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 정아은 저자, 천년의상상 · 2020년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방법은 자기의 무지를 깨고 눈을 뜨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가사 노동은 돈으로 환산하지 않기에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배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나름 재밌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비로소 알았다. 내가 회사를 싫어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 은근히 속으로 회사를 그리워했던 이유를, 그것은 나의 성별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과. 만나는 모든 대상을 무차별하게 파괴하는 돈의 거침없는 행보 과정에서 인류의 많은 습속이 깨어져 나갔다. 돈이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그 단단한 장벽을 깰 수 있었을까 싶었던 영역, 신 분이라는 인류의 오랜 유산도 돈에 의해 무너졌다. 그것은 분명 돈이 가진 파괴성의 좋은 결과였고, 돈이 신분을 깨부수었던 역사는 인류가 두고두고 추억할 명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개인에게, 대한민국에 사는 결혼한 여자 사람이며 아이 둘의 엄마라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정체성을 진 나라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실이 있었으니(p. 86), 바로 돈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성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여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남성을 기쁘게 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 하던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살 수 있게 만들어준 건 선대 여성들과 그들을 지지해준 남성들의 희생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그런데 『돈의 철학』을 읽으면서 알았다. 여성을 지금의 여성 위치에 데려다 놓은 또 다른 공헌자가 있었다는 것을. 돈이라는 놀라운 요물이 여성을 내리누르던 수많은 제도와 관습을 일거에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물론 돈이 여성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원대한 야심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에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관습이 자신이 나아가는 앞 길에 걸리적거리니 귀찮아서 단칼에 해치워버렸을 뿐. 여성도 능력이 있으면 돈을 벌어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우는 데 마땅히 공헌해야 하거늘, 어찌 신체 구조가 좀 다르다는 이유로 집에서 남자의 보조 역할만 하게 하는 것인가? 짐이 심히 못마땅하다.
당장 그 성별 역할 놀이를 멈추어라! 이렇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전능한 조물주의 일갈에, 여성의 앞길이 열렸다. 물론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예속적 측면이 남아 있긴 하지(p. 87)만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가능성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 졌다. 돈을 잘 번다면 혹은 돈을 많이 가졌다면, 그러니까 돈과 친하기만 하면 여성은 성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함정이 있다. '돈과 친하기만 하면'이라는 전제에. 그러나 나를 내리친 것은 돈이 했던 역할, 즉 몇천 년 동안 공고하게 이어져 내려온 남성 우월주의라는 관습을 단숨에 깨뜨려버린 그 힘, 그 막강한 동력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동력이 없었다면 과연 여성운동만으로 여성이 지금의 지위에 올 수 있었을까. 여성운동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자본주의라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력'도 역사가 성차별이라는 오랜 악습을 일소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리라(p. 88).
『소모되는 남자』는 읽는 동안 극적인 심경의 변화를 몰고 왔던 책이었다.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너무 노골적인 여성상 왜곡에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혀 보지 못했던 지점(남(p. 173)자가 균일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고, 억지스러운 논리로 귀결하고 만 한 석학의 실수를 통해 역지사지할 수 있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었다. 후자를 소득으로 받아들인 것은 두 번째 독서를 할 때였는데, 첫 번째 때와 달리 작가의 논리를 하나하나 짚어 반론을 펼치면서 작가와 토론을 벌이는 듯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스릴은 나 자신에 대한 반추라는 뜻밖의 성과로 이어졌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다니면서 내가 펼치는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현상들을 침소봉대 해왔다. 젠더 간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석할 때, 어느 시점부터는 남녀 모두 잘못했음을 깨닫고도 남성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판단한 기존의 주장을 계속 고수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꼭 내가 여성이고 상대가 남성이어서가 아니라 성별과 상관없는 '개인차'에서 유래한 일이었음을 깨닫고도 내 주장을 철회하거나 상대에게 사과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소모되는 남자』의 저자와 똑같은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아무리 주장하는 '대의'가 옳다는 확신이 있어도 그 대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닌 것을 맞다고 하면 안 되겠구나. 저자와 나의 모습을 겹쳐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p. 174)이었다. 모순점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가버리면 결국 그 대의에 커다란 구멍을 내게 된다. 과잉 일반화와 확증 편향으로 점철된 이 책은 그런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였다.
