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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선교단, 구약 시가서 1일 통독 모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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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독과 암송을 통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요한선교단이 구약 시가서 1일 통독 모임을 3월 2일 광진구에 소재한 성광교회(천주찬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예배, 성경 통독과 암송에 집중하며 은혜 받는 시간을 가졌다.
천귀철 목사가 “요한선교단을 통해 제가 제일 많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순종하고 전하는 것을 통해 목회를 비롯해 큰 은혜를 누렸다. 저 외에도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가운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 요한선교단의 목적이다.”라고 인사말했다.
시작 예배는 천귀철 목사의 인도로 김중득 목사가 기도, 욥 22:21-22을 합독 후 천귀철 목사가 “요한선교단이 만들어진 목적은 성경을 읽어 복음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말씀을 체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통독, 암송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감당하자.”라고 설교한 후 장상민 목사의 축도로 시작예배를 마쳤다.
이어 순서대로 성경을 연속해서 읽고 암송하는 은혜의 시간을 갖고 교회에서 대접하는 애찬을 나눈 후 계속해서 오후까지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시간을 갖고 다같이 합심해 기도하고 성경 통독 모임을 마무리했다.
성경 통독, 암송1
성경 통독, 암송2
성경 통독, 암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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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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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GMS) 인천선교훈련 3월 12일 개강...훈련생 모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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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구령의 열정으로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을 「최고의 전도전문가」로 양성하는 총회(GMS) 인천선교훈련이 3월 12일(목) 개강한다. GMS 인천선교회(이사장 이용범 목사)가 주최하고, 인천선교훈련원이 주관, 계산교회·국제전도훈련원이 협력한다.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은 누구나 환영하며, 현장 참석이 불가능한 분은 온라인(유튜브 접속)으로 참가해 성경과 신학, 전도와 선교를 신학대학원 교수에게 직접 배우는 과정이다.
① 최고수준의 신학대학원 교수진 ② 전도전문가 양성(1년 2학기 24주) ③ 온라인 참가(지방참가자)가 특징이다.
개강: 3월 12일(목) 오후 7:30, 인천 계산교회 교육관 3층(본관 맞은편 건물 뒤)
인천 계양구 계양대로 194번길 2 ☎ 032-541-8981~3 (인천교대역 1번 출구 5분)
훈련일정 및 내용
훈련기간
3월 12일 - 5월 28일(매주 목요일 오후 7:30-9:30)
지원자격
① 일반과정 : 교파, 직분 무관, 고졸 이상 남여, 1955. 1. 1 이후 출생자
② 사역자 과정(전도사역 간사) : 대학 졸업 이상 남녀, 1965. 1. 1 이후 출생자
특전
① 전도와 양육 실습 성적 우수자는 교회 사역 간사로 추천한다.
② 수료자(1년 2학기)는 총회(GMS) 선교사 자격(단기)을 부여한다.
등록비
10만 원(교재비, 전도 실습비 별도) 국민은행 645501-01-314795 인천선교훈련원
등록방법
① 문자등록 : 성명, 출석교회, 직분, 주민번호
• 문자 전송 010-2042-2954 (임정하 간사)
② QR 코드 등록 : 코드 접속 후 신청서 작성
https://forms.gle/gecU6bLbhUERYbkk9 (신청 QR코드 링크)
③ e메일 신청 : joynful323@gmail.com
(성명, 전화번호, 출석교회, 직분, 주민번호)
문의
☎ 010-2042-2954 (임정하 간사)
훈련방법
대면훈련(지방참가자는 유튜브 접속)
비형식 훈련(전도실습, 세미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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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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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S이사장 양대식목사·진주성남교회, 연합찬양대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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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S이사장 양대식 목사가 시무하는 진주성남교회가 3월 1일 전교인연합예배를 드리며 연합찬양대가 웅장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에 맞춰 감동적인 찬양을 드렸다. 이날 지휘는 양기성 집사, 반주는 윤정은 집사, 솔로는 이윤경 교수가 맡아 ‘길 만드시는 주’를 찬양했다.
진주성남교회에는 여러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찬양 팀이 있는데 심지어 어린이찬양대도 있어 찬양이 왕성한 교회다.
양대식 담임목사는 연합찬양대의 찬양과 연합 오케스라의 연주에 대해 “너무 감동적이어서 강단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았다. 수고한 분들을 축복한다.”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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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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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장로총연합회, 엄성호장로 회장·김동득장로 수석부회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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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장로총연합회 제29회기 정기총회가 2월 28일 오전 11시 선한목자교회에서 모여 엄성호 장로를 회장으로, 김동득 장로를 수석부회장으로, 김기영 장로를 사무총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28회기 이임회장 (새성남교회/통합) 권오형 장로가 “믿고 협력해 주셔서 한 회기를 잘 마치게 되어 감사드린다. 조찬기도회와 순환예배를 통해 이웃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주님의 따듯한 손길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라고 이임사, 29회기 취임회장 (선한목자교회/기감) 엄성호 장로가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급변하는 사회에 우리 장로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음세대에 신앙을 잘 계승해야한다.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도 잘 감당하기 바란다.”라고 취임사했다.
회장 이취임 감사예배는 (성남제일교회/합동) 신임수석부회장 김동득 장로의 인도로 (둔전교회/기장) 증경회장 김상우 장로가 기도, (생명나무교회/기감) 강옥진 장로가 벧전 5:1~4을 봉독, (CBMC송파지회) 본보이스가 찬양했다.
