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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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소위 “스타” 목사 박영선, 김문훈의 몰락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몰락했다. 한때 한국교회를 들썩였던 스타 목사였다. 박영선 목사는 내가 신학교 시절이던 80년대 신학생들을 매혹했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는 잊혀졌는데 최근 뜬금없이 개척교회 40억 요구 건으로 언론에 언급되다 결국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김문훈 목사는 교역자에 대한 욕설 녹음이 공개된 후 고신 교단 부총회장직과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감추었던 그들의 실체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한때 그래도 깊은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었는데 망연자실하다. 목사는 타종교와 달리 쉽게 팬덤이 형성되고 스타 반열에 오른다. 불교, 천주교에서 이들처럼 명성을 떨친 이들이 있었는가? 기독교는 설교 중심이다보니 설교를 잘 하는 자는 주목을 받는다. 과거 전병욱도 그랬다. 스타 목사의 이면과 몰락을 보며 다시한번 다짐한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지 말자.” 인간이란 잘 난 것처럼 보여도 다 그렇고 그러니 너무 높이지 말고 따르지도 말자. 그랬다가 이처럼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것이 없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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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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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세월은 빠르다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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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9
  • 【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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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2
  • 【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구굴은 무례(無禮)란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의가 왜 필요한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빨가벗고 살든,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놓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한 것이 있다. 나중에 좌석에 앉는 사람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자리가 비면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중간쯤에 앉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를 밀고 들어온다. 양쪽 사람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불편한다. 그런데 나처럼 가운데 자리에 앉을 때 양 편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리가 비면 산모를 위한 여성 좌석 옆에 앉는다. 이 자리에 산모가 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한쪽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좁은 지하철 좌석인데 겨울이라 모두 두꺼운 옷을 입어 더 비좁은데 제발 가운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앉지 마시기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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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 【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취재 가서 보리굴비를 먹게 되었다. 보리굴비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30년을 함께 산 내 반려자. 이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보리굴비 먹은 것을 말하고 보리굴비를 주문해 먹으라고 했다. 이때 아내 왈 “이제 보리굴비 별로 안 좋아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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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1

실시간 칼럼 기사

  • 【넋두리】 기독신문 글 지적에 대한 반응을 겪으며
    최근 기독신문 사설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별 희한한 소리와 반응을 겪었다. 나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문장 표현의 모호함 그리고 오류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찌라시 언론이 기독신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 남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왜 남의 언론을 공격하느냐? 이런 글 쓰게 한 배후가 누구냐? 누가 너에게 어드바이스 해달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앞으로 기독신문 기사를 자세히 읽겠다”라는 것이냐 등등의 말을 들었다. 방금 어느 한 책을 읽다가 이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이런 데서 위로를 편집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물었다. 교정지에 손 많이 대고 참견이나 꼬투리 잡는 멘트 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고, 많이 고칠수록 고맙다고 했다. 신초샤(일본 출판사)는 워낙 꼼꼼해 교정지가 새까맣게 돼서 오는데 정말 고맙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교정지도 그렇게 새까맣게 온다고 하니 교정지가 빨갛게 와도 좌절하지 마세요, 동료 여러분(권남희,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pp. 55). 교단 소식지인 기독신문 글에 오류가 있어 애정으로 지적한 것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참으로 노답이다. 만약 내가 다른 언론사 글이라면 이렇게 여러 번 읽고 오류를 지적하는 피드백을 썼을까?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언론사의 글은 잘 읽지도 않지만, 우연히 봤는데 오타가 있으면 그냥 내버려둔다. 반면 친근한 언론사같은 경우 오타를 알려준다. 오타 하나가 그 기사와 신문사의 격을 얼마나 떨어트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내 기사를 읽고 오타를 지적해 주면 너무나 감사하다. 그만큼 내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기사는 내용은 말할 것 없이 오타와의 전쟁이다. 부목사 때 주보 제작을 맡으면 오타와의 전쟁이었다. 오타가 나서 욕을 먹기도 하고, 주보 전체에 종이를 붙여가며 수정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까다로운 장로 이름이 잘 못 나가 소동이 나기도 하는 등의 일을 겪다 보니 책을 읽으면 오타가 자주 눈에 띈다. 내 기사도 여러 번 교정하는데, 나중에 읽다 보면 또 오타가 있는 것을 볼 때 등에 식은땀이 난다. 그나마 인터넷 신문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지면 신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사람인지라 오타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매사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걸 지적했다고 이런 말들이 들리니 이제 기독신문에서 오타와 非文을 발견하면 타산지석으로 삼고 끝내야겠다. 나나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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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피드백】 교단지 기독신문, 사설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기독신문 2월 4일 자 사설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기에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관심 두고 읽었다. 기독신문은 우리 교단의 교단지이며 사설은 그 신문사의 격(格)을 보여주는 논조 글이기에 몇 가지를 지적할까 한다. 첫째, 논조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논자는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신학교와 관련한 가짜뉴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앞에서 가짜뉴스로 피해를 당한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는데 “신학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신학교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짜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둘째, 非文이 눈에 띈다. 