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
- 오피니언
- 칼럼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
- 오피니언
- 칼럼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9】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죽을 때
-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
【북토크394】 시기 질투가 불러 일으킨 복잡한 인간사
-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물, 특히 베스트셀러 『가면 산장 살인 사건』에 열광했던 독자라면 무척 반길만 한 또 하나의 ‘클로즈드 서클’, 이른바 ‘밀실 살인’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소위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시리즈’ 3부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 소설은 고립된 산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어찌 보면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서는 패턴화된 설정일지 모르지만, 그곳에 모인 7명의 남녀가 어느 연극의 오디션에 합격한 배우라는 점, 그들이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살인극을 벌이게 된다는 점 등으로 연극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든 이중, 삼중의 구조 속에서 살인조차 그것이 실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단지 설정에 불과한 것인지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스릴 넘치는 불안감을 안겨 준다.-교보문고. 두 번째로 읽은 이 작가의 책인데 손에 땀이 날 지경은 아니다. 그래도 흥미롭게 봤고, 계속해서 이 작가의 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말하지." 혼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살인극은 연극이 아니야. 우리가 연극이라고 생각할 뿐, 죄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앞뒤가 맞아. 범인은 원래 꽃병을 쓰레기통에 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 예상치 않게 피가 묻자 뒷마당에 버리고 대신 이 쪽지를 써서 쓰레기통에 넣은 거야. 요컨대 아쓰코도 유리에도 진짜로 살해당했다는 얘기야." "말도 안 돼!” 다도코로 요시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녀석의 얼굴을 봤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입술까지 하얬다. 그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가 말했다. "그 입다물어, 멋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응, 그러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까."(p. 181). "내일이면 끝나. 어떻게든 내일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난 싫어. 전화할 거야." 다도코로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혼다가 그의 어깨를 위에서 꾹 눌렀다. "오디션이 물거품이 되고 말텐데."(p. 194). 그 한마디는 효과가 있었다. 다도코로의 물이 마치 스위치를 끄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디션……그렇구나." "그래, 바로 그거야." 아마미야가 나직이 말했다. "난들 왜 전화하고 싶지 않겠어, 이렇게 불안하고 힘든데 말이야. 하지만 만약 이게 모두 선생님의 계획이라면 전화하는 순간 우리는 실격이야." "실격당하고 싶지는 않아." 나카니시 다카코가 울먹이며 말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치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 마찬가지예요." 구가 가즈유키가 말했다. "그렇군...." 다도코로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p. 195). "아마미야도 연락했더라. 다들 걱정한다고." "아마미야? 그 친구가 연락했어?" "응. 아쓰코와 유리에에게도 전해 달라고 얘기해 두었으니까 조만간 면회하러 올지도 몰라." 아마미야 교스케도 모토무라 유리에도 살아 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그들은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도중에 발이 묶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짓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복수할 요량으로 전화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리얼한 연기에 나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한편 나는 의사에게 내 몸 상태에 관해 듣게 되었다. 외상은 대단치 않지만, 하반신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중추 신경이 망가졌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허리 아래로는 근육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하반신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며칠을 계속해서 울었다.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일이라고는 해도, 그 경위를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증오심이 끓어 올랐다. 물론 그 세 사람에 대한 증오다. 나는 엄마에게 그들의 면회를 철저히 막아 달라고 했다(p. 324). 구가 가즈유키의 독백 "그때 내 대답이 다소 늦었던 건 사실이야." 아사쿠라 마사미의 긴 고백이 끝나자 혼다 유이치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대답이 망설여져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확인해야겠기에 그랬던 거야. 사실은 마사미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은 순간 나도 세 사람을 죽이고 싶었어. 마사미에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봐. 마사미가 왜 타이어에 펑크를 냈는지, 세 사람은 그 점을 먼저 되돌아봤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리 앙갚음하려 는 의도였다 해도 그 거짓말은 너무했어. 도가 지나쳤다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내 잘못이야."(p. 328). 가사하라 아쓰코가 아까보다 한 격렬하게 흐느끼며 말했다. 