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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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선교단, 2025년 추석 성경 통독·구국기도회 모여
    성경 통독과 암송을 통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요한선교단이 주최한 2025년 추석 성경통독과 구국기도회가 10월 9일 강동구 아리수로에 소재한 참사랑교회(김명주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예배, 성경 통독과 암송에 집중하며 은혜 받는 시간을 가졌다. 김동진 목사가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천국에 들어간다. 아울러 행한대로 상 주신다고 하니 상 받을 일을 이 땅에서 많이 해야 한다.”라고 인사말했다. 장소와 식사 등을 제공한 참사랑교회 김명주 목사가 “한글날에 우리 글로 마음껏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시작했으면 한다.”라고 환영 인사말했다. 시작 예배는 김동진 목사의 인도로 구재길 장로가 기도, 인도자가 대하 17:3-11을 봉독, 서원실 찬양사가 찬양했다. 이영형 목사가 ‘여호사밧의 말씀 사랑’이란 제목으로 “첫째,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먹어야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고,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지켜야 된다. 둘째,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기에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통독을 해야 한다. 위기 때 암송한 말씀이 생각나면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래야 통독과 암송이 필요하다. 셋째, 여호사밧이 말씀을 사랑한 결과 하나님께서 나라를 지켜 주셔서 강대하게 해주셨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이명숙 목사 가정이 특송, 강영준 목사가 구국기도 후 천귀철 목사의 축도로 시작예배를 마쳤다. 성경 통독, 암송 1 성경 통독, 암송 2 성경 통독, 암송 3 성경 통독, 암송 4 이어 순서대로 성경을 연속해서 읽고 암송하는 은혜의 시간을 갖고 참사랑교회에서 대접하는 애찬을 나눈 후 계속해서 오후까지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예배는 김동진 목사의 인도로 이견수 목사가 기도, 임현영 목사가 눅 10:25-28을 본문으로 ‘행하라 살리라’란 제목으로 “암송과 통독을 통해 은혜와 복을 누리자.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많은 복을 누림에 대해 감사하며 살자. 그리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자.”라고 설교 후 정진희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추석 연휴 성경 통독 · 암송 시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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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관
    2025-10-09
  • 【북토크】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경쟁력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전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도태는 분명하다. 세상의 흐름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평생 공부하고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각자의 역량을 키워야 생존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경계할 것은 학력만이 전부인 이력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 이로운 것을 주는 행위를 사회적 성취라 정의한다면, 배우는 이유는 깨치고 얻은 지혜를 모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력은 사회적 성취의 단계에서 필요한 준비일 뿐, 그 자체가 성취라 보긴 어렵습니다. 학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치열하다 해(p. 72)서 학력 그 자체를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는 돌려줌 없는 이기적 인간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학벌을 성취라 생각하고 안주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내 그것을 잊고 겸허하게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권위의 명패를 벗어 던지고 일신하며 나아가는 이들에게 학위의 끝인 졸업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p. 73).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대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유니섹스unisex'라는 말은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표현으로 진화합니다. 유니섹스는 '내가 옷을 만들었는데 남성도 여성도 입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젠더리스는 '성 구분 자체를 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결국 생각의 변화와 연결되기 시작하여 이전의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거부됩니다. 과거에는 영화 〈300〉의 주인공들처럼 근육과 활동성이 뛰어난 남성을 이상적으로 규정했다면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화장품 광고 모델, 색조 화장 전문가로 남성이 등장합니다. 여성이 근육을 만들고 뽐내는 것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역할에 대한 족쇄가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꺼려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젠더리스라는 말조차 구분을 전제로 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표현은 끊임없이 현행화해야 합니다. 관행적 표현과 차별적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언어를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익숙한 표현일지라도 변화한 사회에 맞추어 낯설게 바라보고 세심하게 언어를 재정의 할수록 계속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p. 85). 대학 졸업을 앞둔 어떤 청년들은 부모가 '너 뭐 할건데?'라고 묻는 순간 당황해한다고 합니다. '대학을 가라고 한 것은 부모님인데 왜 나에게 묻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입니다. 이미 부모의 발 빠른 정보력으로 중국어과에 간 선(p. 160)배들은 조선족 중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통번역 대학원에도 태어날 때부터 이중 언어를 사용한 네이티브들이 입학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광경이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간 결과입니다. 부모들은 먼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는 척해야 하는 책무에 놓여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나도 잘 몰라, 함께 고민하며 탐색해 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시 과정과 사교육은 고도화되었는데 입시 후의 대학 생활과 진로에 대한 논의는 유예되었습니다. 행위는 전문화되었으나 목표는 전문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과거와 현재의 단서만으로 미래를 단정 지어 진로와 교육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와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변화에 맞추어 다음 세대의 기여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p. 161). '인재는 영입하는 것이지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리더의 역할 변화도 분명해집니다. 이제 작업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고 작업 분배와 공정 점검, 결과의 취합만 맡는 전업 관리 모델은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업 공정이 시스템에 의해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보일수록 '무임승차자'와 '군림하는 사람'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리더에게는 더 깊은 통찰력과 더 높은 전문가적 자세가 요구됩니다. 핵개인들이 함께 일하는 동료 의 전문성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수록, 훈수만 두고 결과물만 취하려는 구성원이나 '20년 차 나이테'를 관록의 증거로 들이대는 관리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회사의 문화와 사규도 핵개인들의 성향을 반영해 계속 갱신되는 중입니다. 이제 리더와 구성원은 서로의 재능과 역할을 어떻게 조합하고 협력할지, 새로운 상호작용의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과장만 달면 아무 일도 안 했는데." 20년 차 부장님들의 하소연은 이제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입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먼저 경험해 본 자가 유리할 수 있지만,(p. 179) 환경 변화가 빠르면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생성형 Al로 빠르게 학습하며 새롭게 적응하는 구성원들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상급자의 말을 소음으로 믿고 거릅니다. 이제는 각 개인의 축적된 경험보다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러니 '나는 20년 동안 나만의 경험을 쌓아왔다'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혜의 원료는 네트워크상에 있기에 딱딱한 권위의 액상화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서사의 핵심은 목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내가 이 회사에 20년을 다녔는데...,' '1 만 직원들과 함께 10조 매출을 냈는데' 같은 말에 감동적인 리액션을 해줄 인구 집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표정입니다. 수치화된 업적만으로는 존경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때그때 여건과 환경 변수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만의 서사입니다.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기여가 얼마만큼 치열했는지. 그 맥락이 있다면 꽤 괜찮은 선배 직업인으로 마땅한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과거의 권세를 그리워하는 노(p. 180)회한 직장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p. 181). 통상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품이 많이 팔리면 마진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급량을 늘리려 합니다. 시장 경쟁으로 인해 마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양적 팽창으로 규모를 늘려야만 성장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엔드 시장은 일반 시장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움직입니다.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는 마진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넬은 매년 가격을 올리고, 올릴수록 더 잘 팔립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선망입니다. 똑같은 산업에서 값이 갈수 록 오르는 물건과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물건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물건을 사고 싶습니까? 하이엔드는 개별성과 고유성이 교차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기업도 개인도 여기서 돌파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량을 만들고, 단가는 높이고, 세계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p. 197). 이연된 보상, 불공정한 거래 효도가 대를 이은 보상의 체계라면 그 보상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도 궁금합니다.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처럼 기대 수명이 70세가 안 되던 시기라면,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20년 동안 받은 양육의 은혜를 부모의 60세 이후 갚아 나가는 것이 꽤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부양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두세 명 이상 존재했기에 1인당 모시는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1990년 이후 출생률이 1.x 명대를 지나 이제 0.x명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장수의 축복은 기대 수명 100세 시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자식이 두 분의 30년이 넘는 여명을 책임져야 한다면 60(p. 221)년의 돌봄이 책무로 다가오는 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생존하시면 한 명의 젊은이가 6명의 노인을 돌봐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20년 양육의 되 갚음이 산술적으로는 누계 100년 이상의 돌봄으로 길어질 터이니 효도란 다음 세대에게는 불공정한 거래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연된 보상'입니다. 부모의 은혜는 하늘과 같기에 다 갚을 수도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하기에 한참 후 부모의 삶이 쇠약해졌을 때 보은합니다. 스승의 은혜 역시 너무 크기에 카네이션을 다는 것만으로는 갚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배의 은혜 역시 후배에게 베품으로 갚아 나갑니다. 이처럼 이연된 보상은 지금의 상하관계가 지속적으로 구조화되길 희망하며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도록 작동합니다. 연공서열과 기수 문화 모두 이런 이연된 보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유동성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이 보상 체계에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경력의 연한이 짧은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시장 가치에 맞는 성과급과 급여 현실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의문을 반영합니다(p. 223).