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 황선우 저자, 이야기장수 · 2024년
40대의 두 여자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살 때 애로사항도 있지만 함께 살게 됨으로 풍성해지는 것도 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비혼, 미혼의 여성들이 함께 사는 형태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삶의 한 방편, 모습이리라.
혼자력 만렙을 찍어본 사람
혼밥이라는 개념이 주목받으면서 그 레벨에 대한 글이 돌아다녔다. 편의점에서 혼자 라면 먹는 건 몇 단계, 패밀리 레스토랑은 몇 단계 하는 식이다. 이런 표현이 참 새삼스럽게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나는 혼밥을 그야말로 밥먹듯 해 왔기 때문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20년쯤 혼자 살다보면 같이할 누군가가 있거나 없거나 스스로 잘 챙겨 먹는 방향으로 개체 안에서 진화가 일어난다. 징징거리며 어리광을 부려봤자 아무도 받아주는 이가 없다면 어른이 될밖에. 몸을 움직여 음식을 직접 만드는 쪽이든 밖에서 거리낌없이 혼자 사먹게 되는 쪽이든. 허기와 식욕을 추진력으로 도약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뛰어넘는 순간을 한번 경험해보면 혼밥은 어렵지 않고 즐길 만한 것이 된다. 나에게 그런 강렬한 혼밥의 첫 기억은 대학 4학년 가을이었다. 대기업 최종면접을 보고 다시 학교 앞으로 돌아왔는데 그냥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더 총체적으로 기운이 달리는 게 느껴졌다(p. 11).
아무래도 다르게 대답하면 좋았을 것 같은 답변이며 긴장해 있었을 표정의 석연치 않음이, 한 고비를 넘겨 스르륵 긴장이 풀리는 기분과 함께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면접 본 곳에 합격하지 못할 것 같다고 나는 이미 예감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뿐이 아닐, 앞으로도 지난하게 이런 문턱들을 지나야 하리라는 막연함 앞에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온몸과 마음의 기력을 끌어내서 버텨야 할 사회생활과 미리 압축해서 맞부딪친 경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나는 면접비를 봉투째 들고서 신촌 어느 돼지갈비집으로 들어갔다. 혼밥일 때도 고기는 2인분 주문이 불판에 대한 기본 예의다. 자취생은 채소를 먹을 기회가 잘 없으니 쌈도 부지런히 싸고 된장 찌개와 공기밥까지 시켜 야무지게 먹고 나왔다. 소고기였다면 너무 빨리 익어버려서 곤란했겠지만 돼지고기는 천천히 내 페이스를 지키며 먹기에 적절했다. 그때의 고기는 맛있기도 했지만 면접에 망하고 조금 찌그러져 있는 내 자아에까지 팽팽하게 콜라겐을 공급하는 듯했다. 예감대로 나는 그 대기업 면접에서 불합격했으나 대신 몇 가지를 얻었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잘 먹여야 한다는 깨달음, 혼자 당당하게 고깃집에 들어가 2인분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경험치, 작은 실패를 삼키고 내려보내는 소화력 같은 것 말이다. 기운을 잘 차린 덕인지 얼마 지나지 않(p. 12)아 그때 면접 본 대기업보다 내 적성에 잘 맞는 잡지사에 취직을 했다. 입사 후에 회식이며 야근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는 일이 많아지다보니 혼밥은 오히려 조용하고 여유로운 식사로 여겨졌다(p. 13).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과연 함께 살(p. 35)기 좋은 대상이었을까? 아마 가슴속 깊이 이해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쳤을 것 같다. 참 다른 김하나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은 욕심이 줄고, 얼마간 정돈되었고, 약간은 느긋해졌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과육이 단단하고 탱글한 육보라든가 달콤하고 새콤한 향이 조화로운 죽향 같은 딸기 종류를 새로 알게 된다거나, 치킨을 같이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다리, 김하나가 좋아하는 날개와 목을 서로 양보라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거나, 그런 작은 여백이 채워지는 것처럼(p. 36).
