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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3】 후회 없기 위해서 삶을 돌아보며 살자
30만 명의 독자가 읽고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에서 번역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이은 신작 산문집. 많은 작품을 통해 그만의 인생관을 세상에 알린 작가로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들이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실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더욱 깊어진 이해에 문체의 매력이 더해져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커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당하는 기분의 연속이다. 그렇듯이, 그의 글에는 가벼움과 깊이가 공존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말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라」 「나의 지음을 찾아서」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성장기에 읽은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 「웃음은 마지막 눈물 속에 숨어 있었어」 「플랜A는 나의 계획, 플랜B는 신의 계획」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등 글의 힘으로 많은 독자의 삶을 변화시켜 온 작가의 글 42편 수록.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고 있으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유리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진다. 청각과 후각의 예민함을 언어화해 나가는 뛰어남이 느껴진다. 그래서 열심히 읽게 된다. 문장에서 힘을 받고 내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예스24 생각해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특히 남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심금을 울렸다. 류시화의 책을 더 읽을 것이다.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 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p. 19). 우리는 상처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여행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여행의 방향을 결정한다. 예술가에게 상처를 입혀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가한 상처가 걸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방식이다. 부서진 크레용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다. 그 부서진 크레용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p. 36).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 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p. 44).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혼이 뼈와 만나는 저 안쪽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저마다의 가슴에는 있다(p. 49). 힘든 시절이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나 자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리라. 그러나 돈이든 그 무엇이든, 지금 '절벽 끝'에 몰려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갑자기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 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그 절(p. 57)박함과 간절함이 내게는 날개였다. 날개를 잃었다면 떠올려 보라, 날개가 돋았던 어느 순간을(p. 58). 저녁 무렵, 한 젊은 여성이 전철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을 감상하며 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중년 여인이 올라탔다. 여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젊은 여성의 옆 자리 좁은 공간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옆으로 밀어붙이며 들고 있던 짐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걸쳐 놓았다. 그녀가 처한 곤경을 보다 못한 맞은편 남자가 그녀에게, 왜 옆 사람의 무례한 행동에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여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걸지 않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p. 84)에서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작자 미상의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가? 진정하라. 함께하는 여행이 짧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고, 속이고, 모욕 주었는가?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함께하는 여행이 곧 끝날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는가? 기억하라, 우리의 여행이 짧다는 것을. 이 여행이 얼마나 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릴 정거장이 언제 다가올지 그들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p. 85). 이런 이야기가 있다. 평생을 경건하고 독실하게 살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섯 시간씩 신에게 기도했다(p. 96). 하지만 무신론자인 동생과 다르게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아내는 그를 떠났으며, 동업자는 배신했고, 자식들도 연락을 끊었다. 반면에 평생 한 번도 기도한 적 없는 그의 동생은 훌륭한 아내와 충실한 자식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삶을 누렸다. 죽어서 신 앞에 선 경건한 남자는 물었다. "저는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불평하는 타입이 결코 아닙니다. 아내가 떠났을 때도 당신께서 정해 주신 섭리를 믿으며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등을 돌렸을 때도 당신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왜 이 모든 불행한 일이 무신론자인 제 동생에게 일어나지 않고 매일 다섯 시간씩 기도한 저에게 일어난 건가요?" 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대는 재미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매일 다섯 시 간씩 그대의 기도를 듣느라 나도 지겨웠어. 지루하게 살지 말라고 내가 그토록 속삭였는데 듣지 않았어." 묘비명에 '최선을 다했다.'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지루하게 살았다.’가 적히면 안 되지 않겠는가(p. 97).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승이 말했다.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p. 109).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말이 옳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메시지를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돌아서면 나의 가슴과 의지에 따른다. 받아들임과 흘려보냄, 이 전략을 나는 계속 실천해 나갈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논쟁한다면 그것은 죽은 자와 논쟁하는 것이다. 누구나 머지않아 죽을 것이기에.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대신, 빠르게 동의하고 자신의 시간을 창조적인 일에 몰입하는 것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관계법이다. 무의미한 논쟁을 끝내고 삶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에서 이기는 내공이 아니라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내공이다. 밀림 속에서 동물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불필요한 의견 충돌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도와 가며 평화롭게 지냈다. 어느 날 호랑이와 당나귀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아는 동물은 없지만, 당나귀가 한 말에 호랑이가 짜증을 내며 "풀은 초록색이야!" 하고 외치는 것이 들렸다. 당나귀는 모두가 놀랄 정도로 더 크게 외쳤다. “아니야, 풀은 파란색이야!” 그 후 “초록색!” “아니야, 파란색!,” "초록색이라니까!", “파란색이라니까!” 하고 연거푸 고성이 오갔고 시간이 가도 논쟁은 멈(p. 110)추지 않았다. 둘의 논쟁에 다른 동물들도 덩달아 편이 갈려 ‘초록색!’ ‘파란색!’을 외쳤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밀림의 세계가 파국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동물들은 그들의 왕 사자를 찾아가 판결을 부탁했다. 사자는 당나귀와 호랑이의 주장을 듣고 나서 잠시 심사숙고한 후, 호랑이가 틀렸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판결에 따라 호랑이는 소란을 일으킨 죄로 1년 동안 밀림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다. 떠나기 전에 호랑이는 사자를 찾아가,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왜 당나귀 편을 들고 자신을 벌했느냐며 하소연했다. 사자가 말했다.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인 걸 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너를 벌한 것이다. 논쟁을 하려면 자신보다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함으로써 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네가 벌을 받는 진짜 이유이다."(p. 111).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며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에게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밤 늦게 전화를 걸어 곧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랭클은 새벽까지 그 여성에게 말을 걸 었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씩 제시했다. 긴 설득 끝에 그녀는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그에게 다짐했다. 나중에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 빅터 프랭클은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랭클이 의아해하며 설명을 부탁하자, 그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그의 자세가 그녀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게 하고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기차 안에서 만난 그 인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p. 120). 일상의 순간에 예술적 생명감을 불어넣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죽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재미있게'라는 단어를 넣으면 더 완벽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재미있게' 죽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좋아하는 것이 세상과의 유쾌한 승부가 된다(p. 132). 우리는 시도하고, 시도하다가 생을 마치는 운명이다. 그것이 시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그대가 '이룬 것'을 들고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툴고 거칠더라도 혼을 담아 ‘시도한 것’을 들고 오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삶에서 시도한 것들을 보여 줄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을 시도하고, 불완전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레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깨달음을 시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또 다른 일화가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푸가를 한 곡씩 연주했다. 그런 다음에야 10시간 작곡에 몰두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음악가라고 느끼는 의식이, 악보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연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웅인 바흐를 존경하며 그날의 작업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기를 비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가락을 유연하게 하고, 일에 발동이 걸리게 하고, 마음이 음악을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였든, 작업실에서 매일 아침 반복하는 그 똑같은 행위가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의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대의 바흐 푸가곡은 무엇인가? 그대가 하는 일이 단순히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그 일을 그대의 삶 자체로 여긴다면 그대가 매일 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나(p. 136)의 경우는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내 시집을 열어 내가 쓴 시를 한 편씩 읽는다. 지난 30년 동안 이것을 건너뛴 날이 거의 없다. 산문을 쓰든, 번역일을 하든, 다른 시인들의 시를 모아서든, 나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내 안의 시인에 연결되기 위해. 시인이며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죽을 만큼 그것에 빠져 보라"고 했다. 영혼의 작업에 다만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불꽃을 계속 태우는 것이 삶이다. 생을 불태우려면 자신이 불타는 것을 견뎌야 한다(p. 137).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파머는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조언을 듣거나 바로잡아지거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고, 들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절을 할 때, 우리의 그러한 존중은 그 사람이 고통을 극복하는 중요한 치유 자원이 된다."(p. 144). 어려울 때는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우리는 희망하고, 절망하고,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의 날갯짓이다. 물에 얼굴을 박고 넘어져 있다면 당신이 할 일은 얼른 일어나는 일이다. 물속에서 산소를 찾거나, 아가미를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한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p. 150)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찬다. 새끼 기린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이다니!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나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찬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차이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찬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아기를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 한다. 엄마 기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새끼 기린이 자기 힘으로 달리지 않으면 하이에나와 사자의 먹잇감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을 무조건 걷어차는 것이다. 일어서서 달리는 법 을 배우라고. 당신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적이 몇 번인가? 별로 기억나지 않(p. 151)는다면 각오하는 게 좋다. 조만간 연타로 발길질 당할테니. 당신이라고 해서 삶이 살살 기분 좋게 굴리는 법은 없다. 그러나 걷어차이고 또 걷어차여도 당신은 일어설 힘이 있다. 당신은 기린 이니까. 카뮈는 "눈물 나도록 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세상에 내놓은 그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엄마 기린과 같다.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진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채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다(p. 152). 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이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비록 이것을 깨닫는 데 생의 반이 걸렸지만.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몸짓을 읽는 연민과 공감의 눈이 필요하다. 홀로된 그녀의 분노와 싸움 역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비록 방법은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그 몸짓이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연결되고 싶어요.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에요." 혹시 당신도 고립된 감정의 덫에 걸려 있다면, 다히 카엥기?(p. 165). 내가 아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이다.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 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 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 난다. 플랜A보다 플랜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p. 181).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 『열흘 밤의 꿈』 에서 일곱째 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큰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있는 이유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뱃사람을 붙잡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언제 육지에 닿을지도 모른다. 배에는 외국인도 있고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난간에 기대 울고 있는 여자도 있다. 자신이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불안하고 따분해진 나머지 남자는 죽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배의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발이 갑판을 떠나 배와 인연이 끊긴 그 찰나, 그는 갑자기 목숨이 아까워진다. 뛰어내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어져 가는 배 안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문(p. 193)득 다시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더 이상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몸은 바다를 향해 다가가고 검푸른 물에 점점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배일지라도 역시 타고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이용하지도 못한 채 한없는 후회와 공포를 안고 검은 파도 속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내가 선택한 이 길, 나에게 손짓하던 그 많은 무화과 중에서 이 열매가 나에게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배를 끝까지 타고 가서 목적지를 확인할 것이다. 내일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실함이다. 어차피 나는 죽음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다. 심장이 침묵한 것 같으면 스스로 심장을 깨워 그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p. 194).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p. 218).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앨리스 카하나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이다. 열다섯 살 때 독일군에 의해 가족 전체와 함께 아우 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해 텍사스 주에서 살며 화가로 활동했다. 그녀에게 일생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은 뼈아픈 기억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그녀는 강제로 부모와 분리되었고, 여덟 살 남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다시 트럭에 실려 어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동생이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중의 어딘가에서 다른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나가 어린 동생에게 흔히 하듯이 그녀는 부주의한 동생을(p. 242) 나무라며 소리쳤다.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밀어닥친 혼란과 비극 속에서 모두가 신경이 불안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동생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앨리스 카하나는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없는 그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그 사람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전시관에 가면, 그곳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신발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갈 때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카하나의 남동생도 그곳 가스실에서 숨졌다. 어떤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부분 옳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이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할 수도 있으며, 나(p. 243)아가 다른 인간관계까지 공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p. 244). 인간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도 입술의 형태로 그 사람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헤어진 후에도 남는 그 말은?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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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2】 가끔은 시를 읽자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으로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한편, 엮은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마음챙김의 시』로 시 읽는 기쁨을 전파한 류시화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는 신작 시집이다. 「초대」 「살아남기」 「너는 피었다」에 위로받고 「그런 사람」 「저녁기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을까」로 삶의 본질을, 「숨바꼭질」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에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한다. 삶 속에서 심호흡이 필요할 때 가슴으로 암송하는 시, 세계를 내면에서 보고 마음속 불을 기억하게 해 주는 시 70편이 실렸다. 섬세한 언어 감각,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이 빛난다. 우리가 귀를 막으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자신이 하는 말은 들린다. 불완전한 단어들이 모여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가슴 안에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그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그가 그것을 시에 담으면 그 세상은 모두의 세상이 된다. 여기에 실린 시들이 그것과 같다. 시는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또 다른 고독한 영혼이 보내는 메시지이다. 읽을수록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과 좋아하는 시가 많아지는 시집, 또 한 권의 마음에 품는 시집이 될 것이다.-예스24 어려운 시가 많아 시를 읽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러나 쉬운 시도 있다. 류시화의 시는 쉬우면서 통찰을 준다. 다른 책을 읽다가 한동안 잊어버렸던 류시화가 언급되는 것을 보고 즉시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 당분간 류시화와 함께 할 것 같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야생화 만약 원한다면 야생화처럼 살라 단, 꽃을 피우라 꼭 다음 봄까지 살아남으라 한 사람의 진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꽃에게서 배운 것 한 가지는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 타의에 의해 무릎 꿇어야만 할 때에도 고개를 꼿꼿이 쳐든다는 것 그래서 꽃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마지막 안내 방송 우리 비행기로 여행하게 되신 걸 환영합니다 탑승하기 전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미 고지했듯이 수하물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소유물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초과 예약으로 기내에 여유 공간이 부족하므로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도, 나아가 무거운 슬픔이나 후회, 혹은 부피 큰 기대는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송별객과는 여기서 헤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작별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니 주머니 없는 옷 입고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탑승해야 합니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집착도 털고 속눈썹에 얹힌 눈물 떼어 내고 이 순간부터는 자신이 누구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조차 필요 없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귀빈석이나 특별 좌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내 영화는 좌석마다 다르게 각자의 인생이 담긴 내용이 재방송될 것입니다 이 여행을 원치 않는다 해도 이미 예약된 이상 취소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자신이 믿었던 것과 다른 목적지나 다른 풍경 속에 내린다 해도 비행기를 회항하거나 내리기를 거부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안내 방송입니다 지연이나 결항 없이 정시에 이륙할 예정이오니 뒤로 미뤘던 일들이나 소원 목록은 다음 생으로 기약하고 오직 사랑한 기억만 웃옷 안감에 품고서 서둘러 탑승구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꽃의 결심 꽃은 피어도 죽고 피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을힘 다해 끝까지 피었다 죽으리 잠깐 멈췄다 가야 해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누군가 이렇게 적어서 보냈다 내가 답했다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 앞에 없을지도 모르거든.’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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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1】 일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63년 만에 ‘근로자의 날’에서 ‘노동절’로 명칭이 복원되고 법정 공휴일로 격상된 올해 5월 1일, 바로 우리 곁 노동자 열일곱 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집 《생업》을 한겨레출판에서 펴낸다. 이 책의 저자인 은유는 《있지만 없는 아이들》《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쓰기의 말들》《글쓰기의 최전선》 등을 통해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날카로운 르포르타주 작가로서 독자를 감응시켜왔다. 그가 작가의 덕목으로 ‘듣는 신체’를 각인하고 이를 공감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겸손한 인터뷰어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일하는 사람이 덜 죽고 덜 다치는 세상을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캠페인의 일환으로 〈시사인〉에 2024년부터 1년 6개월간 연재한 은유의 ‘먹고사는 일’을 바탕 삼아 지면 관계상 수록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대폭 추가해 새롭게 엮었다. 일하는 사람,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17회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는 녹취록만 200자 원고지 2000장을 넘긴 터였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18인의 이야기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 《크게 그린 사람》의 후속편인 《생업》 역시 묵묵히 생계를 건사해온 노동자 17인의 육성을 통해 인간이 일로써 다다를 수 있는 삶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하루 1700인분의 밥을 짓는 급식 노동자, 평생 일을 쉬어본 적 없는 청소 노동자, 요양원이 죽는 데 아니고 사는 데라 말하는 요양 보호사, 지하철 타는 1000만 배우, 진보정당 부대표였다가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노동자 등의 “말이 곧 삶인 말”은 ‘집필 노동자’ 은유의 몸을 통과해 지금 이곳을 톺아보고 올곧은 미래를 상상하는 연대의 기록으로 확장되었다.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살리고 마침내 세상을 살리는 이들의 떳떳한 표정들에서 독자는 생업의 슬픔과 기쁨, 고단함과 긍지를 새삼 자각할 것이다. 1년 6개월 동안 배달 노동자, 급식 노동자, 청년 농부, 독립 연구 활동가, 타투이스트, 심리 상담가, 배우, 가수, 유튜버, 노동 운동가, 변호사, 산재 피해 유가족, 활동가, 국어 교사, 청소 노동자, 요양 보호사까지 총 17명을 만났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안 보일 때는 아무도 안 보이지만 보이기 시작하면 너무도 잘 보이는 우리 주변의 노동자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것으로 묵묵히 세상을 떠받치는 존재이다. 