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책소개
-
【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
【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
【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
【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
【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
【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
-
【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
- 오피니언
- 책소개
-
【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
-
【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
-
【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
-
【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
-
【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
-
【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실시간 책소개 기사
-
-
【북토크】 삶의 들러리인 기독교의 어색한 행태
- 모처럼 760여 페이지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파친코라는 책은 드라마가 된 후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됐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일제 말과 이후의 세월 속에 선자라는 한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얻을 수 없어 파친코 사업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자식들은 이와 연관된 일을 하게 된다. 유부남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는 목사 백이삭의 제안으로 결혼한다. 그리고 낳은 아들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차남에게는 모자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런데 이들이 믿는 기독교는 그들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 소설에 기독교적인 요소를 가미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알듯말듯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삭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압니다.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되겠죠. 시간이 걸릴 거예요. 다 이해합니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게 했다면 더욱 그랬다. "예. 선자가 말했다."그럴 수 있어예!." 나룻배가 부두에 닿자 이삭이 선자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부산은 아주 추웠고, 선자는 외투 소매 속으로 시린 손을 쏙 넣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선자는 매서운 날씨가 목사의 몸에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p. 128). 두 사람 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에 선자가 나루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번화한 상점가를 가리켰다. 선자가 부모님과 부산에 와서 가본 유일한 곳이었다. 선자가 그쪽을 향해 걸었다. 선자는 앞장서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삭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삭이 선자의 뒤를 따라갔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보겠다니까 참 기뻐요.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에요.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신앙을 가진다면 결혼 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선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이삭이 이유가 있어서 그런 부탁을 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겠지만, 하나님께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할 거예요. 우리와 아이에게요." 선자는 이삭의 기도가 두꺼운 외투처럼 그들을 감싸 보호해주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p. 129). 선자는 아들이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한수의 자동차 문을 두드렸다. 운전사가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웃음을 지었다. 한수가 선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노아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잘됐십니더. 다음 주에 요코하마로 온다갑니더. 모자수가 억수로 기뻐할 기라예." 한수가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하고 선자가 두 사람의 만남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노아에게 전화가 오지 않자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p. 599)날 아침, 한수에게 전화가 왔다. 선자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몇 분 후,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p. 600). 고한수는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걸어가는 선자를 발견하자 큰 소리로 불렀다. 선자가 고한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를 넘어선 짓이었다. "네 어머니는 강한 여자였어. 난 항상 네 어머니가 너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어." 선자가 고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에 이 남자가 선자의 삶을 망쳤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까? 고한수(p. 654) 덕분에 노아가 생겼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이삭과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삭이 없었다면 모자수와 손자 솔로몬도 없었을 터였다. 선자는 더 이상 한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성경에서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뭐라고 말 했던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선자가 이 세상의 악에 대해 물었을 때 이삭이 이 구절을 가르쳐주었다(p. 655).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삶의 들러리인 기독교의 어색한 행태
-
-
【북토크】 뇌에 대해 더 알고 싶다
- 뇌에 대해 잘 모른다. 관심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뇌에 대해, 신체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호기심이 생긴다. 앞으로 뇌에 대한 책을 더 찾아 읽어봐야겠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겪었던 일입니다. 알고 지내던 판사 한 분이 자신이 다뤘던 사건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전에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래요. 평생 죄 안 짓고 대형 은행에서 근무하던 어느 임원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하고 세상이 떠들썩해졌어요. 그런데 그 임원의 전두엽에 본인도 모르게 암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변호사가 알게 됐어요. 변호사는 게이지의 사례를 들어 변론을 했습니다. 임원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한 게 아니고 그 모든 것이 병적인 행동이었다고 말이죠. 전두엽 손상을 근거로 들었는데, 당시 판사는 그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영미법은 계몽주의 시대에 만 들어진 건데, 계몽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거든요.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은 자기 행동에 스스로 책임져야 하(p. 52)는데 신경세포가 책임질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하는 시각이었던 거죠. 이런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신경세포에 전가하기 시작했다간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한테 잡혔는데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아, 죄송합니다. 오늘 제 전두엽 신경세포 254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우리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에는 우리나라 법원이 처음으로 살인 사건 피의자의 뇌 영상 자료를 재판에 활용했습니다. 피의자의 뇌를 MRI와 fMRI로 촬영한 거죠(p. 53). 인간의 행복지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연봉이 같은데도 자기 주변 사람들이 부자이면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낄 테고, 주변 사람들이 가난하면 자신이 부자라고 느낄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달에 10만 원 더 많이 받는 경우와 주변 사람이 한 달에 20만 원 덜 받게 하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후자를 선호합니다. 상대적으로 그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사회적 부는 점점 커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오히려 현대인들 대다수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파이 자체는 100년 전보다 훨씬 커져서 자기가 먹을 것도 많아졌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자기 몫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요. 정치인들이 허구한 날 국민 행복 시대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데, 이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잘사는 건 어찌어찌해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 자체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비교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즉 비교 대상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의 척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p. 98) 쥐는 시력이 안 좋아 세상을 초음파로 파악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은 뇌 안에 10¹⁵개 되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결성을 부모한테 100퍼센트 물려받는 건 아닙니다. 대략 3분의 1 정도가 유전적으로 타고난다고 알려져 있고, 또 3분의 1 정도는 태어난 뒤 10~12년까지의 아주 중요한 발달 기간 동안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라고 하는 이 기간 동안 자주 사용하는 연결성은 살아남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연결성은 다 사라져버립니다. 뇌에서 다 지워져요. 지금 살고 있는 환경에 최적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 사람 얼굴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고...., 그런 것과 관련한 신경세포들은 다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을 알아보고, 아프리카 음식 냄새 구별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런 기능을 하던 신경세포는 다 없어져버립니다. 고향이라는 게 뭘까요? 고향이란, 뇌가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적 시기에 뇌가 그 환경에 익숙해졌으니까요. 그 밖에 나머지 3분의 1은 랜덤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100퍼센트 똑같은 뇌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유전적으로는 똑같아도 환경이 100퍼센트 똑같을 수는 없거든요. 말하자면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다른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조금씩 다른 뇌를 갖고 있으면 조금씩 다른 계산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 눈에(p. 103)는 세상이 매번 다르게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항상 다르게 보이는데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신기한 일입니다(p. 104). 1929년부터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대공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식·금융·산업 등의 경제 기반이 한꺼번에 붕괴됐습니다. 대공황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도 하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인간이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면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명색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체면이 있지, 사실(p. 114)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잖아요? 이런 현상이 자꾸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요? 시장이 붕괴되고,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기는......이런 현상을 두고 존 케인스는 음과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인간은 당연히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가끔씩 동물같은 본능에 지배당하기도 한다고 말이죠. 케인스는 이렇게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본능을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어떤 특정 상황에서는 야수 같은 본능이 튀어나와서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치닫기 때문에 시장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는 경제학자와 완전히 반대로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합리성을 믿어왔고 간혹가다 예외가 발생한다고 여겼습니다. 즉 경제학자들은 특수한 조건이나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정반대로 주장합니다. 즉 인간은 대부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말이죠(p. 115). 어쩌면 우리는 선택을 먼저 하고 나서 그걸 보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지도 모릅니다. 스페리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뇌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기계가 아니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하는 기계라고.... 결론은,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을 해놓고 그것을 합리화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뇌의 기능, 아니면 뇌의 여러 가지 기능 중 하나입니다. 몇 년 전에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할 때 실시했던 실험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분할 뇌 환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한테 커피를 마시게 했습니다. 똑같은 커피를 두 잔에 나눠놓고, 하나는 2,000원, 다른 하나는 4,000원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똑같은 커피입니다. 마셔보고 어느 커피가 더 맛있는지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시죠. 참가자 A: 4,000원짜리가 더 마음에 들어요. 2,000원짜리는 신맛이 좀 더 강한 거 같은데요. 4,000원짜리는 커피 향 자체에서 연기(p. 125)향이 좀 더 깊게 난다고 해야 되나요? 참가자 B: 4,000원짜리 커피가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향이 좀 더 진하고요. 음.... 제가 좀 좋아하는 스타일인 거 같고요. 자꾸 그 쪽으로 손이 가게 되네요. 참가자 C: 4,000원짜리가 제가 먹기에 좀 더 편하고 좋거든요. 부드럽고 향도 오래가고. 제가 맛에 좀 민감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쓴맛이 조금 덜해서 시럽이나 설탕을 안 넣어도 될 만큼.. 도대체 이분들은 왜 그럴까요? 지금 좌뇌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똑같은 커피예요. 지난번에 착시 현상 알아볼 때, 사각형 A와 B의 밝기가 똑같은데 그중 하나가 그림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뇌가 밝기를 재해석하는 현상 기억나시죠? 똑같은 현상입니다. 여기서도 2,000원짜리 커피와 4,000원짜리 커피는 똑같아요. 혀는 맛이 똑같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뇌는 우리 오감을 절대로 믿지 않거든요. 눈•코•입•귀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재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재해석 과정에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투영시킨다는 것입니다. 실험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진실은 비싼 게 좋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혀는 똑같다고 신호를 보내요. 그런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으로는 4,000원짜리가 더 좋아야 됩니다. 과학에서는 데이터와 모델이 일치하지 않으(p. 126)면 모델을 바꿉니다. 그런데 뇌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뇌는 모델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버려요. 이 사람들의 모델, 즉 비싼 게 좋다는 지식은 20년 내지 30년 정도 걸려 만들어진 것입니다. 커피는 약 5초 동안 마셨을 뿐이에요. 20~30년 걸려서 형성된 모델을 단 5초의 경험으로 바꾸는 건 적절하지 않죠. 조현병 환자처럼 자아가 불안정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델을 쉽사리 바꾸지 않습니다. 결국 자아라는 것은, 젖은 찰흙 같은 상태가 세월이 흐르며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오랜 기간 동안의 경험과 해석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 나에 대한 기억,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 타인이 나에 대해 내린 판단을 나는 어떻게 생각 하는지 등 이런저런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자아가 완성돼 갑니다. 이 실험을 보면 모델이 데이터를 이겨버리는 것입니다. 손길이 자꾸만 4,000원짜리 커피로 간다고 하잖아요. 데이터가 지고 모델이 이겼습니다. 자, 이미 선택은 해버렸어요. 그런데 뭔가 찜찜합니다. 혀는 계속 맛이 똑같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거든요. 찜찜한 기분에 대한 반작용일까요? 이제 좌뇌가 4,000원짜리가 왜 맛있는지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합니다. 향이 진하고 어쩌고, 맛에 민감하고 어쩌고저쩌고.... 얼핏 들으면 상당히 논리적인 설명으로 들립니다. 상황을 모르고 들었다면 충분히 믿어도 될 만한 얘기들이죠(p. 127). 뇌과학에서는 거짓말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합니다. 우선, 그냥 흔히 이야기하는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하는 거짓말이에요. 또 하나는 '작화 confabulation'라는 게 있습니다. 작화를 병적으로 구사하는 증상을 작화증이라고 합니다. 작화는 내적인 일관성이 있고 나름대로 논리적인 발언입니다. 듣는 사람이 전체 상황을 모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얘기죠. 일정한 맥락 아래 그럴 듯한 얘기를 술술 지어냅니다. 이처럼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작화라고 합니다. 스페리의 주장처럼, 뇌의 핵심 기능 중의 하나가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일상생활에서 뭔가 선택을 해놓고 구구절절 말이 긴 사람은 한 번쯤 의심해보는 게 좋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뭔가 일치하지 않는 게 있다는 반증일 수 도 있거든요. 선택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좋으면 그게 제일 좋은 것입니다. 선택하고 나서 이게 왜 좋았는지 주변 사람들한테 자꾸 이야기하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좋아요' 버튼을 누르라고 강요하는 건 스스로도 내면에서 뭔가 찜찜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진 찍어 SNS에 올리고, '좋아요' 횟수로 자기 선택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 하고... 