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0(목)
 
  • 사물의 소멸 – 한병철(김영사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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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재독 철학가 한병철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철학자는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 보여지는 사물들이 소멸되고 있다. 그렇다. 편하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 되고 있다. 책도 전자책으로, 신분증도 전자 신분증으로, 사진도 디지털로.... 사람 자체도 디지털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사물이 소멸될 수 밖에 없다. 그 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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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과거로부터 배운다. 인공지능이 예측하는 미래는 진정한 의미의 미래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사건맹(事件盲)이다. 반면에 생각하기는 사건의 성격을 띤다.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세계 안에 놓는다. 인공지능에게 결여된 것은 다름 아니라 확실한 의미의 새로움이 시작되게 하는 단절의 부정성이다.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같음을 이어간다. '지능 Interligenz'은 [여러 선택지] 중에서 선택하기inter-legere'를 뜻한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하되, 단 하나의 선택만 한다.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 1과 0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다녀보지 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진정한 의미의 생각하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것을 향해,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이동 중이다. "생각하기의 단어는 이미지가 빈곤하고 자극이 없다. [••] 그럼에도 생각하기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생각하기는 세계를 매번 더 어두워지는 수수께끼의 깊은 우물 속으로 변화시킨다. 그 우물 속은 더 어둡지만 더 높은 밝음을 약속한다."이 기계 지능은 수수께끼의 어둡고 깊은 우물 속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는(p. 67) 깊이를 보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생각하기는 계산과 문제 풀이 그 이상이다. 인간의 생각하기는 세계를 더 환하고 밝게 만든다. 인간의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기계 지능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위험을 초래 한다. 즉, 인간의 생각하기가 기계 지능에 동화되어 그 자신도 기계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 생각하기는 에로스를 먹고 산다. 플라톤 철학에서 로 고스와 에로스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로스는 생각하기의 가능조건이다. 하이데거도 이같은 플라톤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녀본 적 없는 곳으로 가는 생각하기에게 에로스가 날개를 달아준다. “나는 그를 에로스라고 부른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이야. 내가 생각하면서 본질적인 한 걸음을 내디뎌 다닌 적 없는 곳으로 과감히 나아갈 때면 언제나 그 신의 날갯짓이 나를 쓰다듬지.” 계산하기는 에로스가 없다. 데이터와 정보는 유혹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바보처럼 굴기"에서 시작된다. 지능이 아니라 바보짓이 생각하기의 특징이다. 새로운 문구,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모 든 철학자는 바보다. 그는 기존의 모든 것과 결별한다. 그는 저 순결한,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생각하기의 내재층(p. 68)에 거주한다. 생각하기는 "바보처럼 굴기"를 통해 전혀 다른 곳, 다닌 적 없는 곳으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철학의 역사는 바보짓들의 역사, 바보 같은 도약 들의 역사다. "옛날 바보는 자력으로 도달하게 될 확실한 것을 원했다. 그때까지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었다. […] 새로운 바보는 아예 어떤 확실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 […] 그는 부조리를 원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사유상이다." 인공지능은 생각할 능력이 없다. 인공지능은 "바보처럼 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너무 지능적이어서 바보일 수 없다(p. 69).

 

엘파이스 - 선생님이 책에서 펼치는 주장에 따르면, 디지털화를 통해 우리는 ‘호모 루덴스’가 될 것입니다. 즉, 노동 보다 놀이에 더 집중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소멸하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p. 154)

한병철 - 저는 호황이나 불황과 무관한 디지털 실업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디지털화는 대량 실업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 실업은 미래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거예요. 인간의 미래는 기본소득과 컴퓨터게임으로 이루어지게 될까요? 참 암울한 전망이네요. 유베날리스는 정치적 행위 가 불가능한 로마 사회를 '파넴 엣 키르켄세스(빵과 경기)'라는 문구로 묘사하죠. 사람들은 무료 식료품과 장관을 연출하는 경기들을 부여안고 잠잠해져요. 완전한 지배란 모든 사람이 오로지 놀기만 하도록 만드는 지배입니다. 현재 극찬을 받으며 넷플릭스에서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그와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모두 많은 빚을 진 채로 치명적인 게임에 투신하지요. 그 게임에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고요.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의 핵심 면모를 첨예화된 형태로 보여줍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죗값을 치르고 죄를 씻어내는 대신에 빚을 지게 만드는 숭배문화의 첫 사례입니다. 디지털화 초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것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놀이 충동을 무자비하게 착취합니다. 게임의 요소들을 집어넣어 사용자를 중독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들을 보세요(p. 155).