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한쪽에서는 '오래 다니면 이익을 보니 당신도 수혜자다. 그러니 기다려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좋은 이야기지만 난 곧 그만둘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현재의 환경과 역학이 항구적이라면 이 전제의 수혜는 믿을 만합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성장과 세계화, 지능화와 글로벌화의 무한 경쟁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 어떤 약속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믿지 못하니 '즉각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도날지도 모를 어음 말고 현금을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p. 224).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큰딸의 희생 서사도, 친정 어머니의 도우미 역할도 정당한 대가와 세세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고마워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이나, 미안해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라는 마음의 신호입니다. 이러한 '돌봄 과도기'의 핵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p. 236)요? 각자 독립체로 스스로를 관리해 폐 끼치지 않는 사회가 좋은 것인지, 적당한 민폐로 서로의 정이 관계 자본으로 쌓이는 사회가 건강한 것인지 그 정도를 합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삶도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이나, 내 삶이 누군가를 돌보기 위한 자원으로 인식되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현재 극단적인 출생률 저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집단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라도 생로병사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공적 시스템'으로 세밀하게 설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대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립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지원과 협 력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효도의 종말이 인륜의 저버림이 아니라 준비된 사회의 안전판이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각자가 모여 더 크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본권이 될 것입니다(p. 237). 늙는 모습도 천차만별 일상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만 보아도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31세 이후에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뇌 과학 분야의 연구가 있습니다.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10대와 20대에 들었던 음악을 나이 들어서도 듣습니다. 새로운 취향을 탐색하는 호기심에도 노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완고함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낯선 것을 수용하려는 적극성이 줄어듭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관성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p. 240). 지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입니다. 나이를 기반으로 선을 긋고 구분 짓기를 반복한다면 각자가 서 있는 삶의 토대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생애주기에 대한 적응은 어떤 연령대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래가고 함께 가는 공존을 위한 전제는 타자화를 멈추는 것입니다(p. 259). 선배보다 선구자가 되어야 한 분야 전문가가 갖는 권위는 어느 분야든 예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의 정점인 메이저리그로 가고자 달렸다면, 이제는 자기 마당에 차린 아틀리에에서 장인으로 살기를 꿈꾸는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세일즈를 해야 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팔아야 할까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trative'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무의 나이가 그러하듯 서사는 결코 급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진정성으로 만들어집니다(p. 286).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맨 앞에 있다면, 먼저 최대한 많이 고민해 본 것이라면, 그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야 산의 높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p. 297)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유성과 진정성의 단서가 내가 오랫동안 쌓아둔 내러티브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필수 전제가 됩니다(p. 299). 상호허겁의 평형 인생은 짧고 자신의 삶을 형벌처럼 받아들일 이유는 없(p. 318)습니다. 언제든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으며 꾸준히 자신의 삶을 수정해 나가려는 용기는 이 시대에 큰 미덕이 됩니다. 이 용기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그만둔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입니다. 이는 직장을 그만두진 않지만 딱 주어진 만큼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그 이상의 기여는 하지 않겠다는 삶의 방식입니다. 직장의 의미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치 교환의 장소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문제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업을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소극적 태도는 자아 발전에 도움될 리 없습니다. 직업에서 얻는 경험과 자산이 자신의 자아를 발전시키는 연료로 쓰이길 바란다면, 명시적인 그만둠이 아닌 묵시적인 그만둠은 일종의 '수동 공격'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주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힙니다. 비전 없다고 여기는 직장에 계속 머물거나 서로를 갉아 먹는 인간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스스로 정한 반환점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고 그에 도달하면 그만두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만둘 수 있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불균(p. 319)형한 관계가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두어서 대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해지는 것 입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대안이 있을 때 상대는 나를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인용하여 '상호허겁(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저 사람은 갈 곳이 없다.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가 보이면 경쟁 서열 집단에서는 조심성이 사라집니다. 상대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선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p. 320). 지금까지 많은 개인들은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조직의 안정성이 나의 미래를 담보하고 그 안에서 나의 성장을 위한 단계별 기준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각자의 목표가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을 넘어서야만 타인에 의한 평가로부터 해방되고 시험 보는 꿈이 악몽처럼 평생을 괴롭혔던 과거와 작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넘어 나만의 지향점으로 새로운 가치를 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핵개(p. 333)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기려는 경쟁에서 내려오고 보여지는 것의 구속을 벗어던질 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위를 자신있게 인정하는 사 회로의 변화를 꿈꿔 봅니다(p.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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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10-09
  • 【북토크】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정의 의미는?
    제목처럼 이 책은 소위 정상 가족이라고 하는 가족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보여준다. 반면 이상해 보이는 가족이 실은 정상일 수 있음도 보여준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가정은 평안한가?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때린다는 주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항변 1순위다. 상담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 조사를 나가면 “내 자식 내가 가르치는데 웬 참견이냐" 라며 상담과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대 신고를 받아도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에 불성실한 경찰들도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p. 26)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의 답은 '상관있다'이다. 국가가 체벌을 금지하면 학대도 줄어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법으로 체벌을 금지한 나라에서 아이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당 평균 0.5명 미만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낮았다. 반면 체벌금지 법률이 없는 한국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이 10 만 명당 1.16명이었고, 29개국 중 세 번째로 높았다(p. 27).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p. 28)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p. 29). 매를 들고 무섭고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무수한 실증적 데이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체벌의 긍(p. 30)정적 효과는 그저 믿음뿐이고, 체벌의 부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은 워낙 많아서 이건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2016년에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 분야의 거의 '끝판왕' 이라고 할 만한 연구를 발표했다. 체벌과 관련한 50년치 데이터를 메타 분석한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도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보이게 될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아이들 16만 1,000여 명에 대한 데이터가 포함된 이 연구에서 연구진은 체벌의 정의를 '손바닥으로 아이의 엉덩이나 팔다리를 때리는 정도'로 한정했다. 보통 사람들이 학대라고 생각하 지 않는 정도의 체벌을 대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 인지 장애 등 부정적 행태 17개 중 13개와 연관된 행동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체벌을 '잠재적 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체벌과 신체적 학대는 동일한 수준으로 아이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체벌은 아이의 행동과 발달 측면에서 부정적 결과를 낳는 반면, 부모가 애초 아이를 체벌할 때 의도했던 목표의 달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p. 31). 방송도 마찬가지다. 2017년 1월 초 한 방송 프로그램에선 가수 김건모 씨가 어린 시절 '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방송은 "건모를 키운 건 8할이 엄마의 매", "매를 통해 전해진 엄마의 사랑" 등의 자막을 내보냈다. 가족 간 갈등을 단골 소재로 다루는 '막장 드라마'에선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모욕하는 장면들이 예사롭게 등장한다. '폭력도 정'이라고 바라보는 듯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회초리에는 "어른들에게 옛 향수를, 아이들에겐 참교육을 알려줄 좋은 선물이 된다"라는 홍보문구가 달렸다(p. 34).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 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p. 35). 사랑과 폭력 사랑을 폭력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하다. 체벌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에서도 그렇고 대학입학 시즌만 되면 군기잡기성 체벌이 문제가 되는 신입생 환영회의 일그러진 모습도 그렇다. 