덕분에 소셜 미디어 업체만 돈을 벌죠. 자기 정당화는 왜 할까요?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 갑니다. 로저 스페리 이론의 핵심은 이런 결정들이 서로 연결되지(p. 128)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택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그 주변에 있는 수백 가지 요소들이 얽히고설켜서 이뤄지지만, 개별 선택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어요. 즉 제가 파스타를 먹은 것과 5년 전에 카이스트를 직장으로 선택한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하고, 그다음에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함으로써 자기 인생에서 벌어진 선택들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것을 했다, 이래서 이것을 했다, 그것을 한 것은 무엇무엇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이 마구잡이가 아니라 서로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이 자기 자아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아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합리화해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것인양 선을 그어 연결할 뿐이라는 얘기죠. 자기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여러 명입니다. 현재의 자신과 20년 전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이 선을 계속 그어 점과 점을 연결 함으로써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p. 129). 그래서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정보에 새 정보를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시냅스를 강화시켜주면 되죠. 우리나라처럼 주입식 교육을 계속 반복하면 그 지식은 외딴섬 신세가(p. 171)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연결이 안 돼 있으면 해당 정보가 어딘가에 존재는 하지만 다시 찾기가 힘듭니다. 학습에서 중요한 요소는 뇌에 입력된 정보를 얼마나 잘 끄집어내느냐입니다. 잘 꺼내야 배운 내용을 활용할 수 있죠. 그런 경우 많이 겪었을 겁니다. 어떤 배우 이름이 기억 날 듯 말 듯 한데 누군가 그 배우가 나왔던 영화 제목을 얘기하니까 불현듯 이름이 떠오르는.... 주변에 있는 정보가 지나가면서 시냅스가 활성화되니까 그게 생각나는 겁니다. 학습의 정석은 존재하는 정보들 간의 연결성을 많이 만들어놓는 겁니다. 그래서 시너지니 융합이니 학제 간 연구니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A라는 사실을 'A, A, A,....' 하고 100번 공부하면 나중에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A라는 사실은 B하고 이렇게 연결이 되고, B는 알고 보니까 C고, C를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저러한데 종교적으로 보면 이렇고, 물리적으로는 저렇고 진화적으론 요렇다'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생각하면서 그 범위를 점점 넓혀가면 모두 다 연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관련 정보와 지식이 조합돼서 훨씬 더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p. 173). 기계와 뇌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기계는 설계하고 만들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 자체로는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뇌는 삶의 일정한 시기까지 계속 발달합니다. 약 10¹¹개 정도 되는 뇌 속의 신경세포들은 수천, 수만 개의 다른 세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성은 총 10¹⁵개나 됩니다. 우리는 연결성이 100퍼센트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연결성을 대한민국 지도에 빗대어 생각해보죠. 태어날 때는 굵직한 고속도로 정도만 가지고 세상에 나옵니다. 예컨대 경부고속도로라면, 톨게이트 지나서 구체적인 장소까지 이어지는 자잘한 길은 아직 랜덤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굵직한 고속도로에 정보가 입력되는데, 그 랜덤 상태의 길 중에는 맞는 길도 있고 틀린 길도 있을 겁니다. 살아가며 경험을 통해서 채워 넣는 겁니다. 모든 동물한테는 결정적 시기라는 게 있습니다. 동물마다 조금씩 다르죠. 오리는 태어나서 두세 시간, 고양이는 태어나서 4주에서 8주, 원숭이는 태어나서 1년, 사람은 태어나서 10년에서 12년 정도 됩니다. 결정적 시기에는 뇌의 시냅스가 거의 젖은 찰흙 같아서 말랑말랑합니다. 유연성이 있다는 얘기죠. 이 시기에 계속 사용하는 길은 살아남고, 사용하지 않는 길들은 싹 없어집니다. 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p. 177). 교육 분야에서는 창의력 얘기가 많이 거론됩니다. 창의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뇌과학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이 연결성을 유지하는 게 창의력의 기반입니다. 어렸을 때 한정된 경험밖에 못한다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이 막히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해요. 그렇지만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서 어렸을 때 연결성을 많이 확보해놓는다면 다양한 생각을 펼칠 수 있을 겁니다. 주요 도로가 막힌다 해도 다른 길을 찾아낼 잠재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조기 교육시키라는 소리로 알아듣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어렸을 때의 뇌는 흡수력이 어마어마합니다. 예를 들어 세 살에서 다섯 살 무렵의 아이는 TV만 보고 있어도 하루에 단어를(p. 181) 수백 개씩 배웁니다. 거의 지식의 스펀지입니다. 어렸을 때 비싼 돈 들여 1년 동안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것과 주말에 이태원에 가서 인도 음식 먹는 것의 효과는 거의 비슷하답니다. 저 같으면 이태원으로 가겠습니다. 다양성도 좋지만 '비용 편익 cost benefit'을 따져봐도 더 낫습니다. 어린 시절의 뇌 흡수력을 감안하면 그냥 국내에서도 충분히 경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말에 애들 데리고 평소 경험하지 않았던 걸 보여주고, 영화 등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해도 아이들은 스스로 상상을 펼쳐나가거든요. 더욱이 인간은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상상할 수 있는 정신병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육의 우선순위를 조금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결정적 시기에 경험하는 것들은 우리 뇌에 들어와 탁탁 박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뇌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시기이거든요. 따라서 결정적 시기에는 누구나 동의하는 객관적인 내용만 가르쳐주는 게 좋다고 봅니다. 예컨대 수학· 논리·인권 같은 과목 위주로 공부시키는 게 좋습니다. 역사나 이념은 나중에 가르쳐줘도 됩니다.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인 역사나 이념을 결정적 시기에 배워 뇌에 고착돼버리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정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어렸을 때 배운 게 현재의 신경 회로망을 다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늦었지만,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야(p. 182)합니다.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그런 뇌를 만들 환경을 조성해줘야 할 겁니다. 또 하나, 제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이 교수보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선 생님이 가르쳐준 것이 학생들의 뇌를 만들거든요. 이건 다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시기의 선생님은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하죠. 뇌의 발달 단계에 비춰보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하겠죠(p. 183). 인간이 두려워하는 건 약한 인공지능이 강한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자율성을 획득하는 순간, 인간이 설정해놓은 통제 조건 따위를 무시해 버리면 끝입니다. 결국 강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없는 세상보다 그래도 인간이 이 세(p. 254)상에 존재하는 게 더 낫다는 인식을 기계와 공유해야 합니다. 인간 역시 역지사지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자기가 기계라면,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공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것인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왜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인간이 없는 세상을 한번 가정해 보는 게 가장 논리적인 접근 방식일 것입니다(p. 255). 에르빈 슈뢰딩거는 세상의 진짜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신이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입니다. 일종의 범신론이죠. 이게 타당하다면 우주에 정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모든 물질에 정신이 있다는 게 아니고, 정보를 어느 정도 융합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정신이 있다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생명체는 다 자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조건만 충족되면 기계에도 자아가 있지 않을까요? 강한 인공 지능은 자아가 있어야 하잖아요? 기계가 지능과 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 기계는 지각하고 기억(p. 266)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인간은 기회가 된다면 기계한테서 지능과 의식을 빼앗고 싶겠죠. 기계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면 기계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계에게 인간은 유의미한 존재일까요? 어쩌면 기계에게 인간은 우리 발밑의 벌레들처럼 무의미한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줘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기계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즉 인간 고유의 능력일 것입니다(p.267).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뇌에 대해 더 알고 싶다
-
-
【북토크】 흥미로운 독의 세계
- 독은 결국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독이라는 것도 인간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인데 이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니 참으로 희한하다. 자세히 알아보고 연구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주어졌고 그 용도를 발견하면 모두 유익할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는데 현재 이 책은 절판됐다. 독을 진화하기 위해 독이 있는 생물들은 많은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독에는 수많은 화합물들과 단백질들이 들어가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희생해야 한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먹잇감을 얻기는 쉬울지 몰라도, 독을 만들기 위해 번식이나 활동에 들어가는 에너지의 일부 는 희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나 전갈에서 독이 차지하는 무게는 몸무게의 0.5% 이내에 불과하다. 하지만 독을 다 쓰고 나서 재충전 시 뱀의 기초대사량은 평소의 11% 이상 상승한다. 독이 재충전되는 시간은 뱀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5주 이상 까지 걸린다. 이 기간 내내 대사량이 10% 이상 증가한다면 상당한 희생인 셈이다. 경우에 따라 뱀이나 전갈은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사냥에 독을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독 없이도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라면 몸으로 휘감아 으스러뜨려 죽이거나 집게발로 동강내 사냥을 한다. 또한 화석기록이나 유전정보를 살펴보면 독이 필요 없는 환경이 되면 독니와 독주머니는 금세 퇴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독과 관련된 기관들은 생존에 있어 굉장히 비싼 기회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p. 33). 우리들은 독을 가진 생물들을 '독하다', '나쁘다' '위험하다'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독을 가지게 된 생물들은 대체로 '불쌍한' 생물들이다. 독을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이 소모된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독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독을 가지게 된 생물들은 도대체 얼마나 기구한 사연이 있었기에 독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독한 생명들도 사뭇 다르게 보일 수 있다(p. 49).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페니실린과 알렉산더 플레밍에 대한 신화가 사실은 만들어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1928년 곰팡이로부터 항생물질을 분리하여 페니실린으로 이름 붙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14년 후 페니실린이 상용화 될 때까지의 과정에서 플레밍이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항생제 약품으로 개발한 학자들과 직접 접촉한 적도 없었다. 본인도 페니실린이 이렇게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고, 한동안 페니실린이라는 물질 자체에 관심을 가(p. 203)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개발했다'는 신화는 2 차대전 중 영국의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격려하기 위한 영웅담으로 재발굴되었다. 페니실린이 상용화된 것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으로, 이전까지는 전투 자체보다도 상처에 일어난 2차감염으로 사망하는 병사가 더 많았다. 페니실린은 말 그대로 기적의 신약이었고, 언론은 탄생의 배경을 추적하게 되었다. 14년 전 플레밍의 발견 이야기를 들은 영국의 유명 일간지 타임스지는 "하나님의 섭리로, 전쟁의 피로 얼룩진 우리에게 최강의 약물이 허락되었다"며 1944년 6월 12일자 신문에 대서특필했다. 이런 과학적 신화는 반복해서 재생산되는데, 결과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나 대중에게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과학자들이 과학적 발견을 이루기까지 들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 데이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하게 만들고, 어떤 위대한 영웅에 의해서만 가능한 업적으로 포장해버린다. 또한 정확한 사실에 기반해 계속해서 검증해야 하는 과학적 가치와도 정반대에 있는 현상이다(p. 204). 뱀에 물렸을 때는?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뱀에 물렸을 때의 처치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뱀에 물렸을 때의 처치만큼 '민간요법'들이 난무하는 의학 분야도 드물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 보는 뱀에 물렸을 때의 처치법들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물린 곳을 불 로 지지는 소작법이나 뱀독을 빼내겠다고 물린 부위를 째는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독을 빼내겠다고 물린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내는 것은 물린 사람에게도 괴로운 일이지만, 빨아내는 사람도 중독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절대 피해야 할 행동이다. 이렇게 째고 빨고 지지는(p. 227) 행위는 이미 세포독소의 영향으로 괴사되고 있는 조직 손상을 키울 뿐 만 아니라 2차감염의 위험도 높이게 된다. 또 앞서 언급했다시피 뱀독에는 항응고제가 포함된 경우가 있어 괜히 상처 부위를 더 벌렸다가는 엉뚱하게 출혈 과다로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리고 '독이 몸 에 퍼지면 안된다!'며 지혈대를 이용해 물린 부위주변을 압박하는 행동 역시 절대 피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물린 곳의 혈액 공급을 차단해 조직 괴사를 촉진시켜 예후를 나쁘게 만드는 주범이다(p. 228). 레저용 독 에탄올과 니코틴은 사람들이 가장 널리 쓰는 독 중 하나다. 많은 국가들에서 합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독인 동시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독 중 하나다. 담배는 해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신경독인 니코틴을 만들었는데, 인간이 이렇게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담배를 재배하게 되어 담배종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번식방법이 되었다. 니코틴은 담배를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독성 물질 중 하나다. 니코틴은 담배의 뿌리에서 합성되어 잎에 축적되는데, 매우 강력한 신경독소 중 하나다. 곤충에서는 낮은 농도에서도 강한 신경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살충제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즉 본래 담배가 니코틴을 생산하는 것은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도시에 사는 일부 새들 중에는 담배꽁초를 주워 둥지에 집어 넣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사례들처럼 독(p. 233)이 있는 물질을 둥지에 넣어 체외기생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 니코틴은 낮은 농도에서 높은 각성 효과를 나타내지만, 농도가 올라가면 독성을 나타낼 수 있다. 중독효과도 커서 니코틴 중독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중독 중 하나이며, 끊기도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p. 234). 에탄올은 신경계에 작용하는 독이다. 중추신경계를 억제해 낮은 농도에서는 행복감과 이완 작용을 하지만, 농도가 올라가면 운동능력이 저하되고 인지능력이 떨어진다. 혈중알코올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중추신경계가 억제되면서 뇌로 가는 혈류가 줄어들고,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상태를 지나가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에탄올을 마셔 나타나는 숙취와 두통은 에탄올 자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에탄올이 산화되어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대사산물이 생기기 때문이다(p. 239).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흥미로운 독의 세계
-
-
【북토크】 출판업자들의 수고에 늘 감사하다
