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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소위 “스타” 목사 박영선, 김문훈의 몰락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몰락했다. 한때 한국교회를 들썩였던 스타 목사였다. 박영선 목사는 내가 신학교 시절이던 80년대 신학생들을 매혹했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는 잊혀졌는데 최근 뜬금없이 개척교회 40억 요구 건으로 언론에 언급되다 결국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김문훈 목사는 교역자에 대한 욕설 녹음이 공개된 후 고신 교단 부총회장직과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감추었던 그들의 실체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한때 그래도 깊은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었는데 망연자실하다. 목사는 타종교와 달리 쉽게 팬덤이 형성되고 스타 반열에 오른다. 불교, 천주교에서 이들처럼 명성을 떨친 이들이 있었는가? 기독교는 설교 중심이다보니 설교를 잘 하는 자는 주목을 받는다. 과거 전병욱도 그랬다. 스타 목사의 이면과 몰락을 보며 다시한번 다짐한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지 말자.” 인간이란 잘 난 것처럼 보여도 다 그렇고 그러니 너무 높이지 말고 따르지도 말자. 그랬다가 이처럼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것이 없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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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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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세월은 빠르다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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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9
  • 【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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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2
  • 【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구굴은 무례(無禮)란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의가 왜 필요한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빨가벗고 살든,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놓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한 것이 있다. 나중에 좌석에 앉는 사람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자리가 비면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중간쯤에 앉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를 밀고 들어온다. 양쪽 사람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불편한다. 그런데 나처럼 가운데 자리에 앉을 때 양 편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리가 비면 산모를 위한 여성 좌석 옆에 앉는다. 이 자리에 산모가 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한쪽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좁은 지하철 좌석인데 겨울이라 모두 두꺼운 옷을 입어 더 비좁은데 제발 가운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앉지 마시기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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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 【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취재 가서 보리굴비를 먹게 되었다. 보리굴비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30년을 함께 산 내 반려자. 이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보리굴비 먹은 것을 말하고 보리굴비를 주문해 먹으라고 했다. 이때 아내 왈 “이제 보리굴비 별로 안 좋아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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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1

실시간 칼럼 기사

  • 【단상】 4개월 만에 북토크가 300 권이 됐다
    지난 7월 북토크가 250권이 되었을 때 “북토크의 호응에 감사드리며”라는 기사를 썼었다. 4개월이 안 되어 50권을 더 읽어 이제 300권이 됐다. 책은 늘 대출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 취재하러 갈 때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다니며 지하철, 버스에서 읽고, 집에서도 열심히 읽고 있다. 왜 읽는가?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읽는다. 물론 대단한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고 관심 있는 책을 주로 읽는다.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다. 딱히 다른 취미가 없으니, 책을 읽기도 한다. 물론 유튜브가 재밌기에 자주 보지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 앞으로 얼마나 더 책을 읽을지는 모르나 아마도 죽기 전까지 읽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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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 【단상】 20년 된 차의 폐차를 앞두고...중고차를 사려고 한다
    20년 된 차를 폐차하려고 한다. 얼마 전 받은 자동차 종합검사에서 불합격됐다. 앞바퀴 한쪽 캘리퍼가 고착되었는데 수리비가 재생 부품을 사용해도 70만 원 이상이다. 다른 쪽도 수리가 필요한데 문제는 하부 부식이 심해서 수리 기사가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권해 결국 폐차로 방향을 잡았다. 이 차는 담임 부임했을 때 교회가 사준 차였다. 당시 승합차가 없어 9인승을 구매했고, 15년 만에 나올 때 받을 비용을 차감하고 차를 받아왔다. 현재 16만 킬로 중반인데 더 타고 싶어도 탈수가 없다. 이 차는 현대의 대표적인 부식차이기도 하다. 조만간 폐차하고 새로 차를 사야 하는데 작은 차를 살려고 한다. 그동안 20년을 함께한 차를 폐차하려니 심난하다. 적당한 차를 구하려고 열심히 당근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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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단상】 나는 부자다
    내가 가는 세탁소는 집에서 멀지만, 가맹점으로 주로 수요일에 간다. 집 가까운 곳에는 가맹점이 없어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곳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수요일에는 7% 할인하기에 이날 이용하려고 한다. 겨울옷을 맡기러 세탁소에 갔는데 20벌 남짓하니 세탁비가 8만 원 이상이 나왔다. 비용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 세탁소 주인이 “그래서 드라이 맡기는 사람은 부자”라고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돈 없는 사람은 드라이도 맡기지 못하고 집에서 그냥 세탁해 입는다.”라고 했다. 집에 와 아내에게 말하니 “그래서 우리도 가능하면 집에서 세탁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처음 알았다. 어쨌든 나는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는 부자다. 이것도 부자인가? 세탁소 주인이 부자라고 하니 부자인가 보다. 부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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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단상】 기록이 사라졌다!