어쩌다가 '환영'의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나는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할 만한 것'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하위문화 중 첫손에 꼽을 만한 것이 부모의 체벌이라고 생각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부모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신체적 체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힘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불평등함을 인지한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힘과 권력에 따른(p. 39) 불평등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비교적 일상적으로 어린이에게 신체적 체벌을 가하는 지역에서는 부인이나 형제자매를 향한 과도한 폭력도 함께 관찰됐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폭력성의 역사를 살핀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체벌 찬성율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했다. 체벌을 용인하는 하위문화가 성인의 극단적 폭력도 부추긴다는 뜻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체벌 근절이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줄이고 방지 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p. 40). 유교문화권 특유의 가족주의?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참극을 자녀의 인권유린(p. 91)과 폭력, 범죄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동정하는 시선에는 가족주의가 진하게 배어 있다. 살해의 비윤리성보다는 가족이 운명공동체이므로 부모가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식의 목숨을 처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이처럼 부모의 무한 책임 정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여기에 자녀의 독립적 인격과 개별성은 없다. 그런데 이게 흔히들 가족주의가 강하다고 하는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공통된 현상일까?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동반자살'이라며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오야코 신주(부모자녀 동반자살)라 부르며 온정적으로 대해 왔다. 『유년기 인류학』에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심리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실려 있다.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 일본인 이혼 여성이 각기 생후 4세와 6개월 된 두 명의 자녀를 데리고 태평양에 투신했다. 그녀 는 구조됐지만 아이들은 익사했다. 엄마는 두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는데, 당시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받은 2만 5,000명의 서명과 함께 이 사건은 살인이 아(p. 92)니라 '부모자녀 동반자살'에 해당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들은 "그녀가 결코 악의를 갖고 아이들을 죽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호소했다. 아 이들을 '엄마에게 순종하는 아이' 정도가 아니라 엄마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행동조차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문화권 중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은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모두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마치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자발적 결정인 양 다루지만 중국 본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그런 사건이 발생해도 언론은 이를 한국•일본과 달리 '가족 자살'로 부르지 않고 '윤리참극'이라는 단어를 사용 한다. 중국 본토에서는 엄격히 살인을 강조하고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함부로 부모가 그 생사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국가의 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족' 윤리가 우위지만 중국에서는 '개인' 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p. 93)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 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 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비된다(p. 94).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고, 생존의 책임을 떠맡은 핵가족이 위기 상황에서 해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공고한 가족주의로 인해 부모 자녀 사이에 자아가 분리되지 못한 자아혼란이 함께 만들어내는 참극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양극화와 가족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구조,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핵가족 내 부모의 성별 분업에 달려 있고,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가 없는 자녀는 정상적 사회 성원으로 자라기 힘든 사회구조.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아이들이 깔려 목숨을 잃고 있다(p. 95). 그런데 미혼모가 혼자 이 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 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미혼부나 그들의 가족은 자녀에 대한 권리를 미혼모에게 쉽게 떠넘겨버리거나 부모 자녀 관계를 부정해버린다. '가족 제도' 주변에 둘러쳐진 금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그 강력한 가족주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p. 118)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출산에 동의한 미혼부조차 출산 후에는 소식을 끊거나 책임을 방기한다. 아무도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계는 임신, 출산, 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경우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일 뿐이다. 이런 불균형을 보면 한국의 가족주의는 매우 남성 편의적인 가족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미혼모가 미혼부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가 78%이고, 미혼부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9.4%에 불과하다고 한다.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양육비 청구를 하면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를 빼앗길까 봐 미혼모가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있지만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는 수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p. 119).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정상가족'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미혼모, 이주 노동자,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심성도 이처럼 내 가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에 처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2016 OECD 사회지표〉를 보면 거의 모든 지표들이 나쁘지만 사회통합성을 보여주는 타인 신뢰도, 정부 신뢰도, 사회 관계는 35개국 중 24~29위를 오가는 바닥 수준이다. 우리가 이토록 각박해진 이유는 흔히들 말하는 가족 해체, 개인주의화 때문이 아니라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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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5-10-09
  • 【북토크】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들어 인간됨에 대해 쓴 책이다. 진작에 『토지』를 구입했지만 묵혀두고 있다. 그러다 먼저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아직도 언제 20권의 대하소설의 대장정을 시작할지 엄두가 안 난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토지』에는 600여명의 인물이 나온다니 그 안에는 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다양한 등장인물처럼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토지』에서는 양반이라는 절대적 기준점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위치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양반 때문에 죽음조차 불사하고, 누군가의 삶은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질질 끌려 다녔고, 또 누군가는 양반이 아니어서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우리 삶을 장악하는 절대적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기준의 크기나 영향력보다 그것이 생겨난 근원이 궁금합니다. 내 삶의 기준이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타인의 기준이나 사회의 기준을 그대로 옮겨다가 중심으로 삼은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삶을 움직여나가고 있는지 혹은 끌려가고 있는지, 짓눌려 있는지.....곰곰 돌이켜볼 일입니다(p. 48). 이렇게 자기 삶의 가치를 확보한 조병수는 그제야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꼽추라는 첫 번째 혹덩어리도, 추악한 부모라는 두 번째 혹덩어리도 말입니다. 말년에 외로워 진 조준구가 아들을 찾아왔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마지막 순간까지 병수에게 가학적 행패를 부리는데도 말입니다. 그 시궁창 같은 인연 앞에서 병수는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때 병수가 운명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에 복종하는 일과는 좀 다릅니다. 자신이 '꼽추'이고 자기 부모가 저런 사람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병수 는 이제 그런 것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자기 힘으로 살아(p. 63)나가는 자기 삶의 창조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짓누른다고 생각했던 두 개의 혹덩어리를 선선히 짊어지고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만나 살아가는 병수. 그의 삶이 신산해 보이지만,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세상과 그 자신을 변환시킨 예술이다 싶습니다(p. 64). 독립운동 자금 전달과 아들 영호의 학생운동, 이 두 가지로부터 한복이는 비로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벗은 것이지요. 결국 인간이 뭔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어디어디에 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지, 그저 다짐한다고 혹은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다른 일을 해봐야, 다른 행동에 나서야 그야말로 다르게 살게 된다는 것을 한복이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p. 70). 이처럼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에 필요한 힘을 여러 방식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그 힘이 배치되는 관계를 새롭게 조직해냈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으로 나를 옮겨놓고, 또 다른 새로운 장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바꾸어나가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나와 '약속'하기 즉 '미래에 대한 명령'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가 '약속'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I am the master of my face)이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수감 생활 27년을 버티게 해주었다는 시 한 구 절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리라 (…)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인빅투스Invictus」,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p. 79). 인빅투스(Invictus)는 '정복되지 않는 굴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합니다. 『토지』에서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운명의 주인이 된 한복이는 늘그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산다는 거는.....참 숨이 막히제? 억새풀같이 자라고, 벼랑에 매달려 살고......그래도 나는 나다!"(p. 80). 강청댁, 왜 질투합니까? 용이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p. 117)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남자가 월선이한테는 이러저러하게 하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월선이와의 비교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만 끝없이 추락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자신이 피폐해져간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치 추구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나와 비교되는 대상 때문에 발동하는 질투의 감정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질투는 다른 사람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나가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결코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강청댁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날이 피폐해져가고 자신을 스스로 추스를 수 없게 됩니다. 그녀도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띠는 새댁이었는데 말 입니다.