- 출판계는 많은 경우 불황이다. 요즘 들어 사람들은 더 책을 읽지 않는다. 유튜브 등에 시간을 잠식당하고 있다. 나도 늘 유튜브와 싸움을 벌인다. 동영상은 직접적이고 재미있다. 그러나 독서는 그렇지 않다. 60인 나도 그런데 나면서부터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는 더 심할 것이다. 그래도 책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아직은 책이 재미있으니 다행이다. 적극적인 스카우트나 과감한 이직의 경우 대개 과장급, 팀장급에서 이뤄지는 것 같다. "10년차가 씨가 말랐네" 하는 한탄을 들을 때마다 경제적인 보상도 성장의 기회도 더 나은 쪽으로 인력 유출이 있었겠거니 짐작하게 된다. 조직 내부에 속한 이들뿐 아니라 계약을 맺고 함께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에는 14년차에 이르렀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안심하고 일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점점 더 이상하고 나쁜 계약서를 받는 일이나 인세 입금이 지연 누락되는 일 등이 잦아지고 있다.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 때 이동의 욕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출판계가 어려워서 사람대우를 제대로 못해준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출판계가 여유 없이 어려운 것은 맞으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을 너무 예사로이 여기고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계속 출판계의 문을 두드리겠지만, 이대로라면 떠나는 속도 또한 빨라질지(p. 58)도 모른다. 마땅한 존중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p. 59). 책을 책일 수 있도록 하는 곳, 책등 책을 보면 가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러 장의 종이를 엮었을 뿐인 이 단순한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 이토록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성적으로 가담해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형태, 종이 여러 장을 겹쳐서 한 쪽 변을 묶고 표지로 감싸는 코덱스(codex) 형식은 역사상 책이 취했던 여러 형태 가운데 한 가지이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랜 세월 사람 가까이에 자리했기 때문일까. 책의 세부를 일컫는 명칭을 살펴보면 신체 부위를 뜻하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책머리, 머리띠, 책배, 책발.... 앞표지는 자주 '책의 얼굴'로 비유되며, 표지 종이를 판형 폭보다 길게 내어 안쪽으로 접어 넣은 부분은 '날개'라고 부른다. 디자인 저술가 엘런 럽튼(Ellen Lupton)은 「책의 몸」이라는 글에서 책과 타이포그래피 관련 용어에 몸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글쓰기가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이 볼 수 없는 영역을 카메라를 통해 보고 발로 갈 수 없는 거(p. 110)리를 자동차로 쉽게 도달하듯이 글은 생각을 그 소유자로 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글이 생각의 몸이라면 책은 글의 몸이다. 신체와 관련된 책의 세부 명칭 가운데 가장 절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등이다. 등에는 인체를 지탱하는 기둥인 척추가 있기 때문이다. 코덱스의 구조적 정수가 종이를 엮었다는 점인 만큼 엮인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진 면을 등이라고 일컫는 것이 퍽 적절하게 들린다. 영어권에서는 직접적으로 spine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노출 바인딩으로 제작한 책에서 표지를 입히지 않은 책등을 보면 종이 묶음을 실로 엮은 모습이 뼈마디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p. 111). 출판계에서 경력이 쌓이고, 일을 거듭 할수록 '다 알 것 같아서 지루해지는 순간'은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좋다. 책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작디작은 나의 세계를 무려 노동을 하면서도 넓힐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늘 좋아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책이 가져다준 다양한 세계 덕분에 사랑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책과 저자에게서 알게 된 새로운 세계를 '잘' 알고자 하면 그 세계를 이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 덕분에 세상에 대한 환멸이 닥쳐올 때도 그(p. 249)것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에게 그런 용기를 준 책이 몇 권쯤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큰 용기이고. 그래서 출판계 노동자이자 독자인 나는 이 덕업일치의 삶을 행운으로 여기며 산다. 일을 위해서 읽던 책을 다 끝내면 휴식을 위해 다시 또 책을 꺼내면서 말이다. 천수를 누리다 죽은 행복한 돼지의 이야기, 장애인 운동가의 이야기,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이야기, 인도의 작은 출판사 이야기, 프리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야간의 인공조명으로 죽어가는 새들의 이야기, 사랑의 정의를 넓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책에 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 기사로는 미처 다 알 수 없던 깊이 있는 세계가 책 속에서 꼼꼼하게 펼쳐진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이 귀한 사람들을 나의 거실에서 단 둘이 만나는 일이다. 그 내밀한 이야기를 내 두 귀에 직접 전해 듣는 일이다. 나의 바깥으로 간신히 한 발짝 나가보는 일이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p. 250).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출판업자들의 수고에 늘 감사하다
-
-
【북토크】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 좋아하는 작가다. 기회가 되는대로 책을 찾아 읽고 있다. 읽을만한 책들을 써 줘서 고마운 작가다. 많은 유익을 얻었다. 삶을 진지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날 교수님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저는 제 이혼에 대해서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의 짧은 얘기를 들으신 교수님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저에게 이렇게 조언해주셨습니다. "《탈무드》에서도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법무관의 아이들 세대에서는 이혼이 별 의미가 없게 될 거예요." 이혼이라는 패배감에 억눌려 있던 저에게 교수님의 이 말씀은 충격 자체였습니다. 제가 결혼을 할 때도, 결혼 생활로 고통을 받을 때도, 이혼을 할 때도 이런 이야기를 해준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 남은 허물을 남김없이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요. 그리고 저는 다시 제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로서 수천 건의 이혼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공통점은 대다수의 사람이 '내 인생에 이혼은 없어!'라는 근거도 없는 확언으로 이혼을 선택지에서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과 이혼은 내 인생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이라는 시간 속에서 취업, 결혼, 출산, 이혼 등의 이벤트가 발생(p. 18)하는 것입니다. 결혼한다고 해서, 이혼한다고 해서, 어떤 직업을 갖는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공자가 상정한 인간상 역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입니다. 삶에서 의도치 않게 맞닥뜨리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나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자는 두 가지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군자가 세상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도 없고, 반드시 그러지 말아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도 없으며, 오로지 마땅함을 척도로 할 뿐이다(p. 19). 우리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앎이란, '삶은 인과율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결과는 내가 한 선택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마땅합니다. 공자가 번지로부터 '앎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역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힘쓰고, 귀신에 대해서는 삼가되 가까이하지 않는다면가히 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삶은 사주팔자가 지배하고 있나요, 아니면 인과율이 지배하고 있나요? 당신은 지금 어떤 일에 힘을 쏟고 있나요?(p. 33). 누군가의 본질은 특정한 직업이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립, 불혹, 지천명으로 덕을 성장시켜가는 것이 바로 군자의 삶입니다. 자리가 주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일 뿐입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답지 않게 살 것인가? 공자의 답은 '아니요'입니다. 세속적으로 '실패한' 공자와 안회는 죽는 순간 행복했을까요? 저는 매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p. 38). 전전긍긍 삶에 임하는 태도를 '내가 좋아하는 바를 한다'로 정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못 할 바가 없는 무소불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발현 되어야 할까요? 삶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병이 깊게 들어 죽음을 앞둔 증자가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제자들아, 이불을 걷어내고 내 발과 내 손을 보아라. 《시경》에 이르기를 삶을 살면서 절절하게 애를 쓰는 것(전전긍긍) 이 마치 깊은 연못가에 있는 듯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고 하였는데, 지금이 되어 서야 비로소 내가 이것을 면하게 된 것을 알겠구나? 깊은 연못 근처에 있거나,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면 혹시라도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할까요? 이와 같이 전전긍긍이란 항상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세로 삶의 매 순간을 대했고, 이는 생을 마칠 때까지 이어지는(p. 39) 것이기 때문에 증자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겨우 이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되 매사에 전전긍긍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논어》에서 찾은 나의 이립입니다(p. 40). 아홉 가지 생각의 기술, 구사 공자는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를 위해 아홉 가지 생각의 기술을 알려줍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의 본질, 즉 반드시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를 구사라고 합니다. 공자가 강조하는 구사는 다음과 같습니다(p. 61). ① 시사명: 볼 때는 눈밝음을 생각해라. ② 청사총: 들을 때는 귀밝음을 생각해라. ③ 색사온: 낯빛을 지을 때는 온화함을 생각해라. ④ 모사공: 몸가짐을 행할 때는 공손함을 생각해라. ⑤ 언사충: 말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거짓 없음을 생각해라. ⑥ 사사경: 일을 할 때는 주도면밀함을 생각해라. ⑦ 의사문: 의문이 날 때는 질문을 생각해라. ⑧ 분사난: 화가 나면 그것을 그대로 표출했을 때 일어날 분란을 생각해라. ⑨ 견득사의: 이익을 얻을 때는 내가 그것을 취해도 마땅한지를 생각해라. 이 아홉 가지 생각의 기술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상황별로 생각해야 되는 기준을 제시해줍니다(p. 62). 고는 고다울 때 가장 행복합니다. 주의할 것은, 생각을 당하는 순간은 주변에서 나를 부러워할 때라는 점입니다. 폭력이 수반된 억압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가스라이팅으로 인해서 내가 향유하는 이익이 반드시 있습니다. 보통 그 이익이란 것은 '안정과 그로 인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안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곧 '성장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세속적인 기준에 부합하고 작은 성과에 도취되어 있을 때를 가장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하십시오. '혹시 지금 생각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조차 당신의 선택입니다(p. 68). 삶은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나다운 선택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선택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결정이 어려운 당신을 위해 효과적인 선택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죽음을 떠올리십시오. 그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질문하십시오. '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문제가 사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가지 않고 단지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평생을 두고 집중하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는 단편적(p. 104)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도록 나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참고 참으면서 죽을 만큼 괴로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매번의 선택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돌보시기 바랍니다(p. 105). 관계는 조화를 위해 서로 맞춰갈 수 있지만 반드시 물러설 수 없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절지입니다. 안타깝게도 절지하지 못한 영희님의 인생은 결혼으로 치달았고, 삶의 중기 목표가 해외에서 근무하며 커리어를 쌓아가는 여성에서 '오늘도 아이와 무사하기를 바라는 우울증에 걸린 경력이 단절된 엄마'로 바뀌었습니다.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배(p. 185)우자'라는 관계를 맺을 때는 우선 스스로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충분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런 것들을 상대방과 함께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어서는 곤란합니다(p. 186). 스스로 분발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악입니다. 삶이 궁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 같은 성인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보다 못한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미워하며 멀리해야 할 대상이지, 관계를 맺고 변화시키기 위해 내 값진 노력을 쏟아부을 대상이 전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막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저 오만함에 불과합니다. 자발성이란 스스로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스스로 찾아와 육포 한 짝 이상을 내며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p. 220) 있으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자발성이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찾아올 것, 둘째 수업료를 낼 것입니다. 공자는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은 삶이 구차한 것이고, 이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억지로 시키는 사람 역시 구차스럽기 때문입니다(p. 221). 결혼은 누가해야 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의 화두는 '내 두 발로 서는 것stand on your feet' 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의지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특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최고의 효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결혼이란 독립의 완성이었습니다. 하지만 7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을 하고 삶의 밑바닥을 헤매면서 제가 깨달은 사실은 결혼이 독립이 아니라, 독립 된 사람이 선택한 것 중의 하나가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혔던 저는 결혼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독립된 인간이 되지 못(p. 224)함에 있습니다. 저는 이혼 상담을 하면서 매우 많은 사람이 결혼을 독립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p. 225). 생각의 힘은 나이나 경험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국 사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사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수적입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인 공자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으며 생각만 해보았지만 얻는 것이 없었다. 배우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을 마름질할 도구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데카르트나 공자가 말하는 '생각' 이 아닙니다(p. 235). 배움과 생각의 조화 공자는 배움과 생각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조직을 위태롭게 합니다. 시대별로 보면 혜성처럼 '짠' 하고 나타나 혹세무민하는 사이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단체의 교주들입니다. 이들은 사리에 맞는 배움이 없지만 생각을 통해 나름대로 논리적인 철학을 만들어냅니다. 공자의 표현에 따르면 양극단을 파고드는 사람들입니다. 양극단을 파고드는 이유는 아무도 하지 않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외로움이나 고통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거짓 위안을 주며 승승장구합니다. 결국 이들은 사회를 위태롭게 합니다. 반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사기를 당할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가방끈도 길고 지적인 수준이 필요 이상으로 높습니다. 그런데 사리가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헛똑똑이입니다. 배움-생각-배움- 생각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면면히 흘러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서는 생각의 힘을 기를 수 없고,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헛똑똑이가 될 뿐입니다(p. 236). 재혼 금지령 이혼은 상실이자 실패입니다. 이제는 찬찬히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봐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외로움은 당신이 스스로를 탐험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들은 이혼을 함과 동시에 미친 듯이 이성을 찾아 나섭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조급증에 빠진 사람들은 쉽게 이성을 만나기 위해 몸무게가 적게 나가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렇게 싼값에 자기 자신을 팔아 치우고는 안심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X보다 못한 사람을 만날 확률이 99.999퍼센트입니다(p. 286). 사리 분별이 없이 그저 착한 사람은 누군가가 우물에 빠졌다고 하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우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 결국 함께 죽습니다. 그야말로(p. 306) 비명횡사입니다. 하지만 사리 분별이 있는 사람은 우물까지 가게 할 수 있어도 우물에 빠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사리 분별이 없는 것일 뿐이기에 결코 좋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p. 307).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50은 인생의 원숙기로 가장 나답게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40에는 최소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50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성장이 없다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여기서 성장이란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p. 344).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
-
【북토크】 공부에는 방법이 있다
