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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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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만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리더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인격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듣고 멘토에게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성장이 없고 퇴보하는 리더는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겸손해야 배우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해야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여 여러 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무엇인가에 도전하면서 성장합니다. 말하는 기술도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강의하면서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사람 됨됨이 입니다. 인격에 문제가 있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인간미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인격도 성숙해집니다. 인격의 성숙은 내면의 평안, 정직, 겸손, 배려심, 이해심으로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격의 성숙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인격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도 온유와 정직한 삶을 삽니다. 인격이 성숙해야 존경받고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나의 삶을 보고 영감을 받고 누군가가 도전받아야 합니다. 리더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이 없으면 매력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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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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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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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우연히 알게 된 문유석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전직 부장판사라는 경력도 관심을 끌고 그가 쓴 책이 꼴통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사람이 안정적인 밥 벌이 하느라고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퇴직하고 법조인들이 가는 로펌이나 변호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돈 벌려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법이란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라고 말한다.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와는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법, 재미없는 법 그러나 결국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p. 41)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 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p. 42). 물론 국민에게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복지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아름다운 약속들은 써놓았으되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를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국가가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목표(p. 66)는 여러 가지다. 어느 나라든 국방 예산이 최우선 순위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아직 사치라는 논리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세상이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아직도 인간 세상은 대부분 국가 안보, 경제 발전, 민족의 융성, 선진국 진입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권리인 사회적 기본권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라고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가치다. 그게 '존엄'의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당연한 천부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헌법은 세상에서 완성된다(p. 67).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p. 100)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같은 말도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왠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을 강조하셨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가짐까지 포함한다. 인격 수양을 위한 자세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p. 101)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 해보자. 홀로 있을 때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최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 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p. 102),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000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p. 103).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p. 104)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진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 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p. 105)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p. 106) 관계없이 톡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만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였(p. 107)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 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p. 108)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 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p. 109). 전통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범죄의 중함을 그 결과의 외형적 크기, 즉 사망, 전치 몇 주의 상해인지, 손해액이 얼마인지 등으로만 비교하려는 경향을 띤다.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법감정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로 보곤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근친상간, 아동 성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등 터부와 연결되고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유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들이다)을 파괴하는 범죄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본능적 분노를 야기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폭력인 법이 이를 충분히 응보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법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져 사회 존속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p. 158)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은 온갖 인지적 편향과, 이성 이상으로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면 법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p. 159). 성폭력은 자유에 대한 죄 사람들은 왜 성폭력에 대해 유독 분노할까. 성폭력은 단순히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이나 상해와 다르다. 모든 폭력은 사람의 정신에도 충격을 가하지만, 성폭력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오랜 정신적 상흔을 남기기에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어땠을까. 형법상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 아래 강제 추행죄,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함께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12월 29일자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다. 대체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p. 160) 첫번째 뜻으로 '정절'과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정절'을 다시 찾아보면 '여자의 곧은 절개'다. 두번째 뜻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니는 일'이란다.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하면, '기혼 여성의 남편과만 섹스해야 할 의무'와 '미혼 여성의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의무'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도 아닌, 서태지 박진영 신해철이 톱스타로 활약하던 <응답하라 1994> 시절 이야기다. 물론, 설마하니 이 당시까지 법학자나 판사 들이 강간죄를 '정절'과 '순결'을 침해하는 죄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973 년에 발간된 서울법대 유기천 교수의 『형법학』 (개정9판) 교과서를 보면 강간죄는 '인간의 애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다(애정의 자유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지지만). 내가 공부하던 1980년대 후반의 형법 교과서에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가 보호법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1995년 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형법전의 항목 제목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정조에 관한 죄'란 일본의 구형법, 즉 일제강점기 형법의 잔재인 것 같다. 간통죄를 포함한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죄 등과 함께 묶어서 건전한 사회 풍속을 해하는 범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 법익에 관한 죄'로 규정했었는데, 광복 후 1953년 우리 형법이(p. 161) 제정되면서 강간죄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항목 쪽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이다. 