내가 내뱉은 말 때문이야.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꼼짝 못 하게 되었을 때 곧바로 마사미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사고가 일어나서 두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반성할 거라고 생각했어, 모두 내 잘못이야."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모토무라 유리에도 눈물을 흘렸다. "아쓰코 탓만은 아니야. 나도 반대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경쟁이라도 하듯이 참회하려는 세 사람을 "자, 자" 하고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 나서 나는 혼다에게 물었다. "그래서 살인 계획을 세웠다는 말인가요?" "계획은 제가 세웠어요."(p. 329). "나도 잘 모르겠어. 물론 연극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났지. 하지만 중단시키고 싶지는 않았어. 이 연극을 한번 구경하자는 생각이 들더라. 대체 어떤 식으로 연기하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녀는 비탄에 잠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 연기가 꽤 그럴듯하던걸." "마사미!" 아마미야 교스케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휠체어로 달려가 아사쿠라 마사미의 발밑에 엎드렸다(p. 342). "미안해.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어떻게 든 갚게 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 뭐든 말만 해." 가사하라 아쓰코와 모토무라 유리에도 그녀 앞에 쓰러져 흐느꼈다. "세 사람 다 연극을 그만두겠대." 혼다가 말했다. "그리고 너를 위해 뭔가 하고 싶대." "그래?" 아사쿠라 마사미가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너희들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세 사람이 동시에 얼굴을 들었다. "왜냐하면," 아사쿠라 마사미가 말을 계속했다. "우선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야. 이제 겨우 살인범이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난 처지니까." "마사미......" 혼다 유이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사쿠 라 마사미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p. 343). "너희들, 연극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그녀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연극을 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새삼 그런 생각이 드네." 지금까지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던 아사쿠라 마사미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내 옆에 서 있던 다도코로 요시오도 훌쩍거렸다. 나카니시 다카코는 아예 엉엉 울고 있다. 이런 모질지 못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이런 신파극으로 그 눈 높은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어? 게다가 탐정 역인 내 존재가 완전히 빛을 잃었는데 말이야. 내가 이 추리극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눈시울이 시큰거리잖아! 이런 일로 울다니, 바보같이. 이 정도 일로 울면 신파라고, 신파. 울지 마. 울지 말라고. 울지 말란 말이야.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나카니시 다카코가 내 옆에 서서 "여기요." 하며 흠뻑 젖은 손수건을 내밀었다(p. 344).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4】 시기 질투가 불러 일으킨 복잡한 인간사
-
-
【양대식 목사 칼럼17】 사랑받는 비결
- 사랑받는 비결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데,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간에게 사랑받는 자는 길이 열리고, 성공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비결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겸손히 섬겨주고, 헌신, 희생하는 자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고,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 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하면 희생하는 것이 짐이 아니고, 기쁨입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이 없고, 희생 없이 열매 맺는 것은 없습니다. 리더는 섬기고, 희생하는 자입니다. 머리가 좋은 것이 좋은데, 지혜가 없어 자기 유익만 구하고, 이기적이며, 꾀를 부리는 자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섬기고, 희생하는 자는 점점 잘 되고,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희생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꾀부리고, 요령 피우는 자는 시간이 갈수록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정받고, 신뢰 얻는 것이 삶의 축복입니다. 말세는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인데,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리더들은 희생의 본을 보여 준 자들입니다. 희생 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희생하는 자는 누구나 좋아하고, 좋은 소문과 평판이 나서 관계가 좋아지고,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사람들도 나의 삶을 지켜봅니다. 누가 꾀부리고, 요령 피우고, 희생하는지 보고, 마음으로 평가합니다. 누구나 희생하기 싫어하는 시대에 나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고, 실천 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리더가 먼저 희생할 때, 리더가 섬기는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전도가 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구원받는 길이 열립니다. 나누고, 도와주고, 돈을 주고, 대접하고, 헌신하며, 희생하는 자를 누구나 좋아합니다. 말만 가지고 되는 것은 없으며, 희생으로 모든 것이 세워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내게 기억되고 생각나는 자는 나에게 선물 주고, 대접하고, 사랑 주었던 자들입니다. 순간마다 쉽게 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희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는 것 같으나 계속 속지 않으며, 희생한 자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을 시킬 때, 감사함으로 희생하고 일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사랑받게 됩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양대식 목사 칼럼17】 사랑받는 비결