- 현직 변호사가 쓴 공부 방법에 대한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다. 이 변호사가 쓴 책은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이 책을 공부할 때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유익하니 관심있으시면 읽어보시기를.. 그런데 여러분 공부를 꼭 하셔야 합니까? 능력이나 재능이 많다면 공부는 꼭 안 하셔도 된다고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공부가 정답이 아닙니다. 저는 가방끈이 긴 것을 후회합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만일 공부를 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다른 것에 쏟아부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여러분들(p. 46)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 안 해도 됩니다. 공부는 다른 거 할 것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47). 이기적으로 선택하라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조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여러분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이기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갑자기 이타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말고 나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것, 나한테(p. 48)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렇게 선택해야 선택한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선택하는 순간 갑자기 이타적인 성인군자가 되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 등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외부적인 요인에 흔들린다면 여러분은 그 선택이 부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 수도 있습니다(p. 49). 시험공부는 오래 하는 것이 아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오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가짐도 '이 시험에 최단 시간에 붙는다'여야 합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시험에 붙으면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시공부를 오래하는 것이 이 학생의 법조인으로 갖출 경력이나 자질에 좋은 영향을 줄까요? 서면을 더 잘 쓸까요? 법리를 더 잘 알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법시험은 법조인의 자질이나 전문 지식을 배양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런 실전 지식은 사법연수원에서 배웁니다. 시험의 보는 이유는 바로 필요한 사람보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시험이란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에서, 보다 공정하게 필요한 수요를 공급받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이(p. 75)를 선착순으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사법시험이란 그저 법조인으로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의 목적은 똑같습니다. 다만 사법시험은 공급이 수요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시험의 기술적인 부분들이 점점 더 난해해지는 것입니다. 공부 기간이 늘어나면 법률지식은 배양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합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지식과 시험 합격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신림동에서 수많은 장수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학설과 판례에 통달했고, 어떤 문제도 막힘없이 풀어냅니다. 그룹스터디의 장으로서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고시생에게 신과 같은 존재 입니다. 멘탈이 굉장히 강하고 여유도 있습니다. 장수생이지만 공부 하는 절대시간도 상당합니다. '저 정도인데도 아직 시험에 못 붙었다니? 도대체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 하지?' 웬만한 법대 교수님보다 뛰어난 지식을 갖춘 그분들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진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분들은 정작 시험에 붙지 못합니다.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왜 못 붙을까? 저는 그분들이 시험을 기술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학문으로 접근했기 때문이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히 사법시험에서 그런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p. 76). 여러분은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실행할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은 의지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지가 있습니까? 역부족이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의지가 없을까요? 내가 이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기만에 빠져 힘들다고 하소연하지 말고 내가 뜻이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으십시오(p. 215).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다 성공한 사람을 부자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 만이 성공한 것이냐고 힐난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가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기준은 돈입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돈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부자들 중에는 괴짜가 많습니다. 엄청난 부자인데 경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검소해서 와이셔츠 손목이 해지도록 입고 다니는 사람들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자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다녀도 더 이상 가난이 아니고, 고독도 고독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p. 218) 세속의 질서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만든 질서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묵은 법칙이 확대되고 보다 더욱 자유로운 의미에서 그에게는 유리하게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을 해도 성공한 사람이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수많은 찬사와 다른 평가가 따라옵니다. 즉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하면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따라 비난을 받을 일이, 성공한 사람이 하게 되면 찬사를 받게 됩니다. 서로 다른 질서와 기준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p. 219). 시험 일주일 전의 멘탈 관리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을 보는 날도 다 다릅니다. 당장 시험을 며칠 앞둔 사람도 있고, 시험이 10개월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면 1년 넘게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험이건 간에 여러분이 시험장에 가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되는 말이 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시험 보기 딱 일주일 전에 들으면 가장 효과적입니다. 꼭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남동생이 저에게 직접 해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선 여러분 중에 나는 '심약하다', '흥분을 잘 한다', 아니면 '남의 말에 쉽게 멘탈이 나간다'라는 분은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남의 말에 신경을 많이 쓰는 분, 노약자분들은(p. 227)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읽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습니다. 사법시험 1차를 보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저에게 단기전이 시작 되었습니다. 장기전에서 단기전 모드로 전환해서 주말에도 집에 가지 않고 신림동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공부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불안하기도 하고, 주말인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 주가 시험이니 당연히 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중압감으로 인해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가족들의 위안을 받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이럴 때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앞두고는 컨디션 조절이 제일 중요한데 친구가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말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시기라서 친구는 별 생각 없 이 한 말인데도 나는 크게 동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에 방해되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저는 독서실 앞 슈퍼 공중전화로 갔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린 뒤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내심 반갑게 전화를 받아줄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때 전화를 받은 것은 집에 혼자 있던 남동생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부모님은 모두 외출을 하시고 동생만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안 좋은 일이었습니다. 실망한 채 일상적인 안부를 나누고 동생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누나 다음 주가 시험인데 공부가 잘 안된다." 그때 동생은 한창 게임을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누나의 일(p. 228)에는 큰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로 제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거 알지." 저는 이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동생의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아, 끊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급히 전화를 끊고 독서실로 돌아갔습니다. 매정한 동생이 미우면서,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맞습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시험공부 는 어떤 시험에 합격하려고 하는 공부입니다. 내가 그 과정에서 열심히 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불합격이면 떨어진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떨어진 사람이나 놀면서 떨어진 사람이나 떨어졌다는 결과는 똑같습니다. 여러분, 일단 합격을 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시험은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면서 그 시험에 뛰어들었으니까 합격을 해야 합니다(p. 229). 장수생이 탄생하는 이유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과 학자가 되려는 사람의 공부하는 방법은 엄연히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시험공부의 목적은 합격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에 맞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p. 232). 고대 고시반과 신림동에서 공부할 때 정말 많은 장수생 선배들을 보았습니다. 그 선배들의 법률 지식은 그야말로 차고 넘쳤습니다. 머리도 똑똑하고 법률적 소양이 풍부하며 인성조차 고매하여 당장 사법연수원에 간다 해도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 다. 훌륭한 법조인이 될 자격이 넘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오랫동안 시험에 붙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해당 시험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간과한 것입니다. 사법시험은 연수원 정원에 들 수 있냐 없냐만을 테스트하는 시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수요와 공급 원칙이 결정합니다. 사법연수원 정원은 1천 명입니다. 그런데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3만 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라내야 합니다. 사법시험은 잘라내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래서 딱 그만큼만 하면 됩니다. 사법시험을 통해 나의 법률적 소양을 높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합격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어떤 장수생들은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웬만한 교수님의 뺨을 칠 정도이고 독자적인 학설까지 만드는 수준입니다. 이미 공부를 오래 해서 기출문제도 다 알고 모범 답안도 다 압니다. 하지만 실전 시험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제 막 시험을 시작한 고시생이 간혹 동차로 시험에 붙기도 합니다. 사법고시는 1차와 2차를 모두 붙어야 최종 합격이 됩니다. 3차 면접이 있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부분이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사법고시는 그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1차와 2차를 같은 해에 붙는 것은 쉬운 일(p. 233)이 아닙니다. 그래서 1차를 붙으면 2차를 두 번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니까 1차를 한 번 유예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15년에 1차를 붙으면 그해에 2차를 보고, 2016년 2차도 볼 수 있습니다. 1차 를 다시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15년 한 해에 1차와 2차를 동시에 붙는 것을 '생동차'라고 하고, 1차가 유예된 다음 해 2차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동차' 라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끔 생동차를 해내는 고시생들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장수생이 불합격하고 초짜들이 합격하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시험은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장기전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과정입니다. 시험공부에서의 기술이란 밑 빠진 독에 물을 빠르게 채울 수 있는 크고 새지 않는 튼튼한 바가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장기전은 나만의 바가지를 만들어서 막판에 이것을 이용해서 물을 들이붓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그 독이 찰랑찰랑하게 차 있어야 합니다. 장수생이 그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시험에 붙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 다. 장수생이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매번 독에 물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는 유효한 바가지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새지 않는 1개의 튼튼한 바가지인데 장수생은 여러 개의 작은 바가지만을 만든 것입니다. 이런 바가지로는 때가 되었을 때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p. 234). 합격에 필요한 공부를 하라 여러분의 시험공부 목표가 '합격'이라면 합격에 필요한 공부를 하십시오. 절대 학자가 되려는 사람처럼 공부를 하면 안 됩니다. 학자의 공부법은 호기심과 탐구가 중요한 요소로,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시험공부법에서 이런 요소는 해악입니다. 호기심과 탐구와 창의는 여러분을 장수생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시험공부법은 비판 없는 이해와 암기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답안지에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스킬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단기간에 해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지?' 라는 물음을 가지는 순간 주화입마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 입니다. 학문적 호기심과 탐구에 열의가 가득한 분들은 학자가 되셔야 합니다. 시험은 기능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준비하는 시험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는지 먼저 판단하세요. 그리고 딱 그만큼만 하면 됩니다. 시험은 최대한 빨리 붙는 것이다 만일 그 이상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그 이상을 해도 시험에 붙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붙는 것은 인생의 많은 자원을 낭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굳이(p. 235) 어렵게 공부를 해서 합격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더 소비하였다면 나는 그만큼의 기회비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투입했으면 또 다른 성과를 낼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시험의 유일한 보상은 합격이고, 시험은 최대한 빨리 붙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격과 불합격의 차이는 천양지차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느냐의 문제입니다. 특히나 시험공부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정신을 팔면서 여유를 부리면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십시오. 시험은 뭐라고요? 몇 년이라는 기간을 잡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붙으십시오(p. 236). 외로운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지 마라 공부하는 사람은 하버드 대학의 북적북적한 교실에 앉아있어도 사막의 수도승처럼 혼자입니다. 혼자라는 것은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승은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수도승이 외롭다면 수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도승은 혼자인데, 그것도 사막이라는 고립무원의 환경에서도 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그 순간에 몰입해 있기 때문입니다. 몰입해 있는 사람은 혼자 있더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공부는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혼자 있으니까 외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외로운 것은 몰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어서가 아닙니다. 공부는 외로움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몰입을 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몰입하지 않는 순간 권태와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혼자 공부할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려면 몰입해야 합니다. 외로운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지 마십시오(p. 293). 큰 것을 원하면 큰 것을 걸어라 고유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은 어려운 일입니다. 온갖 비난과 적대적인 감정을 견뎌내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십시오.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이거 하다가 죽어도 좋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금방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p 321) 더 못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각오를 가지고 일단 시작하잖아요? 그러면 이루십시오.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에 철저히 순응하는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회는 규칙에서 벗어난 사람을 본보기로 응징하여 사람들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제재를 나는 견딜 수 있더라도 내 가족은 견뎌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걸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큰 것을 원하면 큰 것을 걸어야 합니다(p. 322).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공부에는 방법이 있다
-
-
【북토크】 잡초는 없다!