    요즘 카톡이 말이 많다. 본인들의 이익 창출을 위해 소비자에게 불편한 업데이트를 단행했다. 이로인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이들은 이전 상태로 돌려놓겠다고 했다가 방법이 없다는 말도 하고 있다. 업데이트하지 않으려고 거부를 눌렀는데 카톡이 아예 삭제됐다. 멘붕이었다. 다시 앱을 내려받으니 다행히 목록은 살아났으나 그 안에 기록은 사라졌다. 그동안 여러 사람하고 오갔던 대화가 다 날아갔고, 내 카톡 안에 모아둔 자료들이 사라졌다. 내가 앱을 삭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또한 노트북은 자동으로 카톡을 업데이트시켰다. 결국 카톡 업체는 사기업이다. 이윤 창출이 목적이고 이들은 막대한 자산을 갖고 있으며 카톡을 토대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야 어떻든 말든 자기들 마음대로 카톡을 변경했다. 그동안 국가 정부나 개인들이 얼마나 카톡을 이용하고 의지하며 살았던가? 국가가 공익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닌 사기업의 카톡을 너무 믿고 의지했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독점이다 보니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기업의 사적 이익 앞에 나는 자료를 상실하는 큰 손해를 봤다. 어디다 하소연 할 수도 없다. 다른 경쟁 업체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기업의 이런 오만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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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3
  • 【단상】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기자로서 어떤 기사를 작성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또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게 되도 여러 사람들이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대한 조회수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생각지 않게 많은 조회수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종종 놀라게 된다. 결국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늘 열심히, 성실히 기사를 쓰고 동영상을 만들어 올려야 한다. 심어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형태의 글을 작성해 올린다. 또한 적게 본다고 해서 낙심할 것도 없고, 많이 읽었다해서 우쭐할 것도 없다. 독자들의 취향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몇 명이라도 기사를 보고 좋은 영향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늘 배우는 자세로 앞으로도 계속 기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감사한 것은 기사를 만들어 놓고 단톡에 공개하지 않아도 본지 사이트에 와서 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앞으로 단톡에 공개하지 않고 쓰는 기사가 많을 것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종종 빛과소금뉴스 사이트를 방문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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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단상】 호평 · 악평 · 혐평...생각의 다양함이 주는 불편
    박찬욱 감독의 최신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개봉 13일째인 오늘 10월 6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참 재밌었다. 정말 블랙 코미디였다. 구글은 블랙 코미디에 대해 “죽음, 질병, 폭력, 범죄 등 무겁고 금기시되는 소재를 익살스럽게 다루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한 장르로서 관객에게 웃음뿐만 아니라 불편함과 진지한 생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특징을 보인다.”라고 설명한다. 이 영화는 그런면에서 100% 블랙 코미디이다. 실직한 주인공은 재취업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방법이 익살스러워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함께 본 아내나 둘째 아들도 재미있게 봤다고 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와서는 유튜브로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여러 건 봤다. 그런데 어느 영화 예매 사이트에 가니 이 영화에 대해 악평을 넘어 혐평(영화를 혐오한다는 말로 그냥 만들어 본 말이다)하는 댓글이 많았다. 같은 영화를 보고서 느끼는 것이 참 다양하다는 것에 당황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은 모두 재미있게 봤는데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편차가 하늘과 땅이라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각자 생각의 자유가 있으니 그렇게 혐평하는 것도 자유이나 정말 어떤 사람의 댓글처럼 한 시간 만에 극장을 나올만큼의 영화였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래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직업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감독이란 직업은 남의 돈을 투자 받아 모은 수억에서 수십억 혹은 수백억으로 영화를 만들어 관객을 불러모아 입장료를 받아 수익을 내야하니 얼마나 힘들까? 이 영화의 수익 분기점은 170만이라고 하니 다행히 수익 분기점을 넘어섰다. 그래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1000만명은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말이다. 영화에 큰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이처럼 호불호가 극명한 감상평을 보며 생각의 다양함을 본다. 정치를 봐도 그렇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당선인은 천728만여 표를 얻어 49.42%로, 41.15%에 그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를 8.27%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두 후보 사이의 표차는 289만 천여 표였다. 이 당선인 전 역대 최다 득표자는 지난 20대 대선 당시 천639만여 표를 받았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래도 어쩔건가? 각자의 생각은 자유이니.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사는게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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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6
