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9-13(일)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고혜경 저 | 한겨레출판 | 20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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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 현상,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여성 혐오 문화 확산 등 젊은 남성들의 폭력성과 보수적 가치로의 회귀는 한국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간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남성성 위기에 대해 ‘흔들리는 가부장 질서에 대한 반발’이라는 그간의 분석을 넘어, 인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부터 본질적인 답을 구하며 남성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시도다. 2024년 복간되어 큰 화제를 불러 모은 『여신의 언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신화학자이자, 꿈 해석과 신화를 통해 개인과 집단의 트라우마 치유에 매진해 온 고혜경 교수의 신작이다. 제목인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일차적으로 ‘건강한 어른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 놓인 오늘날의 젊은 남성들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마주하는 법을 잃은 채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에만 자신을 욱여넣느라 깊이 병들어 가는 현대인 전체를 향한 은유이기도 하다.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남신과 여신들은 인간 정신을 이루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힘들을 의인화한 것”(10쪽)이라는 심층심리학·원형심리학적 시각으로 그리스 신화 속 여섯 남신을 들여다본다. 올림포스의 12신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듯, 우리 내면의 여러 원형 역시 균형 있게 통합되어야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게 된다. 정여울 작가는 추천사에서 “이 험난한 사회에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한 부모는 물론, ‘요즘 남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모든 세대들, 그리고 끝내 ‘내 인생의 나침반을 과연 어디에 둘 것인가’를 끈질기게 질문하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7쪽)라고 했다. 이 책은 특정 성향만이 과잉된 현시대 남성성의 위기를 진단하는 동시에, 피상적인 삶을 좇느라 ‘참자기(True Self)’를 잃어버린 모든 이에게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새롭고도 신비로운 시야를 틔워 줄 것이다.-예스24

 

여성 신화학자, 정신분석가가 진단한 남성의 위기 현상을 통해 남성인 나도 모르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됐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 저자의 책을 계속 읽기 위해 몇 권을 대출했다. 모처럼 실력있는 저자를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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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으로부터 새것이 태어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늙어 쇠락한 자리에 다시 젊음이 꽃피는 것도 이치다. 그런데 이 마땅한 순리가 지금의 세상에서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세대 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운명은 두려움이 있는 자리에서 형상화된다'는 말이 있다. 아(p. 33)버지와 아들 사이의 운명도 크로노스의 두려움이 빚어 냈다. 갈등의 기저에, 이 원형적 드라마가 어김없이 작동하나 보다. 변화는 구질서나 기존 세대에게는 도전이고 위협이다. 새로운 질서나 가치 확립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아버지가 구축한 체제에 반기를 드는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다. 크로노스는 세대 간 전환에 연루되는 불가피한 폭력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다(p. 34).

 

이제 헤파이스토스의 결함과 장애, 결핍이 강변하는 교훈이 선명해진다. 삶이 불완전하듯 우리가 하는 시도 또한 모두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그 불완전한 시도 끝에 놀라움과 기쁨이 태어난다. 예술품이 예술가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이라면, 궁극적이며 진정한 예술은 결국 자신을 빚어내는 예술이 아닌가 한다. 헤파이스토스는 자신의 장애와 결핍과 추함에 온 힘을 다해 헌신했다. 그 사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천공이 탄생했다(p. 94).

 

헤파이스토스의 삶은 버겁지만 숭고하다. 열등과 추함 또한 신의 본질이기에 신성하다는 신화의 가르침은 더 이상 결함을 숨기려 괜찮은 척 위장을 하지 않아도, 못난 나를 혐오하거나 이런 내 모습을 세상에 들키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장애도 나라는 고유한 존재의 표식일 따름이다. 이렇게 나의 취약함을 인간다움으로 이해하면 타인의 장애나 결점도 자연스레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신성한 장애'란 신화 이미지는 상처의 심오한 의미를 들여다보게 할 뿐 아니라 인간다움의 품을 넉넉하게 키워 준다. 헤파이스토스 삶의 핵심은 상처에 대한 헌신으로 보인다. 지난한 세월, 그는 온 힘을 쏟아 담금질과 망치질로 천품들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천공으로 빚어 냈다(p. 122). 결국 우리에게 절실한 것도 자기 상처나 장애에 대한 헌신이 아닐까? 이런 태도야말로 최선이며 또 삶에 대한 예의 같다. 상처나 장애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추한 게 아니라 특별함이고 신령함이라는 시각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나의 열등함과 추함마저 귀하게 보듬는 진정한 자기 수용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헤파이스토스가 렘노스를 떠나 올림포스에서 제자리를 되찾았듯, 우리 역시 자기 소외와 고립이라는 자기 감금에서 벗어나 본연의 참 터전을 찾아 그에 합당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발터 F. 오토가 말했듯 비로소 찾아온 마음의 자유와 평안, 그 안으로 스며들 관계의 풍요와 삶의 다채로움은 그간 어둠에 싸여 드러나지 않았던 새 세상의 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림의 맛은 자유와 기쁨일 것이다(p. 123).