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은 질투로 인해 극단으로 치닫는 한 여성의 모습을 더욱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급 술집의 어리고 예쁜 게이샤는 주인 아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주인아줌마 몰래 사랑을 나누는 정도였지만, 그 사랑이 점점 깊어져 주인 아저씨와 게이샤는 술집을 나옵니다. 둘이서 방을 얻어놓고 둘만의 사랑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됩니다. 게이샤는 자신이 벌어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지만 남자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또한 즐겁기만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뭔가 이 남자가 완전히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남자를 내 방에 데려다놓았을 뿐 남자를 완전히 가졌다는 충족감 이 안 드는 겁니다(p. 118). 그러자 그녀의 집착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집니다. 급기야 남자를 외출도 하지 못하게 감금이나 마찬가지의 상태를 만들어버 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남자에 대한 충족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남자의 성기를 잘라 손에 쥐고 거리를 활보하는 기괴한 극단으로 치닫고야 맙니다. 1936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아베 사다' 사건을 재구성했다고 알려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을 소유의 방식으로 볼 때 욕망이 끝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p. 119). '팩트'만 말해라, 이것이 '팩트'다 따위는 꽤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임을 자부하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따지겠다는, 일종의 법리와 증거를 주장하고 논박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이런 태도로 봉기에게 접근한다면 봉기가 저지른 명백한 죄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미역 한두 오리,(p. 204) 체 한 개 따위의 소소한 물품을 가로챘을 뿐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해낸 정도입니다. 간혹 복동네의 자살처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도 있긴 했습니다만, 봉기의 뻔뻔한 말마따나 그가 곧바로 살인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사실은 이런 삶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죄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곳, 자기 성찰과 공감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악이라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토지』에서는 봉기라는 밉살스러운 사람을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란 의미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유대인 학살자)의 일화도 그러했습니다. 성실하고도 효율적으로 나치의 과업을 완수했던 관료 아이히만은 늘 당당했습니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고 말했고, 아니 그 부끄러움을 느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관료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 그것은 인간일 수 없다는 가장 잔혹한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토지』에서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 말기 여학교에서 상의(홍이의 딸)가 전쟁 지원 활동에 동원되어 주먹밥을 만들다가 남몰래 동생 상근이에게 주먹밥 하나를 건네줍니다. 상근이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서 부끄러운 마(p. 205)음에 얼른 자리를 피합니다. 나중에 상근이는 누나 때문에 망신스러웠다고 투덜거립니다. 당장의 배고픔보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치는 배부른 사람이 챙기는 거지, 너처럼 그랬다가는 굶어 죽을 기다"라며 웃습니다. 그런데 멀찍이 앉아 있던 노인이 불쑥 끼어듭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기찹아도 염치를 채리야만 그기이 사람이제. 있고 없고가 상관없는 기라. 있다고 해서 어디 염치 채리더나?" 20권 292쪽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삶, 그 이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문제입니다. 염치를 차려야, 부끄러움을 알아야 그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p. 206). -'나'를 위로하는 나쁜 방식 일상생활에서는 이유 없는 일, 이유를 모르는 일 혹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 들면,(p. 214) 오히려 힘만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쩌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나요? 물론 설명하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서두에서 제가 『토지』를 읽어왔던 내력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얼마든지 여기저기서 이유를 찾아와 다시 맞춰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 설명까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애써 찾아온 이유들을 반대로 확 뒤집어서 진짜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이래서 그렇게 되었나? 하고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이 또한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풍파를 겪어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가끔씩 "그게 팔자야, 운명이야" 하며 무덤덤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이 패잔병 같아 보여서 참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아주 오래된 삶이 전해주는 지혜가 빛나고 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말들은 "아이고, 내 팔자야"라며 한탄하는 넋두리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의 방식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내 그것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것은 그렇게 했을 때 내 마음이 좀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를 위해서 그게 이유라고, 원인이라고 꾸며대는 방식, 그리하여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긍정적이고 솔직한 자세는, 내게(p. 215) 일어난 일을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금의 내가 밀고 나가는 겁니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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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북토크】 하늘과 땅, 모두 살아가기 어렵다
    하늘을 나는 직업을 가졌던 저자는 사람이 사는 땅, 대지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했다. 이당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여러 사고가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땅 대지는 쉬운가? 그렇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 12년 동안 일을 한 뒤 다시 한 번 남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그는 뒤쪽 오른편 엔진을 끈다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 소식은 별로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침묵이 10분 동안 계속되자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항공로의 모든 무전국은 불안감 속에서 철야 근무에 들어갔다. 10분 늦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우편 비행기에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죽은듯한 시간 속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숨겨져 있다. 무의미한 것이건 불행한 것이건 그 사건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다. 운명은 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에 대해 더 이상 항소할 길이 없다. 강철 같은 손이 승무원을 무사히 물에 착수시키거나 파국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p. 34)러나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통보되지 않는다.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 가는 희망을, 시간이 지 날수록 마치 죽을 병처럼 악화되는 이 침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희망은 점점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동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신들이 그렇게 자주 날아다니던 남대서양 속에 우리의 동료들이 잠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메르모즈는 자기의 업적 뒤로 영원히 숨어 버린 것이다. 마치 볏짚을 잘 묶고 나서 자신의 밭에 누워 잠든 추수꾼처럼. 어떤 동료가 이처럼 죽을 때면, 그의 죽음 역시 직무상의 명령에 따른 행동처럼 여겨지고, 여느 죽음보다 처음에는 더 슬프지 않다. 물론 그는 마지막 전근 명령에 따라 저 멀리로 떠났다. 하지만 매일 먹는 빵이 없는 것처럼 그의 존재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지는 않다. 실제로 우리는 동료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p. 35). 가끔 흑인 노예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저녁 바람을 맛보는 일도 있다. 이 포로의 육중한 몸속에서는 더 이상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붙잡힌 당시의 일, 주먹질과 비명 소리, 지(p. 109)금의 암흑 속으로 그를 밀어 넣은 남자의 팔만 기억할 뿐이다. 그 시간 이후 그는 기이한 꿈속에 빠져들었다. 장님처럼 천천히 흐르는 세네갈의 강물이나 모로코 남부의 하얀 도시들의 풍경을 빼앗긴 채, 그리고 귀머거리처럼 친근한 목소리들을 빼앗긴 채 말이다. 이 흑인 노예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구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유목민들의 생활 반경 속에 들어와, 그들이 이주할 때마다 이끌려 다니고, 그들이 사막에서 그려나가는 궤도에 평생 동안 매어 있게 된 지금, 그와 과거, 가정,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 공유할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 모든 것들은 지금 그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랫동안 위대한 사랑을 품고 살아왔으나 그 사랑을 빼앗긴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고독한 고귀함에 싫증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겸손하게 삶에 다가가 평범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복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은 체념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 일상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노예는 주인의 숯불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는다. 자, 들어. 가끔씩 주인이 포로에게 말한다. 이때야말로 주인이 노예에게 선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다. 그날 하루의 피로와 무더위로부터 벗어나 시원한 저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차를 한 잔 준다. 그러면 노예는 고마워 어쩔 줄 모르고, 이 차 한 잔으로 인해 주인의 무릎에 입이라도 맞출 지경이 된다. 노예는 결코 사술에 묵이지 않는다. 그(p. 110)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토록 충성스러운데! 그는 현명하게도 빼앗긴 후인 왕으로서의 모습을 부정해 버린다. 그는 단지 행복한 포로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엔가 해방될 것이다. 너무 늙어서 음식과 의복 값을 못하게 되면, 그는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흘 동안 이 노예는 이 천막, 저 천막을 헛되이 돌아다니며 자기를 써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쇠약해지는 그는 사흘째 되는 날이 저물면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모래 위에 몸을 눕힐 것이다. 쥐비에서 나는 이처럼 벌거벗은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무어 인들은 그들의 임종의 곁을 스치고 지나다니지만, 그들의 태도가 그다지 냉혹한 것은 아니었다. 무어 인 아이들은 검은 몸뚱이 곁에서 놀았으며, 새벽마다 이 몸뚱이가 아직 움직이는지 장난삼아 보러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그 늙은 노예를 비웃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속한 것으로,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너는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잠잘 권리가 있다. 가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드러누운 채 현기증에 지나지 않는 허기를 느꼈지만, 유일한 괴로움인 부당함은 느끼지 못 했다. 그는 조금씩 대지와 하나가 되었다. 태양에 의해 말라붙고, 대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30년 동안 일을 하고 나서 잠과 대지에 대한 권리를 얻은 것이다(p. 111).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을 자각 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고, 또한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생명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주 감미롭다(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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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북토크】 여전히 어려운 내 마음, 네 마음