  • WEA 찬반 팩트 체크(4)-문병호 교수의 WEA 관련 논문 체크
    2025 WEA 서울총회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10월 27 - 31일).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통해 세계 교회를 섬기고 복음화에 앞장설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여전히 잘못된 주장들이 있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팩트 체크를 해보고자 한다. WEA 찬반 팩트 체크(4) 문병호 교수의 WEA 관련 논문 체크 문병호 교수는 신학지남 제88권 1집(통권 제347호, 2021)에 “WEA 신복음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활동 비판: WCC에 편승하여 로마 가톨릭과 신학적 일치를 추구하고 포용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로 나아감”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는 본 논문 3장과 4장의 내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체크해 보기로 한다. 본 논문 3장은 “로잔회의와 로잔언약(1974년): ‘복음화’의 명분으로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의 로마 가톨릭과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문호를 개방”으로 되어 있다. 3장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문 교수의 논리의 핵심은 “로잔언약이 복음화를 명분으로 가톨릭과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함께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우선, 문 교수의 주장과 논리에 의한다 하더라도 가톨릭과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문호를 개방한 곳은 ‘로잔’이지 WEA가 아니다. 문 교수는 로잔이 문제가 있다고 해 놓고는 갑자기 그 문제를 WEA의 문제로 둔갑을 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제110회 총회에서는 “2024년에서 있었던 로잔 서울총회에 큰 문제가 없었으며 신학적으로도 우려할 바가 없다”라고 결론내리며 오히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교단이 앞으로는 로잔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결의를 한바 있다. 그렇다면 로잔이 문제가 있다는 논리도 부정되었다고 볼 수 있고 문 교수만이 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문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WCC의 토마스 중앙위원회 의장이 “그리스도 중심의 혼합주의”를 제시했다고 했고, 가톨릭이 제2차 바티칸 회의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구원이 있다”라는 이른바 ‘보편구원론’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위 두 주장을 모두 WEA와 억지로 연결시키려 한다. 사실 위 두 주장은 각각 WCC와 로마 가톨릭이 한 주장인데 이를 마치 WEA가 동의하고 표방한 것처럼 둔갑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WEA의 신학위원장이었던 부루스 니콜스가 1975년에 WCC 나이로비 총회에 업저버로 참여한 것을 마치 WEA가 WCC와의 종교혼합주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업저버는 결의권이나 발언권이 없는 그야말로 참관인 성격인데 무슨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인지에 대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WEA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공회-로마 국제위원회’의 활동도 마치 WEA가 함께 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부분도 발견된다. 더 심각한 것은 문 교수가 현재 WEA 부의장인 힌클만 박사가 2021년에 “복음주의 신학”(Evangelcal Review of Theology 45/1)에 기고한 논문 “The European Alliance An Historical Sketch” 15-22페이지에 문 교수가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이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 공표한 자기들의 ‘열린 입장’이 WEA의 ‘복음화 개념’에 부합한다면서 그것을 수용할 것을 압박”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고 각주를 표시했는데 힌클만의 논문을 살펴보았으나 그러한 근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힌클만의 논문을 보면 EEA(유럽복주의연맹)는 WCC의 신학에 대해서 우려하며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표명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논문은 당시의 유럽복음주의연맹(EEA)의 현실적인 주제들인 재정문제와 선교 혹은 청년 선교 등에 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EEA가 포루투갈,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문 교수가 인용했다고 하는 힌클만의 위 글에는 문 교수의 주장과 관련하여 ‘로마 가톨릭’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문 교수는 로마 가톨릭이 WEA에 대하여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일 것을 압박했다는 근거로 이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지는 문 교수가 자세히 답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 교수가 인용했다고 하는 원문들에서 문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여러 곳에서 제기된바 있다. 