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부수는 말 – 이라영
내용이 깊은 책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뒤에 어떤 오해나 편견이 있는지 21개의 말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말에는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그 의도를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혼란과 갈등이 난무하는 이 때 말이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말을 더 바르고 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 더 갈고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노동 - 공부 좀 할걸
"공부 좀 할걸."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후회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뭐냐고 물으면 "공부 좀 할걸"이라고 한다. 한국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도 드문데 모두들 공부를 안 했다는 후회를 한다. 그리고 과잉 노동과 저임금을 공부 안 한 '내 탓'이라고 받아들이는 정서를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부모들의 공부에 대한 미련과 후회는 자식들을 향한 빛나는 교육열의 원천이 되고 너도나도 "공부 안 하면 너만 손해다"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괜찮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토대를 말한다. 공부를 잘해서 개인의 성공을 이루고 부모의 체면 유지, 혹은 집 안의 계층 상승에 기여하는 것은 미덕이며 가장 큰 효도나 다름없다. 열아홉 살에 치르는 대입 시험이 인정을 좌우하니 부모들의 치열한 사교육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까지 배우자고 했다던 한국의 교육열은, 실은 공부 못한 사람으로 멸시당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엄마들을 상스럽게 욕하지만 정작 상스러움은 다른 곳에 있다. 고된 노동이 마치 '공부 못한 죄'로 받게 되는 형벌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것이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이 보여주듯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 '능력 없는' 개인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그리고 공부 안 한 '손해'를 너무들 '착하게' 수긍한다. 노동은 왜곡되었고 노동자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래서 보수 언론은 노동자의 연봉에 대한 왜곡 기사를 심심치 않게 생산한다. "억대 연봉 택배 기사", "신의 직업"이라고 과장되게 말 하듯이, 노동자가 고액 연봉을 받으면 사회는 유난히 호들갑을 떤다.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위계 탓이다. 게다가 그 고액 연봉을 받는 노동자도 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몸은 아주 훌륭한 상품이 되었지만 그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노동은 경시받는다.
노동을 숭배하거나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고통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보람을 준다. 문제는 노동의 위계다. 혁명 시인이었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Vladimir Mayakovsky도 그의 시 〈노동자 시인〉에서 "하지만 시인들이 하는 일은 더욱 훌륭한 일인데..."라며 헷갈리는 태도를 보였다. 이 오래된 위계는 육체와 정신의 위계와도 관련 있다. 그런데 과연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있는가. 존재란 실체가 아니라 행위다. 행위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로는 불가능하다. 안질환, 온갖 신경성 질병 등 정신 노동 또한 몸에 흔적을 만든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분조차 모호하다. 육아는 정신노동인가 육체노동인가. 가정방문 학 습지 노동자는 지식노동자인가 육체노동자인가." 노동, 그러니까 모든 살기 위한 '몸부림'은 '마음고생'을 동반한다. 그러니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도, 위계를 나누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며 어불성설이다.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구처럼, 노동은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숭배의 대상도 패배의 징표도 아닌, 살아 있는 자의 행위다. 노동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은 오히려 노동과 삶을 분리시킨다. 나는 노동 해방은 가능하지 않으며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해방'을 말할수록 노동은 소외된다. 노동 해방에 관해 말하기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우리가 하지 못한 '공부'일 것이다. 노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며 최선을 다해 안전한 노동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노동'을 공부 못한 사람의 징벌로 취급할 것인가.
‘노오력’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비유를 소개한다. "우리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 공부와 노동의 위계에 의구심이 없다면 켜켜이 싸인 양파처럼 고통의 겹을 두른 이들의 언어를 이해할 리 없다. 고통의 언어를 듣지 못하는 귀는 죽음의 비명마저 듣지 못한다(pp. 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