당시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인식의 발전이었겠지만, 사회적 인식까지 크게 변화했었는지 의문이다. 그 유명한 보호가치 있는 정조라는 말이 판결문에 등장했을 정도니까. 1955년 7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재판부는 현역 장교를 사칭하며 '댄스홀' 등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바로 파기되었지만, 당시의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회 인식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을 돌이 켜봐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성범죄 사건을 재판할 때마다 변호인들이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법 교과서에 강간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에 관한 죄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부 변호사님들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여성, 나이트클럽에 자주 가는 여성, 과거에 바든 카페든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여성은 그런 자유가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오히려 사회 인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은 지(p. 162)금까지도 적지 않다. 성범죄 피고인의 부모가 낸 탄원서를 보면 피해자가 학교나 회사 내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로 유명한 여자였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남자들과 섹스한 적이 있는 여자는 아무 남자의 섹스 제의에도 당연히 자유롭게 응했을 거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어지곤 했다. 젊은 세대는 당연히 강간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간죄를 폭력범죄, 상해죄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친 곳도 없지 않느냐 후유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좀 무섭게 말은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다'••••• 몸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 즉 '몸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라고 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한다. 강간이란 '누구와 섹스할지, 언제 섹스할지, 어디서 섹스할지, 어떻게 섹스할지, 왜 섹스할지 각자 알아서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죄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의 권리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든, 클럽에서 매일 밤 원나이트를 하는 여성이든, 5분 전에 당신과 섹스를 마친 여성이든,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당신을 보며(p. 163) 계속 웃음을 보인 여성이든,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섹스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이중 어떤 경우에도 발생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모두를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즉 상당히 무거운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억지로 성행위를 한 경우에만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법은 섹스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모든 자유로운 주체 간의 행위들처럼, 자유무역처럼, 동업처럼, 부동산 매매처럼, 코스프레 동호회 사진 촬영회처럼, 합창단 공연처럼, 길거리농구처럼, 자유롭게 그걸 원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상 법은 시민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입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래 말로는 싫다고 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냐고? 말로 싫다면 싫은 거다. 인간은 원래 말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나요. 그래도 자신 없으면 간단하다. 애매한 사이에서는 안 하면 되는 거다. 눈만 맞으면 서로 알아서 이불 까는, 상호 합의 과정이 이미 충분히 이행된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으로 모든(p. 164) 애매한 신호를 자기 성기 측에 유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떻게 초면에 그렇게 과감한지. 남성들에게 불공정한 점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법익으로 하면서도 강간죄의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했었던 과거의 형법 조문이 그랬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여성들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남성들의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므로 침해당할 우려도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했다. 무려 2012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 대신 '사람'으로 개정되어 남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했다. 남성들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폭력으로 박탈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p. 165).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능력이다"라고 썼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 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p. 221)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p. 222) 인간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해 노동시간은 계속 감소했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서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 해서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단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p. 223)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극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p. 224). 에필로그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헌법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개념이나 제도보다도 '사고방식'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를 만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사고방식, 판결문을 작성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다시 말하면 '법학적 사고방식'이자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p. 248)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 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 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 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 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p. 249)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 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수호지」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호결이 악질적인 부잣(p. 250)집을 습격하여 일가족을 죽이는데, 갓난아기를 발견하고는 그 아기마저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아기이지만 언젠가는 커서 복수심에 불타는 화근이 될 것이라 면서. 조선 시대에 누구 하나를 역적으로 몰면 삼족을 멸한 것 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은 특정 단계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제자, 친구, 이웃, 은혜를 입은 자, 가혹함에 분노했던 자들에 의해 언젠가는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역사에서 진짜 '청산'이라고 할 만한 일은 로마가 카르타고에 행한 복수 정도다.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등 카르타고는 여러 번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이 숙적을 철저히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부녀자와 노인은 아프리카 오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의 흔적조차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등 모든 건 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다. 아예 한 나라를 역사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 정도를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끝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공존하려면 일정 정도에서 그치고 타협할 수밖(p. 251)에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윤: 음..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그럼 언제 놀아? 선 :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p. 252)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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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당회와 문제해결