로이 F. 바우마이스터는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남성 우월주의적 시각이 아닌 '동기에 초점을 둔 논리'를 전개한 똑똑한 학자이다. 그러나 자기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밀어붙임으로써 (여자는 일하기 싫어한다거나, 역사적으로 여성이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조직하거나 조직을 꾸리는 일을 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거나) 결과적으로 나 같은 독자에게 속을 훤히 보여주는 비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렇게 쓰고 있으니 미심쩍어진다. 과연 실수였을까? 여성이 사회적 압력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군사를 조직하는 건 꿈꿀 수 없을 만큼 사회적 제약을 받았다는 걸 뻔히 알았으면서도, 그 정도쯤은 선택의 문제로 뭉뚱그려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두 번째 독서를 마칠 때쯤, 그동안 내가 젠더와 관련해서는 여성이 쓴, 여성을 위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 책들만 주야장천 읽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독서 초반에 저자 의 주장에 쉽게 빠졌던 이유였다. 내 안에 나와 비슷한 이들의 생각만 쌓아갔기에 단순한 잽에 훅 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저자(p. 175)가 나중에 자기 논리를 마구 무너뜨리면서 허점을 드러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는가? 책을 덮은 뒤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앞으로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겠다! 내 안에 새로이 어떤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면 최우선적으로 그 가치관과 반대되는 지점으로 달려가 그 지점에 모인 이들의 뇌를 탐구해야겠다! 나와 다른 사고를 하는 이들과 대화하면 혹은 그들의 저작을 읽으면 나와 같은 의견을 지닌 사람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생각을 강화해줄 때보다 뇌의 다양한 부분들을 쓰게 된다. 반론하고 정정하느라 이전에는 가보지 않았던 다양한 대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또한 상대의 오류라는 반사판에 비친 나의 오류를 맞닥뜨리고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상대의 논리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는다 해 도, 일정 부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완고한 철옹성을 이루던 고정관념의 일부를 깎아내게 된다. 이를 통해 내 사유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으니 한 번의 독서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누리는 셈인가.
사람은 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제 육신 안에 갇혀 있기에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주위 사람들을 거울삼아, 가까운 이들에(p. 176) 비친 내 모습을 성찰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강력한 거울이 있었다.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 혹은 나와 정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울이(p. 177).
가사 노동을 노동이 아닌 여성의 '천성'으로 만들면 가사 노동을 하는 이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을 위해 수많은 종류의 가사 노동을 하면서도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는(p. 186) 존재를 곁에 둔 남성 노동자는 그 존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무리 적은 임금을 받아도, 아무리 심한 인격적 모독을 받아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그러니 가족이라는 제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얼마나 신박하고 기특한 존재인 가! 가족과 그에 따른 성별 분업 제도는 남녀를 각기 다른 영역에 배치하고 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참으로 영리하고 충실한 제도이다.
가사 노동에 임금을 부여하면 사회에 대대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일단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부인 여성이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매일 수십 가지의 노동을 하면서도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해 영원히 사회적 약자로 머무는 상태에서도 벗어난다. 여성이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으면 아이를 키우기 위해 드는 돈을 국가가 보조해준다는 개념의 '복지 제도'가 직접적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예로 들었듯 아이를 키우는 저소득층 엄마가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세금을 축낸다고 (로이 F. 바우마이스터 같은 남성학자에게) 욕을 먹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p. 187).