-
-
【북토크393】 삶에 대한 통찰력이 부럽다
- 2015년 봄에 출간되어 어느덧 10년 차 스테디셀러로 접어드는 산문 《태도에 관하여》는 20만 독자들의 견고하고 한결같은 지지에 힘입어 거의 매달 중쇄를 찍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태도에 관하여》는, 상투적인 위로나 동기부여 대신 현실적이면서도 때로는 냉철한 조언을 건네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작가 특유의 솔직하고 담백한 문체는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한 독자는 “삶을 철학하게 만드는 솔직한 텍스트”라고 평했으며, 또 다른 독자는 “인생의 지침서”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작가가 말하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다섯 가지 태도’는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고민하던 남녀 모두의 지표가 되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40세대의 ‘인생 책’으로 자리매김했다.-교보문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남달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저자의 책을 더 찾아 읽을 것이다.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인생 선택을 내리는 일에 주저하는 것은 삶에는 통제 가능한 부분과 통제 불가능한 부분이 있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을 때가 있다. 진실은, 재능과 능력 있는 사람이 온힘을 다 해 노력하고 거기에 운이 따라주면 그때 어쩌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 이다. 재능이나 운을 논하기 이전에 노력부터 하기가 버거운 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 운이라는 그 불확실성마저도 우리를 불안하고 시무룩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인생을 놔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애초에 완벽한 선택, 완벽한 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충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정답 같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숱하게 실패한 선택들이 공존 했을 것이다. 실패를 통해 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틈을(p. 23) 보완하며 계속 스스로에게 인생 결정권을 부여했을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실패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다. 2005년 갑상선암이 세 번째 재발해서 수술을 받고 회사에 휴직계를 내려다가 사표를 썼다. 꼼짝달싹 못 하고 집에 누워 있는 일은 너무 힘들었고 이럴 바엔 회사에 나가 살살 일하는 게 정신적으로 편할 것 같았다. 한창 뻗어가야 할 서른 초반에 커리어를 단절하는 것도 너무 섣부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후회한 적도 있었다. 12년간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냈던 일중독자의 습성이 몸과 정신에 각인되어 있으니 자꾸 회사 쪽으로 안테나가 뻗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워 있을 때 팽팽 돌아가던 정신과는 달리 현실 속 내 몸은 집 밖에 나가면 아파트 단지를 겨우 일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일하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고 자본도 필요 없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가 유일했다. 글쓰기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지만 그것이 당시 상황을 움직일 수(p. 24)있는 유일한 선택지였고 나는 그 선택을 행동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언 19년째, 지금도 '일'로서 글을 쓰고 있다. '아, 역시 글쓰기가 천직이었어. 내 인생의 기적 같은 대전환이야'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 말고는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뿐이다. 기업의 중역으로 승진한 또래 직장 여성들의 기사를 볼 때면 질투가 나면서 과거 그 시절에 글쓰기로 빠지지 않고 좀 더 쉬었다가 다시 회사 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상상했다. 하지만 '누가 뭐라하든 난 이걸로 됐어'라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돌이켜보면 왜 과거의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며 또 하나의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이라고 착각하고 제멋대로 상상하던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p. 25)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었을 것이다(p. 26). 가장 이상화된 부모 자식 관계에 내가 겪은 환경을 비추어보고 '난 남들이 당연히 가진 걸 가지지 못했다'고 부모에게 울분을 품는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한 장차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몇이나 될까. 자식은 부모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어른이 된다.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가급적 빨리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부모 품을 벗어나는 것이(p. 77) 서로를 돕는 길이다. 