    내 몸이지만 내 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맘이지만 내 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일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마음 탐구를 오랫 동안 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마음도 모르고 남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다. ONE POINT LESSON 책상 정리의 사례는 다이어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살을 빼고 싶지만 빠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잘 들여다보면, 마치 '살이 빠지지 않는 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식하는 나, 따뜻한 곳에 누워 있고 싶은 나',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싶은 나', 즉 늘 과식하고 누워서 TV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살 빼고 싶은 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이 빠지지 않는 나'라고 하는 '상자'를 걷어내 보면, 문제는 살을 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과식이나 TV가 진정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고 싶지만 도저히 못한다''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하고(p. 36)싶지만 도저히 하지 못한다'라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p. 37). 내면의 소리에 마주하기 자신의 약점과 장점 모두를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살아간다면 당당해지고 힘이 생깁니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입장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친밀하거나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고 관찰하지 않을뿐더러 판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과 동일합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나의 외모와 태도, 성격 등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과민하게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나의 민낯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겉모습을 과다하게 포장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p. 47).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 '실망할 거야!', '나를 떠날 거야!'와 같은 추측으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추측들이 사실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확인해봐야 합니다. '어떤 근거로 나를 싫어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하나 근거를 찾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봅니다. 변호사가 확실한 증거를 밝히며 반대 심문을 하듯이 자신이 단정 짓고 있는 것들에 대해 논박을 하며 원인불명의 추측들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지금의 나 자신'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장 소중한 건 '나 자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 48). 그런데 왜 '자기 비난 상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어린 시절의 잘못된 환경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나 실패의 경험은 털어버리고 자신이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비난 상자'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다니엘 웨그너 Daniel Wegner 교수가 1987년 '어떤 생각이나 욕구를 누르려고 하면 효과가 있을까?'라는 실험을 했습니다(p. 55).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A 그룹에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지시했고, B 그룹에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은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지시 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종을 친 횟수가 많은 그룹은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B 그룹이었습니다.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 ironic proces theory는 특정 생각, 욕구를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 자주 떠오르거나 행동하게 되는 효과이다). 티벳 속담에 '걱정을 하여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많은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한 가득씩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인 '망각'으로 인하여 걱정의 농도가 옅어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자기 비난 상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이 '망각'의 선물을 '망각'한 것입니다. 과거에 고민했던 일이나 고통, 힘 들었던 기억들을 그대로 안고 또는 그것을 중복시키면서 후회하고 자신을 책망합니다(p. 56). 상담자: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로 이메일 확인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요? 어떤 자세와 어떤 표정일까요? 경애: 잠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요. 그리고 어느새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어요. 등을 웅크리고 앉아서 아무런 표정 없이 컴퓨터 화면을 그냥 보고 있네요. 상담자: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경애: 머저리 같아요. 정신병자 같고 넋이 나간 미친 사람같이 느껴져요. 정말 꼴불견이에요. 너무 못나 보여요. 상담자: 지금 그런 모습이 아닌 원래 경애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경애: 잘 웃고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즐기면서 리더십도 있고, 밝은 사람이에요. 상담자: 그런 긍정적인 면을 잘 기억하고 이야기해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경애: (한참을 생각하다가) 1년 전 미국에서 제가 한창 일을 열심히 배우고 열정적일 때, 제 멘토가 되어주었던 상사가 떠올라요(p. 66). 그분은 지금의 형편없는 제가 아닌 당시의 활달하고 생기 넘쳤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분이 보고 싶네요. 상담자; 그분은 경애 씨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경애: 제가 일을 시작할 때 겁이 많았는데 차근차근 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주셨고, 힘들 때마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는 안심하고 일했나 봐요. 실수해도 되고 못 해도 된다는 편안한 생각에 즐겁게 일했었는데....그분은 저에게 올바른 방향을 알게 하고 안정감을 갖게 해주신 분이에요. 상담자: 그럼 그때 미국에서 힘이 되어주었고 경애 씨의 상황을 잘 알고 어떻게 경애 씨답게 앞으로 가야 하는지 도움을 주었던 상사가 지금 앞에 앉아 있다면 어떤 말을 하실까요? 경애: "경애야! 너는 처음에는 불안해하지만 일이 조금 익숙해지면 어느 누구보다도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내잖니? 한국 생활이 날 설고 힘들었을 텐데 지금도 잘 해내고 있잖아.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인정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돼. 네가 미국에서 얼마나 잘 해냈는지 잊지 마!"라고 말해주실 것 같아요. 상담자: 앞으로도 경애 씨가 자신을 멍청이 같고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분이라면 어떤 조언을 해주실지 떠올려보세요(p. 67). 사실 경애 씨는 회사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받거나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충분히 인정받고 잘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불안을 만들고 그 불안이 집에 와서도 끊임없이 업무 확인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p. 68). ONE POINT LESSON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는 '자기 비난 상자'에 갇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정한 기준에 집착하는 경향 이 있습니다. '매니저라면 인정받고 실수 없이 일을 해야 해!', '난 훌륭 한 부모가 되어야 해!', '난 착한 딸이 되어야 해!'라는 신념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자책하게 되고 바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경애 씨도 이러한 '죄책감' 때문에 매일 귀가 후 집에서 2시간 이상 업무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벌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비난 상자'에 빠지게 하(p. 68)는 '죄책감'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난 이렇게 해야만 해!' 라고 하는 어떤 신념이 있는지 그 문장들을 찾아서 건강하게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해!' 또는 '나는 1등을 해야만 해!'라고 생각하면 어떤가요? 내가 정한 신념은 그에 따른 행동을 낳습니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 다는 생각이나 1등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벌써 긴장하게 되면서 불안해지고 '못 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염려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 해!'라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1등이 아니면 안 돼'라고 계속 생각하게 되면 걱정과 염려의 눈덩이는 점점 공포감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해 가진 신념이 반대로 나를 죽이는 신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 해야만 해!'라는 신념에서 '~ 될 수 있으면 좋 지!'라는 생각으로 바꿔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념을 이루지 못한다는 불안과 공포감으로부터 단순한 걱정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p. 69). 이렇게 하는 것의 목적은 무작정 불안감을 버리고 긍정적인 상태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신념 때문에 딸려오는 쓸데없는 짐을 벗어 던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성과를 내는 것이나 1등으로 가는 목표에 있어서 불안과 공포감을 안고 가느냐, 아니면 단순한 걱정을 안고 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p. 70). 타인의 칭찬에 의심 대신 일단 믿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사실 칭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특히 '겸손'을 '미덕'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칭찬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덕분에 잘된 것이지요', '별말씀을··' 하며 손사래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인사치레이건 아니건 칭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배려해서 해준 말임에도 애써 부정하는 것이 과연 '겸손'이고 '미덕'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칭찬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은 그러한 칭찬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부정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라고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비난 상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칭찬일지라도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받으면 자신이 했던 구체적인 행동을 생각(p. 84)해보고, 그것이 사실이면 상대방의 칭찬을 순수하게 수용하고 자신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의 내면에 긍정적인 소리를 입력하게 되고,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반응이 긍정적인 정서를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행동을 다시 하도록 만드는 연쇄작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친구를 대할 때 어떻게 하나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하거나 폄하하고 모멸감을 주나요? 아니면 친구가 어려울 때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며 당신의 친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도록 힘이 되려고 애쓰나요?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대하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p. 85).