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과 함께 춤을 - 다리아 , 모르 , 박목우 , 이혜정 저자(글), 푸른숲 · 2021년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집이나 시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장애인에게는 일상인 것이 그들에게는 몸부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조한진희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질병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은 질병 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상해봄으로써 상쇄될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난소낭종에 관한 글을 아무리 읽어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질병 세계는 의학적 설명이 아니라 아픈 사람의 목소리로 채워야 하는구나! 질병을 겪은 사람들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내 불안이 힘을 잃게 되겠구나!
같은 맥락일까. 신기하게도 내 질병 서사를 글로 쓰고 드러내면서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다. 또다시 낭종 제거 수술을 받을 경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아파도 돼. 혹이 생긴 것은 오롯이 네 탓이 아니야. 병이 너를 완전히 뒤덮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지 마.'
나는 지금 질병과 나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에 있다. 그렇다고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하루 종일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하지 않을 준비는 하고 있다(p. 37).
부부 둘만으로 이뤄진 가정을 이어가겠다고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남편의 건강 때문이다. 나는 2년 반 정도 일을 쉬었는데, 결코 경제적으로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일을 그만둘 무렵, 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남편이 받는 월급은 두 사 람이 한 달 먹고살 정도다. 꼭 맞벌이를 해야 한다. 남편은 강도 높은 노동을 장시간 해야 하는 제조업에서 일한다. 아침 7시에 나가서, 일찍 오면 저녁 7시쯤 집에 도착 한다. 하지만 야근이 잦아 그보다 늦을 때가 허다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온 남편의 내복에는 한겨울에도 소금기가 배어 있다. 그가 아이를 돌보고 싶어 하더라도 육아는 내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내 체력으로는 일과 육아를 결코 같이할 수 없다. 게다가 남편은 허리가 안 좋아서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남들은 힘들어도 참으면서 아이랑 같이 사는데 왜 너희만 그러지 못하냐고 따진다면, 나는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냥 살고 싶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어떤 이는 자기들만 편하게 살(p. 46)려고 아이를 안 낳는다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이가 없어도 남편과 나는 피곤에 절어 귀가한다.
그저 일하고 먹고 자고 겨우 집 안 정리를 한다. 남편과 나는 불안한 몸으로 겨우 일상을 유지하며 사는데, 여기에 아이의 자리까지 두기는 버겁다. 아프면서 내 관심은 자연스레 내 몸으로 향했다. 나에게는 몸을 잘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몸 돌보기는 마음 돌보기와 다르지 않다. 나는 몸과 마음을 돌보며, 여유롭게 편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나라 생각일랑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바람이라면, 차라리 나는 애국자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누구도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p. 47).
애인은 당시 나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폭력성은 처음에는 나를 추행한 가해자들을 향하더니, 사건이 장기화되자 점차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애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폭력 행위를 저지른 후 자신을 비하하면서까지 내게 사과하던 그에게 나는 연민을 느꼈다. 자신의 폭력이 오랜 운동 경험에서 쌓인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명을 믿었다. 나는 그와 헤어질 시기를 연민 때문에 놓쳤다.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그에게 분노와 공포를 번갈아 느꼈고, 온몸의 피가 다 타서 증발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연민과 분노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몸은 마침내 스스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처럼 끔찍하고도 반복된 성폭력, 데이트 폭력 경험들이 나를 질병으로 내몰았다고 믿는다.
류머티즘은 자가면역 질환이다. 내 면역세포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내가 나를 없애려고 했듯이 나의 몸은 내 안에서 나를 죽이고 있었다. 의사는 자가면역 질환이 원인 불명이라고 설명했다. 나의(p. 218) 경험들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원인 불명은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지, 원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나와 같은 질병, 혹은 유사한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신체 부위가 다를 뿐, 면역세포가 자신 을 공격하는 병을 앓고 있었고, 여성들의 경우 대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 그런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폭력적인 경험에 맞닥뜨렸을 때 상대를 해하기보다 자신을 해하는 여성들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이는 자연스럽게 자가면역 질환의 기전과 겹쳐졌다(p. 219).
속도와 경쟁이 최고의 기준인 이 사회에서 질병 없는 '건강한 몸'이 수행할 수 있는 업무의 양과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거니와,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나태함 때문이라는 사회적 인식 속에서 나는 늘 도태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도태되었다. 질병을 앓 기 전에는 활동가로, 글 쓰는 노동자로 사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질병인'이 된 이후 활동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질병을 가진 몸으로는 한 가지 일만을 수행하기에도 벅찼다. 글 쓰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거나 업무를 완료하는 시점이 점차 늦추어졌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업무의 속도와 양이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둘 중 하나는 말끔히 포기해야 했다. 글 쓰는 노동자로 살아온 나의 경력은 그렇게 단절되었다. 이 역시도 나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일종의 사회적 강요의 결과였다.
아픈 몸으로 노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거나 불가능한 것들을 강요받으면서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의 노동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몸 상(p. 232)태에 맞게 노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질병인이든 장애인이든 이러한 환경이 갖추어진다면 누구나 노동할 수 있다. 질병 때문에 장애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배제하는 것은 낙인과 차별에 다름 아니다. 누구든 삶의 어느 시점에서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이는 질병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p. 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