(선한목자교회/기감) 김다위 목사가 ‘양무리의 본이 되는 장로’란 제목으로 “장로는 섬기고 희생하는 위치이다. 특히 성남시의 다음세대를 잘 이끌어가는 사역을 해야 한다. 장로는 지도자로서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엄성호 회장 장로께서 선한 사역을 잘 감당하실 것이라 믿는다.”라고 설교했다.
이임회장에게 공로패 전달
(일심교회/기성) 회계 김순남 장로가 헌금기도, (선한목자교회/기감) 헤세드 100이 색소폰 특주, (성남제일교회/합동) 증경회장 김태웅 장로가 내빈소개, 28회기 사역스케치 영상 시청, 회기 전달, 취임회장 엄성호 장로가 이임회장 권호형 장로에게 공로패 및 뺏지수여했다.
성남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전태식 목사가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 연합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 하나되어 성시화를 이루자."라고 축사, 한국국제기드온협회 경인지역 회장 한양섭 장로가 "좋은 부모, 배우자, 리더를 만나야 복되다. 신임 엄성호 장로께서 좋은 리더로 많은 일 하실 것이라 믿는다. 모두 충성을 다해 섬기시기 바란다."라고 격려사했다.
(새성남교회/통합) 직전회장 권오형 장로가 선교후원금 및 장학금전달, (선한목자교회/기감) 장로회장 강운규 장로가 선한목자교회 소개 및 인사, 신임 사무총장 (선한목자교회/기감) 김기영 장로가 광고 후 성남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전태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선한목자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앞서, 정기총회 회무는 회장 권오형 장로의 사회로 직전회장 박래권 장로가 기도, “그동안 성원과 헌신으로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앞으로 더 큰 발전을 이어가기 바란다.”라고 회장 개회사, 서기 김기영 장로가 회원 48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후 개회, 사무총장 김종필 장로가 전회의록낭독 · 사업 및 경과보고, 감사 이종도 장로가 감사보고, 회계 김순남 장로가 결산(회계)보고, 임원개선(전형위원장 박래권 장로), 안건토의, 29회기 임원소개 후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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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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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호남협의회 정기총회, 이경석 목사 회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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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2026년 재경호남협의회 정기총회가 2월 27일 오전 11시 종로구 소재 여전도회관 리루이시홀에서 열려 이경석 목사를 회장으로, 장성택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이경석 신임회장이 “저는 호남 출신이고 호남을 사랑합니다.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를 받들어 섬기겠다.”라고 인사말했다.
제1부 예배는 상임회장 조영기 목사의 인도로 수석공동회장 백양선 장로가 기도, 서기 정봉기 목사가 빌 3:12-14을 봉독, 임종길 목사가 특송했다.
증경회장 윤익세 목사가 ‘푯대를 향해 삽시다’란 제목으로 “우리의 최우선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내일이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새로운 임원들은 방향성 있는 목표를 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끼리는 정이 있게 살아야한다. 신앙 가운데 호남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정치, 목회를 해야한다. 하나 되고 뭉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사무총장 장성태 목사가 광고 후 증경총회장 서기행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축사
제2부 축하 및 격려는 상임회장 조영기 목사의 사회로 증경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우리는 고향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고향은 그립기에 고향 사람을 만나면 훈훈한 정을 느낀다. 그래서 재경호남협의회가 너무 귀하다.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증경회장 공호영 목사가 “경기에서나 신앙에서도 바톤 터치가 중요하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리더십 승계가 있기를 바란다.”라고, 증경회장 서흥종 목사가 “기쁘고 감사한 일 가득하기를 바란다.”라고, 증경회장 김상현 목사가 “롬 8:28, 화합하고 선을 이뤄가기 바란다.”라고, 재경호남 장로회장 정채혁 장로가 “지난 한 회기 수고하셨고, 금번 회기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재경호남협에서 목사와 장로가 잘 힘을 합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사랑하고 감사드리며 부총회장으로 총회를 잘 섬기도록 하겠다.”라고, 증경회장 이규섭 목사가 “올 한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라고 격려사했다.
111회 총회 출마예정자 소개
제3부 정기총회는 상임회장 조영기 목사의 사회로 수석공동회장 정신길 목사가 기도, 서기 정봉기 목사가 회원 45명 참석보고, 회록서기 정규재 목사가 전회록낭독, 감사 한광수 목사가 감사보고, 회계 최규운 장로가 회계보고, 상임총무 박명춘 목사가 사업보고, 임원선출, 신•구임원 교체, 신임대표회장이 신임명예회장에게 감사패 전달, 신안건토의 후 폐회하고 손정호 장로가 식사기도한 후 애찬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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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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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교육부, 성경통신대학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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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교육부(부장 이경조 목사)가 주관한 제38회 성경통신대학 · 제43회 주교교사통신대학 · 제30회 평신도성경교육대학원 졸업식이 2월 26일 오후 2시 총회회관 2층에서 열렸다.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신 분들을 축하드리며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잘 섬기기 바란다."라고 격려했다.