비문은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 뉴스에 흔들려 교계가 사리분별을 못하고 사탄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가? 교계가 거짓 뉴스에 휘둘려 사탄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 아닌가?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이것은 앞 문단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사설 분량이 많이 신문사 담당자가 문장을 잘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기독신문사 정도면 기사를 체크하는 담당자들이 여럿일 텐데 이런 명백한 오류가 수정되지 않은 것을 보니 놀랍다. 지면 신문이야 수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인터넷판이라도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사설 제목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 사설의 제목은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온상(溫床)이란 “범죄의 온상”처럼 “어떤 현상이나 사상, 세력 따위가 자라나는 바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사설의 제목 뜻은 『교계가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되어선 안 된다』이다. 교계가 어떻게 가짜뉴스가 자라나는 바탕이 될 수 있는가? 교계가 가짜뉴스의 생산지라는 것인가? 가짜 뉴스는 일반 언론계가 극심하다고 본다. 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그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고 본다. 교계의 가짜 뉴스는 그에 비하면 덜하고 금방 탄로난다. 어떤 매체고 어느 기자가 썼는지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힌다. 굳이 제목을 그렇게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라리 『교계에서 가짜뉴스를 퇴출하자』, 『교계의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말자』등으로 하는 것이 사설 논지와 더 맞지 않겠는가? 교단의 회원으로서, 작은 인터넷 신문사를 운영하는 언론인으로서 앞으로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을 자세히 봐야겠다. 그래서 오류가 줄어들 수 있다면 이 또한 교단을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설] 교계가 가짜뉴스의 온상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세상은 가짜뉴스로 홍역을 앓고 있다. 가짜뉴스(Fake News)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퍼뜨리기 위해 뉴스가 아닌데도 뉴스의 형식으로 퍼뜨리는 정보 또는 그 매개체 등을 의미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오보나 날조, 거짓 정보, 루머, 유언비어, 패러디, 풍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뉴스 전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가짜뉴스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는 파급력이 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가 퍼진 게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사상이나 돈 그리고 여자문제와 관련된 가짜뉴스는 참으로 치명적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본인이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경우가 너무도 허다하고 그 피해가 엄청나게 크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일반국민의 가짜뉴스에 대한 인식’을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해당 내용 중에 왜곡된 가짜뉴스에 관해서 응답자의 40.1%만이 가짜뉴스로 인식했다고 한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잘못된 가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어 버린다는 것에 그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에 대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종북 좌파라는,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뉴스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온갖 왜곡된 정보를 서로 베끼고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는 범죄행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상처와 피해를 주는 무서운 범죄행위이다. 목회의 근간을 흔들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최근 당사자가 참다못해 적극 해명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동성애를 단 한 번도 옹호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종북 좌파 몰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며 종북 좌파가 아님을 강하게 밝혔다. 그의 설교 영상을 보면 몇몇 청년이 나가는 경우가 생겨도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가짜뉴스의 피해는 너무도 크다. 이미 퍼진 가짜뉴스를 과연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진실이 밝혀졌더라도 가짜 정보의 속성상 모든 잘못을 다시 완벽하게 주워 담고 정확하게 수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짜뉴스는 어느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도 총회장을 비롯해 앞장서 일하는 이들이 무차별적 폭격 대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소한 교계에선 가짜뉴스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우리 교단도 가짜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가장 진리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학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각종 사건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실정이다. 가짜뉴스의 근원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을 악용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더욱 비열하고 악하다. 이제는 가짜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근거 없이 확인 안 된 것을 퍼 나르기만 해도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에서 정부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목적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해당 뉴스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며, 특별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재미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도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게 사회법이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유튜브를 통한 공격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서 정직해야 한다. 교계가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기사와 영상에 따라 흔들려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로 인해 상대방에게 엄청난 상처는 물론 회복 불가능 상태로 몰고 가는 경우가 참 많다. 가짜뉴스는 분명 큰 죄악이다. 특징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거룩성이다. 거룩성의 핵심은 정직함에 있다. 무분별한 정보 홍수 시대다. 누구나 영상과 글을 올릴 수 있는 시대를 살지만, 거기에 따르는 윤리 지침이나 실천 방안은 너무도 걸음마 수준이다. 지금의 천박한 가짜뉴스 전성시대에 우리 교단이 선제적으로 적극적인 가짜뉴스 퇴치 운동과 정보클린 운동을 펼쳐나가기를 바란다. 더욱 건강하고 생산적인 기독교 문화를 우리 교단부터 만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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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4
  • 정치 논쟁은 폭행과 살인을 부를 것이다
