪는 고통을 덜어주려 헌신해온 의사들은 의심과 비난에 시달린다.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마땅하다. 세계적 팬데믹의 여파와 씨름하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관념이 개인에게 더 밀접하게 다가오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바로 지금이 만사를 다르게 처리하고 더욱 온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떠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p. 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