큰 대출을 얻고 또 갚아보면서 내 배짱은 아주 조금 도톰해졌다. 또하나 배운 교훈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뭔가를 영원히 피해 다닐 수 없다면 제대로 부딪쳐볼 필요도 있다는 거다. 늘 머물던 안전지대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보면 세상에 생각해온 것만큼 큰 위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겁쟁이일수록, 위험한 상황을 좀처럼 만들지 않는 자신의 본능적 감각을 믿어봐도 좋을지 모른다. 조금 대담해진 쫄보는 오늘도 라니스터에게서 배운다. 빚은, 지지 않는 게 아니라 잘 갚는 게 중요하다(p. 61).
언제부턴가 나는 출근한 다음 집에 혼자 남은 동거인이 식사는 잘했는지, 혼자 굶지는 않았는지, 라면으로 대충 때우지는 않았는지 자꾸 궁금해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음식이란 단지 가족을 위한 희생만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이고, 부엌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고도의 경영이자, 무뚝뚝한 자식과 대화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음식을 싸주고 먹이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엄마의 세계도 함께 넓어져왔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에는 나의 동거인도 포함된다(p. 161).
상처와 아픔, 상실과 고통을 미리 예측하고 죄다 회피하는 게(p. 300) 최고로 행복한 삶의 추구는 아닐 거다. 오히려 그러다보면 삶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병들고 늙은 고양이와 함께하는 어려움이 있고, 언젠가는 떠나보내게 되는 아픔이 있을 걸 안다고 해서 17년 전의 그 첫 만남으로 돌아갔을 때 이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을 포기할까? 헤어질 줄 알면서도 만나고, 기꺼이 사랑을 하고, 그 개별적인 존재의 어떤 특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시간들을 쌓고, 때로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그런 기억이 켜켜이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이루는 것 아닐까. "고로를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진하고 깊은 상실감에 일상생활이 방해를 받을 정도였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은 조금씩 옅어지지만 사라지지는 않겠죠. 그냥 그 상실감과 함께 살아가는 것 같아요. 이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존재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남기는 흔적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은 살아 볼 수 없는..... 자기 자신만 가질 수 있는 삶의 이야기니까요." 공개방송 프로그램이던 리코더 연주 중에 침을 털어내던 손수건의 다른 면에 내 눈물이, 김하나의 콧물이 닦였다. 김하나와 나의 가슴속에는 같은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아주 멋지고 잘생기고 커다란 고양이, 고로 모양의 구멍이. 그 구멍은 우리 공통의 상실이기도, 추억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했던 자리다(p. 304).
집안일에서 청소와 요리 담당을 나눈 것처럼 팟캐스트에서도(p. 315) 우리의 역할 분담은 명확하다. 기획과 녹음까지는 함께하면서 김하나는 기술과 편집을, 나는 대외 소통 업무를 맡는다. 각자의 강점도 달라서 내가 실행에 강하다면 김하나는 전략을 잘 짠다. 한 배를 탄 두 사람 가운데 튼튼한 팔다리로 노를 저어 가는 게 나라면 쌍안경을 눈에 대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내다보고 결정하는 게 김하나인 셈이다. 이런 상호 보완의 시너지는 노력한다고 이 뤄지는 부분은 아니라서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축복이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두 분은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래 같이 일할 수 있죠?" 종종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답한다. "함께 일하는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쟤가 하는 저건 나도 하겠다"일 거예요. 저희는 다르게 생각해요. "쟤가 하는 저건 나는 절대 못 하잖아. 대단한 걸 하고 있네. 나 대신 해주니 고맙다." 하루종일 꼼짝 않고 앉아 오디오 편집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며 초 단위로 파일 자르고 붙이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헤드폰을 쓰는 대목부터 벌써 우울해진다. 거꾸로 수많은 메일 답장과 전화 통화와 메시지와 카톡, 서로의 스케줄을 고려하며 미팅 일정을 테트리스하는 일에 대해 나보다는 김하나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적성에 맞지 않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간에 나로서는 도저히 못 할 부분을 상대가 맡아주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명확히 알고,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감사가 나온다(p. 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