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와 타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할 때, 무엇이 효과적인지 계산하기 무조건 네네 상자에 갇혀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됩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타인의 말을 수용 했다고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삶에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보다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과의 관계나 일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될 때와 타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게 될 때를 따져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느 쪽이 자신에게 효과적인지 손익계산을 해보면 보다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p. 169). '00한 때문에' 대신 '00한 덕분에'로 생각 습관 바꾸기 어차피 과거는 잊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주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 친구가 배신하여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괴롭다' 대신에 '남자친구가 배신한 덕분에 지금의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수능 시험 때 몸이 아팠던 탓에 시험을 망쳐 좋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대신에 '수능 시험 때 몸이 아팠던 덕분에 지금의 학교에 들어와서 더욱 열심히 학교를 다녔고, 그런 좌절의 시간을 통해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결혼에 대한 불안감으로 결혼하기가 두렵다' 대신에 '부모님이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부모님께 의존하기보다는 일찍 독립심이 생겼고, 결혼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뇌는 내가 사용하는 방향대로 변화되는 신경가소성 Neural plasticity (우리의 경험이 신경계의 기능적 및 구조적 변형을 일으키는 형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의 해석을 계속 바꿔줄수록 과거를 떨쳐내고 삶의 활력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p. 202). ONE POINT LESSON '무한 생각 상자'에 얽매이지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선택한 길을 믿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선택한 길 앞에 있는 희망과 목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열심히 살다가 성공하면 베스트이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실패의 원인이 분기점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디지털적인 데이터가 모인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체험이 모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분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인생의 진로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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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북토크】 노년에 직면한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
    여성에게 노년은 남성보다 힘들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 외적인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노년에도 자기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건강을 유지하기 원한다. 남자나 여자나 다 늙는다. 하루라도 일찍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편소설이나 문학 전집을 번역하는 일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생각이나 감정에 동요 없이 매일 조금씩, 여덟 쪽에서 열 쪽을 일본어에서 우리말로 옮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일정 부분은 매일 조금씩 쉬지 않고 꼬박꼬박 무심하게 앞으로 나가는 힘을 요구한다. 무슨 일을 하든 나아가기를 멈추면 거기서 끝이니까. 끝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래오래 한 가지 일을 지속하다 보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가닿기도 한다(p. 20).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필요하지만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일도 필요하다. 나를 계속 열어 두는 연습을 한다. 내가 세상을 궁금해하는 만큼 세상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칭이다. 새로운 경험만큼 나는 더 유연해질 것이다. 나이가 더 들(p. 53)면서 점점 조개가 되어 간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자주 입을 벌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세상을 못마땅해하기보다는 끝까지 세상을 선물로 여기고 싶다. 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늘 실험하고 기꺼이 허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호기심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꼭 붙들고 싶다. 이것이 바로 김 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그들의 삶으로써 내게 전해 준 가장 값진 가르침일 것이다(p. 54). 죽음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내가 좋아하는 일상, 옳다고 여기는 대의, 누구를 더 사랑하고 돌볼지, 어떤 일에 집중할지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래서 김영민 선생께서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게다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내게 묻는 거고, 죽음은 아랑곳없이 닥친 결과다. 그러니 죽음이 뜬금없어 보일 때 지금 당장 죽어도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p. 69).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멋진 언니 중 한 분인 시몬(p. 75) 드 보부아르 님의 잘 늙는 방법을 몇 가지 공유한다.(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실린 글을 참고했다.) 과거를 받아들이자. 삶을 의미 있게 해 주는 친구를 사귀고, 타인의 생각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자. 호기심을 잃지 말고,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을 추구하자. 인생에서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오랫동안 즐겼으므로 때로는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한 때를 보내자. 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은 다음 세대가 끝마쳐 줄 것이다. 부디 120세에 내가 뿌듯한 마음으로 이 글을 보면 좋겠다.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늙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것은 더 좋아하고 싫은 건 눈치 보지 않고 버리고, 건강 염려 없이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나이, 나는 늙어 가는 시간이 기대된다(p. 76).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예전과 달라졌다. 번잡한 일정이 빼곡했던 예전엔 종종 선약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모임을 빠져나왔다. 선약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롯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2~3시간, 1주일에 최소 하루는 있어야 번다한 일과 만남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2~3시간은 나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거꾸로다. 워낙 혼자 지내는 시간을 즐기다 보니 점점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연락이 뜸해진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고립된 외톨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슬며시 찾아온다. 관계 속에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은 그저 변덕일까(p. 87). 노년기에 들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아니,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혹은 '비참' 하지 않으려면 건강과 돈이 꼭 필요하다. 모든 불안은 이 두 가지에서 온다. 나이 든다는 것. 노안이 오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살이 찌고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눈, 치아, 머리술 등 몸의 모든 부분이 관심을 요구한다. 이때 짜증이 난다면 아직 나이 들지 않은 것이다. 나이 듦은 그만큼 수용하기 힘든 인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타자가 되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경험이기도 하다. 죽음과 마주하는 문제다(p. 145). 글을 쓰다 보면 막히는 때가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다.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쓰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 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거나....이 과정을 통해 내가 모르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는 쓰기를 반복해야만 알 수 있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p. 155)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 이유다. 거듭하는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데, 이는 몸에 익을 만큼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 인생은 있지 않을까라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그래서 부동산 매매로 인한 불로소득보다 표절로 인한 불로소득이 내용상으로는 더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금도 내고 비난도 받는다. 발품도 팔아야 한다. 표절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다. 표절은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을 죽인다.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쓰기를 반복하는 일은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니 무조건 계속 쓸 수도 없다. 길을 잃는 공포가 엄습한다. 사유보다 힘든 일이 쓰기다. 그래서 우울은 공부의 벗이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p. 157)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내가 역사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인물이 있는데, 프랑스 의 사상가 볼테르의 친구인 니콜라 클로드 티에리오이다. 그는 당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책만 읽으며 거의 매일 볼테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단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볼테르의 친구로서 볼테르와 관련한 문헌에 언제나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다. 한 줄도 안 썼는데! 일상의 노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백인 중산층 남성의 특권이다. 쓰기의 고통은 김승옥이 스물두 살에 쓴 단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에도 등장한다. 너무나 솔직하다. 그는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왜 글을 쓰는가"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한 대로 생계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내가 주변인이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자원으(p. 158)로 작용하는 분야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 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20)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적 약자가 가장 가질 수 없는 자원은 폭력이다." 이와 달리 국가, 자본, 권력층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구조적으로 폭력의 총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의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의 경험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성을 자각한 이들의 글은 독창적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이야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창의적인 이야기는 쓰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통한 모색에서만 가능하다.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다. '노가다', 공부(工夫)가 되는 것이다(p. 159). 왜 인간은 이토록 말하지 못해 안달일까. 자신의 말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깊은 곳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싶은 욕망과 기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은 사라지는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전달하면 구전되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낯선 사람들이 내게 전한(p. 199)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다.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말은 살아 있으며, 내가 이 말을 나눈다면 그들은 계속 살아 있게 될 것이다(p. 20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10-09