평범한 사람들인가? ‘평범하다’의 정의는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이들은 세상의 척도인 고액 연봉, 전문직 명함, 금메달 같은 물증이 있는 성취로 보면 평범하다. 그런데 가치 척도를 바꾸면 평가가 달라진다. 인간의 존엄, 노동자의 권리, 이타심과 돌봄 측면에서 보면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뛰어나고 색다르다.-‘책머리에’에서. 예스24 생업(生業)은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마지못해 하는 것도 있고, 기쁨으로 하는 것도 있다. 어차피 사는 동안 우리는 일해야한다.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하자. 언젠가 일하지 못할 때가 올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스물일곱에 귀향한 '전업 농부'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일단 아버지와 맞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뭘 좀 해 보려면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했고, 시키는 대로 하면 또 "너무 수동적이다"라고 했다. 여느 직장인처럼 상사와 갈등이 깊었는데 거기다가 상사가 퇴근을 안 하고 "밥까지 차려달라"는 셈이었다. 외진 지역에 섬처럼 고립되었다는 소외감, 서울에서 살 때처럼 책과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없다는 박탈감이 컸다. 스트레스로 체중이 늘고 걸핏하면 장염에 걸렸다. 매달 링거를 맞으며 이게 맞는지를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배 과수원을 그에게 완전히 넘기고 사과 농사를 짓고 싶다며 강원도 양구로 독립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과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때 알았다. "아, 내가 농사일이 힘든 게 아니었구(김후주, p. 39)나."(웃음) 초반 서너 해 고비를 넘겼다. "저 같은 승계농, 후계농 친구들이 농사를 중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가족 간 갈등이라는 통계가 있어요. 일은 다 하는데 돈은 못 받죠. 오히려 일꾼한테는 임금 체불을 못 해도 자식한테는 하거든요. '뭐, 어차피 네 거 될 건데'라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도 알고 있어요. 관련 정책을 개발하고 '가족 경영 협약'을 교육하고 승계 혜택을 주는데도 쉽지 않죠. 그래서 승계농은 청년이 지역에서 정주하 기 제일 좋은 조건인데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죠."(p. 40). 우리밥연대의 가장 큰 특징은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다들 놀라며 묻는다. 그럼 무슨 돈으로 밥을 하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구성원들이 각자 사비를 털고 일손을 보태 "신기하고 희한하게" 굴러가고 있다고 답을 해준다. 요즘엔 차라리 식당에서 사는 게 싸겠다 싶을 만큼 물가가 많이 오르고 있는지라 김주휘는 대책을 강구했다.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연잎밥을 팔고 반찬도 팔았다. 킁곰은 9년째 월급날이면 칼같이 돈을 낸다. 돈을 내려고 우리밥연대에 들어온 회원도 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자 세월호 유가족 경민이 엄마는 내가 그 우리끼리가 되겠다고 했다. 공식적인 후원금을 받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밥연대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단체에 못 섞이는 성격들이에요. 사람이 좋은데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밥연대에 있어요. 저희가 직장인이고 전문적으로 할 수 없는데( 김주휘. p. 61) 후원까지 받으면 일이 커진다, 부담스럽다해서 우리끼리 한 달에 한두 번 할 수 있을 때 하자 했죠."(p. 62). 각국에서 온 난민 신청자들이 요리사로 등판한 '후원의 밤'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에티오피아 사람은 옷을 여왕처럼 차려입고 커피 드립을 하고 모로코 사람은 샌드위치를 만드(p. 91, 심아정)는 등 각자 제 나라 백반을 선보였다. 그는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아정, 당근 잘라줘, 너 파 썰어줘. 그분들이 위축되는 모습이 아니죠. 환대란 내가 뭘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가 주가 될 때, 주객이 뒤집어질 때 가능하죠. 그래서 내 자리를 뺏길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관계가 전복되는 건 달라요. 난민이라고 해서 불쌍한 모습이 정말 아니고 옷도 잘 입어요. 저 보고 옷 좀 사래요. 아정은 단체 티셔츠밖에 없냐? 뭐라고 해요. 나는 이 티셔츠가 열 장 넘어서 그래!(인터뷰 때도 아정은 '물결' 티셔츠를 입었다. p. 92)“ 심아정은 지난겨울 6년간 활동해온 '마중'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트랜스보더링랩(Trans-bordering Lab), 국제법 X 위안부 세미나 팀, 번역 공동체 '잇다'에서 활동하고 공부한다. 국제법 X 위안부 세미나 팀에서는 피해 목소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가해 병사들' 진술을 몇 년째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형제 폐지에도 관심이 생겼고, 느끼는 바가 많다. "가해를 성찰할 기회를 줘야 해요. 죽이면 안 돼요. 사람이 변곡점이 있어야 해요. 시간을 주는 게 너무 중요해요." 그에게 배운 대로 적용해보자면 사형수에게 시간을 주는 사회는 나머지 사람에게도 시간이 주어지는 사회다. 남의 일은 없는 것이다(p. 95). 유튜브에 이정은 배우를 검색하면 ‘연봉 20만 원 무명 배우가 칸에 가기까지’라는 종류의 영상이 인기다. 그가 1992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무대에 선 이래 가난한 배우로 살아온 이야기는 업계의 전설로 회자된다. 방송에 데뷔하기 전인 마흔 살까지 연기 지도, 녹즙 판매, 식당 서빙, 채소 가게 점원 등을 병행하며 이른바 '투잡'을 뛰었다. 채소 파는 가게에서는 정규직 제안을 받을 만큼 열심이었고 소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노동의 역사를 단지 '무명의 설움'으로 여기는 건 게으른 오해다. 어느 돈가스집에서 일할 때다. 후배 배우들이 왔다가 거기서 일하는 그를 보고는 대단하다며 안 창피하냐고 물었다. 그는 심상하게 말했다. "난 배우인데 창피할 게 뭐 있어,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 삼십대에는 자존감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요. 틈나는 대로 생활비 벌고 연습 시간 확보하고 성실하게 사니까요. 내 돈으로 내가 벌어서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뭐가 부끄러운가. 그때는 나 안 쓰는 데 가서 고개 숙이지도 않았어요. 혼자서 강아지랑 살 때니까 생활비도 얼마 안 들고 철딱서니가 없어서 늘 당당했어요. 요즘에는 가끔 고개도 숙이죠. 회사 식구들도 생겼고 부모님도 연로하시니까요. 난 그래서 직장인들 이해가 가요. 가장이면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이정은 p. 121).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장르를 경험하며 배우의 삶을 두루 목격한 그가 볼 때 배우의 흔한 직업병은 암과 우울증이다. 늘 선택받고 평가받는 직업이다 보니 "일이 없어도 스트레스, 인기가 있어도 스트레스"라 그것이 각종 암으로 정신 질환으로 드러난다. 배우로 사는 것은 초조와 불안을 다스리는 일이고, 연륜이 있다고 그 습격을 피해 가지는 못한다. "저는 공연(연극)할 때는 불안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연극 무대는 연습 기간이 긴 데다 한 작품을 마치면 잘 쉬고 다른 작품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의심이 생겼어요. 분명히 시작할 때는 명확했는데 한참 작품을 하다 보면 피로도가 높아져요. 쉬게 됐을 때 일주일은 너무 좋으면서도 근데 원 없이 작품을 했나 그런 의문이 들고, 그다음 대본들이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차기작을 빨리 결정할 게 아니라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죠."(p. 126). 타투이스트의 직업병은 노안이다. 작업할 때 켜는 조명이 세고 초집중을 한 상태로 눈을 쓰다 보니 시력이 약화되어 노안이 빨리 오는 편이다. 그 역시 "서른다섯 살을 기점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체력이 떨어지면서 바로 노안이 왔다. 손목 터널증후군과 디스크도 고질병이다. 한번 작업하고 나서 자리에 누우면 일어나지 못할 만큼 코어가 무너져 폴댄스를 배웠고, 그때 다진 코어 근육으로 지금껏 생존하고 있다. 노동이 가능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요즘엔 킥복싱을 한다(p. 158). 그가 옷자락을 들춰 복숭아 타투를 자랑한다. 주변으로 호랑이, 도마뱀, 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각각은 "그때그때 한 시절을 기록하는 나이테 같은 친구들" 이다. 자랑스러운 훈장이기도 하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주장하는 부모의 벽을 넘어, 33년 불법의 벽을 넘어, 터부시 하는 편견의 벽을 넘어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살아온 날들의 흔적이 타투로 남았다. 이 좋은 타투를 황도는 모두에게 권한다. "기억을 몸에 새기는 신기한 경험"이라는 본령 외에도 타투는 인간관계의 리트머스가 되어주고 소수자 연대의 기회를 열어주는 등 삶에 여러모로 이롭다. "타투는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취미잖아요. 하고 나면 여러 반응이 있어요. 칭찬도 해주고 오지랖도 부리고 별로라고도 하고요. 사회적으로 호불호가 있다 보니까 듣는 말들(황도, p. 159)이 상처가 되죠. 그래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과 공감대가 형성돼요. 일생에 단 한 번도 소수성을 가진 적 없는 사람이 문신을 했다는 이유로 '문신한 XX' '문신한 여자는 걸러'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듣게 되죠. 타인의 외모에 대한 혐오예요.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거고요. 네가 날 걸러? 내가 걸러!(웃음) 타투는 마이너의 삶을 선택해보는 일 입니다."(p. 160). 일이 자아내는 감정들, 노동의 분비물 같은 미용과 원망을 그는 쌓아두지 않는다. "나쁜 마음”을 흘려보내는 자체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나는 글쓰기. 어려서부터 엄마나 친구가 너무 미운데 표출할 방법이 없을 때 글을 썼고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미움이 사라졌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내가 알아주는 수단이 되었다. 또 하나는 수다 떨기. 힘들 땐 누가 뭐래도 동료다. "우리끼리 티타임 하면서 풀어요. 그게 제일 빨라요. 방법 없어. 어떻게 늙어야 하냐가 우리 화두예요."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요양 보호사로 살아남을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마음. 그게 가장 중요해요. 제가 간호사로 근무하고 환자를 볼 때 선이 항상 그어 있어요. 환자는 환자고 직원은 직원이다. 여기는 달라요. 가정생활을 하는 집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과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국가가 혜택을 줘서 만들어주는 공간이라 저 어르신과 내가 다르다고 선을 그으면 안 돼죠. 또 실은 그들의 불편함이 나를 먹여살리는 거죠. 우리를 깨우쳐주기도 하고요."(요양 보호사. p. 184).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까 남은 네 식구도 밥상에 같이 앉지를 못해요. 우리가 좋아하던 음식을 못 먹는 것보다 넷이 같은 밥상에 앉지 못하는 게 더 슬퍼요. 가족이 다 있을 때 집에서 애가 그렇게 됐잖아요. 저희가 느끼는 죄책감은 어떻게 표현을 못 합니다. 왜 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게 넷의 공통된 죄책감이에요." 형이랑 친구처럼 싸우면서 자란 둘째 아들은 장례를 치르고 완전히 페인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얼굴을 안 보려고 한다. 낮에는 자고 밤에 아무도 없을 때 움직인다. "얘가 계속 우리를 피하니까 상담을 권유했더니 화내면서 안 한다고.... 어느 날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을 못 먹겠어요." 열네 살 터울로 큰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막내는 당시 중1이었다. 오빠의 죽음도 아직 못 받아들이는데 학교 친구들한테 부고가 알려져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는 건 더 지옥인 나이였다. "얼마 전엔 학교에서 야간 노동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이름이 언급됐다고 저 서울에 있는데 장문의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내가 학교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 중학교도 학교생활 못 했는데 고등학교 생활도 못 하게 하느냐. 얘는 빨리 손 놔라, 나도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요. 미안하다고밖에 말(박미숙. p. 221)못 해요." 막내는 오빠의 죽음 이후 일주일씩 입을 닫아버렸다. 한 번은 집을 나가 답장도 없다가 밤 12시가 다 돼 연락이 왔다. 지금 어디 있는데 데리러 와달라고. 마음이 괴로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왔다 갔다 헤맸다. 남편의 애도 방식도 그 와는 달랐다. 애 하나 잃었으면 됐지 이제 남은 애들 둘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고, 명절이나 덕준의 생일이면 제사상을 차리길 원했다. 박미숙은 그러고 싶지 않다. "아직 애가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지금도 문을 열고 들어올 거 같거든요. 근데 제사를 지내면 인정하는 게 되니까요. 납골당을 저는 못 가겠고 아빠는 가고 싶어 해요. (외부 활동도) 그만하자고 산재 승인받을 때까지만 하기로 각서를 썼어요. 애들 아빠는 저한테 투사라고 하는데 저 투사 아니고요, 나는 이렇게 애를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죠."(p. 222). 쿠팡이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하며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더라?"라는 말이 고객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쿠팡의 미션이다. 그들의 목표대로 세상은 굴러간다. 타임 푸어(time poor)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소비자는 '로켓 배송' '오늘 배송' 같은 속도와 편리함에 길들여졌다. 노동자의 죽음은 의식하지 못 한 채. 그렇다고 박미숙은 쿠팡을 쓰는 사람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SPC 노동자 사망으로 불매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갖고 있던 쿠폰을 빵으로 바꿔 왔다. 그걸 보고 막둥이가 화를 냈다. "엄마는 쿠팡만 가지고 그러지 SPC도 나쁜데 왜 사먹냐"라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따졌다. "저도 사고 소식을 알았는데 무의식적으로, 살던 습관대로 SPC를 썼잖아요. 이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때는 쿠팡을 이용하진 않았어도 좋은 회사로 알았어요. 사고 후에 드는 생각이 정말 제대로 봐야겠다. 4년간 싸우면서 쿠팡은 비열한 회사, 진짜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회사라는 게 제가(박미숙. p. 229) 받은 인상이거든요.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서 성장하고 있어요. 근데 사람 생명보다 앞서는 법은 없잖아요. 과연 안전한 회사에서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갈 수 있나요. 열린 눈으로 제대로 봐야 해요. 저도 일을 겪으니까 보이게 된 거죠. 쿠팡에 다닐 때 아들은 양팔저울의 비유를 들어가며 말하곤 했다.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누군가 짐을 지고 있는 거라고. 그는 아들이 숙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덕준의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하는 거 함 보자." 엄마도 고생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임을 덕준이 27년 삶으로 보여줬다고 그는 믿는다(p. 230). 그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게 온전히 자기 능력은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같이 똑똑한 사람도 시대 탓에 많이 배울 수 없었다. 엄마를 보면서 소위 '스펙'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아무런 잣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늘 느꼈고 주변에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못나거나 부족해 저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 내가 가진 게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 사회에 대한 생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너는 애가 공부 머리는 있는데 일 머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자만하지 마라.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학습된 것 같아요."(p. 254). "사법 연수원이 경기도 일산 마두역 근처에 있어서 저희끼리 '마두고'라고 불렀어요. 가령 한 반에 50명이고 선생님 들어오면 차렷 경례······.(웃음) 저는 적당히 시키는 대로 따라 가다가 정작 성인이 되어 간 연수원에서 주입식 교육에 반항심이 드는 거예요. 그제야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거부하던 학생들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일찍 철든 아이들이었죠." 법조인이 되겠다고 모여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성적에만 집중하며 세상에 관심 가지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걸(윤지영 p. 255)보고 그는 학을 뗐다. 대학 입시가 그러하듯 사법 시험은 사회와 격리된 채 오로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잘 보는 시험이었다. 그걸 통과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법조인이 되고 사회 지도층이자 엘리트로 여겨지며 스스로도 지도자로 나섰다. 그걸 가까이 보면서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우리가 자격이 있을까."(p. 256). 같이 가자고 말하는 이 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그가 자주 하는 말은 이거다. "그럴 수 있지요, 그랬군요." 반면 절대 하지 않는 말도 있다. "이렇게 하지 그랬어요."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말을 하면 2차 가해가 된다. 상담사가 노동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을 때 저도 모르게 내뱉을 수 있는 위험한 말이다. 노동자의 어려움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너무 힘들었겠다고 말하며 편견 없이 받아줄 때 "안전한 상담”이 가능하다.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돌보는 업에 종사하기 위해 자기 마음 건강도 챙긴다. 그는 1년간 명상 수업을 받기도 했다. 계속 아픔을 들으니 어디선가 충분히 배출해내야 하는데 배출하지 못할 때 "무당이 신병이 나는 것처럼" 몸이 아팠다. 직업병이 된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 진료와 명상을 병행했다. "잠깐이라도 멈추는 게 나를 살게 한다"라는 걸 체험하고 나서는 짬짬이 명상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비운다(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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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0】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피곤한 삶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된 책으로 저자 한병철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다. 그는 현지에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평가 받았으며,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 저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고 보고,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한 답을 구하라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예스24 두 번째 읽었는데도 역시 쉽지 않다. 예스24와 역자의 글을 통해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내게 어려운 책이라 ‘피로’하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노동하는 동물(p. 44)의 승리를 다룬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사회적 발전에 맞설 수 있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체념적 태도로 이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소수에 국한 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이어서 그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쑥 사유의 힘에 호소한다.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비록 세계의 미래가 사유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좌우될 터이지만, 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다소 임시변통으로 보인다. “활동의 경험”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순수한 사유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활동성은 오히려 후기근대적 성과 사회의 활동과잉과 히스테리를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아(p. 45)렌트가 책의 마지막에 제시한 카토의 경구 역시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원래 이 경구는 키케로가 『공화정에 대하여』에서 자기 말의 근거로 삼은 것으로, 아렌트가 인용한 부분에서 키케로는 "광장"과 "북적대는 군중"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 고독 속으로 돌아갈 것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는 카토를 인용한 뒤에 사색적 삶을 찬미한다.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사색적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 본연의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렌트는 활동적 삶에 대한 찬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카토가 이야기하는 사색적 삶의 고독도 아렌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바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 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 46).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p. 103)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p. 104). 역자 후기 간결명료하게 씌어진 이 짧은 책의 요지를 역자가 다시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책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 지점을 지적하고 한국 현실과의 관련성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역자의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p. 119)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 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p. 120)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 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더 나아가서 한병철은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사상이 금지, 억압, 규율, 감시, 주권자/희생자의 이분법과 같은 부정성의 패러다임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라는 시대의 산물로서 근대를 기술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을 패러다임 전환 이후의 사회, 즉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 거명된 사상가들이 여전히 현실 분석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병철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대단히 파격적이고 깊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의 정신분석학은 19세기 말 서양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적 욕망(p. 121)에 대한 금지와 억압의 기제가 균열을 일으키던 시대에 등장한 것이고, 그의 이론 자체가 그러한 부정성의 약화에 현저하게 기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에서 작동하는 부정성의 구조를 기술하는 이론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위기에 빠졌음을, 그리고 그런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것임을 알리는 징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무의식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 이후의 주체는 무의식이 없다고 한병철은 말한다.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p. 122)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정성의 패러다임을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 적용해보면, 분단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이념적 지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특수한 문제점들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분단 이후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현대사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북한)와 민족적 타자(미국)의 문제. 이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혼선을 빚게 된다. 이데올로(p. 123)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 (즉 민족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고,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성은 우리와 유사한 입장에 있던 서독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서독에 진주한 미군은 민족적 타자로서 거부될 수 없었다. 히틀러 시대를 겪은 뒤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불온하고 금지되어야 할 이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독의 경우 애초부터 민족적, 인종적 친연성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타자성은 남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이 사실이다.) 서독에는 오직 동독과 그 배후의 소련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타자가 있었을 뿐이다. 남한의 경우 단순한 부정성의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부정성을 택하고 다른 하나의 부정성을 억지로 지워버려야 했다. 민족적 부정성을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으로 환원해버리거나(이때 북한은 주적이고 미국은 형제다),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을 민족적 부정성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이때 미국은 제국주의자이고 조국은 하나다). 1970~80년대까지는 강력한 반공주의에 의해 민족적 부정성이 부인되었다면, 그러한 반공주의적 억압이 사라진 이후에(p. 124)도 남한이 이룩한 통상국가로서의 기적적 성공은 미국이라는 민족적 타자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자라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거의 없애버렸다. 2008년의 촛불 시위에 민족적 부정성의 차원('검역 주권')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위의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은 건강의 위험에 대한 소박한 염려에 있었다. 한병철의 말대로 ‘건강’과 ‘벌거벗은 생명’이 성과사회의 최후의 가치가 된다면,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최근의 어떤 이슈보다도 압도적으로 더 큰 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성과사회의 징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을 타자로 위험시하고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부정성도 특히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왔다. 민족적 부정성을 앞세우며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을 부인하는 입장(조국은 하나다)에 가까웠던 재야 운동가, 학생운동가들이 제도권으로 진출하고 정치• 사회적 권력에 참여하면서, 북한을 이데올로기적 타자로 규정하는 전통적 반공주의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갔으며, 햇볕정책도 그러한 토대 위에서 실행될 수 있었다.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의 국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도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희미해져가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북한은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한병철이(p. 125)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두고 말한 것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더 이상 위협적인 타자가 아니라 그저 짐스럽고 무관심한 타자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한 경향은 냉전 시대의 기억을 환기하던 절대적 지배자 김정일의 죽음 이후 더욱더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던 이중의 부정성이라는 문제에서 - 여전히 이런저런 불안 요인과 염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 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중의 부정성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남한 특유의 정치 지형(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도 조만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 다고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p. 126)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이것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p. 127)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한병철의 예리한 시대 진단은 그러한 쉽지 않은 반성과 자각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이 책이 고도로 발달한 성과사회의 한복판(독일)에서 얻은 호응은 그의 제안이 고독한 메아리 이상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2012년 3월에 김태환(p.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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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9】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유통되었는가?