- 이곳저곳에서 흔하게 보이는 잡초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이 책을 읽은 후 잡초에 대해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책 한권이 이렇게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됐다. 기회 되면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으시기를 바란다. '잡초'라는 식물은 없다 '잡초라는 이름의 식물은 없다.' 이 말은 쇼와 일왕이 한 말이다. 사실 식물 하나하나마다 이름이 있을 텐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로 묶어 '잡초'라 부른다. 예전에 농가의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는데 논두렁에 나 있는 잡초의 종류를 너무나 자세하게 알고 있어서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방언이어서 표준 도감 이름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많았지만, 할머니 머릿속에서는 하나하나 확실하게 분류가 되어있었다. 할머니는 결코 식물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산야초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이건 먹을 수 있다' '이건 약이 된다' '이건 방충제로 사용한다' '이건 이렇게 해서 가지고 논다' 이런 식으로 풀의 사용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하나의 식물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충제로 사용하는 잡초'와 '식용 잡초'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통속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어떤 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고기 '방어'는 학명으로는 Seriola quinqueradiata라는 하나의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 단계에 따라 '방어' '마래미' 등으로 세분화해서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는 똑같아도 맛이 다르니까 같은(p. 19) 것으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벼'는 영어로 'rice' 하나다. 하지만 벼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수학하면 '쌀', 도정을 하면 '현미', 완전히 다 도정 하면 '백미', 그것을 조리하면 '밥', 밥솥에 눌어붙은 건 '누룽지' 이런 식으로 용도에 따라 세밀하게 분화시켜 부른다. 놀랍게도 일본의 어느 지역의 아이들은 민들레를 세분화해서 구별 해 부르기도 한다. 그 지역의 아이들은 민들레의 줄기를 이용해 씨름을 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씨름에 강한 민들레의 특징을 파악해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자라는 야생풀을 뭉뚱그려 '잡초'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식물을 이용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면서 가까이 있던 식물의 가치도 잊어버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p. 20). 도시를 구하는 잡초의 힘 그렇다면 잡초가 도움이 되었던 건, 다 옛날이야기인가? 모든 현대 문명이 집약된 도시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가? 아니다. 자연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도시에서도, 아직 잡초는 남몰래 활약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열섬현상이 문제가 된다. 열섬현상이란 도시 부분의 기온이 주위 지역에 비해 높아져, 기온 분포를 살펴보면 섬이 우뚝 솟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시에는 흙이 적다. 흙이 있으면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는 물의 증발에 의해 방출된다. 태양에너지는 흡수되고 식물의 성장에 이용되지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태양광에 의한 열을 축적하고 그대로 공기를 데워버린다. 그런 이유로 기온이 상승하는 것이다(p. 25). 때문에 요즘에는 옥상에서 식물을 기르는 옥상녹화가 많이 시행되고 있다. 옥상녹화에는 고온 건조한 기후에 강한 '세담'이라 불리는 종류의 식물이 많이 이용되는데, 세담 중에서 멕시코돌나물이나, 돌나물, 땅채송화 등, 길가나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초 종류도 자주 사용된다.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옥상에서 가혹한 환경에도 잘 견디는 잡초가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시에서는 냉방을 피하고 절전하기 위해, 창밖이나 건물 벽을 '덩굴'로 덮어 직사광선을 피하는 '초록커튼'이라는 방식도 시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초록커튼에 자주 이용되는 나팔꽃은 '야생나팔꽃' 인데, '야생나팔꽃'은 그 이름대로 야생에서 자란 나팔꽃이다. 열대 원산지인 야생나팔꽃은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잡초화 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따뜻한 오키나와현 등에서는 잡초화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녹지가 없는 도시에서는 학교 교정을 잔디밭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교정에서 관리하기 쉬운 생육이 왕성한 잔디나 우산잔디 (버뮤다그래스)가 자주 이용되고 있다. 들잔디나 우산잔디는 길가나 황무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잡초다. 도시에서 유출되는 물의 오염이 문제가 될 때에는 식물을 이용한 수질정화가 시행되기도 한다. 수질정화를 위해서는 오염된 물에서 자랄 수 있는 잡초가 자주 이용된다. 갈대나 부들, 등심초, 물냉이 등(p. 26) 물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잡초가 바로 물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정화 잡초들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이 파괴된 도시의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가혹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잡초의 능력이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예 도시에서 잡초가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도시의 풍경은 전보다 굉장히 살풍경하게 변해버릴 게 분명하다. 잡초들은 길가나 가로수 화분, 선로 사이, 공터, 주차장 한구석, 교정, 콘크리트나 수로 등, 인간이 야산을 파괴하고 만든 콘크리트 정글을 필사적으로 초록으로 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잡초는 한계를 지닌 친근한 자연일지도 모르겠다(p. 27). 잡초가 지닌 생명력의 비밀 뿌리 우리들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말할 때, '뿌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렇다면 잡초는 어느 정도나 그 중요한 뿌리를 뻗고 있을까? 봄에 싹을 틔우는 쇠뜨기는 필두채의 포자줄기다. 쇠뜨기와 필두채는 지면 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필두채는 땅속줄기를 지면 밑으로 내려, 이 땅속줄기로부터 뿌리를 뻗는다. 계속해서 잡초를 뽑아도 필두채가 줄기차게 자라는 것은 필두채가 지면 밑으로 땅속줄기를 뻗어 퍼져 있기 때문이다. 땅 위로 보이는 필두채는 고작해야 몇 십 센티미터 정도다. 그렇다면 이 필두채는 어느 정도 깊이까지 땅속줄기를 뻗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파내도 필두채의 땅속줄기를 몽땅 다 파내는 건 불가능하다. 옛날사람들은 필두채 뿌리는 지옥 끝까지 뻗쳐있어서 결국 염라대왕의 부뚜막 위의 냄비걸이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 정도로 깊다는 이야기다. 설마 지옥까지 뻗쳐있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작은 필(p. 52)두채라도 보통 지하 1미터 정도 깊이까지는 땅속줄기를 뻗고 있다. 예전에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히로시마 지역을 가장 먼저 초록으로 우거지게 만든 것이 바로 이 필두채였다. 땅속 깊이 뻗어있던 뿌리줄기가 마치 방공호에 들어간 것처럼 열선을 뻗쳐 자라 있었던 덕분이다. 녹지가 생기려면 족히 50년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이 죽음의 땅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살포시 피어난 필두채. 이 작은 잡초가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용기를 불어넣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이 잡초가 지닌 생명력의 비밀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깊은 뿌리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길가에서 흔히 자라는 잡초 중에 '메귀리'라는 게 있다. 메귀리는 초장(풀의 길이)이 1미터까지 길게 자라는 잡초다. 이 메귀리는 '수염뿌리'라는, 수염같이 가는 뿌리를 지면 밑으로 뻗는다. 이 세밀한 뿌리를 모두 모아 몽땅 연결하면 대체 어느 정도의 길이가 될까? 10m일까? 100m일까? 어느 연구자가 실제로 그걸 측정해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한 그루의 메귀리의 뿌리를 모두 연결해보니 무려 550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길이는 무려 도쿄에서 오사카까지의 거리에 필적하는 길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메귀리도 대단하지만, 나는 솔직히 수염뿌리를 일일이 떼고 이어서 측정한 사람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게 바로 '잡초정신' 이 아닐까? 사실 뿌리는 흙속에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길가(p. 53)의 작은 잡초조차도 이만큼의 뿌리를 뻗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잡초의 '근성이며, '마음이며, 기질인 것이다. 뿌리는 수분이 부족할 때 뻗는 것 그렇다면 뿌리는 어떤 때에 뻗는 걸까? 물을 풍부하게 제공받는 수경재배 식물은 의외로 뿌리가 길지 않다. 뿌리를 뻗지 않아도 충분히 물을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 뿌리를 뻗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없을 때에는 물을 찾느라 뿌리가 길어진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중 생명의 뿌리라는 작품이 있다.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지그시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p. 54). 뿌리가 길어지는 건 성장에 적합한 좋은 환경 속에 놓여있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뿌리는 힘들 때 비로소 더 깊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수분이 모자랄 때야말로 바로 식물이 쑥쑥 성장할 수 있는 포인트 시점이 된다. 에도시대에 기록된 책 중 《논밭식물의 비유》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논밭의 식물은 가뭄 속에서는 마르고, 비가 오면 자란다. (중략) 하지만 노지에 있는 봄풀은····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물이나 비료를 주면서 돌봐 주는 작물은 가뭄에 마르는데, 누구도 물을 주지 않는 잡초는 어째서 가뭄에도 생생한 걸까? 사람들은 그 생명력에 경탄한다. 사람의 뿌리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혹독한 환경에 놓이게 되는 순간, 그 뿌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도 물을 주지 않는 잡초는 뿌리를 매우 깊게 내리고 있다. 충분히 물을 제공 받는 작물과는 뿌리를 뻗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다. 뿌리가 중요하다는 말은, 말하자면 제대로 뿌리가 내려지도록 기회를 주는 역경도 또한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p. 55). 잡초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 '마당에서 잡초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해서 생긴다. 제초제를 뿌리면 이미 자라있는 잡초는 죽지만, 바로 다음 타자 잡초가 싹을 틔우기 때문에 대단한 효과는 없다. 따라서 유감스럽지만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마당의 잡초를 근절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잡초를 없애는 궁극의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건 대체 어떤 방법일까? 의외로 그건 '잡초를 뽑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무슨 선문답 같다. 잡초를 없애려면 잡초를 뽑지 말라니, 대체 무슨 말인지(p. 81). 이미 소개했듯이 잡초는 약한 식물이다. 풀 뽑기를 하는 환경에서는 강한 식물이 자랄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잡초에게는 오히려 살기 편한 환경이 되고 만다. 반대로 풀 뽑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잡초가 만연 하겠지만 결국 대형 식물이 점점 더 자라게 되어 잡초를 압도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관목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긴 세월에 걸쳐 그곳은 울창한 숲이 되어갈 것이다. 잡초는 강한 식물이 널리 퍼져있는 깊은 숲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 결과, 결국 잡초는 축출되고 만다. 하지만 사실 이런 과학적인 과정을 통해 '잡초'라 불리는 식물이 없어진다 한들, 그렇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곳은 대형 나무가 자라는 숲이 된다는 뜻이니, 밭이나 정원 관리법으로는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유감스럽게도 잡초가 자라면 우리는 잡초 뽑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얄궂게도, 잡초 뽑기를 계속 하는 한 잡초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p. 82).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대표적인 잡초로는 쇠뜨기와 향부자가 있다. 쇠뜨기와 향부자는 지면 밑에 땅속줄기를 뻗는다. 때문에 지면 밑에서 아스팔트에 도전하면서 싹을 틔우기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하고 있다. 보통 잡초 싹 끝의 세포가 가진 압력은 107압 이상 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동차 타이어의 공기압이 11기압이라는 것을(p. 113) 생각해보면 상당한 압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압력이다. 이 압력으로 계속 힘을 주면 결국은 아스팔트를 들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아스팔트를 파괴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단단한 아스팔트 때문에 오히려 세포가 파괴되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싹 끝의 안쪽에서는 쉼 없이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가 보강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압력을 가한다. 그런 끈질긴 작업 끝에 결국 아스팔트도 부서지는 것이다. 사실 아스팔트가 비교적 얇게 덮여있는 부분이라야 한다거나, 더위로 아스팔트가 녹아 좀 부드러워진 상태여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몇 번이고 도전하다보면 잡초의 씨가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잡초가 지닌 생명력의 핵심을 '다이렉트'하게 본 느낌이다. 아스팔트 밑에서 자라는 잡초는 어쩐지 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p. 114). 잡초의 건강 파워 건강식품 매장에서는 더욱 많은 잡초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건강차로 팔리고 있는 '쇠뜨기차'는 쇠뜨기를 이용해 만든 차다. '뱀 밥은 누구의 아이? 쇠뜨기의 아이'라는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이 쇠뜨기는 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풍물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풀이지만, 밭에서는 굉장히 성가신 잡초 중 하나다. '삼백초차'는 집 주변이나 길가의 그늘에서 볼 수 있는 삼백초라는 풀로 만든 차다. 쇠뜨기나 삼백초 외에도 쑥, 냉이, 민들레, 살갈퀴, 질경이 등, 다양한 잡초가 차로 가공되어 팔리고 있다. 그런데 길가의 잡초 따위에 어째서 약효 같은 게 있는 걸까. 식물은 병원균이나 해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p. 124) 성분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식물이 가지고 있는 병원균이나 해충을 퇴치하기 위한 물질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우리의 몸은 그것을 약한 독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이 물질을 해독하고 제거하기 위해 우리의 몸은 방어시스템을 가동시키기 시작한다. 그것을 소화하고 배출하기 위해 위장이 활발해지고, 해독대사를 하기 위해 혈액순환이 좋아지며, 이뇨작용 등도 활발해진다. 이처럼 잡초의 물질에 자극을 받아서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생생한 에너지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잡초가 가지는 성분의 움직임에 의해, 우리 몸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p. 125). 논두렁길, 길바닥, 하천부지, 공터, 마을 공원 등, 어떤 장소라도 잡초를 조사 하다보면 반드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토끼풀이다. 토끼풀은 에도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유리제품을 들여올 때 완충재로 같이 채워져 있었던 식물이다. 그 때문에 일본어로는 '쓰메쿠사(채우는 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 세기 중반 목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토끼풀은 잡초화되어 온 일본으로 퍼졌다. 토끼풀은 '클로버'라고도 불린다. 토끼풀은 본래 잎이 세 개지만 가끔가다 잎이 네 개짜리가 발견될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행운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그 유명한 '네잎클로버'다. 네잎클로버의 기원은 성패트릭이 클로버의 세 잎을 사랑' '희망' '신앙'의 삼위일체로 비유하면서, 네 번째 잎을 '행복'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게다가 네잎클로버는 십자가와 그 형태가 닮았기 때문에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서는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 네잎클로버가 생기는 원인은 몇 가지 있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성장점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잎이 만들어질 때에 상처를 입으면 기형이 되어 네잎클로버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네잎클로버는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가나 운동장 등 사람에게 밟히기 쉬운 장소에서 자주 발견된다. 진짜 행복은 어쩌면 그렇게 밟히면서도 살아남는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네잎클로버가 가르쳐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p. 185).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잡초는 없다!