졸업식은 교육전도국장 나현규 목사의 사회로 전국주일학교연합회장 김충길 장로가 기도, 다같이 딤후 3:16-17을 봉독했다.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가 ‘끝이 아닌 시작’이란 제목으로 “오늘의 졸업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서는 시작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기에 이것을 더더욱 굳건히 붙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 말씀으로 시작해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자. 둘째, 말씀으로 온전해지기 바란다. ‘온전’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말씀으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성경은 선을 행할 능력을 준다. 졸업장은 파송장이다. 말씀의 씨앗을 많은 곳에 심어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졸업장 및 상장 수여
교육부 회계 임계빈 목사가 학사보고 후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가 졸업생 대표에게 졸업장 수여 및 기념품 증정, 이경조 부장이 총회장상 · 교육부장상 수여, 전서노회평대원장 이순렬 목사가 전서노회평대원장상, 함흥노회평대원장 윤두환 목사가 함흥노회평대원장상, 서울강남노회평대원장 김인환 목사가 서울강남노회평대원장상, 인천노회평대원장 김호겸 목사가 인천노회평대원장상을 시상했다. 이어서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가 축도 후 교육전도국장 나현규 목사가 광고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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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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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교육부, 총신대 장로권사대학과 업무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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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부장 이경조 목사) 제20차 임원회의가 2월 26일 오전 11시 총회회관 5층 회의실에서 열려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에서 실시하고 있는 장로권사대학과의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제110회 총회 때 총회 교육부가 총신대에서 실시하고 있는 장로권사대학과 협의할 것을 결의한 후속 조치이다.
이경조 부장은 “총회 교육부가 장로권사대학의 행사에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협력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미 제106회기 때 교육을 필한 자는 총회장 및 총장 공동명의 수료증을 발급하고, 장로고시 일부과목(성경, 교리신조, 정치, 권징조례)를 면제키로 결의했다(총회신학원복원 및 편목과정소위원회 2차 회의 결의사항. 2021. 11. 22).
그러나 노회에 따라 과목 면제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각 노회에 총회와 교육부 명의로 협조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아울러 이미 성경통신대학 과목 이수자는 고시에서 그 과목에 대한 면제를 받고 있기에 거점 별 지방신학교에서 장로권사대학을 진행할 때 이에 대한 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 논의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했다.
앞서 예배는 회계 임계빈 목사가 기도 후 부장 이경조 목사가 고전 3:10을 본문으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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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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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e Covenant Seminary(글로브언약신학교)교수봉사자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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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상의 선교 모델: 선교 현지 ‘교수요원' 배출
미국 Atlanta에 소재한 Globe Covenant Seminary(글로브언약신학교)는 언약적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초교파적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본교는 최근 무슬림 지역과 힌두권 지역에서 신학교 사역을 통해 ‘교육과 선교'를 통합하는 교육선교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Fiji 지역을 중심으로 석·박사 온라인 학위 과정을 새롭게 개설하였습니다.
선교지에서 신학 교육을 통해 ‘교수요원'을 양성하고, 이들이 다시 현지 신학교를 세워 현지인을 교육하도록 하는 선교 방식은, 현대 선교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세계선교학 교수협회 (Association of Professors of Mission)에서도 핵심적인 선교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선교 역량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더 중요한 관심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현지인들의 믿음과 선교적 열정을 어떻게 세계 선교 네트워크와 연결하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 공동체와 같은 선교 공동체를 세워 가느냐에 있습니다.
본 프로젝트는 무슬림 종주국인 Pakistan과 힌두권 지역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서구권 교회에도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과 부흥의 관점에서 긴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영적 문제와 사회적 이슈로 침체된 오늘날 세계 선교에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뿌리를 둔 선교학은, 다양한 종교권의 사람들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새로운 선교 전략일 뿐 아니라, 복음•교회•평신도 신학과 사역•선교를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서 지상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는 교회 개혁과 부흥 운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전 가운데, 글로브언약신학교는 온라인 석·박사 과정에서 강의를 통해 재능기부로 섬겨 주실 교수님들과, 이 교육선교 사역에 함께 동참하실 목회자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강의를 담당하시는 교수님께는 소정의 강의 사례비가 지급됩니다.)
모집 안내
1. 지원 자격
• 언약적 개혁주의 신학에 투철하신 분
• Th.D. 또는 Ph.D. 소지자
2. 담당 과정
• 한국어 과정/ 영어 과정
3. 전공 분야
구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학
4. 제출 서류
• 이력서 1부
이력서는 2026년 3월 15일까지 academics@gcseminary.us 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서류 접수 후 개별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통화를 원하는 분, 카톡ID mylove2500)
또한 교육선교 사역에 관심 있는 목회자 및 사역자께서는 자기소개서를 간략히 작성하여 함께 보내 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점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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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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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3.1운동 제107주년 한국교회기념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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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정석 목사)가 주최한 3.1운동 제107주년 한국교회기념예배가 2월 25일 오전 11시 광림교회에서 있었다.
대표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김정석 감독이 ‘삼일운동과 기독교’란 제목으로 “첫째, 삼일운동은 신앙의 운동이었다. 둘째, 삼일운동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운동이었다. 셋째, 삼일운동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운동이었다.”라고 설교했다.
또한 한교총은 3. 1운동 107주년 한국교회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107년 전,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자주독립을 향한 선열들의 뜨거운 외침은 생명을 갈망하는 함성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존엄을 되찾으려는 신앙의 선언이었다. 이는 총칼이 아닌 만세로, 폭력이 아닌 평화로 맞선 비폭력 항거였으며, 오늘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결단이었다. 이에 한국교회총연합은 3.1운동 107주년 한국교회 기념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교회는 진리의 자유를 수호하며 정의(正義) 사회를 세워갈 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양심과 종교의 자유 위에서 기독 사학의 자율성과 복음의 진리를 굳게 세우고 성경적 가치와 정통 윤리를 훼손하는 입법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며,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는 정의 사회를 실현할 것이다.
2. 한국교회는 국민의 생존(生存)을 위한 파수꾼이 될 것이다.
선열들이 피로써 지켜낸 민족의 미래가 저출생과 자살, 중독과 낙태로 위협받는 현실 앞에서, 국민의 생존을 해치는 구조와 문화에 단호히 맞설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인도(人道)주의 정신으로 창조 세계를 보전할 것이다.