심리적 거리를 두는 일은 완벽한 부모 자식 관계를 투사하여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들을 탓하지 않고 성인 대 성인,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대하며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손에서 놔 버려야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하는 문제가 있다.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며 계속 부모 이슈를 붙들고 산다면 어쩌면 내가 일부러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게 아닌지 냉정하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상처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쯤 되면 그건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p. 78). 결혼이 인생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어주면서 기분(p. 84)전환이나 새로운 도전이 될 수는 있어도 행복을 보장 해주진 않는다. 결혼은 동화책처럼 "그들은 그 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도 아니고 결혼 전 일상처럼 좋았다가 좋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다. 결혼을 해도 둘 다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서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 표현은 결혼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면서 다른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하거나 내가 이해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는 결혼이 꽤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결혼에도 행복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결혼을 하면 보이지 않던 여러 갈등 요소가 생기며 어두운 그림자의 부분을 끌어안을 인내심과 이해심이 중요해진다. 청혼하며 하는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라는 말은 그 순간에는 진심이겠지만 배우자 포함 그 어떤 가까운 인간관계도 나의 인생을, 나의 행복을, 내가 외롭지 않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고독은 스스로 떠안고 처리해야만 할 것 같다(p. 85).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 문제들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1. 정면 돌파 2. 피하기 3. 놔주기(p. 124) 첫째, '정면 돌파'는 쉽게 갈라서지 못하는 관계에 적용 된다. 서로의 장례식에 가서 복잡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사람들. 어쨌거나 평생 내 삶 속에 안고 가야만 하는 관계들. 가령 부부나 연인, 부모 자식 관계, 그리고 절친한 친구들. 이들에게는 애먼 기대를 가져 혼자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대신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원하는 바를 말했다. 기대에 부응해줄지는 알 수 없지만 모호한 부분은 최대한 짚고 넘어간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다른 대안인 피하기나 놔주기로 넘겨야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실패한다 해도 최선을 다해보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둘째, '피하기'는 투명한 호감 외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 대해 취하는 행동이다. 상대가 자신의 자존감, 불안, 현시욕이나 도덕적 우월감, 망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에게 다가올 때, 인간관계 맺음은 그에게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첫인상이 사근사근해서 가까워지기 쉽지만 어느덧 께름칙한 느낌과 함께 그(p. 125) 만남에서 기가 빨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는 말없이 피할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조언이 있는데, 어떤 관계는 서로를 위해 내가 먼저 피해주는 것이 노력이 된다. 그들은 어쨌거나 자기 자신에게밖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는 '놔주기'가 있다. 인간관계는 저마다의 생로병사 운명이 있어서 친밀한 관계여도 자연 소멸하거나 서먹해질 수가 있다. 이때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애매한 채로 놔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자연 소멸이 될까?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분히 매료되지 않았거나 그 관계에서 둘 중 누군가는 무리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분석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그 관계의 끈을 다시 이어보려고 애썼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지 그 관계에서 내가 부족 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불편한 인간관계를 견뎌내야 할 이유는 없다. 당장은(p. 126)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만 한번 관계를 자연스럽게 놓아 버린 다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피차 홀가분해할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 일부러 거론하지 않는 갈등이 있다면 그 갈등을 잠시 가만히 둬보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연스레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들이 있다. 갈 사람은 가고 돌아올 사람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면 어느덧 관계는 재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의 자연스러운 생로병사를 나는 긍정한다(p. 127). 친분이 있는 어떤 소설가는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충돌해서 사고가 났다. 몸이 자전거에서 튕겨져나가 붕 떠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의 몇 초간을 그는 생생히 기억했다. 