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걷는 사람, 하정우-하정우 저자(글) · 하정우 사진, 문학동네 ·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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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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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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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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