자연, 인간, 커피를 블렌딩한 ‘아주 특별한 기행’ 《커피기행》은 커피를 생업으로 삼아온 박종만 커피박물관 관장이 쓴 ‘커피 로드coffee road’에 관한 기록이다. 커피 로드란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커피가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까지 퍼져나가는 길을 가리킨다. 이 땅에 커피나무를 재배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박종만 관장은 우리 커피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북한강변에 커피박물관을 열고 커피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첫걸음으로 커피의 기원과 초기 전파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커피탐험대를 결성하고 2007년 2월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 책은 그 결과를 책으로 담은 것이다. 우선 탐험대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아프리카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는 케냐 커피산업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인공이자 20세기 초 이곳에서 커피농장으로 성공을 꿈꾸었던 덴마크 소설가,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흔적을 살펴본다. ‘킬리만자로 커피’의 생산지로 알려진 탄자니아에서 탐험대는 커피위원회를 무작정 방문하여, 현지 농부의 손을 떠난 커피가 정부에 의해 어떻게 등급별로 관리되고 국외로 수출되는지 취재한다. 그리고 바리스타 챔피언대회가 열린 에티오피아에서 우연히 일본 UCC커피의 우에시마上鳥 사장을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커피의 고향 짐마와 70년 전통의 옥사데이 커피회사를 둘러 본 탐험대는 19세기 말 랭보가 낙타 카라반으로 커피를 실어 나른 길을 따라 사막과 홍해를 건너 예멘의 모카 항으로 향한다.-예스24. 커피 애호가는 아니지만 기회가 있을 때 커피를 먹는다. 밖에서는 맛있는 커피를 먹은 적이 없다. 커피 리브레를 통해 원두를 배달해 먹는데 맛이 좋다. 우연히 커피에 대해 알고 싶어 읽었다. 그런데 20년 전 책이라 최근 책도 찾아 보고 싶다. 커피가 탄생하기까지 8세기 에티오피아의 카파(Kafa, 지금의 짐마Jimma시), 그곳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양을 몰던 소년 칼디Kaldi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열매를 먹고 흥분해서 뛰노는 양을 보며 의문에 빠졌다. 무엇이 양들을 저토록 신이 나게 만들었을까? 칼디는 직접 그 열매를 따서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었다. 쌉싸래한 맛을 혀끝까지 몰고 들어온 그 열매는 곧 칼디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열매 몇 알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온 칼디는 마을의 수도승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렸다. 밤마다 고된 고행으로 졸음과 싸우던 수도승에게 이것은 구원의 열매였다. 칼디가 발견한 이 ‘하늘의 선물’이 바로 커피다(p. 12). 하늘은 푸르고 흙은 붉다. 까만 피부의 케냐 사람들의 해맑은 미소는 자연 그 자체다. 자연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나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먼 곳으로 이끌어간다. 오래전 여행 중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겨우 먼발치에서 들었던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연주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한두 소절만을 부탁했지만 노래는 쉽게 끊이질 않았다. 노랫말을 물어보니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커피농장은 즐거움과 고난이 교차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간절한 희망의 땅이기도 한 것이다. 케냐 농부들은 아침 8시에 나와서 저녁 6시 반까지 일하지만 대우는 썩 좋지 않다. 하루 100케냐실링의 돈을 받는데, 79케냐실링이 약 1달러 이므로 우리 돈 1000원이 조금 넘는 셈이다. 우리 눈으로 봤을 때는 100 케냐실링은 큰돈이 아니지만 이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돈이다. 이마저 벌지 않으면 구걸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커피는 이들에게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다(p. 39). 출발하기 전 되뇌었던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린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 돌아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지부티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p. 188).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고 그 야생커피를 처음으로 경작한 곳이 예멘이다. 800년경 에티오피아의 '가파' 지방에서 발견된 ‘분’은 이슬람 수도사에 의해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초기에는 종교적 논란으로 이슬람 사원 뜰에서 비밀리에 재배되던 커피가 수도승에게 잠을 쫓는 약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비로소 이슬람 제국의 성스러운 음료가 되었다. 에티오피아 '카파'에서 온 ‘분’을 아랍 사람들이 그들 발음으로 '카하와Qahwah‘ 라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기독교 사회에서는 1605년 교황 클레멘트 8세에 의해 '이교도의 사악한 음료'라는 멍에를 벗게 되면서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된다. 17세기 이전까지 유럽의 모든 커피는 예멘의 모카 항으로부터 수입 됐다. 수도 사나Sanna에서 재배된 예멘 커피와 지부티 항을 통해 들어온 에티오피아 커피가 이곳 모카 항에 모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이런 이유로 당시 유럽 사람들은 예멘 커피와 에티오피아 커피의 구분없이 모두 모카라 일컫어졌고,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굳이 따져 말하자면 '에티오피아 모카', '예멘 모카'가 맞는 말이다. 이후로는 친근함과 편리성을 내세워 '커피' 자체를 뜻할(p. 202)때도 '모카A cup of Mocca 라 불렀다. 인도의 자바Java에서 커피가 재배 된 뒤로는 커피를 '자바A cup of Java' 로 부르기도 했다. 19세기가 될 때까지 영화를 누리던 모카 항은 커피의 주요 생산국이 남미와 아프리카로 확대되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p. 204). 모카커피의 본고장 예멘에서도 제대로 된 모카커피는 맛볼 수 없었다. 모순이지만 현실이다. 예멘 사람들에게 커피는 카트와 밀크티에 밀려 한참 뒤쳐져있다. 예멘에서 커피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비싼 커피 값 때문만은 아니다. 카트를 씹고 나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밀크티를 마시면서 저녁 기도를 드리는 그들의 이슬람 문화가 주요 원인이다. 농민들도 너나없이 커피농사를 마다하고 카트를 심는다. 커피보다 몇 배(p. 212) 높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이토록 카트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에서는 카트를 마약에 비유한다. 그 옛날 기독교 사회에 서 '이교도의 사악한 음료'라며 커피를 배척했음을 떠올리면 역사의 아이러니다(p. 213). 에티오피아와 예멘에서 시작된 커피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잠을 쫓는 약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이슬람 제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커피는 이슬람교의 물결을 타고 이집트, 시리아를 거쳐 동서 문명의 중심지인 이스탄불에 와서 문화로 꽃을 피웠다. 카흐베하네Kahvehane라 불리는 터키의 커피점은 체스, 노래와 춤, 잡담이 오가는 사교적 · 상업적 장소를 넘어 정치 토론의 장으로도 이용되었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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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8】 우연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 그것이 인생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죽는 날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이미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의 크기와 아시아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콜럼버스는 그런 과학적 지적을 외면한 채 “지구는 서양배 모양”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한 사람만은 그 땅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보았다. 피렌체 출신의 항해자이자 관찰자, 아메리고 베스푸치. 그는 여러 차례 탐험 끝에, “이곳은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다”라는 역사적 인식을 기록했다. 유럽의 지성, 독일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특유의 치밀한 관찰력으로 탐정과도 같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낸다. 역사는 때로 사소한 착오 하나가 빚어낸 엄청난 아이러니를 남긴다. 15세기 말,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대신 뒤늦게 등장한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어쩌다 두 대륙의 이름으로 굳어졌을까? 츠바이크는 아메리고를 둘러싼 오해와 논쟁의 역사를 추적하며, 작은 편지 한 장과 지도 한 장에 깃든 우연이 어떻게 수세기 동안 굳어진 신대륙 명명의 비밀이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예스24 우연이 얽혀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이 세상살이며 인생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 또한 헛된 일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도 이미 알고 있었던 세계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세계를 더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처음으로 명확히 인식시켜 준 인물은 아메리코 베스푸티오Americo Vesputio였다고 말이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그가 새로운 지역의 발견자라고 확실히 공인된다. 그리고 일곱 번째 장에 이르러 갑자기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결정적(p. 87)인 영향을 미칠 제안이 등장한다. 발트제 뮐러는 지구의 네 번째 대륙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제안을 덧붙인다. “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쿠스Americus 이므로, 이제부터는 그 땅을 아메리쿠스의 땅 Earth of America 또는 아메리카 America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세 줄의 글이 사실상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출생 신고서나 다름없었다. 소책자의 종이 위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활자화되어 인쇄되었다. 만약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 Santa Maria 호의 갑판 위에서 과나하니 해안이 멀리 반짝이는 것을 보았던 1492년 10월 12일을 신대륙의 생일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리학 입문』이 출판사를 떠난 1507년 4월 25일을 우리는 신대륙의 세례 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27세의 인문주의자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소도시에서 내뱉은 이 말은 그저 작은 제안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가진 매력에 도취되어 그것을 다시 한번 더욱 절실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아홉 번째 장에서 발트제뮐러는 한 단락 전체를 할애하여 자신의 제안을 부연 설명한다(p. 88). "오늘날 지구의 세 부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탐구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네 번째 대륙을 발견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도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을 총명한 사람 아메리고가 발견한 아메리고의 땅, 아메리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동시에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단락의 여백에도 인쇄했고, 이 책에 첨부된 세계 지도에도 적어 넣었다. 그 순간 이후로 유한한 존재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 위에 불멸의 후광을 쓰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라는 땅은 이때부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고, 영원히 그렇게 불릴 운명을 맞았다(p. 89). 이 이름을 가장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은 지도 제작자들이었다. 곧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모든 지구의와 모든 판화 그리고 모든 책과 모든 지도에 등장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지도만이 예외였다. 그것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발트제뮐러의 지도가 나온 지 불과 6년 뒤인 1513년에 출간된 지도였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이름 사용을 거부한 고집스러운 지도 제작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바로 그 이름을 처음 제안했던 발트제뮐러 자신이었다. 그는 괴테의 시에 등장하는 마술사의 제자처럼, 마른 빗자루에 생명을 불어(p. 99) 넣었다가 자신이 불러낸 존재를 잠재울 마법의 주문을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누군가의 지적을 받고 콜럼버스에게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발트제뮐러가 왜 자신의 손으로 붙인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다시 없애려 했는지,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진실이 한 번 전설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말이란 세상에 한 번 퍼져나가면 자신만의 힘을 얻어,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으 로 존재를 이어가기 마련이다. 최초로 '아메리카'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젊은 지리학자는 후회하며 그 말을 거둬들이려 했으나, 이미 헛된 일이었다. 그 말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책과 책 사이, 활자와 활자 사이, 입과 입 사이를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멸의 존재가 되어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현실이자 동시에 하나의 이념이 되었다(p. 100).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치열하게 진행된 논쟁에서 제기된 증거와 반론들을 일일이 제시한다면, 그 분량 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될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자들의 절반 이상은 첫 번째 항해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반면 베스푸치를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나머지 학자들은 이 기회를 빌려 베스푸치가 플로리다 혹은 아마존강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엄청난 명성이 주로 이 첫 번째 항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문(p. 124)헌학적 증거로 그 기반을 흔드는 순간 오류와 우연,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남을 따라 한 행위들로 쌓아 올린 바벨탑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인물은 에레라Herrera였다. 그는 1601년 자신의 저서 『서인도제도의 역사』에서 일격을 가했다. 스페인의 역사가가 증거를 찾기 위(p. 125)해 오랜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당시 아직 출간 되지 않은 라스 카사스의 원고를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레라는 라스 카사스가 제시한 근거들을 토대로 「네번의 항해」에 기록된 날짜가 실제와 다르며, 베스푸치가 오헤다와 함께 항해에 나선 시점은 1497년이 아니라 1499년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피고의 변론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로부터 아메리카 발견자의 영예를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교활하고 의도적으로 보고문을 위조했다고 말이다. 이 같은 폭로의 파장은 엄청났다. 학자들은 경악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베스푸치가 아니라니? 절제되고 겸손하며 현명한 행동으로 귀감이되던 그가, 멘데스 핀투처럼 파렴치한 사기꾼, 거짓말쟁이였다니? 이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한 번의 항해라도 거짓으로 밝혀(p. 126)(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 1509~1583)는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여행기로 유명한 저술가로, 1537년부터 1558년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인도, 아라비아,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13번 포로로 잡히고 17번 팔려가는 등 극적인 삶을 살았다. 사후 출간된 『핀투 여행기』 (1614)는 과장된 모험담으로 오랫동안 '허풍쟁이'라 불렸지만, 최근에는 그의 여정이 실제 역사와 부합한다는 연구를 통해 신뢰를 얻고 있다.) 지면 나머지 항해들도 사실로 믿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톨레마이오스로 여겨졌던 인물이 영웅이 되고 자 범죄를 저지른 파렴치한이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비열한 범죄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교묘하게 명예의 전당에 침입한 자라니! 그의 허풍에 속아 신대륙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니, 학자들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지금이야말로 이 수치스러운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1627년 프라이 페드로 시몬Fray Pedro Simon은 매우 진지하게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포함된 모든 지리 서적과 지도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p. 127). 따라서 오랫동안 베스푸치가 사기를 저질렀다고 비난받았던 첫 번째 항해보고서의 조작과 그 밖의 모든 모순들은 결코 베스푸치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항해보고서에 각종 거짓 정보를 덧붙이고 과장해 출판한 파렴치한 편찬자와 인쇄업자들의 잘못임이 이제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설명은 복잡했던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해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명해주는 이 견해에 대해 베스푸치의 비판자들은 마지막 반론을 제기한다. 베스푸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자신이 하지도 않은 항해에 대해 허위로 기술했다는 소문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왜 한번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또한 묻는다. 베스푸치가 세상을 향해 분명히 밝히는 것이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 대륙이 내 이름을 가진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사기 행위에 침묵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기의 공범이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언뜻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베스푸치가 당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느냐(p. 169)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법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에는 문학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일단 인쇄되거나 필사된 글은 모두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breche Direr가 수많은 동판화가들이 형편없는 작품에 자신의 인기 있는 서명 'A, D.'를 찍어 팔았다고 해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는가? 『리어왕』이나 『햄릿』의 원본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을 마음대 로 고쳤다고 해서 어디에 불만을 표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셰익스피어 역시 남의 작품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 되었다고 한들 항의할 길이 없었다. 한때는 볼테르의 이름을 빌려 누구든 자신이 쓴 그저 그런 무신론적이거나 철학적인 글들을 마치 그의 저작인 양 출판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베스푸치라고 한들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변형된 글들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쓴 원본을 끊임없이 왜곡하면서 부당하게 얻은 그의 명성을 세상 속에 퍼뜨렸다. 베스푸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무죄를 입에서 입으로 설명하는 것뿐이었다(p. 170)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508년이나 1509년 무렵, 그런 책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가 스페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전에 모든 의혹을 개인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면, 왕이 굳이 탐험에 대한 허위 보고서를 책으로 출판한 사람에게 선원 교육과 정확한 보고서 작성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겠는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스페인에서 『지리학 입문』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은 콜럼버스 제독의 아들 페르난도 콜럼버스Fernando Columbus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 었다(그의 메모가 적힌 책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는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본토에 발을 디뎠다고 주장하며, 신대륙을 아메리카라 부르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그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나름대로의 메모까지 남겼다. 그런데 페르난도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라면 시기심에 불타는 인물로 비난했지만, 베스푸치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에 대해 이미 라스 카사스는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놀랐다. 제독의 아들이자 탁월한 판단력을 가진 인(p. 171)물인 페르난도가 분명히 아메리고가 쓴 「네 번의 항해」를 소장하고 있었음에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부정과 강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르난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빼앗고 그가 발견한 신세 계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만든 그 불행한 명명의 사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 베스푸치의 결백을 더 명확히 말해주는 것은 없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베스푸치의 의도와 무관하게 붙여졌으며, 베스푸치가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가로채려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p. 1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명성의 햇살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를 향해 비춘 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 상황이 우연히 겹쳐진 결과였다. 오류와 사고, 오해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햇살이 바로 그에게 비춰진 것은 그가 특별한 공로를 세웠거나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운명이나 착오, 우연, 또는 오해 때문이었다. 그 영광은 같은 항해에 참여했던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에 돌아갔을 수도 있었고, 옆 배에 탔던 조타수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역사는 바로 그를 선택했다. 역사의 결정은 아무리 잘못되거나 부당하더라도 결코 번복될 수 없다. 편지에 적힌 두 마디 말, '문두스 노부스'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고 그가 실제로 모두 다녀왔는지조차 불확실한 「네 번의 항해」라는 제목 덕분에 그는 결국 불멸이라(p. 184)는 항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기록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 되 었고, 그가 인류 역사 속에 남긴 업적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멋지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발견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그것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단 하나의 업적이 그의 삶과 이름에 영원히 결부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고 설명한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계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역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종종 역사는 평범한 인물에게 불멸의 업적을 안겨주고, 진정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p. 185)않은 채 어둠 속에 던져버린다(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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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3】 후회 없기 위해서 삶을 돌아보며 살자