그러면서 119 응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거나 골절을 걱정하기보다 '아, 이젠 교통사고에 대한 묘사는 잘할 자신이 있다'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그 이 야기를 들으며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을 쓰는 일은 건강에도 썩 좋지 않고, 평균적으 로 돈벌이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성격은 말 할 것도 없이 점점 괴팍해져가지만 다행히 한 가지 구원이 있다. 이렇게 모든 고통과 슬픔과 사건 사고에서도 무언가를 '건진다'.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고독이 뼛속 깊이 사무칠 때,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고통의 감정은 내 안의 여러 생각과 감정을 미친 듯이 자극시(p. 138)킨다. 비관으로 무너져 내리기보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글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창작의 원천이 되어준다. 어쩌면 병실에서 나는 그런 시간을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한 여성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걷는 흑독한 여정을 그린 영화 〈와일드〉를 보면 에밀리 디킨슨의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 If your Nerve, deny you / Go above your Nerve.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저마다 그 고통을 초월하는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에겐 종교가, 어떤 사람에겐 가족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겐 쾌락의 탐닉이. 그렇다면 글을 쓰는 사람은? 바로 글을 쓰는 것으로 그 고통을 초월하려 한다. 사람의 몸만큼 정직한 건 없고 사람의 마음만큼 조작 가능한 것도 없는 것 같다(p. 139). 그래서 지금은 언뜻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반드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일은 아름다운지. 아름다움. 이 얼마나 모호하고 관념적인 단어인가.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상황과 조건이 다른 일들에 유연하게 적용 되는 질문이다. 그 일을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은 내가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있는지, 애쓰는 과정이 즐거울지, 필요하고 유의미한 일인지, 균형이 잡혀 있는지, 관여된 사람들이 성의를 가지고 그 일에 임하는지 등의 정성적인 가치를 묻는다. 그 일이 가져올 것 같은 좋은 기분의 다양한 모습들의 가능성을 '아름다운가'라는 간결한 언어로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속에서 부대낌이 없다면 나는 그 일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고로 일이 순조롭게 풀리도록 그 누구보다도 내가 노력을 다할 것을 안다. 그 즉각적인 감각.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속마음을 어떻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힘은 이성을 넘어 직관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다(p. 153).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비록 상황에 의해 다분히 충동적으로 시작한 글쓰기와 달리기라 해도, 그것들이 하나의 확고한 루틴으로 일상에 안착하게 된 것은 내가 그것들을 어느 시점부터 내 인생에 '제대로' 들이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 같다. 루틴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자연(p. 183)스러운 다짐이다. 무엇인가를 삶에 능동적으로 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내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인 것과도 관계가 있다. 내게 삶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가늠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했다(p. 184). 나는 인생에서 반드시 좋아하는 일 혹은 꿈꾸던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고, 그렇더라도 충분히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고 싶었고 시도나 노력도 해보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이 일을 한다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p. 200)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도 크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가장 좋은 방법은 유산소운동을 하거나 자는 것 외에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글을 쓰다가 중간에 막히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들을 BGM 틀어놓듯 반복해서 읽곤 했다. 그러면 다시 차분해지면서 글을 이어갈 수 있 었다(p. 304). 소설은 법전도, 도덕 교과서도, 지침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가진 기존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이해시키고 자유의 외연을 넓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p. 316).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3】 삶에 대한 통찰력이 부럽다
-
-
【북토크392】 나도, 내내 읽다가 늙고 싶다