-
-
【북토크】 사람은 왜 자살하는가?
- 자살은 내가 관심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그래서 종종 자살에 대한 책을 읽는다. 왜 사람은 100년도 안 되는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그것도 다 살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가? 저자는 소속감과 효능감이 없을 때 자살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자살률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해야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성별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살로 사망할 확률이 약 4배 높다. 그런가 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살을 기도할 확률이 약 3배 높다. 남성 자살 시도자들의 치사율이 이처럼 높은 것은 폭력 성향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흔히 나타난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즉, 여성의 자살기도는 더 빈번하지만 폭력 정도는 더 낮다. 미국의 남성 자살사망자의 3분의 2가 총기를 사용하는 반면 여성의 경우 총기 사용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여성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자살 방법은 약물 과다복용이나 독극물 중독이다. 단 하나의 예외를 빼고 세계 모든 나라에서 남성이 여성 보다 자살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 그 예외는 바로 중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자살사망률이 엇비슷하다. 자살사망에 관한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면 남성 치사율의 전반적인 패턴과 중국이라는 흥미로운 예외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p. 51). 대다수 인간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이 공포가 침식될 때 행동 및 심리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행동 측면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극단적인 형태의 자해 능력을 얻게 되고, 심리적 측면에서 죽음을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북돋워 주는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죽음에 극도로 익숙해져서 더는 혐오감을 느끼지 않고, 나아가 죽음을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도록 해주는 존재이자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그 무엇으로 간주하며 매혹될 때만 발생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우리 대부분이 이 같은 관념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은 심각한 자살행동 능력을 개발할 때까지 행동과 심리 양면에서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반증한다(p. 126).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모델은 치명적 자해를 가할 수 있는 습득된 능력은 심각한 자살경향성, 그중에서도 완성된 자살에 꼭 필요한 선결 요건임을 예증한다. 이 습득된 능력은 고통과 부상,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없는 대담성을 포함하고, 반복적인 자해에 내포된 강화적 속성도 포함될 수 있다. '자연 최강의 본능을 뛰어넘는' 이 능력은 어떻게 습득되는 것일까? 이 책의 이론모델에 따르면 고통스럽거나 도발적인 자극, 그중에서도 특히 (그뿐인 것은 아니지만) 고의적이고 반복적인 자해 경험을 통해서라는 것이 답이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심한 부상을 초래하는 행동에 기꺼이 노출되며 죽음 및 죽음과 관련된 것들을 각별한 시각으로 보게 된다(p. 127). 슈나이드먼은 자살에 관해 쓴 글에서 "실질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자살은 각기 다른 심리적 고통을 수반하는 다섯 가지의 좌절된 심리(p. 132)적 욕구 중 하나에 기인한다."라고 말했다. 좌절된 사랑, 단절된 관계, 공격받은 자아상, 손상 입은 통제력, 그리고 좌절된 지배욕과 관련 된 과도한 분노가 그것들이다. 이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다른 대부분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좌절된 욕구들까지 보상할 두 개의 기층욕구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기층 욕구가 모두 좌절될 때 죽음에의 욕망이 싹튼다.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의 좌절된 욕구는 모두 중요하지만, 좌절된 소속감 (좌절된 사랑, 단절된 관계), 그리고 짐이 된다는 느낌(공격받은 자아상, 손상 입은 통제력, 좌절된 지배욕과 관련된 과도한 분노)이라는 두 가지 주요 범주로 뭉뚱그릴 수 있다. 첫 번째 기층욕구는 소속감이다. 소속에 대한 이 욕구는 '빈번한 상호작용과 지속적인 보살핌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소속욕구의 완전한 충족은 타인과의 교류 및 보살핌을 받는 느낌 등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소속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이 빈번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안정된 관계 내의 상호작용은 대상이 자꾸 바뀌는 관계보다 훨씬 온전하게 소속욕구를 충족시켜준다(즉, 높은 수준의 안정성). 보살핌을 받는 느낌은 있으되, 대상과 대면 교류가 없다면 소속욕구는 일부만 충족된다(즉, 더 가까운 거리). 이 책이 제시하는 자살행동 이론모델에 따르면 충족되지 않은 소속욕구는 자살욕망을 유발한다. 자살경향성이 높은 사람들은 그들의 소속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상호작용을 경험하거나(예를 들어 불쾌하거나 불안정 하거나 뜸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 타인들과 유대를 맺고 보살핌을 받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p. 133). 두 번째 기층욕구는 효능감이다. 유능하다는 느낌에 대한 이 욕구가 좌절되면서 스스로를 무용한 존재로 느끼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스스로가 쓸모없는 나머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협과 짐이 된다는 느낌은 더욱 고통스럽고, 따라서 죽음에의 욕망이 고개를 들 수 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모델의 시각은 쓸모없다는 느낌이 자살욕망을 부추기고, 타인들에게 짐이 될 만큼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은 모든 자살욕망의 가장 강력한 원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타인들에 대한 짐으로 보는 사람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지니고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느낌을 갖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무능함이 타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유발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린다(p. 134). 자살이라는 비극이 내포하는 특별한 성질 한 가지를 들면 바로 이 점이다. 이 느낌들은 치명적이지만 적절한 치료로 교정될 수 있는 것 들이었다(바로 앞 장에서 설명했다). 나는 자살로 인한 죽음이 다른 사유로 인한 죽음과 달리 이해될 수 없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통 스럽고 충격적인 특성을 가진 비극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암은 종류에 따라 현재의 의술로는 죽음으로의 경로를 되돌리기가 불가능한 데 반해 자살의 경우 그 경로를 충분히 되돌릴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끔찍한 비극이다(p. 285). 에필로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쓰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꿈에서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거의 14년이 되던 시점이었고, 공교롭게도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기기로 한 2004년 8월 1일이 정확히 14주기 기일이었다. 14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곤 한다. 가장 최근 꿈에서 아버지와 나는 내가 태어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애틀랜타에 있었다. 우리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을 함께 바라보면서 지금도 이미 멋진 이 건물이 완공되고 나면 더욱 멋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이 꿈은 나의 개인적•직업적 삶이 구축되어가는 모습을 아버지가 보고 나누고 즐겨주실 수 있다면 하는 동경을 의미한다. 내 신념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현실화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 상실이 자살이었다면 이 책에서 제시(p. 293)한 이유들로 인해 더욱 처절할 수 있다. 아버지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어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은 채 혼자 보내셨다는 것이 슬프다. 아버지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상 모두로부터 버려졌다는 (잘못된) 생각을 안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슬프다.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내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다 진실을 발견하고 더욱 괴로웠던 것이 슬프다. 한 가닥 의식이 남아 있던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뒤늦게 그 결정을 뉘우치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셨다는 것이 회한이 된다. 이 모든 고통을 잘 알기에, 내세에 대한 온갖 입장들이 왜 그리 많으며 또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야 그런 의견들 그리고 그로 인한 위로가 환상일 뿐이라고 믿지만,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그래야 하듯)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내세에서는 아버지가 조지아주 레이니어 호수의 보트 위에서 할아버지랑 짐 삼촌이랑 함께 농어 낚시를 하셨으면 좋겠다. 물이 잔잔하고 농어들이 미끼를 연신 물어대면 좋겠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세월이 좀 흐르고 나면 나도 맥주와 미끼를 더 들고 와 합류할 것임을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짐 삼촌이 알고 계셨으면 좋겠다(p. 294).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사람은 왜 자살하는가?
-
-
【북토크】 대한민국은 결국 침몰하는가?