당회와 문제해결 교회 안에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당회는 교회에서의 섬기는 리더십 팀입니다. 목사는 당회 운영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당회는 성도들을 보살핌과 동시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당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회에서 문제가 생겨 해결 못 하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리더는 당회 운영을 잘해야 합니다. 당회는 토론하는 기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다가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됩니다.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목사의 목회 정책에 기도하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회 안건을 내놓을 때 합리적이고 무리하지 않은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안건을 올렸다가 서로 논쟁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담임목사는 당회 서기와 당회 안건을 사전에 조율해서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모르는 안건을 당회 서기 마음대로 안건에 올리지 못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담임목사와 당회 서기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시 당회원끼리 소통하기 위해 그룹 카톡을 만들었으면 당회 안건이나 공지 사항 외에 사사로운 개인의 글이나 정치 이야기나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소한 것 작은 것 때문에 일어나기에 매사에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 관계에서 교회 문제가 생기면 살피고 의논하여 문제해결의 지혜를 모아 당회원이 하나 되어 한목소리를 내고 초기에 담대히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늦추고 우유부단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 하면 문제해결을 못 하고 적은 문제를 큰 문제로 만들게 됩니다. 당회에서 의논된 내용들, 예를 들면 재정 보고나 인사 문제 등 예민한 것, 서류 내용은 당회 후 집에서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고 나누어 준 서류들을 다시 거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타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회원은 목사의 목회 협력자로서 기도하고 순종하고 협력해야 함을 교육해야 합니다. 당회원을 사랑하고 격려해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회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당회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당회 회원은 문제 해결하는 섬김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나 어디서나 문제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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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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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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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만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리더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인격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듣고 멘토에게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성장이 없고 퇴보하는 리더는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겸손해야 배우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해야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여 여러 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무엇인가에 도전하면서 성장합니다. 말하는 기술도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강의하면서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사람 됨됨이 입니다. 인격에 문제가 있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인간미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인격도 성숙해집니다. 인격의 성숙은 내면의 평안, 정직, 겸손, 배려심, 이해심으로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격의 성숙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인격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도 온유와 정직한 삶을 삽니다. 인격이 성숙해야 존경받고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나의 삶을 보고 영감을 받고 누군가가 도전받아야 합니다. 리더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이 없으면 매력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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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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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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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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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 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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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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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 우연히 알게 된 문유석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전직 부장판사라는 경력도 관심을 끌고 그가 쓴 책이 꼴통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사람이 안정적인 밥 벌이 하느라고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퇴직하고 법조인들이 가는 로펌이나 변호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돈 벌려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법이란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라고 말한다.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와는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법, 재미없는 법 그러나 결국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p. 41)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 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p. 42). 물론 국민에게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복지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아름다운 약속들은 써놓았으되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를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국가가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목표(p. 66)는 여러 가지다. 어느 나라든 국방 예산이 최우선 순위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아직 사치라는 논리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세상이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아직도 인간 세상은 대부분 국가 안보, 경제 발전, 민족의 융성, 선진국 진입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권리인 사회적 기본권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라고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가치다. 그게 '존엄'의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당연한 천부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헌법은 세상에서 완성된다(p. 67).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p. 100)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같은 말도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왠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을 강조하셨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가짐까지 포함한다. 인격 수양을 위한 자세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p. 101)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 해보자. 홀로 있을 때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최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 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p. 102),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000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p. 103).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p. 104)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진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 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p. 105)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p. 106) 관계없이 톡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만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였(p. 107)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 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p. 108)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 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p. 109). 전통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범죄의 중함을 그 결과의 외형적 크기, 즉 사망, 전치 몇 주의 상해인지, 손해액이 얼마인지 등으로만 비교하려는 경향을 띤다.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법감정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로 보곤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근친상간, 아동 성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등 터부와 연결되고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유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들이다)을 파괴하는 범죄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본능적 분노를 야기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폭력인 법이 이를 충분히 응보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법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져 사회 존속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p. 158)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은 온갖 인지적 편향과, 이성 이상으로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면 법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p. 159). 성폭력은 자유에 대한 죄 사람들은 왜 성폭력에 대해 유독 분노할까. 성폭력은 단순히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이나 상해와 다르다. 모든 폭력은 사람의 정신에도 충격을 가하지만, 성폭력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오랜 정신적 상흔을 남기기에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어땠을까. 형법상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 아래 강제 추행죄,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함께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12월 29일자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다. 