- 30만 명의 독자가 읽고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에서 번역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이은 신작 산문집. 많은 작품을 통해 그만의 인생관을 세상에 알린 작가로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들이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실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더욱 깊어진 이해에 문체의 매력이 더해져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커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당하는 기분의 연속이다. 그렇듯이, 그의 글에는 가벼움과 깊이가 공존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말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라」 「나의 지음을 찾아서」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성장기에 읽은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 「웃음은 마지막 눈물 속에 숨어 있었어」 「플랜A는 나의 계획, 플랜B는 신의 계획」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등 글의 힘으로 많은 독자의 삶을 변화시켜 온 작가의 글 42편 수록.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고 있으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유리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진다. 청각과 후각의 예민함을 언어화해 나가는 뛰어남이 느껴진다. 그래서 열심히 읽게 된다. 문장에서 힘을 받고 내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예스24 생각해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특히 남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심금을 울렸다. 류시화의 책을 더 읽을 것이다.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 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p. 19). 우리는 상처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여행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여행의 방향을 결정한다. 예술가에게 상처를 입혀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가한 상처가 걸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방식이다. 부서진 크레용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다. 그 부서진 크레용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p. 36).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 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p. 44).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혼이 뼈와 만나는 저 안쪽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저마다의 가슴에는 있다(p. 49). 힘든 시절이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나 자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리라. 그러나 돈이든 그 무엇이든, 지금 '절벽 끝'에 몰려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갑자기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 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그 절(p. 57)박함과 간절함이 내게는 날개였다. 날개를 잃었다면 떠올려 보라, 날개가 돋았던 어느 순간을(p. 58). 저녁 무렵, 한 젊은 여성이 전철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을 감상하며 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중년 여인이 올라탔다. 여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젊은 여성의 옆 자리 좁은 공간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옆으로 밀어붙이며 들고 있던 짐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걸쳐 놓았다. 그녀가 처한 곤경을 보다 못한 맞은편 남자가 그녀에게, 왜 옆 사람의 무례한 행동에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여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걸지 않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p. 84)에서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작자 미상의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가? 진정하라. 함께하는 여행이 짧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고, 속이고, 모욕 주었는가?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함께하는 여행이 곧 끝날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는가? 기억하라, 우리의 여행이 짧다는 것을. 이 여행이 얼마나 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릴 정거장이 언제 다가올지 그들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p. 85). 이런 이야기가 있다. 평생을 경건하고 독실하게 살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섯 시간씩 신에게 기도했다(p. 96). 하지만 무신론자인 동생과 다르게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아내는 그를 떠났으며, 동업자는 배신했고, 자식들도 연락을 끊었다. 반면에 평생 한 번도 기도한 적 없는 그의 동생은 훌륭한 아내와 충실한 자식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삶을 누렸다. 죽어서 신 앞에 선 경건한 남자는 물었다. "저는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불평하는 타입이 결코 아닙니다. 아내가 떠났을 때도 당신께서 정해 주신 섭리를 믿으며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등을 돌렸을 때도 당신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왜 이 모든 불행한 일이 무신론자인 제 동생에게 일어나지 않고 매일 다섯 시간씩 기도한 저에게 일어난 건가요?" 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대는 재미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매일 다섯 시 간씩 그대의 기도를 듣느라 나도 지겨웠어. 지루하게 살지 말라고 내가 그토록 속삭였는데 듣지 않았어." 묘비명에 '최선을 다했다.'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지루하게 살았다.’가 적히면 안 되지 않겠는가(p. 97).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승이 말했다.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p. 109).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말이 옳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메시지를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돌아서면 나의 가슴과 의지에 따른다. 받아들임과 흘려보냄, 이 전략을 나는 계속 실천해 나갈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논쟁한다면 그것은 죽은 자와 논쟁하는 것이다. 누구나 머지않아 죽을 것이기에.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대신, 빠르게 동의하고 자신의 시간을 창조적인 일에 몰입하는 것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관계법이다. 무의미한 논쟁을 끝내고 삶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에서 이기는 내공이 아니라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내공이다. 밀림 속에서 동물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불필요한 의견 충돌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도와 가며 평화롭게 지냈다. 어느 날 호랑이와 당나귀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아는 동물은 없지만, 당나귀가 한 말에 호랑이가 짜증을 내며 "풀은 초록색이야!" 하고 외치는 것이 들렸다. 당나귀는 모두가 놀랄 정도로 더 크게 외쳤다. “아니야, 풀은 파란색이야!” 그 후 “초록색!” “아니야, 파란색!,” "초록색이라니까!", “파란색이라니까!” 하고 연거푸 고성이 오갔고 시간이 가도 논쟁은 멈(p. 110)추지 않았다. 둘의 논쟁에 다른 동물들도 덩달아 편이 갈려 ‘초록색!’ ‘파란색!’을 외쳤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밀림의 세계가 파국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동물들은 그들의 왕 사자를 찾아가 판결을 부탁했다. 사자는 당나귀와 호랑이의 주장을 듣고 나서 잠시 심사숙고한 후, 호랑이가 틀렸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판결에 따라 호랑이는 소란을 일으킨 죄로 1년 동안 밀림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다. 떠나기 전에 호랑이는 사자를 찾아가,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왜 당나귀 편을 들고 자신을 벌했느냐며 하소연했다. 사자가 말했다.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인 걸 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너를 벌한 것이다. 논쟁을 하려면 자신보다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함으로써 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네가 벌을 받는 진짜 이유이다."(p. 111).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며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에게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밤 늦게 전화를 걸어 곧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랭클은 새벽까지 그 여성에게 말을 걸 었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씩 제시했다. 긴 설득 끝에 그녀는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그에게 다짐했다. 나중에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 빅터 프랭클은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랭클이 의아해하며 설명을 부탁하자, 그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그의 자세가 그녀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게 하고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기차 안에서 만난 그 인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p. 120). 일상의 순간에 예술적 생명감을 불어넣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죽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재미있게'라는 단어를 넣으면 더 완벽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재미있게' 죽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좋아하는 것이 세상과의 유쾌한 승부가 된다(p. 132). 우리는 시도하고, 시도하다가 생을 마치는 운명이다. 그것이 시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그대가 '이룬 것'을 들고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툴고 거칠더라도 혼을 담아 ‘시도한 것’을 들고 오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삶에서 시도한 것들을 보여 줄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을 시도하고, 불완전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레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깨달음을 시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또 다른 일화가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푸가를 한 곡씩 연주했다. 그런 다음에야 10시간 작곡에 몰두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음악가라고 느끼는 의식이, 악보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연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웅인 바흐를 존경하며 그날의 작업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기를 비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가락을 유연하게 하고, 일에 발동이 걸리게 하고, 마음이 음악을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였든, 작업실에서 매일 아침 반복하는 그 똑같은 행위가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의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대의 바흐 푸가곡은 무엇인가? 그대가 하는 일이 단순히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그 일을 그대의 삶 자체로 여긴다면 그대가 매일 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나(p. 136)의 경우는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내 시집을 열어 내가 쓴 시를 한 편씩 읽는다. 지난 30년 동안 이것을 건너뛴 날이 거의 없다. 산문을 쓰든, 번역일을 하든, 다른 시인들의 시를 모아서든, 나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내 안의 시인에 연결되기 위해. 시인이며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죽을 만큼 그것에 빠져 보라"고 했다. 영혼의 작업에 다만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불꽃을 계속 태우는 것이 삶이다. 생을 불태우려면 자신이 불타는 것을 견뎌야 한다(p. 137).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파머는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조언을 듣거나 바로잡아지거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고, 들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절을 할 때, 우리의 그러한 존중은 그 사람이 고통을 극복하는 중요한 치유 자원이 된다."(p. 144). 어려울 때는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우리는 희망하고, 절망하고,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의 날갯짓이다. 물에 얼굴을 박고 넘어져 있다면 당신이 할 일은 얼른 일어나는 일이다. 물속에서 산소를 찾거나, 아가미를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한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p. 150)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찬다. 새끼 기린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이다니!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나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찬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차이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찬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아기를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 한다. 엄마 기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새끼 기린이 자기 힘으로 달리지 않으면 하이에나와 사자의 먹잇감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을 무조건 걷어차는 것이다. 일어서서 달리는 법 을 배우라고. 당신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적이 몇 번인가? 별로 기억나지 않(p. 151)는다면 각오하는 게 좋다. 조만간 연타로 발길질 당할테니. 당신이라고 해서 삶이 살살 기분 좋게 굴리는 법은 없다. 그러나 걷어차이고 또 걷어차여도 당신은 일어설 힘이 있다. 당신은 기린 이니까. 카뮈는 "눈물 나도록 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세상에 내놓은 그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엄마 기린과 같다.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진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채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다(p. 152). 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이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비록 이것을 깨닫는 데 생의 반이 걸렸지만.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몸짓을 읽는 연민과 공감의 눈이 필요하다. 홀로된 그녀의 분노와 싸움 역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비록 방법은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그 몸짓이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연결되고 싶어요.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에요." 혹시 당신도 고립된 감정의 덫에 걸려 있다면, 다히 카엥기?(p. 165). 내가 아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이다.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 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 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 난다. 플랜A보다 플랜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p. 181).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 『열흘 밤의 꿈』 에서 일곱째 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큰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있는 이유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뱃사람을 붙잡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언제 육지에 닿을지도 모른다. 배에는 외국인도 있고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난간에 기대 울고 있는 여자도 있다. 자신이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불안하고 따분해진 나머지 남자는 죽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배의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발이 갑판을 떠나 배와 인연이 끊긴 그 찰나, 그는 갑자기 목숨이 아까워진다. 뛰어내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어져 가는 배 안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문(p. 193)득 다시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더 이상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몸은 바다를 향해 다가가고 검푸른 물에 점점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배일지라도 역시 타고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이용하지도 못한 채 한없는 후회와 공포를 안고 검은 파도 속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내가 선택한 이 길, 나에게 손짓하던 그 많은 무화과 중에서 이 열매가 나에게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배를 끝까지 타고 가서 목적지를 확인할 것이다. 내일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실함이다. 어차피 나는 죽음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다. 심장이 침묵한 것 같으면 스스로 심장을 깨워 그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p. 194).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p. 218).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앨리스 카하나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이다. 열다섯 살 때 독일군에 의해 가족 전체와 함께 아우 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해 텍사스 주에서 살며 화가로 활동했다. 그녀에게 일생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은 뼈아픈 기억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그녀는 강제로 부모와 분리되었고, 여덟 살 남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다시 트럭에 실려 어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동생이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중의 어딘가에서 다른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나가 어린 동생에게 흔히 하듯이 그녀는 부주의한 동생을(p. 242) 나무라며 소리쳤다.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밀어닥친 혼란과 비극 속에서 모두가 신경이 불안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동생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앨리스 카하나는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없는 그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그 사람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전시관에 가면, 그곳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신발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갈 때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카하나의 남동생도 그곳 가스실에서 숨졌다. 어떤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부분 옳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이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할 수도 있으며, 나(p. 243)아가 다른 인간관계까지 공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p. 244). 인간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도 입술의 형태로 그 사람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헤어진 후에도 남는 그 말은?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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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3】 후회 없기 위해서 삶을 돌아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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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2】 가끔은 시를 읽자
-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으로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한편, 엮은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마음챙김의 시』로 시 읽는 기쁨을 전파한 류시화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는 신작 시집이다. 「초대」 「살아남기」 「너는 피었다」에 위로받고 「그런 사람」 「저녁기도」 「얼마나 많이 일으켜 세웠을까」로 삶의 본질을, 「숨바꼭질」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에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한다. 삶 속에서 심호흡이 필요할 때 가슴으로 암송하는 시, 세계를 내면에서 보고 마음속 불을 기억하게 해 주는 시 70편이 실렸다. 섬세한 언어 감각,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이 빛난다. 우리가 귀를 막으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자신이 하는 말은 들린다. 불완전한 단어들이 모여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가슴 안에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그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있다. 그가 그것을 시에 담으면 그 세상은 모두의 세상이 된다. 여기에 실린 시들이 그것과 같다. 시는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에게 또 다른 고독한 영혼이 보내는 메시지이다. 읽을수록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과 좋아하는 시가 많아지는 시집, 또 한 권의 마음에 품는 시집이 될 것이다.-예스24 어려운 시가 많아 시를 읽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러나 쉬운 시도 있다. 류시화의 시는 쉬우면서 통찰을 준다. 다른 책을 읽다가 한동안 잊어버렸던 류시화가 언급되는 것을 보고 즉시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 당분간 류시화와 함께 할 것 같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야생화 만약 원한다면 야생화처럼 살라 단, 꽃을 피우라 꼭 다음 봄까지 살아남으라 한 사람의 진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꽃은 무릎 꿇지 않는다 꽃에게서 배운 것 한 가지는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 타의에 의해 무릎 꿇어야만 할 때에도 고개를 꼿꼿이 쳐든다는 것 그래서 꽃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마지막 안내 방송 우리 비행기로 여행하게 되신 걸 환영합니다 탑승하기 전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미 고지했듯이 수하물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소유물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초과 예약으로 기내에 여유 공간이 부족하므로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도, 나아가 무거운 슬픔이나 후회, 혹은 부피 큰 기대는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송별객과는 여기서 헤어져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작별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니 주머니 없는 옷 입고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탑승해야 합니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집착도 털고 속눈썹에 얹힌 눈물 떼어 내고 이 순간부터는 자신이 누구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조차 필요 없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귀빈석이나 특별 좌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내 영화는 좌석마다 다르게 각자의 인생이 담긴 내용이 재방송될 것입니다 이 여행을 원치 않는다 해도 이미 예약된 이상 취소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자신이 믿었던 것과 다른 목적지나 다른 풍경 속에 내린다 해도 비행기를 회항하거나 내리기를 거부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안내 방송입니다 지연이나 결항 없이 정시에 이륙할 예정이오니 뒤로 미뤘던 일들이나 소원 목록은 다음 생으로 기약하고 오직 사랑한 기억만 웃옷 안감에 품고서 서둘러 탑승구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꽃의 결심 꽃은 피어도 죽고 피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을힘 다해 끝까지 피었다 죽으리 잠깐 멈췄다 가야 해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누군가 이렇게 적어서 보냈다 내가 답했다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 앞에 없을지도 모르거든.’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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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2】 가끔은 시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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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1】 일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 63년 만에 ‘근로자의 날’에서 ‘노동절’로 명칭이 복원되고 법정 공휴일로 격상된 올해 5월 1일, 바로 우리 곁 노동자 열일곱 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집 《생업》을 한겨레출판에서 펴낸다. 