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이 고전을-48인의 대중지성, 장현숙, 이한주, 이성남, 오창희 저 외 5명 | 북드라망 | 2019년

공부공동체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의 학인들이 저마다 꼽은 ‘인생 고전’을 들고, 어떻게 이 고전과 만나게 되었는지, 이 만남이 자신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었는지 이야기하는 책. 오래된 미래인 동양고전 장자와 주역, 맛지마니까야와 법구경 등의 불경은 물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등과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들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고민이 펼쳐진다.-예스24
아직 읽지 못한 고전들이 많다. 젊을 때는 다 읽겠다는 욕심을 냈는데 돌아보니 아직도 고전은 저 멀리 있다. 남은 삶 동안 고전을 가까이 하며 살고 싶다. 세월과 인종을 이겨낸 책들이기에.

도덕의 계보학
명랑한 중년을 위해-최소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서문에서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도 놀라웠다. 요즘 나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고민은 남편의 은퇴, 딸의 독립, 시어머님의 요양병원 입원 등의 일들이 벌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살면서 문득문득 이런 고민을 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처럼 무겁게 다가온 적은 없다. 니제는 우리가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집(p. 28)으로 가져가는’ 단 한 가지 일에만 진심으로 마음을" 쏟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흔히 자신의 직업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선호하는 직업은 무언가를 빨리, 많이, 오랫동안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일이며, 무언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그러니 우리는 직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돈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온 내 삶의 궤적 또한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업을 했고,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임신 6개월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남편이 승진해서 월급이 오르고,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딸이 특목고에 들어갈 때는 살맛이 났다. 재테크로 투자한 편드가 반 토막이 될 때는 밤잠을 설쳤고, 딸이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해 방황할 때는 무기력과 불안에 시달렸다. 크고 작은 부침은 있었지만 남편이 28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고, 먹고살 만큼 돈도 모았고, 딸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이만하면 나름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나를 위한 인생 후반기를 살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뭔가 혹하고 빠져나간 것처럼 큰 상실감이 느껴졌고, 뭘 해도(p. 29) 채워지지 않아 헛헛하기만 했다.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도 불쑥불쑥 올라왔다. 니체는 우리가 무언가를 집으로 가져가는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우리의 체험,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에서 울려 나오는 열 두 번의 종소리”에는 한 번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더 이상 집으로 가져갈 것이 없어지자 상실감, 헛헛함, 불안에 휩싸이는 내 모습이 그동안 이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돈으로 채웠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것에 매달리느라 중요한 많은 것들을 소외시키는 한없이 빈곤한 삶이었다. 현재가 좀더 안락하고 덜 위험하지만 충만함, 의지, 용기, 확신, 미래가 점점 위축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생명력을 소진 시키는 위기의 삶이다. 니체는 내가 사회가 제시하는 도덕적 가치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도덕은 원래부터 주어져서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보편적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고,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면 도덕 또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얽매이는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도덕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니체(p. 30)는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자신이 믿고 따르는 가치들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생겨났으며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따져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도덕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면 그 보답으로 삶의 '명랑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제 청년과는 다른, 새롭게 창조된 중년의 명랑함을 위해 나 자신의 '도덕의 계보'를 밝혀 보려고 한다. 든든한 후원자이자 안내자인 니체와 함께(p. 31).
장자
쓸모없음의 큰 쓸모-이경아
"승진이나 상은 남한테 미루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해라.”-내가 항공사에 입사하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의 욕망과 내 욕망이 만나 승진을 위해 달렸다. 승진을 하면 월급 인상 외에 권력이 생긴다. 비행기 매니저를 하게 되면 평가권도 갖고, 그 비행에서는 최고 권력을 갖는다. 대형기일수록 더하다. 그래서 다들 빨리 승진해서 매니저가 되고자 한다. 회사는 승진을 미끼로 충성을 요구한다. 승진을 하면 다음 승진을 위해 또 달린다. 회사는 직원을 소모품으로 본다. 소모품 중 품질 좋은 소모품이 되라며 충성을 요하는 건 기본이고 성형과 몸매관리도 자기관리라며 독려한다. 그러다 기내에서 일하다 다치거나 아파서 병가(p. 60)가 길어지면 그 직원은 쓸모가 없어지고 회사의 지출을 늘리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회사는 그런 불편함을 당사자가 느껴 그만 두도록 압박을 한다. 그런 일을 하는 중간관리자도 윗선의 필요 에 따라 같은 처지가 된다. 더 윗선은 오너의 마음에 달렸다. 승진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나는 체력에 한계가 왔고, 더는 회사의 소모품으로 살기 싫었기에 과감히 사직서를 냈다. 그때 든 생각은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회사가 나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게 싫었는데도 여전히 삶은 돈으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했다. 돈이 있어야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당당하고 남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어 나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수생활 시작 후 처음 한 일도 재건축 관련 일이다. 