대체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p. 160) 첫번째 뜻으로 '정절'과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정절'을 다시 찾아보면 '여자의 곧은 절개'다. 두번째 뜻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니는 일'이란다.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하면, '기혼 여성의 남편과만 섹스해야 할 의무'와 '미혼 여성의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의무'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도 아닌, 서태지 박진영 신해철이 톱스타로 활약하던 <응답하라 1994> 시절 이야기다. 물론, 설마하니 이 당시까지 법학자나 판사 들이 강간죄를 '정절'과 '순결'을 침해하는 죄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973 년에 발간된 서울법대 유기천 교수의 『형법학』 (개정9판) 교과서를 보면 강간죄는 '인간의 애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다(애정의 자유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지지만). 내가 공부하던 1980년대 후반의 형법 교과서에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가 보호법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1995년 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형법전의 항목 제목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정조에 관한 죄'란 일본의 구형법, 즉 일제강점기 형법의 잔재인 것 같다. 간통죄를 포함한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죄 등과 함께 묶어서 건전한 사회 풍속을 해하는 범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 법익에 관한 죄'로 규정했었는데, 광복 후 1953년 우리 형법이(p. 161) 제정되면서 강간죄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항목 쪽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이다. 당시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인식의 발전이었겠지만, 사회적 인식까지 크게 변화했었는지 의문이다. 그 유명한 보호가치 있는 정조라는 말이 판결문에 등장했을 정도니까. 1955년 7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재판부는 현역 장교를 사칭하며 '댄스홀' 등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바로 파기되었지만, 당시의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회 인식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을 돌이 켜봐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성범죄 사건을 재판할 때마다 변호인들이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법 교과서에 강간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에 관한 죄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부 변호사님들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여성, 나이트클럽에 자주 가는 여성, 과거에 바든 카페든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여성은 그런 자유가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오히려 사회 인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은 지(p. 162)금까지도 적지 않다. 성범죄 피고인의 부모가 낸 탄원서를 보면 피해자가 학교나 회사 내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로 유명한 여자였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남자들과 섹스한 적이 있는 여자는 아무 남자의 섹스 제의에도 당연히 자유롭게 응했을 거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어지곤 했다. 젊은 세대는 당연히 강간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간죄를 폭력범죄, 상해죄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친 곳도 없지 않느냐 후유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좀 무섭게 말은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다'••••• 몸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 즉 '몸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라고 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한다. 강간이란 '누구와 섹스할지, 언제 섹스할지, 어디서 섹스할지, 어떻게 섹스할지, 왜 섹스할지 각자 알아서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죄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의 권리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든, 클럽에서 매일 밤 원나이트를 하는 여성이든, 5분 전에 당신과 섹스를 마친 여성이든,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당신을 보며(p. 163) 계속 웃음을 보인 여성이든,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섹스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이중 어떤 경우에도 발생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모두를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즉 상당히 무거운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억지로 성행위를 한 경우에만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법은 섹스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모든 자유로운 주체 간의 행위들처럼, 자유무역처럼, 동업처럼, 부동산 매매처럼, 코스프레 동호회 사진 촬영회처럼, 합창단 공연처럼, 길거리농구처럼, 자유롭게 그걸 원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상 법은 시민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입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래 말로는 싫다고 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냐고? 말로 싫다면 싫은 거다. 인간은 원래 말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나요. 그래도 자신 없으면 간단하다. 애매한 사이에서는 안 하면 되는 거다. 눈만 맞으면 서로 알아서 이불 까는, 상호 합의 과정이 이미 충분히 이행된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으로 모든(p. 164) 애매한 신호를 자기 성기 측에 유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떻게 초면에 그렇게 과감한지. 남성들에게 불공정한 점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법익으로 하면서도 강간죄의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했었던 과거의 형법 조문이 그랬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여성들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남성들의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므로 침해당할 우려도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했다. 무려 2012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 대신 '사람'으로 개정되어 남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했다. 남성들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폭력으로 박탈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p. 165).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능력이다"라고 썼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 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p. 221)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p. 222) 인간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해 노동시간은 계속 감소했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서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 해서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단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p. 223)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극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p. 224). 에필로그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헌법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개념이나 제도보다도 '사고방식'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를 만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사고방식, 판결문을 작성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다시 말하면 '법학적 사고방식'이자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p. 248)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 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 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 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 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p. 249)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 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수호지」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호결이 악질적인 부잣(p. 250)집을 습격하여 일가족을 죽이는데, 갓난아기를 발견하고는 그 아기마저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아기이지만 언젠가는 커서 복수심에 불타는 화근이 될 것이라 면서. 조선 시대에 누구 하나를 역적으로 몰면 삼족을 멸한 것 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은 특정 단계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제자, 친구, 이웃, 은혜를 입은 자, 가혹함에 분노했던 자들에 의해 언젠가는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역사에서 진짜 '청산'이라고 할 만한 일은 로마가 카르타고에 행한 복수 정도다.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등 카르타고는 여러 번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이 숙적을 철저히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부녀자와 노인은 아프리카 오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의 흔적조차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등 모든 건 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다. 아예 한 나라를 역사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 정도를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끝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공존하려면 일정 정도에서 그치고 타협할 수밖(p. 251)에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윤: 음..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그럼 언제 놀아? 선 :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p. 252)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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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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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당회와 문제해결