자연을 인간 중심의 자원으로만 인식해 온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에 대한 인도적 요청에 응답하며,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한 공적 책임을 다할 것이다.
4. 한국교회는 민족의 존영(尊榮)을 위해 힘쓸 것이다.
환대와 화해의 복음으로 남북 간 국토와 문화의 단절을 넘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존영과 한반도의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5. 한국교회는 근대문화유산을 미래 가치로 계승(繼承)하여 공적 책임을 다할 것이다.
정의(正義), 생존(生存), 인도(人道), 존영(尊榮)의 가치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초석을 놓은 신앙 선배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미래 세대의 가치관 속에 살아 숨 쉬는 공공적 자산으로 계승해 나갈 것이다.
앞서 1부 예배는 공동대표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총회장 정정인 목사의 인도로 공동대표회장,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홍사진 목사가 기념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안성우 목사가 기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총회장 이상규 목사가 슥 9:9~12을 봉독, 광림교회 연합성가대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Giuseppe Verdi)’을 찬양했다. 대표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김정석 감독이 설교 후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장 김성규 목사가 축도하고, 본회 총무, 기독교한국침례회 총무 김일엽 목사가 광고 및 내빈소개했다.
2부 기념행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최인수 목사의 사회로 민족대표33인중 故 연당 이갑성 집사(남대문교회)의 3.1절독립선언문 낭독 영상 시청 후, 대표회장 김정석 감독이 인사말했다.
그리스도의교회교역자협의회 총회장 정기원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보수) 총회장 피용희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개혁) 총회장 김명희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동신) 총회장 가성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한영) 총회장 우상용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합총) 총회장 오표자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총회장 허호성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예정) 총회장 박광철 목사가 특별기도했다.
이어 대표회장이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 후손에게 영예패를 전달했다.
김병조 목사 손자 김 혁 님, 양전백 목사 증손 양경오 님, 이명룡 장로 증손 이호준 님, 이승훈 장로 고손 이기대 님, 이갑성 집사 손자 이재현 님
끝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개신) 총회장 신용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 총회장 안상운 목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총회감독 최형영 목사가 성명서를 발표 후 다같이 일어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선목) 총회장 김국경 목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삼창 후 애국가를 제창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 정동균 목사의 폐회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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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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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 신학과 총동창회 정기총회, 신점일목사 회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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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 신학과 총동창회 제3회 정기총회가 2월 23일 오후 5시 총신대학교 종합관 2층 주기철기념홀에서 열려 신점일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황석형 직전회장이 “동창회를 섬기는 것이 너무 기쁘기에 임기 후에도 계속해서 섬길려고 한다.”라고 인사말했다.
신점일 신임회장이 “기수별, 지역별 동창회를 활성화 해볼려고 한다. 지역별 책임 맡은 동문들이 활성화를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오늘 동창회 총회에 참석한 동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학창시절 은사이신 박희석 교수님, 대선배이시면서도 애정으로 후배들을 돌봐주시는 나성균 선배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창회가 출범해서 2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고 모든 동문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창회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고 방향성도 조금은 희미한 부분도 있지만 임원 여러분들이 열심으로 헌신했기에 그래도 이만큼 발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초대 회장 정귀석 목사님, 2대 회장 황석형 목사님, 감사하고 지난 2년 동안 내 교회를 섬기듯 선후배의 깊은 사랑으로 잘 섬겨준 임원 한 분 한 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동창회는 재학생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동문들에게는 친교뿐 아니라 동문들과 동문들의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선배던 후배던, 교회 규모가 크던 작던, 교회가 어디에 위치해 있던 모든 동문들이 함께 어울리며 위로받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역할 수 있는 동창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목회를 하지 않는 동문들에게도 따뜻하게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동창회가 동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고 각 학번의 동기회와 지역동창회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동창회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동창회를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관심과 협조 바랍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서기 김양천 목사의 인도로 부회장 신점일 목사가 기도, 회장 황석형 목사가 왕상 21:16-19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가치, 세상의 가치’란 제목으로 “우리 안에 아합의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욕망의 선악과가 우리 안에 있다. 교인들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욕심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을 세상에 남길지 고민하는 우리 동문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나성균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총신대학 박성규 총장이 “동문들로 인해 학교가 더 좋아져서 감사드린다. 올해 대학 신입생들이 많이 지원했고, 기숙사는 올해 8월에 착공해 내년 8월에 완공할 계획이다. 5월 14일에 개교 125주년을 맞아 총신대학교에서 ‘총동문 한마음 잔치’를 하는데 많은 참여 부탁드린다. 또한 나성균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계속 기숙사를 위해 헌금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말, 이국진 목사(총신대학교 총동창회 후원회장)가 “3회 총회로 모여 감사하다. 나무 뿌리가 옆으로 뻗어 다른 나무의 뿌리와 엉켜 있으면 쓰러지지 않고 든든히 선다. 저도 유학시절 동문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견뎌온 것 같다. 서로 힘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2부 총회는 회장 황석형 목사의 사회로 박희석 교수가 개회 기도, 총무 손정욱 목사가 사업 보고, 회계 서상배 목사가 회계 보고, 회칙 수정, 임원 선출, 임원 교체, 신임회장이 전임회장에게 공로패 및 꽃다발 증정 후 폐회하고 전병철 목사가 식사기도한 후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학번별 인사
* 광고
1. 제3회 신학과 동창회 총회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배와 총회를 위해 순서를 맡아주신 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과 참석하신 모든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 식사 제공/ 총회 후 1층 식당에 도시락이 준비돼 있습니다.