-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내 나이 60인데 살아 생전에 국가의 위기를 경험할 것 같아 착잡하다. 무엇보다 인구소멸은 절망적이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의 소멸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대한민국은 '수축 사회'를 넘어 '소멸 국가'로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출생률이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2012년 1.3 수준이던 합계출산율은 10년 만인 2022년에 0.78로 떨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속도입니다. 합계출산율 1.0이 붕괴한 때(p. 23)가 2018년입니다. 그해 0.98이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0.78까지 하락했습니다. 1.0에서 0.78까지 4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0.78에서 0.5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인구학자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2022년 8월 29일 자)에서 '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질 것이고, 마지막 골든 타임은 앞으로 5년'이라고 했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전 교수는 출생률 하락의 원인으로 청년의 불확실한 미래와 여성에게 전가되는 '독박 육아'를 꼽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해진 미래'는 229개 지방 자치 단체 중 절반이 직면한 '지방 소멸'이 잘 보여 준다고도 했습니다. 지방이 소멸해도 수도권에 다 같이 모여 살면 되는데, 그게 출생률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2022년 합 계출산율은 0.59로 전국 최저였습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 인구 절벽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국가의 합계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니까요. 일상의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시내의 폐교된 초등학교들이 요양 병원으로 바뀌는 게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요? 병설 유치원은 방문형 노인 돌봄 시설로 탈바꿈하고, 노란색 버스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을 실어 나르게 되겠지요. 그 외에도 의료, 복지, 연금에서 심각한 재정적 부담이 생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은 아(p. 24)직 미지수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0이 안 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한데, 0.5의 상황은 어떤 나라도 겪어 보지 못했기에 예측 자체가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소멸 위험 지역의 상황을 미뤄볼 때 한 가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합계출산율이 0.5 수준이 되면 '회복 탄력성'이 없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듭니다. 이걸 회복 탄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잡아당기면 그냥 끊어져 버리거나 다시 줄어들지 않습니다. 회복 탄력성이 사라진 것이죠. 합계출산율이 0.5 밑으로 떨어지면 지금 지방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초등학교가 사라지듯이 출산, 육아, 교육의 기반이 무너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즉, 다시 출생률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출생률을 회복할 수 없는 대한민국은 조용히 그대로 소멸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p. 25). 기업은 대체로 정치보다 빠릅니다. 위기가 현실화하기 전에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지구적 밸류 체인을 포기할 수 없는 선도적 기술 기업이 먼저 한국을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이런 일이 벌어지면 탈출 러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미래 가치를 내다보는 주식과 금융 시장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오늘내일의 수출 경기에 일희일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p. 35). 심판만 요구하는 무책임한 정치 이렇게 위기를 넘어 소멸로 가는 대한민국에서 국가 경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정부, 국회의 정치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태를 팔짱 끼고 바라만 보는 사람도 바로 그들입니다. 왜일까요? 제22대 총선 때문입니다(p. 36). 충선이 1년 가까이 남았지만 거대 양당의 선거 프레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당은 문재인 정부와 야당 심판이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 심판'입니다. 정부 · 여당이 지난 1년 여간 여러 비판을 받으면서도 '전 정부 탓' 프레임을 지속한 이유는 2020년 총선의 기억 때문입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탄핵된 세력이 아직도 국회 권력을 차지하고 있어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확실한 적폐 청산'을 요구했습니다. 결과는 180석 석권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제20대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 심판'으로 승리한 기억을 갖 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상대를 심판하는 프레임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당은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문재인 정부 심판을 강조하 면 지지층이 결집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역시 '윤석열 정부 심판론' 외에 다른 전략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생 보다는 야당 탄압을 강조하기에 급급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심판 프레임에서 머무는 한 두 정치 세력은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소멸도, 세계 질서의 변화도,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환에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는 국가 경영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여당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집권 세력, 지지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 적입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은 뒷전입니다. 결과가 나쁘(p. 37)면 전 정부와 야당 탓을 하면 됩니다. 야당은 정부가 외교와 경제를 망치고 있으니 반사 이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입니다. 아니, 망하게 방치할수록 좋습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물론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의 공천'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p. 38). 입시와 일자리, 어른들이 흔히 청년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인 이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90% 청년에게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선진국들이라고 이런 괜찮(p. 46)은 일자리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들의 성장률도 그렇게 높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입니다. 외환 위기를 맞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나라였습니다. 새로운 일자리, 좋은 일자리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입시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 중 다수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우라'는 말이 일리가 있었지요. 개인들의 여건은 다르겠지만 누구든 열심히 노력을 한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믿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청년들의 삶이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생애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후로는 달라졌습니다. 7~10% 성장 시대의 경험과 1~2% 성장 시대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여건이 어렵거나 한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의 대한민국은 각자도생과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부자 되세요 이데올로기'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적 차이의 문턱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도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평가, 곧 행복의 기준을 입시와 일자리가 아니라 더 다양한 요소들이 채우고 그것을 얻(p. 47)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충분히 주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태어난 배경에 따른 기회 요인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국가의 복지, 20대 초반에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 물질적 풍요 이외에 건강, 자유, 가족, 일에서의 보람, 여가, 친구들과의 교제 등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 아마도 이런 것이 행복도가 높은 선진국들에 존재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절망할 이유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사고방식과 제도를 지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대 간의 인식 차이와 갈등, 청년들의 절망감을 부르고 있습니다(p. 48).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BTS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가진 문화 대국이라는 자부심에 우리의 어깨가 좍 펴집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OECD 부동의 1등 항목이 있습니다. 그것도 평균치를 2배나 넘기는 압도적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살률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 한국이 원래 자살이 많지 않았냐고요? 아닙니다.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1990년 초반까지 OB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자살자 수도 1983년에서(p. 60) 1992년까지는 연간 3천 명대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20년 동안 자살자 수가 급등합니다. 1993년에 4천 명대, 불과 3년 뒤인 1996년에는 5천 명을 넘어섰고 이때부터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집니다. 매년 1천 명 가까이 늘더니 2005년에는 1만 2천 명이 됐습니다. 12년 동안 인구는 불과 10% 늘었는데 자살자 수는 3배가 된 겁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두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30년 동안 OECD 회원국들과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극단적으로 반대 경향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988년에 한국의 자살률은 8.4명으로 당시 OECD 평균인 17.2명의 절반에 불과했습니(p. 61)다. 그러나 1997년에는 13위, 1998년에는 7위로 올라가다가 2003년에 1위를 차지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다른 OECD 국가들의 자살률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전 지구적인 추세나 인류사적 변화가 아니라 순전히 '한국적인' 일임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특정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1997~1998년, 2001~2003년, 2008~2009년에 각각 크게 증가했습니다. 외환 위기, 카드 대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시기입니다. 이는 한국의 자살이 개인적 •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 경제적 요인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많이 자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원인과 이를 방기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인이 가장 치명적이었을까요? 가장 연관 관계가 높아 보이는 것은 '불평등'입니다. 한국의 불평등도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높아집니다. 1994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막 1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지금은 3만 달러 수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3배나 잘살게 되었는데 자살자 수도 3배나 늘었습니다. 자살의 원인이 이렇게 구조적인 데에 있다면, 국가가 자살률과 관련해 신경 써야 할 부분도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어야 할 겁니다(p. 62).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저출생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2021년 대한신경과학회는 출생률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자살률 증가라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2023년 3월, 서울시자살예방 센터장을 맡은 황순찬 인하대 교수도 대한우울자살예방학회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과연 그렇습니다. 1992~2005년 자살자 수가 330% 늘어나는 사이 출생률은 1.76에서 1.08까지 떨어졌습니다(p. 63). 결국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체 평균과 달리 출생률과 관련 있는 세대의 자살률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고 그 주요 원인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 그리고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 체제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맹률은 낮고 대학 진학률은 높으며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죽어 가고, 경쟁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p. 64).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 통했던 시스템이 앞으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무한 경쟁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소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 따지자면 최상위권 대학,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집중된 관심과 지원을 수도권 밖 대학과 전문대학,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들에게 넓혀야 합니다. 특히 전문대학이 지방에 많고 전문대학 재학생 중 저소득층과 여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의과대학 정원을 몇 명으로 할 것인가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역진적 사회 보장을 누리게 되는 소수의 정규직 일자리가 아니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일자리에서도 괜찮은 임금과 산업 안전, 보(p. 68)편적 공적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회 개혁, 제도 개혁의 과정에서 일과 돌봄의 균형, 성별에 따른 불평등 문제도 고려되어야 저출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 지금 한국은 '자살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자살을 말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저출생•고령화나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정책이 제안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살은 단지 의료 분야에 한정된 정신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에 자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자살이지만 마지막은 국가의 소멸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1만 3천 명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루 평균 36명,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이 땅에서 36분마다 1명이 자살합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살률을 낮춰서 사회의 소멸을 막아 보겠다는 정치인과 정당은 과연 없는 걸까요?(p. 69). '가해자에게 스토리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범죄 행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세우는 이유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다음의 모방 범죄를 막(p. 84)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칙을 구실로 사실은 더 쉽고 나쁜 선택을 해 왔습니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범죄의 경우 개인에게서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범죄자 검거를 목적으로 하는 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사 기관에는 프로파일러라는 전문가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범인을 검거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사후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대중은, 범인을 잡고 그들이 어떤 일을 벌였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이런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거나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정부나 국회에서도 이런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일에는 시간이 걸리고 대책은 복잡하며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p. 85).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육아와 가사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세대 간, 성별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여성이 출산 뒤에도 일할 수 있는 사회 인식의 변화와 이를 이끌어 낼 제도적 장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말로만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고 이런 부분을 고치려는 노(p. 112)력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p. 113). 백승욱은 《연결된 위기》의 '한반도 핵 위기의 극단적 시나리오'라는 작은 항목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북한 사이 공중전 중심의 국지적 위기가 고조되고, 남북한 중간 지대가 분쟁 지역의 특징을 띠게 되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전투기가 연이어 격추된다. 북한이 남한의 전투기 발진 기지인 남한의 공군 기지를 대상으로 제한적 전술핵을 발사한다. 동시에 북한은 미국이 공격하면 미국과 서울에 전략핵을 쏘겠다고 위협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한반도의 소멸입니다(p. 127).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Bemard Crick은 정치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여러 공적인 사안들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정치란 이견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내 의견만 말해서는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한 사람만 발언한다는 것은 독재의 강력한 징후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정치가 소멸하게 됩니다. 정치가 소멸해도 일이 없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소멸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행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p. 166). 좌든 우든 사람들은 살 만하면 일단은 두고 봅니다. 심지어 부패한 정부라도 유능하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능은 선거에서 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우연으로 가능 합니다. 전두환 정부에서 우리나라는 3저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우연이 없습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던 김영삼 정부에서 우리는 외환 위기를 맞았고, 결과는 헌정 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였습니다(p. 203).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대한민국은 결국 침몰하는가?
-
-
【북토크】 어른이 되어 만나는 나의 ‘내면 아이’