그렇다면 문 교수는 근거를 정확히 제시하지 못한 주장을 왜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문 교수가 근거 없는 주장을 마치 어떤 근거가 있는 것처럼 표시했다면 이는 심각한 연구 윤리 위반이 된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한편 제4장은 “복음주의-로마 가톨릭 선교 대화(ERCDOM)(1977-1984): 양시론을 내세워 로마 가톨릭 신학을 사실상 합리화”이다. 여기서 문 교수가 제시한 “복음주의-로마 가톨릭 선교 대화(ERCDOM)”라는 문서는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복음주의권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들이 모여서 다년간 서로의 신학의 중심 내용을 제시하고 서로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병렬구조로 나열한 문서이다. 문 교수가 이 문서에서 인용한 것처럼,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공동체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라고 주장하나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인류의 죄가 보편적이듯이 인류의 구원도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나,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은 보편적이지 않고 선택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제한속죄 개념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양시론에 해당한다고 보는지 의문이다. 양시론은 둘 다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입장과 복음주의자들의 입장 모두를 WEA가 받아들인다면 양시론 이지만, WEA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만을 수용하고 있고 로마 가톨릭만의 입장은 거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 바로 이 문서의 특징이다. 더구나 “복음주의-로마 가톨릭 선교 대화(ERCDOM)”(1977-1984)의 앞 부분에는 “합의된 문서가 아님”(p. 5)을 분명히 했고,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음”(p. 5)도 명시했으며 “양쪽이 서명도 하지 않았다”(p. 5)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확정적인 것도 아니다”(p. 5)라고 했다. 이런 신학적 대화를 정리한 문서를 가지고 그것도 내용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해서 마치 이를 근거로 WEA가 신복음주의라고 덧 씌우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문 교수의 본 논문의 3, 4장을 중심으로 그의 주의 주장에 대한 팩트 체크를 해 보았으나 문 교수의 주장에는 근거가 미약하거나 전혀 없거나, 아예 근거 자체를 왜곡시켰다는 의혹이 있다. 이를 근거로 WEA를 혼합주의, 종교통합, 에큐메니칼에 한층 더 다가선 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문 교수 외에는 어떤 신학자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신학부도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문 교수의 주장이 사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는 문 교수의 논문 5~7장에 대해서 팩트 체크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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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6
  • 정책 총회를 위한 첫걸음, 회록 채택 · 전문가 위원 배치
    제110회 장봉생 총회장의 정책총회가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난산을 통해 출산한 110회 총회가 속도전을 내고 있다. 우선 역대 최단기간으로 총회회록을 채택했다. 회록 채택은 총회를 위한 첫걸음이다. 이것이 늦춰지면 그만큼 총회 전반 활동이 더뎌진다. 그런 면에서 회록을 이미 채택했다는 것은 출발을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책 총회의 효율성을 위해 총대들의 전문성을 살려 위원회에 배정한다. 이를 위해 총회는 전 총대를 대상으로 경력 사항과 전문 분야를 조사하는 온라인 설문을 진행해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서기단에서 1차로 위원을 선정하고, 오는 4차 총회임원회에서 인선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것은 참신한 시도이다. 전국 교회와 노회를 대표하는 1,600여 명의 총대들은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능력과 희망에 맞게 위원회에 배정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장봉생 총회장은 “임기 끝날 때 좋은 평가를 받기 원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합동 교단에 속해 있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런 분명한 목표가 있기에 총회를 바르게, 모두를 유익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관심과 기도를 통해 110회 총회를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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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2
  • 【단상】 총회장은 아무나 하나?