이 책의 저자인 은유는 《있지만 없는 아이들》《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쓰기의 말들》《글쓰기의 최전선》 등을 통해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날카로운 르포르타주 작가로서 독자를 감응시켜왔다. 그가 작가의 덕목으로 ‘듣는 신체’를 각인하고 이를 공감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겸손한 인터뷰어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일하는 사람이 덜 죽고 덜 다치는 세상을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캠페인의 일환으로 〈시사인〉에 2024년부터 1년 6개월간 연재한 은유의 ‘먹고사는 일’을 바탕 삼아 지면 관계상 수록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대폭 추가해 새롭게 엮었다. 일하는 사람,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인터뷰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17회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는 녹취록만 200자 원고지 2000장을 넘긴 터였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18인의 이야기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 《크게 그린 사람》의 후속편인 《생업》 역시 묵묵히 생계를 건사해온 노동자 17인의 육성을 통해 인간이 일로써 다다를 수 있는 삶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하루 1700인분의 밥을 짓는 급식 노동자, 평생 일을 쉬어본 적 없는 청소 노동자, 요양원이 죽는 데 아니고 사는 데라 말하는 요양 보호사, 지하철 타는 1000만 배우, 진보정당 부대표였다가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노동자 등의 “말이 곧 삶인 말”은 ‘집필 노동자’ 은유의 몸을 통과해 지금 이곳을 톺아보고 올곧은 미래를 상상하는 연대의 기록으로 확장되었다. 자신을 살리고 타인을 살리고 마침내 세상을 살리는 이들의 떳떳한 표정들에서 독자는 생업의 슬픔과 기쁨, 고단함과 긍지를 새삼 자각할 것이다. 1년 6개월 동안 배달 노동자, 급식 노동자, 청년 농부, 독립 연구 활동가, 타투이스트, 심리 상담가, 배우, 가수, 유튜버, 노동 운동가, 변호사, 산재 피해 유가족, 활동가, 국어 교사, 청소 노동자, 요양 보호사까지 총 17명을 만났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안 보일 때는 아무도 안 보이지만 보이기 시작하면 너무도 잘 보이는 우리 주변의 노동자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것으로 묵묵히 세상을 떠받치는 존재이다. 평범한 사람들인가? ‘평범하다’의 정의는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는 뜻이다. 이들은 세상의 척도인 고액 연봉, 전문직 명함, 금메달 같은 물증이 있는 성취로 보면 평범하다. 그런데 가치 척도를 바꾸면 평가가 달라진다. 인간의 존엄, 노동자의 권리, 이타심과 돌봄 측면에서 보면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뛰어나고 색다르다.-‘책머리에’에서. 예스24 생업(生業)은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마지못해 하는 것도 있고, 기쁨으로 하는 것도 있다. 어차피 사는 동안 우리는 일해야한다.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하자. 언젠가 일하지 못할 때가 올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스물일곱에 귀향한 '전업 농부'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일단 아버지와 맞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뭘 좀 해 보려면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했고, 시키는 대로 하면 또 "너무 수동적이다"라고 했다. 여느 직장인처럼 상사와 갈등이 깊었는데 거기다가 상사가 퇴근을 안 하고 "밥까지 차려달라"는 셈이었다. 외진 지역에 섬처럼 고립되었다는 소외감, 서울에서 살 때처럼 책과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없다는 박탈감이 컸다. 스트레스로 체중이 늘고 걸핏하면 장염에 걸렸다. 매달 링거를 맞으며 이게 맞는지를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배 과수원을 그에게 완전히 넘기고 사과 농사를 짓고 싶다며 강원도 양구로 독립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과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때 알았다. "아, 내가 농사일이 힘든 게 아니었구(김후주, p. 39)나."(웃음) 초반 서너 해 고비를 넘겼다. "저 같은 승계농, 후계농 친구들이 농사를 중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가족 간 갈등이라는 통계가 있어요. 일은 다 하는데 돈은 못 받죠. 오히려 일꾼한테는 임금 체불을 못 해도 자식한테는 하거든요. '뭐, 어차피 네 거 될 건데'라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도 알고 있어요. 관련 정책을 개발하고 '가족 경영 협약'을 교육하고 승계 혜택을 주는데도 쉽지 않죠. 그래서 승계농은 청년이 지역에서 정주하 기 제일 좋은 조건인데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죠."(p. 40). 우리밥연대의 가장 큰 특징은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다들 놀라며 묻는다. 그럼 무슨 돈으로 밥을 하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구성원들이 각자 사비를 털고 일손을 보태 "신기하고 희한하게" 굴러가고 있다고 답을 해준다. 요즘엔 차라리 식당에서 사는 게 싸겠다 싶을 만큼 물가가 많이 오르고 있는지라 김주휘는 대책을 강구했다.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연잎밥을 팔고 반찬도 팔았다. 킁곰은 9년째 월급날이면 칼같이 돈을 낸다. 돈을 내려고 우리밥연대에 들어온 회원도 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자 세월호 유가족 경민이 엄마는 내가 그 우리끼리가 되겠다고 했다. 공식적인 후원금을 받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밥연대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단체에 못 섞이는 성격들이에요. 사람이 좋은데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밥연대에 있어요. 저희가 직장인이고 전문적으로 할 수 없는데( 김주휘. p. 61) 후원까지 받으면 일이 커진다, 부담스럽다해서 우리끼리 한 달에 한두 번 할 수 있을 때 하자 했죠."(p. 62). 각국에서 온 난민 신청자들이 요리사로 등판한 '후원의 밤'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에티오피아 사람은 옷을 여왕처럼 차려입고 커피 드립을 하고 모로코 사람은 샌드위치를 만드(p. 91, 심아정)는 등 각자 제 나라 백반을 선보였다. 그는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아정, 당근 잘라줘, 너 파 썰어줘. 그분들이 위축되는 모습이 아니죠. 환대란 내가 뭘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가 주가 될 때, 주객이 뒤집어질 때 가능하죠. 그래서 내 자리를 뺏길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관계가 전복되는 건 달라요. 난민이라고 해서 불쌍한 모습이 정말 아니고 옷도 잘 입어요. 저 보고 옷 좀 사래요. 아정은 단체 티셔츠밖에 없냐? 뭐라고 해요. 나는 이 티셔츠가 열 장 넘어서 그래!(인터뷰 때도 아정은 '물결' 티셔츠를 입었다. p. 92)“ 심아정은 지난겨울 6년간 활동해온 '마중'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트랜스보더링랩(Trans-bordering Lab), 국제법 X 위안부 세미나 팀, 번역 공동체 '잇다'에서 활동하고 공부한다. 국제법 X 위안부 세미나 팀에서는 피해 목소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가해 병사들' 진술을 몇 년째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형제 폐지에도 관심이 생겼고, 느끼는 바가 많다. "가해를 성찰할 기회를 줘야 해요. 죽이면 안 돼요. 사람이 변곡점이 있어야 해요. 시간을 주는 게 너무 중요해요." 그에게 배운 대로 적용해보자면 사형수에게 시간을 주는 사회는 나머지 사람에게도 시간이 주어지는 사회다. 남의 일은 없는 것이다(p. 95). 유튜브에 이정은 배우를 검색하면 ‘연봉 20만 원 무명 배우가 칸에 가기까지’라는 종류의 영상이 인기다. 그가 1992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무대에 선 이래 가난한 배우로 살아온 이야기는 업계의 전설로 회자된다. 방송에 데뷔하기 전인 마흔 살까지 연기 지도, 녹즙 판매, 식당 서빙, 채소 가게 점원 등을 병행하며 이른바 '투잡'을 뛰었다. 채소 파는 가게에서는 정규직 제안을 받을 만큼 열심이었고 소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노동의 역사를 단지 '무명의 설움'으로 여기는 건 게으른 오해다. 어느 돈가스집에서 일할 때다. 후배 배우들이 왔다가 거기서 일하는 그를 보고는 대단하다며 안 창피하냐고 물었다. 그는 심상하게 말했다. "난 배우인데 창피할 게 뭐 있어,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 삼십대에는 자존감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요. 틈나는 대로 생활비 벌고 연습 시간 확보하고 성실하게 사니까요. 내 돈으로 내가 벌어서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뭐가 부끄러운가. 그때는 나 안 쓰는 데 가서 고개 숙이지도 않았어요. 혼자서 강아지랑 살 때니까 생활비도 얼마 안 들고 철딱서니가 없어서 늘 당당했어요. 요즘에는 가끔 고개도 숙이죠. 회사 식구들도 생겼고 부모님도 연로하시니까요. 난 그래서 직장인들 이해가 가요. 가장이면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이정은 p. 121).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장르를 경험하며 배우의 삶을 두루 목격한 그가 볼 때 배우의 흔한 직업병은 암과 우울증이다. 늘 선택받고 평가받는 직업이다 보니 "일이 없어도 스트레스, 인기가 있어도 스트레스"라 그것이 각종 암으로 정신 질환으로 드러난다. 배우로 사는 것은 초조와 불안을 다스리는 일이고, 연륜이 있다고 그 습격을 피해 가지는 못한다. "저는 공연(연극)할 때는 불안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연극 무대는 연습 기간이 긴 데다 한 작품을 마치면 잘 쉬고 다른 작품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의심이 생겼어요. 분명히 시작할 때는 명확했는데 한참 작품을 하다 보면 피로도가 높아져요. 쉬게 됐을 때 일주일은 너무 좋으면서도 근데 원 없이 작품을 했나 그런 의문이 들고, 그다음 대본들이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차기작을 빨리 결정할 게 아니라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죠."(p. 126). 타투이스트의 직업병은 노안이다. 작업할 때 켜는 조명이 세고 초집중을 한 상태로 눈을 쓰다 보니 시력이 약화되어 노안이 빨리 오는 편이다. 그 역시 "서른다섯 살을 기점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체력이 떨어지면서 바로 노안이 왔다. 손목 터널증후군과 디스크도 고질병이다. 한번 작업하고 나서 자리에 누우면 일어나지 못할 만큼 코어가 무너져 폴댄스를 배웠고, 그때 다진 코어 근육으로 지금껏 생존하고 있다. 노동이 가능한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요즘엔 킥복싱을 한다(p. 158). 그가 옷자락을 들춰 복숭아 타투를 자랑한다. 주변으로 호랑이, 도마뱀, 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각각은 "그때그때 한 시절을 기록하는 나이테 같은 친구들" 이다. 자랑스러운 훈장이기도 하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주장하는 부모의 벽을 넘어, 33년 불법의 벽을 넘어, 터부시 하는 편견의 벽을 넘어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살아온 날들의 흔적이 타투로 남았다. 이 좋은 타투를 황도는 모두에게 권한다. "기억을 몸에 새기는 신기한 경험"이라는 본령 외에도 타투는 인간관계의 리트머스가 되어주고 소수자 연대의 기회를 열어주는 등 삶에 여러모로 이롭다. "타투는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취미잖아요. 하고 나면 여러 반응이 있어요. 칭찬도 해주고 오지랖도 부리고 별로라고도 하고요. 사회적으로 호불호가 있다 보니까 듣는 말들(황도, p. 159)이 상처가 되죠. 그래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과 공감대가 형성돼요. 일생에 단 한 번도 소수성을 가진 적 없는 사람이 문신을 했다는 이유로 '문신한 XX' '문신한 여자는 걸러'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듣게 되죠. 타인의 외모에 대한 혐오예요.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거고요. 네가 날 걸러? 내가 걸러!(웃음) 타투는 마이너의 삶을 선택해보는 일 입니다."(p. 160). 일이 자아내는 감정들, 노동의 분비물 같은 미용과 원망을 그는 쌓아두지 않는다. "나쁜 마음”을 흘려보내는 자체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나는 글쓰기. 어려서부터 엄마나 친구가 너무 미운데 표출할 방법이 없을 때 글을 썼고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미움이 사라졌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내가 알아주는 수단이 되었다. 또 하나는 수다 떨기. 힘들 땐 누가 뭐래도 동료다. "우리끼리 티타임 하면서 풀어요. 그게 제일 빨라요. 방법 없어. 어떻게 늙어야 하냐가 우리 화두예요."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래야 요양 보호사로 살아남을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마음. 그게 가장 중요해요. 제가 간호사로 근무하고 환자를 볼 때 선이 항상 그어 있어요. 환자는 환자고 직원은 직원이다. 여기는 달라요. 가정생활을 하는 집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과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국가가 혜택을 줘서 만들어주는 공간이라 저 어르신과 내가 다르다고 선을 그으면 안 돼죠. 또 실은 그들의 불편함이 나를 먹여살리는 거죠. 우리를 깨우쳐주기도 하고요."(요양 보호사. p. 184).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까 남은 네 식구도 밥상에 같이 앉지를 못해요. 우리가 좋아하던 음식을 못 먹는 것보다 넷이 같은 밥상에 앉지 못하는 게 더 슬퍼요. 가족이 다 있을 때 집에서 애가 그렇게 됐잖아요. 저희가 느끼는 죄책감은 어떻게 표현을 못 합니다. 왜 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게 넷의 공통된 죄책감이에요." 형이랑 친구처럼 싸우면서 자란 둘째 아들은 장례를 치르고 완전히 페인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얼굴을 안 보려고 한다. 낮에는 자고 밤에 아무도 없을 때 움직인다. "얘가 계속 우리를 피하니까 상담을 권유했더니 화내면서 안 한다고.... 어느 날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을 못 먹겠어요." 열네 살 터울로 큰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막내는 당시 중1이었다. 오빠의 죽음도 아직 못 받아들이는데 학교 친구들한테 부고가 알려져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는 건 더 지옥인 나이였다. "얼마 전엔 학교에서 야간 노동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이름이 언급됐다고 저 서울에 있는데 장문의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내가 학교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 중학교도 학교생활 못 했는데 고등학교 생활도 못 하게 하느냐. 얘는 빨리 손 놔라, 나도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요. 미안하다고밖에 말(박미숙. p. 221)못 해요." 막내는 오빠의 죽음 이후 일주일씩 입을 닫아버렸다. 한 번은 집을 나가 답장도 없다가 밤 12시가 다 돼 연락이 왔다. 지금 어디 있는데 데리러 와달라고. 마음이 괴로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왔다 갔다 헤맸다. 남편의 애도 방식도 그 와는 달랐다. 애 하나 잃었으면 됐지 이제 남은 애들 둘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고, 명절이나 덕준의 생일이면 제사상을 차리길 원했다. 박미숙은 그러고 싶지 않다. "아직 애가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지금도 문을 열고 들어올 거 같거든요. 근데 제사를 지내면 인정하는 게 되니까요. 납골당을 저는 못 가겠고 아빠는 가고 싶어 해요. (외부 활동도) 그만하자고 산재 승인받을 때까지만 하기로 각서를 썼어요. 애들 아빠는 저한테 투사라고 하는데 저 투사 아니고요, 나는 이렇게 애를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죠."(p. 222). 쿠팡이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하며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더라?"라는 말이 고객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쿠팡의 미션이다. 그들의 목표대로 세상은 굴러간다. 타임 푸어(time poor)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소비자는 '로켓 배송' '오늘 배송' 같은 속도와 편리함에 길들여졌다. 노동자의 죽음은 의식하지 못 한 채. 그렇다고 박미숙은 쿠팡을 쓰는 사람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SPC 노동자 사망으로 불매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갖고 있던 쿠폰을 빵으로 바꿔 왔다. 그걸 보고 막둥이가 화를 냈다. "엄마는 쿠팡만 가지고 그러지 SPC도 나쁜데 왜 사먹냐"라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따졌다. "저도 사고 소식을 알았는데 무의식적으로, 살던 습관대로 SPC를 썼잖아요. 이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때는 쿠팡을 이용하진 않았어도 좋은 회사로 알았어요. 사고 후에 드는 생각이 정말 제대로 봐야겠다. 4년간 싸우면서 쿠팡은 비열한 회사, 진짜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회사라는 게 제가(박미숙. p. 229) 받은 인상이거든요.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서 성장하고 있어요. 근데 사람 생명보다 앞서는 법은 없잖아요. 과연 안전한 회사에서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갈 수 있나요. 열린 눈으로 제대로 봐야 해요. 저도 일을 겪으니까 보이게 된 거죠. 쿠팡에 다닐 때 아들은 양팔저울의 비유를 들어가며 말하곤 했다.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누군가 짐을 지고 있는 거라고. 그는 아들이 숙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덕준의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하는 거 함 보자." 엄마도 고생하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임을 덕준이 27년 삶으로 보여줬다고 그는 믿는다(p. 230). 그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게 온전히 자기 능력은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같이 똑똑한 사람도 시대 탓에 많이 배울 수 없었다. 엄마를 보면서 소위 '스펙'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아무런 잣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늘 느꼈고 주변에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못나거나 부족해 저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혜택을 받았다는 것, 내가 가진 게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 사회에 대한 생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너는 애가 공부 머리는 있는데 일 머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자만하지 마라.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학습된 것 같아요."(p. 254). "사법 연수원이 경기도 일산 마두역 근처에 있어서 저희끼리 '마두고'라고 불렀어요. 가령 한 반에 50명이고 선생님 들어오면 차렷 경례······.(웃음) 저는 적당히 시키는 대로 따라 가다가 정작 성인이 되어 간 연수원에서 주입식 교육에 반항심이 드는 거예요. 그제야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거부하던 학생들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일찍 철든 아이들이었죠." 법조인이 되겠다고 모여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성적에만 집중하며 세상에 관심 가지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걸(윤지영 p. 255)보고 그는 학을 뗐다. 대학 입시가 그러하듯 사법 시험은 사회와 격리된 채 오로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잘 보는 시험이었다. 그걸 통과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법조인이 되고 사회 지도층이자 엘리트로 여겨지며 스스로도 지도자로 나섰다. 그걸 가까이 보면서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우리가 자격이 있을까."(p. 256). 같이 가자고 말하는 이 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그가 자주 하는 말은 이거다. "그럴 수 있지요, 그랬군요." 반면 절대 하지 않는 말도 있다. "이렇게 하지 그랬어요."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말을 하면 2차 가해가 된다. 상담사가 노동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을 때 저도 모르게 내뱉을 수 있는 위험한 말이다. 노동자의 어려움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너무 힘들었겠다고 말하며 편견 없이 받아줄 때 "안전한 상담”이 가능하다.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돌보는 업에 종사하기 위해 자기 마음 건강도 챙긴다. 그는 1년간 명상 수업을 받기도 했다. 계속 아픔을 들으니 어디선가 충분히 배출해내야 하는데 배출하지 못할 때 "무당이 신병이 나는 것처럼" 몸이 아팠다. 직업병이 된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 진료와 명상을 병행했다. "잠깐이라도 멈추는 게 나를 살게 한다"라는 걸 체험하고 나서는 짬짬이 명상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비운다(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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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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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1】 일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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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0】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피곤한 삶
-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된 책으로 저자 한병철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다. 그는 현지에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평가 받았으며,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 저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고 보고,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한 답을 구하라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예스24 두 번째 읽었는데도 역시 쉽지 않다. 예스24와 역자의 글을 통해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내게 어려운 책이라 ‘피로’하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노동하는 동물(p. 44)의 승리를 다룬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사회적 발전에 맞설 수 있는 어떤 효과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체념적 태도로 이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소수에 국한 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이어서 그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쑥 사유의 힘에 호소한다.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비록 세계의 미래가 사유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좌우될 터이지만, 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다소 임시변통으로 보인다. “활동의 경험”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순수한 사유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활동성은 오히려 후기근대적 성과 사회의 활동과잉과 히스테리를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아(p. 45)렌트가 책의 마지막에 제시한 카토의 경구 역시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원래 이 경구는 키케로가 『공화정에 대하여』에서 자기 말의 근거로 삼은 것으로, 아렌트가 인용한 부분에서 키케로는 "광장"과 "북적대는 군중"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 고독 속으로 돌아갈 것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는 카토를 인용한 뒤에 사색적 삶을 찬미한다.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사색적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 본연의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렌트는 활동적 삶에 대한 찬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카토가 이야기하는 사색적 삶의 고독도 아렌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바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 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 46).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p. 103)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p. 104). 역자 후기 간결명료하게 씌어진 이 짧은 책의 요지를 역자가 다시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책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 지점을 지적하고 한국 현실과의 관련성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역자의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p. 119)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 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p. 120)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 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더 나아가서 한병철은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사상이 금지, 억압, 규율, 감시, 주권자/희생자의 이분법과 같은 부정성의 패러다임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근대라는 시대의 산물로서 근대를 기술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을 패러다임 전환 이후의 사회, 즉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 거명된 사상가들이 여전히 현실 분석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병철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대단히 파격적이고 깊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의 정신분석학은 19세기 말 서양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적 욕망(p. 121)에 대한 금지와 억압의 기제가 균열을 일으키던 시대에 등장한 것이고, 그의 이론 자체가 그러한 부정성의 약화에 현저하게 기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에서 작동하는 부정성의 구조를 기술하는 이론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위기에 빠졌음을, 그리고 그런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것임을 알리는 징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무의식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 이후의 주체는 무의식이 없다고 한병철은 말한다.