  • 【단상】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기자로서 어떤 기사를 작성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또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게 되도 여러 사람들이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대한 조회수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생각지 않게 많은 조회수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종종 놀라게 된다. 결국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늘 열심히, 성실히 기사를 쓰고 동영상을 만들어 올려야 한다. 심어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형태의 글을 작성해 올린다. 또한 적게 본다고 해서 낙심할 것도 없고, 많이 읽었다해서 우쭐할 것도 없다. 독자들의 취향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몇 명이라도 기사를 보고 좋은 영향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늘 배우는 자세로 앞으로도 계속 기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감사한 것은 기사를 만들어 놓고 단톡에 공개하지 않아도 본지 사이트에 와서 읽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앞으로 단톡에 공개하지 않고 쓰는 기사가 많을 것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종종 빛과소금뉴스 사이트를 방문해 주시기 바란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0-09
  • 【북토크】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비즈니스도 사랑을 강조한다. 자기 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의 비즈니스 대상인 고객 사랑.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목사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오버랩 된다. 목회할 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양의 대상인 성도를 사랑한다면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욕망이 있는 곳에 비즈니스가 생기는 법, 노인들의 욕망이 연결되는 산업은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 60대 카페에 가보니 '정모' 사진들이 보입니다. 그분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비슷합니다. 태반이 아웃도어이고, 대부분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난 10여년 동안 자식들이 어버이날에 사드린 선물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맘 먹고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는 고가의 아웃도어를 사드렸을 겁니다. 고어텍스는 방수기능에 발수성이 있고, 통기까지 되는 훌륭한 섬유입니다. 이것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히말라야에도 갈 수(p. 46)있죠. 그런데 그 옷을 입고 우리는 동네 뒷산에 갑니다. 고작 해발 150m를 오르는 데 고어텍스가 왜 필요할까요? 가격 때문입니다. 기능성 원단일수록 고가이기 때문에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으면 그 재킷은 다른 무명의 원단을 사용한 것보다 비싸며,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있는 김 영감님은 옆집 박 영감보다 돋보입니다. 그런 옷이 여러 벌 있으면 더 부자로 인정받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이 한때 6조 9000억 원 규모로까지 불어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한 벌에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고가 패딩이 차지했지만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아웃도어가 팔리는 이유가 우리나라 지형의 70%가 산이어서 그렇다는 추측도 있었다지만, 150m 올라가는 데 무슨 말씀. 그럼에도 아웃도어를 마케팅하는 사람들은 통기성과 발수성을 말해야 합니다. 그게 그 옷이 비싼 이유이고, 기꺼이 지갑을 여는 구실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은 숨겨진 욕망을 끝까지 뽑아 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둘러 표현해야 합니다. 대놓고 이야기하면 품격이 떨어져서 그것을 사는 사람들까지 없어 보이게 만들거든요. 기업은 그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p. 47). 지금까지의 삶에서 형성해온 이해는 '경험'이라는 소중한 자산으로 켜켜이 쌓이지만, 때로는 나의 기득지가 지금의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기술과 삶이 급변하는 사 회 속에서 기존의 상식은 어느덧 유효기간을 다하고 있습니다. '감이 떨어졌다'거나 '이제 나는 트렌디하지 않다'고 한탄할 때가(p. 56) 딱 이런 상황입니다. '나도 왕년엔 잘나갔지'라고 스스로를 위로 해봐도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습니다. 개인적 감상이 이럴진대 만약 트렌디해야 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현 시대와의 차이만큼 나의 경쟁력이 줄어듦은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골치 아픈 일이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할수록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쌓아온 경험이 오히려 허들이 되다니요. 이 상황을 타개할 해법은 무엇일까요? 미친듯한 크리에이티브? 아뇨, 저는 오히려 상상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함께 모여 자신의 느낌을 공유하는' 본래 의미로서의 상식 comon sense 을 계속 현재시제로 업데이트해 유지하려면, 상상하지 말고 관찰해야 합니다. 창의성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 같은 시대에 상상하지 말라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상상하지 말라는 것을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상력은 물론 필요합니다. 데이터는 결과가 아니라 씨앗일 뿐이므로,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단,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부터 상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p. 57). 새 물을 뜨려면 그릇에 담긴 물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그것,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그것, 과거에 알고 있던 그 것, 그 모든 기득지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던 것은 과거의 사회상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변 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대로,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상상하는 습관을 멈추십시오. 지금까지는 여러분의 지식이 여러분을 지켜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이 좁고 낡은 것으로 판명나는 순간 여러분의 지식은 회사가 여러분을 버리는 구실이 될지도 모릅니다(p. 58).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거칠게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대기업은 일이 매우 많습니다. 중간관리자가 되면 스트레스는 더 극심해지죠.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한창 학령기인 아이들이 눈에 밟혀 결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기업을 그만두면 그보다 규모가 작은 곳으로 이직해야 하는데, 그러면 당장 월급이 줄고 아이들 사교육을 줄여야 하거든요. 그러니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p. 75). 개인의 한계를 다스려가며 의지를 갖고 잘 버텨보려는 사람들 앞에는 명예퇴직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경우가 훨씬 더 많죠. 힘들어도 회사생활을 잘해보려 하는 사람을 기업이 내치는 겁니다. 한국은 경력 25년 차와 신입사원의 임금 차이가 3배에 이릅니다. 반면 독일은 1.3~1.7배입니다. 임금 격차가 크지 않으면 연차가 높아도 회사의 부담이 적으니 종신고용이 가능한데, 한국은 부장이 되면 사람을 정리해야 합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일이면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업무가 표준화돼 있으므로 사원이나 중간관리자나 하는 일이 비슷한데 3배나 연봉을 주고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p. 76).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2011년을 기점으로 '현재'에 대한 대화가 '미래'를 앞질렀습니다. '카르페 디엠'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현재를 즐기고자 해서가 아니라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를 말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과거 개발시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몇 차례나 하며 버텼습니다. 그때의 설득화법은 한마디로 '5년만 참으면 좋아진다'였고, 그때는 온 국민이 그 말을 믿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약속을 얼마나 믿을까요? 몇 년만 고생하면 집 살 수 있다, 승진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공약이 되었습니다. 사회 흐름이 이러하니 연금이나 저축이나 주식 관련 업종은(p. 78)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래가 있어야 없는 돈이라도 아껴서 준비를 할 텐데 그게 안 보이니 돈을 모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미래 대신 현재의 내 만족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한 채 흥청망청 아무렇게나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볍고, 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욕망이란 억압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니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발현되고야 맙니다. 최근에는 그것이 작은 사치, 이른바 '소확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암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돈이 많지 않으니 소소하게 기분을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기분은 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상징적인 것이 네일 아트입니다. 3만~5만 원을 주면 누군가가 정성껏 내 손톱을 다듬어주고 아름답게 꾸며주죠. 그 손맛을 한번 보고 나면 끊을 수 없다고 하네요. 또 손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귀하고 예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드니, 한 달에 한두 번씩 네일숍에 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합니다. "금붙이 사다 안겨 줄 남자도 없으니 손톱에 기분이라도 내야지"라는 어떤 블로거의 말처럼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데 더해 연애조차 힘들다는 오늘날의 사회상에서는 이러한 작은 사치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p. 79). 작은 사치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먹방', '먹부림', '폭풍 흡입'으로 대변되는 먹기 열풍입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데는 먹는 게 최고죠. 그래서인지 '먹다'라는 말이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나 남자나 날씬해야 대접받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의 상식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상식은 바뀌지 않았지만, 스트레스 해소에는 먹는 게 최고이니 날씬한 미래를 잠시 미루고 먹는 만족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이 먹는 게 죄악시되기보다는, 먹는 행위 자체가 일상에서 가장 신나는 이벤트가 되었습니다(p. 80). 이처럼 일생을 보면 삶의 매 순간마다 기회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다 하려고 욕심내지는 마시고요. 다 잘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테니까요. 사람의 일생을 잘 관찰하고, 그중 하나를 택해서 10년을 하면 누구든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p. 97). 남들과 똑같아 보이면 그 순간 가치가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달라야 합니다. 다르면 인지가 되고, 인지된 다음에 기능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기억됩니다. 이 프로세스를 저의 차별화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송길영'이란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보다 저의 특징과 효용을 알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p. 99). '이 좋은 물건을 왜 안 살까'를 궁금해할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해보십시오. 시선을 제품이 아니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점차 내 텃밭을 넓힐 수 있습니다. 산업을 보지 말고 인간을 보면 언제나 답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 전문가이기 때문에 자꾸 산업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 의미가 없습니다. 펄프 함량이 어떻고 조직이 어떻고 하는 전문적 지식보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p. 107). '업'이 아니라 '삶'으로 프레임을 잡아서 보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할 필요 없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반대로 삶이 아니라 업으로 들어가면 어떨 것 같은가요? 지금은 매우 중요해 보이는 신기술이나 소중한 먹거리 산업들도 순식(p. 109)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웬만한 기술은 3년을 버티기 힘든 세상입니다. 특정 기술과 서비스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다가 그 기술과 함께 순장당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다못해 제 주요 분야인 빅데이터라는 단어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열기가 시들해질 겁니다. 그러니 특정 기술 전문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술과 함께 없어질 테니까요(p. 110). 