    가수 태진아의 노래 중에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있다. 오래전 아는 분의 목사 위임식에 갔는데 축사하시는 분이 태진아의 이 노래 음을 따라 “담임은 아무나 하나” 하면서 축하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부목사였기에 “그렇구나! 담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총회장도 마찬가지다. 총회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총대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내가 중학생 때 세례를 주었던 목사님은 총회장이 꿈이었는데 그만 중풍으로 인해 목회를 중단하시게 됐다. 결국 오랫동안 꿈꿨던 총회장의 꿈도, 목회도 날아갔다. 건강에 문제가 없으셨다면 아마 총회장의 꿈을 이루셨을 것이다. 이전 노회의 어떤 목사님은 부총회장에 두 번 떨어졌는데 또다시 도전하시려고 하다가 몇 년 전 뇌출혈로 소천하셨다. 이처럼 총회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 면에서 110회 총회장인 장봉생 목사는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임기가 짧다는 것이다. 임기가 1년이라고 하지만 목장기도회가 끝나면 임기 후반에 돌입한다. 그래서 목장기도회 폐회 설교는 부총회장이 한다. 장봉생 총회장은 110회 총회의 혼란으로 인해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총회장에 추대됐다. 하루를 손해 봤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신문에 의하면 역대 최단기간에 총회회록을 채택하고 110회기 주요 일정도 정했다고 한다. 우선 내년도 목장기도회는 5월 11일부터 13일까지 용인제일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후부터는 총회장 임기 후반이기에 주로 여기까지 계획을 세운다. 감리교 감독 회장은 임기가 4년이다. 뭘 해볼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러나 합동 교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교단은 총회장 임기가 1년이다. 그것도 온전한 1년이 아니다. 장봉생 총회장은 다른 회기 총회장보다 하루 늦게 되었으니 더 부지런히 해서 오랫동안 꿈꾸고 계획했던 정책들을 잘 펼치는 110회 총회장이 되기를 바란다. 꼭 성공적인 총회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성공적인 110회 총회, 성공적인 교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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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 【단상】 “어쩔 수가 없다”....“그렇지 않던데”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봤다. 재밌게 봤다. 정말 재밌었다. 블랙 코미디다. 실직한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에 있는 사람을 제거하고 경쟁자가 될 가상의 입사 지원자들 두 명도 제거한다는 내용이다. 내용이나 연기나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들 몇 가지. 첫째, 해고는 살인이다. 평안했던 가정에 가장의 실직은 위기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해고는 늘 있는 일이다. 대기업 등은 그나마 대우가 좋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회사는 그렇지 못하다. 둘째, 재취업은 쉽지 않다. 특히 산업의 흐름과 방향이 변할 때 이전 사람들은 도태된다. 요즘은 자동화, 무인화가 대세이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이다. 앞으로 그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런 가운데 생존하려면 자기만의 주특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해고 시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제지업에 종사했다가 해고됐는데 여전히 그 일에 미련이 있었다. 한 사람은 해직 후 폐인이 됐고, 다른 사람은 전업했고, 주인공 이병헌은 하던 일로 돌아가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 총 맞아 죽는 해직자와 이병헌의 부인들은 남편들이 다른 재능을 살려 취업할 것을 조언하나 듣지 않는다. 부인들의 말을 들었다면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나 그들은 오랜 기간 해왔던 일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 하며 고집을 피우다 죽거나 살인자가 된다. 나도 어찌 보면 해직자였다. 담임 목회 30년을 할 수 있는 40살에 위임 청빙을 받아 갔는데 그만 15년 만에 나오게 됐다. 아마 싸웠으면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 내가 병들어 죽을 것 같아 7개월 만에 정리하고 나왔다. 그리고 어쩌다 기자가 됐고, 인터넷 신문을 창간했다. 그래서 영화가 남다르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목은 “어쩔 수가 없다”다. 즉 주인공 이병헌이 살인자가 된 것은 해고당했기 때문이고 가정을 위해 재취업 하기 위해서는 살인도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쩔 수가 없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다. 물은 흐르다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보고 안 되면 물이 모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넘어버린다.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은 그래서 수긍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수긍이 안 되기도 한다. 삶에는 여러 갈림길이 있다. 굳이 한 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다른 길의 인생을 사는 것도 재미있다. '어쩔 수가 없다'가 변명이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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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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