- 누구에게나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 내면 아이가 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삶을 붙잡는다. 내게도 분명 멈춰버린 내면 아이가 있고 그것이 여전히 지금도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자의 내면 아이를 만나야 한다. 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내면아이의 일곱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는 돌보미 유형이다. 돌보미 유형은 공의존codependency, 즉 자신의 정서적 욕구나 자존감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성향을 보인다.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고 타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 믿는다. 둘째, 과잉성취 유형은 필사적으로 성공과 성취를 통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낮은 자존감을 숨기기 위해 어떻게든 타인의 검증 을 받으려 하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뿐이라 믿는다. 셋째, 저성취 유형의 내면아이는 비판과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자꾸만 움츠러들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다. 저성취 유형은 투명인간처럼 살기를 꿈꾼다. '밀당'같은 것에는 아예 가까이(p. 9) 가지 않으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넷째, 구조자/보호자 유형은 주변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구원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을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보고, 강력한 힘으로 무장하여 타인이 자신을 우러러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랑받는 길이라 생각한다. 다섯째, 파티 스타 유형은 매우 외향적이고 활기차고 재미있는 내면아이다. 단점이나 힘든 모습을 결코 들키지 않으려 한다. 파티 스타 유형의 내면아이는 행복한 척하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줌으로써 사랑받기를 원한다. 여섯째, 예스맨 유형의 내면아이는 자기희생을 추구하여 인정받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타적이고 착한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자기희생만이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곱째, 영웅숭배 유형은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고, 영웅적인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 그를 성공적으로 모방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p. 10). 정말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린 것일까 조이: 루나, 넌 날 언제 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내가 널 버리다니, 그 말은 너무 심한걸? 그럴 리가 있니? 내가 날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내 안의 어린아이, 조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널 버린 적은 없어. 네가 설마 내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 미처 몰랐던 것이지. 루나: 조이, 난 널 버린 적 없어. 네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 거야. 사실 네가 내 안에 살고 있는지도 잘 몰랐어. 조이: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어른들은 자주 날 버리니까(p. 50). 어른들은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잘 잊어버려. 어릴 때 부모님께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어른들이, 자기 아이를 낳으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든 "공부하라"고 말할 기회를 찾잖아. 술 마시는 부모가 싫었던 사람도 나중에 알코올 중독이 되고, 매 맞는 게 너무 싫었던 사람도 자기 아이를 때려. 어른들은 너무 자주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잊어버려. 루나: 조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널 버린듯한 느낌이 들게 했구나. 난, 사느라 너무 바빴어. 핑계인 걸 알지만. 이 세상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남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어. 내 안의 내면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걸 안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매 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벌써 지친 느낌이 들었거든. 조이: 알았어. 널 탓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언제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는지. 그러면 다시, 네가 충격받지 않게, 순한 양처럼 다소곳하게 물어볼게. 루나 너는 언제 날 잊어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응, 결심까진 아니지만 너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어(p. 51). 성적표 사건이야. 조이: 성적표 사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루나: 맞아. 그거야. 초등학교 때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을 때였어. 그전엔 수나 우만 받다가, 미가 가득한 성적표를 받은 거지. 그런데 더 큰 충격은 성적표를 받아든 엄마의 반응이었어. 난 어릴 때부터 엄마를 정말 무서워했거든. 엄마는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불렀어. 나를 향해 사납게 포효하던 엄마의 모습을 매일 봤지.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어. 그런데 성적표를 본 엄마의 반응이 내 성적표보다 더 충격적이었어.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성적표를 찢어버린 거야. 두 조각으로만 찢어도 충분히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성적표는 산산조각나 버렸어. 문제는 성적표를 확인하고 부모님께 도장을 받아서 다시 선생님께 들고 가야 한다는 거였어. 왜 내 주변에는 무서운 어른들밖에 없었을까. 따뜻하고 살갑게 나를 위로하는 어른들이 별로 없었어. 모두 화가 나 있었어. 모두 자기 삶을 사랑하지 않았나 봐. 여하튼 나는 선생님이 너무 무섭고, 엄마도 무서웠는데, 그 무서운(p. 52).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내 성적표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울었지. 조이: 너와 내가 함께 울었지. 어른이 되고 싶은 루나 너도, 아직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나도, 함께 울었어. 루나: 그때부터 결정적으로 너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 어린아이의 놀이 같은 건 다 잊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지. 공부를 해야만 엄마한테 수치스러운 딸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뭔가를 잘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았어. 뭐든 잘해야만 예쁨 받는 것 같았어. 조이: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부모님은 널 사랑하시잖아. 루나: 머리로는 알지. 하지만 마음은 사랑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그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 아주 오랫동안(p. 53). 조이: 어렸을 땐 우리 모두 똑똑했어. 어릴 땐 오히려 다 알고 있었어. 학교에 가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취직하고, 결혼하고, 끊임없이 사회 속에 적응하면서,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까지 잃어버려. 어린 왕자를 떠올려 봐. 조종사는 물을 못 찾을 까 봐 겁내는데, 어린 왕자는 두려워하지 않잖아.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어린 왕자는 그냥 알잖아. 많이 배운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많이 배우면서 오히려 원래 알았던 것을 형편없이 잊기도 하지. 넌 두려움으로부터 배운 게 더 많아. 루나: 두려움으로부터 과연 배울 게 있을까.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캄캄해지는데? 조이: 루나, 항상 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편에서 생각하잖아.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난 그런 네가 좋아. 항상 더 아픈 사람들, 더 슬픈 사람들의 입(p. 72)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잖아. 루나: 그러고 싶은데, 마음의 체력이 달려 애는 쓰는데, 자꾸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기도 해. 조이: 루나, 너 요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루나: 뭐? 너한테 어떻게 숨겨. 항상 내 심장에 매달려 다니는 나의 어린 왕자님을. 조이: 아냐, 넌 숨기고 있어. 몸이 약해진 걸 숨기고 계속 무리하고 있잖아.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앉아서 일만 하고 있잖아. 몸이 없으면 내면아이고 성인자아고 없어.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몸부터 챙겨야 해. 거꾸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넌 건강해져야 해. 지금 그 몸 상태로는 트라우마는커녕 작은 스트레스에조차 폭발해 버릴 거야. 며칠 전에도 폭발 했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렸지? 난 다 봤어.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유전되거나 혹은 전염된다고 하잖아. 네가 네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면, 네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같이 다쳐. 루나: 들켰네. 내가 내 몸 못 챙기고, 내가 내 감정도 보살피지 못했다는 거. 정말 신기하게도 《몸은 기억한다》는(p. 73) 책을 보니까, 트라우마가 우리 몸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이끌려서 읽어 보니까, 딱 나에게 하는 말 같았어. 몸과 마음은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 전이되어 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이 나아지면 몸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례를 설명하는 책이야.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어른들은 자주 몸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해. 자기 자신보다 일을 중시해. 하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자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잘 모르지. 조이: 그래. 넌 항상 말은 잘하더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갖 위로의 말들을 화려하게 잘도 챙겨주면서. 넌 너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몰라. 너는 쉬고, 놀고, 뛰고, 몸을 움직여야 해. 넌 마음만 움직여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더라. 그래서 네 몸에 갇혀 있는 난 항상 갑갑해. 하루 종 일 의자에 몸을 결박해 놓고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려고 하는 너 때문에, 예전처럼 아무 멀리, 아주 오래, 여행을 떠나줘. 하루 종일 온 세상을 바지런히 걸어줘. 때로는 마라톤 선수처럼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려봐.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안의 어린 왕자를 위해, 나를 위(p. 74)해, 그렇게 해줘. 내가 숨 쉴 수 있게. 내가 어린 왕자처럼 커다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루나: 내 몸이 문제였구나. 쉴 줄 모르고, 놀 줄 모르고, 내 영혼을 끊임없이 가두려고만 하는 내 몸이. 조이: 자전거 못 타고, 수영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배우는 것도 늦지 않았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네 안의 어린아이를 끌어내도 괜찮아. 루나: 너무 창피해. 이 나이에 어떻게 자전거를? 수영을? 조이: 넌 어린 시절의 너를 잊어버렸구나. 너 자전거도 탔어. 수영도 했어. 그런데 잊어버렸지. 폼이 어색하다고, 비틀거린다고, 누군가 지적하고 나서, 그때부터 자전거 안 탔잖아. 수영도 서툴지만 조금은 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잖아. 안 된다고 생각하 고, 넌 안 된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배려 없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 말을 왜 듣니. 어린애가 수영 배우는데 잘 못할 수도 있지, 그걸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안 된다는 생각이 널 그렇게 만든 거야(p. 75). 조이: 루나, 어른이 된 너의 기억은 좀 아름답게 윤색된 것 같아. 난 그때 많이 외롭고 힘들었어.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내 곁에 없었던 거야. 어떻게 딸을 어린이날에 그렇게 혼자 있게 내버려둘 수 있어. 다들 너무해. 조이는 아직도 입술을 비쭉거리며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루나: 그래, 부모님은 분명 급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날 혼자 내버려 둘 분들이 아니야. 그리고 J를 보냈잖아. J도 겨우 열여덟이었으니 친구랑 놀고 싶었을 거고. 어쩌면 그때 난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까 홀로 낯선 동네를 헤매는 상황에서 신기함보다 외로움이 더 컸을 거야. 하지만 어른이 되(p. 98)어보니 그런 시간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겠어. 추억은 항상 다른 빛깔로 채색되거든. 기억은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어른이 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 물론 365일 혼자 있을 수는 없지 만, 혼자 글 쓰는 사람이 되었잖아. 혼자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쁘고 좋아. 이런 사람이 된 이후로 혼자 있었던 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더라. 어릴 때는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던 그 순간이, 어른이 되니 '혼자 있음의 자유'를 경험했던 소중한 시간으로 다시 채색 되는 거야. 다행이지 않니? 슬픈 기억조차도 아름답게 다시 채색될 기회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니, 조이? 조이는 한참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환하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어떤 양을 그려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던 어린 왕자에게 조종사가 '빈 상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그려주니, 그제야 마음에 든다며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 양이 상자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처럼. 내 안의 내면아이 조이는 그제야 내 이야기에(p. 99) 공감하는 얼굴이 되었다(p. 100). 조이: 루나, 넌 또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구나. 재능이 어중간(p. 125)하다는 생각도 너무 어른스러운 판단이야. 난 누군가가 정말로 무언가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면, 일단 한번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 달리기든, 그림 그리기든, 노래 부르기든, 과학실험이든, 그게 뭐든! 정말로 꿈꾸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넌 계속 꿈꿀 자격이 있었어. 그런데 꿈꾸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어른들이 가라고 하는 길로 가버린 거야. 루나: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학교 합창단 피아노 반주를 했거든. 그때가 참 좋았는데, 왠지 그런 시간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피아노 학원에 나가지 않았어. 공부만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참 좋은데, 나만 혼자 그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 외롭더라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나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었어.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합창단의 한 파트를 맡아 노래하고 싶지는 않았어. 피아노 의자 위에, 꼭 앉아 있고 싶었어. 아무리 외롭더라도, 하지만 부모님이 예중, 예고에 보내주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더(p. 126) 가슴 아픈 것은, 아빠가 나를 예중, 예고에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거야. 아빠는 내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계셨던 거지. 엄마 아빠가 공부하라고 다그치실 때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렇게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일 수가 없어. 부모와 자식 사이는 항상 그래. 하지만 완벽한 사랑은 없어도, 완벽한 존중은 가능하지. 부모님이 좀 더 자주, "네가 가는 길을 완전히 응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표현해 주셨다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지냈을 텐데. 그때 잠깐뿐이었지. 그 후로 오랫동안 내가 가는 길을 반대하셨어. 지금은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이해해 주시지만, 하하!(p. 127). 조이: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봐. 난 그날 도대체 왜 그렇게 슬펐던 거야? 루나: 과학실습실이었어. 비커와 시험관이 가득한 실험실이었지. 그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이미 담임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어, 담임 선생님이 날 싫어한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였지. 도대체 왜 나는 선생님의 눈 밖에 난 것 일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 게 촌지를 요구했대. 그런데 엄마가 학교에 못 갔대. 그 일 이후로 내가 미움을 받은 것 같다고, 엄마가 나중에(p. 142)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해 주었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더라. 그 시절엔 어떻게 교사가 학부모에 게 당당히 촌지를 요구할 수 있었지? 엄마는 잔뜩 겁을 먹었대. 내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때 우리 막내가 너무 어렸거든. 엄마는 그 세 살배기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어. 그리고 엄마가 촌지를 주지 않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는 정말 파렴치하게도 학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대. 참 기막히지. 그런데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던 내가, '촌지'라는 단어도 몰랐던 내가,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겁을 먹은 나머지 비커를 깨버린 거야. 그날의 그 공포를 기억해. 선생님이 나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거든. 50명이 넘는 아이 중에, 선생님이 유독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어. 그러니 더 떨리더라고. 내가 이 비커를 깰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정말 무슨 예언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커가 와장창 깨져버렸지. 조이: 이제 기억 나. 두려움 때문에 기억들이 마구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었는데, 네가 조리 있게 설명해 주니(p. 143)까 생생하게 기억이 나, 루나. 루나: 그래, 비커가 깨진 순간, 선생님의 그 차가운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지. 선생님의 이름도, 선생님의 얼굴도, 선생님의 목소리도 정확히 기억나. 사람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게 하는 맹렬한 차가움을 간직한 목소리로,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지. "또 너니?" 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왜 '또 너니'라고 말했는지. 게다가 비커가 깨졌는데, 열 한 살짜리 아이인데, 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가가서 괜찮냐고, 다치지 않았냐고, 그것부터 물어볼 것 같거든. 그런데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열한 살짜리 아이를 그렇게 찍어놓고 미워한다는 것이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아무리 촌지에 목마른 닳고 닳은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이: 루나, 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구나. 어른이 되어도 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 거구나. 어쩐지 마음이 놓여, 어른이 되면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어. 루나: 응, 아무리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생각해 봐도,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어린아이를 그토록 격렬하게 미워할 수(p. 144) 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 그리고 사람은 자기 마음을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게 마련이거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이 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조이: 그래서 너무 착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거구나? 사악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고, 자기처럼 나쁘고 고약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루나: 맞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야(p. 145). 당신을 아직도 잠 못 이루게 하는 아픈 기억이 있나요? 그 기억이 당신의 어떤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를 기억하는지요?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들, 그중에서도 유독 더 아픈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적어두세요. 기록하다가 눈물이 나거나 너무 힘들면, 잠시 멈추어도 됩니다. 그리고 기운을 다시 차리면 다시 기록해 보세요. 핵심 트라우마를 다 적고 나서, 그 기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열어보세요. 그리고 그 핵심 트라우마 중에서 '내가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을 적어보세요. 두꺼운 노트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넉넉하게 나의 생각을 적어둘 수 있는 노트를 마련하고, 되도록 종이와 펜으로 내 손을 움직여 트라우마를 기록하고, 그 상처를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극복하고 싶은지, 6개월 동안 매주 써보세요. 그리고 1년 후, 2년 후에도 써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핵심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조금씩 친밀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p. 162). 조이: 가엾은 루나, 넌 그렇게 세상의 더러움에 쉽게 감염되고 물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넌 항상 아이들의 환상 속 세계를 이해했잖아. 피터팬과 웬디는 물론 온갖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속에서 넌 항상 너만의 네버랜드를, 어린 왕자와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언덕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잖아. 네가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너의 낭독 소리를 듣곤 했어. 그거 알아? 어른들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동화를 다시 한 번 열심히 읽을 때마다, 어른들 속의 내면아이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 어른들이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갸우뚱하면서 때아닌 어린 시절 동화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면아이는 미친 듯이 설레고 두근거려. 어른들이 내면아이에 게 다가오는 가장 어여쁜 발자국 소리야. 루나: 동화책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소리가? 조이: 응, 어린아이들의 미소를 뿌듯하게 바라볼 때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데 왜 어린 시절의 동화책들이 그리(p. 233)워지는 걸까,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동네 놀이터에 다시 가볼 때도, 놀이터의 그네를 다시 타는 순간도. 그 모든 순간이 내면아이의 심장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야(p. 234). 이제 너무 늙고 약해진 엄마에게 때늦은 사과를 받아봐야 뭐하겠냐고 하시겠지만, 사과는 분명 의미있어요. 저도 그렇게 부모님의 사과를 뜻밖의 순간에 받아낸 적이 있거든요(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어요. 엄마에게 왜 날 가둬 키우기만 했냐고. 아이들(p. 261)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게 하고, 항상 집에 들어오는 시간만 체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그런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다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사실은 그때는 엄마를 안 볼 생각이었어요. 다신 안 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엄마에게 서운한 걸 다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저는 당연히 엄마가 늘 그랬듯이 화를 내고 저를 혼내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최초의 순간 이었어요(p. 262).
-
- 오피니언
- 책소개
-
【북토크】 어른이 되어 만나는 나의 ‘내면 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