- 당회와 문제해결 교회 안에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당회는 교회에서의 섬기는 리더십 팀입니다. 목사는 당회 운영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당회는 성도들을 보살핌과 동시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당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회에서 문제가 생겨 해결 못 하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리더는 당회 운영을 잘해야 합니다. 당회는 토론하는 기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다가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됩니다.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목사의 목회 정책에 기도하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회 안건을 내놓을 때 합리적이고 무리하지 않은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안건을 올렸다가 서로 논쟁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담임목사는 당회 서기와 당회 안건을 사전에 조율해서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모르는 안건을 당회 서기 마음대로 안건에 올리지 못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담임목사와 당회 서기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시 당회원끼리 소통하기 위해 그룹 카톡을 만들었으면 당회 안건이나 공지 사항 외에 사사로운 개인의 글이나 정치 이야기나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소한 것 작은 것 때문에 일어나기에 매사에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 관계에서 교회 문제가 생기면 살피고 의논하여 문제해결의 지혜를 모아 당회원이 하나 되어 한목소리를 내고 초기에 담대히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늦추고 우유부단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 하면 문제해결을 못 하고 적은 문제를 큰 문제로 만들게 됩니다. 당회에서 의논된 내용들, 예를 들면 재정 보고나 인사 문제 등 예민한 것, 서류 내용은 당회 후 집에서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고 나누어 준 서류들을 다시 거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타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회원은 목사의 목회 협력자로서 기도하고 순종하고 협력해야 함을 교육해야 합니다. 당회원을 사랑하고 격려해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회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당회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당회 회원은 문제 해결하는 섬김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나 어디서나 문제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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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당회와 문제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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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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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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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만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리더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인격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듣고 멘토에게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성장이 없고 퇴보하는 리더는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겸손해야 배우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해야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여 여러 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무엇인가에 도전하면서 성장합니다. 말하는 기술도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강의하면서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사람 됨됨이 입니다. 인격에 문제가 있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인간미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인격도 성숙해집니다. 인격의 성숙은 내면의 평안, 정직, 겸손, 배려심, 이해심으로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격의 성숙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인격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도 온유와 정직한 삶을 삽니다. 인격이 성숙해야 존경받고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나의 삶을 보고 영감을 받고 누군가가 도전받아야 합니다. 리더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이 없으면 매력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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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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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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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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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 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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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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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 우연히 알게 된 문유석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전직 부장판사라는 경력도 관심을 끌고 그가 쓴 책이 꼴통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사람이 안정적인 밥 벌이 하느라고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퇴직하고 법조인들이 가는 로펌이나 변호사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돈 벌려고 그런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법이란 공생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라고 말한다. 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와는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법, 재미없는 법 그러나 결국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p. 41)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 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p. 42). 물론 국민에게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복지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아름다운 약속들은 써놓았으되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를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 국가가 그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제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책 목표(p. 66)는 여러 가지다. 어느 나라든 국방 예산이 최우선 순위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이 되기 전까지는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아직 사치라는 논리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세상이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아직도 인간 세상은 대부분 국가 안보, 경제 발전, 민족의 융성, 선진국 진입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권리인 사회적 기본권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라고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의 가치다. 그게 '존엄'의 의미다. 인간이 존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이 당연한 천부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헌법은 세상에서 완성된다(p. 67). 유별날 자유, 비루할 자유, 불온할 자유 헌법은 다양한 자유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이를 보장하고 있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듯한 풍성한 메뉴판이지만 감동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국가나 헌법이 우리에게 시혜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고유하게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는 무엇일까. 이동하고, 직업을 갖고, 학문을 추구하고, 뭔가를 표현하고 등등 멋진 무엇을 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자유. 그것은 그저 홀로 있는 내 공간 안의 자유, 내 머릿속 생각의 자유일 것이다. 뭘 거창하게(p. 100) 하기 이전에, 태어난 내 모습대로 그저 있을 자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슬프게 되뇌던 독백 같은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것도요. 그저 있습니다, 애기씨."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같은 말도 이렇게 헌법 조문으로 적어놓고 보면 왠지 멋져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나 걸맞은 권리 같다. 착각이다. 