주부들이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선의에서 나오는 것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돈을 받고 하는 활동에 참가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조건 때문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아홉 시에 출근하고 여섯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할 수는 없고, 그래도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싶은 마음은 있는 상황에서, 결국 선택지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는 봉사 활동이나 종교 활동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돈을 벌지 않고 살아서 돈을 받지 않는 데 익숙”하다는 명쾌한 말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고뇌가 없다. 주부들의 생활 깊숙이 도사린 '자본주의사회에서 제 손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이가 느끼게 되는 설움'에 대한 성찰적 시선이 없다. 또한 그 말은 그가 저서와 강연에서 줄기차게 말하는 '엄마가 된 여성은 일보다는 남편과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또렷한 인과관계를 이룬다. 남편과 아이를 우선순위에 놓은 기혼 여성이 제 손으로 돈을 벌 기회를 잃고, 그런 상태에서(p. 208) 취미 활동과 봉사 활동이라는 한정된 선택지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스님의 입장에서는 무보수로 자신을 도와주니 기특하다 싶겠지만, 그것은 여성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성은 대가를 바란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천성이 참 선량하다'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 대목을 곱씹다 보면 왜 스님의 설법이 주로 주부들을 향하는지, 왜 친근 한 꾸짖음의 대상이 늘 여성인지, 왜 남성에게는 거의 말을 걸지 않거나 걸어도 아주 피상적인 수준의 말만 하고 넘어가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온갖 치사한 일을 겪으며 힘겹게 돈을 버는 남성들과 자주 접하지 않고, 그러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더더구나 단호하게 꾸짖는 건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을 성찰해본 적이 있을까. 자본주의는 나쁘다는 피상적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남성과 여성을 얼마나 교묘하게 갈라놓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 제게 복종하도록 만드는지 심도 있게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자본주의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종교 내부에서 주로 리더 역할을 맡은 자가 남성에 국한되며, 그 남성을 보필하고 종교 내부의 여러 프로그램이 잘 진행되도록 밑에서(p. 209)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한 발짝 떨어져서 하나의 풍경으로 조망해본 적이 있을까. 이 글을 쓰기 전, 저자가 했던 즉문즉설 형식의 강연 영상을 검색해서 한 편 한 편 시청했다. 고정된 활자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눈빛과 말투, 제스처를 통해 그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영상들을 보면서 조금씩, 스님이 주부들에 게 폭넓게 지지받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움직이며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스님은 글 속에서 만나는 스님과는 조금 다른 사람 이었다. 영상을 볼수록 내 안에서 스님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는데, 그것은 스님이 주부라 불리는 일군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스님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들(아이 교육, 남편이나 시가와의 갈등이 주를 이루는)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그에 대해 질문으로 응수했다. 연속 질문을 통해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질문들이 이끌고 가는 방향성에 있어서는, 내 기준에서는 너무나 성별 분업적이고 구시대적이라 동의할 수 없었지만, 방청객의 질문에 답하고 상대가 자신의 진짜 생각과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태도와 성의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디에 가서도 자신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기(p. 210) 힘든 주부들에게, 그것은 값진 경험이었으리라. 이름난 저명인사가 자신의 말에 끝까지 귀 기울여준다는 것, 진심으로 마음을 내에 답해준다는 것. 그 소용의 기운이 방청객으로 참가한 여성 의 남은 생에 크디큰 자산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건네는 이의 태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곱씹는 순간이었다(p. 211)
자본주의가 설정한 성별 분업이 갈라놓은 것은 남녀 사이 만이 아니다. 여성은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살림과 육아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는 정언명령은 그런 명령을 받아들인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도 갈라놓는다. 돈으로 환산되는 일만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적 시각에 갇힌 한, 비혼 여성은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는 기혼 여성을 의존적이고 답답하게 산다' 여기고, 기혼 여성은 비 혼 여성을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비하하게 된다. 체제 유지를 위해 사회는 단일한 여성상, 곧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습을 자꾸만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그 여성상에 부합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자신이 선 자리를 옹호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로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p. 223)각해보면, 조금만 시야를 넓혀보면, 여성은 자신이 선 자리의 전체 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은, 기혼의 자리에 서든 비혼의 자리에 서든, 내가 서 있지 않은 자리의 가치와 진가를 알아보고 평가할 안목을 갖추게 된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기존 통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안 문화 제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책이지만, 주부인 내게는 이런 관점에서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p. 224).
가족이란 핏줄이라는 우연을 매개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가족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부여받는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조건이다. 혈연을 이유로 누군가는 삶에 필요한 물질적•정서적 재화가 전무한 상태에서 생활하고 누군가는 모든 종류의 재화가 넘쳐나는 상태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회구조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사 회적•문화적 진보를 무색하게 만드는 퇴행적 구조가 아닐까. 가족에게 생존과 교육과 복지를 일괄적으로 책임지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귀한 존재를 우연과 운에 내맡기는 원시적 행 태이다. 시민 결합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요소(p. 242) 보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힘을 실어주는 진일보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이는 가족을 무시하자거나, 가족끼리 살지 못하게 하 자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 구성원들끼리 서로의 인생을 과도하게 부담하게 만드는 제도적 강제를 덜어내어 가족 내부에서 부글거리는 압박감을 덜어내고 가족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의 박탈감과 억하심정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시민 결합 제도는 주거와 재화를 분배하는 방식에 다양성을 실어 그러한 과정을 실현해나가는 실효성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p. 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