3. 동기회 및 지역 모임 활성화/ 학번별 동기회와 지역별 모임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4. 카카오톡 단체방/ 동문들의 경조사와 사역,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축하하고 위로하며 사랑으로 소통하는 교제의 장으로입니다. 올라오는 글에 관심 가져 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소견이나 사적인 글, 퍼다 옮기는 글, 광고, 신문기사 등은 게시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5. 회비/ 연회비(1년)는 10만 원이며, 매월 납부 시 월 1만 원입니다.
- 회비 계좌: 신한은행(서상배: 신학과 동창회 회비통장), 110-594-87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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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오피니언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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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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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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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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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3】 IMF 풍랑 속에서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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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풍랑 속에서 선교
1997년에 한국에 IMF의 풍랑의 파도가 덮쳤다. 갑자기 다가오는 풍랑의 파도에 국민 모두가 힘들었다. 이 파도가 교회에도 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들이 선교사 파송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선교사들에게 후원하는 후원금이 줄어들거나 후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을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금 모으기 운동으로 어린아이들의 돌잔치에 마련했던 금반지를 비롯한 귀한 것들을 내어 놓으면서 국민들이 힘을 모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교회들도 일부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미루거나 후원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교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을 중단하지 않고 우선으로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도 1997년에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그 해 9월에 답사를 요청하였다. 9월에 몽골에 처음으로 방문하여 몽골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교회에 보고하여 우리 가정을 몽골의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교회가 결정하였다. 우리 가정을 몽골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그 다음 주에 IMF가 발생하였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파송을 연기하자는 의견과 파송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그 다음해인 1998년 2월에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몽골에 선교사로 나아가는 목표는 한국에서 만났던 몽골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다. 당시에 한국에서 많은 몽골인들이 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이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교회의 섬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 한국에 출석했던 필리핀 성도들이 필리핀에 돌아간 이후에 이들을 방문해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후에 결심하게 되었다.
"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막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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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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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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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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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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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소위 “스타” 목사 박영선, 김문훈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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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몰락했다. 한때 한국교회를 들썩였던 스타 목사였다.
박영선 목사는 내가 신학교 시절이던 80년대 신학생들을 매혹했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는 잊혀졌는데 최근 뜬금없이 개척교회 40억 요구 건으로 언론에 언급되다 결국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김문훈 목사는 교역자에 대한 욕설 녹음이 공개된 후 고신 교단 부총회장직과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감추었던 그들의 실체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한때 그래도 깊은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었는데 망연자실하다.
목사는 타종교와 달리 쉽게 팬덤이 형성되고 스타 반열에 오른다. 불교, 천주교에서 이들처럼 명성을 떨친 이들이 있었는가? 기독교는 설교 중심이다보니 설교를 잘 하는 자는 주목을 받는다. 과거 전병욱도 그랬다.
스타 목사의 이면과 몰락을 보며 다시한번 다짐한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지 말자.” 인간이란 잘 난 것처럼 보여도 다 그렇고 그러니 너무 높이지 말고 따르지도 말자. 그랬다가 이처럼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것이 없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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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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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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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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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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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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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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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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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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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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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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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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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의 케리어우먼이 유방암에 걸렸다. 이후 전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면서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 언젠가 암으로 진단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질병이든, 사고든, 죽음이든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삶의 길목에 선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철거덕 하고 닫혔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내던져졌다. ‘도대체 왜 내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가장 컸다. 2019년 12월,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SNS의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일과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 앞에선 나 역시 한없이 약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치료되지 않으면 어떡하(p. 5)지?, '전이되면 어떡하지?', '죽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그동안 고통이나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안온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경제적 어려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와의 이별, 허리 디스크와 같은 질병의 고통, 열정을 쏟았던 일의 중단 등 다양한 고통과 위기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기쁨과 행복,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삶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주가 내 삶 속에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암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암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암이 내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고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영영 무채색 같은 삶을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암 진단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과 행복과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여전히 삶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p. 6) 인생은 계속됐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는 삶도 내 인생이었고, 이 시간 또한 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기니 절망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어둠에서 나와보니,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강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암 진단 이전엔 지나치게 자아가 비대해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삶을 만들어야 만족했다면, 암 진단 이후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분이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훨씬 넓고 깊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항암-수술-방사선치료라는 3대 표준치료를 마친 나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 먹고 싸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알아버렸기에,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 잘 가고 한밤 중에 여러 번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유지만 되어도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크(p. 7)다.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동안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졌다. 그렇게 암은 내게 곰국처럼 진한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을 진단받고 처음의 내 모습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알아요."(p. 8).