자유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생활만 보호하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독을 강조하셨다.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가짐까지 포함한다. 인격 수양을 위한 자세로는 훌륭한 말씀이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억제를 요구하는 잔인한 말씀이다. 매 순간, 마음속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p. 101)을까. 불경스럽지만 율곡 선생조차도 홀로 있을 때는 온갖 찌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하셨을 거라는 데 오천 원 지폐를 건다.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 해보자. 홀로 있을 때도 어그러지지 않도록 생각조차 삼가야 할 '옳음'이 '마땅히 아녀자는 지아비를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라면 어떨까. 또는 '동성에게 연정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최악이다'라면? 이러한 '옳음'에 위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타인들이 엿보고 폭로하려 든다면, 신상털이를 해대며 낙인찍는다면, 너의 생각을 밝히라며 질문을 해댄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라거나 십자가를 밟아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일까. 예시를 바꾸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요되는 '옳음'이 지금 시대에 한창 인기 있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 이다. 이를 내심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p. 102), 그 어떤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나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이를 양심 추지(미루어 생각하여 앎)의 금지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000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털 숭숭 난 아저씨가 여학생 교복을 입고 앉아 있든 말든, 하루종일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든 말든 남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불편한 속옷을 입든 말든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노브라'를 선언한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졌던 모욕과 공격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그건 유별날 자유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적 자유다. 그걸 '지적질'하는 행태들이야말로 유별날 뿐이다.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p. 103). 사생활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이다. 그런데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고 인권변호사 출신 후보가 '반대합니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은 찬성, 반대 대상이 아니고, 공적 자리에서 개인적 선호를 밝힐 대상 역시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실질적 해도 끼치지 않는데 단지 자기 선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 싫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생태계의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욕망도, 선호도, 고통도 제각기 다르다. 한때 유행했던 '파검 vs. 흰금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뇌가 색을 인지하는 패턴의 차이에 따라 같은 드레스를 누군가는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한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자기 방식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자율성은 행복추구권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노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다. 상관없어, 네가 게이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p. 104) 레즈비언이건. 트렌스젠더의 인생을 살건.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내 자신의 방식대로 아름다워.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니까. 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사람에게는 불온할 자유도 있다. 어떤 책을 읽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국가의 반역자로 처벌한 긴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더욱 강조되어야 할 자유다. 어떤 불온한 생각도 처벌할 수 없다. 심지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의 계획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다면, 혼자 쓰는 일기장에만 적어두었다면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불온하다'는 온당하지 않다는 뜻이고, '온당하다'는 판단이나 행동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무엇이 온당한지 불온한지는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결정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그 기준도 달라진다. 다양한 생각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근간 이다. 유별날 자유나 불온할 자유는 비교적 쉽게 그 필요성을 수(p. 105)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비루할 자유'일 것 같다. 추잡하고, 너절하고, 더럽고, 비겁하고... 그럴 자유라니 본능적으로 그런 것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생각과 취향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그것을 강제로 끄집어내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내면이, 사생활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쉽게 외부로 드러날 위험에 놓인 사회가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기업의 주수입원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무료로 제공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지, 어떤 영상을 클릭하는지, 어떤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그들은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거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개개인들도 타인을 24시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엿보기의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증의 시대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도덕적 완장을 차고 타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종교 경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각이란 수시로 변화하기 마련이고 어떤 특정한 맥락 속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인의 의사와(p. 106) 관계없이 톡 잘라 이것 보라며 전시하고 조리돌림하고 잊히지 않도록 '박제'하기까지 한다. 종교적 열정에 들떠 십자군전쟁에 나선 기사들처럼. 바야흐로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마녀사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현상으로서 도덕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결합된다. 진영 논리가 강화되고 논쟁 대신 전쟁이 공론의 장을 지배할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수단은 도덕이다. 치밀한 논리나 실질적인 정책으로 싸우는 것은 힘들고 대중의 성마른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망신 주기가 훨씬 손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사생활'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야 만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국가에서 공직자의 자녀가 음주운전을 한다든가, 공직자의 남편이 요트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 권력형 비리가 개입되었는지는 공적 영역의 일이지만 그 외에는 개인이 각자 책임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의 근원은 대부분 부메랑이다. 예전에 상대를 공격할 쉬운 무기라고 환호하며 찔러댄 결과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제 살 깎아먹는 경쟁이다. 도덕이 무기가 되는 사회는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인류는 그런 사회를 여러 번 시험해보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을 겪였(p. 107)고, 크롬웰과 칼뱅의 엄격한 종교 윤리에 기반한 공포정치도 보았으며,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의 대학살도 목도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율법과 도덕, 가문의 명예를 명분으로 한 폭력과 억압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 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p. 108)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 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p. 109). 전통적인 법치주의 시스템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범죄의 중함을 그 결과의 외형적 크기, 즉 사망, 전치 몇 주의 상해인지, 손해액이 얼마인지 등으로만 비교하려는 경향을 띤다.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 법감정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로 보곤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근친상간, 아동 성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등 터부와 연결되고 진화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유지•발전에 저해되는 행위들이다)을 파괴하는 범죄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본능적 분노를 야기한다. 그런데 제도화된 폭력인 법이 이를 충분히 응보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법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져 사회 존속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하지 않은 응보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처럼 보아 엄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응보는 단순히 국민 감정에 휘둘리는 사법 포퓰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사법이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일 수도 있다. 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탁이 아니다. 법은 인간을 위(p. 158)한 도구다. 