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p. 122)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정성의 패러다임을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 적용해보면, 분단국으로서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이념적 지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특수한 문제점들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분단 이후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현대사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북한)와 민족적 타자(미국)의 문제. 이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혼선을 빚게 된다. 이데올로(p. 123)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 (즉 민족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고,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성은 우리와 유사한 입장에 있던 서독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서독에 진주한 미군은 민족적 타자로서 거부될 수 없었다. 히틀러 시대를 겪은 뒤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불온하고 금지되어야 할 이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독의 경우 애초부터 민족적, 인종적 친연성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타자성은 남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이 사실이다.) 서독에는 오직 동독과 그 배후의 소련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타자가 있었을 뿐이다. 남한의 경우 단순한 부정성의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부정성을 택하고 다른 하나의 부정성을 억지로 지워버려야 했다. 민족적 부정성을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으로 환원해버리거나(이때 북한은 주적이고 미국은 형제다),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을 민족적 부정성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이때 미국은 제국주의자이고 조국은 하나다). 1970~80년대까지는 강력한 반공주의에 의해 민족적 부정성이 부인되었다면, 그러한 반공주의적 억압이 사라진 이후에(p. 124)도 남한이 이룩한 통상국가로서의 기적적 성공은 미국이라는 민족적 타자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자라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거의 없애버렸다. 2008년의 촛불 시위에 민족적 부정성의 차원('검역 주권')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위의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은 건강의 위험에 대한 소박한 염려에 있었다. 한병철의 말대로 ‘건강’과 ‘벌거벗은 생명’이 성과사회의 최후의 가치가 된다면,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최근의 어떤 이슈보다도 압도적으로 더 큰 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성과사회의 징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을 타자로 위험시하고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부정성도 특히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왔다. 민족적 부정성을 앞세우며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을 부인하는 입장(조국은 하나다)에 가까웠던 재야 운동가, 학생운동가들이 제도권으로 진출하고 정치• 사회적 권력에 참여하면서, 북한을 이데올로기적 타자로 규정하는 전통적 반공주의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갔으며, 햇볕정책도 그러한 토대 위에서 실행될 수 있었다.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의 국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도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희미해져가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북한은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한병철이(p. 125)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두고 말한 것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더 이상 위협적인 타자가 아니라 그저 짐스럽고 무관심한 타자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한 경향은 냉전 시대의 기억을 환기하던 절대적 지배자 김정일의 죽음 이후 더욱더 뚜렷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던 이중의 부정성이라는 문제에서 - 여전히 이런저런 불안 요인과 염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 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중의 부정성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남한 특유의 정치 지형(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도 조만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 다고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p. 126)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이것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p. 127)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한병철의 예리한 시대 진단은 그러한 쉽지 않은 반성과 자각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이 책이 고도로 발달한 성과사회의 한복판(독일)에서 얻은 호응은 그의 제안이 고독한 메아리 이상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2012년 3월에 김태환(p.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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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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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0】 성공을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피곤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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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9】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유통되었는가?
- 자연, 인간, 커피를 블렌딩한 ‘아주 특별한 기행’ 《커피기행》은 커피를 생업으로 삼아온 박종만 커피박물관 관장이 쓴 ‘커피 로드coffee road’에 관한 기록이다. 커피 로드란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커피가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까지 퍼져나가는 길을 가리킨다. 이 땅에 커피나무를 재배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박종만 관장은 우리 커피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북한강변에 커피박물관을 열고 커피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첫걸음으로 커피의 기원과 초기 전파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커피탐험대를 결성하고 2007년 2월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 책은 그 결과를 책으로 담은 것이다. 우선 탐험대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아프리카 최고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는 케냐 커피산업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그리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인공이자 20세기 초 이곳에서 커피농장으로 성공을 꿈꾸었던 덴마크 소설가,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흔적을 살펴본다. ‘킬리만자로 커피’의 생산지로 알려진 탄자니아에서 탐험대는 커피위원회를 무작정 방문하여, 현지 농부의 손을 떠난 커피가 정부에 의해 어떻게 등급별로 관리되고 국외로 수출되는지 취재한다. 그리고 바리스타 챔피언대회가 열린 에티오피아에서 우연히 일본 UCC커피의 우에시마上鳥 사장을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커피의 고향 짐마와 70년 전통의 옥사데이 커피회사를 둘러 본 탐험대는 19세기 말 랭보가 낙타 카라반으로 커피를 실어 나른 길을 따라 사막과 홍해를 건너 예멘의 모카 항으로 향한다.-예스24. 커피 애호가는 아니지만 기회가 있을 때 커피를 먹는다. 밖에서는 맛있는 커피를 먹은 적이 없다. 커피 리브레를 통해 원두를 배달해 먹는데 맛이 좋다. 우연히 커피에 대해 알고 싶어 읽었다. 그런데 20년 전 책이라 최근 책도 찾아 보고 싶다. 커피가 탄생하기까지 8세기 에티오피아의 카파(Kafa, 지금의 짐마Jimma시), 그곳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양을 몰던 소년 칼디Kaldi는 이름 모를 나무의 열매를 먹고 흥분해서 뛰노는 양을 보며 의문에 빠졌다. 무엇이 양들을 저토록 신이 나게 만들었을까? 칼디는 직접 그 열매를 따서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었다. 쌉싸래한 맛을 혀끝까지 몰고 들어온 그 열매는 곧 칼디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열매 몇 알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온 칼디는 마을의 수도승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렸다. 밤마다 고된 고행으로 졸음과 싸우던 수도승에게 이것은 구원의 열매였다. 칼디가 발견한 이 ‘하늘의 선물’이 바로 커피다(p. 12). 하늘은 푸르고 흙은 붉다. 까만 피부의 케냐 사람들의 해맑은 미소는 자연 그 자체다. 자연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나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먼 곳으로 이끌어간다. 오래전 여행 중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겨우 먼발치에서 들었던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연주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한두 소절만을 부탁했지만 노래는 쉽게 끊이질 않았다. 노랫말을 물어보니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커피농장은 즐거움과 고난이 교차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간절한 희망의 땅이기도 한 것이다. 케냐 농부들은 아침 8시에 나와서 저녁 6시 반까지 일하지만 대우는 썩 좋지 않다. 하루 100케냐실링의 돈을 받는데, 79케냐실링이 약 1달러 이므로 우리 돈 1000원이 조금 넘는 셈이다. 우리 눈으로 봤을 때는 100 케냐실링은 큰돈이 아니지만 이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돈이다. 이마저 벌지 않으면 구걸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커피는 이들에게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다(p. 39). 출발하기 전 되뇌었던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린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빨리 가려면 직선으로 가라. 깊이 가려면 굽이 돌아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지부티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p. 188).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고 그 야생커피를 처음으로 경작한 곳이 예멘이다. 800년경 에티오피아의 '가파' 지방에서 발견된 ‘분’은 이슬람 수도사에 의해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아라비아반도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초기에는 종교적 논란으로 이슬람 사원 뜰에서 비밀리에 재배되던 커피가 수도승에게 잠을 쫓는 약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비로소 이슬람 제국의 성스러운 음료가 되었다. 에티오피아 '카파'에서 온 ‘분’을 아랍 사람들이 그들 발음으로 '카하와Qahwah‘ 라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기독교 사회에서는 1605년 교황 클레멘트 8세에 의해 '이교도의 사악한 음료'라는 멍에를 벗게 되면서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된다. 17세기 이전까지 유럽의 모든 커피는 예멘의 모카 항으로부터 수입 됐다. 수도 사나Sanna에서 재배된 예멘 커피와 지부티 항을 통해 들어온 에티오피아 커피가 이곳 모카 항에 모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이런 이유로 당시 유럽 사람들은 예멘 커피와 에티오피아 커피의 구분없이 모두 모카라 일컫어졌고,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굳이 따져 말하자면 '에티오피아 모카', '예멘 모카'가 맞는 말이다. 이후로는 친근함과 편리성을 내세워 '커피' 자체를 뜻할(p. 202)때도 '모카A cup of Mocca 라 불렀다. 인도의 자바Java에서 커피가 재배 된 뒤로는 커피를 '자바A cup of Java' 로 부르기도 했다. 19세기가 될 때까지 영화를 누리던 모카 항은 커피의 주요 생산국이 남미와 아프리카로 확대되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p. 204). 모카커피의 본고장 예멘에서도 제대로 된 모카커피는 맛볼 수 없었다. 모순이지만 현실이다. 예멘 사람들에게 커피는 카트와 밀크티에 밀려 한참 뒤쳐져있다. 예멘에서 커피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비싼 커피 값 때문만은 아니다. 카트를 씹고 나서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밀크티를 마시면서 저녁 기도를 드리는 그들의 이슬람 문화가 주요 원인이다. 농민들도 너나없이 커피농사를 마다하고 카트를 심는다. 커피보다 몇 배(p. 212) 높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이토록 카트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에서는 카트를 마약에 비유한다. 그 옛날 기독교 사회에 서 '이교도의 사악한 음료'라며 커피를 배척했음을 떠올리면 역사의 아이러니다(p. 213). 에티오피아와 예멘에서 시작된 커피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잠을 쫓는 약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이슬람 제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커피는 이슬람교의 물결을 타고 이집트, 시리아를 거쳐 동서 문명의 중심지인 이스탄불에 와서 문화로 꽃을 피웠다. 카흐베하네Kahvehane라 불리는 터키의 커피점은 체스, 노래와 춤, 잡담이 오가는 사교적 · 상업적 장소를 넘어 정치 토론의 장으로도 이용되었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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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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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9】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유통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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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8】 우연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 그것이 인생
-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죽는 날까지 그곳을 인도라 믿었다. 이미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의 크기와 아시아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발견한 땅이 아시아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콜럼버스는 그런 과학적 지적을 외면한 채 “지구는 서양배 모양”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한 사람만은 그 땅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어보았다. 피렌체 출신의 항해자이자 관찰자, 아메리고 베스푸치. 그는 여러 차례 탐험 끝에, “이곳은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다”라는 역사적 인식을 기록했다. 유럽의 지성, 독일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특유의 치밀한 관찰력으로 탐정과도 같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낸다. 역사는 때로 사소한 착오 하나가 빚어낸 엄청난 아이러니를 남긴다. 15세기 말,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대신 뒤늦게 등장한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어쩌다 두 대륙의 이름으로 굳어졌을까? 츠바이크는 아메리고를 둘러싼 오해와 논쟁의 역사를 추적하며, 작은 편지 한 장과 지도 한 장에 깃든 우연이 어떻게 수세기 동안 굳어진 신대륙 명명의 비밀이 되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예스24 우연이 얽혀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이 세상살이며 인생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 또한 헛된 일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도 이미 알고 있었던 세계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세계를 더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처음으로 명확히 인식시켜 준 인물은 아메리코 베스푸티오Americo Vesputio였다고 말이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그가 새로운 지역의 발견자라고 확실히 공인된다. 그리고 일곱 번째 장에 이르러 갑자기 앞으로 수백 년 동안 결정적(p. 87)인 영향을 미칠 제안이 등장한다. 발트제 뮐러는 지구의 네 번째 대륙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제안을 덧붙인다. “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쿠스Americus 이므로, 이제부터는 그 땅을 아메리쿠스의 땅 Earth of America 또는 아메리카 America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세 줄의 글이 사실상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출생 신고서나 다름없었다. 소책자의 종이 위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활자화되어 인쇄되었다. 만약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 Santa Maria 호의 갑판 위에서 과나하니 해안이 멀리 반짝이는 것을 보았던 1492년 10월 12일을 신대륙의 생일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리학 입문』이 출판사를 떠난 1507년 4월 25일을 우리는 신대륙의 세례 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27세의 인문주의자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소도시에서 내뱉은 이 말은 그저 작은 제안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가진 매력에 도취되어 그것을 다시 한번 더욱 절실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아홉 번째 장에서 발트제뮐러는 한 단락 전체를 할애하여 자신의 제안을 부연 설명한다(p. 88). "오늘날 지구의 세 부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는 이미 완전히 탐구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네 번째 대륙을 발견하였다. 유럽과 아시아도 여자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을 총명한 사람 아메리고가 발견한 아메리고의 땅, 아메리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동시에 발트제뮐러는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단락의 여백에도 인쇄했고, 이 책에 첨부된 세계 지도에도 적어 넣었다. 그 순간 이후로 유한한 존재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 위에 불멸의 후광을 쓰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라는 땅은 이때부터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고, 영원히 그렇게 불릴 운명을 맞았다(p. 89). 이 이름을 가장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은 지도 제작자들이었다. 곧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모든 지구의와 모든 판화 그리고 모든 책과 모든 지도에 등장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지도만이 예외였다. 그것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발트제뮐러의 지도가 나온 지 불과 6년 뒤인 1513년에 출간된 지도였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이름 사용을 거부한 고집스러운 지도 제작자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바로 그 이름을 처음 제안했던 발트제뮐러 자신이었다. 그는 괴테의 시에 등장하는 마술사의 제자처럼, 마른 빗자루에 생명을 불어(p. 99) 넣었다가 자신이 불러낸 존재를 잠재울 마법의 주문을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누군가의 지적을 받고 콜럼버스에게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발트제뮐러가 왜 자신의 손으로 붙인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다시 없애려 했는지,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진실이 한 번 전설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말이란 세상에 한 번 퍼져나가면 자신만의 힘을 얻어,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유롭고 독립적으 로 존재를 이어가기 마련이다. 최초로 '아메리카'라는 말을 입에 올렸던 젊은 지리학자는 후회하며 그 말을 거둬들이려 했으나, 이미 헛된 일이었다. 그 말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책과 책 사이, 활자와 활자 사이, 입과 입 사이를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멸의 존재가 되어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현실이자 동시에 하나의 이념이 되었다(p. 100).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치열하게 진행된 논쟁에서 제기된 증거와 반론들을 일일이 제시한다면, 그 분량 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될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자들의 절반 이상은 첫 번째 항해가 허구라고 주장했다. 반면 베스푸치를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나머지 학자들은 이 기회를 빌려 베스푸치가 플로리다 혹은 아마존강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엄청난 명성이 주로 이 첫 번째 항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문(p. 124)헌학적 증거로 그 기반을 흔드는 순간 오류와 우연,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남을 따라 한 행위들로 쌓아 올린 바벨탑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인물은 에레라Herrera였다. 그는 1601년 자신의 저서 『서인도제도의 역사』에서 일격을 가했다. 스페인의 역사가가 증거를 찾기 위(p. 125)해 오랜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당시 아직 출간 되지 않은 라스 카사스의 원고를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레라는 라스 카사스가 제시한 근거들을 토대로 「네번의 항해」에 기록된 날짜가 실제와 다르며, 베스푸치가 오헤다와 함께 항해에 나선 시점은 1497년이 아니라 1499년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피고의 변론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로부터 아메리카 발견자의 영예를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교활하고 의도적으로 보고문을 위조했다고 말이다. 이 같은 폭로의 파장은 엄청났다. 학자들은 경악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베스푸치가 아니라니? 절제되고 겸손하며 현명한 행동으로 귀감이되던 그가, 멘데스 핀투처럼 파렴치한 사기꾼, 거짓말쟁이였다니? 이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한 번의 항해라도 거짓으로 밝혀(p. 126)(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 1509~1583)는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여행기로 유명한 저술가로, 1537년부터 1558년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지역(인도, 아라비아,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13번 포로로 잡히고 17번 팔려가는 등 극적인 삶을 살았다. 사후 출간된 『핀투 여행기』 (1614)는 과장된 모험담으로 오랫동안 '허풍쟁이'라 불렸지만, 최근에는 그의 여정이 실제 역사와 부합한다는 연구를 통해 신뢰를 얻고 있다.) 지면 나머지 항해들도 사실로 믿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톨레마이오스로 여겨졌던 인물이 영웅이 되고 자 범죄를 저지른 파렴치한이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비열한 범죄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교묘하게 명예의 전당에 침입한 자라니! 그의 허풍에 속아 신대륙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니, 학자들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지금이야말로 이 수치스러운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1627년 프라이 페드로 시몬Fray Pedro Simon은 매우 진지하게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포함된 모든 지리 서적과 지도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p. 127). 따라서 오랫동안 베스푸치가 사기를 저질렀다고 비난받았던 첫 번째 항해보고서의 조작과 그 밖의 모든 모순들은 결코 베스푸치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항해보고서에 각종 거짓 정보를 덧붙이고 과장해 출판한 파렴치한 편찬자와 인쇄업자들의 잘못임이 이제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설명은 복잡했던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해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명해주는 이 견해에 대해 베스푸치의 비판자들은 마지막 반론을 제기한다. 베스푸치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자신이 하지도 않은 항해에 대해 허위로 기술했다는 소문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왜 한번도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또한 묻는다. 베스푸치가 세상을 향해 분명히 밝히는 것이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 대륙이 내 이름을 가진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사기 행위에 침묵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기의 공범이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언뜻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베스푸치가 당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느냐(p. 169)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법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에는 문학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일단 인쇄되거나 필사된 글은 모두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breche Direr가 수많은 동판화가들이 형편없는 작품에 자신의 인기 있는 서명 'A, D.'