밤 9시 반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여보세요. 양선아 씨죠? 저는 청주시 버스운전사인데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어요. 종점에서 버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지갑과 안경이 들어 있는 가방 주인 맞으시죠?" 세상에! 가방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으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후 2시 반께 버스에서 내렸으니, 가방이 온종일 버스 좌석에 놓여 있었을 텐데 아무도 가방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또 버스 기사님이 명함을 보고(p. 48) 연락을 해준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쳐 나는 기사님께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가방이 돌아왔어요! 가방도 돌아 오고 상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내일 항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항암 전날 대부분의 환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루 동안 급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그날 너무 피곤 해 '꿀잠'을 잤다. 버스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나비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날 나는 훈훈한 마음과 함께 친절과 배려, 정직의 미덕을 배웠다(p. 49).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방귀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배에서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 식구가 정말 질식사할 정도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 고통도 웃으면서 넘겼다(p. 65).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변비 특효약'을 떠올리셨다. 바로 키위! "선아야, 예전에 엄마도 수술했을 때 변비 때문에 엄청 고생한 적 있거든, 뭘 먹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키위 있잖아, 그 키위를 먹고 바로 시원하게 변을 봤어. 밤에 자기 전에 유산균을 먹고, 키위도 좀 먹어보자." 마트로 달려가 당장 골드키위를 샀다. 그리고 바로 키위 두 개를 흡입했다. 저녁에 유산균도 먹었다. 키위를 잔뜩 먹은 다음 날, 정확히 항암 뒤 7일째 되던 날이다. 그날도 아침 식사 뒤 키위를 먹고 있는데 신호가 왔다. 바로 화장실로 달렸다. 뿌지지지직....단단히 막혀 있던 변이 드디어 내 몸을 탈출했다. 쾌변이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행복감이 솟았다. 영유아 시기 아이들이 '배변 독립'을 할 때 이런 뿌듯함을 느끼려나.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그 날 이후 내 목소리도 낯빛도 달라졌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몸동작도 날렵해졌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웃고 다녔다. "이제 좀 살겠는갑네. 얼굴 보니까 살아났구만, 살아났어. 완전 다르네~"(p. 66). 남편이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항암 1차 이후 일주일, 똥에 죽고 똥에 산 한 주였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라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의 마지노선은 엄청 낮아졌고, 행복을 느끼는 빈도수는 늘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p. 67).
머리카락 빠지는 문제에 며칠 동안 부대끼면서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도 생긴다. 그래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기쁠 땐 제대로 기뻐하고 슬플 땐 제대로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 상실감으로 힘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시간이 너무 단축돼 편리했다. 머리를 말리거나 헤어스타일 고민할 필요 없이 비니 같은 모자만 쓰면 되니 간편했다. 또 기분 따라 가발로 헤어스타일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재밌었다. 원래 나는 모자도 좋아하는데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써보는 기회도 가질 수(p. 77)있었다. 더운 여름엔 비니만 간편하게 쓰고 시원하게 보내고, 겨울엔 가발로 따뜻하고 다채롭게 보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제는 새롭게 움튼 머리카락을 보며 또 다른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항암제 공격으로 두피 세포들도 힘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자란다. 1년 만에 미용실을 찾아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발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고 통쾌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구었던" 나무들이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이재무, 〈가을 나무로 서서〉, 《몸에 피는 꽃》, 창비, 1996)을 예고하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봄이 오고 있다(p. 78).
본 병원 의사와 면담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지만 한방 병원에서는 의사 면담을 30분 넘게 한다. 의사는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비급여 항목 치료가 많아 치료비가 비싼 만큼 암 치료 전문 한방병원 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담당 한의사는 상담 중 내가 눈물을 보이자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또 "지금은 울지만 백혈구 촉진제 맞으면 호중구 수치도 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비니 없나 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격리된 병실에서 후배가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봐요, 이렇게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힘내셔야죠"라며 격려해주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게는 '보약'이고 '치료제'였다(p. 84).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듯, 항암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을 수시로 만났다. 그때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혈관이 딱딱해지는 현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책이나 의사, 환우들에게 객관적인 정보 및 각종 경험담 수집)에 집중했다. 부작용 이야기를 들으니 굳이 무리해서 케모포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의사 의견대로 일단 팔 혈관으로 항암을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p. 115).
먹는 것이 고역인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먹방(먹는 방송)'이다. 항암 부작용으로 힘들어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나도 비로소 먹방 월드에 입성했다. 집에서는 친정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내 앞에 앉아 밥숟가락을 다 뜰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밥을 먹었다면, 병원에서는 먹방을 틀어놓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숟가락을 들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수미네 반찬〉, 〈신상출시 펀스토랑〉(p. 137), 〈맛남의 광장〉 등 먹방은 얼마나 다채롭고 끝이 없던지.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환호하고 맛을 즐기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과거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을 했고, 먹방은 상업적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다. 그런데 암 진단 뒤 혀의 감각을 잃고 매끼 챙겨 먹는 일이 고역이 된 뒤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껏 저렇게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먹은 적 있던가? 나는 나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렇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본 적 있던가?' 그동안 내게 식사 시간은 감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매 끼니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따라서 식사 시간은 내 시간을 빼앗는 무엇이었다. 취재원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음식보다는 취재원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하므로 음식을 먹 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은 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던가. 내가 먹는 것들은(p. 138) 내 세포를 만들고 몸 구석구석에 가서 내 몸과 마음이 잘 작동하도록 해주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병사 역할을 해준다. 그 고마운 음식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매끼 맛을 음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엄마가 정성들여 보내준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 139).