 

신전 박공벽에 새겨진 글귀에서도 '아폴론이 누구인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이 말은 본래 아폴론의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우주와 사물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라는 뜻이다. 결국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이니 주제 파악하고 분수 지키라'는 명료한 선 긋기다. 정확한 경계 설정 또한 아폴론의 핵심 특질이다. 아폴론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애매하게 선을 넘나들거나 경계 너머에 함부로 침입하는 행위를 금기시하는 신이다(p. 129).

 

‘영웅은 반만 듣는다.’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니 그러하다. 심층심리학적 관점으로 표현하면, 1장에서 제우스를 탐색하며 이야기한 것처럼 영웅은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른 자들이다. 나는 역사에 기록된 여러 영웅에 대해 개인적인 물음을 품고 있다. 영웅은 왜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할까? 남의 땅을 정복하며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파괴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잔혹성은 영웅의 덕목인가? 어떤 가치관을 지녀야 영웅이 벌이는 행위들을 '영웅적' 이라 칭송할 수 있는가? 오이디푸스도 라이오스도 전통적인 의미의 영웅에 속 하는 인물들이다. 이들 부자의 공통 취약점은 바로 인내심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틀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재빨리quickly’ 다. 이들은 모호함을 못 견딘다. 만일 라이오스가 친부 살해라는 신탁을 한 번쯤 깊이 되새김질했다면, 즉 그에게 신탁을 듣는 귀가 있었다면 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아들 오이디푸스도, 자신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더욱 부강한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은유로서 신탁을 받아(p. 155)들일 수 있었다. 어머니와의 혼인을 ‘궁극의 자궁’, 곧 영원한 피안(彼岸)으로 회귀하려는 인간의 숙명으로 깊이 사유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신탁은 피할 수 없는 저주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향한 거대한 공안(公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본래 신탁의 언어는 마치 꿈처럼 ‘영웅의 귀’가 아니라 '심리학적 귀'를 필요로 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와의 대화를 자신의 심리학적 귀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았더라면, 또 오이디푸스가 폴리스의 오염에 대해 델포이 아폴론 신전이 아니라 다른 신들의 신전에 신탁을 구했더라면 전혀 다른 가능성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다혈질인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깊이 성찰하며, 그 의미가 저절로 앎이 되어 떠오를 때까지 '신중하고 적극적인 수동'의 태도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가족 드라마는 비극이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판기를 쓰듯, 즉답만을 구하는 자리에서 신성한 언어는 그 의미를 상실하나 보다. 델포이 오라클은 사라졌다. 영웅의 후예인 현대인은 '이제 오라클은 침묵한다'고 단정한다. 폐허가 된 델포이 신전처럼 오라클도 그저 과거의 유물일까? 아니면 지금의 우리는 영웅의 귀를 물려받아 오라클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영혼의 감각을 잃고 피상적인 세계에서 무의미하게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내려진 신탁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영웅의 귀가 비극을 초래한다!"(p. 156).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고하는 능력과 동일시한다. 이전의 전체론적, 애니미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성과 합리를 내세우며 인간 사고의 우월성을 선포한다. 그런데 무의식 탐색에 주안점을 두는 심층심리학의 입장에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설득력이 낮다. 심층심리학에서는 인간은 비이성에 속하는 감정이나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이며, 특히 삶의 방향이나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적 동인에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뉴턴도 기계론적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개인적으로 데카르트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과장된 비전'이 현대인 내면의 진실일 수 있다는 점을 한편으로 인정한다. 이성과 합리를 토대로 하는 '거리 두기'와 '객관성 확보'는 학술적 연구 과정에서 필수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과학적 진술은 현시대 우리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언어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뉴턴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모두 아폴론의 후예들이다(p. 165).

