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손바닥에 너를 새겼고, 김혜한
얼마 전 내가 속한 파이디온선교회 단톡에 김혜한 선배가 본인이 쓴 책을 소개했다(나는 총신 85학번이고, 김혜한 선배는 책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82학번으로 보인다. 선교회 활동을 할 때 개인적으로 본 적은 없다). 최근 총신대학 총동창회 총회를 취재하러 갔는데 박성규 총장이 선물 받은 책 30권을 참석자들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우연히 이 책을 받고 읽게 되었다.
사모로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 책을 읽다가 두 번 울었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말이다.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남이 보면 참 우스웠을 것이다. 중늙은이가 책을 보다 울고 있으니 말이다. 눈물이 난 대목은 다음과 같다.
①부르심을 점검하다
"사모님들을 섬기는 자리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합니까? 하나님 이 나를 부르신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역이 맞다면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세 가지 이상의 증거와 말씀을 주세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 장로님이 떠올랐다. 사모축제도 끝나고 인사를 한번 드리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평소 연락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이 많았겠지만, 이날은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장로님! 오늘 갑자기 장로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보기 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오후에 만나서 장로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김혜한 선교사를 왜 만나야 하나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살림하다 아껴둔 비상금을 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장로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물질을 지원한 적이 없기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이어서 여쭙기를 "우수리는 뗄까요?"라고 물으셨다고 하신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니다. 우수리도 떼지 말고 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다 들고 왔다고 마음을 나눠 주셨다(pp. 56-47).
②아버지 마음
지금도 그때 친구의 말을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오려 한다. 남편의 신장 이식을 위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간 후원하던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정말 전화하기 싫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앞으로 생활이 어떻게 될지 불안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환난이 오고 재정의 어려움이 오니 작은 물질도 포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럼에도 양심상 사역을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동기인 금신이에게 연락할 차례가 되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기독 동기 모임을 매달 가졌던 금신이는 동기 모임에서 매달 정한 금액을 전하는 회계 역할을 맡아 왔다.
"금신아, 남편이 신장 이식을 해서 교회를 사임하게 됐어, 지금까지 후원해 줘서 고마워."
해야 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전화선 저쪽에서 금신이의 대답이 들려왔고, 그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나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끊었는지, 뭐라 말하고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184-185).
왜 나는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울었던가? 내 마음에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말로 나는 목회를 중단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노회에서 사임 처리했다. 그리고 12월에 부모님 댁으로 이사를 갔다. 그동안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경력을 쌓아 담임으로 나갔는데 40살에 시작해 55살에 목회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사임키로 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 나이에는 다른 교회로 부임하기 쉽지 않다. “사임한” 혹은 “사임당한” 목사라는 꼬리표가 있는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이후 딱 한 군데 동네에 있는 교회에 지원을 해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 얼떨결에 기자가 됐고 지금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임 후 아내는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았다. 군목 시절에 만난 아내는 이후 부목사, 담임 때 많지는 않아도 사례비로 생활했다. 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러나 사임 후 나는 비정규직 인생이 됐다. 친구들은 마을버스 운전을 하라고도 했다. 나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 교육도 받았다. 그러다 이제 언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재정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는 않는다. 총신대학에 500만 원 후원도 했다. 총신대 종합관 도너월에 보면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제는 5년 차 기자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취재하러 가서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달 평타는 치면서 지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 하늘을 보며 울었던 기억도 있다. 교회 봉사를 할 때는 정규직으로 매달 생활비가 나왔으나 이제는 자영업자로 돌아다녀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다. 그래도 그동안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살았던 것은 특혜였다. 이제 비로소 돈벌이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돈과 관련된 선배의 이야기를 보면서 5년간 겪었던 “서러움”이 떠올라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집돌이” 인생이 이제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다. 지금, 이 글도 전남 영암 행사를 취재하고 올라가는 KTX에서 쓴다. 아침 6시 21분에 KTX 타고 내려와 이제 올라간다.
40세에 담임으로 나가 정년 70의 30년 절반을 목회하고 남은 기간은 기자로 살아갈 것 같다. 이 길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제2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히 감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필요한 물질을 채우고 계신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 굶지 않게 하신다. 내가 지금도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인생이다.
오늘도 사모들의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 “사서 고생하시는” 선배의 인생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깨어진 항아리 같은 선배의 인생에 물을 넘치게 부으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다 깨어진 항아리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