암 치료 관련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한다. '대사치료'의 대가 나샤 윈터스 박사는 저서 《대사치료, 암을 굶겨 죽이다》(처음북스, 2018)에서 암 치료에 있어 채소 섭취가 중요한 이유는 채소의 식물 영양소가 DNA 손상을 예방하고 결함이 있는 DNA를 복구시켜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이라는 질병은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해 통제 불가능하게 분열하고 신체 여러 부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DNA 손상을 예방해주는 채소를 평소 많이 챙겨 먹는다면 자연스럽게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윈터스 박사는 특히 십자화과 식물을 추천하는데, 십자화과 식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 콜리플라워, 콜라비, 무 등이 있다. 십자화과 식물은 우리 몸에서 잠재적인 발암물질을 제거하고 종양 억제(p. 141)" 유전자의 작용을 강화해준다고 한다(p. 142).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을 하고, 가슴 한쪽을 잘라낼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모든 일은 천둥 치듯 별안간 일어났고, 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내린 이 소낙비에 내 방식대로 대처해야 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편인 나는 비교적 빨리 암에 걸린 일을 수용했고, 항암치료라는 난관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8번의 항암 끝에 왼쪽 가슴을 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 그 느닷없는 삶의 '펀치'를 맞고 나는 한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p. 152)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감각을 마비시켜 비합리적인 사고를 확장시킨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지금 삶'마저 엉망으로 만든다(p. 153).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항암 8차를 하고 암의 사이즈를 줄여 부분절제를 하기를 원했던 나는 암 크기가 현격하게 줄지 않아 전절제를 해야 했다. 그 독한 항암제를 투입할 때도 씩씩하게 버텨온 나는 전절제 결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 더 슬퍼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어찌(p. 190)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최종 수술 결과를 보니 애초 발견된 암 외에도 그 옆에 제자 리암(암세포가 비정상적인 증식을 일으킨 부위가 상피 내에 국한 된 경우를 말하며 상피내암으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고 하니 전절제는 내게 딱 맞는 결정이었다. 제자리암은 유관이나 소엽의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아 덜 위험하다고 하지만, 제자리암이 또다시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분절제를 선택했다가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고 그 힘든 항암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봤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유방외과 의사의 전절제 결정은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섣불리 좋다 나쁘다 판단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나중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도 그 일로 되레 새로운 삶의 의미를(p. 191) 찾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보았다(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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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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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4】 자신의 고통을 글로 치료한 작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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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는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로서 여러 책을 읽었다. 하지만 사후 발간한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읽지 못한 나머지 책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한국전쟁 때 오빠를 잃었고, 57세 때 3개월 간격으로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잃었다. 이 고통을 글로 아로새기며 아픔을 삭였다. 작가의 고통은 수많은 책으로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 자기 삶을 책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유산이 될 것인가!
아무에게도 봉사하지 않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 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설 쓰기를 이어간 것은 순전히 이기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에게 이 일은 이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 전신을 던진다는 것은 이기심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p. 28)를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함이 있었기에 박완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살림에 치여, 그래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거 보여주었으면 됐지, 하고 그만두었을 일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취미로 하기엔 글 쓰는 건 힘들어요. 요즘 여자들 글 쓰고 싶어들 하지요." 오한숙희와의 인터뷰에서 박완서가 한 말인데, 제법 뼈 있게 들린다. 박완서가 중년에 맞이한 변화는 취미 하나 시작한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에게 등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여성동아〉 신인 작가상을 받은 후 글 몇 편 써보다 그만두었다면, 헛헛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p. 29).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인생 전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때이면서 사회와 문화가 자신에게 부과한 역할에 충실한 시기이지만, 인생 후반기는 주어진 규범과 사회적 인정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사는 시기라고 했다. 온전한 독립은 이때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사는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 후반기가 충만하지 못하다고 그는 말한다. 중년은 인생이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의 몸은 제법 공평하게 마흔 줄에 이르면 신호를 보낸다. 혹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으로 마흔이면 국가가 생애 전환기 건강검진 안내서를 챙겨서 보내준다. 평균 수명을 여든으로 본다면, 마흔은 인생의 딱 중간 지점이다. 작가 박완서도 딱 여든까지 살았다. 물론 누구나 그처럼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조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생애 전환기에 한 번쯤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p. 35). 그것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예의라면 예외일 것이고, 그 인생의 주인인 자신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p. 36).
트라우마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와도 같다. 원한 있는 혼령들의 이야기가 많은 동양에서는 죽은 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귀들도 산 자를 통해서 해결을 보려 하므로 결국 트라우마는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이다. 트라우마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캐시 카루스 (Cathy Caruth)는 트라우마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서 반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을 괴롭힌다. 또한 트라우마는 끝내 이해하지 못할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p. 89)에 반복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즉, 트라우마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경험에 대한 반복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사로잡는 기억이 반복해서 그것을 말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트라우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으며, 그 들음을 통해서 나의 트라우마는 타인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p. 90).
트라우마로서 박완서의 전쟁 경험은 1973년에 발표한 단편 〈부처님 근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증상들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특히, 떨칠 수 없는 그 기억이 어떻게 박완서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찾게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이 산 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자신이 실제로 느꼈던 것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았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게 박완서의 전쟁 경험 이야기들이 다른 어른들의 전쟁 이야기와 다르게 와닿는 이유는 이러한 트라우마적 속성 때문이다. 박완서 자신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통해서 분단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고발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통일 주장도 직업이 될 만큼 분단 문제가 정치화되기만 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고, 1981년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소감문에(p. 91)서 밝혔다.
박완서의 전쟁 경험의 핵심은 오빠의 죽음이다. 해방 후 잠시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오빠가 그 경력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어, 나머지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오빠를 기다렸다. 공산 치하의 서울에 살면서 오빠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꼈던 박완서는 큰 저항 없이 서울대 캠퍼스에 동원되어 몇 가지 일들을 했다. 그러나 이내 동조할 수 없어 슬쩍 빠졌는데, 서울 수복 후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심하게 심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서울이 수복된 후 오빠는 어찌어찌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때 이미 오빠는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박완서의 가족은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납북되었던 오빠가 한강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시민증을 얻지 못해서 애를 태우게 된다. 그러던 차에 친척의 도움으로 군속 신분으로 피난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부대에서 하루를 보내던 중 오빠가 사고(p. 92)로 양발에 총상을 당해 결국 온 가족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공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되었다. 처음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리 피난을 독려하였기에 서울은 텅 비었고, 그 빈 도시에 그의 가족은 남았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는 텅 빈 서울에 남은 그가, 자신이 심문을 당하며 버리지 취급을 당한 것과 피난도 못 가고 서울에 자기 가족만 남게 된 이 기막힌 사연을 언젠가는 글로 쓰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박완서의 이러한 결의는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것을 증언하겠다는 욕구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p. 93)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p. 94).
