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 이철수(삼인 · 2005년)
어느 책을 읽다가 이철수 화가를 소개한 글을 보고 대출해 읽었다. 간혹 이 작가의 판화를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책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림과 글이 담백하게 잘 어울린다. 이런 글과 그림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려면 먼저 담백하게 살아야겠지. 20년 전 책이라 품절됐다.
숲에서도 전쟁은 벌어집니다. 온통 소나무뿐으로, 평정된 소나무 일색의 숲에서도 작고 새로운 생명들 끝없이 제 키를 키워 솔숲 그늘을 벗어나려 준동합니다. 기어오르고, 타고 오릅니다. 그늘에 적응하고 거기 기생하는 것들조차 제 생각 따로 있습니다. 그 작은 전투! 세상도 그렇지요?(p. 17).
많던 손님들 다 떠나시고, 뒷설거지를 깨끗이 했습니다. 몸을 씻고 책상에 앉아 객들과 어울려 지껄인 그 많은 헛소리 지우고 싶다, 생각합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말은 손님들이 가지고 가셨겠지요. 그 많은 헛소리 가운데 몇 마디쯤은. 남겨둔 것에는 쓸 것이 없어서 가져가신 것도 염려가 됩니다. 말이나, 글이나, 그림이나 그렇게 어렵습니다. 추석이 코앞에 왔습니다. 모처럼 식구들과 무슨 말씀하시려는지요?(p. 24).
생각이 많은 날, 단순해지면 좋을 텐데.... 그러기 어려운 날, 어디 빈 의자 있으면 가서 앉아 보시지요? 그 많은 고민, 생각...다 놓고 잠시 조용히 있어 보시지요. 잠시 쉬어가는 것도 방법입니다(p. 38).
이렇게 텅 비어 있는 하늘 허공과 빈 땅을 보면서, 인생에 너무 큰 욕심 쓸데없다 하는 생각하면 안 되나요? 살아볼수록 그렇다 싶은데....더운밥이 찬밥 되는 것 잠깐이지요? 제 욕심이 채찍질하는 대로 살다 보면 길 잃기 십상입니다. 가을이 좋습니다(p. 40).
가을 길에 낙엽이 쏟아집니다. - 한꺼번에, 약속한 듯 쏟아져 내리는 나뭇잎들은 때를 안다. 사람 같지 않다. -때를 모르고 변화를 때맞추어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보인다. 그렇지요. 부디, 우리들의 노경은 이렇지 않기를. 슬프고 부끄럽지 않기를... 하고 빌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에 불빛 희미하게 밝았습니다. 부끄러워지는 가을밤에(p. 49).
대추나무 앙상해졌습니다. 가지 끝에 푸르던 잎, 익은 대추 모두 사라졌습니다. 본래 없던 것이지! 하면서도 거기 살던 빛나던 생명의 기억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없어질 것도 있을 때 소중히!(p. 51).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물을 쓸 일이 많습니다. 이것저것 써보아도 썩 편한 그릇이 없어서, 젓장 사면 들고 오게 되는 흰 플라스틱 통을 가져다 윗부분을 요령껏 잘라냈습니다. 손잡이도 있으니 옮겨 다니기도 좋고, 바닥이 편평해서 물 쏟을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으면....(p. 59).
누가 사주를 묻습니다. -저는 사주대로 안 살기로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지요. 얼굴에, 굶어죽자고 해도 밥 안 굶겠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요. 굶어죽을 리가 있겠어요? 그렇게 대답했지요. 시절이 어려우니 곳곳에 명리학 점술이 성행합니다. 그도 작은 위안일 수는 있겠지만 하늘 아래, 땅 위에 스스로 존귀하다는 우리 존 재는 어쩌자고요? 마음 비우면 온통 하늘이고, 절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p. 71).
다 살고 나면 조등 하나 걸리지 나고 죽는 것 일상사 가난한 마을 골목에 조등 하나(p. 84).
건빵에 바늘구멍 두 개는 바람 빠지라고 뚫어놓은 거라지요? 부풀어 망가지지 말고 차분하게 익으라고 꼭꼭 바늘로 찔러준 흔적이 눈 같습니다. 건빵 몇 알 집어먹다가 농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람 얼굴에 눈 두 개, 귀 두 개, 콧구멍 두 개, 입 하나. 왜 뚫어 두었겠어? 바람 들어 부풀지 말고, 얌전히 잘 사시라는 뜻이겠지!(p. 112).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잘 알려진 기업 홍보실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마침 비 오시는 날이라 장화 신고 우산도 들고 집에 입던 옷 그대로 올라갔는데 서울 도심은 화창했습니다. 큰 빌딩에 들어 로비에서 신분 확인 절차를 꼼꼼히 챙기는 건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볼일 있는 큰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초입에 앉은 사무직원이 손짓해 부르는데 "어이! 이봐!'였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조용히 다가갔지요. 그러고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 나 불렀어? 왜? 그 사람이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다가가는 동안도 예사롭지 않은(?) 태도였겠지요? 마침 그 방 어른 격인 분이 저를 알아보고 "이 형! 여기야, 들어와!" 그러셨습니다(p. 136).
참 오래 전에, 제가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일 적에,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던가요? 아버지께서 일러주셨습니다. 벚꽃 그리라고 하거든, 벚꽃이 덩어리져 있는 모습을 자신 있게, 대범하게 표현해 보라고 하셨지요. 덕분에 과분한 칭찬을 들었습니다. "넌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그런 소리 몇 번 듣게 되니까 제가 ‘잘 그리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던데요? 그렇게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해였다는 건 곧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어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뜰에 벚꽃 낙화가 분분합니다. 아이들, 칭찬하며 키우세요(p. 152).
오늘도 두어 번 논에 들어온 백로를 쫓아내고, 비 개고 나면 날아들어 올 배고픈 산비둘기의 콩밭 공략을 하마 걱정하느니. 사람의 마음 옹졸하고 옹색함이 이렇습니다. 넉넉하여 가진 것이 많을수록, 노심초사.... 지킬 것도 많은 법(p.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