엘파이스 -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약속했는데....허망하게도 현실에서 스마트폰은 우리가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우리를 구속된 신세로 만드는 긴 사슬이 되어버리지 않았나요?

한병철 - 스마트폰은 오늘날 디지털 강제노동수용소이거나 아니면 디지털 고해소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모든 지배 장치, 지배 기술은 고유한 성물들을 만들어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데 동원하죠. 그런 성물들은 지배를 안정화합니다. 스마트폰은 디지털 지배 체제의 성물이에요. 복종을 유도하는 장치로서 스마트폰은 묵주와 비슷한 역할을 해요. 묵주는 휴대하기 쉽고 다루기 쉽다는 점에서 일종의 '핸디Handy'('핸드폰'을 뜻하는 독일어 – 옮긴이)예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죠. 우리는 계속 고해해요. 자발적으로 발가벗지요. 그러면서 애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주목이고요(p. 156).

 

한병철 - 오늘날 우리는 모두 진짜이고자 해요. 바꿔 말해, 타인들과 다르고자 해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들과 비교하죠. 바로 이 비교하기(같게 만들기)가 우리 모두를 같아지게 합니다. 요컨대 진정성 강박이 같음의 지옥을 초래합니다.

엘파이스 - 우리에게 더 많은 고요가 필요할까요?

한병철 - 우리는 정보 고요가 필요합니다. 정보 고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뇌가 완전히 타버릴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각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여기 있음 경험Prasenz-Erfiahrung'이 사라지죠. 우리는 세계로부터 점점 더 분리됩니다. 우리가 세계를 상실하(p. 160)는 거예요. 세계는 정보 그 이상입니다. 화면은 세계 결핍이 심각해요.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주위를 맴돌 뿐이죠. 스마트폰은 이 세계 결핍에 결정적으로 기여합니다. 세계 상실의 주요 증상은 우울이에요. 우울할 때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를 상실하죠. 우리는 혼란스러운 자아 속으로 침몰해요. 제가 보기에 디지털화, 정확히 스마트폰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치과의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통증이 심한 치아 치료를 받을 때 환자들은 자기 스마트폰을 움켜쥔다더군요. 왜 그럴까요? 내가 핸드폰을 수단으로 삼아 나 자신을 확인하는 거예요. 핸드폰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에, 내가 실존한다는 확신에 이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치과 치료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핸드폰을 움켜쥡니다. 제 가 기억하는데, 어린 시절에 저는 치과 치료를 받을 때 어머니의 손을 움켜쥐었어요. 오늘날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기 손이 아니라 아이의 핸드폰을 내주면서 꽉 쥐게 할 거예요. 멈춤과 안정이 타자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에게서 나오는 거죠. 이런 상황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다시 타자들에게로 되돌려보내져야 해요(p. 161).

 

엘파이스 - 선생님은 철학자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하이데거는 가장 추상적인 사유 형태들을 탐구한 형이상학 연구자이고, 그의 글은 일반인이 읽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고도로 추상적인 그 사유를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일들에 성공적으 로 적용하죠. 철학은 다수의 인구가 속한 세계를 더 많이 다뤄야 할까요?(p. 162).

한병철 - 미셸 푸코는 철학을 일종의 급진 저널리즘이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로 간주합니다. 철학자들은 가차 없이 "오늘"을 다뤄야 한다고 그는 말하죠. 이 측면에서 저는 푸코를 추종합니다. 저는 오늘을 사유로 파악하려 애써요. 그리고 바로 이 사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p. 163).

 

아트리뷰 - 선생님은 책에서 디지털화를 계속 거론합니다. 디지털화가 상대를 사라지게 만들고 나르시시즘을 번창하게 한다고 지적하죠. 또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발적 자기착취를 번창하게 한다는 점도 언급하죠. 선생님은 처음에 어떻게 이 주제들을 주목하게 되었나요? 어떤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나요?