마지막으로 박완서가 그 아름다움에 밤을 새웠다던,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t Lohfink)의 시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p. 136)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p. 137).
박완서는 갓 스물에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이 넘나들었던 사선의 기억을 딛고 일가를 꾸려 자녀와 손자녀를 보며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57세의 나이에 남편과 아들을 다 잃으면서 다시 한 번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 후 그는 홀로서기에 주력(p. 160) 하면서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제는 조금씩 자신의 죽음도 준비했다. 그가 남기고 가고 싶어 한 것은 자식들이 품은 자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자신의 소유물도 남 기고 싶지 않아, 가능하면 부지런히 버렸다고 한다.
이는 소노 아야코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남편을 보내고 버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말을 2년 전 만났을 때 했다. 하지만 노년의 죽음 준비와는 다르게 중년의 죽음 준비에 생산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과제일 것이다. 박완서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하는 정신적 전성기는 전혀 늘어난 것 같지 않고 되레 후퇴한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이런 유치한 감정적 반응과 생각이 올라온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우리 시대가 어른보다는 같이 놀아줄 친구를 더 요구한다는 것도 어른 노릇을(p. 161)꺼리게 하는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성숙하게 사는 시기가 길어진 게 아니라 미숙하게 사는 시기만 늘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축복이기 힘들 것이다. 중년은 이 '한 사람의 몫' 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는 때이고, 그것이 중년의 죽음 준비가 가질 수 있는, 노년과는 다른 생산성이라고 생각한다(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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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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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2】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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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의 선교이해
선교적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되는데 담임목사의 선교이해가 너무나 중요하다. 담임목사는 매주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님들은 해외선교만을 선교라고 이해한다. 목사님들처럼 성도들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이주민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지 않아서 이주민선교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런데 나를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신 조원형 목사님(현재는 천산중앙교회 원로목사)은 국내에 온 이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가 이들을 품고 선교하시고 선교사로 파송하시고 국내에 들어 와서 선교하실 때에도 지원을 하여 주셨다. 그래서 몽골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페루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총회에서는 초대 총회 이주민선교협의회 회장을 맡으셔서 교단 내에 이주민선교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셨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는 연초에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부흥회를 하였다. 교회에 있는 필리핀, 몽골, 페루 성도들은 교회의 한 가족처럼 지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교회의 큰 행사에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필리핀 성도 중에 한 명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숙소에 와서 잠을 자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무관심하였다. 이때에 담임 목사님은 필리핀에 있는 사망한 가족들만 아니라 필리핀 동료 가족들 모두를 모든 비용을 교회가 마련해서 한국에 초청하여 관광을 하면서 모든 가족을 위로하였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 교회에 축복하셔서 630평의 공장 부지를 주셔서 그 땅이 지금 그 교회의 교육관과 선교관이 되었다.
담임목사가 선교를 해외선교만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도 중요한 선교로 이해하고 헌신 할 때에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나를 선교사로 파송한 천산중앙교회에서 눈으로 확인하였다.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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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8
문화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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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철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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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이 길게 놓여 있다.
비록 끝이 보이지는 않으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철길이 없으면 어떤 철도도 달리지 못하기에
같은 철길을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사용한다.
무궁화, 새마을 그리고 ktx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요금도, 소요 시간도 다르다.
이 철도길은 오늘 어떤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인가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기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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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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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부추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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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께서 동네 친구분에게 얻어오신 부추가 심겨 있다. 어느 날 장독대 대형 화분에 몇 포기 옮겨 심었다. 이전에는 꽃을 심었었다.
가끔 자라난 부추를 잘라 먹었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져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흐느적거리는 풀같았던 줄기가 꼿꼿이 세워지고 키가 자라 끝 쪽에 뭔가 맺히더니 작은 꽃을 피웠다. 참 요물이다. 잘라 먹을 때는 풀같았는데 그냥 내버려두니 계절을 따라 생존을 위해 꽃을 피운 하나의 꽃이 되더니 신기해 유심히 보는 사이 벌도 날아와 꽃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추꽃은 처음 봤다. 늘 집이나 식당에서 음식 부재료로 먹던 풀 같은 것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다. 도심 옥상에서 부추꽃을 보니 서울 촌놈이 행복하다.
식물은 번식을 위해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통해 수정한다. 그렇게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사람도 꽃이다!
화려한 장미, 매혹적인 목련도 꽃이지만 부추도 꽃이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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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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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안빈낙독은 안빈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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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이란 말이다. 내겐 안빈낙독(安貧樂讀)이 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한다”는 뜻이다.
교단 기자는 담임목사 때보다는 가난하다. 담임목사로서 보장되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없다. 차량 유지비도, 통신비도 모두 교회가 부담했었다. 담임 부임 때 구입했던 트라제XG를 가져와 아주 가끔 사용하고 주로 세워둔다.
기자로 취재현장을 다닐 때 대중교통이 편하고, 취재비 받아서는 차를 운영할 수 없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은 있으나 늘 책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취재가방에 언제나 책을 갖고 다닌다. 집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은 책이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운전하는 것이 불편한다. 운전하느라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잠시 취재 갔다가 다음 취재까지 짬이 생겨 굳이 한 장소를 찾아 왔다. 종로쪽에 있는 저렴하고 넓직한 카페이다. 종로 쪽에 올 때 시간이 비면 와서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내게 독서 취미가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었다. 다행히 지금도 독서가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책을 읽으면 취재 현장까지 가는 것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비어도 좋다. 책 읽고 있으면 되니까.
모두 안빈낙독의 삶을 사시기를. 엉뚱한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책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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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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