    탈무드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면 친구와 정치, 종교 및 돈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최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한국일보 2월 3일 인터넷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대전서부경찰서는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A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일 오전 2시 20분쯤 대전 서구 도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50대 B씨를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범행 직후 119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됐다. B씨는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경찰에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이 격해져서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범행 경위를 조사한 뒤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도 여야로 나뉘어 원수 사이가 됐다. 과거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우익이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현재 상황이 그렇다고 본다. 실제 극우는 지난달에 서부지방법원을 난입해 때려 부수는 폭거를 벌였다. 방화에 실패하고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제 폭도들은 사법부의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생을 망칠 것이다. 자기 정치 견해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이에 대해 논쟁하지도 말자. 그런다고 바뀌지도 않는다. 감정만 상할 뿐이다. 너무 정치에 매몰되지 말고, 우선은 헌법재판부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 대책이 없다. 국가를 위해서도 빨리 이 혼란이 종식되어야 한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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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3
  • 【왈가왈부】 헌재의 판결만 기다린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해 말이 많다. “죄가 있다”, “죄가 없다”는 말이다. 단톡이 뜨겁고, 포털 기사에 대한 댓글이 뜨겁다. 글 하나로 친구가 원수가 되고, 단톡이 폭파된다. 정말 전국이 난리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윤석열에 대한 최종 판단은 헌재에서 결정 난다. 그 결정에 따라 다시 대통령직으로 복귀하든지 아니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 것이다. 그때까지 뭐라 떠들든지 아무 소용 없고, 쓸데없다. 아무리 어떤 주장을 한다 해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논쟁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다. 나 또한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생각과 주장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된다. 현 정권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은 헌법재판관들이 쥐고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일 것이다. 원치 않는 대통령들이 있던 많은 지난 세월을 살아왔는데 2년 반 정도 못 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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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0
  • 총신 40년 戀歌
    취재가 있어 총신대학에 왔다. 학교 앞 버스에서 내리며 교문을 보니 입학한 지 40년이 된 게 떠올랐다. 나는 1985년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날은 2025년 1월 20일이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입학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총신 캠퍼스는 많이 변했다. 이전 종합관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합관이 들어섰다. 주로 수업을 들었던 신관은 리모델링해서 완전 새로운 건물이 됐다. 그리고 교련 수업을 받았던 뒷동산에는 제2종합관이 들어섰다. 4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올 일이 없었는데 15년 담임 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로 전업(?) 했기에 취재차 모교를 종종 방문한다. 40년 세월 속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입학 동기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신학과에 100명이 입학했으니 참 적은 숫자였고, 총회적으로 활동하는 동기는 거의 없다. 앞으로도 취재차 총신에 올 일이 있겠지만 올 때마다 재학시절이 떠오르고 추억도 떠오를 것이다. 그 당시 학교 교수진에 대한 불만, 학내 문제, 총회 문제로 인한 수강 거부 등등 총신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이 흐르니 모교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 때와 달리 자유분방한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모교 총신이 늘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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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0
  • 【기고】 사울의 예배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급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세는 기울었고 병사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이제 곧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흩어지는 병사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줄 하나님께 엎드렸다. 하지만 사무엘은 책망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새로운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사울에게 있어서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성공”이었을 뿐이다. 그 성공이라는 우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에겐 하나님도 수단이었을 뿐이다. 위급할 때 적절하게 사용해 먹을 수 있는 수단 말이다. 다급할 때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삼상 28:7-11). 사울에게는 무당이든 우상이든 상관없었다.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찾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지,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울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3계명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해버리고 모독하는 일이었다. 예배가 때로는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이 예배인 줄 알고 도와준다. 나무도 가져와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준다. 옆에서 짐승도 잡아준다. 그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하지만 예배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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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6
  • 무속은 힘이 쎄다
    무속(巫俗)은 “무당과 관련된 풍속”이라고 설명한다. 모처럼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갔다. 좌우를 보니 여전히 무당집이 건재하다. 나는 동성중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 동네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으로 배정됐다. 버스를 타고 오가며 미아리 고개를 넘는 동안 3년간 지겹게 점집들을 봤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윤석열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등장했다. 구약 성경을 다 외운다는 김건희 씨는 무속에 심취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웬만한 무당보다 자기가 쎄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천공, 건진법사 등등이 등장하고, 여론 조작에 앞장선 명태균은 자기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주도한 전직 장성 중에는 점집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 이런 무속인들이 난리를 치니 어지럽다. 이 시국에 한국교회와 목사, 장로, 신자들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결코 변하지 않을 각자의 신념과 생각이 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자신과 무고한 후대가 져야 할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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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진리를 위해 싸우라!