법은 인간사회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은 온갖 인지적 편향과, 이성 이상으로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면 법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우리의 법치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대중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법조 엘리트들이 먼저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p. 159). 성폭력은 자유에 대한 죄 사람들은 왜 성폭력에 대해 유독 분노할까. 성폭력은 단순히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이나 상해와 다르다. 모든 폭력은 사람의 정신에도 충격을 가하지만, 성폭력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성폭력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오랜 정신적 상흔을 남기기에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어땠을까. 형법상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 아래 강제 추행죄,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함께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12월 29일자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다. 대체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p. 160) 첫번째 뜻으로 '정절'과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정절'을 다시 찾아보면 '여자의 곧은 절개'다. 두번째 뜻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니는 일'이란다.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하면, '기혼 여성의 남편과만 섹스해야 할 의무'와 '미혼 여성의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의무'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도 아닌, 서태지 박진영 신해철이 톱스타로 활약하던 <응답하라 1994> 시절 이야기다. 물론, 설마하니 이 당시까지 법학자나 판사 들이 강간죄를 '정절'과 '순결'을 침해하는 죄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다. 1973 년에 발간된 서울법대 유기천 교수의 『형법학』 (개정9판) 교과서를 보면 강간죄는 '인간의 애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라고 설명하고 있다(애정의 자유란 무엇인지 또 궁금해지지만). 내가 공부하던 1980년대 후반의 형법 교과서에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가 보호법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1995년 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형법전의 항목 제목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천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정조에 관한 죄'란 일본의 구형법, 즉 일제강점기 형법의 잔재인 것 같다. 간통죄를 포함한 '정조에 관한 죄'를 강간죄 등과 함께 묶어서 건전한 사회 풍속을 해하는 범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 법익에 관한 죄'로 규정했었는데, 광복 후 1953년 우리 형법이(p. 161) 제정되면서 강간죄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항목 쪽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이다. 당시 법조계로서는 상당한 인식의 발전이었겠지만, 사회적 인식까지 크게 변화했었는지 의문이다. 그 유명한 보호가치 있는 정조라는 말이 판결문에 등장했을 정도니까. 1955년 7월 2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재판부는 현역 장교를 사칭하며 '댄스홀' 등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상급심에서 바로 파기되었지만, 당시의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회 인식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을 돌이 켜봐도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성범죄 사건을 재판할 때마다 변호인들이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법 교과서에 강간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에 관한 죄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부 변호사님들은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여성, 나이트클럽에 자주 가는 여성, 과거에 바든 카페든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여성은 그런 자유가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라. '정조에 관한 죄'라는 제목이 오히려 사회 인식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은 지(p. 162)금까지도 적지 않다. 성범죄 피고인의 부모가 낸 탄원서를 보면 피해자가 학교나 회사 내에서 자유분방한 연애로 유명한 여자였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남자들과 섹스한 적이 있는 여자는 아무 남자의 섹스 제의에도 당연히 자유롭게 응했을 거라고 믿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어지곤 했다. 젊은 세대는 당연히 강간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간죄를 폭력범죄, 상해죄와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친 곳도 없지 않느냐 후유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좀 무섭게 말은 했지만 때린 것은 아니다'••••• 몸 어디가 부러지고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장애가 생기고 하는 것, 즉 '몸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라고 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 다시 쉽게 직설적으로 고쳐 말한다. 강간이란 '누구와 섹스할지, 언제 섹스할지, 어디서 섹스할지, 어떻게 섹스할지, 왜 섹스할지 각자 알아서 정할 자유'를 침해하는 죄다. 이 자유는 모든 인간의 권리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이든, 클럽에서 매일 밤 원나이트를 하는 여성이든, 5분 전에 당신과 섹스를 마친 여성이든,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당신을 보며(p. 163) 계속 웃음을 보인 여성이든, 어떤 이유로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과 섹스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이중 어떤 경우에도 발생 하지 않는다. 게다가 법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모두를 처벌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반항을 억압할 만한', 즉 상당히 무거운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억지로 성행위를 한 경우에만 강간죄로 처벌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각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 법은 섹스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모든 자유로운 주체 간의 행위들처럼, 자유무역처럼, 동업처럼, 부동산 매매처럼, 코스프레 동호회 사진 촬영회처럼, 합창단 공연처럼, 길거리농구처럼, 자유롭게 그걸 원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상 법은 시민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 피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입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원래 말로는 싫다고 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하냐고? 말로 싫다면 싫은 거다. 인간은 원래 말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나요. 그래도 자신 없으면 간단하다. 애매한 사이에서는 안 하면 되는 거다. 눈만 맞으면 서로 알아서 이불 까는, 상호 합의 과정이 이미 충분히 이행된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하면 된다' 박정희 정신으로 모든(p. 164) 애매한 신호를 자기 성기 측에 유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어떻게 초면에 그렇게 과감한지. 남성들에게 불공정한 점도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법익으로 하면서도 강간죄의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했었던 과거의 형법 조문이 그랬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여성들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인지, 남성들의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므로 침해당할 우려도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했다. 무려 2012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 대신 '사람'으로 개정되어 남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자격을 획득했다. 남성들도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폭력으로 박탈당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 역지사지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요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p. 165).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능력이다"라고 썼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 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p. 221)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p. 222) 인간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해 노동시간은 계속 감소했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서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 해서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단축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길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p. 223)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극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더 멀리 보면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 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 노력, 능력, 경쟁, 공정,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 가치만 추구할 수 없다. 공정 역시 결국에는 공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이다(p. 224). 에필로그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헌법 이야기를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개념이나 제도보다도 '사고방식'이다. 