한병철 - 《피로사회》나 《심리정치》 같은 제 저서들의 바탕에 깔린 통찰은 푸코의 규율사회 분석이 우리의 현재를 더는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규율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구별합니다. 규율 체제는 명령과 금지(p. 170)를 통해 작동하죠. 그 체제는 억압적이에요. 자유를 억누릅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 체제는 억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유혹적이고 허용적입니다. 이 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신에 착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발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착취하죠. 요컨대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과사회에서 살아요. 이것을 푸코는 보지 못했어요.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성과 주체는 실은 노예입니다. 주인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 주체는 절대적인 노예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외래적인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에요. 이 역설적인 노예의 자유를 카프카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동물이 주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 자기를 채찍질한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 이 꾸준한 자기 채찍질은 피로와 우울감을 일으켜요. 노동 그 자체는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심각한 피로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노동하고 나면 기력이 소진될 수야 있겠지만, 이 소진은 파괴적인 피로와 다릅니다. 노동은 언젠가 끝나요. 반면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는 성과 강제는 노동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 되죠. 그 성과 강제는 잠들었을 때도 우리를 괴롭히고 드(p. 171)물지 않게 불면증을 일으킵니다. 노동에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해요. 그러나 성과 강제에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내적 압력, 이 성과 압력과 최적화 압력이 우리를 피로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병적 징후는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에요. 오직 억압적 체제만이 저항을 유발합니다. 반면에 자유를 억누르지 않고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아요. 지배가 자유로 자처하는 순간, 지배는 완성되죠. 이것이 저의 사회비판적 에세이들의 바탕에 깔린 깨달음 들입니다. 이 깨달음들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p. 172).

 

역자 후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정보와 달리 사물에 본질적인 몸 또는 몸뚱이다. 합리적 상식의 관점에서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한다면 몸과 몸뚱이를 구별해야겠지만, 한병철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아 있는 놈으로 여긴다면 (인터뷰 참조), 굳이 몸과 몸뚱이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몸소'라는 우리말에서 뚜렷이 느껴지는 '여기 있음'의 면모, 그리고 투박하고 거추장스럽고 묵직한 몸뚱이가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저항' 혹은(p. 188) '다름'이다.

한병철의 문체를 흉내 내자면, 사물 곧 몸은 여기 있음이요 저항이요 다름이다. 줄여서, 사물은 다름이 여기 있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읽어내고 공명한 명제다.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 몸의 소멸, 여기 있는 다름의 소멸을 경고한다. 디지털화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모든 이, 디지털화에 순응하거나 반항하는 모든 이, 디지털화에 초연하거나 심드렁한 모든 이가 이 경고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디지털화의 바탕으로 내려가 이만큼 폭넓고 깊이 있는 철학적 진단을 내놓는 저자는 그리 많지 않다. 코로나 대유행 앞에 움츠러들어 숱하게 줌 모임을 하 면서 나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품곤 했다. 여기 있음 없이 사람들과 만나는 것, 몸 없이 토론하는 것, 전원을 끄자마자 검은 벽으로 변하는 디스플레이에 매달려 경험과 배움을 갈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을 했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 책을 내밀며 꼭 읽어보라고 권하겠다. 디지털화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한병철도 핸드폰을 사용한다(주로 꽃 이름을 알아보는 데 쓴다고 한다). 디지털화의 혜택이 막대하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p. 189)다. 그러나 한 사회가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비대면 소통 방식과 좋아요, 댓글, 구독 등의 평가 기준에 대체로 순응하고 심지어 열광한다면, 그 찬란한 새로움의 뒷면에 밴 어둠을 들춰내는 것이 그 사회를 위하여 철학자가 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이 특히 우리 사회에 요긴하다고 판단한다. 마스크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우수한 방역 성과를 거둔 이유 중 하나는 마스크 착용과 원격 소통에 대한 거부감이 약한 것에 있을 듯하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성과는 우리의 씁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과 표정이 마스크로 가려진 것이, 서로의 몸이 외따로 있는 채로 소통하는 것이 그리 괴롭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도 우리는 놀랄 만큼 무표정하고, 몸에 대해서는 접촉은 말할 것도 없고 언급조차 사실상 금기가 아닌가! 한병철이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반갑고 흡족하여 잠시 번역을 멈췄다. 내가 '충심의 사물'이라고 꽤 억지스럽게 번역 한 것은, 쉬운 말로 '정든 물건'이다. 한병철은 정든 물건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를 정(情)의 철학자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 더 참신한 표현을 물색해(p. 190)야겠다. 그를 숱한 꼰대 중 하나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그러나 얕잡아 볼 책은 더더욱 아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과 기술 비판에 대한 명쾌한 설명만으로도 이 책은 철학적 가치로 차고 넘친다. 거기에 페터 한트케와 한병철 본인의 뛰어난 문학적 문장까지. 이 멋진 책을 모든 철학자와 모든 시인께, 그리고 철학자나 시인이 아닌 모든 분께 권한다(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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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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