    옳든 그르든 담임목사로 인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 가지 반응이 있다. 찬성, 반대, 관망, 회피이다. 담임목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매우 강하게 반대운동을 벌인다. 담임목사를 내쫓기 위해서이다. 이때 대부분의 성도는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정도 사태 파악을 하면 분란에 대해 찬성, 반대, 관망, 회피하게 된다. 담임목사 반대자들에 대해 찬성하고 동조하거나, 반대자들에게 반대하고 각을 세우고 대립하거나, 사태를 관망하며 반대나 찬성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시끄러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회피를 한다. 이때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찬성 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싸워야 한다. 물론 주먹다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 측의 주장에는 주장으로, 반대 측의 고함에는 같이 고함으로 맞대응해야 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자들을 규합해 담임목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나도 2020년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주는 권사가 있어서 그나마 7개월의 갈등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권사는 나를 지지하고 반대자들이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일당백으로 싸워줬다. 그러나 더 이상 반대 교인들을 목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목회를 중단했고 그 권사도 다른 교회로 옮겼다. 내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여러 교인이 함께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반대 측의 주장이 틀리고 잘못됐다면 담임목사와 교회 그리고 나머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도하며 진리의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 반대자들은 과격할 수 있다. 그래서 맞대응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관망하거나 회피하게 된다. 반대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이 반대자들의 전략이다. 분란 중에 있는 교인들이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 교회와 담임목사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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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1
  • 원로 목사도 해임될 수 있다
    목사가 나이가 들어 목회를 마무리하면 은퇴 목사가 되거나 원로 목사가 된다. 총회 헌법 4장 4조 “목사의 칭호”에 보면 은퇴 목사는 “목사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며, 원로 목사는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생활비를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과반수로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정년이 지나면 노회의 언권만 있다”고 설명한다. 한평생의 목회를 마무리할 때 원로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다. 우선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장기 목회를 무난하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원로로 예우할 마음과 형편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원로 목사에 대한 부담으로 50대 이상을 담임으로 청빙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목회가 20년이 되어갈 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임케 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교회가 여력이 없어 원로 예우를 못 하는 경우들도 많다. 예우는커녕 퇴직금도 없어 후임자가 전임자의 은퇴금을 갖고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 교단지 기독신문 담임목사 청빙 광고에 전임자 퇴직금을 갖고 와야 한다는 노골적인 문구가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장기 목회 후 월 생활비나 혹은 넉넉한 은퇴자금을 일시불로 받고 물러나며 원로 목사라는 칭호를 갖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이후 삶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원로 목사 “해임”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방의 한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킨 원로 목사가 해임됐다. 이처럼 원로 목사도 문제가 있을 때 해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원로가 되기 전 드러나지 않은 잘못이 이후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원로로 추대된 이후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은퇴 목사야 원로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원로 목사라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원로 목사는 다르다. 그러므로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흠결이 있다면 시무 기한 조건이 된다 해도 본인 스스로 원로 목사가 안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후 본인의 잘못이 드러나 원로 목사 “해임”되는 수치는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 목사가 되었다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원로 목사는 특권이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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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9
  • 교회 분란 때라도 거짓말하지 말라
    2020년 55살, 담임목회 15년 만에 위기가 왔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나를 내보낼 모의를 했다. 이들을 설득해 보려고 7개월을 끌다 결국 목회를 접었다. 그 교회는 총회장을 역임한 원로목사가 있었는데 10여 년 만에 후임 담임목사 4명이 모두 중도 사임당했고, 나도 15년 만에 사임당했다. 이때 그들은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교회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나는 그 당시 용산에 위치한 교회의 평수도 몰랐다. 이 일 이후 알아보니 대지가 300평이었다. 그 당시 공시지가가 평당 2천만 원이니 토지 가격은 60억이었고 실거래가로 하면 100억이 넘을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무엇보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먹으려고 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내보내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목회할 의욕이 나지 않아 옳고 그름을 떠나 주변 목사들의 만류에도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십계명 중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교회 분란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판을 친다. 현재 분란을 겪고 있는 어느 교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대자들은 목사가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100억을 담임목사가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도 하고, 교회 토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유용하기 위해 “목사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다는 말인가? 한 번의 거짓말이라도 들통나면 나머지 모든 주장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분란이 일어나면 신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혈기를 부리고 고함을 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상에 있는 교회는 불완전해서 원치 않는 분란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이미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며 마귀 짓을 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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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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