헌법의 기본 원리를 만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사고방식, 판결문을 작성할 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다시 말하면 '법학적 사고방식'이자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p. 248)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 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제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 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 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에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 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p. 249)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 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수호지」를 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호결이 악질적인 부잣(p. 250)집을 습격하여 일가족을 죽이는데, 갓난아기를 발견하고는 그 아기마저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아기이지만 언젠가는 커서 복수심에 불타는 화근이 될 것이라 면서. 조선 시대에 누구 하나를 역적으로 몰면 삼족을 멸한 것 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은 특정 단계에서 단절되지 않는다. 제자, 친구, 이웃, 은혜를 입은 자, 가혹함에 분노했던 자들에 의해 언젠가는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역사에서 진짜 '청산'이라고 할 만한 일은 로마가 카르타고에 행한 복수 정도다.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등 카르타고는 여러 번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로마는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이 숙적을 철저히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부녀자와 노인은 아프리카 오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의 흔적조차 없애려고 성벽, 신전, 민가 등 모든 건 물을 부쉈으며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땅을 가래로 갈아엎어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만들었다. 아예 한 나라를 역사에서 말살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 정도를 원하는 것인가? 할 수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끝장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공존할 수밖에 없고, 공존하려면 일정 정도에서 그치고 타협할 수밖(p. 251)에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옳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은 다섯 살 남동생 '윤'이 밤낮 친구 연오에게 맞으면서도 또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같이 노는 꼴을 보니 열불이 난다. 그래서 채근한다. 선: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 그럼 어떡해? 선: 다시 때렸어야지. 윤: 또? 윤: 음.. 선: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 음....그럼 언제 놀아? 선 : 어? 윤: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p. 252) 천진난만한 다섯 살 아이 윤이의 말이 어쩌면 헌법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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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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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전직 부장판사를 통해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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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당회와 문제해결
- 당회와 문제해결 교회 안에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당회는 교회에서의 섬기는 리더십 팀입니다. 목사는 당회 운영을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당회는 성도들을 보살핌과 동시에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당회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회에서 문제가 생겨 해결 못 하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리더는 당회 운영을 잘해야 합니다. 당회는 토론하는 기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다가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됩니다.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목사의 목회 정책에 기도하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회 안건을 내놓을 때 합리적이고 무리하지 않은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안건을 올렸다가 서로 논쟁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담임목사는 당회 서기와 당회 안건을 사전에 조율해서 안건을 올려야 합니다. 담임목사가 모르는 안건을 당회 서기 마음대로 안건에 올리지 못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담임목사와 당회 서기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시 당회원끼리 소통하기 위해 그룹 카톡을 만들었으면 당회 안건이나 공지 사항 외에 사사로운 개인의 글이나 정치 이야기나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소한 것 작은 것 때문에 일어나기에 매사에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 관계에서 교회 문제가 생기면 살피고 의논하여 문제해결의 지혜를 모아 당회원이 하나 되어 한목소리를 내고 초기에 담대히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늦추고 우유부단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 하면 문제해결을 못 하고 적은 문제를 큰 문제로 만들게 됩니다. 당회에서 의논된 내용들, 예를 들면 재정 보고나 인사 문제 등 예민한 것, 서류 내용은 당회 후 집에서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고 나누어 준 서류들을 다시 거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타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회원은 목사의 목회 협력자로서 기도하고 순종하고 협력해야 함을 교육해야 합니다. 당회원을 사랑하고 격려해야 하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회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당회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당회 회원은 문제 해결하는 섬김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나 어디서나 문제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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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 당회와 문제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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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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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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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 구굴은 무례(無禮)란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의가 왜 필요한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빨가벗고 살든,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놓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한 것이 있다. 나중에 좌석에 앉는 사람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자리가 비면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중간쯤에 앉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를 밀고 들어온다. 양쪽 사람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불편한다. 그런데 나처럼 가운데 자리에 앉을 때 양 편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리가 비면 산모를 위한 여성 좌석 옆에 앉는다. 이 자리에 산모가 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한쪽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좁은 지하철 좌석인데 겨울이라 모두 두꺼운 옷을 입어 더 비좁은데 제발 가운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앉지 마시기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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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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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 취재 가서 보리굴비를 먹게 되었다. 보리굴비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30년을 함께 산 내 반려자. 이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보리굴비 먹은 것을 말하고 보리굴비를 주문해 먹으라고 했다. 이때 아내 왈 “이제 보리굴비 별로 안 좋아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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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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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교만. 하나님도, 사람도 싫어한다!
- 교만(驕慢)에 대해 구굴 A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만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한다. 심리학과 철학에서 다루는 교만의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자기중심성: 타인의 권리나 감정보다 자신의 이익과 우월함을 우선시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뽐내며 건방짐'으로 정의한다. 7대 죄악: 기독교 전통에서는 교만을 7대 죄악 중 가장 뿌리 깊고 치명적인 첫 번째 죄악으로 꼽는다. 심리적 기제: 때로는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 기제로 나타나기도 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세상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을 볼 때 불편하다. “뭐가 그리 잘났는가?”하는 생각을 한다. 별것도 아닌 것인데도 교만을 떤다. 그런데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교만한 자를 그냥 내버려두자. 하나님께서 손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 떠는 것들로 인해 기분은 상하지만 냅두자. 언젠가 댓가를 치룰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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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교만. 하나님도, 사람도 싫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