 

헤르메스는 머리에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손에는 마법의 지팡이를 든 채 날개 달린 샌들을 신은 모습으로 유명하다. 동작도 생각도 잽싸고 날렵해 마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듯하다. 가장 높은 올림포스에서 가장 깊은 하데스의 세계까지, 헤르메스가 가지 못할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물처럼 돌아들고 바람처럼 가변적이라 어떤 걸림돌도 장애물로 헤르메스 앞에서는 작동하지를 않는다. 지혜로운지 장난꾸러기인 건지, 영리한지 교활한지, 심지어 골탕 먹고 있는 건지 같이 즐기고 있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틈을 주지 않는 샘솟는 위트와 트릭의 소유자다. 그러니 헤르메스를 '규정'하거나 단정'하는 일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거다!' 하는 순간 헤르메스는 이(p. 175)미 그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네 표현 중에선 ‘도깨비 같다’ 는 말이 헤르메스가 가진 뉘앙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한다. '애매모호'는 헤르메스의 핵심 특질이다. 우리말로 헤르메스를 찾아보면, '도둑' '사기꾼' '모사꾼'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이는 헤르메스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헤르메스는 도둑질을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제시한다. 도둑질당한 당사자는 그를 받고 만족해 하며 행복해지기까지 한다. 이런 헤르메스에게 직접 '당신은 도둑인지'를 묻는다면, 그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는 거래를 했을 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마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오히려 내가 손해 봤다'며, 상인들이 자주 쓸법한 말도 덧붙일지 모른다. 헤르메스는 상업의 신, 무역의 신, 부의 신이다. 잘 알려진 고가의 명품 '에르메스'는 이 신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했다. 구매자도 판매자도 헤르메스의 트릭을 존중할 줄 아는 듯하다. 누구도 에르메스 제품의 값어치를 상세히 따지지 않는다. 원가는 얼마인지, 가성비 따위는 중요치 않다. 비싸기 때문에 갖고 싶어지는 사람의 욕망을 최대한 존중하기에, 그에 걸맞은 값을 매겨 사는 이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고 파는 이는 그 대가로 부를 얻는다. 헤르메스의 트릭에는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마법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헤르메스가 부의 신이 된 데에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 대화의 신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헤르메(p. 176)스는 흥정과 협상의 달인이다. 헤르메스에겐 그 자체가 놀이 인지라, 정찰제는 헤르메스 영성에 대한 모독이다. 뜨거운 논쟁이 한창인 회의장도, 언어 구사에 있어 고도의 기술적 우아함을 요하는 외교 현장도 헤르메스 신이 관장한다. '말 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또한 헤르메스가 수호신이다(p. 177).

 