- 지난 40년 동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 철학, 역사, 신화, 사상, 교육학, 사회학, 정치학, 음악, 미술, 무용,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성과 교양을 아우른 저술 활동을 선보였던 번역가이자 저술가, 그리고 언제나 ‘읽는 사람’이었던 박홍규의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책을 너무 사랑해서 한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저자의 독서와 고독, 사회와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아이돌을 인문하다》와 《산책하는 마음》을 쓴 박지원 작가가 2018년 겨울부터 2019년 여름까지 경상북도 경산의 영남대학교 도서관과 박홍규의 자택을 총 열 차례 방문하며 함께 나누었던 독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서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크게 봐선 고독한 삶의 가치, 한국 사회의 병폐,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총 네 가지 주제로 파생되었고, 이 대담집은 그 이야기를 독서, 고독, 사회, 인간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재구성했다.-교보문고 남다른 인생을 산 노교수의 자유로운 대담을 흥미있게 읽었다. 나도 죽을 때까지 읽으며 살고 싶다. Q.사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독서도 훈련이라고 한다면, 교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런 훈련을 잘 해오셨던 것 같습니(p. 57)다. 이런 점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을까요? A.음, 어떻게 형성이 되었을까요? 짧게 말씀드리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웃음) 무엇보다 매일매일의 습관과 취미처럼 익숙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날씨의 비유를 들기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무슨 해답을 드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자기 삶에서 그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와 같은 의미의 자연스러운 독서, 생활과 밀착된 독서가 더욱더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들어요(p. 58). 그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 해요. 저 자신에게도 그랬습니다. 저는 어떤 경우든지 간에, 어떤 책이든 간에 '읽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습관과 감수성이 쌓인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은지 발견해나갈 수 있겠죠. 그 모든 책이 그것을 읽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책들일 겁니다. 제게도 그랬고 말이죠(p. 79). Q.책을 읽지 않는 정치인에 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죠? 교수님의 책 『독서독인』은 아예 이런 정치인들에게 화가 나서 쓴 책이라고 밝히기도 하셨고요. (웃음) A.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참 책을 읽지 않습니다. 정치와 독서의 관계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요. 한 사람의 정치인이 정치를 시작하게 되는 데 독서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큰 작용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작용해야 하고요. 히틀러든, 처칠이든, 체 게바라든, 호지명이든, 간디든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관을 수립한다거나 자기만의 삶의 자세를 조탁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정치인의 경우엔 좌우를 막론하고 책을 읽지 않고, 책을 통해서 진지하게 자신의 정치관을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책 자체를 일종의 사치품이나 장식품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정치 행사를 출판기념회로 포장하는, 이런 되지도 않은 겉 멋에 책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참으로 썩어빠진 한국적인 정치 전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p. 89) Q.출판계 선배가 들려주었던 말씀이 기억나네요. 예전에 어느 유력 정치인의 자서전을 편집하면서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문장도 엉망이고, 보좌관이나 비서가 대신 쓴 게 분명한, 영혼 없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것 때문에요. 그 정치인의 이름을 듣고 저도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웃음) A.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정치적 이념적 노선에 끼워넣기 위해서 아주 선별적이고 단편적인 독서만을 한 느낌이랄까요? 이것은 여느 정치인의 독서 경로와 지적 배경을 훑어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책을 제대로 읽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식의 겉핥기식 독서가 절대 될 수 없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간디나 호지명 같은 사람들은 독서라는 게 그 자체로 생활화가 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 중엔 독서가 곧 생활이 된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그들의 독서는 "나는 이렇게 독서도 한다"라는 과시이자 수식으로 기능 한다는 것 같다는 애기죠. 저는 우리나라 정치가 여전히 천박하고 수준이 낮은 이유가 독서가 그 자체로 정치인 자신(p. 90)의 생활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요. 지금은 탄핵이 된 어느 대통령의 서재도 화제가 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서재의 빈곤함과 체계 없음을 지적했던 정치인 또한 제가 보기엔 독서의 깊이가 전혀 탄탄하다고 생각되진 않았지만••(웃음) Q.그런 면에서 한국의 법률 교육에 대해서도 많이 비판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A.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상당한 수가 법조인 출신이죠. 법률가라고 하는 것이 정치인으로 출세하는 가장 유력한 밑바탕인 게 사실이니까요. 제가 30여 년간 법과대학에서 예비 법률가들을 가르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있어서 가장 빈곤한 게 독서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아시다시피 법률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법률 교과서, 육법 전서를 거의 달달 외우는 수준으로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다양한 사고의 실험도, 공감의 경험도 법률가를 지망하는 20~30대 청년의 머릿속에는 작용하지 않게 되는 것 이고요. 그야말로 교조적인 두뇌가 형성되는 것이죠(p. 91). 