를 찍어 팔았다고 해서 어디에 항의할 수 있었겠는가? 『리어왕』이나 『햄릿』의 원본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을 마음대 로 고쳤다고 해서 어디에 불만을 표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셰익스피어 역시 남의 작품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 되었다고 한들 항의할 길이 없었다. 한때는 볼테르의 이름을 빌려 누구든 자신이 쓴 그저 그런 무신론적이거나 철학적인 글들을 마치 그의 저작인 양 출판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베스푸치라고 한들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변형된 글들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쓴 원본을 끊임없이 왜곡하면서 부당하게 얻은 그의 명성을 세상 속에 퍼뜨렸다. 베스푸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무죄를 입에서 입으로 설명하는 것뿐이었다(p. 170)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508년이나 1509년 무렵, 그런 책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가 스페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전에 모든 의혹을 개인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면, 왕이 굳이 탐험에 대한 허위 보고서를 책으로 출판한 사람에게 선원 교육과 정확한 보고서 작성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겠는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스페인에서 『지리학 입문』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은 콜럼버스 제독의 아들 페르난도 콜럼버스Fernando Columbus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 었다(그의 메모가 적힌 책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는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본토에 발을 디뎠다고 주장하며, 신대륙을 아메리카라 부르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그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나름대로의 메모까지 남겼다. 그런데 페르난도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라면 시기심에 불타는 인물로 비난했지만, 베스푸치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에 대해 이미 라스 카사스는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놀랐다. 제독의 아들이자 탁월한 판단력을 가진 인(p. 171)물인 페르난도가 분명히 아메리고가 쓴 「네 번의 항해」를 소장하고 있었음에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자기 아버지에게 저지른 부정과 강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르난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빼앗고 그가 발견한 신세 계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만든 그 불행한 명명의 사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 베스푸치의 결백을 더 명확히 말해주는 것은 없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베스푸치의 의도와 무관하게 붙여졌으며, 베스푸치가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가로채려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p. 1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명성의 햇살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를 향해 비춘 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 상황이 우연히 겹쳐진 결과였다. 오류와 사고, 오해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햇살이 바로 그에게 비춰진 것은 그가 특별한 공로를 세웠거나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운명이나 착오, 우연, 또는 오해 때문이었다. 그 영광은 같은 항해에 참여했던 다른 누군가가 쓴 편지에 돌아갔을 수도 있었고, 옆 배에 탔던 조타수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역사는 바로 그를 선택했다. 역사의 결정은 아무리 잘못되거나 부당하더라도 결코 번복될 수 없다. 편지에 적힌 두 마디 말, '문두스 노부스'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고 그가 실제로 모두 다녀왔는지조차 불확실한 「네 번의 항해」라는 제목 덕분에 그는 결국 불멸이라(p. 184)는 항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기록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 되 었고, 그가 인류 역사 속에 남긴 업적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멋지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발견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그것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단 하나의 업적이 그의 삶과 이름에 영원히 결부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고 설명한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계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역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종종 역사는 평범한 인물에게 불멸의 업적을 안겨주고, 진정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p. 185)않은 채 어둠 속에 던져버린다(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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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38】 우연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 그것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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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5】 미술가 이면의 흥미로운 사실
- 가볍게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가들의 이면에 있는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어떻게 영웅시되고 또는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언제나 이런 책이 재미있다. 고흐의 명성이 사후에 폭발적으로 확산된 데에는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봉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형의 죽음 직후 테오마저 요절하자, 요한나는 고흐의 유작과 서신을 정리하며 형제의 편지를 엮은 《반 고흐 서간집》을 출간했다. 이를 통해 고흐는 단순한 인상주의 화가가 아닌, 내면의 고뇌와 예술적 열정을 지닌 비극적 천재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고흐의 작품을 유럽 각지의 전시에 출품하며 그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갔고,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과 맞물리며 고흐를 '잊힌 거장'에서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끌어올렸다. 고흐가 '고통받는 천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된 데에는 당시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낭만주의 이후 예술가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세속과 타협하지 못하는 순수한 존재, 혹은 사회에 의해 오해받는 비극적 영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고흐는 그러한 인식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생전에 정신 질환을 앓았고, 가난에 시달렸으며, 귀를 자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일화는 그의 예술적 고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색채와 고통은 분리되지 않은 채 수용되었고, 이는 20세기 대중문화 속에서 고흐를 '예술가-순교자'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앞서(p. 16) 말한 대로 《반 고흐 서간집》은 이러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수많은 전시와 평론, 영화와 소설, 심지어 팝송까지 고흐를 현대인의 정서적 우상으로 만들었다. 고흐는 더 이상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삶과 예술, 고통과 창조의 상징이 되었다. 고흐의 명성은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미술 시장에서도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이게 된다. 198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붓꽃〉이 5,390만 달러에 낙찰되며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고, 1990년에는 일본의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가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구입하며 또 한 번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에도 고흐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상징적인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꾸준한 수요와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제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전 지구적 문화 자산이자 시장 가치가 입증된 하나의 예술 브랜드로 기능하고 있다(p. 17). 미술사학자 낸시 모울 매슈스Nancy Mowl Mathews 역시 "고갱은 마치 에로틱한 에덴을 발견한 양 세상을 속였지만, 실제 그는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묘사한 낙원은 허구일 뿐"이라며 신화 너머의 고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갱은 유럽에서 부인 메트를 학대해 가정을 파탄 냈고, 타히티에서도 현지 주민 및 프랑스 식민 당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마르키즈 제도에서 경찰과 성직자들에 의해 '문제 인물'로 지목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고갱이 편지와 저작에서 그린 '남태평양의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자화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폴 고갱의 타히티 생활은 모순으로 가득한 이중적 삶이었다. 그는 문명을 떠나 낯선 땅에서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며 빈곤과 병고에 시달렸고, 실제로 고독하고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타히티는 결코 '오지'가 아니었고, 고갱 역시 완전히 현지에 동화된 예술가라기보다는 식민 사회의 이방인으로 서구와 원주민 세계를 오가는, 복합적 위치에 놓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히티의 현실을 왜곡했고, 상상 속 원시 낙원의(p. 39) 신화를 창조해냈다. '타히티의 고갱'은 결국 고된 현실과 이상화된 환상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신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가 남긴 찬란한 색채와 풍경 뒤에는 병든 몸과 외로운 정신, 그리고 식민적 시선으로 형성된 왜곡된 '낙원'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갱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그 예술이 만들어진 배경 역시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 속 타히티는 예술적 열매이자 식민적 욕망이며, 예술가를 이해하는 그간의 방식이 남긴 문제적 유산이다(p. 40).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다수의 스케치와 밑그림을 스스로 불태웠다는 일화다. 그는 제작 과정의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작품이 마치 신의 손에서 '완성된 상태' 로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는 또한 '천재'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자기 신화 전략의 일부였다. 즉, 서명뿐 아니라 '과정' 자체를 감추는 것 역시 자기 연출 방식이었던 셈이다(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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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5】 미술가 이면의 흥미로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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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4】 아픔을 통한 삶에 대한 성찰
-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특히 암)에 대해 쓴 개인적인 에세이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던 저자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다. 이런 경험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질병 경험에 대한 ‘서술’을 넘어 질병 경험에 대한 ‘사유’로, 저자 자신이 질병을 경험하면서 배운 것들을 짚어가며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의미를 묻고 재의미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질병은 우리의 유한한 이 땅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된다.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협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 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p. 8)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p. 9). 의원, 병원, 전화통화 등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간에 의학의 진찰과 치료는 오직 질환만이 논의 대상이라고 모든 사람이 믿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서 질환은 측정될 수 있는 것이고 기계론에 기반을 둔다. 의사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내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의식하며, 그래서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들을 때 더욱 입을 다문다. 질환에 관련된 질문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느끼는 것들이 바로 질병이다. 내 삶에 관해 묻고 싶은 질문이 있지만 허용되지 않고 말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는 생각해서도 안 된(p. 29)다. 내가 느끼는 것과 말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내 목소리를 삼킨다. 의사들은 보통 예의 바르게 질문에 대답해주지만, 질문을 하려면 답변이 어떤 용어로 돼 있을지 예상해야 하며 결국은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질문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은 과중한 스트레스와 업무에 시달릴 때가 많고, 그리하여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전문가다운' 활동의 경계 밖으로 너무도 자주 밀려나곤 한다(p. 30). 몸 이외에 잃은 것들도 있다. 캐시와 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친구와 친척들이 우리를 염려하고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이후 최악의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더는 예상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곁을 지켜줬고 어떤 이들은 사라졌다. 질병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부부는 내 질병을 외면한 이들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상실의 일부다. 캐시와 내가 삶에 걸었던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일을 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성취하고, 아이들을 낳아 자라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우리 부부가 함께 늙 어가리라는 기대가 평범해 보이던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무엇이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인지, 캐시와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삶에 거는 순진한 기대를 잃었다는 것이 질병을 겪으며 얻은 수확으로 보일 날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실로 느껴진다.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p. 66),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 캐시와 내가 함께 겪은 것이든 나 혼자 만의 것이든 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운이 좋았기에 아내와 함께 애도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상실 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은 상실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p. 67). 질환은 신이 보낸 메시지가 아니고, 질병은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다. 이런 관념은 질병을 둘러싼 신화 중 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한편 신화는 기회를 보여주기도 한다. 기회는, 질병은 그저 생길 뿐이지만 삶을 의미 깊게 만드는 방향으로 우리가 질병 경험을 엮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믿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의지를 가질 때 바라는 대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의지 둘 다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질병을 몸의 뜻에 맡기는 동시에 의학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깊은 믿음은 가장 적극적이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때 가장 잘 싸운다(p. 144).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자리에선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늘 한구석의 죽음이겠지"라고 폴 사이먼은 노래했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p. 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p. 191).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일상적인 것을 소중히 하며 사는 기회도 준다. 여기서 나는 다시 '덤으로 얻은 삶'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삶을 덤으로 받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건강이나 질병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질병에 대한 공포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건강만을 원하는 욕망 또한 넘어설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질병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 가져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덤으로 얻은 삶이란 강물 위에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 내가 질병을 겪으며 배운 교훈 중 반절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p. 222). 이 시는 내가 배운 것의 반절일 뿐이다. 햇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을 이루는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반쪽들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가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뻗어 나가는 세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암 초기, 통증이 심했던 어느 날 밤에 본 풍경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서리 낀 창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보았다. 창에 비친 자신이자 세계를 보며 내 몸의 통증 밖에 존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창문이 세계의 일부인 것처럼 내 통증도 세계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창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통증도 이 세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창을 보며 배운 교훈을 수 세기 전에 쓰인 중국의 경전인 『도덕경』은 이렇게 표현한다(p. 223). 세계를 네 자신처럼 여겨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믿음을 가져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수 있으리라 강물 위에 빛나는 햇빛을 소중히 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빛이 거기 계속 비칠 것을 상상하고 믿을 수 있을 때, 나는 이 세계 너머에 속하는 평화를 느끼며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 있을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 때, 여기 있어서 행복하다. 하지만 반드시 여기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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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4】 아픔을 통한 삶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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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3】 각자에게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 이 책은 저자가 2002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지금부터 24년 전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다. 석고 작업을 하는 주인공이 만난 두 여자를 통해 삶의 틀, 아픔의 틀을 깨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가들의 역량은 역시 대단하다. 한강 작가의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나, 앞으로 여기 안 와요." 그것은 조금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결의가 들어간 말씨라는 점만 달랐다. "이제부터 다이어트할 거예요. 휴학하구, 다음 학기에 놀랄 만한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 눈빛두 그때쯤은 달라져 있겠죠." L의 얼굴은 진지했고, 차라리 결연했다. 그녀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 아이에게 이런 결단력이, 강(p. 121)한 의지가 있었나. "아저씨가 그랬죠. 내가 예쁘다구. 살이 찐 다음부터, 난 한 번도 내가 예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해봤어요. 그런데 아저씨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까 행복했어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나도 모르게 자신감두 생겼구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내 욕심이 지나친 건 아니겠죠. 그 사람 말예요. 그 사람이 나한테 예쁘다구 말해 주면, 그날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가냘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건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잠시 후 그녀의 거대한 몸이 떠나가자, 작업실은 예전보다 넓고 헐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을 뿐, 더 이상 배웅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짧은 헤어짐의 절차조차 그녀에게는 지루하고 갑갑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3시쯤 나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다. 불을 켜고 찬 물 한 잔을 마신 뒤. 나는 뜻 없이 작업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농담 삼아 말했던 대로, 고개를 웅크리고 L의 틀집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잡았던 포즈대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틀집은 안락 하였다. 누군가 틀집의 앞면을 끌어다 붙여주기만 하면 관(棺)은 완성될 것이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는 그녀의 등이 닿(p. 122)았던 실팍한 곡선 위로 몸을 기댔다.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감은 눈 위로 겹쳐진 것은 L의 눈이었다. 언제나 젖어 있는 것 같던 그녀의 말간 두 눈이 어룽어룽 내 이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조심스럽게 틀집 밖으로 나오고 나자 나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누구든, 자신의 관 속에 미리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낡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나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아침을 기다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공간에 버티고 있었던 L의 육중한 양감이 떠나갔음을,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염려했던 환멸은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3년이 지난 뒤 그녀를 우연히, 그렇듯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p. 123).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p. 312)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p. 313).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 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 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p. 328)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p.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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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3】 각자에게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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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2】 인간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된다면?