혁명가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을 주로 섭외한다. 소외와 열등의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가져 보지도 내어 보지도 못하던 사람들로부터 우렁찬 함성을 끌어낸다. 이 자체로 해방이다. 소위 '성공'이나 '꿈' 같은 미래의 가능성으로 부터 차단된 채 좌절과 무기력에 지배당하는 계층의 내면에(p. 238)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 분노와 공격성이 잠들어 있다. 선동가는 바로 그 자리에 현란한 수사의 화염병을 던져 넣는다. 이는 단지 가난이나 기회 박탈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 물기 없는 고목처럼 우울이나 권태로 말라 죽어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마치 좀비처럼 살아 있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많은 이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그러하고, 억압된 학교에서 나날이 숨 막히는 청소년들이 그러하고, 각종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며 죽음 같은 외로움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구호의 내용보다는 함성의 강도나 전복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훨씬 중요한지도 모른다. 갑갑한 가정을 뛰쳐나와 산과 들에서 광란의 춤을 추던 마이나데스처럼, 강요된 순응으로 질식해 가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마이나데스가 된다. 이들에게 '디오니소스 해방자'는 곧 살아 있음을 느끼도록 해 주는 마법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관계를 깨고 체제를 해체할 필요가 있는 자리는 디오니소스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해야만 지킬 수 있다. 개성이 억압되고 표준화된 단정과 예의가 교리처럼 강요되는 곳에는 '착해야 돼' '말 잘 들어야지' '순응해' 같은 말들이 난무한다. 이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혁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디오니소스 해방자는(p. 239) '디오니소스 독재자' 없이는 오지 않는다. 잔뜩 술에 취해 닥치는 대로 깨부수고 난 다음날 아침, 심신에 멍이 든 가족의 얼굴과 부서진 살림살이가 나뒹구는 씁쓸한 풍경을 마주한다. 흥분한 관중들이 격렬히 충돌한 경기장에는 치우고 수리해야 할 쓰레기 더미와 파괴의 잔해가 널려 있다. 유리창을 깨고 건물로 난입해 무법천지 활극을 벌인 자들은 '폭도들'이라는 낙인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이 모두 어제의 해방자가 독재자로 탈바꿈하는 순간들이다. 역사는 혁명가가 독재자로 바뀌는 순간을 '부패'나 '타락'이라 부른다. 혁명의 상상력에는 혁명 뒤에 올 독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보다. 자유와 평등과 해방의 깃발을 치켜드는 혁명은 분명 디오니소스 신의 영감 하에 일어난다. 선동가는 대중을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혁명 이후에는 오직 자신만이 결정을 내리고 자신만이 통치하는 것을 최선이라 여긴다. '영구 집권'은 독재와 폭압에서 빠지지 않는 구색이다. 이러니 지구상에서 혁명이 거듭 되풀이되나 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화학자의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 보자. 소위 문명화된 현 사회에,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심리적 평안을 위협하는 디오니소스 신이 왜 다시 표면으로 올라 와 세계 곳곳을 위협하는가? 법을 어기고 질서를 파괴하는 디오니소스 신이 집단무의식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디오니소스는 정통을 위협한다. '정통' '정통주의'라(p. 240)는 뜻의 영어 'orthodoxy'는 '곧은' 올바름'을 뜻하는 그리스어 'ortho'와 '생각' '견해'를 뜻하는 'doxy'가 결합하여 탄생한 말이다. 사회가 정한 '바른 생각'에 동조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필연적으로 그 틀을 벗어나 '다른 생각heterodoxy' 을 품는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디오니소스는 후자를 위한 신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통 수호는 귀족들의 가치였고, 이들은 주신으로 제우스나 아폴론을 섬겼다. 여성과 농민과 노예의 주신은 물론 디오니소스다(p. 241).

 

기꺼이 하강하는 사람만이 풍요를 누린다

하데스는 그림자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신이라 했다. 하데스의 세계에서 놀라운 통찰을 얻은 카를 융은 '구원의 열쇠는 그림자 속에 있다'고 선언했다. 인류가 '제임스 웹' 이라는 괄목할 망원경으로 우주라는 미지를 탐사하듯, 내면 세계 또한 안으로의 또 깊이로의 탐험이 절실한 때다. 특히 우리 의식에서 제일 멀리 유배시킨 하데스에 구원의 열쇠가 놓여 있다면, 네키아는 택해야만 할 필연이자 구원의 길이다. 융은 자신의 탐색을 '내면 여정inner journey'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여정journey out'이라고 말했다. 안으로 뛰어들지 않고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없음을 강조한 역설적 표현이다. 궁극의 자리에서 안과 밖은 이어질 수밖에 없을지라도, 지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동안 철저하게 무시해 온 우리의 가까운 미지, 각자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데스를 자신의 삶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p. 291). 어떻게 하면 하데스의 부로 영혼이 비옥해질 수 있을까? 영웅이고자 매진해 온 현대인이 남겨진 삶을 영혼의 돌봄으로 갈무리하고자 할 때, 즉 자아에서 자기로 삶의 중심을 이동하고자 할 때 하데스는 그를 위한 필연적인 길이자 방향이고, 허기진 우리 영혼의 자양분임을 앞선 선각자들이 삶으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마침내 저마다 자신의 '마음 오디세이아'를 시작하려 할 때, 고대 그리스의 오디세우스와 현대의 융이 뱃사공 카론이 되어 하데스로의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내면 깊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자를 만나 보이지 않는 운명의 그물을 가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혼의 지도는 이미 그려져 있다. 먼저 탐색했던 선조들의 선물이다. 여정에 오르면 수많은 난관을 맞닥뜨리고, 난파되고 표류할 것이다. 삶에 쉬운 길은 없지만, 나만의 길은 있음을 믿는다. 모험으로 가득할 나의 길이 결국 풍요의 길이자, 영예로운 길이고, 또 유일한 길이다(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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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3】 신화를 통해 분석한 오늘날의 남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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