이런 예비 법률가들의 기본적인 장점은 암기력과 두뇌 회 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획일적인 교육 제도 아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인간 지성의 훈련이란, 많은 독서와 예술, 경험을 통한 시행착오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어가는 걸 의미하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유연하게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스스로 함양해나가야 하고, 우린 그 과정을 바로 '인격의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예요. 그 인격이 바탕이 되어야 자유로운 사고와 성찰이 가능할 테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률 교육이라고 하는 게 철두철미 폐쇄적이고 도그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법률가가 되어도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기란 대단히 힘든 법입니다. 법률가의 두뇌 구조는 보통 굉장히 경직되어 있는데, 무엇 하나를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 있어선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민주사회에서 수많은 환경과 경우에 처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유연하게 바라보고, 인정하고. 품어낸다는 차원에선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사실이죠(p. 92). Q.우리 인문학 전반의 부박한 풍토 같은 게 있는 것 같고, 그런 면을 강하게 지적해주고 계신데요, 그렇지만 학자들은(p. 139) 학자들이더라도 일단 사람들이 너무 책을 읽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웃음) 요즘은 워낙 재밌는 것들이 많아진 세상이라서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점점 더 심해질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박 선생, 저는 이게 꼭 어제오늘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독서의 절대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독서의 생활화랄까요. 일상화랄까요.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척박한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평생에 걸쳐 사람들이 더 책을 읽어주길 바라며 이런저런 작업을 해왔던 건 사실이고, 책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책이 한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랄까, 그런 건 대단하다고 늘 생각하긴 하지만, 제 주위를 봐도 책을 안 읽는 경향이 더 농후해진 것도 부정할 수 없죠. 최근에 어느 출판사에서 『내 삶에 스며든 헤세』라는 책을 낸다고 해서 그 원고를 청탁받았어요. 50명 정도 되는 필진 에게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듣는 책이라고 하던데, 어젯밤에 그 원고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요. 헤세가 『데미안』을 쓸 때가 2차 세계대전의 막(p. 140)바지였습니다. 이때 독일이든 유럽이든 정말로 피폐한 절망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헤세가 이야기한 건 그야말로 자기에게 충실할 것이었잖아요. 『데미안』은 자기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세상과 대결할 것을, 자신의 알을 깨고 나아갈 것을 이야기한 책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알을 깬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괴롭고 힘든 일이겠지만, 저는 그런 순간에 책이 다른 매체는 전달하기 힘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헤세를 읽고 감명을 받았듯,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책들을 읽고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Q.저도 늘 책이 안 읽힌다, 책이 안 팔린다, 이렇게 불평하곤 하지만 교수님 말씀에 공감하긴 합니다. 내가 정말 가장 깊은 층위에서 전하고 싶은 말, 내가 가장 고독한 차원에서 품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보편적인 문법으로 전할 수 있는 매체가 책이니까요. 책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되, 독서의 생활화와 일상화가 지금보다 더 중요해져야 한다는 게 교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p. 141). A.네. 많이 읽어야 하고, 다양하게 읽어야 합니다. 계속 말씀 드렸듯 저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교과서 숭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통한 능력주의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걸 좀 배제하고 더욱 다양한 생각이 흘러넘치는 세상이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입니다. 좀 더 많은 사상과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다니고 서로 부딪치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독서라는 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봐요. 교과서 몇 권으로 명문대에 합격했다, 이것만큼 독서 문화에 위험한 생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저의 삶을 합리화시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어쨌든 다양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생각이 열리고, 그 열림 속에서 다양한 독서와 번역과 저술이 가능해지는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 바람직한 세상이라 생각합니다(p. 142). Q.효의 상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배려죠. 인간적인 배려. 아까 박 선생이 유교적인 인본주의를 말씀하셨지만, 그런 인본의 바탕에는 인간관계의 배려에 차등화를 인정하는 관점이 깃들어 있을 겁니다. 내 가족과 내 부모, 내 자식에 대한 배려는 이웃에 대한 배려보다 훨씬 더 강한 배려를 바탕으로 합니다. 왜? 내 가족이고 내 부모 이니까 말이죠.