이런 맥락에서, 데이터 분석을 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가장 먼저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 안에 사회의 흐름과 중요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분석이 인간의 욕망을 파악하는 일인 만큼, 인간을 심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적 소양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인문 전공자들과 함께 데이터를 분석합니다. 데이터를 분석해서 추이를 발견해내는 일이 결국에는 '인간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p. 205). 처음부터 인문적 통찰을 가지고 가설을 세웠다면 좋았겠지만, 예전에는 그저 데이터만 모아놓고 인문 분야의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물어보기에 바빴습니다. 지금은 심리학, 사회학, 철학, 인류학, 경제학 연구자들이나 학회의 도움을 받고, 직원도 인문사회 분야를 전공한 인재를 주로 모셔와서 통찰의 깊이를 더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과 함께 신문과 뉴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3년만 꾸준히 챙겨서 보면 세상이 어떻게, 왜 변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뉴스를 보고 3개월 후면 그들의 정치적 의도라든지 행간이 실제 화됩니다. 이뿐인가요. 검색엔진도 있고, 포털도 있고, TV 프로 그램도 트렌드를 읽는 중요한 경로입니다. 정보는 많고 수단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저 많이 관찰하고, 많이 읽고, 많이 고민 하면 됩니다(p. 206). 결국 대중은 우리가 보낸 시간과 고민의 총량에 비례하여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때 '고민'이 아니라 '행위'에 대해 보상받는다면 시간당 임금에 함몰돼버립니다. 삽질 1000 번 하면 얼마하는 식으로요. 그나마 지금은 임금이 싼 나라로 이런 노동이 옮겨가기 때문에 경쟁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식의 경쟁력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런 구도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p. 241). 그래서 툭하면 애플 나쁘다고 욕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신문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비판인데, 팍스콘에서 아이폰 만드는 비용은 부품가를 다 합해도 200달러가 채 안 되는데 판매가는 750달러나 매겨서 550달러는 거저먹으니 애플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부품을 분해했더니 반도체가 얼마이고 다른 부품은 또 얼마라며 시시콜콜 따집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아이폰에 들어간 반도체인가요? 우리는 아이폰의 원가를 사는 게 아니라 아이폰의 설계를 삽니다. 즉 애플이 한 고민의 총량을 사는 겁니다. 고민을 많이 할수록 고민의 총량이 부가가치로 전환됩니다. 이 말은 곧 고민을 적게 하고 일을 쉽게 하면 가져갈 게 없다는 뜻입니다. 한게 없으니까요. 따라서 고민의 총량을 늘려야 합니다(p. 242). 마지막으로, 책을 마치기 전에 '제대로 관찰하고 배려하는 법' 에 관해 소소한 팁 하나를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의 표정을 본 적 있는지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못 읽는 사람도, 자기 아이 얼굴에서 언뜻 스치는 미묘한 표정 변화는 귀신같이 포착합니다.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물건을 팔고 싶으면 그것을 살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는지, 마음에 안 들지만 대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사는지, 아무 생각 없이 심부름만 하는 건지··· 이러한 차이를 읽을 수 있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란 결국 가치를 만드는 것이고, 가치를 만들려면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고민해야 합니다. 애정이 있으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배려할 수 있습니다. 배려를 받은 사람은 만족할 것이고, 만족하면 사랑 하게 됩니다. 20여 년 동안 일하며 제가 깨달은 가치의 선순환은 이것입니다. 반대로 애정이 없으면 고민을 안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p. 281). 그러니 일로 성공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키지 않아도 미친 듯이 합니다. 날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 지금의 사회라면, 앞으로는 전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됨에 따라 세계 1등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의 구조로 더욱 변화할 겁니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 잘할 이유를 못 찾고 대충 할 테니 전망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애정이 있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일에 대한 애정과, 내 결과물을 향유할 사람들에 대한 애정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강연을 할 때 저는 청중들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면 빨리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 고객이 싫다, 일은 싫지만 급여가 좋으니까 한다 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자신의 꿈을 찾으라는 자기계발적 교훈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현실적으로 안 될 터이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공할 수가 없어요. 경쟁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여러분의 제품에는 혼이 담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차이를 다 압니다. 애정이 있어야 승산이 생깁니다(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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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9
  • 【북토크】 나이 적은 사람에게도 배울 건 배우자
    찾아보니 이 책의 작가는 카피라이터로 나이는 50살이다. 그런데 글을 잘 써서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나 보다 어린 사람의 글에서도 좋은 것을 배울 때가 많다. 편견없이 글을 읽으면 많은 유익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현재 품절됐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것이 유익 중 하나가 이처럼 절판, 품절된 책을 종종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프레이밍framing 한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 내부의 프레임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언어 때문에 프레임이 무의식적으로 들어서기도 한다. 정치권에서는 프레이밍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보수파는 세금폭탄이라는 자극적인 말을 퍼뜨려 공포감을 조성하고 본질을 왜곡한다. 귀족노조라는 말을 만들어 그들의 요구를 배부른 소리로 몰아가기도 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선 농약급식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아이들 먹는 급식 앞에(p. 29) 농약을 갖다 붙이다니, 고약하다. 그렇게 정치적 목적으로 나온 말을 진보 언론이든 보수 언론이든 그대로 받아 쓴다. 그 논란에 걸맞은 이름은 '급식 네거티브' 정도가 될 것이었다. 보수 측은 언제나 한발 앞서 기민하게 언어를 프레이밍해 내어놓고 반대 세력은 그것을 규탄하느라 힘을 빼앗긴다. 같은 언어를 써서 규탄하는 것 또한 프레임에 휘말리는 짓이다. 언어를 쉽게 여기면 안 된다. 지난 대선 결과처럼 51대 49로 팽팽하게 나뉜 이 나라 국민들은 서로 상대편을 '종북좌파' '수구꼴통'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 나라엔 제대로 된 보수도, 제대로 된 진보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언어와 프레임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다. Privatization이라는 단어는 민영화가 맞을까, 사영화가 맞을까? 의료 민영화인가, 의료 사영화인가? 과거사 청산을 말할 때 그것은 정말로 과거사일까?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거기서 비롯된 현재의 수많은 병폐가 상존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과거사일까? 과거사라는 말을 쓰는 순간 '과거에 연연한다' '과거에 발목 잡힌다'라는, 진보가 아닌 퇴보의 언어적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과거사 문제는 '친일매국재산 환수' '왜곡 • 은폐 역사 바로잡기' 등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오해를 없앤다고(p. 30) 본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표현을 써가며 규제는 속히 척결해야 할 악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또 "규제, 눈 딱 감고 화끈하게 풀어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규제는 암 덩어리가 아니다. 몇몇 공룡 기업이 산업을 통째로 좌지우지하고 중소기업과 구멍가게들까지 무너뜨리는 이 나라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는 고삐이자 보루이며 안전망이다.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라면 300명 넘는 아이들이 물에 잠겨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임은 지금 든 몇몇 예보다 훨씬 깊은 층위의 문제라서 쉽게 짚어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기에 언어에 대한 고민은 지금 당장,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칼퇴근이 아니라 그냥 퇴근이다. 야근이 아니라 초과근무다. 몸값이라는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서운 말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 브라더는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주입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 언어를 틀어쥐는 자가 사고를 지배한다(p. 32). 무대응의 기술 한두 해 전 출판계에선 논란에 불이 붙었다. 한 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새로 번역해 내놓으며 이전의 번역은 오역투성이였고, 우리는 25년간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해왔다고 도발한 것이다. 그러면서 카뮈 번역에서 최고 권위자인 김화영 선생을 공격했다. 그가 소설을 완전히 왜곡하고 등장하는 인물 전부를 자기 입맛에 맞게 창작했다는 거다. 논란은 활활 불타올랐고 그 출판사의 《이방인》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가, 문제의 번역가가 사실은 그 출판사의 대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가, 그 출판사의 번역에 오히려 더 오역이 많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등 잡음이 들끓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출판사의 행태는 여러모로 무례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렇게 시끌시끌한 와중에 공격의 대상이었던 김화영 선생은 참 불쾌하고 때론 억울했을 법도 한데 끝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현명했다고(p. 227) 생각한다. 그가 불쾌함과 억울함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잡음에 기름을 붓는 격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때론 무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다. <타임>지 에세이스트였던 로저 로젠블라트Roger Rosenblatt가 쓴 책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 에는 살면서 매우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법칙들이 유머러스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 3번 법칙은 이것이다. '나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그 장엔 나쁜 일을 바로잡아보려다 일을 엉망으로 그르치고는 미국 멍청이들의 전당에 오른 자들의 사례가 이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경우 현실주의자는 그 일을 그냥 내버려두지만, 낭만주의자는 그 소동을 깨끗이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쫓겨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인터넷 생활에 대한 명심보감이 있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어그로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라는 금언이 들어 있을 것이다. 관심을 끌고 싶어서 무차별적으로 악플을 써대는 애처로운 사람들에게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들에게 또 다른 빌미를 주지 말라는 뜻(p. 278)이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악플을 무시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트루먼 커포티 Truman Capote가 쓴 책 중에 《개들은 짖는다 The dogs bark》가 있다. 제목은 아랍 속담인 "개들은 짖어도 마차 caravan 는 간다"에서 따왔다는데, 비평가들의 악평에 투덜거리는 커포티에게 앙드레 지드가 들려준 말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카라바조 Caravaggio는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을 그리고자 했다. 그의 그림은 지금의 눈으로 봐도 대단히 용감한 시도로 가득 차 있다. 비평가와 시민들은 전통과 아름다움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그에게 비난을 쏟아부었다. E. H. 곰브리치 E. H. Gombrich는 《서양미술사》에서 카라바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으므로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평가들이 이러쿵저러쿵하고 지껄여대는 동안 그는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나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한다(p.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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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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