그곳은 회사보다 더했다. 오직 돈이었다. 청렴하다고 믿었던 현직 교수인 조합장이 뇌물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는 것을 보며 그곳을 떠났다. 유용성에 대한 내 전제는 의심하지 않고 남들만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런 삶 말고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고전 공부를 시작했고 『장자』를 만났다. 장자는 사당목인 상수리나무를 예를 들어 무용지용을 역설한다. 목수 석이,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이고 둥치가 백 아름 정도나 되는 사당목을 보며, 제자에게 배로 만들면 가라(p. 61)앉고 관을 짜면 곧 썩을 나무인데 그 덕에 오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사당목이 석의 꿈에 나타나 "나를 무엇에 비교하는지? 열매를 맺는 재능이 있는 나무는 그 재능 때문에 가지가 꺾이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니 화를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쓸모없기를 바라왔는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당신 덕에 완전히 그리되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였다"고 이야기한다. 또 둘 다 하찮은 사물인데 어찌 상대방을 하찮다고 하며, 죽을 날이 가까운 쓸모없는 인간이 쓸모없는 나무 운운하느냐고 반문한다. 장자는 삶을 삶 자체로 보라고 한다. 무엇이 진정 생명을 위한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 장자가 말하는 큰 쓸모는 양생(養生)이다. 이 사당목은 남들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재능이 없기에 오히려 천수를 누리고 있다. 돈이 없다고 비루한 삶인가? 돈이 많으면 고귀한 삶인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돈이 많아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나? 부자들이 돈이 없어 자신의 삶을 중독이나 폭력으로 몰고 가나? 장자는 내가 쓸모없음의 유용성에 눈을 뜨도록 해주었다. 난 그동안 돈이 되지 않는 일상은 무시하고 살았다. 돈을 버는 것도 일상을 살기 위한 일인데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들을 절대화하며 소중한 일상과 내 몸을 제물로 삼았다. 돈이라는 작은(p. 62) 것으로 큰 내 삶을 평가받고자 했다. 이제 장자를 통해 새로운 삶의 비전을 만나 굳어 버린 전제들을 하나하나 깨며 자유로워지고 싶다(p. 63).
말과 사물
'당연히'와의 결별-전현주
과연 『말과 사물』은 놀라운 책이었다. 진리는 연속적으로, 진보적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다는 것, 각각의 시대는 고유한 인식의 틀로 자신만의 진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지금까지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던 그것은 여하튼 '우리 시대'의 진리일 뿐이다! 이럴 수가, 내가 그동안 배워 온 것은 무엇이었나. 무지에서 진리로,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인간적인 사회로 변화 발전해 온 것이 역사 아닌가. 그런데 각각의 시대적 지반 위에 세워진 진리'들'이라니, ‘단절’의 역사라니! 『말과 사물』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준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의 뿌리를 흔들었다. 『말과 사물』에서 이 새로운 진리를 뒷받침해 줄 증거들을 발(p. 174)견할 때마다 나는 즐거웠다. 공부하는 재미를 알아가는 기분이 있다. 그런데...그렇게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날 문득 의문이 생겼다. 진리란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라, 시대 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또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어 버리는 거지? 헐! 내가 푸코(Michel Foucault)를 이렇게 읽고 있었다니. 푸코에게는 각각의 앎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 서 있는 지반에 질문을 던진다. 각 시대가 자신들만이 구성하는 진리를 갖듯, 푸코 역시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그는 방대한 자료들을 풀어 헤치고, 그 사이를 촘촘히 들여다보고, 주의 깊게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며 완전히 다른 역사를 '재구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앎의 길을 내기 위한 그의 지난한 싸움! 바로 여기가 내 공부자리여야 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살아오며 답답했던 일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한 것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의 직장 일로 외국에 살던 시절 집에서는 영어식 발음이나 표현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한국어를 해야지, 라는 생각에. 성인이 되면서는 ‘인간’ 답게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놀고 먹는 잉여적 인간이 되지 않기 위(p. 175)해 필사적으로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각종 보험을 들었다. '생명'은 당연히 죽음과는 반대편에 있으니,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이외에도 나는 수많은 '당연히'들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분명 힘들고 혼란스러웠음에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질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당연하니까. 푸코를 만난 이후 나의 '당연히'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당연히'들이 구성된 지반을 잘 보여 주었다. 그 지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그것을 좇아 사느라 힘들었었다.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큰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조심 조심 '당연히'들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럼 이제는? 절대적인 것도 아닌 것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네. 괜히 피곤하게 살고 있었네. 그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살면 되겠군. 신난다! 그렇게 나는 멈춰 섰다. 편안함 위에, 푸코를 새로운 진리로, 또 다른 당연함으로 붙잡으면서 말이다. 이는 공부하기 전에 있던 '당연히'를 다른 '당연히'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가 하는 고민을 배우는 대신, 나를 불편한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내용만 취하고 있었다. 나아가 내가 자유롭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주 쉬운 방식을 찾아냈다. 배운 내용을 진리로 받(p. 176)아들이기. 그것으로 나의 편안해진 삶을 계속 유지하기. 『말과 사물』은 이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 진리에 기대고 싶은 마음을 흔든다. 편안함에 주저앉으려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이제 자신의 질문을 놓치지 않고, 지난한 싸움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내는 푸코의 공부가 배우고 싶었다. 나의 ‘당연히’를 뿌리째 뒤흔드는 공부를. 잘 가, ‘당연히’~. 나는 이제 푸코와 함께 새로운 길을 가겠어(p. 1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