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제가 저의 제자보다 저의 자식에(p. 177)게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강한 애착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분명히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차이 역시 한계는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유교의 오랜 논쟁거리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도둑질이나 살인을 했을 때 자식이 부모를 고발할 수 있느냐고요. 묵자나 순자는 부모를 고발할 수 있다고 주장 합니다. 공자나 맹자는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고요.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공자와 맹자 같은 이야기를 했죠.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A.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신이 소속된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 대해선 반드시 상대적인 거리를 둬야 한다고 믿으니까요. 그건 저에게도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p. 178). Q.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천착하는 일의 가치를 말씀해주고 계신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 에너지가 한 사람을 얼마나 성장하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해서 말이죠. A.제가 저보다 뒤에 따라오는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바로 이 말입니다. 주위 사람들에 휩쓸려서 무작정 시험 준비에 뛰어들지는 말아달라, 라고요. 무언가를 '죽지 못해 하는 것처럼은 하지 말라'라고요. 인생은 그렇게 길(p. 238)지 않다고요. 저 또한 제가 좋아하는 것, 제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을 했는데 이 정도로는 밥을 먹고 살았고, 책도 좀 썼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당신이 제일 하고픈 일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은 40년 뒤에 나보다는 나을 것이라고요. 제가 대학 3학년인가 4학년 때 노동법을 전공하겠다고 결단하고, 노동운동판에 뛰어다니고, 교수 자리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음에도 노동법을 공부하러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다들 사람들이 저보고 그랬습니다. "너 도대체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을 왜 하냐?"라고 말이죠. 교수가 될 희망도 없고, 그 걸 해서 좋은 자리에 취직할 희망도 없는 학문을 말이죠. 저는 그냥 좋아서 했어요. 정말 그랬습니다. 저는 저에게 의미가 있고 즐거운 일들을 찾아서 그걸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때때로 방황도 하고 힘든 적도 많았지만, 젊은 시절에 그처럼 자기 자신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은 더없이 소중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누구에게든 그럴 거예요(p. 239). Q.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은 좋지만, 그것이 '올바르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훨씬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 됩니다. A.박 선생, 제가 분명히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건 비유컨대 이런 것입니다. 아까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세계의 인간상〉을 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찍부터 그런 좋은 책들을 읽은 건 저에게 참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의 사상과 교양의 뿌리도 그때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제가 간직하고 있는 간디와 톨스토이에 대한 존경과(p. 374)흠모는 그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영향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제가 그 시절 읽은 책 중에는 제게 너무나도 악영향을 끼친 책도 많았어요. 음담패설에 엉터리 같은 책들 말이 지요. 제가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이에요. 홀로 헌책방을 다니면서 그런 책들에 탐닉했던 그 오랜 시간.... 그리고 그런 시간을 기억하며 제가 믿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적어도 중학교 1학년생에겐 D. H. 로렌스를 읽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Q.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을 읽으셨던 것이겠죠? A.네. 저는 그때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렇게 어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그런 책을 읽는 일이 제게 남긴 악영향을 되게 되는 것이죠. 로렌스의 이 소설이 문학사적으로 걸출한 작품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건, 어린아이와 청소년에게 최소한의 독서 지도는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완전히 자유롭게 책을 읽게(p. 375)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 귀신 죽이기』라는 책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리스에서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죠. 거기엔 어린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괴팍하고 이상한 이야기가 많으니 함부로 읽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유치원에서 그 내용을 읽히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과연 아이들에게 필요한 내용, 아이들을 더 건강한 어른으로 길러내기 위한 교양이 무엇인지에 관한 어떤 진지한 성찰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예요. 박 선생, 저는 도덕이나 윤리라는 것을 무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될 때까지는 반드시 도덕적 윤리적 훈련이 필요 하다고 생각해요(p. 376).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392】 나도, 내내 읽다가 늙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