- 이 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의 원작 소설이다. 나는 재미있게 봤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가 재밌었기에 원작 소설을 보고 싶어 읽게 됐다.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봉 감독이 책의 주요 모티브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창작한 것이다. 이 책에 있듯이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 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소설과 영화다운 상상이고 그 안에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흥미로웠다. 사실 내가 미드가르드에서 겪고 있던 그 문제는 미드가르드를 떠날 때도 불거졌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엔지니어도 아니었다. 예술이나 오락, 글쓰기에도 재능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면 별 볼 일 없는 학문이나 연구하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도서관에서 찾은 별 의미도 없는 책을 뒤적이며 아무도 읽지 않을 연구 논문을 썼을 것이다. 그보다 이전에 태어났다면 공장이나 광산, 군대에 일생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드가르드에는 별 볼 일 없는 학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웬이 아주 친절하게 지적했듯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큘러를 한 번 깜박이면, 또는 태블릿을 몇 번만 두드리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수고를 들이는 사람도 없기는 했다(p. 43).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이런 이유로 예나 지금이나 무료한 청춘들이 으레 그래 왔듯, 나 역시 틈만 나면 사고 칠 궁리를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p. 44). 나는 맛없는 아침 식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나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식 스가 죽었을 때보다도, 파이브한테 일이 생겼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어. 종료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는 네가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계속 통신 가능한 거리에서 비행하고 있었어. 결국 포기하고 돔 격납고로 돌아온 다음에도 조종석에 앉아서 한 시간을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불멸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렇지?"(p. 83). 유니언에 속한 세계 수백 개 중에서 인류와 토착 생명체가 공생하는 장소는 딱 하나뿐이다. 이 행성은 은하계 나선형 팔의 거의 끝에 있는 M형 항성을 홀로 공전하는 작은 왜성으로 가장 가까운 개척지와 20광년 떨어져 있다. 인류가 가장 먼 곳 까지 나가 개척지 건설에 성공한 사례였다.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행성을 롱샷이라 불렀다. 이 개척지의 성공 뒤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애초에 롱샷 행성에는 나무에 서식하는 두족류가 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이동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숲 지붕 색에 맞춰 색을 바꾸기 때문에 적외선 카메(p. 371)라 없이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은 행성에 하나뿐인 대륙의 중앙 고원에 모여 살았다. 처음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 이들은 과학 기술이나 문화 면에서 미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능력은 농업이 발달하기 이전의 인류보다 크게 앞서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다. 내가 본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원래 인간이 무기와 거주지, 플리터와 우주선을 발전시키게 된 이유가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너무 서툴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롱샷의 토착 생물들은 생태계의 일원이 되는 데 서툴지 않았다. 그들은 총 없이도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다.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륙거점은 해안에 있었고 해안은 그들이 서식하는 산지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개척민들도 토착 생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들이 낯을 가리고 일부 지역에서만 사는 데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착륙 후 20년이 흐르도록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남이 왜 다른 거점과는 달랐는지까지 역사책에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세워 볼 수 있다.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개척민들은 끊임없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성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간. 시간이 열쇠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p.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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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2】 인간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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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1】 조력 사망에 대하여
- 이 책은 미국의 조력 사망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조력 사망이 합법화된 주는 별로 없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죽음의 방법에 대한 논의는 멀기만하다. 과연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흥미롭게 읽었다. "나는 평생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어요. 항상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좋은 영화를 보려고 애썼죠. 늘 스스로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게 완전히 무의미해진 거예요.” 켄이 멈칫하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래를 뱉어내고 숨을 골랐다. "현대 의학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늙다리들은 한참 전에 사라졌겠죠." 그는 다른 아파트와 연결된 복도를 고개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엄청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목숨에 매달려요. 정말 그렇게 매달릴 만한 가치는 없는데."(p. 25). 의료 조력 사망은 정신이 온전한 성인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받은 치사 약물을 섭취해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할 경로이다. 미국에서 진행성 치매 같은 중증 인지장애 환자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어도 조력 사망법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조력 사망법은 환자가 스스로 치사 약물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의사가 치사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는 안락사는 절대 금지다(p. 38).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 중 상당수는 다른 모든 걱정, 심지어 물리적 통증에 관한 걱정보다 더 극심한 실존의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벌어진 상처만큼 아프고 쓰라릴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가 더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앞으로 비참한 날들만 남았을 때는 죽음 자체보다 살아간다는 것이 더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p. 91). 조력 사망 자격 심사를 통과한 환자 중 일부는 결국 치사 약물을 사용하지 못한다. 약을 섭취하기 전에 사망하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약을 섭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다.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오리건주 존엄사법이 통과된 후 23년 동안 2,895명이 법에 따라 처방전을 받았고 그중 1,905명이 치사 약물로 사망했다. 조력 사망을 신청한 환자 중 3분의 1이 끝까지 약을 섭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p. 236). 조처럼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면 큰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조력 사망법을 이용하는 모든 환자가 안도감을 느끼려고 무조건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병세가 악화할 경우 대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환자들도 있다. 은퇴한 종양 전문의로 엔드 오브 라이프 초이스 오리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마크 래릭은 처방전을 받는 것이 미래의 돌연한 악화 가능성에 따른 보험이나 보증처럼 작용한다고 확신 한다. 그가 약을 처방해준 많은 환자가 실제로 복용하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 약을 받아갔으나 끝내 복용하지 않았다(p. 246).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한 죽음이라 해도 유족에게는 죽음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조력 사망은 가정에서의 호스피스 임종보다 더 명확한 측면이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의 호스피스 기관 베이헬스Bayhealth는 3년에 걸쳐 의료 조력 사망과 전통 호스피스 임종에 따른 애도 경험을 비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은 호스피스 임종에 입회한 유족보다 미련이 덜 남았고, 임종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컸다고 답했다.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이 착잡함과 비탄을 호소한 사례는 두 가지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환자의 결정에 반대한 유족과, 치사 약물을 복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러기(p. 279) 전에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었다. 후자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껴 회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p. 280). 환자가 죽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은 난감한 화해의 과업을 회피하곤 한다. 심지어 호스피스 임종의 경우에도 환자가 언제쯤 사망할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p. 281) 조력 사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부정할 수 없다.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날을 알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얻는다. 많은 유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돕는 과정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게 사실이긴 해도, 사회적으로는 사별 이후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 삶을 마쳤다는 데 대한 사회적 낙인 탓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기도 한다. 고인이 조력 사망을 실행하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친척, 친구, 동료에게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족이 많다. 사별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허용 하지 않는 경우를 숨겨진 애도, 즉 '박탈당한 애도'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죽음에 비해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자살, 약물 과다 복용, 유산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다. 유족이 타인에게 받는 비난은 매우 미묘할 수 있다. 그런 비난은 사람들의 무심한 언행, 움칫하는 몸짓, 어떤 단어의 억양 등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침묵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p. 282). 삶의 마지막을 다소나마 통제하길 원하는 환자의 선택지를 개선하는 데 어떤 과제가 남아 있을까? 최우선 과제는 50개 주 모두에서 조력 사망법이 통과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미국인의 80퍼센트가 합법적으로 조력 사망을 시도할 수 없는 주에 살고 있다. 이들이 삶의 마지막에 심각한 고통을 피하려면 은밀하고 위험할 수 있는 자력 구제에 의존해 죽음을 앞당 기거나, 음식물 섭취를 자발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스위스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아픈 사람들과 조만간 아플 사람들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과제는 조력 사망을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력 사망을 '자살'로 칭하기를 그만두고 의료 행위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조력 사망은 그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 법적 범주를 이루므로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그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또(p. 302) 다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임종 돌봄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필수 과목으로 포함하고, 조력 사망 신청에 관심 있는 임상의에게 대응 방법을 교육하며, 조력 사망에 반대하는 의료인을 위한 보편적 위탁 조항을 도입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임종 환자 돌봄 인력 양성과 관리에 크게 기여할 호스피스나 완화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미 일부 진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 환자의 자문 의사 역할을 맡는 의사들이 나타났고, 캘리포니아와 오리건과 워싱턴의 일부 호스피스는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명시했다. 버클리에서 임종 과학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의사 로니 샤벨슨은 결국에는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을 삶의 마지막 선택지 중 하나이자 치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p. 303).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끈질기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적으로 여기면 죽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 할 경우 그 불가피성을 직면하기가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진다. 죽음을 향한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려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과의 관계를 탐구할 공간과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일찍부터 삶의 마지막을 두고 대화를 시작하면 죽음에 관한 사회적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무상함을 깊이 인식하고 애도 상담부터 호스피스 치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p. 306). '웰다잉' 욕구는 의료와 장례 영역에서 삶의 마지막에 관한 통제권을 찾으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일환이다.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가 이런 노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장, 가정에서의 임종 돌봄, 수분해당, 시신 퇴비화, 수목장 등의 선택지를 조사한다. 자신의 추모사와 부고장을 작성하고, 생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기 장례식 배경음악 목록을 만들거나 관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한다. 죽음에 관한 논의를 정상화하려는 '죽음 긍정death-positive' 운동 (최근 급성장 중이다)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좋은 죽음good death'이 현대인의 또 다른 의무('생산적 삶과 성공적 죽음')로 둔갑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웰다잉이 여력 있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성급한 우리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고통에 간편하고 기계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쉽다. 조력 사망은 어디까지나 중증 환자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p. 307). 이 책은 단기간의 관찰 결과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후 치사 약물 조합이 일부 바뀌었고 부분적이나마 법안 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의 조력 사망 경험은 전반적 으로 변한 것이 없다. 조력 사망 자격은 여전히 획득하기 어렵다. 병세가 지나치게 악화했거나 반대로 처방전을 받을 만큼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여전히 법조문에 구속받는다. 그리고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에 겪는 고통을 덜어주려 헌신해온 의사들은 의심과 비난에 시달린다.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마땅하다. 세계적 팬데믹의 여파와 씨름하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관념이 개인에게 더 밀접하게 다가오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바로 지금이 만사를 다르게 처리하고 더욱 온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떠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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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1】 조력 사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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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0】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
-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책이든 심리치료의 도구는 다양하다. 이 책은 정신과의사의 관점으로 영화를 분석한 것이다. 흥미롭게 봤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마음의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그것이 좋은 영화를 봐야할 이유이다. 극단적인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섣불리 고통의 현실을 직면하라고 요구하는 원칙론적인 접근보다 먼저 그들이 한숨을 돌리고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것은 피해자 대부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필요한 자극이 되기 쉽습니다.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정서적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부적응적인 행동까지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안정감과 연결감(p. 28)을 느낄 수가 있어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p. 29).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와는 아주 다릅니다. 트라우마는 기본적으로 1) 미리 예측할 수 없고, 2) 미리 대비할 수도 없으며, 3) 또한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도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위협에 대항을 해볼 수도 없고 도망을 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기본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강렬한 두려움, 공포, 무력감, 불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데 피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이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압도적인 상황의 경험'이 바로 트라우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뇌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한다고 이러한 변화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트라우마는 우리 인간의 뇌의 신경회로를 압도적으로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피부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듯이, 마음의 상처도 저절로 치유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상처의 깊이와 무게에 따라 치유(p. 46)의 방법과 시간에 큰 차이를 보이겠지만 어쨌든 불가항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의 치료는 큰 진전을 보이는 것입니다(p. 47).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은 감정을 마비시컴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자극이 될지 모를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제한하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합니다. 극단적으로 수동적이 되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삶에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적이고 무미건조한 삶의 지루한 반복이 결코 그들의 삶을 만족스럽게,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아무런 행복도 느낄 수 없는 답답한 자신의 삶에 대한 염증도 느 끼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수동성에 대한 혐오감도 점차 더해질 테니까요. 무미건조한 삶은 트라우마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트라우 마의 영향력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의 기회, 삶의 새로운 즐거움 • 기쁨• 성취감의 기회를 제한시키기 때문이지요. 다양한 긍정적인 경험들이야말로 트라우마의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감정의 마비' 라는 방어기전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환자에게 일시적인 안 정감은 줄 수 있지만 그만큼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더 길게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 인 셈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 여성부 실태 조사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은 고작 2.3%라고 합니다. 여전히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나 아동들은 자신들이 받은 트라우마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도움을 받고(p. 140) 이러한 피해자들이 결국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한참 전에 벌어진 일을 잊고 이제 현재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내면에는 가해자에 의해 황폐 해져버린 삶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변화와 상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요. 아무리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트라우마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잃어버린 다리가 다시 생겨날 수도 없고, 보이지 않게 된 눈이 다시 보이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원하지 않은 변화와 상실을 겪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충분히 표현되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과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속에서나 상상 속에서라도 가해자들에게 화를 표현하고 그들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야 피해자들의 마음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과 분노가 더 이상 그들(p. 151)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게 될 때 피해자들은 비로소 트라우마 이전의 자신과 트라우마 이후의 자신을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어?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하잖아" 라는 말보다는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볼까?" 하는 말이야말로 이런 피해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위로의 말일 것입니다(p. 152).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사고의 전환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마쓰시타 고노스케)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항을 미친 경영자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일 겁니다. 잘 알려진 대로 마쓰시타는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 시타전기산업의 창업자입니다. 일본의 전자 산업하면 우리들은 소니를 떠올리지요. 소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일본 내에서의 평판이나 인기는 마쓰시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한번 고용하면 평생 같이 가는 가족적인 일본식 기업 문화는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초등학교 중퇴자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를 동기 부여로 바꿔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가난 덕(p. 236)분에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고의 전환' 이었습니다. 즉 매사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임한 결과 인생의 장애물을 인생 도약의 뜀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쓰시타는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지요. 긍정적 사고와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인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긍정적 사고와 희망 이상의 치유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p. 237).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자 고통입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겪은 많은 사람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트라우마의 기억을 피하려 하듯이 상실감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조반니처럼 "내가 그때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어쩌면 상실감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책을 하는 것이 덜 괴롭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늦추기만 할 뿐이지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상실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을 적응적인 애도 반응adaptive grieving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애도 반응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쯤 끝나야 한다는 원칙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슬퍼하고 원망하고 애통해해도 됩니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인생의 중심에서 멀어져가면 됩니다. 이렇게 상실감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살아남은 자의 몫입니다(p. 271). 험난한 이 세상,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커다란 풍랑에 휩싸이지 않고 별 기복 없이 순탄하게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뜻하지 않게 큰 사고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고, 협박당할 수 도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두 명 중 한 명은 일생에서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정면으로 트라우마와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 그 충격과 후유증의 흔적이 얼마나 깊게 남을 것이냐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가족 • 친구 • 연인 • 배우자의 태도입(p. 277)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은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가장 커다란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해와 지지, 공감을 받지 못할 경우 트라우마의 상처는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의 공감의 결여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제 2의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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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0】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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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리더와 문제해결』 출간
- 리더와 문제해결에 대한 책이 출판되어 화제다. GMS 이사장이며 진주성남교회를 담임하는 양대식 목사가 35번째 신간 『리더와 문제해결』을 발표했다. 이 책은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지혜가 담겨있다. 리더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를 강사로 모셔 강의를 듣고 집회강사로 청하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양대식 목사는 리더십과 관계 전공자요 실천신학자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저자의 연락 전화는 010-4944-9434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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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리더와 문제해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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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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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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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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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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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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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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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